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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93 (강희제 시대 : 오배의 난, 삼번의 난) 본문
중국의 역사 93 (강희제 시대 : 오배의 난, 삼번의 난)
우리 조상들이 야만족, 야만인이라고 비웃고 천시하던 여진족은 부패와 비리로 썩어빠진 명나라가 반란군에게 멸망하자 반란군을 타도하고 명나라를 이어 중원을 점령하였다. 청나라는 한족들이 창업한 역대 어느 왕조보다도 넓은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중원의 중흥을 가져온 왕조이다. 한족들이 이루지 못했던 위업을 달성해 준 여진족에게 한족들은 감사는 커녕 지금은 청나라를 이룩한 여진족은 한족에 동화되어 그 명맥조차 찿기 힘들다.
한족들은 그들의 왕조 역사에서 황제가 포로가 되면 '치'로 표기하고 후계 싸움으로 피비린내 나는 정변은 '변'이라고 표기하였다. 한마다로 치욕스런 역사는 교묘하게 적당한 한자로 표기하여 감추며 그들의 자랑거리는 침소붕대하여 역사에 남겼다.
오늘의 중국을 만든 초석은 청나라가 모두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강희제, 건륭제에 이르는 기간은 청이 가장 융성하던 시기로 중국의 한족들까지도 그들 황제에게 존경을 금치 못할 정도로 강건성세를 누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양반이었던 우리 조상들은 유교를 신봉하면서 이상주의에 빠져 말로만 똑똑하던 사대부들의 허세와 공리공론, 그리고 파벌싸움으로 권력 투쟁만 일삼고 관리들은 백성들을 수탈하여 호의호식 하기 바쁜 가운데 백성들은 온통 모두 거지가 되었고 유랑자가 되어 이곳 저곳을 떠돌며 살아가는 비참한 삶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조정은 외척들이 준동하여 비리와 탐욕에 눈이 멀어 정치를 농단하였으며 역사의 흐름도 인식하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다가 결국은 일제에 나라까지 망해 먹었다.
오랑캐는 중원을 정복하고 강건성쇠를 이룬 반면 양반이며 선비인 우리 조상들은 나라까지 망하고 36년간 일제에게 갖가지 참혹한 침탈을 다 당하고 외세 덕분에 해방이 되었으나 그것도 반쪽으로 갈라져 남북으로 대치하고 있는 서글픈 실정이다.
누가 오랑캐이고 누가 양반인가?
오늘도 권력에 눈이 멀어 선거전에 침을 흘리며 유권자를 향해 거짖말을 쏟아내고 있는 졸부들이 넘쳐나는 나라이다. 좌니 우니 이 좁은 땅에서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은가? 호남이니 영남이니 뭐가 그리 멀다고 아우성인가! 먹고 살만 하다고 골프채나 휘두르며 추락할 줄 모르고 자만심에 빠져 큰소리 치는 졸부들이 너도 나도 한 치 앞으로 내다보지 못하고 날뛰는 나라...., 밝은 이성은 서해 바다에 빠진지 오래고 서로 잡아먹지 못해 서로 더 갖기 위해 부정과 비리가 나무하는 나라... 낙태공화국, 부패공화국, 비리공화국, 사기공화국, 파벌공화국을 언제 벗어날 것인가?
청나라 역사를 쓰면서 이 나라 꼴에 다시 분노가 치민다...우리는 강희제 같은 군주를 왜 만나지 못하였는가...
강희제 시대의 그 웅대한 치적을 살펴본다.
강희제 등극
1661년 순치제가 24세의 젊은 나이로 제위에서 물러나고 아들 현엽이 제위를 승계했다. 이가 청의 성조 강희제이다. 순치제의 퇴위와 강희제의 즉위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순치제의 퇴위에 관한 이야기는 청나라 역사상 3대 의혹에 꼽힌다. 퇴위한 것이 아니라 사망하였다는설, 실연에 의한 퇴위라는 설, 천연두를 앓다가 사망하였다는 설 등 갖가지 구구한 억측이 나돌았다. 그러나 그 진실은 아직 모른다.
강희제의 제위 계승에 따른 소문으로는 원래 그가 제위 계승자의 서열에도 들지 못하였는데 여러 황자 가운데서 유일하게 천연두를 앓은 마마 자국이 있었기 때문에 직계 황통이 끓기는 것을 크게 염려한 순치제가 자신의 후계자로 강희제를 지목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당시 천연두는 생명을 앗아가는 무서운 역병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강희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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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애신각라현엽(愛新覺羅玄燁) |
재위 | 1661년 ~ 1722년 |
별명 | 천고일제(千古一帝) |
출생일 | 1654년(순치 11년) 5월 4일 |
출생지 | ![]() |
사망일 | 1722년(강희 61년) 12월 20일 (향년 69세) |
사망지 | ![]() |
황후 | 효성인황후 효소인황후 효의인황후 효공인황후 |
부황 | 순치제 |
모후 | 효강장황후 |
이전 황제 | 순치제 |
다음 황제 | 옹정제 |
묘호 | 성조(聖祖) |
시호 |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경성신중화 공덕대성인황제 (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中和 功德大成仁皇帝) |
강희제(康熙帝, 순치(順治) 11년 음력 3월 18일 (1654년 5월 4일) ~ 강희(康熙) 61년 음력 11월 13일 (1722년 12월 20일))는 청나라의 제4대 황제(재위 1661년 ~ 1722년)이자 1644년 명나라 황제 숭정제(崇禎帝)의 자살 직후 명나라가 멸망하고 난 뒤 청 군대의 입관(入關) 이후 중국을 다스리는 통일 황조로서의 두 번째 청나라 황제이기도 하다.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 휘는 현엽(玄燁), 묘호는 성조(聖祖), 시호는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 ), 짧은 시호로는 인황제(仁皇帝)이며 연호는 강희(康熙)이다. 또한 만주어로는 얼허 타이핀 한(Elhe Taifin Han), 몽골어로는 엔크 암갈란 칸(Enkh Amgalan Khaan)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제3대 황제인 순치제(順治帝)의 셋째 아들이자 순치제의 후궁 출신인 효강장황후 동가씨(孝康章皇后 佟佳氏)의 소생으로서 자금성(紫禁城)에서 태어난 최초의 청나라 황제이다.
