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중국의 역사 95 (강희제 시대 :후계문제,통치철학,사후평가) 본문
중국의 역사 95 (강희제 시대 : 후계문제, 통치철학, 사후평가)
존속 기간 : 1616년 - 1912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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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어: (없음) | |||||
국가: 공금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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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선양(1636~1644) 베이징(1644~1912) 39°55′N, 116°23′E | ||||
공용어 | 만주어, 중국어 | ||||
정부 형태 | 전제군주제 천명제 (1616 ~ 1626) 강희제 (1661 ~ 1722) 선통제 (1908 ~ 1912) | ||||
정부수립 • 성립 (후금) •국호 개칭 •중국 통일 •신해혁명 •해체 |
1616년 1636년 1644년 1911년 10월 10일 1912년 2월 12일 | ||||
면적 • 면적 • 내수면 비율 |
9,984,670 km² 2.8% | ||||
인구 • 1820년 어림 • 인구 밀도 |
383,100,000명 명/km² | ||||
통화 | 위안 (1889년부터) |
중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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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고대 | |||||||
선사 시대 | |||||||
신화·삼황오제 | |||||||
황하・장강 문명 | |||||||
하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 |||||||
상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 |||||||
주 기원전 1122~기원전 256 | |||||||
서주 | |||||||
동주 | |||||||
춘추 시대 | |||||||
전국 시대 | |||||||
제국의 시대 | |||||||
진 기원전 221~기원전 206 | |||||||
한 기원전 206~서기 220 | |||||||
전한 | |||||||
신 8~23 | |||||||
후한 | |||||||
삼국 시대 220~280 | |||||||
위, 촉, 오 | |||||||
진 265~420 | |||||||
서진 | |||||||
동진 |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 ||||||
남북조 시대 420~589 | |||||||
수 581~618 | |||||||
당 618~907 무주 690~705 | |||||||
오대십국 시대 907~960 |
요 916~1125 | ||||||
송 960~12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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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 서하 1038~1227 | ||||||
남송 | 금 1115~1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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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1271~1368 | |||||||
명 1368~1644 | |||||||
청 1644~1912 | |||||||
현대의 중국 | |||||||
중화민국 1911~현재 | |||||||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
역대 황제
건주 여진(建州 女眞) 추장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재위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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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 시조 (淸始祖) (청 태조 추숭) |
- | 애신각라포고리옹순 (愛新覺羅布庫里雍順) |
- |
- | 청 조조 (淸肇祖) (청 태조 추숭) |
원황제 (原皇帝) |
애신각라맹특목 (愛新覺羅孟特穆) |
1405년 ~ 1433년 |
- | - | 순황제 (順皇帝) (청 태조 추숭) |
애신각라충선 (愛新覺羅充善) |
1433년 ~ 1467년 |
- | - | 흥황제 (興皇帝) (청 태조 추숭) |
애신각라탈라 (愛新覺羅脫羅) |
1467년 ~ 1481년 |
- | - | 정황제 (正皇帝) (청 태조 추숭) |
애신각라석보제편고 (愛新覺羅錫寶齊篇古) |
1481년 ~ 1522년 |
- | 청 흥조 (淸興祖) (청 태조 추숭) |
직황제 (直皇帝) |
애신각라복만 (愛新覺羅福滿) |
1522년 ~ 1542년 |
- | 청 경조 (淸景祖) (청 태조 추숭) |
익황제 (翼皇帝) |
애신각라각창안 (愛新覺羅覺昌安) |
1542년 ~ 1571년 |
- | 청 현조 (淸顯祖) (청 태조 추숭) |
선황제 (宣皇帝) |
애신각라탑극세 (愛新覺羅塔克世) |
1571년 ~ 1583년 |
제1대 | 청 태조 (淸太祖) |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 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 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
애신각라노이합적 (愛新覺羅努爾哈赤) (누르하치) |
1583년 ~ 1616년 |
후금(後金, 1616년 ~ 1636년)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
