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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47 (당나라 :고-당 전쟁) 본문
중국의 역사 47 (당나라 3 : 고-당전쟁)
고-당전쟁
고-당전쟁은 중국 역사 중에서 '정관의 치'라며 중국인들이 자랑하는 당나라 이세민의 치적 중에서 들추고 싶지 않은 역사의 사실이다. 당나라 이세민의 가장 결정적인 실수이며 우리 고구려 역사 중에서 가장 자랑스런 대목이다. 그들에게는 치욕스런 정복전쟁이었고 감추고 싶기도 할 것이며 역사적 기록도 패배한 내용을 삭제하거나 허위로 기록하는 등 고-당전쟁을 들추고 싶지 않은 역사일 것이다.
우리나라 텔레비젼에서 고-당전이 드라마나 역사 다쿠멘트리로도 방영되었지만, 당시 당태종은 안시성 함락에 실패한 후 요택지역으로 철수하면서 고구려군의 추격으로 위기에 처하자 고구려 포로를 모두 풀어주고 겨우 목숨만 살려 장안으로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중국의 역사서는 모두 고-당전쟁을 혹한과 추위로 철수하게 되었다며 축소 기록하고 있다. 사실 진위여부를 떠나 우리 선조들의 수나라와 당나라 침공에 결정적인 승리였다는 점, 그리고 중국인들이 자랑하는 당태종 이세민이 고-당전에서 비참한 패배 이후 바로 사망하였다는 점이다.
이후 당나라 고종은 이세민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목으로 수차에 걸쳐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고구려는 당나라 침공을 성공적으로 물리치면서 국가를 지탱하였으나 연개소문 사후 벌어진 세 아들간의 권력투쟁의 결과 허무하게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고-당전쟁은 중국이나 우리 역사의 하이라이트이다. 그래서 고-당전쟁에 대해서 삼국사기의 고구려 실록과 같이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온건주의자 영류왕과 연개소문의 반정
영류왕은 평원왕과 그의 둘째 왕후 사이에 태어났으며, 영양왕의 이복 동생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치 않으며, 이름은 '성'이다. 서기 618년 9월에 영양왕이 후사없이 죽자 고구려 27대 왕에 올랐다.
영류왕이 즉위하기 6개월 전인 618년 3월에 중국에서는 수 왕조가 몰락하고 당 왕조를 비롯한 할거정권이 성립됐다. 당 왕조를 일으킨 이연(고조)은 황하 동쪽의 태원 귀족이며, 수나라 말기에는 태원의 유수로 있던 인물이다. 그는 당을 건립한 이후 꾸준히 세력을 확대하여 각지에서 할거하고 있던 군벌들을 제거하고 통일작업을 지속한다.
이연은 이처럼 내적으로는 통일작업을 지속하면서 외적으로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한다. 이연이 당 왕조를 건립하자마자 고구려에 손을 내민 것은 후방을 안정시켜 통일작업을 지속하기 위함이었다. 고구려 조정에서는 일단 이연의 화친제의를 받아들였지만, 한편에선 중국의 혼란을 이용하여 영토를 확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었다. 그러나 양류왕은 한반도 쪽 백제와 신라의 위협이 상존하는바, 중국 쪽과의 전쟁은 위험을 자초하는 길이라고 일축했다.
영류왕은 온건주의 정책으로 일관하였고, 이에 따라 고구려는 수나라와의 정쟁에서 발생한 포로들을 교환하기에 이른다. 622년에 이뤄진 이 포로교환협상의 결과로 양쪽에 잡혀 있던 포로 2만명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624년 2월에는 당나라에서 유행하고 잇던 도교가 도입되고, 이듬해에는 불경과 노자의 교리가 전래되어 고구려와 당 사이에 문화적 교류도 이뤄진다.
그런데 이 무렵 당나라에서는 내분이 발생하여 이연의 여러 아들 중 당의 건립에 가장 공을 많이 세운 사람은 차남인 이세민(태종)이었다. 그러나 이연은 장자인 이건성을 태자로 세웠고, 이에 불만을 품은 이세민은 건성을 폐하고 자신을 태자로 세울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이연은 세민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세민으로부터 태자 건성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가지 방책을 강구하게 된다. 이 때문에 이세민은 아버지 이연과 형 건성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마침내 626년에 이르러 무력충돌로 이어진다.
626년 6월. 이세민은 자신의 심복들을 궁성 옆 호숫가에 잠입시켜 태자 건성을 살해하고, 이연에게 압력을 가하여 선위 형식을 통해 왕위를 찬탈하였다. 이렇게 하여 당은 야심만만한 이세민이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였고. 이에 따라 고구려를 비롯한 주변국들은 당나라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게 된다.