1661년(순치 18년) 부황 순치제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올라 1722년(강희 61년)까지 재위하여 재위 기간이 61년으로 중국의 역대 300여 명의 황제 가운데 가장 길다. 8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정치 상황이 좋지 않았으나 그를 이겨내고 내란과 국가적 위기인 오배의 난과 삼번의 난을 효과적으로 진압하고 정성공의 아들 정경이 다스리던 대만을 복속시켜 진정한 중국 통일을 달성하였다. 근대화의 발판을 서서히 마련하던 러시아와의 갈등도 있었으나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만주와 연해주 쪽의 국경을 확정한다. 청나라에 대항하던 북방의 몽골 오이라트 준가르의 칸 가르단의 군사를 자신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나가 격파하여 북방의 안정을 가져왔다. 이러한 정책과 그의 통솔력과 카리스마, 치밀한 군사 전략, 안목을 바탕으로 강력한 절대 황제권을 수립하였다. 강희제는 강화된 황권으로 거의 독단적으로 나라를 이끌어 갔기에 자칫 전제 독재로 빠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 황권을 조절하고 정치의 일부는 재상들이나 대신들과 의논하였으며 한족 대신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정책을 실행하여 이를 피했다.
강희제는 단호한 외정과는 달리 내정에서는 선정을 베풀었는데 황하와 장강의 치수에 성공하여 농사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으며 전란의 와중에도 세금을 줄이고 인두세 역시 영원히 동결하여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주었다. 한편으로는 《강희자전》, 《고금도서집성》 등 대규모 편찬사업을 벌여 당대의 문화발전과 현대 중국어 어법의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지배층인 만주족과 피지배층인 한족을 고루 등용하여 조정의 화목을 꾀하였다. 또한 중국 역대 황조 중 마지막 태평성대인 강건성세(康乾盛世)를 일으켜 아들인 옹정제(雍正帝), 손자인 건륭제(乾隆帝)까지 태평성대가 지속되었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자 명군, 즉 천고일제(千古一帝, 천 년에 한 번 나올 만한 황제) 또는 연호를 따서 강희대제(康熙大帝)로 칭송받으며 아직도 많은 중국인에게 크게 존경받는다.
그는 당시 서양에서 역시 절대 왕정을 수립한 루이 14세, 러시아 근대화에 박차를 가한 표트르 1세 등 업적이 많은 유럽의 여러 군주들과 더불어 당시 아시아를 대표하는 통치자였다. 또한, 황후 4명 등 총 64명의 후비(后妃)와 잉첩(媵妾)을 거느려서 청나라의 역대 황제 중 가장 많은 후궁을 둔 황제이며 아들 35명과 딸 20명을 두어 중국 역대 황제 중 가장 많은 자녀를 둔 황제이기도 하다.
초기 생애
1654년(순치 11년) 5월 4일에 북경 자금성의 동쪽 후궁 동육궁 중 하나인 경인궁(景仁宮)에서 순치제의 후궁인 강비 동가씨에게서 태어났다. 현엽은 강비 동가씨의 유일한 소생이라, 태어나면서부터 경인궁에서 어머니에게 금지옥엽처럼 키워졌다. 현엽은 어릴 때부터 학문에 남달라 책을 읽으면 바로 암송하고 그 뜻을 능히 꿰뚫어 즉시 풀이하였고 궁술에 뛰어나 말을 타면서 토끼를 바로 쏘아 맞히는 등 문무를 겸전하여 부황 순치제와 조모인 효장태후의 총애를 받았다. 5살 때부터 제대로 황자들이 배우는 학문을 배우는데, 인시(새벽 4시)에 일찍 일어나 부황과, 조모 그리고 적모(嫡母)인 황후, 모비에게 문안을 올리고 진시(아침 8시)에 나가 밤늦은 술시(저녁 8시)까지 문연각에서 스승의 지도 아래 공부하였는데도 불평불만이 없었다고 한다.
7살 때인 1660년(순치 17년)에 자신의 이복동생이자 순치제의 4남이 죽자 뒤이어 황태자 자리에 올랐으나 공식적으로 선포되지 않았다. 현엽이 황태자에 지명된 이유는 어머니 동가씨의 가문이 청나라 건국 때의 큰 공신 집안이자 명문가이어서 그녀가 다른 후궁에 비해서 위세가 대단하고 동가씨의 지위 역시 황귀비로 후궁 중 가장 높았으며, 당시 순치제의 황후였던 효혜장황후(孝惠章皇后)가 아들이 없자 총명한 현엽을 눈여겨보던 순치제는 그를 황태자로 삼은 것이다. 순치제는 본래 효장태후의 조카딸을 황후로 맞아들였으나 행실을 이유로 폐위시켜 정비(靜妃)로 삼아 자금성 안의 영수궁(永壽宮)에 구금하였고 효장태후의 주선으로 효장태후의 조카손녀, 즉 순치제의 조카뻘을 황후로 삼으니 그녀가 효혜장황후였다. 하지만 억지로 결혼을 해서인지 순치제는 효혜장황후를 멀리하였다. 오히려 궁녀 출신의 동악씨를 총애하여 현비(賢妃)로 삼아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가 사는 승건궁(承乾宮)을 찾았다.
