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중국의 역사 94 (강희제 시대 : 대내외 치세) 본문
중국의 역사 94 (강희제 시대 : 대내외 치세)
존속 기간 : 1616년 - 1912년 | |||||
| |||||
표어: (없음) | |||||
국가: 공금구 | |||||
![]() | |||||
수도 | 선양(1636~1644) 베이징(1644~1912) 39°55′N, 116°23′E | ||||
공용어 | 만주어, 중국어 | ||||
정부 형태 | 전제군주제 천명제 (1616 ~ 1626) 강희제 (1661 ~ 1722) 선통제 (1908 ~ 1912) | ||||
정부수립 • 성립 (후금) •국호 개칭 •중국 통일 •신해혁명 •해체 |
1616년 1636년 1644년 1911년 10월 10일 1912년 2월 12일 | ||||
면적 • 면적 • 내수면 비율 |
9,984,670 km² 2.8% | ||||
인구 • 1820년 어림 • 인구 밀도 |
383,100,000명 명/km² | ||||
통화 | 위안 (1889년부터) |
중국의 역사
| |||||||
---|---|---|---|---|---|---|---|
신화와 고대 | |||||||
선사 시대 | |||||||
신화·삼황오제 | |||||||
황하・장강 문명 | |||||||
하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 |||||||
상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 |||||||
주 기원전 1122~기원전 256 | |||||||
서주 | |||||||
동주 | |||||||
춘추 시대 | |||||||
전국 시대 | |||||||
제국의 시대 | |||||||
진 기원전 221~기원전 206 | |||||||
한 기원전 206~서기 220 | |||||||
전한 | |||||||
신 8~23 | |||||||
후한 | |||||||
삼국 시대 220~280 | |||||||
위, 촉, 오 | |||||||
진 265~420 | |||||||
서진 | |||||||
동진 |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 ||||||
남북조 시대 420~589 | |||||||
수 581~618 | |||||||
당 618~907 무주 690~705 | |||||||
오대십국 시대 907~960 |
요 916~1125 | ||||||
송 960~1279 |
|||||||
북송 | 서하 1038~1227 | ||||||
남송 | 금 1115~1234 |
||||||
원 1271~1368 | |||||||
명 1368~1644 | |||||||
청 1644~1912 | |||||||
현대의 중국 | |||||||
중화민국 1911~현재 | |||||||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
역대 황제
건주 여진(建州 女眞) 추장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재위기간 |
---|---|---|---|---|
- | 청 시조 (淸始祖) (청 태조 추숭) |
- | 애신각라포고리옹순 (愛新覺羅布庫里雍順) |
- |
- | 청 조조 (淸肇祖) (청 태조 추숭) |
원황제 (原皇帝) |
애신각라맹특목 (愛新覺羅孟特穆) |
1405년 ~ 1433년 |
- | - | 순황제 (順皇帝) (청 태조 추숭) |
애신각라충선 (愛新覺羅充善) |
1433년 ~ 1467년 |
- | - | 흥황제 (興皇帝) (청 태조 추숭) |
애신각라탈라 (愛新覺羅脫羅) |
1467년 ~ 1481년 |
- | - | 정황제 (正皇帝) (청 태조 추숭) |
애신각라석보제편고 (愛新覺羅錫寶齊篇古) |
1481년 ~ 1522년 |
- | 청 흥조 (淸興祖) (청 태조 추숭) |
직황제 (直皇帝) |
애신각라복만 (愛新覺羅福滿) |
1522년 ~ 1542년 |
- | 청 경조 (淸景祖) (청 태조 추숭) |
익황제 (翼皇帝) |
애신각라각창안 (愛新覺羅覺昌安) |
1542년 ~ 1571년 |
- | 청 현조 (淸顯祖) (청 태조 추숭) |
선황제 (宣皇帝) |
애신각라탑극세 (愛新覺羅塔克世) |
1571년 ~ 1583년 |
제1대 | 청 태조 (淸太祖) |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 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 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
애신각라노이합적 (愛新覺羅努爾哈赤) (누르하치) |
1583년 ~ 1616년 |
후금(後金, 1616년 ~ 1636년)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
제1대 | 청 태조 (淸太祖) |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 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 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
애신각라노이합적 (愛新覺羅努爾哈赤) (누르하치) |
천명(天命) | 1616년 ~ 1626년 |
제2대 | 청 태종 (淸太宗) |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 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 (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 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
애신각라황태극 (愛新覺羅皇太極) (홍타이지) |
천총(天聰) | 1626년 ~ 1636년 |
