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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5월 (사대와 자주)

두바퀴인생 2010. 5. 20. 19:37

 

 

우면산의 5월 (사대와 자주)

 

천안함 사건 조사 결과 발표를 보고 정부는 북에 대한 단호한 대북제제를 발표할 모양이다. 세계적인 불량아 북한 공산집단의 김정일과 지배층은 전면전 등 엄포와 공갈로 남을 협박하고 있다. 미국은 부추기고 중국은 말이 없다. 강대국과 불량배 사이에서 우리는 사재와 자주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고 있다. 졸개를 내세워 싸움 붙이고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려는 놀음에 우리는 어떻게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참으로 착찹한 심정이다.

 

우리 조선은 인접 강대국인 중국에 대하여 항상 사대를 하면서 명맥을 유지하여 왔다. 조선은 살아남기 위해서 비굴하였고 백성들은 피죽을 먹고 유랑하며 거지처럼 살고 있었지만 지배층은 그래도 호의호식하며 잘 살아왔다. 

 

삼배구교두를 올리며 청태종에게 항복을 했던 인조는 왕권을 유지하면서도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수십만 조선 포로들이 심양으로 끌려갔으며 백성들은 피고름을 짜내면서 풀뿌리로 연명하였다. 그러면서도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조선의 지도층은 호의호식하며 수백년을 더 생존할 수 있었다. 생존을 위해 자주를 포기하고 사대를 하며 비굴하게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주를 외치며 청나라에 도전했던 준가르는 나라도 민족도 결국 멸망하여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비굴한 삶 사대와 용감한 삶 자주에 대하여 살펴본다.  

 

 

 


청나라의 패권에 도전했던 준가르

17세기, 중국 서북 지역에서는 돌궐계의 준가르(准噶爾) 부족이 흥기했다. 준가르칸국(汗國)의 2대 칸 갈이단은 오늘날 중국 신강-위구르 자치구과 청해성을 석권한 다음 2500㎞ 거리의 외몽고 고원을 돌파하고 내몽고 고원으로 진공(進攻), 1690년에는 북경 밖 350㎞ 지점까지 육박했다.

외몽고의 제(諸)부족들은 청(淸)나라 강희제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내몽고의 오란포통에서 갈이단의 군대는 청나라 강희제의 군대와 충돌했다. 갈이단의 군대는 낙타와 수레를 앞세워 유목민 특유의 방어선을 쳤지만, 청군의 홍이포 공격에 산산이 부서졌다.

갈이단은 5년 후 외몽고로 쳐들어와 다시 한번 청나라의 패권에 도전했지만 패배하고, 이듬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180만㎢에 달하는 외몽고(오늘의 몽골공화국)가 청나라 영토로 편입됐다.

준가르칸국의 도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5대 칸 책망아랍포단은 1716년 장군 대책령에게 8000명의 원정군을 이끌고 티벳을 치게 했다. 대책령의 원정군은 해발 6000m의 천산을 넘고 500㎞의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넌 후 해발7000m의 곤륜산을 넘은 다음, 다시 1200㎞를 행군해 이듬해 티벳의 수도 라사를 점령했다. 이는 당나라 현종 때 고선지 장군의 토번 공략에 버금가는 군사적 위업이었다.

이번에도 청나라가 개입했다. 1720년 준가르칸국의 군대는 청나라 군대에게 패배해 티벳에서 철수했다. 이후 160만㎢에 달하는 티벳은 청나라의 판도 안에 흡수됐고, 이름도 서장(西藏)으로 개칭됐다.

그 후 준가르칸국은 오늘날 청해성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화석특칸국의 나복장단진과 손을 잡고 청나라에 대항했지만, 다시 한번 실패했다. 이후에도 준가르칸국과 청나라는 끊임없이 충돌했다.

서방의 강국 준가르칸국을 완전히 제압할 능력은 없었던 청나라는 현존 국경선을 인정하는 선에서 준가르칸국과 화약(和約)을 맺으려 했다.