하지만, 그 해 11월에 자금성 안에 천연두가 퍼지고 현비 동악씨가 천연두에 걸리자 순치제가 총애하던 현엽을 동악씨의 양자로 주려 했으나, 효장태후와 생모인 동가씨가 황위 계승자인 현엽이 천연두에 옮을 것을 염려하였기에 이에 완강히 반대하여 실패하였다. 그러나 현엽은 어찌 된 일인지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맸으나 얼마 안 되어 다행히 나았다. 그리고 두 달 뒤인 1660년(순치 17년) 12월, 동악씨는 결국 차도가 보이지 않고 죽자 순치제는 즉시 동악씨를 효헌단경황후(孝獻端敬皇后)로 추서하고 태묘에 그 신주를 모셨다. 그리하고 나서, 순치제는 이례적으로 자신이 총애하던 태감을 오대산에 있는 청량사에 보내어 동악씨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그러나 본래 출신이 높은 귀족 집안이 아니고 또한 죽은 황자, 그것도 서출 출신의 황자가 이례적으로 황태자의 작위를 받고 그 어미는 황후에 봉하자 만주족과 한족 대신들의 반대가 매우 컸다. 반대가 심하자 순치제는 그에 대한 항의와 황태자였던 자신의 4남을 잃은 슬픔까지 겹쳐 1661년(순치 18년) 1월 하순,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제위에서 물러나 승려가 되려고 이미 자신의 태감이 있는 오대산 청량사로 출가하고 주지 옥림수(玉林秀)에게서 행치(行痴)라는 법명을 받았다.
당시 대신들은 순치제에게 빨리 돌아오라 종용하였으나 순치제는 끝내 듣지 않고 머리카락을 자르기까지 하였으나 다시 황궁으로 돌아왔고 회궁 도중 천연두에 걸려 1661년(순치 18년) 2월 5일 24세의 나이로 붕어하여 황위가 유고 상태가 되었다. 당시 황궁에서 배분이 가장 높던 황태후 효장태후는 아들인 순치제가 붕어하자 매우 놀라며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조정의 최고 신료인 영시위내대신(領侍衛內大臣) 6인과 각지의 친왕·군왕들을 불러들였다. 그중 미리 지어진 유조에 따라 조정의 수장인 정황기 출신의 감국대신 겸 이부상서 색니, 양황기 출신의 병부상서 오배, 정백기 출신의 형부상서 소극살합, 역시 양황기 출신의 호부상서 알필륭에게 일단 황궁을 봉쇄하고 궁인들에게 입단속을 하게 하였다.
조정은 그 해 2월 7일에 순치제의 붕어를 공식 발표하였고, 국상을 준비하였다. 2월 17일에 효장태후는 순치제에게 세조(世祖)라는 묘호와 장황제(章皇帝)의 시호를 올리고 순치제의 시신을 효릉(孝陵)에 안장하였다. 뒤이어 순치제의 유조를 낭독하니 현엽을 황태자로 책봉하라 쓰여 있었다. 유조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 | 짐의 아들인 강비 동가씨 소생의 제3황자 현엽은 연치가 겨우 8살이나 그 용모가 단정하고 영민하니 이 나라 종묘사직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고로 현엽을 황태자에 책봉하여 다음 황제에 올리도록 하라. 27일 동안 상복을 입다가 그 뒤 옷을 대례복으로 갈아입고 즉위식을 치르도록 하라. 특히, 영시위내대신 색니, 소극살합, 알필륭, 오배는 조정의 원훈이자 개국공신으로 짐이 언제나 신뢰하던 대신들이니 충성을 다하여 신제를 보좌하고 정무를 처리하라. | ” |
이에 따라 8살의 황태자 현엽을 청나라의 새 황제로 추대하니 이가 청나라의 제4대 황제인 성조 강희인황제(聖祖 康熙仁皇帝)이다. 어머니 강비 동가씨를 황태후에, 당시 순치제의 황후였던 효혜장황후 역시 황태후로 격상하고, 조모인 효장태후는 태황태후로 격상하였으며 이듬해인 1662년에 연호가 순치(順治)에서 강희(康熙)로 바뀌었다. 이 새로 정한 연호인 강희의 ‘강’(康) 자는 안녕과 평화, ‘희’(熙) 자는 조화와 흥성을 뜻하므로, 강희는 바로 평화로운 조화를 뜻한다.
만약 효장태후가 빨리 영시위내대신을 부르지 않고 수수방관하였다면, 황궁에 보위를 놓고 쟁탈전이 일어났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효장태후는 이를 신속히 대처하고 황태자 현엽을 제위에 올려 화를 막을 수 있었다. 황위에 오를 당시 정치적으로 매우 급변적이던 상황과 8살이라는 정치를 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린 나이가 악재로 작용하여 제왕학 수업도 제대로 받지 않은 채 즉위하였으나 자신이 평생 황제로 살아야 할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틈틈이 제왕학 수업을 지속하면서 일찍 정치를 깨닫기 시작하였다.1662년(강희 원년)에 중국 서남부 운남으로 쫓겨가 겨우 명맥만 유지한 남명(南明)의 황제 영력제가 청군과 평서왕 오삼계에게 처참히 죽임을 당해 명나라의 황통을 이어받아 청나라에 비협조적인 여러 한족에게 은밀히 지지받던 남명은 명나라 멸망 후 18년 만에 이렇게 멸망하였다.
제위에 오른 강희제는 당시 8세의 어린 나이였다. 어린 강희제는 아버지 순치제의 유언에 따라 4명의 명망있는 만주족 출신 대신을 보정대신으로 임명하여 자문을 받았다. 보정 대신 가운데 오오바이가 있었는데 그는 대단한 야심가로 조정의 권력을 제멋대로 휘둘러 횡포가 심하였다. 강희제가 16세 때부터 정사에 임하였으나 오오바이는 계속해서 강희제의 존재를 무시하고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려 하였다.
어느날 보정 대신의 한 사람인 스크사하가 정치 문제를 둘러 싸고 오오바이와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그후 오오바이는 갖가지 음모를 꾸며 스크하사를 모함하고 강희제에게 스크하사의 처형을 강요했다. 강희제는 이것이 모두 오오바이의 조작 음모임을 알고 스크하사의 처형을 망설이자 이에 불만을 품은 오오바이는 강희제 앞에서 호통을 치면서 큰 소란을 피웠다. 그러나 강희제는 이같은 오오바이의 무례하고 불경스런 행위를 꾹 참고 눈감아 줄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결국 오오바이는 조서의 내용을 위조하여 스크하사를 처형하고 말았다.
