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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48 (당나라 4 : 고선지 장군) 본문
중국의 역사 48 (당나라 4 : 고선지 장군)
고선지(高仙芝)장군은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태어나 오로지 자신의 탁월한 능력만으로 중국 당나라 현종 시절 군대의 총사령관이 된 전설적인 명장이다. 망국의 고구려 유민이라는 차별대우 속에서도 출중한 지략과 뛰어난 통솔력을 발휘하여 중앙아시아를 석권하고 실크로드를 개척했던 위대한 장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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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로 본 중국 서역의 안서도호부. |
비록 당나라에서 태어나 당나라 장수로 활약했지만, 어디까지나 고구려의 피를 물려받은 고구려인이었으며 자랑스러운 우리의 선조인 것이다. 고선지장군이 억울하게 죽은 까닭도 당나라에 적대했던 이민족, 특히 고구려 출신이라는 사실이 아니었을까. 모함을 받아 원통하게 처형되었지만 사서가 전하는 그의 훌륭한 인품과 '유럽 문명의 아버지'로도 평가받고 있는 위대한 업적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을 것으로 본다.
고선지장군은 고구려가 망한 지 30년이 지난 서기 695년~700년 무렵에 당나라에서 태어났다. 구당서와 신당서에 그의 전기가 실려 있으며 자치통감 등에도 그의 활약상을 전해주고 있지만 그의 사망 시기만 나올 뿐, 그가 정확하게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은 없다. 먼저 고선지에 관한 초기의 기록은 <구당서 고선지전>에 나와 있다.
'고선지는 본래 고구려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는 사계(舍鷄)다. 처음에는 하서군에 종군했는데 공을 쌓아 사진장군, 제위장군이 되었으며 그는 외모가 사나이답고 건장할 뿐 아니라 기마술과 궁술에 능했다. 또한 용감한데다가 과단성도 뛰어났다.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라 안서에 이르렀는데, 그곳에서 아버지의 공로로 유격장군이 되었다. 나이 20여세가 되어 장군에 제수되어 아버지와 벼슬이 같게 되었다. 그러나 절도사 전인완과 개가운 밑에 있을 때에는 큰 벼슬을 하지 못했다. 뒤어 부몽영찰이 여러차례 발탁하여 파격적 승진을 거듭했다. 개원 말기에 안서도호부, 사진도병마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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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사막을 가고 있는 낙타의 행렬. |
고구려가 668년에 멸망했는데 그 이듬해에 당나라가 고구려의 유민들을 산동성과 영주 지방으로 강제 이주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고선지장군이 억울하게 처형당한 해가 중국의 사서들은 모두 755년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당시 그의 나이가 55세 정도로 추측되고 있다. 또한, 고선지장군의 성은 고구려 왕족과 같은 고씨이다, 그의 아버지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무인으로 고구려 왕족의 후예로 짐작되는 것이다.
아버지 고사계는 본래 고구려의 유민으로서 당나라에 끌려온 포로였으나 실력이 뛰어난 무인으로서 하서군에서 당나라를 침범하는 서강족을 막다가 실크로드의 서쪽 끝 지역, 오늘의 신강성 고차현인 안서도호부로 재배치되었는데, 당시 안서도호부의 치소는 실크로드의 중요한 거점이었던 것이다. 고선지장군은 이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다가 아버지 고사계를 따라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워 20세 전후에 유격장군으로 전격 발탁된 듯하며, 그때부터 군인으로서 입신양명한 것으로 보인다.
