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중국의 역사 46 (당나라 2 : 역대 황제) 본문
중국의 역사 46 (당나라 2 : 역대 황제)
역대 황제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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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덕명황제 (德明皇帝) (당 고조 추숭) |
고도(皋陶) | - | - |
- | - | 선천태상황제 (先天太上皇帝) (당 현종 추숭) |
이경(李敬) | - | - |
- | 당 성조 (唐聖祖) (당 현종 추숭) |
고상대광도금궐 현원태상천황대제 (高上大廣道金闕 玄元太上天皇大帝) |
이이(李耳) | - | - |
- | - | 흥성황제 (興聖皇帝) (당 고조 추숭) |
이고(李暠) | - | - |
- | 당 헌조 (唐獻祖) (당 고조 추숭) |
선황제 (宣皇帝) |
이희(李熙) | - | - |
- | 당 의조 (唐懿祖) (당 고조 추숭) |
광황제 (光皇帝) |
이천석(李天錫) | - | - |
- | 당 태조 (唐太祖) (당 고조 추숭) |
경황제 (景皇帝) |
이호(李虎) | - | - |
- | 당 세조 (唐世祖) (당 고조 추숭) |
원황제 (元皇帝) |
이병(李昞) | - | - |
제1대 | 당 고조 (唐高祖) |
신요대성대광효황제 (神堯大聖大光孝皇帝) |
이연(李淵) | 무덕(武德) 618년 ~ 626년 | 618년 ~ 626년 |
제2대 | 당 태종 (唐太宗) |
문무대성대광효황제 (文武大聖大廣孝皇帝) |
이세민(李世民) | 정관(貞觀) 627년 ~ 649년 | 626년 ~ 649년 |
제3대 | 당 고종 (唐高宗) |
천황대성대홍효황제 (天皇大聖大弘孝皇帝) |
이치(李治) | 영휘(永徽) 650년 ~ 655년 현경(顯慶) 656년 ~ 661년 용삭(龍朔) 661년 ~ 663년 인덕(麟德) 664년 ~ 665년 건봉(乾封) 666년 ~ 668년 총장(總章) 668년 ~ 670년 함형(咸亨) 670년 ~ 674년 상원(上元) 674년 ~ 676년 의봉(儀鳳) 676년 ~ 679년 조로(調露) 679년 ~ 680년 영륭(永隆) 680년 ~ 681년 개요(開耀) 681년 ~ 682년 영순(永淳) 682년 ~ 683년 홍도(弘道) 683년 |
649년 ~ 683년 |
- | 당 의종 (唐義宗) (당 중종 추숭) |
효경황제 (孝敬皇帝) |
이홍(李弘) | - | - |
제4대 | 당 중종 (唐中宗) |
대화대성대소효황제 (大和大聖大昭孝皇帝) |
이현(李顯) | 사성(嗣聖) 684년 | 684년 |
제5대 | 당 예종 (唐睿宗) |
현진대성대흥효황제 (顯眞大聖大興孝皇帝) |
이단(李旦) | 문명(文明) 684년 광택(光宅) 684년 수공(垂拱) 685년 ~ 688년 영창(永昌) 689년 재초(載初) 689년 ~ 690년 |
684년 ~ 690년 |
690년에서 705년까지는 측천무후가 무주의 황제로서 통치함.
당나라 황제와 연호 2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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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복위) |
당 중종 (唐中宗) |
대화대성대소효황제 (大和大聖大昭孝皇帝) |
이현(李顯) | 신룡(神龍) 705년 ~ 707년 경룡(景龍) 707년 ~ 710년 |
705년 ~ 710년 |
임시 | - | 상황제 (殤皇帝) (소황제<少皇帝>) |
이중무(李重茂) | 당융(唐隆) 710년 | 710년 |
제5대 (복위) |
당 예종 (唐睿宗) |
현진대성대흥효황제 (玄眞大聖大興孝皇帝) |
이단(李旦) | 경운(景雲) 710년 ~ 712년 태극(太極) 712년 연화(延和) 712년 |
710년 ~ 712년 |
- | - | 양황제 (讓皇帝) (당 현종 추숭) |
이헌(李憲) | - | - |
제6대 | 당 현종 (唐玄宗) |
지도대성대명효황제 (至道大聖大明孝皇帝) |
이융기(李隆基) | 선천(先天) 712년 ~ 713년 개원(開元) 713년 ~ 741년 천보(天寶) 742년 ~ 756년 |
712년 ~ 756년 |
- | - | 봉천황제 (奉天皇帝) (당 숙종 추숭) |
이종(李琮) | - | - |
제7대 | 당 숙종 (唐肅宗) |
문명무덕대성대선효황제 (文明武德大聖大宣孝皇帝) |
이형(李亨) | 지덕(至德) 756년 ~ 758년 건원(乾元) 758년 ~ 760년 상원(上元) 760년 ~ 762년 |
756년 ~ 762년 |
- | - | 승천황제 (承天皇帝) (당 대종 추숭) |
이담(李倓) | - | - |
임시 | - | 광무왕 (廣武王) |
이승굉(李承宏) | - | 762년 |
제8대 | 당 대종 (唐代宗) |
예문효무황제 (睿文孝武皇帝) |
이예(李豫) | 보응(寶應) 762년 ~ 763년 광덕(廣德) 763년 ~ 764년 영태(永泰) 765년 대력(大歷) 766년 ~ 779년 |
762년 ~ 779년 |
제9대 | 당 덕종 (唐德宗) |
신무효문황제 (神武孝文皇帝) |
이괄(李適) | 건중(建中) 780년 ~ 783년 흥원(興元) 784년 정원(貞元) 785년 ~ 805년 |
779년 ~ 805년 |
제10대 | 당 순종 (唐順宗) |
지덕대성대안효황제 (至德大聖大安孝皇帝) |
이송(李誦) | 영정(永貞) 805년 | 804년 ~ 805년 |
제11대 | 당 헌종 (唐憲宗) |
소문장무대성지신효황제 (昭文章武大聖至神孝皇帝) |
이순(李純) | 원화(元和) 806년 ~ 820년 | 805년 ~ 820년 |
제12대 | 당 목종 (唐穆宗) |
예성문혜효황제 (睿聖文惠孝皇帝) |
이항(李恆) | 장경(長慶) 821년 ~ 824년 | 820년 ~ 824년 |
제13대 | 당 경종 (唐敬宗) |
예무소민효황제 (睿武昭愍孝皇帝) |
이심(李湛) | 보력(寶曆) 825년 ~ 826년 | 824년 ~ 826년 |
임시 | - | 강왕 (絳王) |
이오(李悟) | - | 826년 |
제14대 | 당 문종 (唐文宗) |
원성소헌효황제 (元聖昭獻孝皇帝) |
이앙(李昻) | 대화(大和) 827년 ~ 835년 개성(開成) 836년 ~ 840년 |
826년 ~ 840년 |
제15대 | 당 무종 (唐武宗) |
지도소숙효황제 (至道昭肅孝皇帝) |
이염(李炎) | 회창(會昌) 841년 ~ 846년 | 840년 ~ 846년 |
제16대 | 당 선종 (唐宣宗) |
원성지명성무헌문예지 장인신총의도대효황제 (元聖至明成武獻文睿智 章仁神聰懿道大孝皇帝) (성무헌문효황제 <聖武獻文孝皇帝>) |
이침(李忱) | 대중(大中) 847년 ~ 859년 | 846년 ~ 859년 |
제17대 | 당 의종 (唐懿宗) |
소성공혜효황제 (昭聖恭惠孝皇帝) |
이최(李漼) | 함통(咸通) 860년 ~ 873년 | 859년 ~ 873년 |
제18대 | 당 희종 (唐僖宗) |
혜성공정효황제 (惠聖恭定孝皇帝) |
이현(李儇) | 건부(乾符) 874년 ~ 879년 광명(廣明) 880년 중화(中和) 881년 ~ 884년 광계(光啓) 885년 ~ 887년 문덕(文德) 888년 |
873년 ~ 888년 |
임시 | - | 폐황제 (廢皇帝) |
이온(李熅) | - | 886년 |
제19대 | 당 소종 (唐昭宗) (당 양종<唐襄宗>) |
성목경문효황제 (聖穆景文孝皇帝) |
이엽(李曄) | 용기(龍紀) 889년 대순(大順) 890년 ~ 891년 경복(景福) 892년 ~ 893년 건녕(乾寧) 894년 ~ 897년 광화(光化) 898년 ~ 900년 |
888년 ~ 900년 |
임시 | - | 성황제 (成皇帝) (덕왕<德王>) |
이유(李裕) | - | 900년 ~ 901년 |
제19대 (복위) |
당 소종 (唐昭宗) (당 양종<唐襄宗>) |
성목경문효황제 (聖穆景文孝皇帝) |
이엽(李曄) | 천복(天復) 901년 ~ 903년 | 901년 ~ 903년 |
제20대 | 당 애종 (唐哀宗) (당 경종<唐景宗>) |
소선광렬애효황제 (昭宣光烈哀孝皇帝) |
이축(李柷) | 천우(天祐) 904년 ~ 907년 | 904년 ~ 907년 |
당 태종 이세민(唐太宗 李世民, 599년: 개황(開皇) 19년 1월 23일 ~ 649년: 정관(貞觀) 23년 7월 10일)은 중국 당나라의 제2대 황제이며 당 고조 이연의 차남이다. 이름인 '세민'의 본래 뜻은 제세안민(濟世安民), 즉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는 뜻이다. 그는 실제로 뛰어난 장군이자, 정치가, 전략가, 그리고 서예가이기까지 했으며, 중국 역대 황제 중 최고의 성군으로 불리어 청나라의 강희제와도 줄곧 비교된다. 그가 다스린 시대를 정관의 치라 했다.