오오바이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져 차마 눈 떠고 볼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어느날 오오바이가 병을 핑계로 집에서 쉬고 있을 때 강희제가 병문안을 갔는데 오오바이의 이불 속에 숨겨져 있는 칼이 발견되자 급히 호위병들이 에워 쌌으나 강희제는 태연하게 이 순간을 만주의 전통으로 인정하는 발언을 하면서 그냥 넘겼다.
이 후 강희제는 오오바이를 제거해야 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강희제는 귀족 자제들 가운데 친위대를 선발하여 대궐안에서 무예를 닦았다. 오오바이는 그저 어린 황제가 전쟁 놀이를 하는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강희제는 오오바이를 체포하기 위한 준비였다는 사실을 오오바이는 몰랐다. 어느 날 궁정의 내궁 문에 들어선 오오바이는 삽시간에 친위대에 의해 포박되고 감옥에 갇혔다.
강희제는 오오바이의 죄상을 조사하여 재판에 회부하도록 명령했다. 결국 사형을 언도 받은 오오바이는 황제를 직접 만나기를 청원하여 강희제 앞에 섰다. 그러자 오오바이는 옷을 모두 벗고 자신 몸에 난 여러 상처를 보여 주었다. 그 상처들은 청태종 홍타이지를 전장의 위기에서 구한 상처들이였다. 순간 강희제는 마음이 흔들렸으나 오오바이의 사형은 면하되 일족들에 대한 숙청은 단행했다.
강희제가 황제로서 권력을 장악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그러나 신변의 위협을 제거한 강희제 앞에는 또 어려운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베의 난과 삼번(三藩)의 난이었다.
오배의 난
강희제는 8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아직 친정은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보정대신들이 그를 보필하였다. 본래 어린 황제가 즉위하였으면 황태후나 태황태후가 수렴청정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미 황태후였던 자화황태후(慈和皇太后), 즉 강희제의 생모인 효강장황후 동가씨는 강희제가 등극한 지 얼마 안 되어 병에 걸리고 2년 만인 1663년(강희 2년)에 24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다른 황태후이며 강희제의 적모인 인헌황태후(仁憲皇太后), 즉 순치제의 황후인 효혜장황후는 황태후 서열로는 효강장황후보다 위였으나 엄연히 위에 시어머니인 효장태황태후가 있어서 수렴청정할 권한은 쥘 수 없었다. 대신들 사이에서 수렴청정할 것이라 예상하던 효장태황태후는 수렴청정을 직접 하는 대신 네 명의 보정대신들에게 정책 최고 의결권을 내렸다.
보정대신들은 어린 황제가 훗날 환관들에게 농락될까 봐 순치제 때 설치된 명나라의 동창(東廠, 환관의 수뇌부이며 황제 직속 정보기관)과 비슷한 기구인 십삼아문(十三衙門)을 폐지하여 환관들을 정무에서 축출하고 원래 순치제 때 폐지된 내무부를 다시 설치하여 황제에게 충성스러운 만주족 충복들로 하여금 환관들을 대신하게 하였다. 보정대신은 모두 꽤 상당한 권력을 누렸으나, 그중에서도 병부상서 오배가 제일 권력이 막강하였다. 오배는 백성들의 땅을 불법으로 획책하는 등 갖은 전횡을 일삼았다. 하지만 병권을 틀어쥐고 있어서 아직 친정의 권한이 없는 강희제와 오배의 세력에 비하여 매우 미약한 대신들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일단 강희제는 오배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일부러 장정들을 불러 몽골 씨름을 하도록 하였다. 또한, 틈틈이 제왕학 수업을 잊지 않고 배웠다. 강희제의 그 스승이 바로 명나라의 마지막 진사시(進士試)에서 장원을 한 제세(濟世)였다.
강희제는 오배를 견제하기 위해 또 다른 보정대신인 색니의 손녀를 황후로 맞아들이기도 하였다. 그녀가 바로 강희제의 정궁황후이며 첫 번째 황후인 효성인황후(孝誠仁皇后) 혁사리씨다. 1667년(강희 6년) 7월 조상의 예법에 따라 14살이 된 강희제는 친정을 시작하였고 성인 의례와 함께 정식 즉위식을 치렀으나, 그 해에 자신을 보호해준 색니가 소극살합에게 강희제를 돌봐 달라는 말을 남기고 죽는다. 소극살합이 권력을 잡으려 하였으나 이에 위기감을 느낀 오배는 소극살합에게 날조된 역모죄를 뒤집어 씌워 교수시키고 자신이 조정의 전권을 장악하였다. 오배는 소극살합을 죽이는 과정 중 편전인 건청궁에서 강희제와 언쟁을 벌이다 심지어는 강희제의 용상에까지 가서 강희제를 협박하였다. 강희제는 크게 놀라며 오배에게 군신의 예를 잊었느냐며 꾸짖었고 오배는 그 즉시 자신의 행동이 경솔했음을 알고 용상에서 내려가 머리를 조아렸다. 오배의 이러한 행동은 분명 군주 기만죄(기군죄)였으나 아직 힘이 약한 강희제는 그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 다른 보정대신인 알필륭은 오배의 편에 붙었으나 오배의 전횡을 부추기지도 그렇다고 비난하지도 않았다.
