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우면산의 겨울 25 (한무제, 그는누구인가? 12 ) 본문
우면산의 겨울 25 (한무제, 그는 누구인가? 12 )
눈내린 우면산
'무고(巫蠱)의 난'
무고란 무축(巫祝의 주법(呪法)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말하는데, '무고의 난'은 무제 말년 무제가 병환이 깊어지자 구익부인의 계략으로 서역의 주술사를 불러 굿을 벌린 결과 황제의 병은 무고 때문이라는 말을 믿고 강충에게 명하여 많은 사람들을 옥사를 일으켜 죽였다. 구익부인은 강충과 짜고 황태자를 제거하기 위해 무고 혐의를 씌여 모함하자 무제의 노여움을 사게 되고 황태자는 위기에 처해진다. 이에 항태자는 두려움을 느끼고 군사를 동원하여 반대파 간신들을 처단한다는 명목으로 난을 일으켰으나 결국 실패하고 자결하였다. 2년 동안 반란에 가담했던 장안 백성 2만여 명이 희생 당하는 무제 시대 최대의 권력 투쟁 사건이다.
말년의 무제
이 사건의 구체적인 전말은 이렇다.
BC91 년, 구익부인이 추천한 강충이란 자가 흉노 사신으로 갔다가 조공을 약속받고 돌아와 무제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구익부인이 무제에게 강충이 황제를 위해 일을 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조른다. 무제는 그를 조정 감찰로 임명한다. 조정 감찰에 임명된 강충은 무제와 구익부인을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다.
한편 망령기에 접어든 무제는 환청에 빠져 수시로 자객 소동을 벌이는 등 악몽에 시달리는 등 병환이 점점 더 깊어져 가고 있었다. 이때 경성의 대협 '주안세'란 사람이 실명으로 '공손하'의 아들이자 직책이 태복인 '공손경성'이 '양석공주(위황후의 딸)'과 사통하고, 사람을 시켜 무술로 한무제를 저주하기 위해 무제가 자주 다니는 감천궁 땅 속에 허수아비를 묻어 놓고 무고하고 있다고 고변하였다.
이 말을 들은 무제의 귀가 번쩍 뛰었다. 무제의 지시로 대대적인 조사가 이루어 지고 강충은 공손하 부자 집안은 물론 위황후의 딸인 양석공주, 제읍공주 집안 등 관련자들 주거지를 뒤져 목각인형을 찿아냈다.
또 태자와 알력관계에 있던 강충은 구익부인과 짜고 이번 기회에 태자까지 제거할 목적으로 목각인형을 위황후궁과 태자궁에 미리 묻어 두고 뒤져 찿아내는 방법으로 혐의를 씌우기로 하고 무제에게 구익부인이 서역의 주술사를 초빙하여 요기가 서린 기운을 쫒아 내도록 권유한다. 이때 구익부인과 강충은 주술사와 짜고 황후궁, 태자궁 두 궁을 가르키며 요기가 서려 있다며 땅을 파면 목각인형이 나올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이에 무제는 강충에게 지시를 내려 궁을 뒤져 목각 인형을 찿아내도록 지시한다.
황후궁과 태자궁을 뒤진 결과 목각 인형이 대량으로 나오자 위황후와 황태자가 궁지에 몰리게 되고 이를 참지 못한 황태자가 군사를 동원하여 강충을 살해한다. 일이 커지자 황태자는 간신들과 환관을 잡아들이고 궁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병력 동원을 지시한다. 그러나 장안에 가까운 곳의 실질적인 주병력을 동원하는 데는 황제의 어명이 있어야 하기에 황태자가 직접 찿아 갔으나 책임 장수의 거부로 병력 동원은 실패하게 된다. 한편 무제는 궁 밖에 머물면서 황태자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외부 병력을 동원하도록 조치하여 승상 유굴리가 동원된 관군을 이끌고 황태자 반란군과 일전을 벌이게 된다.
황태자는 병력동원이 실패하고 장안성내 민간인으로 반란군을 조직하여 관군과 대치하여 5일간 장안 성내에서 전투를 벌이지만 역부족으로 결국 관군에 진압을 당하게 된다. 위황후는 황태자의 반란이 실패하자 황태자를 평민복으로 변복하여 밖으로 도망을 내보내고 황제 사자가 황후 옥새를 가지려 오자 자신은 스스로 목숨을 끓는다. 무제는 반란에 실패하여 자결한 황태자의 시신을 바라보며 분노와 애통함으로 눈물을 보이면서 후회를 하게 된다.