당 태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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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 626년 ~ 649년 |
황후 | 문덕황후 |
부황 | 고조 |
모후 | 태목황후 |
이전 황제 | 고조 |
다음 황제 | 고종 |
초기 생애
이세민은 개황 19년 (599년)에 당국공 이연(李淵)과 그 처 두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614년에는 장손씨와 혼인을 올렸고, 617년 수 양제 양광의 고구려 원정과 엄청난 대토목 공사로 이미 피폐해진 수나라 각지에서 반란군이 일어났으며, 이연 역시 여기에 가담, 봉기했다.
그리하여 아버지를 모시고, 수의 수도 장안으로 진격해서 장안을 손에 넣고, 때마침 양광마저 강도에서 그의 시위장이자 우문술의 아들인 우문화급(宇文化及)과 우문지급(宇文智及) 형제에게 암살되자, 이연은 당의 황제의 위에 오르고, 이세민을 진왕(秦王)에 봉했다.
뒤이어, 반란을 일으킨 여러 호족과 귀족들이 당에 충성을 바치지 않자, 이세민은 그들을 격파하러 출병했다. 반역 호족은 왕세충, 두건덕, 설인고, 유무주 등이었는데, 이세민은 이들에게 단 한번도 패하지 않고 모두 제거하여, 아버지인 당 고조 이연에게 천책상장(天策上將), 즉 하늘이 내린 장수라는 별호를 얻었다.
현무문의 변
이후, 이세민의 권세는 점점 커졌고, 인기 또한 높아졌다. 이것을 불안하게 여긴 형 황태자 이건성과 막내동생 제왕(齊王) 이원길은 이세민을 죽일 모책을 세우고, 급히 자신들 계파의 대신들을 불렀다. 이건성파 중에는, 위징(魏徵), 왕규, 배적(裵寂) 등이 있어, 이세민 제거 작전을 세운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챈 이세민은 처남 장손무기(長孫無忌)와 장군 이정(李靖), 이세적(徐世勣) 등을 이용해, 도리어 역으로 그들을 이용하려 했다.
626년 7월 2일, 이세민은 부황 이연에게, 형제들이 자기를 죽이려 모함한다 아뢰었고, 이연은 그들을 장안의 궁성으로 불렀다. 그들이 궁성의 현무문으로 들어온 순간, 매복한 이세민의 군사들이 이건성과 이원길에게 화살을 쐈고, 그 자리에서 그들은 살해당한다.
이것이 바로 '현무문의 변'이다. 3일 뒤에 이연은 할 수 없이 이세민을 황태자로 삼고, 2개월 뒤에 그에게 양위하였다. 이에 이세민이 9월 4일에 황제에 올랐으며, 이듬해에 연호를 정관(貞觀)이라 하니, 이가 바로 당나라 제2대 황제인 태종이다.
이세민은 황제에 오르고 나서, 농민들에게 균등히 토지를 나누어 주어서, 조·용·조 제도로 세금을 걷었다. 이 제도는 토지를 받은 사람을 국가에 곡물을 바치고, 1년 중 20일을 국가를 위해 일하며, 직물 등도 바침으로서, 국가는 풍족해졌으며, 민생은 안정되었다. 이세민은 형 이건성의 편에 있던 위징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고, 위징은 명재상이 되어, 중국을 안정시켰다.
또한,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인재를 양성했고, 군사제도는 징병제로 택하였다. 이렇게 많은 인재를 등용시킨 당나라는 나날이 번창해져 갔으며, 백성들도 더더욱 이세민을 우러러 보았다. 또한, 이세민은 아무리 적의 밑에서 일했던 장수라 할지라도 능력이 뛰어나면 무슨 일을 해서라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세민은 아무리 신하들이 자기에게 독설을 퍼부어도, 역정을 내지 않고 그 간언을 잘 받아들여 언제나 국가와 백성들을 위해 좋은 정책을 만들 수 있었다.
630년에 이세민은 동돌궐을 정벌하여, 천가한(天可汗), 즉 천하의 칸 중의 칸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중앙 아시아도 정복해, 당의 영토를 전 황조 수의 2배로 넓혔다.
이세민의 고구려 원정
644년 6월 당은 고구려의 요동 공격을 명령한 후 11월 수륙 양면으로 약 3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해 공격을 시작했다. 이때 당군은 각종 공성용(攻城用) 기구를 총동원했다. 당 태종은 다음해 2월에 뤄양(洛陽)을 출발하여 직접 원정길에 올랐다. 요동에 진입한 이세적(李世勣)의 군대는 개모성(蓋牟城)을 함락시키고, 장량(張亮)의 수군은 비사성(卑沙城)을 함락시켰다. 태종이 직접 독려하는 가운데 645년 5월에는 요동성까지 함락시킨 뒤 백암성(白巖城)을 공격했다.
백암성이 6월에 함락되자 태종은 안시성이 연개소문의 정변 때도 안시성 성주(양만춘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가 복종하지 않아 공격을 받았으나, 항복시키지 못한 점을 들어 우회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보급로가 차단될 것을 염려한 이세적의 건의를 받아들여 안시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고구려의 중앙정부에서는 고연수(高延壽), 고혜진(高惠眞)의 지휘 아래 말갈군을 포함하여 15만 명의 군사를 내어 안시성 구원을 위해 출동시켰으나 당군의 작전에 말려들어 고전 끝에 항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립된 안시성의 저항이 완강하자 이세적은 태종에게 성이 함락되면 남자를 모두 구덩이에 파묻겠다고 했다. 포위공격이 성과가 없자 당의 장군들은 동남쪽에 있는 오골성(烏骨城)을 먼저 치고 곧바로 평양으로 직공하자고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태종의 손자 무기(無忌)가 오골성을 공격할 때 후방에서 안시성의 고구려군이 역공할 가능성이 있다며 반대하자 이를 받아들여 계속 안시성을 공격했다. 하루에도 6~7차례에 걸쳐 당군의 공격이 계속되었고 포거(抛車:투석기)가 날린 돌에 성벽이 무너지면 고구려군은 재빨리 목책(木柵)을 세워 방어했다. 당군은 성 동남쪽에 성과 같은 높이로 흙산을 쌓아 성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흙산이 거의 완성될 즈음에 갑자기 무너지면서 성벽을 무너뜨리자 고구려군은 재빨리 성벽 밖으로 나와 이를 점령하고, 나무를 쌓아 불을 지르니 당군은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태종은 책임자 부복애의 목을 베고 싸움을 독려하여 마지막 3일간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으나 끝내 실패했다. 안시성 전투에서 많은 병력을 잃은 당군은 뒤이어 쫓아온 연개소문에게 크게 패퇴하고, 태종은 결국 고구려 침공에서 얻은 병이 원인이 되어 사망하였다.