선황 순치제의 유조를 받은 고명대신 중 한 명인 소극살합을 죽이고도 계속 더 많은 횡포를 일삼는 오배를 보고 강희제는 군사를 이끌고 선수를 치려 했다. 그러나 조모인 효장태황태후가 이를 말리고 사태를 지켜보라 일렀다. 하루는 소극살합을 죽인 오배가 병을 핑계로 두문불출하는데 강희제가 문병을 갔다. 오배는 강희제에게 위문을 받은 뒤 다시 자리에 누우려 할 때, 그의 품 속에서 단도가 발견되었다. 강희제는 만주족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단도를 찬 것은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전통이라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으나, 분명 오배가 선수를 틈타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을 안 강희제는 치밀하게 오배를 제거하기 위한 작전을 본격적으로 세웠다. 강희제는 오배에게 덫을 놓아 정치적으로 상의할 일이 있으니 오배를 자금성으로 들라 하였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1669년(강희 8년) 5월에 오배는 효장태황태후의 5촌 조카 반포이선(般布爾善) 등과 함께 결국 자신의 사병들과 휘하 장수들의 군사를 이끌고 자금성에 침입하여 강희제를 죽이려 하였으나, 오히려 강희제는 북경 내성을 지키는 구문제독 오육일(吳六一)의 내성·황성 방위군과 황궁 친위군으로 오배의 군사들을 포위하여 몰살시켰다. 오배는 군사가 몰살되었다는 소식에 분개하고 단신으로 건청궁으로 들어가 강희제를 위협하였으나 강희제는 몽골 씨름으로 단련된 젊은 무사들을 불러내어 오배를 추적하여 체포하였다. 강희제는 오배가 군주 기만죄인 기군죄 등 30개의 대죄로 30번 처형되어야 마땅하지만 선황인 태종과 세조를 전투에서 온몸으로 막은 공을 참작하여 가산을 적몰하고 목숨만 보전하게 하고 유배형을 내렸다. 그러나 언제 다시 반기를 들지 모른다는 색액도 등 대신들의 주장으로 귀양을 보내기도 전에 결국 사약을 받아 처형되었다. 강희제는 오배의 죽음으로 뒤숭숭한 조정에 죽은 색니의 차남 색액도(索額圖)를 대신으로 삼아 조정을 안정시켰다. 이로써 강희제는 진정한 친정을 하게 되었으며, 신하들에게 막중한 권한을 맡기지 않았고 강력한 황권을 확립하기에 이른다.
삼번의 난
청나라 초창기 조정은 운남.귀주 지방의 방위를 담당한 평서왕 오삼계, 광동 지방 방위를 담당한 평남왕 상가희, 복건 지방을 담당한 정남왕 경중명 등을 봉하여 남쪽으로 도망친 남명 정권에 대처하는 번병으로 삼았다. 그래서 이 세 왕을 삼번이라 불렀다. 번은 울타리를 뜻하는 말로 청왕조의 울타리라는 뜻이다.
오배를 축출한 이후, 강희제는 오배보다 더 큰 세력인 삼번(三藩)을 염려하기 시작하였다. 원래 번(藩)은 청나라의 특수 행정구역으로 주로 변방에 설치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삼번은 중국 남쪽의 세력이 강대한 3명의 화북 출신 한족 번왕을 말하는 것으로 운남의 평서왕(平西王) 오삼계, 광동의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 복건의 정남왕(靖南王) 경중명(耿仲明)의 아들 경계무였는데, 경계무는 작위를 받은 지 얼마 안 가 죽고, 그 작위는 그 아들이자 경중명의 손자인 경정충(耿精忠)이 승계하였다. 이들은 순치제 때, 청나라의 중국 통일을 크게 도와 번왕에 책봉됨과 동시에 막강한 군사권과 남해에서 다른 나라들과의 무역으로 엄청난 돈을 축적하고 있었다. 또한, 이들은 자신이 다스리는 지방에서의 행정권, 사법권까지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 막강한 세력 때문에 이들은 스스로 무기를 제조하고 은자를 함부로 찍어서 물가가 크게 올라갔다. 이 때문에 삼번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은 매우 컸다. 특히 오삼계는 홍타이지의 막내딸이자 강희제의 막내 고모 화석건녕공주를 며느리로 둔 황실 인척이어서 오삼계에게 함부로 해코지할 수 없었다.
또한, 매년 조정에서 3천만 냥의 많은 은자를 삼번에게 내려서 국고는 거의 동날 지경이었다. 삼번은 남쪽의 해적들과 서쪽의 야만족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계속 막대한 돈을 요구하였다.
이 삼번 가운데에서도 가장 세력이 강한 것은 평서왕 오삼계였다. 오삼계 일파는 세력을 빙자하여 횡포가 심하였을 뿐 아니라 북경의 청나라 조정에 대해서도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강남에서는 백성들이 청왕조에 불만을 품고 반청 활동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남명 정권의 반항도 끈질기게 계속되었기 때문에 토벌을 맡긴 삼번에게 손을 쓸 여력이 없었다. 강희제가 즉위했을 무렵 반청 세력도 거의 제거되고 남명 정권도 멸망한 이후였다. 그리고 만족과 한족 간 모순 관계도 어느정도 수습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팽배일로에 있던 삼번 세력에 대한 반격을 가할 시기를 노리고 있었다.
이때 평남왕 상가희는 아들 상지신과의 불화로 노년기에 이르러 더욱 망향의 향수에 젖어 있었다. 그는 고향 요동으로 돌아갈 테니 아들 상지신에게 왕위를 계승시켜 광동에 머무르게 해 달라는 요지의 청원을 북경 조정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이 청원에 대한 북경 조정의 결정은 매우 강경하였다. 상가희의 귀향과 은퇴는 허락하지만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강희제는 이번 기회에 번왕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과감한 조치를 취한 것이다.
강희제의 강경 조치는 다른 번왕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운남의 오삼계와 복건의 경정충(경중명이 이미 죽고 그의 손자)은 예외적인 조치인지 아니면 다른 번왕에게도 적용되는지 탐지하기 위하여 다함께 북경 조정에 은퇴허가를 요청하여 강희제의 처분을 기다렸다. 이들의 목적은 북경 조정의 속셈을 탐지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해볼 테면 해봐라"는 일종의 위협 비슷한 면도 있었다.