무제는 황태자 주변 인물들 중 반란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관련자 모두를 참하고 단순 가담자들은 모두 유배를 보낸다. 공손하 부자는 물론 위황후의 두 딸 양석공주와 제읍공주, 태자비, 아들과 며느리까지 처형하고 강보에 싸인 태자 손자 유병기(후에 선제)는 감옥에 들어간다. 감옥 관리인 정위감 병길이 죽은 태자의 부하로 어린 유병기를 돌보며 여자 죄수의 젖을 먹이며 돌보게 된다.
무제는 분노와 좌절감에 빠져 더욱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간다. 무제는 병이 점점 더 깊어지자 전국을 돌아다니며 신선을 찿아다닌다. 한 신선이 장안성 감옥에 천자 기운이 있다고 하자, 장안성 감옥에 있는 모든 죄인을 죄의 경중을 막론하고 모두 처형하도록 지시하여 대부분은 처형시켰으나 유병기는 장하의 보살핌으로 처형은 면했다.
서역 관문 '관저우'
전국의 지방 자사들이 상주문을 올리고 그 중 '전천주'란 자만 황태자의 무고를 탄원하는 상주문을 올린다. 무제는 나중에야 태자가 모함을 당한 것을 알고 '사자궁'을 세우고 '귀래망사지대'를 지어 추모하며 태자를 복권시킨다. 무제는 '죄기조(罪己詔)'(황제 스스로 죄 있음을 밝히는 조서)란 조서를 전국에 내려 속죄한다. 따라서 유병기도 결국 사면되어 병길의 외할머니 집에서 자라게 된다.
흉노가 서역의 2개 군을 습격하여 역탈을 감행하자 무제는 15번 째 출병을 결심하고 어전회의를 열었다. 무제의 출병 제안에 대한 의견을 묻자 신하들은 이구동성으로 재정이 부족하여 병력과 군마의 차출이 어려움을 들어 출병의 어려움을 상소한다. 이광리 장군이 나서서 병력 10만 정도가 필요하나 3만 병력도 차출이 어려우며 군마도 부족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지시라면 당장이라도 출병하겠다고 상주한다. 무제는 결국 무리하지만 최대한 국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준비토록 지시한다.
정화 3년(BC90 년), '오원'에서 7만 병력이 출병하고 서하에서 2만 병력, 도합 9만여 병력을 이광리 장군이 이끌고 출병하였다. 출병 전 이광리와 승상 유굴리는 무제의 노환과 망령이 점점 심해지는 상태에 갑작스런 유고 사태에 대비하여 창업왕을 내세워 정권을 장악할 것을 모의하게 된다. 이광리는 협조 가능한 측근들의 명단을 유굴리에게 전하면서 모든 것을 위임하고 서역 전장터로 떠난다.
당시 한나라는 관리들의 폭정으로 태산 지역 백성들이 반발하고 죽은 황태자의 억울함을 상주하는 상소문이 계속 올라온다. 무제는 곽광으로 하여금 승상 유굴리를 감시토록 하고 태자 반란 당시 이광리 장군이 어디서 무얼하였는지 묻는다. "이광리는 반란 당시 시골 집에서 휴양을 보내고 있었다."고 곽광이 보고한다. 무제는 유굴리와 이광리가 사전 모의를 한 것으로 의심하고 이부인의 왕자를 황태자로 만들기 위한 모의로 생각하게 된다.
출병한 이광리는 '준계산' 근방에서 흉노군 일부를 격파하는 전과를 올린다. 한편 곽광은 승상 유굴리 부부를 감시한 결과 모반 도모가 의심되는 정황이 확인되었고 이광리가 준 명단까지 입수한다. 곽광으로부터 전반적인 모반 혐의를 보고를 받은 무제는 분노하며 승상 유굴리와 이광리의 가족들 모두를 체포하여 멸족시키도록 지시한다. 한편 무제는 태자를 추모하는 사자궁을 건설하고 전천후를 승상 자리에 앉혔다.
전선에서 가족이 멸족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광리는 무제에 대해 분노하면서 고민에 빠진다. 귀국하면 자신도 참수 당 할 것은 자명한 일이고 그렇다고 흉노에 항복도 불가하다고 판단, 귀환을 포기하고 자신이 이끌던 7만 대군을 황제의 지시도 없이 다시 북상하여 흉노 지역 깊숙한 '질리수' 근방까지 진격한다.
