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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가을 14 (언론에 대하여...그리고 퍼벌릭액세스 본문
우면산의 가을 14 (언론에 대하여... 그리고 퍼블릭 액세스)
언론의 기능
정치학자이며, 매스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이론적 연구의 4비조(鼻祖) 중의 한 사람인 라스웰(H. Lasswell)은 커뮤니케이션의 사회적 기능을 ①환경의 감시 ②환경에 대한 반응을 통해서 사회 각 부분의 상관조정 ③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문화적 유산의 전달이라는 세가지 기능을 제시한 바 있다. 또한 라이트는 라스웰이 제시한 세 가지 범주에 네 번째인 ④오락기능을 추가했다. 한편 맥퀘일(D.McQuail)은 새로 ⑤동원적 역할이라는 새로운 기능을 추가 시킴으로써 이것은 오늘날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보편적인 기능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① 환경의 감시기능
인간이 적응해야 하는 직접 환경이나, 외부 환경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관한 소식이나 정보를 수집해서 전달하는 활동이다. 신문이나 방송의 경우 뉴스 보도가 이 기능에 해당된다.
② 상관조정기능
이들 사건에 관한 소식이나 정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어떤 것인가를 선정하고, 이를 해설하고 평가해서 방향을 설정하는 활동을 말한다. 신문이나 방송의 경우 사설이나 논평 혹은 해설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③ 문화적 유산의 전달기능
각급 학교에서 교사가 학생들에게 지식뿐 아니라 한 국가 사회에 지배적인 규범이나 가치 태도와 같은 행위양식을 교육시킴으로써 학생들의 사회화에 기여하고, 보다 거시적으로는 한 사회의 문화나 전통을 계승시키는 것과 같이, 매스 커뮤니케이션도 사회 교육의 장으로서 교육적 기능과 문화적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④ 오락기능
문화적 기능의 일부분을 구성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개인적 차원에서 즐거움이나 휴식을 제공함으로써 심리적 보상과 긴장을 해소시켜준다. 신문이나 방송의 경우 연예오락, 스포츠, 신문소설, 연속 드라마가 그 좋은 예이다.
⑤ 동원적 역할(mobilizing role)
맥퀘일에 의하면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사회에서는 매스 미디어가 국가의 이익을 증진시키고, 사회발전과 특정한 가치나 행동유형을 확산시키는 에이전트 역할의 담당을 기대한다는 것이다. 매스 미디어의 동원적 역할은 발전도상국이나 사회주의국가에서 강조되는데, 발전도상국가의 경우 신문이나 라디오 그리고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서 가족 계획 캠페인, 농촌잘살기 운동(새마을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사회주의국가의 경우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하기 위해 미디어가 선전선동의 도구로 이용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언론의 중립성
현대사회에서 언론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좋은 언론이란 정치, 경제, 문화, 과학 등 모든 문제를 가능한 중립적이고 과학적으로 접근하여야 한다. 특히 이견이 있을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언론의 일방적이고 주관적인 의견 제시보다는 양쪽의 의견을 균형 있게 다루면서 판단은 독자나 시청자에게 맡겨야 한다. 그러나 가끔씩 비전문가이면서 또는 문제의 전후 사정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하면서도 단지 기사거리나 시청자 또는 독자의 눈길만을 끌기 위한 언론보도를 접하게 된다. 상호논란이 있는 문제에 대해 한쪽의 주장만을 편협적으로 보도하거나 목소리 큰 소수의 의견을 마치 전체인양 호도하여 기사화하는 경우를 볼 수 있으며 때로는 자체조사라는 알 수 없는 여론조사를 통하여 문제를 만들고 이를 주관적으로 확대 해석하는 기사도 심심찮게 접하게 된다.
언론의 편파보도는 사회악이다. 권력과 자본에 종속된 언론은 중립성을 상실하기 쉽다. 중립성을 상실한 언론은 독자로부터 인정받기도 힘들며 권력층을 비호하고 국민들을 호도하게 되면 언론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언론의 편파보도는 독재권력을 낳기 쉬우며 독재권력은 비판적인 언론을 가장 싫어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언론이 중립성을 지키기에는 한계가 있다. 자본을 투자한 자본가는 자신에게 유리한 이사진과 관리인을 임명하며 그러한 언론이 중립성이나 독립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어려움이 있다. 또한 권력층에 비판적인 언론을 궘력층이 그대로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언론을 탄압하며 세무조사 등 갖가지 방법으로 자본가를 압박하거나 매수하게 된다.