이후 이세민의 아들인 당 고종이 신라와 협공하여,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까지, 고구려는 8번에 걸친 당군의 원정을 막아냈다.
후계자와 최후
649년, 당 태종 이세민은 이 때, 이질을 앓고 있었다. 원래 그는 황태자 이승건이 있었으나 폐하고, 이후 4남 복왕 이태를 봉하였으나, 행실을 이유로, 역시 폐하였다. 그리하여, 9남 위진왕 이치를 황태자에 세웠다. 황태자 이치는 이후 당의 제3대 황제 당 고종이 되며, 대리 청정을 했다.
649년 7월 10일, 당 태종 이세민은 장안 함풍전에서 51세를 일기로 붕어했으며, 시호는 태종 문무대성대광효황제(太宗文武大聖大廣孝皇帝)이며, 능호는 소릉(昭陵)으로 지금의 섬서성 예천현에서 동북쪽으로 50리 떨어져 있는 산에 묻혔다.
황후와 후궁
- 문덕황후 장손씨 (文德皇后 長孫氏)
- 위귀비 (장손황후 사후 실질적인 내명부통솔)
- 서현비
- 양귀비 (수 양제의 딸)
- 음현비 (태종을 죽이려해 합장박탈)
- 연숙비 (무후시절엔 연태비)
- 양덕비 (동생 이원길의 처)
- 양덕비 (동명이인)
- 왕소의
- 무재인 (측천무후)
아들들
- 상산왕 폐황태자 이승건 <常山王 廢皇太子 李承建>
- 초왕 이관
- 오왕 이각
- 복왕 폐황태자 이태 <僕王廢皇太子 李泰>
- 폐서인 이우
- 촉왕 이음
- 장왕 이운
- 월왕 이정
- 진왕 이치 (당 고종) <晉王 李治>
- 기왕 이신
- 강상왕 이효
- 대왕 이간
- 조왕 이복
- 조왕 이명
딸들
- 양성공주 <量性公主>
- 여남공주 <麗濫公主>
- 문성공주 설안<文成公主說安>
- 남평공주 사희<南平公主四熙>
- 수안공주 <修安公主>
- 장락공주 <將樂公主>
- 예장공주 <藝章公主>
- 비경공주 <備景公主>
- 보안공주 <寶顔公主>
- 동양공주<童陽公主>
- 임천공주<任天公主>
- 청하공주<靑河公主>
- 난릉공주<暖凌公主>
- 진안공주<進安公主>
- 안강공주<岸鋼公主>
- 신흥공주<信興公主>
- 성양공주<省亮公主>
- 합보공주<合普公主>
- 금산공주<琴山公主>
- 진양공주 명달<眞洋公主明達>
- 상산공주<床山公主>
- 신성공주<新聖公主>
연호
당 고종 이치(唐高宗 李治, 628년: 정관(貞觀) 2년 7월 21일 ~ 683년: 홍도(弘道) 원년 12월 27일)는 중국 당나라의 제3대 황제이다. 당 태종 이세민의 9남이다. 모친은 문덕황후 장손씨이며, 자는 위선(爲善)이다.
4세에 진왕에 봉해졌고, 이후 큰형 이승건, 넷째 형 이태가 황태자에 올랐으나, 폐위되어, 적자 중 막내인 이치가 황태자에 올랐다. 그리고, 649년 7월 10일에 아버지 이세민이 죽자, 5일 뒤인 649년 7월 15일, 22세의 나이에 황제에 오르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정관의 치를 이끌었던 유능한 가신들을 옆에 두고, 대외적으로도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그리하여, 660년에 백제, 668년에 고구려 등 여러 나라를 멸망시켜, 당의 영토는 최대에 이르렀다.
그리고, 아버지의 재인이었던 무씨를 총애하여, 궁중의 소의까지 승격시켰다가, 무씨의 간악한 꾀로, 결국 무씨를 황후로 만들었다. 무씨는 황후가 되자, 이치의 외가인 장손씨 가문을 대역죄인으로 몰아, 주요 인물들을 가차없이 처형했으며, 이후로도, 자신에게 반대하는 신하들은 모두 죽여버리는 잔학한 면모를 보였다.
그후로, 이치가 병이 나자, 황후 무씨는 심지어, 정치를 대행하게 되었고, 누구 하나 막는 신하들이 없었다.
재위 34년째인, 683년 12월 27일, 당고종 이치는 56세의 나이로 붕어했으며, 건릉(乾陵)에 묻혔다. 시호는 고종 천황대성대홍효황제(高宗 天皇大聖大弘孝皇帝)이다.
황후와 후궁
- 폐황후 왕씨 (廢皇后王氏)
- 측천황후 무씨 (則天皇后 武氏)
- 폐숙비 소씨(廢淑妃蘇氏)
- 귀비 하란씨(貴妃賀蘭氏)(무측천의 조카,오빠 하란민지의 여동생)
- 한국부인 하란씨(韓國夫人賀蘭氏)(무측천의 언니,하란민월의 어머니)
- 첩여 서씨(婕妤 西氏) (당 태종과 현비 서씨의 여동생)
- 궁인 유씨(宮人柳氏)
- 궁인 양씨(宮人梁氏)
- 궁인 정씨(宮人鄭氏)
아들들
- 연왕 폐황태자 이충 <燕王廢皇太子 李忠>
- 원도왕 이효 <原悼王李孝>
- 택왕 이상금 <澤王李上金>
- 허왕 이소절 <許王李素節>
- 대왕 폐황태자 이홍 <代王 廢皇太子 李弘> (뒷날 의종 효경황제<義宗 孝敬皇帝>로 추숭)
- 노왕 폐황태자 이현 <潞王廢皇太子 李賢>
- 영왕 이현 (당 중종) <英王 李顯>
- 예왕 이단 (당 예종) <豫王 李旦>
딸들
- 의양공주 <義陽公主>
- 고안공주 <高安公主>
- 안정공주 <安定公主>
- 태평공주 영월 <太平公主令月>
측천무후(則天武后, 624년: 무덕(武德) 7년 1월 23일 ~ 705년: 이주(利州) 5년 11월 2일)는 당나라 고종 이치의 황후이며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여황제이다. 중국에서는 그녀를 무측천( 武則天)이라 부르기도 한다. 음탕하고 간악한 요녀(妖女)라는 비난과 민생을 보살펴서 나라를 훌륭히 다스린 여걸(女傑)이라는 칭송을 같이 받고 있다. 이름은 조(照)이고, 아명은 미랑(媚娘)이다. 황제로 즉위하자 자신의 이름을 조(曌)로 바꾸었다. 무사확(武士彠)의 차녀이다. 태어난 날짜는 정확하지 않고, 630년에 태어났다고 하는 설도 있다.
초기 생애
무조는 624년 1월 23일에 당의 이주(利州. 지금의 四川의 廣元)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무사확은 유명한 목재상인데, 수 양제 양광의 대토목 공사로 거부가 되었다. 617년 양광의 폭정 때문에 일어난 대반란에 당시 태원 유수 이연(李淵)과 같이 참전하여 얼마 뒤 당나라가 건국되자, 황제가 된 이연에게 태원군공 겸 이주도독이란 작위를 받았다. 620년에 무사확이 본처를 잃고, 양씨를 새로이 처로 맞이해, 세 딸을 낳으니 그중 둘째가 무조이다.
무조는 어릴 때부터 대담하였고, 말타기와 글읽기를 좋아하여 성격이 적극적이었다고 전해진다.