제1대 | 청 태조 (淸太祖) |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 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 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
애신각라노이합적 (愛新覺羅努爾哈赤) (누르하치) |
천명(天命) | 1616년 ~ 1626년 |
제2대 | 청 태종 (淸太宗) |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 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 (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 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
애신각라황태극 (愛新覺羅皇太極) (홍타이지) |
천총(天聰) | 1626년 ~ 1636년 |
청(淸, 1636년 ~ 1912년)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
제2대 | 청 태종 (淸太宗) |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 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 (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 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
애신각라황태극 (愛新覺羅皇太極) (홍타이지) |
숭덕(崇德) | 1636년 ~ 1643년 |
- | 청 성종 (淸成宗) (청 세조 추숭) |
무덕수원광업정공 안민입정성경의황제 (懋德修遠廣業定功 安民立政誠敬義皇帝) |
애신각라다이곤 (愛新覺羅多爾袞) (도르곤) |
- | - |
제3대 | 청 세조 (淸世祖) |
체천융운정통건극영예흠문 현무대덕홍공지인순효장황제 (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 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章皇帝) |
애신각라복림 (愛新覺羅福臨) |
순치(順治) | 1643년 ~ 1661년 |
제4대 | 청 성조 (淸聖祖) |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 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 (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 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 |
애신각라현엽 (愛新覺羅玄燁) |
강희(康熙) | 1661년 ~ 1722년 |
제5대 | 청 세종 (淸世宗) |
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 관인신의예성대효지성헌황제 (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 寬仁信毅睿聖大孝至誠憲皇帝) |
애신각라윤진 (愛新覺羅胤禛) |
옹정(雍正) | 1722년 ~ 1735년 |
제6대 | 청 고종 (淸高宗) |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 수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 (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 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 |
애신각라홍력 (愛新覺羅弘曆) |
건륭(乾隆) | 1735년 ~ 1795년 |
제7대 | 청 인종 (淸仁宗) |
수천흥운수화수유숭문경무 광유효공근검단민영철예황제 (受天興運敷化綏猷崇文經武 光裕孝恭勤儉端敏英哲睿皇帝) |
애신각라옹염 (愛新覺羅顒琰) |
가경(嘉慶) | 1795년 ~ 1820년 |
제8대 | 청 선종 (淸宣宗) |
효천부운입중체정지문성무 지용인자검근효민관정성황제 (效天符運立中體正至文聖武 智勇仁慈儉勤孝敏寬定成皇帝) |
애신각라민녕 (愛新覺羅旻寧) |
도광(道光) | 1820년 ~ 1850년 |
제9대 | 청 문종 (淸文宗) |
협천익운집중수모무덕진무 성효연공단인관민장검현황제 (協天翊運執中垂謨懋德振武 聖孝淵恭端仁寬敏莊儉顯皇帝) |
애신각라혁저 (愛新覺羅奕詝) |
함풍(咸豊) | 1850년 ~ 1861년 |
제10대 | 청 목종 (淸穆宗) |
계천개운수중거정보대 정공성지성효신민공관의황제 (繼天開運受中居正保大 定功聖智誠孝信敏恭寬毅皇帝) |
애신각라재순 (愛新覺羅載淳) |
동치(同治) | 1861년 ~ 1875년 |
제11대 | 청 덕종 (淸德宗) |
동천숭운대중지정경문 위무인효예지단검관근경황제 (同天崇運大中至正經文 緯武仁孝睿智端儉寬勤景皇帝) |
애신각라재첨 (愛新覺羅載湉) |
광서(光緖) | 1875년 ~ 1908년 |
비정통 | - | 대아가 (大阿哥) (대황자<大皇子>) |
애신각라부준 (愛新覺羅溥儁) |
보경(保慶) | 1899년 |
제12대 | 청 공종 (淸恭宗) |
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 경부관예정목체인입효민황제 (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 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愍皇帝) (말대황제<末代皇帝>, 손황제<遜皇帝>) |
애신각라부의 (愛新覺羅溥儀) (푸이) |
선통(宣統) | 1908년 ~ 1912년 |
강희제
일세의 명군 강희제에게도 취약점은 있었다. 바로 후계자 문제인데 그에게는 자그만치 35명이나 되는 황자가 있어 그 가운데 둘째 아들을 황태자로 세웠으나 본래 자질이 나쁘고 비행이 많아 강희제의 마음을 괴롭혔다. 강희제는 일단 이 황태자를 폐하엿다가 중신들의 간언을 받아들여 얼마 후 복위시켰다. 그러나 강희 51년 (1712년)에 다시 황태자를 폐하고 그 후로는 황태자를 세우지 않았다. 이때부터 청나라는 황태자를 세우지 않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후계자는 오로지 유조에 따라 결정되었다. 나중에 강희제의 유조에 다라 넷째 아들 윤진이 황태자로 지명되었는데 이가 옹정제이다.