언론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맨 먼저 주창한 선구자는 「실락원」의 저자 존 밀턴이었다. 밀턴은 출판물에 대한 허가·검열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역사적인 문헌 「아레오파지티카」(Areopagitica)를 발표했는데 이는 자유언론을 옹호하는 고전적인 전거가 됐다. 그는 허가·검열제에 반대하는 3가지 주요한 논거를 제시했다.
첫째, 허가·검열은 악의 부모가 생산한 악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로마교회에 반대하는 입장과 이론을 가진 사람을 박해하기 위해 만든 것이요, 천주교회의 비위에 거슬리는 의견을 억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허가·검열은 실질적으로 실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허가·검열 제도로 출판물을 통제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의 마음까지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수많은 책, 팜플렛, 신문 등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능률적으로 검열·규제한다는 것은 날이 갈수록 기술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셋째, 서적은 살아 있는 사람의 정신을 표현한 것이다. 진리는 더 이상 특정개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자유롭고 공개된 경쟁에 의해 그리고 대중적 인정에 의해서만 생존할 수 있는 독특한 힘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자유로운 토론은 반드시 허용돼야 하며 모든 아이디어는 자유로운 공개시장(free and open market of ideas)에서 자율조정돼야 한다고 밀턴은 생각했다.
밀턴의 자유로운 공개시장과 자율조절의 개념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뒷받침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고 있다. 물론 일체의 사상을 자유공개시장에 방임할 것인지 아니면 일정한 제한과 규제가 요구되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언론자유의 말살이 언론자유의 허용보다 훨씬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민주주의가 최선이 아닐지 모르나 독재보다 나은 것과 같으며, 이는 또한 역사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라 할 만하다.
나아가 언론의 자유를 주장한 이론가로서 철학자 J. S. 밀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자유론」(On Liberty)에서 밀은 표현의 자유를 자연권이 아니라 사회적 효용(social utility)에 의거해서 공리주의적으로 정당화했다. 나아가 과거의 자유주의자들이 정부의 권력을 제한함으로써 자유가 확보된다고 믿은 것과 달리 자유에 대한 위협으로서 ‘정부의 폭군’을 경고했을 뿐 아니라 ‘다수의 폭군’도 경고했다. 즉 다수가 소수의 의견을 억압함으로써 개혁, 통찰력, 나아가 진리를 질식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밀의 주장에 따르면 언론의 자유는 거의 무한정 허용돼야 하며 이를 억압하려는 시도는 거의 모든 경우 비난받을 일이라는 것이다. 표현된 의견이 다수의 것이든 극소수의 것이든 상관없으며, 심지어 이 세상에서 그런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이 오직 하나일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밀에 따르면 전 인류가 같은 의견이고 오직 한 사람만 반대 의견일지라도 인류가 그 사람을 침묵시키는 것이 정당하지 못한 것은 그 한 사람이 권력으로 전 인류를 침묵시키는 것이 정당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밀의 논변은 2가지 경우로 구분된다. 하나는 다수자나 관계당국이 억압하고자 하는 의견이 진리일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의견이 허위일 경우인데 밀은 두 경우 모두에 대해 자유와 관용을 요구했다. 우선 억압당하는 의견이 진리인 첫번째 경우는 어떤가? 만일 우리가 그러한 의견을 묵살시킨다면 그것은 곧 진리를 묵살시키는 셈이 될 것이다. 또한 억압하는 자들이 그런 의견을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을 경우 그는 자신의 무오류성을 가정하는 셈이다. 역사를 통해 권력을 가진 자가 자신의 견해가 오류일 수 없다고 가정하고 그후 언젠가 진리로 판명될 소수자의 의견을 억압하는 일이 수없이 자행돼 왔다.