7만 군사라면 적은 군사도 아니며 당시 무제는 가용한 병력을 모두 흉노 전선에 투입한 상태였다. 아마 이광리는 7만 병력을 이끌고 장안으로 진격하여 무제를 척살하고픈 마음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반역이며 이씨부인의 왕자까지 참살 당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며 역사에 반란을 주도한 괴수라는 오명을 남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광리는 흉노 지역으로 진군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흉노 지역을 정벌하면 그 지역에 새로운 제국을 세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광리가 선택한 길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7만 군사와 같이 스스로 자멸하는 길을 선택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무제는 자신의 지시도 없이 이광리가 군대를 이끌고 흉노 지역으로 들어가자 "가족 목숨을 대신하여 이광리는 7만 한군과 같이 스스로 괴멸 당하려 하는구나!"라며, 그의 의도를 알고 "수많은 한나라 선배 장수, 병사들이 흘린 선혈이 모두가 헛되도다!" 라며 심하게 분노하며 통탄한다.
서역 초원지대
이광리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연연산'까지 진격하여 완전고립 지역인 그곳에서 흉노군 8만과 전투를 벌이다 결국 퇴로가 차단되어 한나라 7만 군사는 모두 괴멸되고 이광리는 포로로 잡혀 투항을 거부하다 흉노 선우 모친 제사에 제물로 살해 당하게 된다.
말년의 무제는 마음속에 두려움이 가득찬 망령된 노인에 불과했으며 광기에 가득찬 거의 살인마에 가까운 정신병자로 변질되어 주변 혈족이나 신하, 장수들에 대해 닥치는대로 처형을 시키거나 멸족을 시켰다. 그 예로 전선에 나가있는 무장 이광리 가족을 멸족시킨 것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행위이며 무리한 처사였다.
무제는 구익부인과 어린 왕자를 데리고 장안에서 3백리 거리에 있는 전쟁 유공자 촌락인 '공적지' 향민을 위문차 방문한다. 오랜 기간 대흉노전쟁을 벌이면서 부상당한 수많은 향민들이 팔과 다리가 짤린 체 거지같이 살면서 황제가 그들 촌락을 방문한 점에 감격해 하며 "황제가 오셨다! 황제가 오셨다!" 라고 소리치며 읍소하여 무제를 반긴다.
그들은 위청과 곽거병, 이광 장군들과 같이 대흉노전에 참가하여 불멸의 전공을 세운 사람들이었다. 무제는 그들을 둘러보면서 마을에 세워져 있는 비문 앞에 서서 그들의 공적을 써 놓은 글을 읽으면서 " 더 이상 흉노를 칠 수는 없다" 면서 상념에 잠긴다. 마을 주민은 총 800 명 정도로 그 중 710명이 대 흉노 전투에 참가하였고 135명이 공로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한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 전쟁터를 누비면서 한조 역사를 위대하게 만들었던 사람들이지만 그 결과 반신 불구가 되어 버린 사람들이 나라의 보훈은 제대로 받지도 못하고 거지처럼 살고 있었다.
무제는 병환이 점점 깊어지자 궁내 주술사, 도사들을 모두 쫓아낸다. 어느날 환관에게 피습을 당하는 위기 순간에 근신이던 김일제가 환관을 제압하고 무제의 목숨을 구한다. 이에 무제는 "과거의 적인 너가 나의 목숨을 구하고 과거에 아군이 나의 목숨을 노리는구나!" 하면서 김일제에 대한 신임이 깊어진다. 무제는 김일제가 흉노로 시집간 한나라 공주의 아들이라는 점에 그와 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진정으로 그를 믿게 된다.
무제의 지시로 광록대부 곽광은 사마천을 방문하여 태자의 죽음과 이광리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황제의 명으로 재등용을 권유한다. 사마천은 조카에게 작성된 <사기> 두 부 중 한 부는 궁에 보내고 한 부는 고향 산속에 숨기도록 지시하고 궁으로 가서 무제를 알현한다.
무제는 사마천에게 "사기 작성은 다 되었느냐?" 고 물으면서 "작성된 사기를 보고 싶다, 가져오라!"고 한다.
무제는 사마천에게 "내가 작성된 책 내용을 보고 화를 내며 불 태우라고 한다면 어쩔 것이냐?"고 미리 협박성 질문을 묻는다. 사마천은 "누구나 운명을 타고 나듯이 책도 그 운명을 타고 나는 것으로 폐하께서 불태우시겠다면 어쩔 수 없지 않사옵니까!"고 하였다.
무제는 "짐은 대한조가 오랑캐를 굴복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렸다. 과연 천하의 후세인들이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제라도 이능이 돌아오면 짐은 용서해 주고 싶다"고 하였다.
무제는 사마천을 의식하여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은근히 기대하면서, "짐은 어떤 황제라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이에 사마천은 "폐하께서는 성군이 십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마천은 무제를 성군이 아닌 폭군으로 사기에 기록하였다.