이세민이 왕위에 오르자 곧 영토확장작업을 가속하는 한편 주변국들에게 압력을 가하여 외교적 우위를 확보한다. 이 결과 고구려,백제,신라가 당과 화친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백제와 신라의 사신이 당나라에 '고구려가 길을 막고 귀국의 예방을 못하게 한다'고 말하자, 당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백제,신라와 화친할 것을 종용한다. 영류왕은 당의 요구를 받아들여 신라,백제와 화친하겠다는 답서를 당나라 조정에 보낸다.
이처럼 동방의 세 나라에 대해 종주국 행세를 하던 당은 628년에 마지막 남은 군벌세력을 제거하고 통일작업을 완수한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양사도 무리는 돌궐(터키)에 의지하였는데, 이 해에 양사도는 부하에게 살해되었고 서돌궐은 추장이 포로로 잡히자 당에 항복하였다.
이렇듯 당이 수나라에 이어 강력한 대국으로 떠오르자 고구려는 당의 침입을 염려하였고, 반대로 당나라로부터 멀리 떨어진 신라는 당나라 세력을 이용하여 영토를 확장하려는 계획을 꾸민다. 신라의 팽창정책을 이끌고 있던 진평왕과 김유신은 당이 통일 작업을 완성한 후에 필시 고구려를 침공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때문에 고구려가 한반도 변경에 힘을 쓰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629년 고구려를 침공하여 낭비성을 함락시킨다. 이에 고구려는 몇 번이나 반격을 가하지만 당의 침입을 우려하여 적극적인 공략에 나서지 못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군사를 요동에 집중시키고 당의 침략에 대비하여 부여성에서 발해에 이르는 장성을 쌓고자 하였다. 이 장성 계획은 국상격인 대대로에 올라있던 서부대인 연태조가 주도하였고, 축성 작업은 631년 2월부터 시작되었다. 이 작업을 지휘하던 연태조는 지병으로 사망하고, 그의 아들 연개소문이 대업을 이어받아 작업을 지속하였다.
이 무렵, 한반도 고구려군이 신라 변경 요지인 칠중성을 공격하여 1개월간의 싸움 끝에 신라 장군 알찬에게 패배하여 퇴각하고 말았다.
이러는 사이 당은 동돌궐을 멸망시키고,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태자를 입조시킬 것을 요구한다. 이 때문에 고구려 조정은 강온파가 나누어져 설전을 벌였다. 강경파는 더 이상 당나라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며 태자의 당나라 입조를 반대한 반면, 온건파는 태자를 장안으로 보내 당과의 관계를 돈독히 함으로써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영류왕은 온건파의 주장을 받아들여 640년 2월 태자 환권을 장안에 보냈다. 같이 편지를 보내 태자를 당나라 국학에 입학시켜 줄 것도 요청하였다.
양류왕이 온건파를 지지하자 강경파의 입지는 좁아졌다. 그런데 641년 당에서 직방 낭중 진대덕을 보내 태자의 예방에 답방하겠다는 서한이 도착하였다. 이에 강온파 대립은 극에 달하게 된다.
강경파는 진대덕이 낭중의 벼슬에 있는 자로 병법에 능하며 지리에 밝은 인물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를 입국시킬 경우 반드시 후환이 생길 것으로 주장하였다. 당이 진대덕을 보내는 이유는 고구려 지리를 파악하여 자신들의 침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영류왕은 강경파의 주장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영류왕은 친당주의 성향을 드러내면서 진대덕이 오는 도중 여러 성을 구경하게 해 달라는 요청도 허락했다. 이에 진대덕은 요수로부터 평양성에 이르는 길목을 샅샅이 살펴 고구려의 지리를 익히는 한편, 각 성에 배치된 군사력까지 면밀히 조사하였다. 귀국한 진대덕은 당태종에게 고구려를 칠 것을 간언하게 된다.
진대덕이 다녀간 뒤에 고구려 조정에서는 강경파의 불만이 노골적으로 불거져나오기 시작하였다.적국에 태자를 입조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적국 장수에게 지리를 익히도록 길을 열어주었으니 강경파의 불만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영류왕과 온건파는 급기야 축성작업을 중지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축성작업을 지휘하고 있던 연개소문이 강하게 반발하였고, 이에 영류왕과 온건파들은 연개소문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영류왕이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비롯하여 온건파를 척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642년 10월에 잔치를 마련하여 그들 신하들을 대거 초청하였다. 그리고 수하부대를 사열한다는 핑계로 군대를 집결시킨 뒤 이를 참관하던 대신들을 모두 참살하였다. 또한 거사에 성공하자 군사를 이끌고 장안성으로 가서 영류왕을 포박하여 죽였다. 당 태종은 영류왕이 죽었다는 전갈을 받고 애도의식을 거행하고 고구려에 지절사를 보내 조문하였다.