이처럼 유조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후계 황제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된 관례는 결과적으로 청나라에 다행한 일이었다. 황태자였던 둘째 아들에게 비행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황태자라는 지위가 그들 더욱 타락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황제가 죽을 때까지 후계자가 밝혀지지 않기 때문에 황태자를 추종하는 세력이 생길 수도 없고, 또 여러 황자들은 아버지의 관심을 끌기 위해 문무 양면에 더욱 정진하려 노력하였다. 이 같은 관례는 어쩌면 훌륭한 후계자를 길러내기 위한 한 가지 방편이었는지도 모른다. 황제가 급사할 경우에 대비하여 자금성 안의 건청궁 황제 옥좌 바로 뒤 '정대광명' 이라고 써붙인 액자 뒤에 황제가 후계 황제로 지목할 황자의 이름을 써 비단갑에 밀봉해 놓았다. 이 제도는 옹정제 때부터 시작되어 청나라가 막을 내릴 때까지 지켜졌다.
황태자 책봉 문제
훌륭한 정치를 펼친 강희제였지만, 그의 자식들은 그다지 큰 그릇이 되지 못했다. 강희제는 황자들 모두를 자신의 경연 토론장인 남서방에서 교육시켜 유학의 사상이 몸에 밴 황자로 만들려 하였으나 대부분 그리 되지 못하였다. 제2황자이며 강희제의 유일한 적자이자 적장남인 윤잉(胤礽)은 첫 번째 황후인 효성인황후의 소생으로, 효성인황후가 1674년(강희 13년)에 윤잉을 낳은 직후 난산으로 붕어하자 이를 슬퍼한 강희제가 이듬해인 1675년(강희 14년)에 바로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이것은 본래 가장 유능한 아들을 후계자로 삼는 만주족의 전통을 깨고 한족의 전통을 도입하는 것이었기에 만주족 대신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었으나, 유학을 숭상한 강희제는 이런 논의를 단호히 일축하였다. 이에 서장자이고 제1황자의 작위를 받았으며 윤잉보다 두 살이 많은 윤시(胤禔)가 대신들 사이에서 윤잉의 경쟁 상대로 떠올랐으나 강희제는 여러 번 공식석상에서 윤잉을 후계자로 천명하여, 제위는 윤잉이 승계받는 것으로 확정되어 갔다.
강희제는 윤잉의 거처를 과거 명나라 때 황태자들이 머물던 동궁인 종수궁(鍾粹宮)으로 선택하지 않고 역대 황제와 가문의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인 봉선전 옆에 새로 궁을 지어 육경궁(毓慶宮)이라 이름짓고 이곳을 윤잉의 거처로 정하였다. 또한 강희제는 다른 어느 황자들보다 그 위상을 높였으며, 그리고 황제에게만 입히는 황포를 윤잉에게 특별히 입을 수 있도록 허락하고, 황궁 어디서든 가마나 말을 탈 수 있게하였다. 또한 당시 어느 친왕들보다 더 많은 봉토와 식읍을 받는 등 큰 특전을 베풀어 주었다. 당시 윤잉이 받았던 봉토와 식읍은 역대 청나라 친왕 중 가장 많은 봉토를 받은 도르곤보다도 더 많이 받았다. 강희제는 윤잉이 훗날 황자들에게 핍박받을지도 모를까봐 윤잉을 제외한 나머지 자식들의 작위를 올려주는 것을 꺼려하였고 실제로 1700년대까지 윤잉을 제외한 황자들은 모두 친왕에 오르지 못하였다. 마지막으로 강희제는 윤잉에게 다른 황자들이 받는 교육보다 더 수준높고 엄격한 교육을 시켰다. 윤잉을 가르치는 사부 역시 당대 최고의 학자 중 한 명인 왕섬을 임명하여 윤잉을 완벽한 차기 황제로 만들려 하였다. 머리가 총명하던 윤잉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공부하여 이미 4살 때 한문을 쓰기 시작하여 7살에는 사서오경을 다 떼었다 한다.그리고 강희제의 순행과 몽골 원정 때에도 황태자로서 조정을 장관, 대소사를 처리하여 정치 분야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백성들에겐 따뜻하던 강희제는 자식, 특히 자신이 가장 총애하고 아끼던 자식인 윤잉에겐 더없이 냉정하고 혹독하게 대하였다.