그러나 패기에 넘치는 준가르칸국의 칸들은 현실에 만족하기를 거부했다. 책망아랍포단의 아들 책령은 청나라의 옹정제에게 “나의 아버지는 승천해 이미 성불(成佛)했으며, 세계에 라마교를 널리 전파해 인류가 안녕을 얻게 하는 것이 나의 임무”라고 선언했다. 이는 ‘천자(天子)’를 자처하는 청나라 황제의 패권을 부인하는 언동이었다.

준가르는 1731년 청나라군을 무찌르고 외몽고 동부로 진격했다가 외몽고 부족들에게 패배했고, 이듬해 다시 외몽고를 침공했다가 패배했다. 1734년 청나라와 준가르 사이에 강화조약이 맺어졌다. 이후 25년간 양국은 평화를 유지했다.

준가르의 멸망

1745년 책령칸이 죽었다. 이후 10년간 준가르에서는 쿠데타와 내란이 잇따랐다. 1754년 권력 다툼에서 패한 준가르의 귀족 아목이살납이 청나라로 망명했다. 청나라 건륭제는 아목이살납을 후대했다. 이듬해 건륭제는 아목이살납을 앞세워 준가르를 침공했다. 내란에 지친 준가르의 수도 이리는 허망하게 함락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청나라는 준가르를 완전히 병탄(倂呑)할 생각은 없었다. 건륭제는 준가르를 통일 이전의 상태로 환원시켜 4개 부족으로 나누고 부족장(칸)들을 임명했다. 아목이살납은 쌍친왕의 봉작(封爵)을 받았다.

만일 이때 준가르가 건륭제의 조치를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준가르는 조선처럼 청나라의 번속국(藩屬國)으로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면서도 사실상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준가르인들의 피가 너무 뜨거웠다. 아목이살납부터 쌍친왕의 봉작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청나라에 자신을 통일 준가르의 칸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그는 1756년 준가르의 옛 수도 이리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건륭제가 임명한 네 명의 칸도 아목이살납에게 합류했다. 아목이살납의 군대는 청나라군을 잇달아 격파하면서 준가르칸국의 옛 땅을 거의 수복했다.

준가르인들과는 더 이상 대화로 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한 건륭제는 끝장을 보기로 작정하고 1757년 대규모 원정군을 준가르로 보냈다.

이때 준가르에게 불행이 닥쳤다. 천연두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병영에 천연두가 돌면서 준가르 군대는 청나라군과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아목이살납은 이웃한 하사크 왕국을 거쳐 러시아로 도주했으나 천연두에 걸려 사망했다.

그들의 지도자였던 아목이살납이 죽고, 군대도 무너졌지만, 준가르인들의 저항은 계속됐다. 준가르인들은 유격전을 벌이며 청나라에게 저항했다.

청나라군이 고전하자 화가 난 건륭제는 청나라 원정군 사령관 조혜에게 준가르인들을 아예 멸종(滅種)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준가르칸국은 물론 준가르인이라는 종족마저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오늘날 준가르라는 이름은 중국 서부의 준가리아 분지, 중국과 러시아 국경의 준가르문(門)이라는 지명으로만 남아 있다.

준가르와 조선

준가르인들의 자주독립을 위한 장렬한 투쟁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 투쟁의 결과는 너무나 참혹했다. 나라는 물론 종족마저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가정이지만, 준가르인들이 건륭제의 조치를 받아들이고, 청나라의 번속국으로나마 독립을 유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중국의 끊임없는 팽창주의 야욕 앞에 결국은 중국의 일부로 병탄되고 말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준가르가 청나라의 번속국으로나마 존속했다면, 19세기 중반 청나라가 쇠락하고 러시아 세력이 중앙아시아로 진출하는 틈을 타서 독립을 쟁취했을 가능성도 크다. 실제로 1871~1881년 러시아는 이리를 점령했었고, 신강성 지역의 위구르인들은 일시적으로 독립을 쟁취했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준가르가 독립국으로 계속 존속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마도 준가르는 러시아의 보호 아래 명목상의 독립을 유지하다가 이내 러시아에게 병탄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준가르인이라는 ‘종족’은 보전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볼셰비키 혁명 후 소련 체제 아래서 준가르인들은 이웃한 우즈벡이나 카자흐, 키르기즈, 타지크, 투르크멘처럼 소련을 구성하는 ‘공화국’의 일원으로 존재하다가, 소련의 붕괴와 함께 독립을 획득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렇지는 못하더라도 준가르인들은 오늘날 최소한 러시아연방공화국 내의 구성공화국으로 ‘종족’을 기반으로 한 자치 정도는 누리고 있을 것이다.