청(淸, 1636년 ~ 1912년)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
제2대 | 청 태종 (淸太宗) |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 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 (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 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
애신각라황태극 (愛新覺羅皇太極) (홍타이지) |
숭덕(崇德) | 1636년 ~ 1643년 |
- | 청 성종 (淸成宗) (청 세조 추숭) |
무덕수원광업정공 안민입정성경의황제 (懋德修遠廣業定功 安民立政誠敬義皇帝) |
애신각라다이곤 (愛新覺羅多爾袞) (도르곤) |
- | - |
제3대 | 청 세조 (淸世祖) |
체천융운정통건극영예흠문 현무대덕홍공지인순효장황제 (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 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章皇帝) |
애신각라복림 (愛新覺羅福臨) |
순치(順治) | 1643년 ~ 1661년 |
제4대 | 청 성조 (淸聖祖) |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 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 (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 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 |
애신각라현엽 (愛新覺羅玄燁) |
강희(康熙) | 1661년 ~ 1722년 |
제5대 | 청 세종 (淸世宗) |
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 관인신의예성대효지성헌황제 (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 寬仁信毅睿聖大孝至誠憲皇帝) |
애신각라윤진 (愛新覺羅胤禛) |
옹정(雍正) | 1722년 ~ 1735년 |
제6대 | 청 고종 (淸高宗) |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 수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 (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 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 |
애신각라홍력 (愛新覺羅弘曆) |
건륭(乾隆) | 1735년 ~ 1795년 |
제7대 | 청 인종 (淸仁宗) |
수천흥운수화수유숭문경무 광유효공근검단민영철예황제 (受天興運敷化綏猷崇文經武 光裕孝恭勤儉端敏英哲睿皇帝) |
애신각라옹염 (愛新覺羅顒琰) |
가경(嘉慶) | 1795년 ~ 1820년 |
제8대 | 청 선종 (淸宣宗) |
효천부운입중체정지문성무 지용인자검근효민관정성황제 (效天符運立中體正至文聖武 智勇仁慈儉勤孝敏寬定成皇帝) |
애신각라민녕 (愛新覺羅旻寧) |
도광(道光) | 1820년 ~ 1850년 |
제9대 | 청 문종 (淸文宗) |
협천익운집중수모무덕진무 성효연공단인관민장검현황제 (協天翊運執中垂謨懋德振武 聖孝淵恭端仁寬敏莊儉顯皇帝) |
애신각라혁저 (愛新覺羅奕詝) |
함풍(咸豊) | 1850년 ~ 1861년 |
제10대 | 청 목종 (淸穆宗) |
계천개운수중거정보대 정공성지성효신민공관의황제 (繼天開運受中居正保大 定功聖智誠孝信敏恭寬毅皇帝) |
애신각라재순 (愛新覺羅載淳) |
동치(同治) | 1861년 ~ 1875년 |
제11대 | 청 덕종 (淸德宗) |
동천숭운대중지정경문 위무인효예지단검관근경황제 (同天崇運大中至正經文 緯武仁孝睿智端儉寬勤景皇帝) |
애신각라재첨 (愛新覺羅載湉) |
광서(光緖) | 1875년 ~ 1908년 |
비정통 | - | 대아가 (大阿哥) (대황자<大皇子>) |
애신각라부준 (愛新覺羅溥儁) |
보경(保慶) | 1899년 |
제12대 | 청 공종 (淸恭宗) |
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 경부관예정목체인입효민황제 (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 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愍皇帝) (말대황제<末代皇帝>, 손황제<遜皇帝>) |
애신각라부의 (愛新覺羅溥儀) (푸이) |
선통(宣統) | 1908년 ~ 1912년 |
지배체제
청나라의 중국 지배 정책은 3대 순치제 때 대대적인 기틀이 잡히고 강희제의 오랜 재위 기간 동안 통치 조직이 형성되엇다. 청나라는 한족이 아닌 북방 민족으로서 중국을 정복한 점은 원나라와 동일하였으나 한족 지배 정책에서는 원나라보다 훨씬 관대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원나라는 시종 무력에 자신감을 가진 나머지 중국의 토지와 백성들을 자신들이 취득한 재산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엿다. 반면 청나라는 처음부터 중국 백성들을 질곡에서 구원한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웠다.
원나라의 중국 지배는 순전히 몽골민족을 위한 것이었다. 중앙과 지방 공공기관의 장관이나 다루하치는 모두 몽골인이 독점하였으며 정치상의 결정권도 모두 장악했기 때문에 중국인관리는 보좌관 구실밖에 하지 못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만주족과 한족이 합동으로 정치를 수행하는 형식을 취하엿다. 중앙정부의 내각대학사 이하 고급 관료는 대개 만주족과 한족이 반반씩 차지하여 상호 보완하는 이중 체제를 채택하였다.