윤잉은 20대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였으나 30대가 넘어서부터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주색잡기를 좋아하였다. 속으로는 윤잉을 매우 아꼈으나 겉으로 내색을 하지 못한 아버지의 냉정함과 혹독함, 어머니를 태어나자마자 여읜 모정의 갈망, 그리고 형제들간의 암투 등으로 인해 점점 타락하기 시작한 윤잉에게 실망한 강희제는 3황자 윤지, 4황자 윤진, 8황자 윤사 등 다른 황자들에게 각기 부서를 책임지고 도맡게 하였다. 다른 황자들은 모두 육부를 관리하여 강희제의 신임을 얻고 군왕, 친왕으로 승승장구하였으나, 윤잉은 어떠한 부서도 맡지 않은 채, 부황의 눈밖에 나고 정신질환에 가까운 비행까지 일삼았다 한다. 그리고 이미 조정은 황자들과 신료들의 야심으로 인해 사분오열이 되었는데, 이 중 윤시는 자신이 장자인데 언제나 차남이며 황태자인 윤잉의 뒤에 서야 되고 윤잉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절을 해야 했으며 자신이 아우들에게 “형님”이라 불리는 반면 윤잉은 이복 형인 윤시를 비롯한 형제들에게 “황태자 전하”라는 존칭으로 불리는 것이 큰 불만이라 반윤잉 세력에 적극 가담하였다. 윤잉이 황태자로 있을 당시 윤잉을 포함한 9명의 황자가 파벌에 참여하였는데 그 계보와 파벌에 참가한 주요 대신들을 보면 이러하다.
- 황태자당(皇太子黨)
- 차남 황태자 윤잉(皇太子 胤礽)
- 영시위내대신 색액도(領侍衛內大臣 索額圖)
- 황장자당(皇長子黨)
- 장남 직군왕 윤시(直郡王 胤禔)
- 영시위내대신 납란명주(領侍衛內大臣 納蘭明珠)
- 황사자당(皇四子黨)
- 4남 옹군왕 윤진(雍郡王 胤禛)
- 13남 패자 윤상(貝子 胤祥)
- 사천순무 연갱요(四川巡撫 年羹堯)
- 황팔자당(皇八子黨)
- 8남 패륵 윤사(貝勒 胤禩)
- 9남 패자 윤당(貝子 胤禟)
- 10남 패자 윤아(貝子 胤䄉)
- 14남 패자 윤제(貝子 胤禵)
- 영시위내대신 동국유(領侍衛內大臣 佟國維)
- 보군통령 융과다(步軍統領 隆果多)
- 중립파
3남 성군왕 윤지(誠郡王 胤祉)
5남 항군왕 윤기(恆郡王 胤祺)
7남 순군왕 윤우(淳郡王 胤祐)
12남 패자 윤도(貝子 胤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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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이미 황태자 윤잉의 위치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아챈 윤잉의 작은 외조부이자 이미 40여 년 전에 죽은 색니의 차남, 색액도(索額圖)는 자신을 위시로 한 태자당(太子黨)의 결성과 황장자인 직군왕 윤시와 그 외숙부 납란명주(納蘭明珠)를 위시로 한 황장자당의 결성으로 붕당이 시작되어 서로 조정의 주도권과 황위 후계권을 잡으려 하였고, 심지어는 태자당이 윤잉에게 알리지 않고 강희제를 암살하려 하자 진노한 강희제는 1703년(강희 42년)에 색액도를 사사하고 그 일파를 척결해 처형하거나 유배보낸 뒤 윤잉에게 엄중한 경고를 내렸으나, 여전히 윤잉은 달라지지 않고 나태하였으며 조회에도 참석치 않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1708년(강희 47년)에 강희제는 윤잉을 폐위시키고 서인으로 삼아 종인부(宗人府)에 가두어 버렸다. 윤잉을 폐위하고 태묘(太廟)에 고할 때, 강희제는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그 후 6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우울하게 지내다가 중풍에까지 들었다고 실록은 기록하였다. 그러나 본래 윤잉을 총애하였고 황태자를 자리에 두고 골육상쟁을 염려한 강희제는 이듬해인 1709년(강희 48년)에 윤잉이 직접적으로 대역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황태자로 복위시키고 도리어 납란명주를 하옥시켰다. 색액도와 납란명주는 40년 동안 강희제의 곁에서 정치를 도와주던 조정의 수반들이자 영시위내대신이었으나 황위를 놓고 당쟁이 시작되자 강희제는 이들을 단호히 조정에서 혁파하여 당쟁의 불씨를 끄려 하였다. 하지만 윤잉이 복위되자 안심하였던 황장자당을 중심으로 황팔자당까지 합세한 반황태자파는 다시 윤잉을 폐위시킬 음모와 이간책을 꾸몄다. 황팔자당은 8황자 윤사가 주축이 되었고 이에 가담한 대신으로는 또다른 조정의 영수이며 강희제의 외삼촌이자 세 번째 장인인 동국유와 그 아들인 융과다가 윤사를 도왔다.