궁녀 시절
636년, 당 태종 이세민이 황후 장손씨를 잃자, 그 이듬해에 무조의 용모가 빼어나다는 얘기를 듣고 무조를 재인으로 삼았다. 이 때 그녀의 나이 겨우 14세였는데, 그녀는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인데다가, 애교를 부릴 줄 몰라 이세민의 총애를 받지 못했고 무조는 이세민이 죽을 때까지 12년 동안, 승은도 받지 못했다. 그렇게 649년에 이세민이 사망하고, 9남인 이치가 황제에 올라 고종이 되었다.
그리고 무조는 선제의 후궁은 비구니가 되어야 하다는 법도에 따라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감업사에 들어갔다. 이치는 태자일 때, 부황 이세민을 간호하던 무조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그녀에게 반했다.
이치는 분향차 감업사에 들렀는데, 거기서 무조를 본 순간 또다시 옛정이 떠올라 결국, 그녀를 데리고 황궁으로 들어갔다.
재입궁과 암투, 그리고 황후
무조가 황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로는 이치의 황후인 왕씨의 도움이 컸다. 왕씨는 이치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소숙비를 질시했는데, 그런 그의 마음을 소숙비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무조를 불러들이라 이치에게 부추겼다. 그러나 이것은 여우를 잡기 위해 범을 불러들인 격이 되었다.
무조는 이치와의 사이에서 모두 4남 2녀의 자녀를 낳아 이치의 사랑을 차지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황후 왕씨와 결탁하여 소숙비를 폐출시켰다. 이리하여 무조는 비(妃)가 되었다. 하지만, 야심만만했던 무조는 왕씨에 반대하던 사람들을 끌어모았고, 그들을 이용하여 황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였다.
무조는 어느날 딸을 낳았는데, 그 딸을 황후 왕씨가 매우 좋아하였다. 하루는, 왕씨가 무조의 딸을 보고간 후, 무조는 자신의 손으로 딸을 목졸라 죽여버렸다. 그리고 딸의 시신을 이불로 덮어두었다.
이 때, 고종 이치가 들어와 딸을 보러 왔다가 죽어있는 것을 확인하자, 무조는 이 모든 것이 황후의 소행이라 모함하였다. 이에 이치는 황후 왕씨를 폐서인시키고, 무조를 황후로 삼으니, 이 때가 654년 10월 13일이었다.
무조는 황후가 되고 나서도 왕씨와 소숙비를 가만 놔두지 않았고, 그녀들에게 곤장 백 대를 치고 다리를 잘라, 술 항아리에 가두어 죽어가게 하였다고 한다.
비정한 어머니
황후 무씨는 가장 먼저 고종 이치의 외숙부이자, 승상인 장손무기를 자살시키도록 강요했다. 또한, 장손씨 일가를 모조리 몰살시켜버렸다. 656년, 무씨는 황태자였던 이충에게 여러 죄를 뒤집어씌우고 폐위시켰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신의 장남 이홍을 앉혔다.
이런 그녀의 전횡을 보다 못한 이치가 대신들을 은밀히 불러 무씨의 폐위를 의논하였으나, 무씨의 심복들이 그 사실을 알고 무씨에게 밀고하였고, 그녀는 대신들을 폐황태자인 이충과 대역죄를 꾸미려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모두 처형해버렸다. 이충은 검주로 귀양보내졌다가, 664년에 사약을 받고 죽었다.
무씨는 실제로 대단한 정치적 역량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치에게 '건언12사'라는 건의문을 올렸고, 이치는 이를 모두 수용하였다. 얼마 뒤, 이치의 건강이 악화되자, 이치는 황태자 이홍에게 제위를 물려주려 했다. 이홍은 총명하고, 겸손하였으며 이치와 대소 신료들에서도 신임이 두터웠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무씨는 675년 이홍에게 독약을 보내 그를 죽였다.
그 후로, 그 다음 아들인 이현(李賢)이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이현 역시 죽은 형 이홍 못지않게 총명하였다. 무씨는 아들의 총명에 위기감을 느껴 이현에게 여색을 밝힌다 모함하였다. 680년에 이현은 황태자에서 폐출당했으며, 684년에 파주(巴州)에서 어머니 무씨가 보낸 자객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황제로 향하는 발걸음
무씨는 자신의 셋째 아들 이현(李顯)을 새로이 황태자로 삼았다. 그는 형들과 달리 유약하였고, 어머니의 말에 절대 순종했다. 3년 뒤인, 683년 고종 이치는 사망하였고, 황태자 이현이 황제에 오르니 이가 중종이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무씨는 그를 폐위시켰다. 이유는 바로 이현의 처인 황후 위씨와 그 아버지 위현정이 정사를 농단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현을 여릉왕으로 강등시키고, 자신의 소생 중 막내 아들인 이단을 황제에 올리니 이가 바로 예종이다.
이때부터, 그녀는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모든 정사를 직접 관장하였다. 무씨는 낙양을 신도(神都)라 고치고, 관제도 새로이 개편하였다. 하지만, 이에 반발한 대신들도 적지 않았다.
684년 9월, 양주의 서경업이 먼저 군사를 일으켜 장안으로 진군하였는데, 그 격문을 낙빈왕이 썼다. 무씨는 그 격문을 보고 낙빈왕이 자신의 수하에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으며, 어쨌든 그녀는 30만의 진압군을 파견하여 40일만에 그 모든 반란이 평정되었다. 그리고 무씨는 이 반란에 동조하였던 모든 대신들을 처형시키고, 내각을 새로이 개편하였다.
무씨는 하늘의 뜻을 거론하며, 여론을 조작하기도 했는데, 그녀의 조카 무승사가 '성모임인 영창제업'(聖母臨人 永昌帝業) 즉, 황태후께서 군림하시니, 황제의 기운이 대대손손 번창하리라는 쓰여진 돌을 가져와 무씨에게 바쳤고, 이것을 본 무씨는 기뻐하여 연호를 '영창'으로 고쳤다. 한편, 당 고조 이연의 11남인 한왕 이원가의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할 뻔했으나, 무씨는 군사를 보내 이를 진압함으로써 자기의 황제 즉위에 대한 모든 장애물을 치우고 말았다.
유일무이한 여황제
690년 9월 9일 중양절을 기해, 무씨는 예종 이단을 황제에서 폐하고 자신이 황제에 올랐다. 자신을 측천 금륜대성신황제(則天 金輪大聖神皇帝)라 칭했고 국호를 대주(大周),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였으며 도읍을 장안에서 신도 낙양으로 천도하였다.
역사에서는 그녀가 세운 주나라를 서주, 동주와 구분하기 위하여 그녀의 성 무씨를 따 '무주(武周)'라 불렀다. 무씨는 황제에 오르자마자, 악독한 대신들을 임명하여 당 황조의 종친과 구대신들을 잔혹하게 몰살시켰으며 국법을 더욱 엄히 하였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제대로 제도적으로 정착되어 있지 않았던 과거제도를 다시 개편하였고 이로 인해, 여기서 뽑힌 신흥 세력들이 많았다. 이들은 훗날 이융기를 도와 '개원의 치'를 성립시키는데 일조한다. 무씨는 이러한 사람들을 많이 중용하여, 그들을 지지기반으로 만들었다. 또한, 당나라 때도 실력이 있던 대신들을 중용하였다. 이들이 적인걸, 장간지 등이다.
또한, 과거를 회시, 공사, 전시의 순으로 삼아서, 국가에 필요한 많은 인재들을 배출, 적재적소에 등용시켰다. 그녀가 다스리던 시기는 태종 이세민이 다스리던 시대에 버금갔고, 백성들의 생활은 풍족하였다. 무씨는 근무가 태만한 관리들은 모두 파면하였으며, 심지어는 잡아 죽이기까지도 했다. 무씨는 또한 불교를 중흥시켜, 전국에 많은 불교 사원을 세우고 많은 승려들을 양성시키도 하였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러한 그녀의 치세를 '무주의 치(武周之治)'라 불렀다.
무씨는 자식교육도 대단히 엄격히 시켰는데, 그녀가 가장 사랑한 딸 태평공주를 엄격히 가르쳐, 법을 위반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조카 무승사도 꽤 뛰어난 정치역량을 가지고 있었으나, 권력이 매우 커져 무씨와 조정 대신들의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환관 설회의는 무씨의 총애를 등에 업고, 횡포를 일삼기도 하였다.
