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우면산의 겨울 21 (한무제, 그는 누구인가? 8 ) 본문
우면산의 겨울 21 (한무제, 그는 누구인가? 8 )
안개 낀 새벽 우면산
장건의 오손국 파견과 <막북대전>
기원전 121년, 혹심한 한파로 인해 흉노 지역의 가축이 떼 죽음을 당하고 먹을 것이 없어지자 흉노는 한나라 국경을 침범하여 약탈을 자행하게 된다. 이에 무제는 위청, 곽거병, 이광, 조신(흉노인 장수. 한에 귀화. 위청 추천), 소협, 소건 등 장수들과 모사(참모)로 장건을 포함하여 정양에서 출발하여 서역 지역의 흉노를 공격토록 하여 출격시켰다. 그러나 이 토벌전은 결국 별 성공을 거두지 못하게 된다.
위청은 흉노군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소규모 전투만 치를 뿐 별 소득이 없자 군대를 철수하여 변경에서 정비를 하면서 무제에게 상황 전문을 보냈다. 전문을 받은 무제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흉노군을 찿지도 못하고 전쟁 임무인 흉노군 주력을 섬멸하지도 못하고 있는 위청 장군에 대해 이제는 몸만 사리는 장수라며 호통을 친다. 선우 주력을 찿아 당장 섬멸하라는 무제의 어명을 받은 위청은 참모 장건의 조언을 받아 다시 부대를 이끌고 적을 찿아 북으로 이동하여 '작아호' 일대에 전개하여 숙영하면서, 선봉 조신 장군으로 하여금 기병 3,000 기를 이끌고 흉노 주력을 찿도록 수색 정찰을 명하였다.
흉노 선우는 한나라 군대의 침공을 알고 접전을 회피하면서 위청 군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면서 유인하여 섬멸하려고 계획한다. 그래서 우선 위청 군의 선봉인 조신 장군을 미인계를 사용하여 나포하기로 한다. 위청군의 선봉인 조신이 출발하여 정찰이동 중 흉노 선우는 조신을 나포하기 위해 이동로를 추적하면서 조신(흉노이름 '아호아')의 옛 애인인 자신의 여동생을 보내 조신을 만나 설득하여 흉노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흉노군 선두에 나서게 한다. 이러한 사실도 모른 체 흉노군 정찰에 나선 조신은 정찰 중 흉노군과 마주치게 된다. 흉노군 선두에 갑자기 말을 타고 한 미모의 여인이 나타나자 조신은 정신이 혼미해져 그녀를 가까이 가서 본 결과 옛 애인임을 알고 설득을 당하고 있던 중, 한나라 장수가 상황을 잘 모른체 쏜 화살에 흉노 여인이 죽게 된다. 이에 조신은 이성을 잃고 한나라 장수를 단칼에 죽이고 자신의 병사 3,000기를 데리고 한나라를 반역하고 흉노로 돌아가게 된다.
위청은 장수 조신 반역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흉노군의 매복에 소건 장군 부대가 전멸하는 등 피해를 보았으나, 800명의 기병만 데리고 작아호 북방 흉노 본거지를 기습하여 곽거병만이 엄청난 전과를 올리게 된다. 무제는 장수들이 돌아오자 위청이 몸만 사리고 옛날 같지 않다며 실패에 대해 질책하는 한편, 무제는 곽거병의 전공을 치하하면서 '표기장군'에 임명하였다.
흉노인으로 한나라에 귀화한 한 장수 '조신'
흉노군 선두에 한 여인, 한군 장수 조신이 달려 나옴
조신의 돌아옴에 감사하는 흉노 선우
한나라 기병 전진, 접전
이 때 '박망후' 장건은 대장군 위청의 참모로 흉노와 서역 ,지리 등 많은 정보를 제공하였다고 한다. 곽거병의 승리로 패전의 책임을 두려워 한 혼야왕은 이치사 선우의 충신인 휴도왕을 살해하고 수하와 함께 한나라에 투항하였다. 무제는 투항한 혼야왕에게 1만호의 봉읍과 탑음후라는 직위를 하사하고 그 일족 또한 후대하였으며, 정벌한 휴도왕의 땅에는 '무위군', 혼야왕의 땅에는 '장액군'을 세우고 서역을 경영하였다.
