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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91 (남명 정권의 성립 )

두바퀴인생 2010. 5. 16. 10:24

 

 

중국의 역사 91 (남명 정권의 성립)

 

부패의 극을 달리던 명나라는 이자성의 반란군에 무력하게 멸망하였으나 남경의 남명 정권은 명나라 부흥을 위해 마지막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조정 대신들이 모두 청나라에 항복한 이후 실제로 남명 정권에는 항청을 위해 남명 정권을 이어나갈 수 있는 인재가 없었다.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한 정권은 재기가 그만큼 어려운 것이며 남부가 곡창 지대임에도 불구하고 군사력을 건설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고 황족 중 황권을 이을 인물도 없이 구심점이 없는 하수아비 정권에 불과하였다. 백성들이 명나라 치세 동안 탁월한 치세를 이룬 것이 아닌 탐관과 부패가 만연하여 결국 멸망하였기에 백성들의 참여도 그만큼 부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남명 정권은 이후 18년간 명맥을 유지하다가 오삼계의 토벌군에 의해 미얀마까지 도망갔던 영력제가 오삼계의 인도 요구에 의해 미얀마 정부로부터 인도되자 오삼계는 영력제를 처형하였다.이로써 남명 정권은 명나라 장수 출신인 변절자 오삼계에 의해 멸망 당하였다.

 

 

 

남명 정권의 성립

 

명나라는 남경을 제2의 수도로 정하여 이곳에 소형 정부 기구를 두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명나라 태조 홍무제는 원래 명왕조를 창업했을 때 남경을 수도로 정하였고 그 후 영락제가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아버지 홍무제의 능이 있는 곳이라 하여 남경을 특별히 취급하였다. 그래서 원래 있던 정부 기구를 그대로 두어 축소판 정부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북경이 함락되고 숭정제가 자결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남경에서는 정부를 수림하기 위한 논의가 일기 시작하였다. 정부를 세울 경우 누구를 황제로 옹립하느냐가 첯째 문제로 떠 올랐다. 당시 북쪽의 난을 피하여 남경으로 옮겨온 황족 가운데 황통에 가까운 두 사람의 왕이 있었는데 복왕 주유숭과 노왕 주상방이었다.

 

황통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복왕이었으나 그에게는 개인적으로 인격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예부 시랑 전겸익 등은 복왕은 7가지 불가한 점이 있다며 반대하였으나 봉양 총독 마사영 등이 군대를 배경으로 강력히 밀었기 때문에 결국 복왕의 옹립이 확정되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문제는 숭정제가 죽은 후 황태자의 생사를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자성이 산해관까지 인질로 잡았다는 사실만 확인되었을 뿐 그 후 생사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살아 있다면 정통 황족의 우선권이 있으므로 다른 황족이 황위에 오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복왕은 황제가 아닌 감국으로 국사를 담당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남명 정권으로 복왕은 그 후 홍광제라 불리었다.

 

홍광제의 남명 정권은 남으로 쫒겨난 가운데도 부패와 무능으로 순치 2년(1745) 5월15일에 막을 내렸는데 즉위 1주년이 되는 날에 청군에 남경이 함락되었다.

 

그 후 당왕 융무제, 계왕 영력제의 세 정권이 수립되었으나 이 세 정권의 조정 관리들은 대부분 부패하고 무능하여 청군의 공격을 막아낼 힘이 없었다. 그러나 도처에서 봉기한 항청 무리에 의해 남명 정권은 18년간 명맥을 유지했다. 마지막 영력제는 멀리 미얀마까지 도망하였으나 변절자 오삼계는 군사를 보내어 미얀마 정부에 영력제의 인도를 강력하게 요구하여 미얀마 정부는 영력제를 오삼게에게 인도하였고 오삼계는 영력제를 처형하였다.

 

이렇게 남명 정권은 멸망하였으나 그 무렵 바다를 사이에 둔 대만에서는 정성공이 영력의 연호를 사용하면서 청나라에 대항했다.

 

정성공은 복건의 천주 출신으로 원래 이름은 정삼, 자는 대목이었다. 아버지 정지룡은 해적 출신이었는데 나중에 명나라에 귀순하였다. 어머니는 일본인의 딸로 정성공은 일본의 히라도 태생이었다. 그는 7세 때 일본을 떠나 귀국하였는데 독서와 무예를 특히 좋아했다.

 

청군이 산해관을 넘어 북경에 육박할 무렵 난을 피하여 내려온 융무제가 복건성 복주에서 남명 정권을 세우자, 정성공은 아버지 정지룡의 주선으로 융무제를 알현하엿다. 융무제는 첯눈에 정성공의 인품에 끌려 주씨 성을 하사하고 이때부터 이름을 성공으로 바꾸었다.

 

융무제의 남명 정권은 사실상 정지룡을 비롯한 일족들의 무력으로 지탱되고 있었다.

 

청군이 절강성에서 복건성으로 노도와 같이 밀려오자 복건의 주력 부대는 절강과의 경계선인 선하령에서 항전 태세를 구축하였다. 대원수로는 정성공의 숙부인 정홍규, 부원수에는 정성공의 종형인 정채가 임명되어 선하령 방어에 임하였다.

 

그러나 정성공의 아버지 정지룡은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비밀리에 홍승주와 내통하여 선하령에서 병력을 철수시키고 청군에 투항했다. 정성공은 아버지 정지룡의 투항을 극구 만류하였으나 아버지 투항 의사를 꺽지는 못하였다. 정지룡은 투항 후 북경으로 가고 정성공은 바다로 나와 반청 활동을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