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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90 (청의 창업 시대)

두바퀴인생 2010. 5. 15. 05:16

 

 

 

중국의 역사 90 (청의 창업 시대)

 

 

청나라는 천운을 타고 난 나라였다.

 

그들이 발흥할 때는 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전란이 조선반도에서 발생하자 명나라는 내부의 부패와 환관들의 전횡에도 불구하고 조선을 구원하기 위하여 요동에 위치한 명나라 군대를 동원하여 지원하는 동안 그들은 명나라의 감독이 소홀한 틈을 타서 힘을 비축하였고 직접 명나라를 무너뜨리는 일도 없이 자체내에서 발생한 이자성의 반란군에 의하여 명왕조는 스스로 붕괴하였다. 청나라는 원숭환-오삼계가 산해관을 지키는 동안 산해관을 넘지 못하여 애를 태우고 있을 즈음 뜻밖에도 반란군에 적개심을 품게 된 오삼계라는 적의 장수가 청나라의 지원을 요청하는 연락을 하자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산해관 문을 활짝 열어둔 상태로 입성했다. 하늘의 도움인가 조상의 돌봄인가! 예친왕은 스스로 대청제국의 앞날에 서광이 비추는 것을 감지했을 것이다. 이자성의 반란군도 청나라 군대의 피를 흘리지 않고도 오삼계의 명군으로 하여금 서로 피를 흘리게 만든 다음 어부지리로 북경을 점령했다. 오삼계의 변심은 진원원이라는 한 기생 출신의 애첩을 되찿기 위해 벌인 한 남자의 분노에 찬 적개심에서 출발한 것에 불과하였으나 청나라의 운명은 탄탄대로를 걷게 만들었다.

 

역사는 참 아리러니하다.

 

우리의 고구려는 중원을 위협할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으로 중국의 수나라, 당나라와 싸워 연전연승을 거두었으나 중원 대륙을 위협만 하였을 뿐 지배하지는 못하였다. 고려는 3차에 걸친 글안족의 침공에 시달렸으나 강감찬을 비롯한 수많은 장수들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또 뒤이어 몽골제국의 원나라가 7차에 걸친 침공으로 온 나라는 불바다가 되었고 유명 문화재를 비롯하여 전국 방방곡곡이 처참한 살륙으로 피비린내가 진동하였다. 고려가 원에 복속되자 원나라의 문화 풍습과 몽골어가 유행하였고 원나라에 아첨하며 자신의 영달을 누린 자들이 수많이 나타났다. 원나라에 끌려간 고려 여인 중에서 원 황제의 후비로 들어간 조선여인 기씨에 의해 그의 일족들에 의해 고려의 조정에 대한 횡포는 극에 달하였고 고려왕들이 그들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했으며 왕이 교체되기도 하였다. 무신정권에 의한 항몽 의지도 시간이 갈수록 허물어 지고 강화도에서 농성을 계속하였으나 나라의 힘은 그들을 물리칠 여력이 없었다. 팔만대장경으로 국운상승을 기원하였으나 다 헛된 일이요, 소용없는 짓이었다. 결국은 고려 조정이 원에 완전 예속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삼별초들이 항몽전을 벌이면서 진도-제주도까지 쫒겨 가면서 충의의 피를 뿌렸다. 무능과 부패로 무너지기 시작한 고려 조정은 결국 이성계의 반란으로 왕조가 소멸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태종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통해 국가의 기초를 다지고 그 위에 문화의 꽃을 피운 세종대를 거쳐 세조대에 이르기까지 국운을 펼친 시기였으나 예종에서 명종대까지 문약에 흘러 훈구파와 신진 사림들간에 동서남북,대소노소로 갈리어 당파싸움으로 일관하고만 있었다. 

 

 

이미 망했어야 할 조선...