흉노 진영
무제는 제후국인 회남왕, 형산왕이 반역을 도모하다 스스로 자결하고 회남왕의 딸 능공주가 적에게 기밀을 넘겨주는 등 간첩 행위를 하다가 적발되어 독을 먹고 자결하는 등 반역 관계자들이 제거되자 회남국과 형산국을 직접 관리토록 하는 한편 전방 '감천궁'에 나가 직접 전쟁을 진두지휘 할 결심을 하게 된다.
한편 새로운 제련기술로 제작된 강철 양날검이 한나라군에 실전에 배치하였으며 위청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출격하였다. 무제는 감천궁으로 이동하여 전술작전을 지휘하게 된다.
한편 흉노는 무제가 직접 전쟁을 지휘하려고 감천궁으로 이동한 사실을 알고 귀순한 조신의 건의에 따라 일거에 무제를 사로잡을 요량으로 조신이 흉노 정예 3,000기를 이끌고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비응계곡'을 통해 은밀히 감천궁에 접근하여 무제를 나포할 기습계획을 수립한다.
위청은 사방에 흉노군 본대를 찿기 위해 정찰대를 내 보내고 비밀 밀정을 운용하고 있었다, 한 밀정이 급히 보고하는 바에 의하면 수 미상의 흉노군이 비응계곡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위청은 무제의 안위를 걱정하게 된다. 그 길을 알고 있는 사람인 반역한 조신이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도 예측하고 있었다. 지휘관인 장수의 이동 문제는 황제의 허락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며 감천궁 가까이 위청 장군이 동원 가능한 한나라 군대가 없었고, 단지 황제 직할부대인 '호림우림' 부대 3만이 변경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시간상 도저히 절차를 밟을 수가 없는 긴박한 상황임을 고민하던 위청은 공손오 장군으로 하여금 전장을 감독토록 하고, 이광 장군과 단신으로 감천궁 서북방 변경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황제 직할부대인 '호림우림' 부대 3만 병력을 이용하기로 하고 급히 이동하였다. 호림우림 부대는 황제의 명에 의해서만 움직일 수 있는 부대로 전쟁 고아들로 편성된 부대였으며 대장군 위청이 임의대로 움직일 수가 없는 부대였다. 위청은 호림부대 지휘관에게 대장군 호패를 보이면서 황제가 위급한 상황을 설명하고 급히 병력을 이동하여 흉노군의 기습을 방어하도록 지시한다. 그러나 호림 부대 지휘관은 황제의 명에 의해서만 움직일 수 있다며 버티다가 상황의 위급성을 인지하고 나서 결국 병력을 출동시킨다. 비응계곡으로 은밀히 접근하던 흉노군 조신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한나라 군이 전면에 나타나자 기습이 노출된 것을 알고 포기하고 돌아가게 된다.
위청은 감천궁으로 달려가 무제에게 부복하며 위치이탈과 호림부대 동원에 대해서 사죄했다. 무제는 말없이 위청을 쳐다보다가 황제의 허락도 받지 않고 지휘관이 전장을 이탈하여 갑자기 감천궁에 나타난 점과 호림우림 부대를 황제의 허락도 없이 동원한 점을 들어 위청의 대장군 호패를 회수해 버린다. 위청은 황제에 대한 섭섭함이 기득했으나 10만 병력을 버려두고 임의로 전장을 이탈한 죄가 참형임을 생각하며 이제는 황제의 신뢰를 상실하게 되었다는 점에 우울한 마을으로 돌아온다.