조선은 준가르인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청나라의 침공에 굴복한 조선은 청나라에 대한 사대(事大)를 감수해야 했다. 그런 상황을 만들어 낸 당시 위정자들의 무능과 무책임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조선은 그 덕분에 청나라의 번속국이라는 형태로나마 국체(國體)를 유지할 수 있었고, 19세기 말 동(東)아시아의 역사가 요동칠 때 청나라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일제(日帝)의 식민지로 전락했고, 해방 후에도 분단이라는 뼈저린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오늘날 분단된 상황으로나마 한(韓)민족의 정체성은 유지되고 있고,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아시아에서 보기 드문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그 국제적 위상을 자랑하고 있다.

“지난 1000년간 우리 민족 최대의 업적은 ‘살아남았다’는 것”

어린 시절, 역사를 즐겨 읽으면서부터 늘 우리 조상들의 ‘사대’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했었다. 임종시 “돌림 천자(중국 주위의 종족들이 5호16국 시대에 중원으로 들어가 크고 작은 나라를 세우고 천자를 칭했던 것을 말함) 한번 해 보지 못한 못난 나라에 태어났다가 죽는 게 뭐 그리 서러워 우느냐?”고 했다던 조선시대의 시인 백호 임제의 호통이 늘 귓가에 맴돌았었다.

그래서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를 읽으면서는 피가 끓었고, 고구려와 연개소문에게 푹 빠져 10여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시린 가슴으로 우리의 역사와 현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자주’를 외치려면 그만한 실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 아쉽게도 우리 역사상 우리가 그런 ‘실력’을 갖추었던 시절은 거의 없었다는 것, 중국 중심의 천하 질서 아래서 ‘자주’를 할 실력이 없던 우리는 ‘사대’의 형태로 민족의 명맥을 보존해 왔고 ‘팍스 아메리카나’ 세계 아래서는 ‘한미동맹’이라는 형태로 나라의 활로를 찾아야 했다는 것을 말이다.

지나간 1000년을 정리하고 새로운 1000년을 맞느라 들떠 있던 1999년,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지난 1000년간 우리 민족이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은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살아남았다는 것”이라고.

그것은 너무나 가슴 시린 얘기였다. 남들이 5대양 6대주를 경영하고, 근대 문명의 이기들을 발명하고, 사상과 철학을 다듬고, 정치-경제-사회 체제를 만들어낼 때, 고작 우리가 내세울 것이라고는 “살아남았다”는 것이라니.....

하지만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가슴 벅찬 이야기기도 했다. 그 척박한 티벳 산골짜기까지 쳐들어가 기어코 먹어치운 중국, 한반도와 만주를 차지하고도 모자라 전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던 독랄한 일본, 얼어붙은 시베리아를 가로질러와 지난 세기말 중국으로부터 161만㎢(한반도의 8배)의 땅을 사취(詐取)한 북극곰 러시아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도 우리 민족은 살아남았고, 오늘날 우리나라는 이만큼 성장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어린 시절 내가 그렇게 증오했던 ‘사대’의 결과였다.

무엇이 진정한 자주인가?

물론 나는 흔쾌한 마음으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자주적인 삶을 살기를 희망한다. 내 나라, 내 민족이 남에게 고개 숙이지 않는 강성한 나라, 억센 민족이 되기를 희망한다. 특히나 ‘사대’가 병통이 되어버린 ‘사대주의’라는 고질은 반드시 떨쳐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주’는 말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국제 사회의 역학(力學)관계와 질서를 무시하고 야랑자대(夜郞自大)하는 것이 자주는 아니다.

