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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겨울 22 (한무제, 그는 누구인가? 9 )

두바퀴인생 2009. 12. 28. 11:31

 

 

 

우면산의 겨울 22 (한무제, 그는 누구인가? 9 )

 

 

 

 

                                                                                     벽을 여는 여명

 

 

 

 

상홍양의 신경제정책

 

매년 계속된 흉노 원정으로 한나라의 재정은 바닥까지 치닫게 된다. 시대를 불문하고 전쟁을 하는 데는 엄청난 비용이 든다. 그래서 이런 재정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존망이 좌지우지 되는 사례가 얼마던지 있다. 

 

그런데 무제는 일련의 새로운 경제정책을 도입해 훌륭히 국가 재정을 다시 일으키는 데 성공한다. 여기서 상홍양이라는 비범한 경제 관료가 큰 역활을 하는데, 신경제정책의 입안과 실행을 추진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전기는 <사기>에도 <한서>에도 없다. 그 밖의 자료에 따르면 그는 뤄양에서 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암산의 재능을 인정받고 13세 때 시중이 되었다. 무제가 새로운 정책을 필요로 하게 되자 재무 관료로서 두각을 나타내 대농승(재무차관)에서 대사농(재무장관)으로 승진하면서 신경제 추진의 주역이 되었다고 한다.

 

 

소금과 철의 전매

소금과 철은 당시 가장 중요한 산업으로 이익이 엄청났지만 무제의 시대까지는 민간에서 운용했다. 그 결과 쇠를 제련하고 소금을 파는 자는 재물 또는 만금을 모았다. 그러나 나라의 어려움을 돕지 않아 서민들은 괴로움에 빠졌다."고 <사기. 평준서>에 적고 있는데 그들이 국고에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

 

무제는 고심끝에 각 제후국과 상인들로 하여금 기부금을 내도록 권장하였는데, 무제가 생각하는 만큼 재정에 도움이 도지 못하자, 고심 끝에 소금과 철의 전매권을 국가가 관리하도록 조치를 내렸다. 이때가 기원전 119년으로 위청과 곽거병이 흉노 토벌을 위해 동시 출격한 해이다. 이후 국고의 수입이 증대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는데 이익이 엄청났음이 분명하다.

 

" 이때 사방의 난리를 정벌하니 수레와 무기의 비용과 승리에 대한 상금으로 억만을 계획하니 모두 대사농을 우러렀다. 이는 모두 소금과 철의 복이었다."<염철론>

 

 

 

 

균수법과 평준법

기원전 115년에 실시한 균수법이란, 정부의 상품 유통 관리라고 말할 수 있다. 기존에는 각 군국이 그 지역의 산물을 중앙 정부에 조세로 바칠 때 수송비도 부담했다. 따라서 수도에서 먼 군국과 가까운 군국의 부담액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났다.

 

'균수(均輸)' 란 수송비를 균등하게 한다는 뜻이다.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중앙에서 각 군국에 균수관을 파견하여 조세로 바치는 그 지역의 산물(곡물, 직물)을 관리하고 필요에 따라 이를 적절한 가격으로 사들이는 권한을 주었다.

 

한편, 평준법은 수도에 평준관을 두어 싸게 사들인 물자를 저장하고 물가가 오르면 이 물자를 방출하여 가격을 안정시키는 제도를 말한다.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기격 안정을 위해 정부미 방출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결국 이 두 제도는 상업을 국가가 관리하는 형태에 가까운 것으로, 대상인의 이익 독점을 제한하고 그 이익의 대부분을 국고로 환수한다는 숨겨진 목적이 있었다.

 

 

 

 

산민전과 고민령

산민전(算緡錢)이란 상공업자에게 부과하는 특별 재산세로, 상인은 재산 평가액 2,000전에 1산(120전), 수공업자는 4,000전에 1산을 과세했다. 일반인에게는 1만전에 1산을 과세했다니 상공업자에 대한 특별 과세는 2.5배에서 5배나 높았다.