영류왕은 한 명의 왕후에게서 태자 환권을 얻었다. 그런데 왕후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고, 환권에 대해서는 당나라에 입조하여 국학에 입학하였다는 기록만 남아있다. 하지만 642년 10월 영류왕이 연개소문 반정에 살해 당할 시 그도 함께 살해된 것으로 판단된다.
마지막 왕 보장왕과 고구려의 몰락
연개소문의 반정으로 보장왕이 즉위하면서 고구려와 당의 관계가 악화된다. 당은 일찍부터 고구려를 침략하려 했으나 마땅한 명분을 찿지 못하고 있던차, 마침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옹립하자, 당 태종은 이를 빌미로 고구려를 침략하게 된다. 당은 총력전을 펼치며 고구려를 공략하고,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지휘아래 당의 침략에 대응하게 된다.
보장왕은 평원왕의 셋째 아들인 대양왕의 장남으로 이름은 장(보장)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치 않으며, 서기 642년 10월 연개소문이 그의 큰 아버지 영류왕을 죽이고 그를 추대함에 따라 고구려 제28대 왕에 올랐다.
보장왕이 즉위하자 모든 권력은 연개소문에 집중되었다. 연개소문은 스스로 대막리지에 오른 후에 조정과 군권을 장악하고, 보장왕을 허수아비로 전락시켰다. 이에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일인독재체제가 성립되고, 이는 후에 고구려 멸망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반정과 독재에 항거한 세력이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안시성 성주였다. 그는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즉위시킨 후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조정을 장악하자 이를 불충으로 규정하고 항거할 움직임을 보인다. 연개소문은 군사를 동원하여 안시성을 공격하지만 번번히 실패하였고, 결국은 안시성을 휘하에 넣지 못한 채 종래의 안시성 성주 직위를 그대로 유지시킨다는 뜻을 밝히고 사태를 마무리 짓는다.
한편, 이무렵 한반도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의 싸움은 백제가 신라의 40여 개성을 함락시켜 차지함으로써 유리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는데, 그해 8월 백제가 다시 신라의 요충지인 대야성을 함락시켜 전세는 점점 신라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신라의 선덕여왕은 그해 10월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고구려 실권자 연개소문은 김춘추의 요청을 거절하고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면서 어부지리를 노리기로 하였다.
이 때 당 태종 이세민은 고구려 침략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수나라가 네 차례에 걸친 고구려 침공으로 나라가 망하는 불운을 겪은 것을 본 백성들이나 군사들에게 아직은 거부감이 많이 남아있던 상황이라 섣불리 명분없이 침략을 할 수도 없던 차에, 영류왕을 죽인 연개소문에 대한 응징을 빌미로 본격적인 침략준비에 돌입했다.
이러는 사이 연개소문은 당나라 내부 사정을 좀더 소상하게 파악할 필요성을 느끼고 643년 3월에 당에 사신을 보냈다. 사신을 보낸 명분은 도교를 널리 유포하기 위해 도사를 청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짜 목적은 당나라 전쟁준비를 소상히 살피는 것이었다. 도교를 선호하고 있던 이세민은 연개소문의 내심을 눈치 채지 못하고 도사 8명과 노자의 도덕경을 보내주었다.
당나라에 갔던 사신의 귀국보고는 이세민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으며 침공이 임박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연개소문은 장정을 대거 징발하고, 변방의 성곽을 수리하는 한편 군사들은 진법훈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고구려가 당의 침입에 대비하는 동안 신라는 백제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외교전을 펼치고 있었다. 신라는 643년 9월에 당에 사신을 보내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의 조공길을 막고 있다고 하면서 원군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이세민은 신라와 손을 잡고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려는 계획을 짠다. 당의 계략을 눈치 챈 연개소문은 백제와 손을 잡고 적극적으로 신라 공략에 나선다.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를 협공하자 이세민은 고구려에 사농승 상리현장을 보내 당장 신라 공격을 멈추지 않으면 당이 군사를 출동시키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과거 신라에게 빼앗긴 성읍을 되찿기 전에는 신라 공략을 멈출 수 없다며 상리현장의 요구를 한마디로 거절한다.