“‘누가 최후에 웃는가 보자’, 이런 신념, 이런 배짱을 가지고 싸우면 당해낼 자가 없다”는 김정일의 호언은 듣기에는 무척이나 장쾌하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는 300만 인민이 굶어죽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나마 북한이 완전히 쓰러지지 않고 있는 것은 동냥과 공갈협박, 밀수 덕분이다.

인민들의 삶의 수준을 조선조 철종 시대로 돌려놓고, 인민들을 굶겨 죽이고, 국제사회에서 ‘노스 코리아’라면 기묘한 부자세습독재와 기아와 인권유린, 위폐제작, 마약 수출 등을 연상케 만들어 민족의 이름과 자존심에 먹칠을 해 놓고, 소리 높여 외치는 ‘자주’와 ‘존엄’은 얼마나 공허한가?

“작전권은 그냥 한국이 가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또 능력이 있기 때문에 한국이 전환을 하려고 하는 것”이라는 노무현의 장담도 듣기에는 꽤나 그럴듯하다.

하지만 노무현의 ‘자주’ 놀음 와중에 나라의 안보는 흔들리고, 국론은 분열되고, 외자는 빠져나가고, 공장은 문을 닫고, 일자리는 사라져가고 있다.

지난 50년간 쌓아 올린 나라의 부(富)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 국민들의 한숨 소리가 귀에 들리는데,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백조원의 생돈을 처발라서라도 ‘자주’를 하겠다는 노무현의 치기는 얼마나 헛된 것인가?

그 돈을 교육이나 과학기술, 차세대 성장동력 부문에 투자한다면 얼마나 많은 일자리가 생기고, 국민들의 삶이 풍족해지겠는가?

‘진정한 자주’를 실천해 온 것은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일부 욕됨이 없지는 않았으되 그것을 참으면서 미국을 이 땅에 잡아두고 그 힘을 빌려 나라의 힘을 키워 여기까지 온 것이 진정한 ‘자주의 길’이었다는 것을, 노무현은 알기나 할까?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하면, 지난 번 북한의 미사일 발사 때 “세계적인 미사일 기술을 가진 북한과 힘을 합쳐 강성대국을 만들자”고 외쳐댔던 자들은 다시 한번 환호할 것이다.

아마 그들은 ‘미제(美帝)의 거듭된 압박에도 불구하고 핵실험을 성공시켜 강성대국의 위용을 보이고 민족의 자존심을 드높인 장군님’께 한없는 경애의 뜻을 표하면서 다시 한번 ‘우리 민족끼리’를 외쳐댈 것이다. 순진한 국민들 가운데는 그들의 그런 선전선동에 물색없이 동조하는 이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핵실험을 강행하면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미국의 경고가 그들의 귀에 들어갈 리가 없다.

하지만 그런 식의 ‘자주’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게 해서 북한의 인민들이 어육(魚肉)이 된다면, 거기에 섣불리 동조하다가 대한민국마저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고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이 후퇴한다면 그런 ‘자주’가 무슨 가치가 있을까?

그런 식으로 남과 북의 한민족이 공도동망(共倒同亡)한다면, 세계는, 그리고 역사는 “멸망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주’를 위해 투쟁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그런 동족과 운명을 같이했던 대한민국은 참으로 위대했다”고 박수를 칠까?

박수를 칠 리도 없겠거니와, 설사 박수를 받는다 해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김정일이나 노무현식의 ‘자주’가 준가르인들이 갔던 길을 되풀이하는 것이라면, 그런 ‘자주’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한 개인이라면, 혹은 한 집단이라면, 설사 그것이 헛된 구호일 뿐이라 해도 ‘자주’를 외치며 산화(散華)하는 것이 장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 나라, 한 민족에 대해서도 그렇게 쉽게 얘기할 수가 있을까?

대만의 문필가 백양(栢楊)은 준가르의 멸망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한 사람 또는 하나의 작은 집단이 존엄을 이유로 기왓장을 지키지 않고 귀한 옥(玉)을 깨는 식으로 자신을 장렬하게 희생시키는 행동은 만세에 존경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한 국가 또는 민족이라면 굴욕을 받아들이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기왓장을 지키면 언젠가는 다시 집을 지을 날이 있지만, 옥은 한 번 깨면 영원히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펌,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