여걸의 만년과 죽음
만년에 이르러, 무씨는 조카 무승사에게 황위를 물려줄지, 아니면 당 황조의 황태후로 돌아가야 할지라는 큰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무씨 황조를 잇는 것에 대해 적인걸 등과 같은 여러 재상들과 신료들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699년, 무씨는 유폐되어 있던 여릉왕 이현을 다시 태자에 봉했다.
6년 뒤인, 705년에 무씨는 병에 걸렸고, 이러한 때에 재상 장간지가 군사들을 이끌고 무씨가 와병 중인 전각으로 가 당 황조의 복원을 요청하였고, 무씨는 이를 승낙하여 당 황조가 15년만에 복권되었다. 그리고 중종 이현이 다시 황제에 즉위하였다. 무씨는 그리고 최초의 여성 태상황이 되었다.
그 해 11월, 무씨는 중종 이현과 막내아들 예종 이단, 막내딸 태평공주 등을 불러놓고 무씨 일가를 잘 부탁한다는 말과 죽은 뒤에 황제가 아닌 황후로 칭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또, 억울하게 자신의 손에 죽었던 폐황후 왕씨의 일가 역시 사면 복권해달라 간청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자신의 묘비에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 명하였다.
705년 11월 2일, 거의 반 세기동안 천하를 다스렸던 여걸인, 측천 성신대황제 무조는 장안 상양궁 선거전에서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녀는 비록 잔혹한 정치를 펼쳤으나, 이러한 그녀의 정치는 당 태종 이세민의 '정관의 치'이후 성공한 정치를 펼쳐, 훗날 당 현종 이융기의 '개원의 치'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평가
측천무후 이전에 있던 귀족의 혈통 중심의 관료제에 능력 위주의 관료제의 가능성을 심어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물론 그 이면에 정적을 지나치게 잔혹하게 살해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능력 위주의 등용은 뒷날 '개원의 치'를 이루는 발판이 되었다.
이홍(李弘, 652년 ~ 675년)은 당나라의 황태자로 당 고종과 측천무후의 아들이다. 측천무후소생 첫째 아들로 이복 형 이충이 폐위되자 15세의 태자가 되나 '자치통감'에 모후 측천무후가 독살했다 하였다. 후에 동생인 당 중종이 복위한 후 의종(義宗)으로 추존된다.
당 중종 이현(唐中宗 李顯, 656년: 현경(顯慶) 원년 11월 26일 ~ 710년: 경룡(景龍) 4년 7월 3일)은 당의 제4대 황제이다. 당 고종 이치의 7남으로 모친은 측천황후 무씨이다.
이현은 처음엔 주왕에 봉해졌는데, 동복 형들인 이홍과 이현(李賢)이 태자에 올랐으나, 어머니인 무씨의 미움을 받아 모두 폐위당하고, 그 다음인 이현이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683년 12월 27일, 아버지가 붕어하자, 7일 뒤인 684년 1월 3일에 황제에 올랐으나, 그는 허수아비 황제였다. 태후 무씨가 계속 정권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현은 1개월 뒤인, 684년 2월 26일에 결국 폐위당한다. 그리하여 그는, 여릉왕으로 지위가 격하되어, 연금당했다.
690년엔 어머니 무씨가 국호를 당에서 주라 바꾸고 황제에 올랐다. 그리고 15년 뒤인, 705년에 어머니가 신하들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국호를 주에서 당으로 바꾸고 태후로 물러났다. 그리하여, 705년 2월 23일에 다시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이번엔 자신의 부인인 황후 위씨가 정권을 장악하려 했고, 710년 7월 3일에 결국 위씨와 자신의 7녀인 안락공주에게 독살당했다. 시호는 중종 대화대성대소효황제(中宗大和大聖大昭孝皇帝)이다.
당 예종 이단(唐睿宗 李旦, 662년: 용삭(龍朔) 2년 6월 22일 ~ 716년 :개원(開元) 4년 7월 13일)은 중국 당나라의 제5대 황제이며, 아버지는 당 고종 이치, 어머니는 측천무후이다.
662년 6월 22일에 장안에서 태어났으며, 곧 은왕에 봉해졌다. 684년 2월 26일에 형 당 중종 이현이 어머니인 황태후 무씨에게 폐위되자, 그 다음날에 어머니에 의하여 황제의 위에 올랐다. 그러나, 690년 9월 9일에 어머니 무씨는 자신을 내쫓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대주(大周)라 했다. 그리고 이단은 황태자로 강등되었다.
705년, 어머니가 죽고, 형인 이현이 다시 황제에 오르자, 형에 의해 안국상왕에 봉해졌다. 하지만 710년엔 이현이 자신의 부인인 황후 위씨와 딸 안락공주에게 독살당하고, 황후와 공주가 이현의 아들인 이중무를 황제로 올리자, 이에 분개한 이단의 3남 이융기는 자신의 고모 태평공주와 손을 잡고 위씨 일가를 모조리 죽여버리고 당 상제(당 중종의 아들)를 폐위시켰다. 그리하여 다시 황제에 오른 이단은 이융기를 황태자에 책봉하고, 712년에 이융기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퇴위하여 태상황이 되었다. 716년 7월 13일에 55세로 붕어하였으며 시호는 예종 현진대성대흥효황제(睿宗顯眞大聖大興孝皇帝)이다.
당 현종 이융기(唐玄宗 李隆基, 685년: 수공(垂拱) 원년 9월 8일 ~ 762년: 상원(上元) 3년 5월 3일)는 중국 당나라의 제6대 황제이다. 별호는 당명황(唐明皇)이며, 당 예종 이단의 3남으로, 어머니는 숙명황후 유씨이다. 당 태종 이세민 이후, 번영을 이끌었으나, 동시에 쇠퇴를 이끌기도 한 황제이다.
당 현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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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제6대 황제 | |
재위 | 712년 ~ 756년 |
황후 | 폐황후 왕씨 정순황후 원헌황후 |
부황 | 예종 |
모후 | 숙명황후 |
이전 황제 | 예종 |
다음 황제 | 숙종 |
이융기는 처음에 초왕(楚王)으로 책봉되었으나, 후에 임치왕(臨淄王)으로 책봉되었다. 일찍이 별가 등 요직을 맡았으나, 당시 황후인 큰어머니 황후 위씨에게 모함을 받아 수도 장안으로 소환되었다. 710년, 위씨가 딸 안락공주와 결탁하여 황제인 중종 이현을 죽이자, 이것을 알아챈 이융기는 우림군 병사를 소집, 궁중으로 들어가 위씨와 안락공주를 죽이고, 이어 위씨 가문 모두를 몰살시켰다. 또한 자신의 할머니인 성신황제 무씨의 집안 무씨 일가까지 몰살시켰다.
이어, 고모 태평공주에게 아버지 예종 이단의 복위 주도 운동을 맡아달라 하였고, 그로 인해 이단은 다시 황제의 자리에 앉았고, 이융기는 평왕(平王)에 책봉되었다가 큰형인 이헌의 양보로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712년 9월 8일, 이때는 이융기의 27번째 생일이었다. 예종 이단은 황태자 이융기에게 황제의 위를 물려주고 연호를 선천(先天)이라 하니, 이가 당나라 제6대 황제인 현종이다.
현종 이융기가 즉위했으나, 그의 고모 태평공주는 황위를 노리고 있었다. 태평공주는 은밀히 여러 번 이융기를 독살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며, 713년에 이융기는 태평공주와 그 일당을 모두 죽여버렸다.
'개원의 치'
유능한 재상들의 보좌
현종 이융기는 1년 뒤 713년에 연호를 개원(開元)으로 바꾸고, 정치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현종을 섬기던 관리중에는 유능한 재상들이 많았는데, 요숭(姚嵩), 한휴, 송경, 장구령, 소숭 등이었다. 이들 모두 각각의 능력이 출중하고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지극하였다 한다. 그중에도 요숭의 공이 가장 높아, 이융기는 그를 승상에 임명하기도 했다. 요숭은 그에게 가난의 퇴치를 포함한 치국의 10가지 조건을 제시하였고, 이융기는 이것을 모두 수용하였다. 한휴는 언제나 이융기에게 직언을 올렸다. 하지만 소숭은 이융기에게 언제나 순종적이고 아첨을 하였다 한다.