고구려에서 돌아온 상리현장이 연개소문의 말을 전하자 이세민은 '왕을 죽이고 이웃 나라를 침공하여 전쟁을 일삼는 연개소문을 응징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원로 대신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원로 대신들로부터 형식적인 승인을 얻어낸 이세민은 자신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치기로 하고 출전 준비에 돌입했다.
이에 연개소문은 전국에서 말갈군을 포함하여 약 20만 병력을 편성하여 그 중 5만은 한반도 쪽 변방에 배치하고 나머지 15만은 요동과 평양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또한 그때 안시성에는 안시성주의 독자적인 세력인 성민 7만과 군사 3만이 있었으므로 고구려의 요동방면 병력은 총 23만이었다. 연개소문은 이정도 병력이면 충분히 당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지만 혹 당군이 바다를 타고 평양을 칠 것을 염려하여 보장왕을 비롯한 왕실 종친들은 대동강변의 하평양으로 피신시켰다.
고구려가 당의 침략에 대비하는 사이 당 태종은 일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645년 3월에 출전 명령을 내렸다. 이세민은 총 10만 병력을 동원하였는데, 그 중 4만은 당 장수 장량이 전함 5백 척을 거느리고 발해를 건너 평양으로 향했으며, 나머지 6만은 이세민이 직접 거느리고 요수(난하)를 건너 육로로 진군하였다. 또한 돌궐군과 거란군 수만 명이 당군을 지원하기 위해 동원되었으니, 침략군은 총 15만에 육박하였다.
이세민이 이끄는 10만 병력 중 이세적이 이끄는 1만 선봉대가 4월 개모성을 공략하여 무너뜨리고 , 장량의 수군은 요동반도 비사성을 습격하였다. 이후 양국 군사는 한 달 가량 공방전을 지속하다가 5월에 장량이 비사성을 함락시켰다. 또한 개모성을 함락시킨 이세적은 요동성으로 진군하였다.
고구려군의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연개소문은 신성과 국내성의 4만 병력으로 하여금 요동성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고구려군이 후방에서 공격하자 당군은 수천의 전사자를 내고 패주하였는데, 다시 이세민이 이끄는 5만 병력이 당도하자 고구려군은 뒤로 물러나 수성전을 펼쳤다. 이 때 요동성에서는 이세적이 이끄는 1만 병력이 성을 에워싸고 공격을 지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동성을 무너뜨리지 못하자 이세민은 자신의 정예부대인 5만을 이끌고 이세적을 지원하였다. 이후 요동성은 당군에 의해 겹겹이 포위되어 공방전을 치루다가 12일 만에 함락되고 말았다.
요동성이 함락되자 백암성이 위태롭게 되었다. 이에 백암성주 손대음은 이세민에게 심복을 보내 항복을 청하고 백암성을 내주었다. 요동성과 백암성을 무너뜨린 이세민은 자신의 선봉부대 5만과 이세적의 선봉부대 1만, 돌궐과 거란군 수만, 고구려군 포로 및 백성 5만을 이끌고 안시성으로 진격하였다.
당군이 안시성으로 진격한다는 소리를 듣고 연개소문은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에게 총 15만의 군사를 내주고 안시성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이에 이세민은 고연수에게 사람을 보내 회유작전을 썼다. 이세민은 자신은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다만 신하의 예절을 가르치기 위해 왔다고 말하면서 신하의 예만 갖추면 빼앗은 성은 모두 돌려주고 돌아가겠다고 제의했다. 그러자 고연수는 이세민이 공격할 의사가 없다고 판단하고 방심하였고 싸움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 이세민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2만 6천 명의 기습병을 조직하여 고구려군을 급습하였다.
당군의 기습을 받은 고구려군은 졸지에 대혼란에 빠져 3만의 군사를 잃었다. 이에 고연수와 고혜진은 직할부대 3만 6천을 이끌고 이세민에게 항복하게 되고, 나머지 병력은 신성과 건안성으로 퇴각하게 된다.
이 때문에 안시성은 완전히 고립되어 난관에 봉착하는데, 이세민은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안시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안시성주의 뛰어난 용병술에 힘입어 안시성의 군민들은 사기를 잃지 않았고, 반대로 시간이 지날 수록 당군은 피로에 지쳐 사기가 저하되고 있었다. 한편 이세민은 연인원 50만 명을 동원하여 안시성 보다 더 높은 토성을 쌓아 공격하였으나 이 역시 안시성주의 치밀한 방어벽에 밀려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하였다. 오히려 토성 작전으로 당군은 많은 물량과 병력을 잃어야 했다.
당군의 실패가 거듭되는 가운데 어느듯 겨울이 닥쳤다. 그 때문에 당군은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그해 10월에 퇴각하기 시작했다. 당군은 퇴로에 많은 동사자가 발생하여 군사를 대거 잃었다.