나아가 다수자나 관계당국이 반대 견해가 진리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애써 억압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만일 억압당하는 의견이 두 번째 경우처럼 한낱 허위일 뿐이라면 그것이 백일하에 토론돼 그 허위성이 모든 사람들에게 명백히 폭로되는 것을 막아야 할 이유는 더욱 없을 것이다. 사실상 권력을 쥔 자들은 그들이 유린하려는 의견이 진리일 수도 있으며 자신의 견해가 그릇된 것일 가능성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가능성에 대한 우려 때문에 자신의 그릇됨을 솔직히 받아들이기보다는 반대 견해를 억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밀에 대한 반대자는 다시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시할 수 있다. 어떤 견해는 비록 우리가 그것이 거짓임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사회적으로 지극히 유해한 것으로 추정돼 미풍양속을 보존하고 문명을 보호하기 위해 그것을 억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를 명분으로 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유용성을 근거로 해서 우리와 다른 견해를 억압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밀은 사회적 유용성, 즉 공리를 근거로 한 반론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그에 따르면 어떤 견해가 공공의 복리에 기여하는 유용성이 있는지 여부도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토론에 공개돼 공적인 판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종교적 믿음이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판단 역시 오류가능한 판단이며, 다른 믿음과 마찬가지로 백일하의 논쟁에 회부돼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경우와 달리 억압의 대상이 되는 견해가 거짓으로 판명된다고 해보자. 그럴 경우도 그것을 억압하는 일은 정당한 행동이 되지 못하는가? 이러한 반문에 대해서도 밀은 역시 부정적인 견해를 제시한다. 즉 그 경우에도 역시 억압자는 그릇된 일을 한 셈이다. 그 한가지 이유는 그는 그것이 거짓임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것을 억압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는 그것을 객관적이고 공정한 논의에 회부하고자 하는 용의를 갖지 않았으며 그것을 억압함으로써 논의의 기회를 박탈하게 되고 그 진위 여부를 알 수 있는 계기를 차단해 버리는 셈이다. 설사 어떤 의견이 잘못인 경우도 그것을 억압하면 진리와 오류의 대결이 가져오는 바 진리에 대한 보다 명료한 지각과 선명한 인상을 잃게 하는 불이익이 결과하게 된다는 것이다.
밀에 따르면 결국 자유는
첫째, 인간의 자기 실현을 위해 반드시 요구된다는 것이다. 자유에 대한 옹호는 밀에 있어서 2가지 기본적인 믿음에 기초하고 있는 셈이다. 하나는 인간의 본성이 다양하며 그러한 다양성(diversity)이 그대로 자유로이 표현되도록 허용될 경우에만 만개할 수 있다는 믿음이며, 다른 하나는 살 만한 가치 있는 삶임을 말해주는 자율성(autonomy)에 대한 믿음이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적절한 범위 내의 다양한 선택지가 없을 경우는 성립하지도 유지될 수도 없다. 요약하면 밀은 자유를 자율성에 의거해서 정당화하고 있으며 나아가 자율성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다원주의가 요구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언론의 자유는 개개인의 인격완성, 자질향상, 능력개발을 위해 필수불가결의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언론의 자유는 정치적 자유를 포함한 다른 모든 자유의 전제가 되는 핵심적 자유다.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는 바를 자유롭게 남에게 전달할 수 없다면 다른 어떤 자유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언론의 자유는 다른 자유들과 더불어 민주사회의 초석이라 할 수 있다. 민주주의란 그 누구도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할 만한 현자는 없으며 보통사람들의 중지를 모으고 합의(consensus)를 도출하고자 하는 정치체제다. 중지를 모으고 합의를 도출하는 민주적 절차에 있어 핵심은 바로 언론의 자유라는 것이다.
끝으로 언론의 자유는 지식을 얻고 진리를 추구하는 데 필요불가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이들이 다양한 의견을 자유로운 공개시장에 개진하고 그것이 자율조정되는 과정을 거쳐 진리가 부각되고 선이 승리할 수 있으며 나아가 이는 또한 인간이성에 대한 믿음에 근거를 두고 있다. 공론의 과정이 자유사회의 필요조건이고 언론자유는 공론의 필요조건이라 할 수 있다. 공론이야말로 공중의 지적 역량을 키우며 이를 통해 시민사회가 성숙할 수 있는 까닭에 언론의 자유는 또한 시민사회의 성숙을 위한 필수요건이라 할 수 있다.