예를 들면 내각 대학사는 만주족.한족 각 3명, 그 밑의 협판대학사는 각 1명,육부의 상서.좌시랑.우시랑을 무두 각 1명으로 하여 철저히 만.한 동수제를 채택하였다. 공용어는 만주어였으나 중국어를 곁들엿기 때문에 이를 번역하기 위하여 각 아문에 필첩사 약간명을 두었다. 아문의 실제 사무는 중국인 서리가 운영했다.
지방 행정은 중국인 자치에 위임한다는 방침을 세워 중국인에게 많은 지위를 할애하되 이를 감시하기 위하여 만주족을 배치하였다.
지방의 방위 임무는 중국인으로 조직된 녹영병이 담당하고 이 녹영병은 각 성의 총독.순무.제독이 관리하였다. 총독.순무는 한족.만주족 동수 비례로 임명하엿다. 군사상의 요충지에는 팔기병을 주둔시켰고 그 지휘관.장군은 팔기 출신으로 임명하였다.
청나라의 청치 조직은 매우 교묘한 면이 있었는데 만주족과 한족이 협력하여 공무를 수행한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이었으나 실제로는 만주족과 한족이 상호 견제하고 상호 감시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나쁜 일도 좋은 일도 못하게 되었는데, 원래 중국은 전통적으로 정치가에게 좋은 일을 하도록 권장하는 것보다는 나쁜 일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인재 등용
강희 18년 (1679년) 강희제는 인재 등용을 위하여 관리 등요시험인 박학홍사과를 설치하였다. 이는 한족의 반청 지사들을 관리로 등용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당시 강희제는 청나라가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중국을 통일하였으나 민심 수습면에서 난제가 많았다. 특히 기개있는 한족과 몽골족 지식인들을 회유하기란 그리 쉬운일이 아니었다. 이 점에 착안한 강희제는 삼번의 난을 거의 평정할 단게에 이르자 박학홍사과를 설치하였다. 그는 포고를 내려 학식있는 선비들에게 모두 박학홍사과에 응시하도록 권장하여 합격한 자를 관직에 등용하였다. 그러나 웬만한 명나라 유신이나 인망있는 지식인들은 응시조차 하지 않았다. 강희제는 대신들에게 이들 지식인들을 추천.선발하였으나 이에도 실패하였다.
그 다음으로 사자들을 지식인들에게 보내어 출사를 강요하였으나 이 또한 실패하였다. 그래서 많은 지식인들을 가마에 태워 북경으로 끌어올려 시험을 보도록 하였으나 시험을 거부하는 사람, 시험장에 나오고서도 답안을 제대로 쓰지 않거나 시험을 거부하는 사람, 답안 대신 시로써 심정을 토로하는 자들도 많았다. 그래도 강희제는 이들 지식인들을 회유하여 관직에 등용하엿는데 주존이.모기령.우동 등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청나라는 한족 지식인들의 손을 빌리지 않고서는 문치는 물론 문화사업도 벌일 수 없는 형편이었다. 강희제는 무인의 기질이 많은 인물이엇으나 한편으로는 피나는 노력으로 면학에 열중하는 호학인이기도 하였다. 그가 즉위한 것이 8세 때였으므로 그는 제왕의 지위에 있으면서 제왕학을 공부했다. 그는 특히 주자학에 큰 관심을 보였고 또 당시 중국에 와 잇던 에수회 신부에게 수학과 자연 과학을 배웠다.
강희제는 천하에 흩어져 있는 학자들을 북경에 모아 대대적으로 서적 편찬 작업을 벌였다. 가장 유명한 것은 중국 최대의 자전으로 알려져 있는 <강희자전>이다. 이 책의 편찬 사업은 강희 49년(1710년)에 시작하여 6년 후인 강희 55년에 완성되었다. 수록된 자수는 4만 7천 35자, 고문자 1천 995자로 도합 4만 9천 30자에 달하는 대작이엇다. 이 밖에도 <대청회전> 180권, <패문운부> 106권, <역대제화시류> 120권, <전당시> 900권 등이다.
과거 제도
청나라 시대의 과거는 향시와 회시로 구분되었다. 향시는 각 성에서 시행하는 시험으로 에시 성격을 띠었고, 회시는 중앙에서 시행하는 시험으로 본시였다. 향시에 합격한 사람을 거인이라 불렀는데 이 거인은 3년에 한 번 실시되는 회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연도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거인은 대략 1년에 2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회시에 급제하면 진사가 되는데 보통 200~300명 정도였다 하니 경쟁률리 엄청나게 높았다.