무제는 흉노의 우익 주력을 섬멸하기 위해 표기장군 곽거병 단독으로 출병시키기로 마음 먹는다. 전군에서 가장 우수한 장병을 선발하고 정예병으로 구성했다. 곽거병에게 1만 기의 기병 정예병을 주어 단독으로 황제의 통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공격하되 일체의 후방지원도 없이 공격하게 하는 한편 장건을 서역에 다시 파견한다. 무제는 출병하지 않은 위청과 바둑을 두면서 감천궁 사건에 대한 위청의 섭섭한 마음을 달래면서 오로지 흉노 주력을 섬멸하고 북방의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자신의 최종 목표임을 강조하면서 황제의 지시를 어기거나 실수는 용서할 수 없다는 그의 단호함을 말해 준다. 위청은 무제의 말을 들으면서 노예인 자신을 중용하여 오늘에 이르게 해 준 황제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다면서 전장에서는 말, 장수, 전비에 대해서 중요성을 이야기 한다. 무제의 말에 머리를 조아리며 충성을 다할 것을 부복하고 무제는 위청의 머리조아리는 모습을 보면서 겸손함을 치하하면서도 한편 조정내에서 위황후와 위씨 세력이 과도하게 커지는 것을 경계하는 눈빛을 보인다.
서역정벌에 나선 표기장군 곽거병의 활약은 과연 눈부셨다. 곽거병은 '오르도스'를 정벌한 대장군 위청의 조카로 18세의 어린 나이에 시중이라는 직책으로 황제의 신변 업무를 볼 정도로 총명하였다고 한다. 기원전 121년 봄, 표기장군에 임명된 곽거병은 1만 기를 이끌고 하서 지구를 급습하여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그 전과는 대단하여 적 수급과 포로가 3만이 넘고, 휴도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금인을 탈취하고 기련산의 추도왕을 비롯한 5명의 왕과 왕자들 59명, 선우의 연지를 포로로 잡고 적 병력의 3/10을 섬멸하였다고 한다. 보고를 받은 무제는 곽거병의 전과에 흐뭇해하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는데, 자신이 선발한 약관 24세의 젊은 장수가 자신과 너무나 닮은 점과 그가 세운 전공이 나이에 비해 너무나 컷기 때문이다. 이제 위청의 시대가 가고 곽거병의 시대가 온 것이다.
곽거병은 2차에 걸친 출병으로 흉노 지역을 종횡무진하면서 흉노 본거지를 습격하고 반복 기습으로 흉노군 5개 부락을 괴멸시키고 흉노 선우 왕자 김일제를 포함한 왕족, 귀족, 장군, 흉노인 등 10만 명을 포로로 잡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우게 된다. 보급도 없이 흉노 지역을 종횡무진하는 곽거병의 1만 군대를 흉노군이 추적이 불가능할 정도로 종잡을 수 없이 종황무진하였기 때문이다. 곽거병의 신출귀몰한 그의 병력 운용과 기습은 흉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이에 무제는 탄력을 받아 고비사막 북방의 흉노 본거지를 기습하여 주력을 섬멸하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한나라는 무제의 지시에 따라 수많은 병력이 차출되고 군마가 동원되었으며 경제 정책과 조세 정책을 수립하여 군비도 확충하였다.
'막북전투'
기원전 119년에는 대장군 위청과 표기장군 곽거병에게 각각 5만 기를 주어 고비 사막 북쪽 흉노의 본거지와 주력을 정벌토록 하였는데, 곽거병에게는 '시련산 '북쪽 흉노 집결지와 본거지를 소탕하는 임무가 주어지고 위청은 흉노 왕정 본부의 선우 주력군을 소탕하는 임무가 분리되어 주어졌다.10만의 전방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무제는 무려 보병 50만과 10만 마리의 군마를 예비로 동원하여 지원토록 했다.
위청군에 소속된 과거 한나라 최고의 장수였던 이광은 위청과 곽거병에게 밀려 전공을 세우지 못하자 무제에게 선봉에 설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무제는 그러겠노라며 이광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 하고 실제는 장탕의 권유로 반역을 도모하려 했던 회남왕과의 관계를 의심하여 조신처럼 흉노에 투항할 것을 우려하여 위청에게 지시하여 선봉에 서지 못하게 밀지를 내렸다.