고선지 장군이 1만명의 원정군을 이끌고 '세계의 지붕'이라고 부르는 파미르 고원과 힌두쿠시 산맥의 험로를 넘어 기적 같은 100일간의 강행군을 감행했을 때인데, 기록에 따르면 고차를 출발, 15일 뒤에 발환성에 다다랐고, 다시 10일 뒤에 악비덕을 지났으며 다시 10일간의 행군 끝에 오늘의 카슈가르인 소륵에 이르렀으며, 20일 뒤에는 총령수착을 지나고, 또 20일 뒤에는 파미르 고원의 최고지점을 통과하여 파밀천에 이르렀다. 그리고 다시 20일의 강행군을 하여 특륵만천을 건너 파미르 고원의 남단이며 오늘의 타자키스탄의 영토인 오식닉국에 이르렀으니 100일 동안 3000리에 이르는 험로를 돌파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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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산산맥을 배경으로 끝없는 가고 있는 열차의 행렬. |
고선지 장군은 연운보를 점령한 뒤 다시 카라코람 산맥을 넘어 소발률국(길기트) 원정을 단행했다. 이 원정은 해발 4천 6백 94미터나 되는 험준한 탄구령을 타넘어야 하는 고행과도 같은 강행군이었다. 이 원정 또한 용감했던 고구려 무인의 피를 이어받은 고선지장군의 탁월한 전략과 전술, 무서운 투지와 과단성이 없었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이 연운보전투 승리와 소발률국 원정 성공에 힘입어 당나라는 그동안 토번에게 빼앗겼던 서역의 종주권을 되찾았고, 동서간의 교역로인 실크로드를 다시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원정의 성공에 따라 고선지장군의 역사적 위상이 당나라의 장수에서 세계사적인 인물로 격상되었던 것이다.
영국의 저명한 고고학자이자 탐험가인 오웬 스타인도 고선지 장군이 1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카라코람 산맥을 넘어 소발률국을 원정한 일을 가리켜, "한니발과 나폴레옹이 알프스 산맥을 넘은 것보다도 더욱 위대한 전술적 모험이었다."고 찬탄했다 한다.
결국 고선지장군의 전공은 원정군에 감군 자격으로 종군했던 환관 변영성이 황제에게 자초지종을 그대로 상주하여 모든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져 이에 따라 현종은 고선지장군에게 홍로경어사중승의 벼슬을 내리는 한편, 부몽영찰을 조정으로 불러들이고 고선지를 안서사진절도사로 삼았던 것이다.
현종은 또 고선지의 전공을 치하하여 장안의 저택 두 채도 상으로 내렸다 한다. 고선지장군이 맡은 안서사진절도사는 휘하 병력이 2만 4천명으로 당나라 서쪽 끝 지역의 군사, 행정의 총책임을 지는 자리였다. 이로써 고선지는 망국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태어나 온갖 멸시와 차별대우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탁월한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당 제국 군대의 최고 사령관에 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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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서 시가지의 네거리 비천여인 조각상의 모습. |
고선지가 안서절도사로 재임할 무렵은 당 제국의 전성기였고, 당에서 서역으로 통하는 실크로드를 장악하고 있던 고선지장군은 실질적인 중앙아시아의 총독과 마찬가지였다. 그는 또 한차례 군대를 이끌고 파미르 지역의 지배권 탈환을 시도하는 토번의 기도를 좌절시켰다. 이로써 당은 타림분지 전역, 천산산맥 북쪽에서 아랄해 동쪽, 파미르고원의 아프가니스탄 지역 동쪽, 인도 북부 카슈미르 지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런 공로를 높이 산 현종은 고선지에게 특진겸좌금오대장군동정원이란 벼슬을, 고선지의 아들에게는 5품관 벼슬을 특별히 내렸던 것이다.
4년이 지난 뒤 고선지장군은 밀운군공으로 봉해졌는데 밀운군은 현재 북경 북쪽지역인데, 전에 고구려 유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킨 곳 가운데 하나였다.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선지장군은 토벌군 부원수로 재기용되었다.
반란군에 의해 낙양이 함락되고 수도 장안이 위태롭게 되자 고선지는 섬주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동관으로 후퇴했는데 환관 변영성이 황제에게 고선지장군을 음해 모함하는 바람에 이에 노한 현종은 반란군이 눈앞에 닥쳤음에도 불구하고 고선지와 봉상청을 모두 참수형에 처하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고구려인의 기개를 세계에 떨친 일세의 명장 고선지장군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고선지장군은 노예와 마찬가지 신분이었던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태어나 부당한 차별대우를 받으면서도 자신의 탁월한 지략과 담력으로 최고 사령관에 올랐다. 또한 세계의 지붕을 넘어 서역 원정에 성공하고, 동서 문명간의 교류를 이끌어냄으로써 세계사를 바꾼 명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단순히 당나라의 무장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고구려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랑스러운 고구려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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