장안으로 돌아간 이세민은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다시금 고구려를 치고자 하였다. 하지만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이에 1만 이하의 소규모 병력으로 소모전을 펼쳤다. 그러면서 이세민은 강남12주에서 선박건조 기술자를 대거 동원하여 대대적인 전함 건조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648년 정월 장수 설철만에게 군사 3만을 내주고 전함을 동원하여 평양으로 향했다. 이 후 몇 차례에 걸쳐 공방전이 계속되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다시 이세민은 649년에 30만 병력을 동원하여 고구려 정벌을 계획하였으나 그해 4월에 고구려 정벌을 중지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와 당은 일시적인 휴전상태로 돌입하게 되었다.
당과 휴전 상태였으나 한반도에서는 여전히 전쟁이 이어졌다.고구려군과 백제군은 신라를 협공하여 655년에는 23개 성을 잃게 되자, 신라의 무열왕(김춘추)은 당에 사신을 급파하여 원군을 요청하게 된다.
신라의 요청을 받은 당은 그해 2월 영주도독 정명진과 좌위 중량장 소정방으로 하여금 군사를 내주어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해 요수를 건너 고구려군과 대치하였으나 패배하여 퇴각하게 된다. 이 때문에 약이 오른 당나라 고종은 658년 다시금 정명진과 중량장 설인귀에게 군사를 내주어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역시 대패하고 돌아갔다.
그 후 당은 659년 11월 설인귀로 하여금 다시 고구려를 침략하게 하였고, 이듬해 6월에는 소정방이 군사 13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신라와 함께 백제 공략에 나섰다. 이 같이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밀린 백제의 의자왕은 그해 7월 결국 항복하였다. 이에 따라 의자왕 및 백제의 신료들은 당나라로 끌려갔고, 백제에 남아 있던 신하들을 중심으로 백제 부흥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백제를 무너뜨린 나당연합군은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로 향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고구려는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신라의 칠중성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소정방이 이끄는 나당연합군은 대동강의 하평양을 향해 진군하였고, 이에 호응하기 위해 당 고종은 67개 주에서 4만 4천의 병력을 징발하여 고구려 대륙 쪽 변방을 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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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 한 사람이 죽었다고 고구려가 망하는구나!
서기 668년 겨울, 흰 옷을 입은 수만 명의 사 람들이 북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초겨울인데도 만주 벌판엔 매서운 눈보라가 날렸다.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드센 눈보라를 헤치며 힘겨운 걸음을 옮기는 대열의 맨 앞, 짐승의 우리처럼 생긴 수례에는 고구려의 28대 왕 보장이 타고 있었다. 편의상 사서에는 보장왕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에게는 정식 시호(제왕이나 종친, 또는 일정한 품계 이상의 관리가 죽었을 때 생전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추증하는 별도의 존칭)가 없다. 그는 나라를 잃어버린 군주이기 때문이다. 보장은 그의 본명일 뿐이다.
한 나라의 국왕이었지만 부모가 지어준 이름으로만 역사에 기록된 비운의 주인공, 하염없이 날리는 눈발 사이로 보장왕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태막리지만 살아 있었어도!"
태막리지란 645년부터 20여 년간 지속된 당과의 전쟁에서 고구려를 끄떡없이 지켜낸 영웅 연개소문을 뜻했다. 보장왕은 연개소문에 의해 시해된 영류왕의 조카였다. 642년 고구려 평양성은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이날은 천리장성 축조 현장의 감독으로 떠나는 연개소문의 열병식이 있는 날이었다. 연개소문은 이날 열병식에 참석했던 수백 명의 귀족들을 참살하고 궁 안에 숨어 있던 영류왕까지 무참하게 살해한 뒤 정권을 장악했다. 정변의 명분은 굴욕적인 대당외교를 중지하고 고구려의 자존심을 회복한다는 것이었다.
이 때부터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일인독재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그는 보장왕을 옹립한 뒤 스스로 태막리지가 되어 병권과 정권을 동시에 장악했으며 고구려 9백 년의 역사에서 그 어느 장상이나 제왕도 가지지 못한 권력을 쥔 사람이 되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사>에서 쓴 것처럼 이때 고구려의 모든 권한은 연개소문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고 왕은 그저 옥새만 찍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귀족들이나 왕실 내부에서 크게 반발하지 못한 것은 어느 정도 정변의 명분이 통했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은 당나라의 위세에 굴하지 않는 보다 강력한 제국을 꿈꾸는 고구려인들의 열망에 불을 붙였다. 적어도 그가 살아 있는 한 그 열망은 실현될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20여 년간 고구려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군림하면서 몇 가지 치명적인 오류를 범했다.