조정의 일부 신료들이 평남왕 상가희가 자신의 작위를 평남왕세자 상지신(尙之信)에게 물려주고 은퇴를 요청하자 다른 번왕들인 오삼계와 경정충 역시 왕작의 파직을 요청하였다. 강희제는 상가희의 안은 윤허하였으나 오삼계와 경정충의 안건은 보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진심으로 은퇴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어린 황제인 강희제를 떠보려고 한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이 문제를 둘러싸고 어전회의가 열렸다. 강희제는 당시 20세의 청년이었다. 대신들은 오삼계 등의 상주에는 반드시 계략이 숨어 있으므로 이를 승인할 경우 오삼계 등에게 모반의 구실을 준다며 철번 요구를 보류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소수의 의견도 있었다. 호부상서 미사한, 병부상서 명주, 형부상서 막락 등 3인은 철번을 승인하지 않으면 그들의 세력은 더욱 강해져 완전한 독립국 형태를 이루어 모반 이상으로 더 큰 문제를 남기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제대로 삼번의 심리를 파악하지 못한 조정과 병부상서로 있던 납란명주(納蘭明珠)는 즉시 삼번의 군대 철수령과 삼번 철폐에 관한 주청을 올리고 강희제는 이를 윤허한다. 그러나 삼번은 듣지 않고 점점 조정을 장악한 자신들과 태생적으로 다른 만주족에 큰 불만을 나타내어 1673년(강희 12년) 12월 2일에 같이 군사를 일으켜 각지의 순무를 죽이고 조정을 위협하니 이것이 삼번의 난이다.
강희제는 다수의 의견을 물리치고 소수의 의견에 따라 "오삼계는 진작부터 모반을 일으킬 궁리를 하고 있었고 이번 철번 요구를 승인해도 승인하지 않아도 모반할 것은 뻔하다. 어차피 모반 할 바에야 일찌감치 모반을 일으키게 하여 그들의 세력을 제거하는 것이 상책이다."
이렇게 해서 오삼계 등의 철번 요구는 승인되었다. 철번 승인이 결정된 것은 강희 12년(1673년) 7월로 이를 알리는 칙사가 각 번왕에게 파견되었다. 오삼계는 철번 승인의 칙서를 받자 열화 같은 불덩이가 치솟아 올랐으나 꾹 참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철번 요구가 분명히 보류될 것으로 알고 모반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시간을 벌 작정이었다.
오삼계가 모반을 일으킨 것은 그 해 11월 21일 이었다. 중국의 전통에 모방에는 명분이 필요했다. 오삼계는 명분을 위하여 명나라 황통을 이을 만한 후손을 찿아 추대하려 하였으나 누구 한 사람 응하는 자가 없었다. 남명 최후의 황제 영락제를 안남까지 쫒아가 죽였고, 명나라를 배반하여 청에 의탁하여 명나라 멸망과 청나라 중원 장악에 누구보다도 현저한 공을 세운 인물이 바로 오삼계이며 그가 한족에게는 천추만대에 걸친 매국노이며 변절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삼계는 청왕조에서 받은 작위와 관복을 벗어 던지고 30년 전에 입었던 명왕조의 장군 갑주로 무장을 갖추었다. 그리고 곤명 교외에 있는 남명 정권의 영력제의 무덤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명나라에 충성할 것을 맹세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참회는 표리부동한 인간의 내면을 잘 보여 주고 있는바, 이자성의 반란군이 북경성을 점령하고 숭정제가 자살해도 청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50만 정예 대군을 거느리고 산해관을 떠나지 못하였는데, 오랑캐인 청군에게 항복하느니 반란군 이자성의 회유에 응하였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와 사랑하던 애첩 진원원이 이자성 반란군에게 잡혀가자 자신의 가족과 한 여인을 위해 오랑캐인 청나라에 항복하고 청의 지원을 받아 이자성을 쳐부수기 위해 천혜의 길목인 산해관 성문을 활짝 열어졌히고 오랑캐인 청군을 중국 내륙으로 끌여들인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명나라도 배신했지만 결국에는 청나라도 배신하는 우를 범하는 졸부같은 인생의 길을 걸었다.
삼번은 자신들의 거병 명분으로 ‘반청복명’(反淸復明)을 내세웠으나 원래 그들은 청나라에 투항하여 명나라의 멸망에 큰 몫을 하였기 때문에, 다시 청나라를 저버리고 명나라를 부흥시키자는 이 명분은 매우 모순적이었다. 강희제는 오삼계에게 조정에 진출해 있던 오삼계의 장남이자 평서왕세자 오응웅을 건네줄 테니 회군하라 권유하였으나 삼번 연합군은 이를 듣지 않고 계속 진군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에 오응웅과 그 아들 오세림은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반청의 깃발을 높이 들고 일어선 오삼계는 순식간에 장강으로 진격하여 사천으로부터 호남으로 나와 완주.상덕.악주.형양 등을 점령했다. 조정에서는 삼번이 협력하여 일제히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오삼계를 고립시키는 작전을 폈다. 즉 일단 철번을 승인했던 광동의 상가희 부자와 복건의 경충정에게 철번을 중지한다는 결정을 내려 통보했다.
복건의 경충정은 조정의 이 같은 결정이 오삼계를 고립시키자는 계략입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여러가지 생각 끝에 오삼계와 협력하여 모반에 가담할 뜻을 굳혔다. 이때가 강희 13년 3월이었다. 한편 광동의 상가희 부자는 이런 시점에서도 여전히 불화가 계속되고 있었다. 청나라 조정에서는 상가희를 친왕(황제의 아들)에 승격시키는 등 일련의 파격적인 조치를 취하여 모반에 가담하지 않도록 적극적인 회유공작을 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오삼계로부터는 상가희에게 모반을 권유하는 서신이 도착하였다. 상가희는 이 서신을 그대로 조정에 보내어 자신은 모반할 뜻이 없음을 행동으로 보였다. 그러나 난폭한 그의 아들 상지신은 강희 15년(1676년) 2월 아버지 상가희를 유폐시키고 오삼계의 모반에 가담키로 하였다. 그러나 상가희는 유폐 중에 병사하고 말았다.