그러나 위청은 무제의 지시를 무시하고 이광 장군의 간청에 그를 믿고 병력 3,000을 주어 선봉에 세웠다. 흉노 선우는 위청군을 격멸시키기 위해 숲속에 매복하고 있었으며 가짜 본대를 위청군 전면에 배치했다. 위청은 흉노의 간계를 알고 선봉 이광으로 하여금 가짜 본대를 수차례 반복 공격토록하고 자신은 선우 본대가 나타나면 후방을 치기로 계획하였다. 이광이 공격하자 흉노군이 이에 말려들었다. 이광은 흉노 주력을 유인해 내는 미끼 역활을 하였는데, 흉노 선우가 결국 위청의 전술에 휘말려 본대를 투입하게 된다. 흉노 선우 본대는 앞 뒤로 포위되어 싸우다가 괴멸되면서 선우까지 전사하게 된다. 또한 위청군 선봉에 선 이광도 결국 장렬하게 전사하고 전투는 위청군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이 전투로 흉노 선우가 전사(실종?)되고 여러왕을 비롯한 흉노군 7만의 포로를 잡았다고 한다.
한편 곽거병은 막북 깊숙히 진출하여 흉노 본거지를 소탕하고 대승을 거두게 되는데, 이때 흉노군은 여러 식수원에 죽은 말, 양을 넣어 역병을 퍼뜨렸는데, 곽거병은 그 물을 마시고 본인도 모르게 역병이 걸려 돌아온다. 물론 한나라군도 수만 명이 전사하고 14만 마리의 말 중 3만 마리만 돌아오게 된다. 무제는 끼니를 잊고 전투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승리 소식이 전해지자 무제는 20년 간 기다려 온 최후의 승리에 감격하면서 <막북대전>은 한나라의 최후 승리로 마감하게 된다. 무제는 이광의 장렬한 전사 소식에 눈물을 흘리면서 곽거병 부대에 소속되어 있는 그의 아들 이감을 '관내후'에 봉하고 손자 이능을 직속부대인 호림부대에 배치하였다. 무제는 위청과 곽거병을 대장군 직보다 높은 '대사마'직을 부여한다. 이후 수십 년간 흉노의 한나라 변경 침입은 사라지게 된다.
개선 후 어느 날 전사한 이광의 아들 이감이 대장군 위청을 찿아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게 만들었다며 칼로 위청을 죽이려다 상처를 입히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소식을 들은 곽거병은 분개하면서 황제를 수행하여 나간 사냥터에 이감을 활로 쏘아 죽이게 되자, 곽거병으로부터 '자신이 죽였다'는 보고를 받은 무제는 '사슴뿔에 이감이 받혀 죽었다'고 소문을 내도록 하면서 , 사람을 물리친 뒤 곽거병의 살인 행위에 크게 분노하여 심하게 구타한 후 여론을 고려하여 곽거병을 서역 변방인 삭방으로 쫒아 보낸다. 무제의 명을 받고 서역으로 가던 곽거병이 갑자기 급사하는데, 아마 막북대전시 강물을 마신게 원인이 되어 역병에 걸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젊은 전쟁 영웅이 아깝게 사라졌다. BC117년 곽거병이 2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자 무제는 건설중인 자신의 무덤옆에 곽거병의 묘를 만들면서 막북의 기련산에서 석재를 운반하여 그의 비석을 세워 주었다고 한다.
위청과 곽거병의 활약으로 하서 지구를 획득한 한나라는 이른바 하서 4군(장액, 주천, 돈황 ,무위)을 설치하여 서역으로 가는 길을 확보, 흉노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BC115년~BC73) 흉노는 한의 대 공세 중 호전적인 이치사 선우가 사망(BC114)하여 그 세력이 더욱 약화되었다. <사기> 흉노열전에는 곽거병의 활약으로 고비사막 이남에서 흉노를 찾아 볼 수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의 상황을 흉노인은 "우리가 기련산을 잃어 가축을 먹일 땅이 없고 연지산을 잃어 여인들의 얼굴을 물들일 수도 없다." 고 탄식했다고 전하고 있다.
장건의 '오손국' 재파견
무제는 이때 장건을 다시 서역으로 파견하였는데, 이번 목적지는 서북쪽에 있는 '오손국'으로 파견하여 이들과 손을 잡고 흉노 협공 태세를 만들려는 계획이었다.