언론의 자유와 책임
언론의 자유를 위시해서 자유는 인간다움과 인간적 삶을 위해 반드시 보장돼야 할 지고의 가치가 아닐 수 없다. 다른 것을 명분으로 해서 자유가 제약될 경우 우리는 비인간적 억압과 유린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무제한적이고 무제약적인 자유는 진정한 자유라기보다는 방종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유에 대한 정당한 제한과 제약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바로 자유 그 자체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유는 자유 그 자체에 의해서 그리고 자유 그 자체를 위해서 정당하게 제한 혹은 제약될 수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나의 자유가 타인의 동등한 자유를 위해 제약되고 제한될 경우 그러한 제한과 제약은 정당화된다는 뜻이다.
이상과 같은 논리에서 자유나 권리는 의무나 책임과 상관개념(correlative terms)으로서 성립하며, 그런 점에서 조건부 자유요 조건부 권리라 할 수 있다. 나의 자유나 권리는 타인의 동등한 자유 및 권리와 양립하는 한 인정될 수 있다. 이는 자유를 보장받고자 하는 나의 권리가 상대방의 동등한 자유에의 권리를 보장할 의무와 책임을 함축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런 한에서 나의 자유가 일정 정도 제약됨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 사회의 성원 모두가 누리는 자유의 전체계 혹은 자유의 총량이 최대화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언론의 자유가 동시에 언론의 책임을 동반한다는 논거는 언론이 갖는 기능상의 이중성에서 유래되기도 한다. 언론매체는 야누스처럼 2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우리가 직접 접근하기 어려운 각종 정보와 사회적 환경을 가능한 한 정직하고 진실되게 보도하고 그에 따른 분석과 시비를 가리는 공기적(公器的) 기능이다. 언론매체가 지닌 또 하나의 얼굴은 뉴스를 상품으로 이윤추구를 도모할 수밖에 없는 기업적(企業的) 성격이다.
기업으로서 언론의 성공이 독자적 입장에서 자유로운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까닭에 이 또한 자유언론의 전제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언론의 기업화는 자본주의적 법칙에서 종속을 뜻하며, 그런 의미에서 언론의 타락을 결과할 수 있는 까닭에 이는 언론의 공기적 기능과 갈등관계에 있게 된다. 나아가 언론매체의 독과점 현상은 다원적 정보, 다각적 시각, 다면적 견해가 밀턴의 이른바 자유롭고 공개적인 아이디어의 시장을 형성하는 기반까지도 허물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혹자에 따르면 이제는 언론의 자유 여부가 아니라 언론의 횡포 여부가 문제라는 것이다. 선동적이며 선정적인 무절제한 폭로, 국정과 관련된 중대현안들에 대한 과장된 추측과 논평, 정확하지도 않고 심지어 사실무근한 보도와 논평, 사생활의 과도한 침해와 명예훼손 등은 분명 언론 횡포의 대표적 사례라 할 만하다. 자신의 치부나 과오에는 관대하고 남의 경우는 가혹하게 논평하는 관행, 오보나 과장보도가 확인된 경우도 정정에 인색한 것 역시 언론 횡포의 또다른 사례다. 이에 편승해 사이버 언론기관과 언론인의 각종 이권개입 및 협박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언론의 사명
언론매체의 자본주의화로부터 언론의 횡포 같은 이상과 같은 비판적 여론 속에서 타임지의 발행인 핸리 루스가 출연하고 지식인을 대표하는 시카고대 총장 로버트 허친스를 의장으로 하는 언론자유위원회(The Commission on Freedom of the Press)가 구성, 장장 4년여에 걸친 연구조사의 결과로 발표한 ‘자유롭고 책임있는 언론’(A Free and Responsible Press)이라는 보고서는 이른바 단순한 언론의 자유가 아니라 사회적 책임의 동반을 강조한 역사적 문건으로서 오늘날 우리의 언론 상황에서도 타산지석으로 음미해볼 만하다.