상지신이 모반에 가담함으로써 삼번은 연합 전선을 형성하여 장강 이남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였다. 청왕조로서도 창업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 듯하였으나 청군은 예상보다 선전하였는데 민심이 청군쪽에 유리하였기 때문이었다. 청군은 삼번의 토벌에 한족 군대를 동원하였는데 한족 군대들은 삼번이 내세운 '민족 대의'에 동조하지 않았다. 삼번이야 말로 빈족 대의를 배반한 원흉으로서 당연히 응징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오삼계는 휘하 군대를 두 갈래로 나누었다. 오삼계는 전군을 한군데로 집중하여 압도적인 전력으로 적의 거점을 하나하나 궤멸시키는 것이 중요하였으나 두 갈래로 분산시킴으로써 양쪽 모두 불리한 국면을 맞게 되었다.
3개월 내에 삼번 연합군은 중국 남부를 거의 점령하였고, 지금의 섬서성과 하남성까지 진군하였다. 섬서와 하남 지역을 지키는 녹영의 장군들은 거의 삼번에게 협조적이어서 삼번 연합군의 진군에 큰 저항은 없었다. 그 군세가 엄청나 몽골의 칸들이 반역자인 오삼계에 대항하기 위해 지원을 해주겠다 하였으나 강희제는 이를 거절하고 자신의 힘으로 국난을 헤쳐가려 하였다. 그러나 오삼계는 돌연 북경으로 향하는 군사들의 진군 속도를 늦춘다. 청나라 조정의 군사를 너무 만만히 봐서 거만해졌기 때문이다.
당시 섬서성, 감숙성을 관장하던 제독인 왕보신은 오삼계의 삼번 연합군을 잘 막았으나, 오삼계를 물리쳤다는 자신을 역시 너무 과신하여 조정에 반대하고 독자 세력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뒤이어 양기륭(楊起隆)이란 사람이 자신을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셋째 아들인 주자형(朱慈炯), 즉 주삼태자(朱三太子)로 자칭하고 사람을 모아 북경을 몰래 기습하였고 강희제는 효장태황태후를 모시고 옛 수도 성경(盛京)으로 도망가려 하였다. 그러나 양기륭이 북경에 쳐들어올 것이란 정보를 알아챈 청군이 양기륭의 군대를 기습 공격하여 와해하였다. 삼번의 난 역시 곧 시간이 갈수록 물자가 많은 조정에 유리해져 갔고, 곳곳에서 도해(圖海)·주배공(周培功) 등 훌륭한 장수들과 팔기군의 활약으로 나태해진 삼번의 군사들을 대파할 수 있었다. 강희제는 삼번의 군사들을 물리치는 데 한족 장수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들 한족 장수들은 만주족이 잘 모르는 삼번의 약점들을 잘 알아 더욱 손쉽게 격파할 수 있었다.
강희제는 비록 초반에는 불리했으나 기존 방침은 후퇴하지 않았다. 오삼계의 아들 오응웅은 태종 홍타이지의 딸과 결혼하여 북경에 살고 있었는데 강희제는 오응웅을 처형함으로써 삼번의 토벌에 대해서는 일체 협상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오삼계의 양군은 막상 전투가 계속되자 점점 오삼계군은 모두 패색이 짙어졌다. 오삼계의 양군이 점점 불리해지고 있다는 소식은 연합 세력 전선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나머지 두 번 세력들은 대세를 관망하면서 유리한 쪽에 가담하려는 기회주의적 경향이 짙었던 관계로 슬슬 꽁무니를 빼기 시작하였다.
2월 청나라에 반기를 들었던 광동의 상지신이 그 해 12월에 청나라에 귀순의 뜻을 비쳤다. 복건의 경정충은 이미 청나라에 항복하여 왕작을 그대로 유지한 채 복주에 유임하라는 허락을 받았다. 상지신은 경정충에 대한 조정의 조치를 보고 귀순의 뜻을 밝혔다. 오삼계는 상지신에게 원조를 요청하였으나 아무런 답이 없었다.
어렵게 가담시킨 두 번왕의 이탈로 오삼계는 고립 상태에 빠지게 되었지만 그는 청군은 충분히 격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의 전력을 과대 평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탈한 두 번왕도 자신이 청군을 물리치면 언제가는 다시 자신의 편으로 돌아올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오삼계는 자신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내외에 확인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즉위식을 올려 황제가 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판단하였다.
강희 17년(1678년) 3월 오삼계는 당시 거점이던 장사에서 형주로 이동하여 이곳을 정천부라 이름하고 엄숙한 즉위식을 올렸다. 나라 이름을 '주(周)', 연호를 '소무(昭武)'로 정하고 백관을 설치하고 제장에게 봉작을 내렸다. 그리고 운남.귀주 지방에서 과거를 실시하여 인재를 모으는 등 민심을 끌기 위한 인기 정책을 잇따라 발표했다.
그러나 즉위식을 올린 오삼계는 인기 정책의 효과도 보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3월에 즉위하여 8월에 타계하였으니 황제 생활의 연극은 겨우 5개월의 단막극에 그쳤다. 이 5개월 사이에 대만의 정경이 중국 대륙에 출병하여 해징성을 함락하고 천주성을 포위하는 등 활동을 하였으나 오삼계를 지원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오삼계가 죽은 것은 그의 나이 67세 때였다. 중추가절(한가위)을 맞아 달구경을 하면서 연회석상에서 죽었는데,혹구주가 청나라에 항복하려 한다는 소식에 분개한 나머지 죽었다고 한다. 오삼계가 죽자 그의 부장들은 운남에서 그의 손자 오세번을 맞아들여 황제로 옹립하고 연호를 '홍화(洪化)'로 하였다.