조선은 오랑캐나 왜구로 부르면서 천시하던 여진족과 왜구가 조선을 침공하여 임진왜란과 정묘.병자호란을 겪으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유약한 유생들에 의해 나라의 부국강병은 정치.사상.사회적인 모든면에서 무능,허례허식,공리공론,계급구조,인재등용,당파싸움 등으로 무너지고 그들의 이상정치와 권력 싸움에 임금도 무력한 일개 중생에 불과하였다. 양반,평민,상눔,천민이라는 계급구조는 뛰어 넘을 수도 없으며 모든 권력은 양반들에 의해서 농단되었으며 계급을 뛰어넘는 인재 발굴은 없었다. 그러나 중국의 전한시대 한무제는 노비에서 발탁하여 수차례에 걸친 흉노 정벌로 만리나 영토를 확장하여 한무제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도록 활약한 위청.곽거병 같은 위대한 인물도 우리는 등용도 못했고 찿을 수도 없었다. 모두가 글안군에, 몽고군에, 청나라군에 온 날가 쑥대밭이 되고 불탔으며 포로가 되어 끌려 가기 바빴고 수많은 백성들은 힘없는 군졸로 이름모를 벌판에서 한 줌의 흙으로 사라졌다.   

 

조선의 선조는 간신들의 모함으로 증황도 없는 정여립 모반 사건을 빌미로 정철로 하여금 천여 명 이상이 장살,참형,옥사,고문사,사약,유형을 시키면서 권력 싸움에 정신 없는 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산성.동래성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가는 곳마다 장부뿐이 병사들로 지방 수령들은 백성을 버리고 도망치기에 바빴으며 개미새끼 한 마리도 넘나들기 힘들다는 조령을 포기하고 진흙탕 벌판인 탄금대에서 왜군을 맞이한 조선 최고의 장수 신립은 북방에서 연마한 기마전을 한답시고 무지하게 수차례 전개하다가 약 7000여 명의 조선 기마군 대부분은 모두 개죽음을 당하였다. 왜군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대기병 장애물에 능숙하였으며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에 신립의 조선 기마군은 추풍낙엽처럼 처참하게 무너져 신립은 탄금대에 투신하였다. 이러한 신립의 비보를 접한 조선 조정은 놀라 북으로 파천하기로 하고 비내리는 날 궁인과 신하들 대부분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고 초라한 행장으로 피란가던 선조의 어가 행렬에 백성들은 분노의 돌팔매질을 하였다.

 

북행길에 날이 저물자 어두운 임진강에 도착하여 강변 망루인 촉석루에 불을 붙여 태우면서 주먹밥을 먹으며 강을 도강하여 평양-의주로 피란가던 선조는 이순신이라는 한 수군 장수가 옥포해전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승리하였다는 장계를 보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하였다. 조선군이 승전보를 전하다니...기가찰 노릇이 아닌가! 뒤이어 계속되는 승전보에 반대당 간신들의 시기와 모함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순신은 연전연승을 구가하면서 인기가 높아가자 질투심 많은 임금은 간신들의 모함에 이순신을 죽이지 못해 안달났던 임금이었다. 죽음은 면하되 백의종군이요 그사이 조정의 지시만 받던 원균에 의해 조선 수군은 대부분 수장되는 참패를 겪고 남은 판옥선 12척으로 재기를 다짐하고 선택한 곳이 물길이 가장 센 명량이라!  힘이 적으니 자연을 이용하고 그들을 유인하여 자연의 힘과 남은 전력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결과 명량대첩 대승이라!

 

전선에 나간 전함이 갑자기 폭발과 함께 침몰해도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해서 자신들의 배가 침몰됐는지도 모르는 오늘날과 천안함 사건과 비교하면 지금의 우리 해군은 원균보다 한수 아래거늘... 바다의 싸움은 이미 보나마나 패전할 것은 기정사실이 아닌가....물길도 모르고 깊이도 모르고 적이 근접해도 모르고 군복벗고 휴식중에 당한 일이라...두 눈 부릅뜨고 어두운 밤바다를 이잡듯이 살피고 경계해야 하거늘 무엇에 얻어 맞앗는지 암초에 걸렸는지 갑자기 두 쪼각나 뒤집어 지는 뱃전에서 반은 수장되고 반은 살아 나오기 바빴다. 적은 반드시 아군이 방심하는 순간에 그것도 심한 악천후 야간에 침투한다는 것은 전술의 기본이거늘 접적지역에서 그토록 방심하다니...