이 보고서는 자유로운 사회가 자유로운 언론을 요구한다고 전제하나 신문의 기능에 필수적인 5가지 요구사항은 규정하고 있다.
첫째, 언론의 사명은 매일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정확하고 진실되며 종합적인 보도를 해야 한다. 이는 허위보도가 아닌 정확한 보도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사실(fact)과 의견(opinion)을 분명히 구분, 혼동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으로서 이 위원회는 사실을 그저 객관적으로 충실하게 보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건의 의미를 알 수 있는 문맥적 진실보도를 요구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사실보도나 객관적 보도는 절반의 진실 혹은 미완성의 보도가 되기 쉬우므로 보다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진실보도를 강조한다.
둘째, 언론은 다양한 설명과 비판이 제안되고 교류되는 광장 즉 공론의 장이어야 한다. 신문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각종 토론과 논쟁을 다각도로 공평하게 게재할 책임을 지니며 자신의 입장에 반하거나 대립되는 것까지도 보도함으로써 이른바 아이디어의 자유롭고 공개적인 시장임을 보장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스스로 주장하는 언론의 자유는 결국 자기모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 언론은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집단의 대표적인 의견과 입장을 반영해야 한다. 언론이 특정 계층이나 집단의 입장을 왜곡하거나 편파적으로 보도함으로써 계층과 집단들간의 긴장과 대립을 조장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특히 이 점은 현금 우리 사회에서 전개되는바 언론이 편가르기의 주범인 동시에 언론들간의 편가르기 현상을 노정함은 크게 언론의 책임에 위반되는 일이라 할 만하다.
넷째, 언론매체는 사회가 공유하는 가치나 목적을 명확하게 제시해야 한다. 이는 논설란이 갖는 하나의 기능으로서 바로 언론의 교육적, 문화적인 기능을 지시하며 언론이 학교교육 이상으로 교육적이고 문화 전수적인 기능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피교육자들은 학교에서 교사들과 지내는 시간의 2배 정도의 시간을 언론매체, 특히 TV 앞에서 보내고 있다는 보고가 있는데 이로부터 우리는 언론매체가 어린이의 인격형성에 어떤 위력을 지니는지 짐작할 만하다.
다섯째, 언론매체는 매일매일의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이른바 정보의 자유(freedom of information) 혹은 알권리를 충족시켜야 한다. 오늘날 시민들은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더 현실성 있는 정보를 요구하기 때문에 뉴스와 의견은 광범위한 영역을 커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언론의 존재 명분이나 정치의 명분은 같다. 정치가 그렇듯이 언론도 국민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 그래야 마땅하다. 국민의 행복에 도움이 안 되는 언론은 사회의 악이다. 정치인이 입을 열면 국민을 팔듯이 언론은 정론(正論)이니 직필, 공정보도, 진실보도 등의 용어들을 아무 죄의식 없이 사용한다.
언론이 정론 직필 공정보도 진실보도를 해야 하는 것이 누구를 위해서인가. 독자인 국민을 위해서다. 국민이 그것을 바라기 때문에 국민에게 충실(loyalty to citizens)하는 것이 언론의 사명이다.
따라서 정치가 잘못되고 언론이 참 구실을 못하면 정치 언론은 다 같이 국민에게 죄짓는 것이며 국민을 배신하는 것이 된다. 우리 사회는 툭하면 의리를 찾는다. 의리 얼마나 좋은가. 정치와 언론은 국민에 대한 의리를 배신하면 안 된다. 이같이 큰 의리를 지키는 것이 참 의리다. 깡패사회나 골목의 의리처럼 파당이나 사주 한사람의 의리에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언론은 어찌 보면 레토릭에서 정치보다 한 발 더 앞선다. 민주주의·자유·인권의 파수꾼임을 자처한다. 권력의 횡포로부터 이 같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켜내겠다고 큰소리를 친다. 그렇지만 무서운 권력이 뚜벅뚜벅 언론 앞으로 걸어오면 뒤로 물러서고 비굴해진다.