무제는 백성들에게 "윤태죄이"의 조서를 내리면서,
"짐은 백성들의 삶이 이토록 어려움에 처해 있는 줄 몰랐다. 짐은 과거를 반성하는데, 수십 년 간 전쟁을 하면서 한의 영토는 만리나 확장하였으나 호구는 반으로 줄었다. 군주는 백성들이 토탄에 빠지는데 자신만 옳타고만 하는 것은 인륜에 어긋난다. 이제는 전쟁을 종식하고 백성들의 삶에 진력하겠다...."고 백성들에게 고지하였다. 이또한 무제는 역사에 자신의 평가를 긍정적으로 평가되기를 바라면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과오를 늬우치는척 하지만 사마천은 <사기>에 무제에 대한 평가를 긍정적으로만 쓰지 않았다.
무제는 사후 역사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해서 무척 예민하게 생각하면서 전화위복을 꾀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무제는 사마천이 <사기>에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였는지 무척 궁금하여 그래서 사마천의 사기를 빨리 보고 싶다고 하였던 것이다.
무제는 피를 토하면서 쓰러진다. 대사마 곽광을 비롯한 상홍양, 김일제 등 중신들을 불러 어린 황태자의 후사를 부탁한다.
" 짐은 과거 지은 죄가 과다하다. 한조 강산과 미성년 태자 불능을 부탁한다. 탁고지신들이 태자를 보좌하여 만사 신중, 성실로 보좌하여 한조 역사가 단절되지 않도록 하라! 오랑캐와 난신적자들을 반드시 물리쳐라."고 당부한다.
중신들이 물러가고 구익부인이 옆에 있을 때 무제는 과거를 회상하면서, 구익부인에게 "오늘 짐이 죽는다면 그대는 짐과 같이 죽겠느냐?"고 하자, 구익부인은 " 황태자가 아직 어린데, 제가 어찌 죽어야 합니까?" 하고 답변하자, 무제는 버럭 화를 내며 군사를 불러 "당장 강충과 무고 사건에 대해서 황후를 철저히 조사 후 참수하라!"고 지시하면서 분노한다.
무제는 위황후와 황태자 억울한 죽음에 많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 원인 제공자가 바로 구익부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에 대한 보복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마천에게는 어린 황제가 즉위하면 구익부인이 휘두르게 될 조정의 혼란을 걱정해서 참수했다고 이야기 하게 된다. 무제는 쓰러져 눈물을 흘리면서 이제 자신의 주변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는게 없다는 사실에 깊은 시름에 잠긴다.
서역 황야
무제는 병상에서도 <사기>를 다 읽고 난 뒤 중서령 사마천을 불렀다. 사마천이 달려와 읍소하며,
'소신, 사마천 폐하께 대령하였사옵니다~~"
무제는 사마천을 바라보면서,
"너가 쓴 책 읽고 짐이 홧병 났다. 넌 책을 통해 나에게 보복하는구나. 내 수명이 1년은 단축된 것 같다."
"소신, 사죄하려 왔사옵니다"
"넌 짐을 폭군으로 만들었고, 넌 충신으로 만들었구나! 너는 끝까지 나에게 정신적으로 굴복하지 않은 유일한 신하로구나. 그럼에도 널 살려 주겠다"
"소신, <폐하본기>를 다시 쓰겠습니다"
"필요 없다. 책은 불사르지 않겠다. 한 사관의 사견으로 생각하겠다. 구익부인을 처형시킨 것은 어떠냐? 아이가 어리고 어미가 강하면 천하가 혼란스럽게 된다. 선황 경제의 망설임이 여러 난이 발생한 이유이다. 인간은 최고 권력자가 되면 누구나 교만하고 사치하여 타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것은 누구도 제지 못한다. 인력으로 불가한 것을 실행하는 역사 정복의 숙명을 피할 수는 없다..."
그리고 무제는 자신의 치적부분에 대한 <사기>의 비난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 하다가 억누른 불쾌감을 참지 못하고, "여봐라!" 하고 환관을 불러 사기를 가리키며 " 저것을 당장 가져가 불 태우라"고 지시했다. 환관들이 들고 나가려고 하자, 무제는 사마천을 바라보고는 다시 "아니, 그만 두라!"고 하면서 사마천을 향해 "당장 나가!"라고 분노에 찬 얼굴로 고함친다.
사마천은 무제가 불에 태우라고 할 것을 예상하고 미리 <사기> 두 부를 작성하여 한 부는 고향 산 속에 숨겨 두라고 조카에게 말했던 것이나, 무제는 <사기>를 태우지 않고 사마천을 죽이지 않는 대신 자신에 대해서 재평가를 기대했는지 모른다.
BC87 년 2월 정묘일, 한나라 7번 째 황제인 위대한 군주 무제는 54년의 위대한 치세를 끝으로 구익부인의 궁인 요조궁에서 사망한다.
-서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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