그럼에도 윤잉이 반성을 하지 않고 다시 주색잡기를 좋아하였으나, 문제는 윤잉이 강희제의 후궁인 서비 정씨를 건드려 황실에 충격을 던져주었다. 1712년(강희 51년)에 강희제는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장강 이남으로 순행을 떠났는데 아직도 윤잉을 못미더워한 강희제가 윤잉이 북경에서 딴 마음을 품지 않나 관찰하기 위해 일부러 북경을 비운 것이다. 그리고 황제가 궁을 비웠으니 황태자였던 윤잉이 임시로 정무를 돌보았다. 그러나 윤잉은 음모를 꾸며 강희제가 북경으로 환도하면 강희제에게 태상황으로 물러나고 자신이 찬위하겠다는 쿠데타를 기도하였는데, 이 사건은 확실히 윤잉이 주도한 역모였다. 이것을 눈치챈 북경의 대신들은 순행 중인 강희제에게 돌아올 것을 요청하였고 강희제는 북경으로 돌아오자마자 윤잉을 바로 황태자에서 폐위시켜 냉궁인 함안궁에 가두고 폐서인하여 영원히 서인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또한 두 번이나 폐태자시킨 이 사건을 다시 언급하는 자가 있으면 참수할 것이라 엄중히 명하였다. 이 사건의 폐단을 계기로 청나라는 멸망할 때까지 죽은 황자를 황태자로 추서만 하였을 뿐, 생전에 어느 황자도 황태자로 지명받지 못했다. 강희제는 얼마 뒤 전위조서를 건청궁 ‘정대광명’(正大光明) 편액 뒤에 보관토록 하고 자신이 붕어한 뒤에 열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저위비건법(儲位秘建法)이다.
이로 인해 형제들 간의 후계자 다툼이 발생하였다. 그중 4남 옹친왕 윤진, 8남 염친왕 윤사(胤禩), 14남 순군왕 윤제(胤禵)가 가장 실력있는 아들들이었다. 장자인 직군왕 윤시는 과거 윤잉이 처음 폐위되었을 때 폐태자 윤잉을 저주하고 몰래 자객을 보냈으며, 윤잉의 방에다 칼이 꽂힌 윤잉의 인형을 숨겨놓기도 하였다. 심지어 윤시는 부황 강희제 앞에서 윤잉을 죽이겠다 하였으나, 오히려 크게 혼나고 윤잉처럼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당시 8남 윤사가 인정이 많고 공명정대하여 가장 많은 신료의 신망을 받았으나 실제로 윤사는 간교하였고 이간질에 뛰어나 황자들간의 분란을 부추겼다. 심지어 윤사는 심복을 시켜 점쟁이를 매수하여 자신이 다음 황제가 될 것이란 소문을 공공연히 내어 강희제의 분노를 사서 강희제 말기에 윤사는 조정에서 중책을 맡지 못하였다. 이들은 서로 공적을 다투고 부황인 강희제의 총애를 받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특히 강희제는 만년에 14남인 윤제를 총애하여 그에게 북방의 만리장성을 수호하는 중책인 무원대장군(撫遠大將軍)의 작위와 병부의 지휘권을 내렸다. 병권을 내려주면 황위를 물려주는 것으로 생각하던 황자들간의 암투는 더욱 격화되었고, 8남 윤사와 14남 윤제가 손을 잡고 파벌을 형성하자 4남 윤진 역시 파벌을 형성하여 조정의 주도권을 잡으려 하였다.