애민정치
고 고우영 화백의 《만화 십팔사략》(두산동아)에 따르면, 이융기는 "짐이 마르더라도, 천하와 백성들이 살찌면 아무 여한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융기가 재위 초기에 얼마나 민생위주의 정치에 전력을 쏟았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융기는 중앙의 유능한 관리를 지방에 도독이나 자사로 파견하였고, 적성에 맞지 않는 관리는 모두 교체하였다고 전해진다. 심지어는 나라에 가뭄이 돌자, 황궁의 쌀을 배고픈 민중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어진 정치를 행하였고, 환관과 인척을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여 정치가 문란해질 위험을 미리 막았다. 또한 이융기는 사찰과 승려의 수를 줄이고, 권력가들을 제압하는 한편, 조정을 정비하여 상벌을 엄정히 나누어 주어서 중종 이후 혼란스러웠던 정치 상황을 안정시켰다. 이융기의 훌륭한 정치덕분에 당나라의 국력은 당연히 강성해졌으며, 태종 이세민이 이룩한 태평성세에 버금가는 치세를 하여 후세 사람들은 이를 당시의 연호인 개원(開元)을 따 '개원의 치(治)'로 불렀다.
양귀비의 등장
이러한 치세가 계속되자, 당 현종 이융기는 거만해져서 자신을 위해 충언하는 훌륭한 대신들을 내치고 자신에게 아첨을 떨고 순종하는 신하들을 중용하였다. 또, 이원을 세워 광대들을 키워내기도 했다. 그리고 이융기는 유능한 장구령을 해임하고 이임보를 승상으로 임명했는데, 이임보는 무식하고 무능한 인간이지만 아첨에 뛰어나서 이융기의 총애를 받아 승상까지 오를 수 있었다. 또한 이융기에게 오는 모든 정보를 차단하고 19년간이나 국정을 전횡한 간신배이기도 하다.
737년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무혜비마저 죽자, 방황하던 이융기는 어느 날, 한 여자를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만사가 손에 잡히지 않았고, 결국 당대 최고의 권력가인 환관 고력사를 시켜 그녀를 데려오게 한다. 그녀가 바로 수왕비 양옥환이었다. 양옥환은 이융기의 며느리였는데, 그녀의 미모에 반한 이융기가 그녀를 자신의 13남인 수왕 이모에게서 가로챘던 것이다.
이리하여 745년, 이융기의 나이 61세 때에 양옥환은 귀비에 책봉된다. 귀비는 황후 다음가는 자리였던 지라, 당시 황후가 죽고 없던 차에 그녀는 황후의 역할을 대신하다시피 했다. 이 여인이 바로 양귀비이다.
양귀비 일가의 전횡
현종 이융기는 죽은 양귀비의 아버지에게 대위제국공이란 벼슬을 내리고, 그녀의 숙부와 세 명의 친오빠에게도 높은 벼슬을 하사하였다. 또한 양귀비의 세명의 언니를 모두 국부인으로 책봉하여 그 세도가 매우 어마어마했다.
이융기는 그 중에서도 양귀비의 셋째언니 괵국부인에게도 반해, 그녀와도 애정 행각을 벌였다. 그녀를 질투한 양귀비가 괵국공주는 황궁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는 말도 있다. 이에 노한 이융기는 양귀비를 궁에서 내치기까지 했다.
이 양귀비의 일가 친척 중에서 가장 세도를 누린 사람은 양귀비의 사촌 오빠 양검이다. 양검은 이융기에 총애를 받아 이융기에게 '국충(國忠)'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이임보가 죽자, 양국충은 승상에까지 올라 국정을 전횡하였다. 양국충도 소인배요 간신배인지라, 충신은 죽이거나 내치고, 아첨꾼들을 이융기 옆에 붙여놓는 등 갖은 전횡을 일삼았다.
당시 내쳐진 양귀비는 양국충의 집에 있었는데, 양국충이 환관 고력사와 담합하여 양귀비와 이융기의 관계를 화해시키려 했고, 이융기는 결국 그 화해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양귀비와 같이 화청궁에서 목욕을 했는데, 그녀의 육체를 본 이융기는 다시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안록산과 양귀비
747년, 이융기는 절도사 안록산이 장안으로 오자,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고, 여기서 안록산과 양귀비가 처음 대면을 하게 된다. 안록산은 이융기와 양귀비의 총애를 받아, 양귀비의 수양아들이 되었고, 변방의 국방까지 책임지게 되었다. 양귀비는 늙은 이융기가 싫어졌을까. 그녀는 이제 체구가 우람한 안록산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 때, 승상 양국충은 안록산의 등장으로 점점 위기감을 느꼈고, 이융기에게 안록산을 모함하였다. 그러나, 양귀비는 언제나 안록산을 변호하여 그를 위기에서 구했다. 양귀비는 조정의 권세까지 장악하게 되었던 것이다.
안·사의 난
천보(天寶) 14년인 755년, 안록산은 변방으로 돌아가, 부하 사사명과 함께 양국충 타도를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이 반란이 바로 안사의 난이다. 반란이 일어나자 이융기와 양귀비, 양국충과 그 일가 친척들은 모두 장안에서 피신하였고, 반란군은 계속 장안을 향해 진격했다. 하지만 이융기를 호위하던 관군이 일행이 머무르고 있는 마외파에서 양국충과 그 일가를 모두 죽일 것을 강요하였고, 양국충이 놀라 허둥거리자, 군인들은 그를 끌어내어 목을 베어버리고, 시체를 여러 조각으로 찢어갈겼다.
이들은 이융기가 쉬고 있던 역관에서 계속 시위를 하자, 신하 위견소, 위방진을 보냈으나 소용이 없자 이융기 자신이 그들을 설득을 하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양귀비를 죽일 것을 강요하였고, 환관인 고력사 역시 선택이 없다고 하자, 이융기는 어쩔 수 없이 양귀비에게 자결 명령을 내렸다. 양귀비는 울면서 역관 옆 나무에 목을 매어 죽었다. 이 때, 그녀의 나이 38세, 때는 756년이었다. 양귀비가 죽었다는 소리를 들은 군인들은 환성을 내지르며 다시 이융기를 서쪽으로 행군했다. 그러나 같이 따라온 황태자 이형은 마외파에 남아 조정 일을 주관하였고, 북쪽으로 올라가 영무에서 황제에 오르고, 이융기를 태상황으로 삼았다.
쓸쓸한 최후
757년 12월, 태상황 이융기는 장안으로 돌아왔고, 감로전에 거처하며 쓸쓸한 나날을 보냈다. 5년 뒤인, 762년 5월에 양귀비에 대한 그리움과 지난날의 영화에 대한 허무함 때문에 병이 들었다. 그는 옥피리를 처량하게 불고, 궁녀를 불러 자신을 목욕시키라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5월 3일 새벽에 붕어하니 그 때 나이 78세였다.
시호는 현종 지도대성대명효황제(玄宗 至道大聖大明孝皇帝)이며, 능호는 태릉(泰陵)이다.
사후 평가
며느리이기도 했던 양귀비와의 로맨스는 화제가 되어 장한가 등의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의 성리학자 이현일 등은 그의 저서 갈암집에 '당나라 현종이 재물을 긁어 모으고 사치를 일삼았다.(唐玄宗斂財侈費)'고 비판하였다.
안사의 난( 安史之乱)은 755년에서 763년까지 당나라에 생긴 전란이다. ‘안사’라는 이름은 난을 이끌었던 안녹산 · 사사명의 머릿글자를 딴 것이다.
안녹산( 安祿山, 703년? ~ 757년)은 당나라의 무장으로 안녹산의 난을 일으켰다. 아버지가 소그드인, 어머니가 돌궐족이다.