 

임란 당시 이순신 장군은 적이 눈에 보여 그런것도 아니요 레이다나 무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사방팔방에 초계선을 밤낮 주야로 보내 적정을 탐지하고 정세를 살피며 불화살과 신기전을 쏘아 올리며 파도와 싸우며 첩보를 전달하였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물길과 바람, 달과 별을 바라보며 내일의 기상을 예측하고 적을 유인하면 반드시 통과할 것으로 예상되는 곳에 매복하는 방식으로 전투에 임하였다. 전투를 앞 둔 밤이면 외로이 수루에 올라 백성과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며 조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간신배들과 임금이 자신에 대한 비난과 모함을 예상하면서도  밤바다와 하늘을 살피며 바람소리 새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밤잠을 설치면서 전략.전술을 강구하고 노심초사 근심걱정하면서 자신이 구상한 전투방식을 수군 장병들로 하여금 북소리,징소리,호각소리, 대장기 깃발색에 따라 포를 쏘며 앞으로 나가고 뒤로 빠지고 좌.우 회전하며 돌격하는 연습을 밤 먹듯이 하였기에 23전 23승의 놀라운 전승을 기록하는 전과를 올렸던 것이 아닌가!

 

승리하는 장수는 역적이요 아첨하는 신하는 충신이라... 조선은 이때 망하였어야 했던 나라였다. 이런 더러운 나라에서 충이 무엇이며 승리가 무엇인가? 오로지 백성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 하나로 노심초사 물길을 헤아리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결과가 곤장이요 백의 종군이라...  시시각각 조여오는 선조의 칼끝을 의식하고 최후의 전장에 나선 장군은 노량앞 바다에서 마지막 철수하는 왜눔을 한 명이라도 더 수장시키기 위해 마지막 찬란한 천추의 피를 뿌리면서 분사하였으나 임금인 선조와 간신들의 모함과 무능은 변할 줄을 몰랐다. 임진.정유재란까지 조선 반도는 쑥대밭이 되었고 수많은 백성들이 주검이 되어 피를 뿌렸다. 조선의 부녀자는 강간.겁탈을 당하고 그들에게 끌려가 색노예가 되었으니 무능한 나라의 백성들은 태어난 나라를 탓하기도 목이 메이고 태어난 시기를 탓하기도 눈물겨운 일이라...나이 50이 넘은 나이에 색기는 발동하여 장가를 가 젊은 10대 왕비를 맞아 들이니 완전 원조교제라 그녀가 낳은 왕자가 영창대군이니 눈물의 씨앗이라...인목대비와 광해군간에 서로의 갈등 관계를 해소하지 못하고 유신들의 음모로 인해 대비를 유페시키고 영창을 죽이니 광해군의 중립외교도 결국은 무능한 간신배들의 인조반정으로 불거품이 되고 나라는 조선 최고의 무능한 임금인 인조가 등극하였더라...

 

임진.병자 7년간 왜란에 허덕이던 사이 만주 벌판에서 말달리며 힘을 비축한 누르하치란 인물이 부족을 통합하고 성장하더니 호전적인 홍타이지가 인조반정을 빌미로 정묘년 이전부터 조선에 '쳐들어 간다! 쳐들어 간다' 고 통보하고 통보하면서 쳐들어 올 기세를 보여도 조정은 명분과 실리를 두고 서로 싸움질 뿐이니 장수들은 기개도 없는 졸장들이라...그러다가정묘년에는 대략 강홍립의 중계로 물러 갔으나 병자년에는 정색을 하고 쳐들어 오니 조선의 장수들은 가는 곳마다 모두 항복이요, 나중에는 앞잡이가 되어 가는 곳마다 성문앞에서 항복을 권유하는 기막힌 세상이라... 적이 오면 항복이요 아니면 강화도에 들어가 농성하는게 전부인 이 나라는 임금은 강화도행 길이 막히자 남한산성에 올라가 농성하면서 40여 일간 대책없는 지구전을 펴다 식량이 떨어지자 우물안 개구리 신세라...온다는 남쪽의 지원군은 오는 쪽쪽 청군에 포살당하고 결국 청군이 강화도를 점령하자 왕족들과 비빈들이 포로로 잡히고, 그리고 수많은 부녀자들이 자결을 선택했다. 한양 길거리는 죽은 시체가 산더미를 이루었고 인조가 궁으로 가는 길은 시체를 치워야 갈 정도로 참혹하였다. 소현과 봉림을 비롯하여 볼모로 끌려가면서 삼학사들이 줄줄이 줄에 묶여 수십만 포로들과 같이 심양으로 수천리 길을 끌려 갔으나 어느 누구도 그들을 구출하기 위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나라였다. 백성들의 피고름만 짜내는 묘안 백출에만 관심이 있었고 탱자탱자한 삶을 살아가기만을 좋아하는 선비들이며 유생들이라 자신들의 입신영달만을 위해서만 붓을 들 뿐이었다.