장건 사절단 이동 모습
이 무렵, 흉노는 이미 고비사막 북쪽으로 쫓겨난 상태였다.
장건 일행 300여 명은 도중에 흉노의 방해를 받지 않고 천산산맥 북쪽 '이리' 강 유역 '이시크쿨' 호수(키르키스탄 지역 천산산맥 분지의 호수)에 살고 있는 오손국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장건이 함께 협력하여 흉노를 치자고 끈질기게 설득하여도 그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오손국 역시 한보다는 흉노를 더 두려운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다. '오손'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주민들을 옛 혼야왕의 땅에 이주시켜 흉노를 방어하려한 장건의 계획은, 오손왕이 늙고 친 흉노파의 반대도 있어 군사동맹과 이주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으나, 오손은 한나라의 위세에 눌려 친한파로 돌아 서게 되었고 오손으로 부터 수 십 필의 명마(서극)를 답례로 받아 오손국의 사절단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귀국하면서 장건은 동행한 부사들을 대원과 강거(지금의 카자흐스탄지역), 대월지, 대하, 안식(이란), 신독(인도) 등으로 사신을 파견해 장래를 위한 포석을 깔았다. 이후 이들은 그 나라의 사신을 데리고 차례차례 중국을 방문해 서역 각국의 상세한 정보를 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눈을 통해 한의 강대함을 서역 각국에 알리게 되었다. 또한 이들 각나라와 비단을 포함한 종이, 붓, 도자기 등 많은 문물 교류가 이루어 지기 시작하였으며 많은 서역 물품인 포도와 석류, 검은 깨, 참깨, 호두, 완두콩, 오이, 당근, 유리, 목숙, 비파, 한혈마 등 셀 수 없는 많은 종류의 물건이 오고가는 교류가 시작되었다.
장건이 무제의 명을 받고 흉노를 협공하기 위하여 떠난 여정이 결과적으로 동서간의 교역과 문화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다. 장건은 기원전 115년 중국으로 돌아와 그 이듬해 기원전 114년에 죽었다.
한혈마(汗血馬)
하루에 천리(약 400km)를 달린다고 전해지는 한나라 시대 서역 대완국에서 산출되던 명마의 한 종류이다. 「피와 같은 땀을 흘리며 달리는 말」이라는 의미로 「한혈마」라고 불린다. 이 천리마는 한혈보마, 대완마 등으로 불렸고, 한 무제는 천마(天馬)라고 불렀다.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한 무제의 명으로 서역으로 파견되었다가 흉노에 포로로 잡혀 탈출한 장건의 보고에 의해, 대완(페르가나)에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명마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무제는 한혈마를 얻기 위해 대완에 특사를 파견하지만, 사신의 오만한 태도에 격분한 대완은 제의를 거절하고 귀향 도중 습격하여 사신을 참살하고, 대완마를 사기 위해 보낸 보물을 탈취한다.
기원 전 104년 이에 격분한 한나라는 원정군을 보내, 대완을 정벌하고 결국 한혈마를 얻었다. 무제는 한혈마를 얻은 후 감탄하여 「서극천마의 노래」를 만들게 하였고 「천마」라고 한혈마를 칭찬하였다. 감숙성 무위시의 뇌조묘 뇌대한묘에서 볼 수 있는 유명한 말의 동상·「마답비연」은 이 말을 모델로 했다고 전해진다.
3세기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여포의 죽음으로 관우의 애마가 되는 명마 적토마도 이 한혈마의 일종으로 추측된다. 김용의 소설 사조영웅전에서 나오는 곽정의 소홍마가 바로 이 한혈마이다.
월지(月氏, 月支)또는 대월지(大月氏, 大月支)
고대 중앙 아시아의 국가이다. 기원전 3세기 ~ 1세기 경, 북아시아, 중앙 아시아에 존재했던 유목 민족과 그 국가를 이른다. 월지라는 명칭은 한자로만 전해 내려오며, 그들의 종족적 기원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월지는 원래 중국의 감숙 성의 서부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모돈 선우 시기에 서방으로 쫓겨 가고 명칭을 대월지로 변경한다. 이후 박트리아에 자리잡은 대월지의 일부는 인도로 들어가 쿠샨 제국을 건설한다.