수석 급제자를 장원이라 불렀고 차석은 방안, 3위는 탐화라 불렀다. 회시에 급제한 후 전시라 해서 황제가 임석한 가운데 또 한차례 시험이 있었으나 이 전시는 순위를 결정하는 것일 뿐 합격 여부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또 비정기적으로 3년에 한 차례 은과라는 별칭으로 임시 회시도 열렸다. 청나라 시대에 실시했던 회시의 수는 은과를 합하여 모두 112회에 이르렀다. 따라서 112명의 장원이 배출된 셈인데 한 가지 흥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출신 성별 합격자는 강소성 49명,절강성 20명으로 이 두 성이 과반수를 차지했다. 양주.소주.항주를 포함한 두 성에서 그만큼 많은 인재가 배출된 것이다.수재가 많이 배출되려면 그만큼 면학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하고 경제적으로 뒷받침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곳이 청나라 시대에 경제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과거뿐만 아니라 청나라 시대에 문학자.예술가들도 이 두 곳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양주에서는 부호들이 많이 살고 잇어 서화 수집가도 많았고 예술가들이 모여 들었다.
러시아와의 갈등 : 네르친스크 조약
1680년대에 러시아 제국은 로마노프 왕조가 지배하고 있었다. 또한 강희제가 러시아와의 갈등이 있던 당시는 러시아의 근대화와 최전성기를 이루어낸 표트르 1세의 초기 시대였다. 이미 이전부터 러시아는 군대를 동원하여 만주로 내려왔다. 과거 순치제 때 러시아와의 국지적인 전쟁으로 청나라는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한 조선에 러시아와 싸울 군사를 요청하였고, 조선은 군사를 1654년(순치 11년)과 1658년(순치 15년)에 두 번 파병하여 러시아군과 싸웠는데, 이것이 조선의 나선 정벌이다. 그로부터 30여 년 뒤, 러시아는 표트르 1세가 강력한 개화 정책 아래 근대식으로 바뀐 군대로 계속 청나라의 동북쪽을 침략하였고 일부는 북만주에 주둔한다. 심지어는 근처에 살던 만주인에게 보드카를 선물로 주어 취하게 한 다음 기습하여 그 부족의 거의 모든 장정을 죽이고 아녀자들을 겁탈하기도 하였다. 강희제는 이에 분노하여 러시아에 사과를 요구하였으나 러시아는 그에게 선물을 보내고 통상 자유의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러시아가 계속 송화강까지 세력을 넓히려 하자, 강희제는 먼저 국경에 애혼성(愛琿城, 아이훈 성)을 쌓았으나 계속 러시아가 야욕을 드러내자 그에 강경책을 써서 러시아의 국경 요새인 아르바진을 공격하였다. 아르바진을 점령하였으나 러시아군은 물러나지 않고 뺏긴 아르바진 요새를 수복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청군과 러시아군이 흑룡강 부근에서 국지적으로 싸우고 휴전하기를 반복한 뒤에, 1689년(강희 28년)에 강희제는 영시위내대신이자 자신의 처숙(妻叔)인 색액도를 흠차대신으로 명하여 러시아와 협상을 보게 하였다. 러시아와 청나라 대표가 네르친스크에서 만나 헤이룽강의 지류인 고르비트사 강과 스타노보이 산맥을 청나라와 러시아의 국경으로 확정 지으니, 이것이 네르친스크 조약이다. 이 조약에서 청나라의 제안이 대부분 수용되어, 청나라는 동북쪽의 넓은 영토를 얻게 되었다. 또한, 청나라와 러시아 간의 무역에도 자유를 보장하였으나, 러시아에는 그다지 득을 볼 만한 조항은 많지 않아, 훗날 함풍제의 치세 때, 러시아가 애로호 전쟁에서 청나라의 원조를 빌미로 만주와 연해주의 많은 땅을 도로 가져가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몽골과 티베트 원정
몽골 초원은 홍타이지 이후 청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조공을 올리고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이미 1675년(강희 14년) 차하르 부족이 당시 삼번의 난으로 청나라에 생긴 혼란을 틈타 중원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노한 강희제는 몽골을 내몽골과 외몽골로 나누어서 부족 간의 규합을 막으려 하였다. 몽골이 청나라에 복속된 지 수십 년이 지나고, 몽골의 여러 부족 중 일부는 절대 복종하고 일부는 표면적으로나마 청나라에 충성을 바쳤다. 그러나 그중 몽골의 한 부족인 오이라트 부족에 뿌리를 둔 초로스 칸가 출신의 준가르 부족의 칸인 가르단이 세력을 모아 몽골과 티베트를 통일하여 라마 제국을 건설할 포부를 품고 청나라에 대항할 조짐을 보였다. 이미 가르단은 1677년(강희 16년) 오이라트 부족을 통합하고 1682년(강희 21년)에는 타림 분지까지 점령하였다. 그런 다음 이들은 동투르키스탄을 점령하였고 이제 청나라가 다스리는 중원을 노렸다. 준가르는 자신들이 군사를 일으킨 명분으로 옛 원나라의 대칸은 만주인이 아닌 몽골인으로 옹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준가르는 청나라를 견제한 러시아와 티베트에 원조를 받기도 하였는데 심지어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는 가르단에게 보슈그투 칸, 즉 대칸의 직함을 내렸다.