 

나라가 없어지지 않은 게 신기하고 임금의 목을 치고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웠어야 했었다. 타고난 핏줄은 용감무상하고 기상이 뛰어난 민족이나 잘못 받아들인 공리공론에 몰두하는 학문은 명분과 의리만 강조했지 실리는 멀리하고 기술은 천시하였던 나라였다. 이런 학문은 나라를 무능과 부패의 늪으로 만들고 개척과 투쟁의 정신은 소멸되었다. 자신의 자리가 불안하여 소현을 독살하고 태자비 강씨마져 사약을 내려 죽게 만들더니 손자3명을 모두 귀양보내 두 명은 죽고 한 명만 겨우 살아 남았다. 효종인 봉림대군의 북벌도 유림들의 반대로 무위로 끝나고 혁신군주 정조의 개혁도 유신들의 반대로 물거품으로 사라졌다. 외척들이 준동하면서 부패가 만연했던 조선은 흥선과 민비의 싸움질과 외세를 끌여들여 서로 치고받고 싸우며 나라를 말아먹더니 결국에는 일제에 망하는 비참한 현실을 초래했다. 일제 36년 동안 수없이 많은 애국지사와 항일투쟁, 정신대와 강제동원에 끌려간 조선인들이 이름모를 땅과 바다에서 피를 뿌린 수많은 백성들은 누구의 잘못이며 누구를 탓하여야만 하는가!  이 민족은 그럴수 밖에 없는 민족인가?

 

오랑캐 보다 못 난 민족... 

그러나 우리들이 오랑캐로 멸시하던 몽골족은 그 황량한 초원에서 아시아와 유럽을 아루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고 러시아, 페르시아, 중동 지역에 걸친 몽골제국을 건국하면서 금나라와 송왕조를 무너뜨리고 원나라를 세워 중원을 통치했다. 또 글안족은 금나라를 세워 중원을 통치하였고 여진족은 요나라, 청나라를 세워 중원을 통치했다. 테벳 지역 강족의 20만 대군은 당나라 침공 수도를 포위하여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켰고 몽골족의 후예 알탄칸은 명나라 영종을 포로로 잡아 황제가 적에게 포로로 잡히는 역사적으로 가장 큰 치욕을 안겨 주었으며 북경을 포위하여 '경술의 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렇듯 중국 주변 소수 민족들은 수시로 중원을 점령하여 지배하거나 중국인들의 간담을 써늘하게 하였으나 우리 민족은 고구려의 고토회복은 커녕 좁은 반도 안에서 무능과 부패로 백성들의 고혈을 짜서 유신 양반들은 그들의 부귀영화만을 누리기를 원했다.

 

칼을 사용하는 것은 무인이요 천시당하니 누가 무인을 지망할 것이며, 기술자를 천시하니 누가 기술자가 되어 기술을 개발할 것이며, 상인을 천시하니 누가 상인이 되어 장사를 할 것인가? 오로지 추상적인 글씨로 점철된 유교 학문에 길이 있고 답이 있다고 생각한 유신 양반들이나 오늘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이 그들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오히려 우리들 양반이 오랑캐요 그들 오랑캐가 오히려 양반이 아닌가? 그들은 용감무쌍하였고 현명하였으며 질서가 있었고 뭉칠줄도 알았다. 같이 묵숨을 다해 적진으로 돌격하였고 능력있는 자는 누구던지 발탁하여 등용시켰다. 한니발이 이탈리아 반도를 16년 간 종횡무진하면서 '칸내전투' 등에서 로마군 7만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는 등  로마는 1,2,3차 포에니 전쟁을 통해 수많은 집정관들이 전장에서 전사하였으나 인재 등용에 출신과 민족을 가리지 않고 노예던지 이민족이던지 능력만 있으면 등용시켰고 그들의 무진장한 인재 공급에 수많은 집정관들이 전사해도 충원이 가능한 체제였다. 원로원을 포함한 귀족들은 스스로 전장터에 앞장서서 나갔고 수없이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로마는 천 년 이상 긴 역사를 통해 미개인 유럽을 깨웠고 세계를 지배했던 것이 아닌가...  

 

멸망으로 가는 길...