나폴레옹이 크레타 섬을 탈출했을 때 그를 비하했던 언론이 그가 파리에 나타나자 ‘나폴레옹 황제 만세’를 불렀듯이 말이다. 지금이라고 크게 다른가.
지금 우리 사회는 평화가 절실하다. 국민 통합, 화합이 중요하다. 정치권의 갈등이 국민의 갈등으로 번지는 것을 막아야 할 최후의 보루는 언론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론은 우리 사회의 갈등을 더 부추기고 있지 않은지 오만을 털고 냉철히 성찰해야 한다. 들끓는 정치 갈등, 사회 갈등, 종교 갈등. 사회와 종교 간의 갈등의 해결사는 언론이 맡아야 한다.
어디 시대가 부르는 그런 참 언론 없을까.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 믿는다.
언론의 현실과 미래
그런 시대가 가고 지금은 언론에 자유가 넘쳐나지만 반대로 미디어산업의 위기 또는 저널리즘의 붕괴라는 위험신호가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가 됐다. 수 많은 형태의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고 그것들이 벌이는 끝없는 경쟁이 시장의 질서를 파괴하고 미디어가 목숨처럼 지켜야 할 정확성과 책임을 깔아뭉개는 일이 거의 날마다 벌어지고 있다.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는 미디어 전체가 수용자의 신뢰를 잃고 미디어의 사회 통합 기능마저 떨어뜨리고 마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미디어 환경의 최근 변화는 인터넷이라는 온라인 매체가 시도 때도 없이 쏟아내는 무차별, 무분별한 의사(擬似) 뉴스의 양산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뉴스원이 분명치 않고 따라서 정확도가 현저하게 떨어지는 말을 언론이라는 허울로 퍼뜨리는 것을 언론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언론의 책임이나 권위, 또는 자유니 하는 규범의 틀을 벗어던진 것은 그러나 인터넷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른바 정통 언론을 자랑하는 신문·방송도 그런 시류에 편승해서 무책임하고 부정확한 정보들을 양산하는 데 동조하고 있는 건 아닌지 깊이 반성해야 할 시점이다.
미디어에 대한 신뢰가 추락했다는 것은 언론이 그 사회적 책임을 질 수 없게 됐다는 말과 같다. 언론 교과서에 나오는 말대로라면 만원극장에서 불이야 하고 소리를 질러서 극장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무책임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미디어의 신뢰 추락이라는 무서운 현상이 한국만의 사정은 아니다.
최근 한국 언론은 정파(政派)의 이해관계에 따라 보도와 논평에서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원칙을 유린한다는 지적을 듣고 있다. 신뢰를 떨어뜨리는 가장 큰 병폐다. 창피하고 병적인 이 현상을 고치는 유일한 길은 언론 본래의 신뢰를 되찾는 것뿐이다. 미국 같은 언론 선진국에서도 사정은 거의 비슷하다. 최근의 한 독자 조사 결과(Pew Research Center의 7월 조사)는 그것을 더 심각하게 보여주고 있다. 조사 대상의 절반을 훨씬 넘는 63%의 응답자는 보도 기사가 정확하지 않다고 보고 있으며, 29%만이 그 정확도를 인정하고 있다. 1985년 첫 조사 때는 보도의 정확 55%, 그 반대는 34%였다. 지난해의 조사 결과는 전자가 39%, 후자는 53%였다. 절반이 넘는 다수가 부정확한 보도를 날마다 접하고 있다는 것은 가공할 공해다.
뿐만 아니라 무수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뉴스원은 대개의 경우 입맛에 맞도록 가공한 사실의 일부만을 미디어에 제공한다. 매끈하게 만들어진 사실, 어느 한쪽에 편향된 왜곡된 사실이 뉴스라는 이름으로 전달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왜곡 현상이 해마다 심해진다는 건 그렇다치더라도 놀랍게도 미디어 쪽에도 만연되고 있다는 것이 보고서의 지적이다.