 

세금 부담을 줄이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차이가 없는데, 무제 시대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때 부호들은 앞을 다투어 재산을 숨겼다.'<한서, 식화지>고 한다. 따라서 원만한 징세를 위해서는 고민령과 같은 엄한 벌칙이 절실했다.

 

고민령은 위반자에 대해 재산을 몰수하고 1년 동안 변방을 수비하도록 하는 고발 장려 제도로 고발자에 대해서는 금액의 절반을 준다고 되어 있다. 그러자 무질서한 고발이 폭풍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별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그 결과 중산층 이상의 재산가는 거의 모두 고발을 당했고, 국고에 몰수된 재산이 수억에 이르렀으며, 대상인들은 줄을 이어 파산했다고 한다. 위에서 살펴봤듯이 상홍양이 실시한 재정정책은 당시 커다란 경제력을 보유했던 대상인을 목표로 삼았으며, 농민에 대한 세금 증가는 최대한 피했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백성들의 원망을 사지 않았다는 점에서 현명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피해를 입은 상인들은 크게 불만을 가졌을 것이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였지만 경제력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국가가 그들의 불만을 해결하려면 힘으로 누르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혹리(酷吏)' 라고 부르는 검찰 관료였다.

 

 

문화 부흥과 혹리 등장

 

유교가 다른 제자백가의 학문을 누르고 국가를 통치하는 학문으로 자리 잡은 것은 무제 시대부터이다. 시황제의 분서갱유로 유교의 학문적 가치가 땅에 떨어졌지만 무제에 이르러 다시 부흥하여 교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무제는 문물제도를 정비해 나가면서, 문화를 장려하였고, 문학에서도 서사시가 유행하였다. 또 궁중에 악부를 설치하고 각 지방의 민요를 모아 기록하고 연주하게 하여 예술 분야도 새바람을 불어넣었다.

 

뿐만 아니라 그 유명한 역사서 <사기>가 만들어진 것도 무제 때 였다. 이는 사마천의 부친인 사마담이 죽으면서 자신이 시작한 <사기>의 완성을 아들에게 부탁하였다. 사마천은 20세 경 낭중이 되어 무제를 수행하면서 크게 견문을 넓히고 이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저술에 착수하여 무려 130권에 달하는 체계적인 역사서 <사기>를 완성하게 되었다.

 

저술에 몰두하던 중 흉노와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 투항한 장군 이릉을 변호하다 궁형을 받게 되지만, 옥중에서도 저술을 계속하여 마침내 황제의 신임을 회복하고 환관의 최고직인 중서령까지 오른다.

 

대외적으로는 흉노 정벌을 우선하면서도 대내적으로는 경제와 문화를 부흥시켰다. 무제의 치세에는 훌륭한 관료들의 정책과 실행이 잘 조화되었다.

 

한편, 백성을 사랑과 온정으로 통치하던 관료를 지칭하는 순리(循吏)에 대응하는 혹리가 등장한 것도 이 시기였다.

 

혹리는 무제의 경제정책을 비방하거나 방해하는 자를 처단하는데 앞장 선 관리들이었다. 무제의 강력한 전제정치의 실시와 중앙집권적 관료제도의 확립은 추상적인 이론만을 주장하는 유가 출신의 관료보다 법령에 충실하고 실무에 밝은 법가 출신 관료가 더 적합하였던 것이다.

 

혹리는 전제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가혹하게 법을 집행하는 관료들에게 사마천이 붙여 준 명칭이다. <사기>의 혹리열전에는 모두 열한 명의 전기가 실려 있는데, 그 중 아홉 명은 무제 시대에 활약한 사람들이었다.

 

사마천은 매우 부정적인 어조로 이들의 전기를 써내려갔지만, 현실적으로 무제의 전제 정치를 지탱한 것은 쓸데없이 요순시절을 찬미하는 유가 관료가 아니라 이들 혹리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활발한 대외 정벌을 계속했던 무제의 치세도 한 꺼풀 벗겨 보면 이런 혹리의 활약으로 지탱되고 있었던 것이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