정변의 직접적인 원인은 영류왕과 귀족들이 연개소문의 막리지 계승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막리지는 세습직으로 아버지가 죽으면 그 아들이 직위를 이어받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연개소문과 정치적 노선을 달리했던 영류왕과 귀족들은 뚜렷한 이유도 없이 승인을 거부했다. 결국 신변에 위협을 느낀 연개소문이 먼저 칼을 빼어든 것이다. 이것은 정변의 순수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지만 그가 정권을 잡은 뒤에도 왕실은 보존되었다는 점에서 반역이 아니었다는 옹호의 목소리가 힘을 얻는 것도 사실이다.
영류왕 시해 사건 이후 연개소문의 정책 가운데 가장 모순된 부분도 바로 이것이다. 그는 자신이 정권을 잡은 뒤 막리지의 세습을 폐지하는 대신 연씨 일족들로 그 자리를 채웠다. 이러한 권력의 독식은 고구려 붕괴의 결정적 빌미를 제공했다.
연개소문에겐 장남 남생을 비롯해서 남건과 남산 세 아들이 있었다. 연개소문은 장남인 남생을 15세 때 중리소형에 임명하고 23세가 됐을 땐 중리부 최고 관등인 중리위두대형에 올렸다. 중리부란 국가 기밀을 다루는 정보 부서로 군사권까지 장악하고 있는 막강한 권력 기관이었다. 결국 고구려를 말아먹은 건 이 무능한 아들들이었다.
연개소문이 죽은 뒤 고구려는 극심한 내분으로 몸살을 앓았다. 내분의 원흉은 연개소문의 아들들이었지만 그 배후에는 당나라 첩자들의 활약이 있었다.
"조심하십시오. 지금 평양성에선 두 아우 분들이 결탁하여 태막리지 어른을 헤치려 한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어느 날 연남생의 심복 가운데 하나가 심상치 않은 이야길 꺼냈다. 연남생은 자격지심이 강하고 의심이 많은 위인이었다. 마침 그는 변방을 순시하던 중이었다. 자신이 도성을 비운 사이 두 아우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첩자의 말에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얼마 후 그는 부하를 평양성에 보내 동정을 알아보도록 시켰다.
이 무렵 평양성에선 당의 또 다른 첩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연남산에게 접근하여 심복 노릇을 하고 있었다. 연개소문의 셋째아들인 남산은 중리대형과 중군주활을 겸하고 있었는데 유사시에 병력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태막리지 편에 심어놓은 우리 측 정보원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조만간 암살자가 성으로 들어올 것이니 누구든 수상한 자가 있으면 무조건 처단하셔야 합니다."
"설마하니 형님이 친동생인 우리들을 죽이려고 하겠느냐?"
나쁜 말일수록 귀에는 솔짓한 법이다. 연남산은 처음엔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그는 이 일을 둘째형인 연남건에게 전했다. 연남건 역시 설마하면서도 의심하는 마음을 떨쳐내지 못했다.
며칠 후, 연남생이 보낸 부하가 평양성으로 잠입해 들어왔다. 연남건은 특별한 용건도 없이 평양성 안팎을 살피고 다니는 그들 불잡아 고문 끝에 형인 연남생이 자신들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아무도 모르게 연남생의 부하를 처치한 뒤 연남건은 왕명을 사칭해 태막리지 소환령을 내린다.
한편, 평양성으로 보낸 부하가 돌아오지 않는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던 연남생은 심복들로부터 그가 이미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평양성으로 절대 가시면 안 됩니다."
연남생은 심복들의 말대로 소환령에 응하지 않았다.
얼마 후 연남건이 태막리지가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중앙의 군사들이 그를 체포하기 위해 오고 있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당황한 연남생은 국내성으로 몸을 피하고 심복들과 대책을 논의한다.
"어차피 고구려는 태막리지께 등을 돌렸습니다. 차라리 당나라 왕실에 도움을 청하십시오. 고구려 조정을 뒤엎는 일이라면 그들은 누구와도 손을 잡으려 할 것입니다."
첩자들의 농간에 휘말린 연남생은 결국 살아남기 위한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된다. 그가 자신의 아들 헌성을 보내 구원을 청하자 측천무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당고종은 이 무렵 측천무후의 말이라면 무조건 수용했고, 그녀는 당의 실질적인 군주로서 모든 정사를 주관하고 있었다. 고구려에 첩자를 보내 연남생 형제들을 이간시킬 아이디어를 낸 것도 그녀였다.