또한 1688년(강희 27년), 준가르는 몽골 초원의 다른 부족인 할하 부족의 땅을 점령하고 거의 모든 부족민을 죽였다. 살아남은 할하족은 고비 사막을 넘어 강희제에게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였다. 준가르의 군사들이 청나라의 영토를 침략하자, 1690년(강희 29년) 7월 강희제는 자신의 이복형이자 순치제의 차남 유친왕 복전(裕親王 福全)과 이복동생이며 순치제의 5남 공친왕 상녕(恭親王 常寧) 등을 대동하고 친히 팔기군을 이끌고 몽골로 원정길에 올랐다. 이것은 명나라의 영락제 이후 황제가 최초로 친히 고비 사막을 넘어 몽골 원정을 감행한 원정이며 중국 역사상 황제가 군사를 이끌고 나간 마지막 친정이었다. 이 원정에서 강희제는 할하족의 공식적인 합병 서약과 충성 서약을 받았다. 뒤이어 청군은 준가르군과 내몽골에서 맞붙었으나 전염병과 계속되는 패배로 사령관이었던 이복 형제들에게 책임을 묻고 군사를 물려 북경으로 환도하였다. 강희제 자신도 전염병에 걸려서 한동안 고생하였다.
그러나 1696년(강희 35년)에 강희제는 8만의 팔기군 군사를 이끌고 몽골로 진입, 차오모도 전투에서 준가르군과 싸워 대승하였다. 패한 가르단은 이듬해인 1697년(강희 36년)에 알타이 산맥 기슭에서 음독자살하였다. 1712년(강희 51년), 강희제는 준가르 부족을 견제하기 위해 남러시아에서 살던 투르쿠트 족에 사절을 보냈다. 이러한 강희제의 강한 견제에도 준가르 부족은 여전히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며, 1717년(강희 56년)에 준가르 부족의 신임 칸이자 가르단의 조카 체왕 아랍단은 6천 명의 적은 군사를 이끌고 과거 동맹이었던 티베트를 점령하였다. 준가르군은 수장 달라이 라마라 칭하던 티베트의 왕 랍장을 폐위시킨 뒤 살해하였고 1718년(강희 57년)에 청군을 격파하였다. 준가르군은 여전히 그 세력이 막강하였으나 1720년(강희 59년)에 강희제가 보낸 팔기군의 대대적인 원정에 준가르군은 결국 패퇴하였고 티베트에 원정 온 체왕 아랍단은 몽골로 돌아가 은둔하였다. 그 이듬해인 1721년(강희 60년)에 청군은 켈장 갸초를 모시고 와서 제7대 달라이 라마로 만들고 티베트를 청나라의 영토에 정식 편입시켜 티베트는 안정되었다. 하지만, 준가르 세력은 청군의 티베트 원정 이후 결정타를 맞았으나 완전히 멸하지는 않았다. 강희제의 손자인 건륭제 때에야 위구르와 함께 청군에게 항복하여 그 세력이 완전히 와해되었다.
팔기군 개편과 군사 정책
이미 팔기군에 관한 정책은 조부인 숭덕제가 만주족 팔기군, 한족 팔기군, 몽골족 팔기군으로 나누고 아버지 순치제 때 비로소 완성이 되어 있었으나, 강희제를 이를 다시 개편하였다. 당시 팔기군 아래에 녹영(綠營)이라는 군단이 있었는데 이 휘하에 삼번의 난 때 활약한 주배공이나 대만 수복 때 정씨 휘하 군사들을 대파한 시랑 등 한족 장군들이 바로 여기에 속하였다. 강희제는 공을 세운 이들에게 군부에서 높은 자리를 주어 독려하였고 이들은 후대의 옹정, 건륭 시대에 장군들에 비하여 더 강력하고 군권 역시 막강하였으며 병사들에게 인정을 베풀며 주연을 자주 열어주어 그들에 대한 병사들의 신망 역시 높았다. 또한 강희제는 만주족 장군들을 녹영의 지휘관으로도 임명하여 만주족의 유능한 전투 방식을 알려주어 녹영의 전투력을 높였다. 녹영은 계속해서 팽창하여 후대에는 팔기군 대신 녹영이 대외 원정 등에서 더 많은 활약을 하게 되었다.