그것이 진정한 명예요 애국이거늘 지금 우리는 어떤가? 이 나라는 군면제가 힘이요 면제 받아야 지도자가 되고 출세하는 기막힌 나라다. 나라는 부패와 비리천국이요, 세계 제일의 자살공화국에 각분야는 비리와 부패가 만연하여 썩어가는 냄새가 판을 치고 있다. 지도층이 바르지 못하니 공정하지 못하고 능력이 있어도 인정받지 못하는 나라...경.검찰은 같은 강도며 도적이요 비피로 얼룩진 스폰서 검사들이 판치는 나라... 군대는 눈도 멀고 귀도 멀고 머리도 망치에 맞은 장애인이 된지 벌써 오래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으나 적 어뢰가 군함을 격침시켜도 피로 파괴니, 아군 함정이 어쩌니, 미 잠수함 오폭이니 하며 좌빨들의 주장이 판치는 나라...군은 정치 논리에 이리저리 쳐박혀 식물인간이 된지 오래고 사기는 다 떨어져 졸장들만 모인 오합지졸의 군대가 되어버렸다. 국방부와 각군 본부는 부패와 비리가 만연하고 나라를 위해 죽어도 개.돼지처럼 취급받는 나라...부패가 온상이 되어 군대를 기피하고 면제받은 사람들이 정부 지도자요 대기업 회장들이 활개치는 나라..., 범죄경력자, 세무회피자,부동산 불법 취득자 등 범법자들이 선거에 출마하여 입술의 세치 혀로 유권자를 농단하고...,유권자들은 이런 사람들을 찍어주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인데도 모르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이 나라 지도자로 선출되고 군림하는 한 이 나라는 중국의 당나라,명나라 말년 시대 환관과 외척들이 준동하여 조정은 모함과 갈등이 팽배하여 변경에서 목숨바쳐 충을 행하던 장수를 목베고 적과 내통하여 나라를 멸망의 길로 끌고가는 무리들인지라...무를 멀리하고 천시하며 지도층이 부패하여 나라가 망하였던 역사를 안다면 이 나라는 점점 어두운 멸망의 길로 들어가고 있으며 절대로 다시 일어나기에는 요원하다는 생각이 든다. 모두가 거짓말이라지만 북은 핵융합까지 개발했다는 소식이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이 나라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북에 버금가는 대량살상무기를 우리도 개발하지 않으면 주변국에 언제가지도 비굴하게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의 핵우산이 영원히 우리들 머리위에 펼쳐 있을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설마가 현실이 된다면 어쩔 것인가? 

 

지금 이 나라 어디 누가 밤잠을 설치면서 전략.전술을 연구하고 고심하는 장수는 어디 있으며 반토막 통나무 위에 올라선 것 같은 한국의 미래가 사방에는 내노라는 힘쓰는 강대국들이 버티고 있고 북에는 평양파 좌빨 불량배 공산집단이 주민들의 고혈을 짜내면서 지도층은 호의호식하면서 핵구슬을 만들어 탄두에 올려 놓고 언제던지 쏘아붙일 기세로 공갈과 협박을 계속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미국에 입양된 고아같은 신세가 아닌가...발로차면 죽은 목숨이고 잡은 손 놓으면 낙동강 오리알 신세라... 거센 풍랑이 몰아치는 현해탄 바다위에 자살공화국의 장기인 투신자결로 한국의 미래를 명예롭게 결정할 것인가? 그것은 명예로운게 아니고 무능이다. 그들의 힘만 믿고 언제가지  버틸 것이며 그들을 언제까지 믿고 부패와 비리로 얼룩진 자살공화국을 키우고 이어나갈 것인가!

 

멸망의 길은 이 땅의 초토화는 월남전 이상으로 부산 앞바다에 보트피플이 넘쳐 날 것이다. 지금까지 이룬 이 땅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됨은 물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권력층, 가진자를 비롯하여 모든 지식인들은 사라질 것이다. 우리들의 자녀들은 벌거벗고 평생토록 노예처럼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상황을 초래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청의 역사를 기술하다 답답한 마음에... 

 

  

 

 

청의 창업 시대

 

청나라는 오삼계가 뜻밖의 구원 요청을 해온 덕에 결국 쉽게 북경에 입성했다. 예친왕 도르곤은 슬기롭고도 과단성 잇는 인물이었다.그는 청왕조가 명왕조의 뒤를 계승한 중국 정통의 왕조라는 사실에 정책의 역점을 두었다. 그리하여 숭정제와 황후 주씨를 예로써 개장하여 능묘를 세우고 백성들에게 3일간 복상을 명하였다.