667년 9월, 당나라 군대의 침공으로 고구려 신성이 허망하게 무너졌다. 고구려 서부를 지키는 요새 중의 요새로 알려진 신성이 무너진 것은 이미 당에 투항해서 벼슬까지 받은 연남생의 수하가 그곳 성주를 포박하고 성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끝까지 성을 사수할 각오로 목숨을 내걸고 싸우다 포로가 된 고구려 사람들은 이때 침략군의 선봉에 선 자가 연개소문의 장남이었다는 사실에 충격과 분노를 가누지 못했다.
신성의 함락은 주변 16개 성의 함락으로 이어졌고, 곧이어 요하 일대를 지키던 부여성의 함락과 더불어 40여 성이 힘없이 무너져버렸다. 연개소문이 필생의 목적으로 삼았던 것은 고구려의 안전을 위협하는 당을 완전히 거꾸러뜨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과 함께 고구려는 승자에서 패자의 자리로 밀려나고 있었다.
668년 9월, 수도 장안성은 당군에 겹겹이 포위되었다. 겁에 질린 연남산은 백기를 들고 제 발로 당군의 진영에 찾아가 투항해버렸다. 성 안에 남아 있던 보장왕과 연남건은 당나라와 내통하고 있던 승려 신성의 무리가 성문을 열어주는 통에 당군에 생포되고 만다.
그러나 주몽이 나라를 세운 이래로 7백 년, 길게는 9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동북아시아의 강자로 군림했던 고구려가 이처럼 허망하게 무너질 수는 없었다. 677년은 공식적으로 고구려가 당에 멸망한 지 5년째 되던 해였다. 국내성이 무너진 뒤 귀족들을 포함, 20여 만 명의 포로들과 함께 당에 끌려갔던 보장왕은 이 해 안동도독 조선국왕에 봉해져 요동으로 돌아온다. 요동 지방은 668년 이후 끈질기게 고구려 부흥 운동이 일어났던 곳으로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이 가장 거세게 나타난 지역이다. 측천무후는 당나라 입장에선 골칫거리인 요동 지방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한민족인 보장왕을 총수로 내세웠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당시 안동도독부가 있던 위치는 당군의 침입에 맨처음 무너진 신성 주변이었다. 보장왕은 이 지역에 아직 고구려의 혼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놀라움과 감동을 주체할 수 없었다. 졸지에 나라를 잃고 분통해하던 고구려 유민들에게 왕의 귀환은 새로운 희망이었다. 보장왕은 그들의 뜨거운 염원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고구려 유민들을 잘 다스려서 정책에 협조할 수 있도록 하라는 당의 요구를 묵살하고 스스로 반대 세력의 선봉에 섰다.
681년 보장왕은 말갈족과 연계하여 당과 맞설 준비를 하고 고구려 유민들을 하나로 모았다. 그러나 진작부터 이 지역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던 당은 군대를 동원하여 부흥군을 진압하고 보장왕을 다시 내재(內地)로 끌고 가 유배시켜버렸다.
"연개소문 한 사람이 죽었다고 나라가 망하는구나!"
1년 후 보장왕은 유배지에서 오욕의 인생을 마감한다. 당은 그 시신을 돌궐족 추장의 묘 옆에 묻고 비석을 세웠다.
578년 북주의 무제가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크게 패하고 물러간 이후 90년 동안 고구려는 한 번도 중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적이 없었다. 수나라의 4차례에 걸친 도발을 잠재우고 난 뒤 이어지는 당태종의 복수전에도 고구려는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거듭되는 이 전쟁의 패배로 한이 맺힌 당태종은 죽기 전에 자신의 아들에게 "절대로 고구려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지 말라."는 유언까지 남겼다. 연개소문이 살아 있는 한 고구려는 감히 그들이 넘볼 수 없는 강국임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결국 고구려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버렸다.
연개소문,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고구려 흥망의 중에 그가 있었다고 믿는다. 어떻게 한 사람의 무장이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데 그토록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일까?
- <당태종이 묻어버린 연개소문의 진실> 중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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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부여풍을 위시한 백제부흥군이 백제 땅의 서북부 일원을 회복하여 나당연합군의 후미를 쳤다. 그 바람에 신라군은 다시 남진하여 백제부흥군과 싸워야 했으며, 그 바람에 고구려군은 서북변방에 병력을 집결시켜 4만 4천의 당군을 패주시켰다.