강희제는 전통적인 팔기군 체계에 엄격한 규율을 적용하는데 만약 장군이 병사들과 같이 돌아오지 않으면 장군을 참하고, 병졸이 자신의 부대와 같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 병졸 역시 참하도록 명하였다. 강희제는 장병이 모두 일심동체라 생각하여 책임 역시 같이 져야 한다 생각하였고 이런 엄격한 규율 덕분에 강희 시대의 팔기군은 후대인 옹정, 건륭 시대의 팔기군보다 더 훈련이 잘 되어 있고 용감하였다. 특히 강희 시대의 팔기군은 강희제의 여러 전쟁 때 큰 활약을 하며 승리를 안겨주었다. 후대에 가서는 팔기군의 기강이 많이 흐트러지는데, 강희 시대엔 통일을 위한 전쟁을 많이 하였으나, 후대에 들어가 전쟁이 별로 없고 군사들의 수도 갑자기 늘어나 통제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자 자연히 흐트러지게 되었던 것이다.
내정의 안정
1677년(강희 16년) 강희제는 중국 전통의 고유 내각인 상서방(尙書房)을 개편하여 남서방을 설치하여 자신의 경연장으로 사용하였으며 전 황조인 명나라처럼 여러 명의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를 두어서 조정의 일을 의논하였다. 이 내각대학사의 남서방은 훗날 강희제의 아들인 옹정제 때에 군기처로 발전하게 된다. 황궁의 살림을 아끼려고 명나라 때에 10만 명이나 되던 환관과 궁녀의 수를 400명으로 대폭 줄였으며, 비용 역시 명나라 시절에 비해 40분의 1로 줄였다. 강희제 스스로 옷이 완전히 낡지 않은 이상 그 옷을 기워서라도 입을만큼 크게 검소하였고 자신의 침전에도 10명 안팎의 환관과 궁녀밖에 두지 않았다. 치수 공사에도 뜻이 있어 1677년(강희 16년)에 황하 치수 공사에 착수, 근보(靳輔)를 그 책임자에 명하였으며 1684년(강희 23년)에 완성해 황하가 범람하지 않도록 하여 농민의 피해를 줄였다. 또한, 대운하 역시 보수·증축하여 많은 배가 물량을 대량 수송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로써 황하가 안정되어 많은 물자가 장강과 황하를 잇는 대운하를 타고 범람 걱정 없이 북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팔기군의 둔전지로 쓰던 권지(圈地)를 모두 몰수하고 그 땅을 모두 소작농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으며, 소작지와 소작농을 함께 매매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해 소작농들을 보호하였고, 백성들이 지주의 수탈 없이 편안히 살 수 있게 하였다. 또한, 흉년이 들었을 때는 흉작의 정도에 따라 세금을 일부 감면, 또는 전원 감면하였다.
강희제는 황하의 치수 공사가 완성된 1684년(강희 23년)을 시작으로 1689년(강희 28년), 1699년(강희 38년), 1703년(강희 42년), 1707년(강희 46년), 1712년(강희 51년) 등 총 6번 남방으로 순행하여 장강 이남의 많은 지역 유지들에게 신뢰를 얻었고, 이남의 학자들에게 학문을 사사하기도 하였다. 또한, 남방 순행 때, 정해놓은 예산을 제외한 별도의 비용은 가져온 내탕금으로 모두 지출하여 남쪽 백성들의 재산 착취를 막았다.
강희제는 세수입을 전시(戰時)에도 늘리지 않아 민생이 전시에도 평상시를 유지하도록 하였고, 치세가 지속할 때마다 세금을 올리기는커녕 점점 감면하여 백성의 존경과 칭송을 한몸에 받았다. 1711년(강희 50년)에는 성세자생인정(盛世滋生人丁) 제도를 공포하여 성인의 인두세를 당시의 값에서 영원히 동결시키고 그 값을 받는 장정의 수 또한 2,450만 명으로 한정하고 그 이상은 받지 않겠다고 천명하였다. 또한, 이 제도가 시행된 지 얼마 안 가 지정은제를 북경과 하북성 일대에서 시행하기도 하였다. 대만 수복 이후에는 4개의 항구를 열어 대외 무역업을 활성화하여 많은 은자를 국고에 가져오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강희제의 선정은 청나라와 만주족에 대한 한족 백성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으며, 한족을 융화하기 위한 강희제의 피나는 노력에 자연히 한족 백성은 스스로 청나라를 따르게 되었다. 또한 몽골의 소수 민족과의 관계에도 힘을 기울여 1703년(강희 42년) 성경과 가까운 곳인 승덕 지방에 피서산장이라는 큰 이궁을 지었고 그 곳에서 각기 다른 소수 민족의 족장 등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거나 부족의 의식도 행하게 허락하였다.