천수연과 성군의 붕어
1722년(강희 61년) 5월 4일 강희제는 자신의 68번째 생일을 맞는 것을 기념하여 65세 이상의 만주족, 한족, 몽골족, 회족 현직 관리들 및 퇴직 관리들 1천여 명을 자금성 건청궁(乾淸宮)에 초대하여 큰 주연을 베풀었다. 이것이 바로 천수연(千叟宴)이다. 천수연은 이미 1713년(강희 52년) 강희제의 나이가 육순이 넘은 것을 기념하여 자신의 동년배인 대신들을 불러 축하를 해주었다. 그 이후 두 번째로 열린 이 천수연에선 3000명 정도의 각기 다른 민족 출신의 신하들을 불러모았다. 천수연에서 강희제는 이들 전직 재상들과 대신들, 원로 관리들과 함께 강희 시대의 성공과 완성을 자축하였다. 이후, 천수연은 손자인 건륭제도 여러 번 베푸는 등 궁중의 주요 행사가 되었다. 천수연을 베푼 강희제는 곧 병에 걸렸고, 황위를 노리는 황자들은 이를 호기로 삼아 점점 세력을 확장하였다. 얼마 뒤인 1722년(강희 61년) 12월 20일에 이궁인 창춘원(暢春園)에서 붕어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69세였다.
강희제의 정식 사인은 오한과 호흡 곤란이라 하나, 일설에 따르면 강희제의 병세는 그리 심하지 않았고 며칠 뒤에 돌연사했다 하여, 여전히 강희제의 죽음에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강희제 붕어 당시 강희제를 모신 신하가 야심 많은 4남 윤진의 휘하이자 자신의 외사촌동생이며 자신의 세 번째 황후인 효의인황후의 동생 구문제독 겸 보군통령 융과다(隆科多)라는 점으로 강희제가 윤진의 사주로 융과다에게 독살당하였다는 설도 있다. 본래 융과다는 8남 윤사의 수하였으나 윤진의 설득과 매수로 결국 윤진의 수하로 들어갔다.
능호는 경릉(景陵)으로 부황 순치제의 황릉인 효릉(孝陵) 옆에 있으며, 청동릉(淸東陵)의 하나이다. 묘호는 성인의 뜻으로 국가를 다스려 진정으로 통일시킨 큰 업적이 있는 황제라 하여 성조(聖祖), 시호는 생전에 강희제가 인과 덕을 중시한 것을 따 인황제(仁皇帝)로 명명하였다. 정식 시호는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로 이 긴 시호에서도 그의 업적을 확인할 수 있다. ‘합천’(合天)은 분열된 천하를 다시 통일시켰다는 뜻이고 ‘홍운’(弘運)은 국운을 크게 넓혔다는 뜻이다. ‘문무’(文武) 역시 나라의 기틀을 잡고 문과 무를 고루 이용하여 전성기를 이룩한 황제에게 올리는 시호로 나라를 세운 개국 황제에게 올려지는 ‘고’(高) 자와 더불어 황제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시호이며 그리고 ‘중화’(中和)와 ‘대성’(大成)은 청나라를 중흥시켜서 나라를 더욱 번창시키고 여러 민족을 하나로 모아 크게 이루었다는 뜻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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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의 붕어 이후에도, 황자들의 황위 다툼은 계속되었고 8남 윤사와 14남 윤제는 강희제의 붕어와는 상관없이 각기 자신이 황위에 오르려 하고 군대 동원을 명령하는 등 갖가지 수단을 부렸다. 강희제 붕어 당시, 강희제는 ‘4’자를 희미하게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강희제 붕어 후, 8황자 염친왕 윤사, 9황자 혁군왕 윤당, 10황자 돈군왕 윤아 등은 훗날 목숨이 위태로울까 봐 그들의 넷째 형 윤진이 황위에 오르는 것에 절대 반대하여 그 대안으로 역시 ‘4’자가 붙어 있는 14황자 순군왕 윤제를 후계자로 우겼으나 강희제의 전위 조서에는 후계자가 4남 윤진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당시 강희제의 유조의 내용 중 황위 승계에 대한 내용을 보면 이렇다.