이에 당군은 그해 4월에 다시금 대병력을 이끌고 다시 수륙 양동 작전을 구사하여 평양을 향해 진군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고구려군에게 패배하자 당나라 조정에서는 고구려와 휴전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고, 이에 밀린 당 고종은 일시적으로 고구려 공략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당군이 주춤하는 사이 연개소문은 뇌음신에게 군사를 내주어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하지만 연일 장마가 계속되는 바람에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해야만 했다.
그러자 그해 8월에 소정방은 10만 대군을 선단에 태우고 보장왕이 머무르는 대동강의 하평양으로 진군하였다. 그리고 대동강을 타고 평양성을 포위했지만 공방전만 계속하다가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 무렵 서쪽에서는 당 고종이 보낸 당군이 요수(난하)를 넘어 압록수(라오허)를 향해 밀려왔다. 이에 연개소문은 장남 남생에게 수만 명의 군사를 내주고 압록수를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9월에 당군이 압록수를 넘어 쳐들어 왔으나 남생이 이끄는 고구려군에 밀려 퇴각하였다.
이렇듯 당군은 패주만 계속하다가 665년 정월 방효태를 앞세워 다시금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그러나 방효태는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과 사수언덕에서 혈투를 벌이다가 패배하여 몰살하였으며, 방효태는 그의 아들 13명과 함께 불귀의 객이 되었다.
이때 소정방은 여전히 하평양성을 포위하고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전면전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포위를 풀고 퇴각하고 말았다.
고구려는 이렇게 연개소문의 지휘 아래 군관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매번 당군을 퇴각시켰지만, 666년에 연개소문이 사망하면서 상황은 급변하였다. 당시 고구려의 모든 권력은 연개소문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들 간에 정권다툼이 일어났던 것이다.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맏아들 남생이 막리지 직위를 이어 조정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남생의 동생 남건과 남산은 형의 권력독식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남생이 변방을 순시하는 사이 왕명을 빙자하여 남생의 측근들을 없애고 남생을 소환하려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남생은 국내성에 몸을 숨기고 자신의 아들을 당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남생의 구원 요청을 받은 당 고종은 설필하력으로 하여금 남생을 마중하게 하였고, 남생은 군대를 거느리고 당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그 후 보장왕은 남건을 막리지로 삼고 조정을 재편하였다. 하지만 고구려 조정은 많은 신하가 제거되어 어수선하였고, 민심도 남건 형제에게서 등을 돌렸다. 당 고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남생의 군사를 앞세우고 이적,설필하력,학처준,백안륙 등에게 대군을 내주고 고구려를 치도록 하였다. 이렇게 되자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한반도 쪽 12개 성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해 버렸다.
연정토의 투항은 남건을 매우 당황하게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당군이 대군을 형성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였다. 이에 667년 9월 남생과 연계된 밀정들의 간계로 성문을 열게 하는 등 신성근처의 16개 성이 함락되었고, 다시 남소,목저,창암 등의 요지가 함락되었다. 그 후 부여성과 그 주변의 40여 성이 함락되었고, 668년 9월에는 보장왕이 머무르던 하평양이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보장왕은 항복을 선언하고 남건,남산 등과 대소 신료 등 20여 만명이 장안으로 끌려갔다. 보장왕이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던 고구려 군사들은 여전히 당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급기야(구려의 역사를 포함하여) 고구려는 900년 역사의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한편 장안으로 압송된 보장왕은 전쟁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 하여 당의 벼슬을 받고 당나라가 평양에 설치한 안동도호부에 머물렀다. 그런 가운데 670년에 검모잠이 보장왕의 외손자인 안순을 왕으로 세우고 고구려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검모잠과 안순 사이에 갈등이 생겨 안순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도주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또한 671년에는 보장왕 항복 이후 3년 동안 그때까지 저항하고 있던 안시성이 무너지면서 고구려 부흥운동은 막바지에 이르렀고, 672년 5월에 당의 대대적인 공략에 밀린 고구려 잔여 병력은 대부분 신라에 투항하였다.
이 후 보장왕은 신성으로 옮겨진 안동도호부를 통할하다가, 677년에는 요동도독조선군왕에 임명되어 요동에 머물렀다. 그는 이 때 고구려 재건을 노리며 말갈과 함께 군사를 일으키려 하다가 발각되어 681년 앙주(지금의 사천성 공주)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682년에 사망하였다.
보장왕이 죽은 뒤 당나라 조정은 그의 시신을 장안으로 옮겨 돌궐의 가한(추장)이었던 힐리의 무덤 옆에 장사하고 비를 세웠다. 보장왕은 나라가 망했기 때문에 시호를 받지 못했으며, 이에 따라 따라 그의 이름 '보장'을 묘호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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