영주에서 호시아장을 맡았는데 6개 국어를 잘했다. 30대에는 장수규를 섬겨서 무관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742년에는 평로절도사가 되었다. 변경 방비를 잘 맡아서 현종의 신임을 얻었다. 744년에는 범양절도사, 751년에는 하동절도사로 부임하면서 병력의 3분의 1을 장악했다.
양국충은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조짐을 보이자, 현종에게 안녹산이 모반을 꾀한다고 전했다. 하지만 안녹산은 이에 대한 반기로 15만의 병력을 이끌고 중원으로 쳐들어갔다. 한때는 화베이 지방을 점령했지만, 얼마 뒤에는 시력이 약해지고, 종기가 생겨난 이후부터는 위령이 안 세워졌다.
나중에 소생을 편애한 결과로 그는 취침 중에 이저아에게 암살당했다. 죽은 뒤에는 안녹산사적(安祿山事蹟)이 편찬되었다.
당나라 말기 율령제의 변질, 균전제와 조용조의 변화, 부병제의 붕괴 등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개원의 치를 이끌었던 당현종은 양귀비에 빠져서 정치를 고력사 등의 환관들에게 넘겼고, 이로 인해 양국충 등의 외척과 환관들의 본격적인 환관-외척정치가 시작되었다. 환관과 외척들의 전횡과 부패 속에서 제도와 관리들은 타락할 수밖에 없었으며, 권력 다툼은 결국 안녹산에게 난을 일으킬 명분을 주게 된다.
부패한 관리와 환관정치로 인해, 수탈을 당할 대로 당한 농민의 소외로 자립 소농민층이 해체된 것도 원인이다. 해체된 자립 소농민층은 유민화되었다.
당나라는 이때 지배체제를 시작하려고 했지만, 측천무후 때 억압된 귀족 세력이 현종 때에 다시 집권했다. 구집권층과 지주, 상인층 출신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경과
- 755년 안녹산은 간신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 756년 1월 안녹산은 낙양에서 제위에 올라 연(燕)이라 칭한다.
- 756년 5월 양귀비 자살하다.
- 756년 6월 장안(시안) 점령.
- 757년 1월 맏아들인 안경서에게 안녹산 살해당한다.
- 759년 안녹산의 부장이던 사사명에게 안경서가 살해당한다.
- 761년 사사명의 맏아들 사조의에게 사사명이 살해당한다.
- 762년 당 현종 사망
- 763년 사조의 자살로 난이 평정됨.
영향
안사의 난으로 8년 간의 전란에 시달려 많은 농민들이 죽고, 당은 쇠퇴기로 접어들게 된다. 이 전란으로 인해 전국의 인구는 293만 호로 13년 전의 890만 호에 비해 70%의 인구가 감소하게 된다. 역사상 최초, 최악의 킬링필드였던 셈이다. (597만 호가 이 전쟁으로 사라짐으로써 한 호당 5인 기준을 삼아도 3천만 명이 넘게 죽었던 것이다.)
당 숙종 이형(唐肅宗 李亨, 711년: 경운(景雲) 2년 ~ 762년: 상원(上元) 3년)은 중국 당나라의 제7대 황제이며, 아버지는 당 현종 이융기, 어머니는 추존된 원헌황후 양씨이다. 본명은 이여(李與)였으나, 738년에 황태자로 책봉된 후 이형으로 개명하였다. 한편, 고려의 사서를 바탕으로 기록한 《고려사절요》 등에는 그를 태조 왕건의 고조부로 기록하고 있으나, 고려 말의 학자 이제현은 《왕대종족기》를 저술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였다.
756년, 안·사의 난으로 부황 이융기가 양귀비 등과 함께 도피하자, 부황을 호송하였다. 이 때 양귀비가 부황의 명령으로 죽자 호송한 조정 대신들은 이융기에게 당장 태자에게 위를 넘기라 주청올렸고, 이리하여 이융기는 마침내 영무에서 태자 이형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서촉의 성도로 들어갔다.
이형은 황제로 즉위하자 연호를 천보에서 지덕(至德)으로 바꿨다. 이형은 장군 곽자의와 이광필에게 반란군 토벌 명령을 내렸다. 757년 정월에 안록산이 결국 자신의 아들 안경서에게 살해당하자 자연스레 반란군의 힘은 약해졌고, 그 해 9월에 곽자의와 함께 수도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2월에는 태상황제 이융기 역시 돌아왔다.
머지않아, 안·사의 난은 진압되었으나, 나라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형은 당을 부흥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미 당나라는 쇠퇴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762년 5월 3일, 아버지인 태상황제 이융기가 사망하였고, 얼마 안되어 이형 역시 병이 들고 말았다. 이 때, 황후 장씨가 태자 이예를 끌어내고 그 자리에 자신의 소생인 월왕 이계를 올리려 하였다. 그러나 신하 이보국이 이를 알아차리고, 황후 장씨를 시해하였다. 그러나 이형은 병이 심하여 그런 일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결국 762년 6월, 이형은 황궁에서 5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시호는 숙종 문명무덕대성대선효황제(肅宗 文明武德大聖大宣孝皇帝)이다. 능호는 건릉(建陵)이다.
당 대종 이예(唐代宗 李豫, 726년: 개원(開元) 14년 ~ 779년: 대력(大歷) 14년)은 중국 당나라의 제8대 황제이다. 당 숙종 이형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추존된 장경황후 오씨이다. 초명은 숙(俶)이다.
756년, 당시 황태손이던 때에 조부인 현종 이융기가 안록산의 반란을 피하고 서쪽으로 도망가자, 아버지인 황태자 이형과 동행하였다. 조부 이융기가 이형에게 제위를 물려주자, 이예는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얼마 안 있어 수도 장안과 부수도 낙양을 되찾았다. 762년에 환관인 이보국이 황후 장씨를 시해하고 얼마 안 있어, 부친 이형이 사망하였다.
곧바로 이예는 황제에 올랐고, 그 이듬해에 7년 동안 당나라를 어지럽힌 안·사의 난은 결국 진압되었다. 하지만 반란은 곳곳에서 끊이지 않았다. 또한 그는 티베트 고원의 토번(吐番) 왕조에게 비단을 공납하던 것을 중지해, 당시 토번의 왕이던 치쏭데찬(赤松德贊)의 분노를 이끌어내 763년, 토번의 장수 다짜뤼공(達扎樂宮)이 20만 군대를 이끌고 공격해 장안을 11일간 점령당하기도 하는 엄청난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 더군다나 이예는 불교를 심취하여, 불교 사찰에 많은 토지와 면세 혜택을 주기도 했다. 이 때문에 당의 재정이 한층 더 악화되었다.
779년, 5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시호는 대종 예문효무황제(代宗 睿文孝武皇帝)이며, 능호는 원릉(元陵)이다.
당 덕종 이괄(唐德宗 李适, 742년: 천보(天寶) 원년 ~ 805년: 정원(貞元) 21년)은 중국 당나라의 제9대 황제이며 , 당 대종 이예의 장남이다.
758년에 아버지 이예가 황태자에 책봉되자, 이괄은 황태손에 책봉되었고, 764년에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779년에 부황 이예가 붕어하자, 바로 즉위하였다. 이듬해인 780년에 재정을 개선시켰고, 재상 양염의 건의에 따라 조·용·조 제도에서 양세법으로 바꾸었다. 그 때에도 반란은 잦았으며, 장군인 주비가 황제를 참칭하자, 이괄은 군사를 보내어 한중에서 반란군을 격파하였다.
중앙 집권을 강화하려 힘썼고, 수도 장안의 상업을 더욱 늘려, 어떤 사람들은 이 때를 '중흥의 치'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집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환관들을 많이 등용하는 폐단이 발생하여, 이는 훗날 당나라의 멸망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괄은 805년에 64세의 나이로 붕어하였으며, 시호는 덕종 신무효문황제(德宗 神武孝文皇帝)이며 능호는 숭릉(崇陵)이다.