 

명나라는 이자성의 유적집단에 의해 멸망하였다. 청은 정의에 입각하여 이자성을 토벌하였기 때문에 청왕조가 명왕조를 계승한 것이라는 논리였다. 예친왕은 명나라 관리가 항복하면 벼슬을 더 높여 주는 등 일련의 회유책을 써 민심 안정에 힘을 기울였다.

 

청나라가 심양에서 북경으로 천도했을 무렵 그들의 중국 지배 지역은 북경 일대에 제한되어 있었다. 명실공히 중국을 완전히 통일하기에는 아직 요원한 느낌마져 들었다. 예친왕은 공격의 템포를 늦추지 않고 북경에서 도망친 이자성을 추격토록 하였다. 하남까지 도망친 이자성은 브장들과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논의를 벌엿다. 그런데 우금성이 이엄을 반역을 빌미로 살해하자 이에 유종민이 크게 반발하는 등 내분이 일기 시작하였다. 동관까지 도망친 이자성은 이곳을 발판으로 세력을 만화하려 하였으나 그를 추격하는 청나라의 자친왕(예친왕의 동생)과 명나라 항장 공유덕에 의해 패주하였다. 청군은 두 갈래로 나누어 영친왕 아지커, 오삼계, 상가희 등이 거느리는 별군이 대동에서 북쪽으로 돌아 연안으로부터 섬서로 진출하여 이자성군을 협공하였다. 이자성군은 서안성에 불을 지르고 무관에서 양양을 거쳐 무창으로 도망쳤다. 이자성은 이곳에서 진용을 정비하여 남경을 공격할 태세를 보였으나 추격하는 청군에 자주 패하여 구강으로 쫒겨 들어갔다. 이자성은 부하들을 산기슭에 남겨둔 채 홀로 구궁산에 올라가 천제묘에 배례를 올릴 때 농민들의 습격을 받아 죽었다. 일설에는 구궁산에 올라가 스스로 목을 메고 죽었다고도 한다.

 

수령을 잃은 이자성군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였으며 유종민은 청군에 잡혀 죽고 이자성의 아들과 대부분의 부하들은 명나라 호광총독 하등교에게 항복하였다. 청군이 동관을 격파한 것은 순치 2년 정월이고 이자성이 죽은 것은 같은 해 윤 6월이었으니 청군의 공격이 얼마나 신속하였는지 알 수 있다. 이자성의 최측근 우금성은 아들과 함께 청나라에 투항하여 중용되었는데 후에 이로 인해 청나라 조정에서도 여러가지 물의를 일으켰다.

 

이자성 집단을 완전 평정한 청군은 계속해서 사천에 자리 잡고 있는 장헌충 토벌에 나섰다. 이 토벌에는  평서왕으로 봉해진 오삼계가 출전했다. 청나라에 투항하여 명나라 잔존 세력 토벌에 나선 반역자들은 오삼계 외에 정남왕 공유덕, 평남왕 상가희, 정남왕 경중명 등이 있었다. 이들은 수십만의 청군을 세길로 나누어 반청세력을 소탕하고 뒤이어 강남(장강 일대)으로 향했다.

 

순치 2년(1645) 4월 청군은 양주를 점령하였다. 무자비한 살륙이 10일간이나 전개되어 80만 명의 인명이 살해되었다. 역사는 이 비극을 '양주 10일'로 부른다.

 

같은해 7월 강음이 함락되었고 죽은 자의 시체가 거리와 연못을 메웠다. 강음은 총가구 1만 호에 수비병 1천 명도 못되는 소도시였다. 이곳에서 무려 9만 7천 명이 죽임을 당하여 전체 인구 가운데 생존자가 겨우 53명이었다고 한다.

 

결렬한 전투가 되풀이되고 확대되면서 강남 여러 곳은 완전히 피바다를 이루었다. 정의와 불의의 대결, 즉 청나라와 내통하여 일신의 영달만을 꾀한 자도 많았지만 반면 빈족을 끝까지 지키려는 영웅도 많았다. 남명의 사가법, 장황언,구식사,장헌충의 부하 이정국,이자성의 부하 이내형,학요기,강음의 영수 염응원,진명우 등과 수많은 무명 애국자들이 목숨을 걸고 민족의 적 청나라와 싸워 이름을 역사에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