신뢰는 정치의 가장 큰 덕목이라는 말을 자주 듣지만 미디어, 언론이야말로 독자·시청자의 신뢰를 잃으면 아무리 좋은 말도 의미 없는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 신뢰는 그러나 하루 아침에 쌓을 수 없다. 진실을 추구해 마지않는 굳은 신념과 끊임없는 정진만이 이룰 수 있는 목표일 것이다.
[문우언론재단이사장]
얼마전 시민단체에 의해 열린 퍼벌릭액세스, 즉 시민영화제가 열렸다.
2001년부터 열리기 시작한 이 영화제는 내년이면 10회째라고 한다. 매스미디어가 모두 대기업,정치권이 장악하여 일반대중들에게 일방적인 언론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현실에서 일반대중들이 자신들의 표현하고자 하는 이야기나 주장을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 헌법에 보장된 진정한 언론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시도라 할 것이다.
퍼벌릭액세스(Public Access) 란, "매스미디어로부터 소외된 공중이 자기의 의견을 표명하기 위해 매스미디어에 그것에 필요한 지면이나 시간을 요구하여 그것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권리"라고 할 수 있다. 요컨데 수용자가 미디어 측의 부담으로 신문의 지면이나 방송의 시간을 요구하여 자유로이 의견이나 작품 등을 나타낼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이렇듯 액세스권은 매스미디어가 점차 대규모화하고 발전하게 됨에 따라 소수의 자본가나 정치권력에 장악됨으로써 일반대중이 언론표현의 자유를 누리기 어렵게 된 상황에서 그들의 권리를 보장해 주기 위해 등장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매스미디어가 거대화,독점화됨으로써 언론의 자유가 미디어를 소유하거나 지배하는 소수의 계층이나 집단의 자유로 전락하였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의 언론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액세스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제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액세스권은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독점자본이 장악하고 있는 기존의 언론 구조를 불변의 현실로 용인하는 가운데 제한적인 작은 부분에서의 반론권 등 액세스권을 법률적 권리로 확보하자는 측면에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액세스권에 대한 논의는 보다 적극적으로 발전될 수 있다. 거대 자본의 미디어로 하여금 약간의 지면이나 시간을 할애하도록 요구하여 보장받는 정도가 아니라 시민들이 직접 매체를 소유.운영함으로서 언론의 자유보다 풍부하게 누릴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국민참여방송의 이론적 근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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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기특한 카메라의 발칙한 상상, 제9회 퍼블릭액세스 시민영상제
내년이면 벌써 10주년을 맞이하는 퍼블릭액세스 시민영상제의 올 해 슬로건은 “기특한 카메라의 발칙한 상상”이다. 시민들이 참여하는 문턱 낮은 영상제의 원조격인 이 행사는 2001년부터 해마다 열려왔다. 시민영상제답게 작품을 출품한 모든 시민들은 10대부터 50대까지 나이불문, 모두 ‘감독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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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제 폐막일인 25일,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광화문 미디액트의 대강당은 시민감독들이 뿜어내는 발랄하고 신선한 영상에너지들로 가득했다.
마침 시각장애인이 주인공인 ‘조금 불편한 그다지 불행하지 않은 0.24’가 상영된 후 감독과의 대화가 열리고 있었다. 제작, 감독, 주연까지 직접 1인 3역을 해낸 시각장애인 임덕윤 감독은 말했다. “이 영화를 본 관객 한 분이라도 시각장애인을 도울 때 꼭 인기척을 하고 도움을 주게 된다면 나는 바랄 게 없다. 한국인들이 정이 많아 그런지 (시각장애인을 보면)일단 붙잡고 본다(웃음).” 장애인을 도우려고 붙잡는 손길을 뱀으로 형상화한 영화 속 한 장면을 말하는 것이다. 도우려 내민 손길이 장애인 당사자에게는 오히려 위협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단다. 그는 행사 장소나 리플렛 등에도 장애인 접근성을 좀 더 높였으면 하는 따끔한 지적까지 보탰다.