당 순종 이송(唐順宗 李誦, 761년-806년)은 중국 당나라 제10대 황제(재위 805년)이다. 당 덕종의 장남으로 779년 황태자가 되었으며 805년 황제가 되었다. 그는 병으로 제위에 일년도 있지 못 했다. 환관들은 순종이 그의 아들 헌종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이 되도록 종용했다. 짧은 치세동안 순종은 왕숙문, 왕비 등과 함께 유종원 등의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여 중흥을 위한 개혁을 꾀하였다. 황권을 강화하고 지방 군벌과 환관의 세력을 억제하려던 개혁의도는 그의 치세 연호를 따서 영정혁신(永貞革新)이라고 불린다. 그의 황권강화 정책은 이후 아들 헌종에 의해 이어진다.
당 헌종 이순(唐憲宗 李純, 778년 ~ 820년)은 중국 당나라의 제11대 황제(재위 805년 ~ 820년)이다. 당나라를 다시 일으킨 황제라 일컬어진다. 아버지 순종이 양위하여 즉위하였다. 그는 성격이 곧고 과단성이 있어 안록산의 난이 끝난 후 절도사의 횡포를 누르고 나라의 명예를 높이는 데 힘을 기울였다. 또한 물가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의 세금을 내려주는 등 당나라의 중흥을 위하여 애쓴 현명한 황제였다. 한유·유종원·백거이 등이 활약한 것도 이 때이다.
그 후 헌종은 금단을 먹은 뒤 불교와 조급증에 빠져 결국 환관 진홍지에게 시해당하였다. 묘호는 헌종(憲宗), 시호는 소문장무대성지신효황제(昭文章武大聖至神孝皇帝)이다.
당 목종 이항(唐穆宗, 李恒, 795년 ~824년)은 당나라의 제12대 황제였다. 이름은 이항(李恒)이고 본명은 유(宥)이다. 당 헌종의 셋째 아들이었다. 연호는 장경(長慶), 시호는 예성문혜효황제(睿聖文惠孝皇帝)이다.
처음에 수왕(遂王)에 봉해졌다. 812년 맏형 소혜태자(惠昭太子) 이령(李寧)이 폐위되자 그는 둘째 형 동안군왕 이관(李寬)을 제치고 황태자가 되었다. 820년 제위를 계승하였으나 4년만에 사망했다. 어머니 곽씨는 당 헌종의 후궁으로, 즉위후 의안황후(懿安皇后)로 추존하였다. 목종의 외할머니는 제국소의공주(齊國昭懿公主)로 증조할아버지 당 덕종의 여동생이자 고조부 당 대종의 넷째 딸이었다.
당 경종(唐敬宗, 809년-826년)은 당나라의 제13대 황제(재위 824년 - 826년)이며, 목종의 장남이었다.
공희황후(恭僖皇后)소생으로, 부황의 급서로 14세에 즉위했으나 재위 3년만에 1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뒤는 이복동생인 정헌황후(貞獻皇后) 소생 문종이 계승했다.
당 문종(唐文宗 809년 - 840년의 이름은 이앙(李昻). 당나라의 제14대 황제(재위 : 827년 - 840년)로 당 목종의 둘째 아들이며, 당 경종(敬宗)의 이복 동생이다. 정헌황후(貞獻皇后) 소생이다. 본명은 함(涵)이었다가 나중에 앙(昻)으로 개명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하나남은 친동생과도 연락이 두절되었으며 모후의 친척은 많지 않았다. 이복형 당 경종이 갑자기 사망하자 환관 왕수징(王守澄) 등의 추대를 받아 황제위에 올랐다. 처음에는 올바른 정치를 하고자 고민하여 궁녀 3천 명을 출궁하고, 오방응견(五坊鷹犬)을 방출하며, 불필요한 벼슬아치와 부패 관리들을 1천 2백여 명을 파직시켜 개혁정책을 폈다. 문종은 환관들에게 농락당했으며, 환관들은 그를 아들 취급하였고 가짜 외삼촌을 등장시켜 황제를 우롱하기도 했다. 문종은 모후의 친척이 많지 않아 비밀리에 외가를 수소문했는데, 그 중 1인은 환관과의 원한관계 때문에 가짜임이 탄로났으며, 문종의 가짜 외삼촌은 3명이나 등장하였고 이들은 모두 유배되었다. 문종은 이훈(李訓)과 정주(鄭注) 등을 신임하여 등용했으며, 이들과 짜고 환관들을 모살(감로지변)하려다가 실패했다. 840년 병으로 대명궁(大明宮) 태화전(太和殿)에 거처하던 중 환관에 의해 독살당하였다.
당 무종(唐武宗, 804년 - 846년)은 당나라의 제15대 황제(재위 : 841년 - 846년)로 이름은 이찬(李瀍)이며 다른 이름으로는 이염(李炎)이다. 선희황후 위씨(宣懿皇后韋氏) 소생으로 당 경종, 당 문종의 이복 동생이었다. 병약한 이복형 당 문종 때에 황태자에 책봉된 한왕 이성미(李成美)가 폐위되자 황태제에 책봉되었으며, 형 당 문종이 환관들과의 정쟁중 독살당하자 건왕 이진, 익왕 이승 등 두 조카를 제치고 황위를 승계하였다. 무종 역시 재위 6년만에 독살당하였였다.
당 선종(唐宣宗)은 당나라의 제16대 황제(847년 ~ 859년)이다. 당 헌종의 제13자로 효명황후(孝明皇后) 소생이며 당 목종의 이복 동생이다. 이복 조카인 당 무종이 독살당하자 황위에 올랐다. 본명은 이침(李忱), 연호는 대중(大中)이다.
원래는 13서자로 광왕(光王)에 봉작되었으나 비슷한 또래의 이복 조카 당 문종, 당 무종이 연이어 독살당하면서 황위에 오르게 되었다. 시호는 성무헌문효황제(聖武獻文孝皇帝)이다.
당 의종(唐懿宗, 833년 - 873년)은 당나라의 제17대 황제(859 - 873)로 본명은 이최(李漼)이고 연호는 함통(咸通)이다. 시호는 소성공혜효황제(昭聖恭惠孝皇帝)이다. 당 선종의 장남이었으나 아버지 당 선종이 병으로 사망한 뒤, 환관들의 옹립으로 황위에 올랐다.
후에 조선 사람 이현일은 그의 저서 갈암집에 당나라 의종이 직간하는 신하에게 화를 내고 유배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 희종(唐僖宗, 862년 - 888년)은 중국 당나라의 제18대 황제(재위 : 873년 - 888년)이며 이름은 이환(李儇)이다. 당 의종의 다섯째 아들로 혜안황후(惠安皇后) 소생이다. 아들 건왕(建王) 이진(李震), 익왕(益王) 이승(李升)의 두 아들이 있었으나 모후는 모두 미상이며, 뒤는 이복동생인 당 소종이 차지하였다. 시호는 혜성공정효황제(惠聖恭定孝皇帝)이다.
당 소종 이엽(昭宗 李曄, 867년-904년)은 중국 당나라의 제19대 황제(재위 888년-900년, 901년 ~ 904년)이다. 당 의종의 일곱째 아들이자 공헌황후(恭憲皇后) 소생이며 당 희종의 이복 동생이었다. 원래 이름은 걸(傑)이었다가 즉위 후 엽(曄)으로 개명하였다. 나중에 다시 이름을 고쳐 민(敏)이라 하였다.
당 애종(唐哀宗, 892년 - 908년 2월 21일) 또는 당 애제(唐哀帝)는 당나라의 마지막 황제이자 제20대 황제(재위 904년 - 907년)이다. 당 경종(唐景宗)으로도 불린다. 전황 당 소종의 9남이며 폐위된 당 성제의 동생이었다. 후량 태조 주전충에 의해 양위의 형식으로 폐위된 뒤 제음국왕(濟陰國王)에 봉해졌으나 908년 2월 21일 독살당하였다. 후량이 망하고 후당이 선 뒤 후당 명종에 의해 소선광렬효황제(昭宣光烈孝皇帝)의 시호를 받고, 묘호는 다시 경종(景宗)으로 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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