기원 전 3세기경 타림분지에 거주지를 두고 동서무역을 독점하여 당시에는 흉노를 압박할 만큼 강세를 유지했다.
이후 사기에 따르면, 모돈 선우(재위 기원전 206년 ~ 기원전 176년) 말기에 월지는 흉노에 패배하여 서쪽으로 쫓겨난다. 아울러 월지 지배하에 있던 서역의 나라들도 흉노의 영향권으로 들어간다. 이 때 일부가 남아서 서쪽으로 간 세력을 대월지(大月氏)라고 하고, 남아 있던 부족을 소월지(小月氏)라 불렀다.
기원 전 162년 모돈(冒頓)의 아들, 노상 선우의 공격을 받고 왕이 살해되었다. 이 때 노상 선우는 패배한 월지 왕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었다 한다. 패배한 월지는 더욱 서쪽의 아무르강(阿母河) 주변 소그디아나로 벗어나고, 이 땅에서 대월지는 대하(박트리아)를 정복하고, 대월지국을 세워, 중계 무역으로 자리를 잡는다.
기원 전 130년경 전한의 장건이 반흉노 동맹을 제안하러 가지만, 이미 안주할 땅을 손에 넣은 대월지는 단호히 동맹을 거절한다.
기원 전 1세기경, 토하라의 쿠샨 왕조가 강대해져, 이 땅을 쿠샨 제국(귀상)이 지배하고, 동서교역도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중국은 이 쿠샨 왕조도 대월지라고 불렀다.
대완국 또는 페르가나(러시아어: Фергана́, 우즈베크어: Фарғона)
중앙아시아 동부, 아랄 해로 흘러 들어가는 시르다리야 강 상류와 카라테긴 산지에 위치한 페르가나 분지를 중심으로 한 도시이다. 인종적으로는우즈베크계와 타지크계로 나누어진다.
오래 전에는 대완국(大宛國) 등 아리아계 국가가 성립되었다. 페르가나 분지는 명마의 산지이고, 한혈마(汗血馬)라고 불리는 명마의 산지였다. 전한의 무제가 대완을 침략한 배경에는 이 한혈마의 산지라는 이유가 있었다. 한나라 때에는 한자로 대완이라고 불렸고, 서진 이후는 페르가나의 파낙나가 사용되게 되었다. 풍요의 땅으로서 알려졌으며, 7세기부터는 돌궐 등 터키계 민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다.8세기에 아랍에 정복되었고 압바스 왕조의 지배하에서 이슬람의 영향 하에 놓이게 되었다.
오손 또는 우선(烏孫)
투르크어를 사용하는 유목 민족이었다. 오손족은 중국문헌에 따르면 중국의 북동부의 예지 근처에 살았다. 그러나 기원전 176년 경 일리 강과 이시쿨 호수의 영역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숑누에 패한 후 그곳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형성하였다. 그곳에서 그들은 5세기동안 머물렀다. 오손에 대한 중국의 가장 최근의 문헌은 서기 436년에 중국의 사절단이 방문한 것이다.
그들의 다음 운명은 투르크 왕국과 중앙아시아 특히 제티수 지역에 닥친 운의 돌연 역전과 관련있다. 그들의 이동의 상당한 흔적과 충격이 6세기에서 오늘날 까지 페르시아, 무슬림, 투르크와 러시아 문헌에 남아있다. 현재 그들의 후손은 약 250,000 명이며 서기 1세기의 인구의 절반정도이다. 우이신스는 두 종족이 있는데 둘라트와 사리 우이신(황오손)이 그들이다.
강거 (康居)
현재 우즈베키스탄 인근 지역에 세워진 고대 국가이다. 강거의 여름 수도가 지금의 타슈켄트이다. 위치는 소그디아나의 북쪽이며 다유안(페르가나)의 북서쪽 1000km 떨어져 있다. 기원전 128년 장건이 방문한 후 기록에 남겼다.
강거는 수당왕조시대에 강국(康國)으로 개명하였지만 그 당시에 영역은 곡투르트 칸의 돌궐인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서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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