재정 정책 역시 기존에 비해 수정하여, 세금을 적게 하였어도 무역 등으로 이미 은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국고도 그다지 별문제가 없었다. 1668년(강희 7년)에 1,500만 냥, 1710년(강희 49년)에 5천만 냥이 넘는 은자가 있었으나, 강희제의 말년인 1722년(강희 61년)에는 은자가 7백만 냥도 채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국고의 거의 모든 은자가 군비로 들어갔으며, 강희제 역시 정무를 보기에는 이미 너무 늙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강희제는 이것을 타개하기 위해, 재정에 재능을 가진 4남 옹친왕 윤진(胤禛)에게 조언을 하고 새로운 정책을 찾으라 명하였으나, 강희제는 그 정책의 실현을 보지 못했다.
강희제의 정책을 바탕으로 인구도 크게 상승하기 시작하였다. 1644년(명 숭정 17년) 명나라가 멸망할 때 기나긴 전쟁과 반란, 기근으로 중국의 인구는 1억 명 이하로 내려갔으나 전쟁을 끝내고 강희제의 강력한 내정에 백성들의 삶의 질이 나아지자 인구가 다시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강희제가 죽을 때에는 다시 1억 명에서 올라가 1억 5천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고 옹정제, 건륭제를 거쳐 계속 인구는 늘어났다.
문화 발전과 기독교 전례 문제
강희제는 소년 시절부터 많은 학문을 배웠다. 그중에서도 유학, 즉 성리학을 좋아하였으며 그 자신이 훌륭한 유학자로서 유학의 가르침에 따라 살기를 노력하였다. 서예 역시 매우 달필이어서 소림사의 현판을 바로 강희제가 썼다. 어린 시절 강희제가 쌓은 학식은 그에게 크게 도움이 되어 경연이나 조회 등에서 신료와 유학자들과 논의를 펼치고 난 뒤에, 이들은 강희제에게 꼼짝도 하지 못하였다 한다. 심지어 강희제가 크게 병이 난 도중에도 결코 책을 멀리하지 않았다 한다. 강희제는 자신이 만주족이라는 것을 항상 잊지 않았으나, 중국의 문화가 자신들의 문화보다 매우 월등한 것을 알고 그것을 만주족 대신들에게 융화시키려 하였다.
강희제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신임하여 그들에게서 서양의 지리, 천문, 수학, 음악 등을 배웠고, 중국 황제 중 처음으로 피아노를 쳤으나 가톨릭교회의 교리는 전혀 배우려 하지 않았다 한다. 이러한 이유로 선교사들의 중국 포교에 위기가 닥치기도 하였다. 이미 아버지 순치제 때 중국에 와서 흠천감 장관을 재직했던 아담 샬 폰 벨을 시작으로 한때 러시아와의 전쟁 때 간접적으로 러시아를 돕기도 했던 서양의 선교사 조아생 부베·마테오 리파·페르디난드 페르비스트·주세페 카스텔리오네·장 당빌 등이 계속 유럽에서 와서 새로운 학문을 강희제와 대소 신료들에게 전래하였다. 페르비스트는 아담 샬 폰 벨의 뒤를 이어 흠천감 장관을 역임하여 새로운 천문학을 중국에 전파하였고, 부베는 강희제에게 기하학을 가르쳐주었으며, 장 당빌은 정밀한 중국 지도인 《황여전람도》(皇與全覽圖)를 만들었다. 또한, 마테오 리파는 12년간 궁정에 있으면서 강희제에게 서양화를 그려 주었다. 리파는 1723년에 그의 고향 나폴리로 돌아와 나폴리 동부 대학에 ‘중국 학회’를 세웠다. 이 학회는 유럽 최초의 중국학 학회였으며, 유럽인들에게 중국과 동양을 알려주는 총본산이 되었다. 다른 선교사들은 강희제의 통치와 학문에 대한 열정을 곁에서 지켜보고 그를 ‘기독교만 믿으면 완전무결한 군주’라고 칭하였다.