“ | 제4황자 옹친왕 윤진은 인품이 귀중하고 사려가 깊으니 짐이 생각하건대 필히 대통을 이을 자격을 갖추었다. 고로 짐이 죽은 후 짐의 뒤를 이어 즉시 황제의 자리를 잇도록 하고 예법에 따라 상복을 입다가 27일에 평복으로 갈아입고 새 황제의 즉위를 만천하에 알려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알게 하라. | ” |
그리고 4황자 옹친왕 윤진은 유조에 쓰여 있는대로 황위에 오를 명분을 세우고 자신의 이복동생이자 강희제의 13남 패륵 윤상에게 원래 윤사의 파가 장악하고 있는 북경 근교의 풍대병영의 군사를 포섭·동원하도록 명령하고 이 군사들을 동원해 반대 세력을 모두 제거하고 황위에 오르니, 이가 청의 제5대 황제인 옹정제이다. 그러나 옹정제가 황제에 오른 이유는 유조개위설, 개조찬위설, 무조탄위설 등 여러 설로 나뉘어져 있는데, 일단 당시 강희제는 황위를 물려주려면 당사자인 옹정제를 직접 불러서 황위를 넘긴다는 얘기를 했어야 하나 옹정제나 다른 황자들 및 중신들에게 말하지 않고 곁에 있던 융과다에게만 말을 하였다 한다. 또한 만약 옹정제를 후계자로 점찍었다면 옹정제에게 황위를 잘 부탁한다는 얘기를 하기는커녕 자신의 병세에 대해서만 얘기를 하였다. 다른 유명한 가설로는 옹정제의 명령으로 융과다가 강희제가 원래 점찍어 놓은 ‘14황자 윤제에게 물려준다’(傳位十四皇子) 대신 ‘4황자 윤진에게 물려준다’(傳位于四皇子)라고 교묘히 바꾸고 조작된 이 유조를 공포하여 황위에 올랐다는 설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가설일 뿐이며 정확히 황제에 오르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통치 철학과 사상
강희제는 유교적 사상으로 국가를 통치하려 하였다. 아버지 순치제와 아들 옹정제가 만주족이 믿던 불교, 즉 라마교를 중요시하였다면 강희제는 오히려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더욱 중시, 즉 숭유억불을 국시로 삼았는데 그 방식은 청나라 이전에 중국을 다스린 한족 출신의 황제와 그 통치 이념이 비슷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도 불교를 믿어 불교를 그리 심하게 탄압하지는 않았다. 강희제는 군주가 모범을 보여야 백성이 군주를 믿고 따를 것이라 하여 백성을 위해 헌신하는 이른바 ‘섬기는 리더십’을 자신의 통치 철학으로 삼았다. 삼국 시대 때 촉한의 승상 제갈량의 후출사표의 한 구절인 ‘국궁진력’(鞠窮盡力), 즉 ‘모든 것을 쏟아 붇는다’와 국궁진력한 후 ‘안거낙업’(安居樂業), 즉 ‘백성을 편안하게 살게 해주고 즐겁게 일에 종사하게 해준다’를 자신의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은 것이 좋은 본보기이다. 유교적 사상을 중시한 강희제는 백성들에게 언제나 효를 중시하여 백성에게 유교 지침서를 내렸고 아버지 순치제와 어머니 효강장황후가 떠난 후 자신의 양육을 책임진 조모 효장태황태후를 모시는 데에도 부족함이 없이 효도를 다하려 노력하였다. 효장태황태후는 1688년(강희 27년)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희제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손자인 강희제와 증손자들인 황자들에게 큰 존중을 받았다. 또한 강희제는 인(仁), 덕(德), 예(禮) 중심의 인자한 정치를 펼치고 되도록 과격한 정치를 펴지 않으려 주력하였다. 강희제는 본래 명나라 홍무제가 만들고 순치제가 바꾼 〈육유(六諭)〉를 확대한 〈성유십육조(聖諭十六條)〉를 1667년(강희 6년)에 반포한 뒤 백성들에게 이 내용을 토론하고 실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강희제의 뒤를 이은 넷째 아들 옹정제는 성유십육조의 매 조마다 친히 설명을 붙이고 그 의의를 보다 알기 쉽게 해설한 〈성유광훈(聖諭廣訓)〉을 편찬하여 전국에 반포하여, 유교통치이념을 더욱 굳건히 하였다.