역전의 노장 오삼계가 죽고 그의 손자 오세번이 반란군의 수령이 되었으나 가뜩이나 불리한 전세 속에서 반란군의 전도는 암담하기만 하였다. 지금까지 반란군 토벌을 주저하던 광동의 상지신은 대세가 이미 판가름 난 것으로 판단하고 토벌군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청군은 기회를 놓칠세라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오삼계가 죽은 다음해 정월에는 악주.장사.상덕을 탈환하고 2월에는 오삼계가 수도로 정한 형주를 점령하였다. 반란 왕조 오세번은 귀주로 도망쳤다가 다음에는 운남으로 도망쳤다. 그 해 10월 오세번은 청군에게 포위되어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렇게 해서 강희 12년(1673년)에 일어났던 삼번의 난은 9년 만인 강희 20년(1681년)에 종지부를 찍었다.
광동의 상지신은 오삼계가 죽은 후에야 겨우 군사를 움직여 광서의 무선을 공략하였으나 이 극단적인 기회주의자를 청나라는 용서하려 하지 않았다. 평소부터 횡포한 행위가 많아 상지신의 평판은 북경의 조정에서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상지신은 북경으로 송치되어 반란 왕조의 수령 오세번이 반란 황쟁을 계속하던 강희 19년 9월 처형되었다. 이로써 그 다음해에 오세번의 자살과 함께 광동.운남 두 번왕은 완전 소멸되었고 남은 것은 복건의 경충정뿐이었다.
경충정은 이따금 대만의 정군을 공격하는 한편 북건의 반청 세력과 싸워 청나라에 대한 충성의 뜻을 확인시키려 하였으나, 이미 두 번왕을 소멸시킨 청나라가 복건만을 남겨둘 리가 없었다. 운남의 오세번이 소멸된 다음해 정월, 경충정도 5가지 죄목을 뒤집어쓰고 처형됨으로써 삼번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청나라는 그 후로는 다시 번을 설치하지 않고 완전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였다.
강희 22년(1683년) 8월 청나라 수군제독 시랑이 대만을 공격하자 대만의 정극상이 마침내 청나라에 항복함으로써 강희제는 비로소 전 중국을 통일하는 데 성공하엿다.
청조가 삼번에 대해서는 가혹한 처분을 내렸으나 대만의 정씨 일가에 대해서는 관대하였다. 항복한 정극상은 북경으로 송치되긴 하였으나 한군공에 봉해져 그의 일족과 함께 북경 거주가 허락되었다. 강희 38년(1699년)에는 대만에 있던 그의 할아버지 정성공의 유해를 고향인 복건에 이장할 것을 허락하는 등 특전도 내렸다.
청나라가 대만의 정씨 일족에 대하여 주살 등 극형을 면하게 한 것은 그들의 반청 활동에 일관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삼번은 한족 출신 장군으로서 일단 청나라에 항복하였다가 다시 청나라를 배반한 데 반하여 정씨 일가는 명나라 유신으로서 최후까지 청나라에 저항하였으므로 이것은 '충의'로 인정햇기 때문이었다. 청나라는 정성공을 역적으로 보지 않고 그의 일관성 있는 충성과 의리를 높이 평가하여 표창하는 여유를 보인 것이다. 이것은 청나라도 한 왕조로서 충성과 의리를 존중할 줄 알며 이와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는 뜻을 보이기 위한 정책적인 배려로 취한 행동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만 수복
삼번의 난을 끝으로, 중국 본토는 일단 잠잠해졌다. 그러나 오직 대만, 팽호 제도, 금문, 하문 등 동남 36개 섬들이 아직 청나라의 소속이 아니고 대만 호족인 정성공이 통치하고 있었다. 정성공은 남명의 융무제에게서 연평군왕(延平郡王)의 작위를 받고 명나라의 황실 성씨인 주(朱)씨의 성을 하사받고 국성야(國姓爺)로 불리다가 1662년(강희 원년)에 이미 죽고, 그 장남인 정경이 지배하고 있었다. 대만 군사들은 삼번의 난 때부터 때때로 본토로 쳐들어와 해안가 마을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죽이는 등 피해가 났다. 청나라 수군이 여러 차례 대만 수군과 해전에서 싸웠으나 바다에서 노련하고 네덜란드의 기술을 받아들였으며 함선까지 빠른 대만 수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였다. 강희제는 이에 일단 대비책으로 대만과 가까운 광동, 복건, 강소, 절강 등 동남 4성의 주민들을 해안에서 30리 이상 떨어진 곳으로 옮기며 동남 4성과 대만의 무역을 금지하는 해상 금지령을 선포하여 대만의 숨통을 끊었다. 하지만, 이 해상 금지령도 청나라 쪽에 피해가 컸다. 당시 해안가 주민들은 대만과 무역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해안가 주민들을 내륙으로 옮길 때, 이들의 불만을 컸으나 강희제는 특별히 이들에게 세금을 3년간 전부 면제하고 내륙에서 살 돈까지 줘서 무마시킬 수 있었다.
강희제는 이어 과거 정경의 부하였던 시랑(施琅)을 수군 총제독으로, 중국 동남부와 대만 쪽 전문가인 요계성(姚啓聖)을 병부상서급의 권한을 가진 복건, 절강 총독으로 삼아 대만을 점령할 작전을 세웠다. 대만은 원래 정성공 사망 이후부터, 정경을 비롯한 정성공의 친족들이 후계자 쟁탈로 사정이 매우 피폐해져 있었다. 강희제는 잘 훈련된 팔기 수군과 서양 선교사로부터 자문을 구해 만든 최신식 대포를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대만을 공격하였다. 이 사이에 정경은 사망하고 그의 아들들인 정극장(鄭克藏)과 정극상(鄭克塽)이 연평군왕 자리를 놓고 싸워 결국 정극상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청군의 대대적인 공격과 그에 따른 대만 상륙에 결국 정극상은 1683년(강희 22년) 7월에 변발과 호복 차림으로 청에 항복하여 강희제는 진정한 중국 통일을 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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