강희제는 선교사들을 황실 천문대 등의 요직에 두는 한편 초기에는 청나라에서 가톨릭교회의 포교를 허가하였다. 1692년(강희 31년)에 청나라의 어느 곳에서도 포교를 허락하고 조정의 가톨릭교회에 대한 박해를 엄금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몽골 원정 때 말라리아에서 걸렸다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강희제는 선교사들에게 더 많은 호의를 가지게 되었고, 북경 내성에 교회를 짓는 것을 허락하여 선교사들과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였다. 그러나 그 뒤로 당시 예수회를 제외한 청나라에 들어간 종파들이 중국의 조상 숭배, 우상 숭배에 대해 비판적으로 변해갔고, 곧 이들 종파의 말을 들은 로마 교황청에서 중국의 전례(典禮)를 문제로 삼음으로서 중국의 전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1704년(강희 43년)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하느님을 상제(上帝)나 천주(天主)로 표기하는 것이 서양에서 뜻하는 조물주라는 말과 그 뜻이 서로 다르고, 매년 봄과 가을마다 지내는 공자의 제사와 조상의 제사가 우상 숭배이므로 중국의 전례를 금지한다는 회칙을 발표하고 1715년(강희 54년) 이를 재확인하였다. 강희제는 이에 대해 매우 불쾌하게 여겨 교황의 회칙을 가지고 온 특사인 교황청 소속 추기경을 체포하거나 본국으로 강제 송환하였다. 1706년(강희 45년) 강희제는 예수회에 찬동적이지 않은 선교사들을 모두 국외로 추방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특단의 상응 조치로 1721년(강희 60년) 교황의 회칙 수렴을 거부하고 교황청이 더 많은 선교사들을 파견하고 백성들에게 선교·선동해서 청나라를 가톨릭 국가로 만들려 한다며 교황의 회칙을 비판하였고, 선교사들의 청나라 출입을 허가하는 대신 포교는 불법화하였다. 그러나 강희제가 붕어하고 난 다음에 1724년(옹정 2년), 강희제의 아들인 옹정제는 포교와 선교사들의 청나라 출입을 모두 불법화하고 예수회 선교사들 역시 당시 포르투갈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오문(澳門, 마카오)으로 추방하였다.
또한 강희제는 당나라·송나라 때의 과거의 일부분이었던 전시(殿試)를 발전시킨 박학홍유과(博學鴻儒科)를 실시하여, 많은 인재, 특히 강남의 한족 출신 학자들을 모아 박학홍유로 삼았고 이 중에서 뛰어난 이들은 한림원 학사로 삼았다. 그리고 이 인재들로 하여금 명나라 시기의 실록인 《명사》(明史)를 편찬하여 초기의 명 태조와 명 성조 때 번창하였으나 후에 여러 황제의 실정을 부각시켜서 청나라가 명나라의 정통성을 확실히 계승하였다는 것을 알리려 하였다. 또한, 박학홍유로 하여금 백과사전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연감유함》(淵監類函), 《패문운부》(佩文韻府), 《역상고성》, 《수리정온》, 《전당시》 등을 편찬케 하였다. 여기서 가장 돋보이는 문화적 업적은 바로 1711년(강희 50년)에 시작하여 5년 뒤인 1716년(강희 55년)에 완성된 《강희자전》(康熙字典)인데, 이것은 박학홍유 수십 명과 대신 진정경(陳廷敬) 등이 수년 동안 공을 들여 만들었다. 4만 2천여 개의 한자가 수록된 《강희자전》의 출판은 현대 중국어의 어법과 단어를 확립시킨, 강희 시대 문화 사업의 완성이었다.
하지만, 강건성세 3대에 걸쳐 많은 한족 학자들을 숙청한 문자의 옥이 일어났는데, 이미 문자의 옥은 춘추 전국 시대 제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 문자의 옥은 오랜 세월을 거쳐 계속되었는데 청나라에 들어와서는 도르곤을 황숙(皇叔)이 아닌 왕숙(王叔)으로 써서 도르곤과 당시 황제인 순치제를 왕(王)으로 모독한 이유로 한족 학자가 교살되었다. 이들 학자는 만주족인 청나라의 중국 통치의 정통성을 강력히 부인하여 중국의 평화적이고 자애로운 통치를 지향하던 강희제의 분노를 샀다. 문자의 옥에 연루된 학자들은 대역죄로 다스려져 능지형을 받았다. 또한, 그 구족의 16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참수시키고 16세 이하의 남자와 모든 여자는 노비로 삼아 변방으로 보냈다. 실제로 1711년(강희 50년)에 대명세라는 한족 학자가 자신의 저서인 《남산집》(南山集)에 망한 명나라의 연호인 영력(永曆)을 사용하여, 대명세의 삼족이 모두 처형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청나라는 옹정제와 건륭제를 거쳐 만주족에 비판적인 학자를 더욱 탄압하여 유배를 보내거나 처형하였고, 비판한 책들은 모두 불태워 버리거나 금서로 지정하였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면산의 5월 (사대와 자주) (0) | 2010.05.20 |
---|---|
우면산의 5월(천안함 사건 조사 결과 발표) (0) | 2010.05.20 |
중국의 역사 93 (강희제 시대 : 오배의 난, 삼번의 난) (0) | 2010.05.18 |
중국의 역사 92 (정성공의 대만 경략) (0) | 2010.05.17 |
중국의 역사 91 (남명 정권의 성립 ) (0) | 2010.0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