강희제는 강화된 황권으로 거의 황제 중심의 독단적으로 나라를 이끌어 갔기에 자칫 전제 독재의 가능성이 보일 수도 있었으나, 스스로 황권을 조절하고 정치의 일부는 재상들이나 대신들과 의논하였으며 당시 궁핍하게 살고 있는 한족들의 사정을 잘 알고 있던 한족 대신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정책을 실행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이런 강희제의 인자한 정치는 한족이 만주족의 청나라를 지지하게 만드는 데에 크게 일조하였다. 1717년(강희 56년) 강희제는 〈고별상유〉(告別上諭), 즉 마지막으로 백성들에게 바치는 글을 남겼는데 강희제는 “한 가지 일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온 천하에 근심을 끼치고, 한 순간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천추만대에 우환거리를 남긴다.”라고 역설하였다. 또한 “제왕이 천하를 다스림에 능력이 있는 자를 가까이 두고, 백성들의 세금을 낮추어 주어야 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고, 위태로움이 생기기 전에 나라를 보호하며, 혼란이 있기 전에 이를 먼저 파악하여 잘 다스리고, 관대하고 엄격함의 조화를 이루어 나라를 위한 계책을 도모해야 한다.”라고 후대의 황제에게도 이를 훈계하였다. 강희제는 황제로서 자식과 같은 백성들에게 이런 당부의 말을 남겨 황제로서의 도리를 다하려 하였다.
강희제는 자신에게 올려지는 상소문과 보고서, 비망록 등 하루에 무려 300개에서 400개의 문서들을 모두 보고 그것을 결재하고 일일이 그 상소에 대한 비답도 적어주었는데, 심지어는 전시에도 하루에 200개 이상에 문서들을 결재하였고 정무에 대한 엄청난 정력을 보여주었다. 삼번의 난 때에는 무려 하루에 500여 개의 문서들을 본 뒤 다 처리하고 때로는 밤을 새울 때도 많았다 한다. 학식이 높은 황제의 적절한 대안은 성지가 내려오는 즉시 수행되었고, 그로 인해 백성들은 살기 편안해졌다. 그의 학식은 경연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는데 그의 학식과 논리정연한 질문을 듣고 경연에 참가한 재상들과 대신들이 모두 대답을 제대로 못하였다 하며, 수학 등 서양 학문까지 습득한 강희제는 더욱 학식이 풍부해져서 당시 그가 습득한 학식은 당시 루이 14세 치하 프랑스 왕족들의 평균 학식보다 훨씬 우월하였다고 평하기도 한다. 만주족과 한족의 구별을 없애려 하였듯이 선교사들에게도 큰 호의를 베풀어준 강희제는 남방 순행에도 선교사들을 대동하고 떠났다.
이렇게 만주족으로서 중국의 사상, 즉 한족의 사상인 유교에 적극적이었던 강희제였으나 만주족으로서의 근본도 잊지 않았다. 그는 유교를 숭상하였으나 독실한 불교 신자이기도 하였다. 강희제는 엄청난 양의 정무의 스트레스를 타파하기 위해 자주 사냥에 나갔으며 피서산장 근처의 황실 사냥터에서 대신들과 외국 사신들에게 자신의 사냥 솜씨를 마음껏 뽐내어 자신이 정무에만 시달리는 문약한 군주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그가 몽골에 친히 원정을 간 것 역시 그의 강건함을 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 강희제는 노년기에 스스로 자신이 셀 수 없이 많은 사냥감을 잡았다 하였는데, 실제로 강희제는 강궁을 자유자재로 다룰 만큼 활의 명수였다. 그는 노년기에 자신이 평생동안 사냥해서 잡은 맹수들을 열거하기를 호랑이 135마리, 멧돼지 132마리, 늑대 96마리, 표범 25마리, 곰 20마리, 그리고 원숭이 10마리를 잡았다 한다. 또한 하루에 토끼 310마리를 잡았으며 꿩, 너구리, 사슴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잡았다고 전한다. 강희제는 문(文)과 무(武)를 모두 중시하고 문이 필요할 땐 문사를, 무가 더 필요할 땐 무사를 더 썼지만 언제나 힘의 균형을 잃지 않게 하였다. 이렇게 그는 한쪽에만 치우침이 없이 고루 그에 걸맞는 인재들을 등용하였기에 태평성대를 이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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