이어서 원주에서 올라온 여고생 감독들의 재기발랄한 영화 ‘날아라 병아리’와 ‘비비디바비데부’가 상영됐다. 이 당찬 여고생 감독들은 초등학교 조기교육 열풍을 따끔하게 비판하고, 도농 간의 격차를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이번 영화제 일반부문에서 작품상을 받은 ‘오늘도 난, 외출한다’의 수민 감독은 대구의 여성영상상영공동체 핀다[Find_A]에서 활동하는 여성감독이다. 장애여성의 독립생활을 다룬 이 영화는 결혼은 안 하지만 아이를 키우고 싶은 장애여성의 고민을 담고 있다. 그녀는 상영소감을 담담하게 말했다. “다양한 정체성과 삶을 가진 여성들을 만나고, 그 얘기를 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영상의 힘이 있는 것 같다. 오늘 같은 자리도 마련 되서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 여러 삶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소통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영상의 힘, 다양성, 소통. 퍼블릭액세스의 정신을 표현한 말들이다. ‘영상의 힘’은 비단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현실의 문제를 비판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88만원 세대의 고민과 넋두리, 그리고 희망까지 자신의 얘기를 솔직하게 담아낸 ‘내 청춘을 돌려다오’로 이번 영상제의 대상을 수상한 김은민 감독은, “다큐를 찍으며 암울한 88만원 세대였던 내 자신이 능동적으로 되가는 것을 느꼈다.”는 말로 영상의 힘을 표현했다. 카메라를 든 그녀는 더 이상 무기력한 88만원 세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경험이 그녀에게는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고 한다.
시민영상제인만큼 작품을 출품한 감독들의 면면도 다양했다. 공동대상을 수상한 ‘휴대폰을 지켜라’의 황예지 감독은 부산에 사는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이다. 어린이 및 청소년 부문에는 고등학교 영상반, 예술고 학생들, 카메라로 놀기 좋아하는 일반 학생들까지 다양한 학생감독들의 작품이 상영되었다.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체스’의 김수랑 감독은 7전 8기 끝에 영화제 수상의 꿈을 이룬 감동으로 눈물을 흘렸다. 일반계 고등학교의 영상반 출신도 아닌 그는, 친구들과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좌충우돌했던 눈물겨운 노력담으로 좌중을 웃겼다. 일반부문에는 장애인, 88만원 세대, 영화전공자, 방송사 PD지망생, 50대 회사원 등 다양한 시민감독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출품했다. ‘화씨 2008’을 만들어 일반부문 작품상을 수상한 감독 3명은 영화제작학교에서 만난 사이다. 이들은 촛불집회라는 공동의 주제로 각 세대가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말하고 싶어 카메라를 들었다고 한다. 감독 3명 역시 청년층과 장년층으로 세대 간 의기투합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이번 영상제의 특징에 대해 물으니, 이희완 영화제 사무국장은 “총 110여 편이 출품되어 32편이 상영되었는데, 청소년 부문은 드라마가 압도적으로 많고, 일반부문은 다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한다. 청소년들은 상상력에, 어른들은 비판과 성찰에 주력한 흔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청소년 감독들의 영화를 보니 세계최고 수준의 억압을 뚫고 이런 상상력을 ‘끝내’ 유지하고 있는 우리 청소년들이 그저 대견할 따름이다.
발랄한 청소녀의 나레이션이 돋보였던 ‘촛불은 미래다’의 대사 한 마디가 떠오른다. “내 생애 최고의 동문서답이다. 아 놔~, 공부해야는데 헌법 1조까지 다시 알려줘야 하나!”. 그 많은 촛불은 다 어디서 샀냐는 이명박 대통령의 의문에 대한 청소년 버전의 답이다.
영화평론가인 염찬희 집행위원장은 “일반 부문이 촛불이나, 88만원 세대 등 현실의 문제에 천착한 다소 모범생의 모습이라면, 청소년 부문은 자신들의 눈으로 바라 본 세상에 대해 자유롭고 재기발랄한 상상력들을 발휘한 점이 눈에 띄었다”고 했다. 시민영상제인만큼 영화적으로 매끄럽게 잘 빠진 영화보다는, 조금 거칠더라도 날것 그대로의 문제의식을 잘 담아낸 흔적들에 더 후한 점수를 주었다고 한다. 다른 전문 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들이 오히려 수상을 못 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것이 퍼블릭액세스의 정신이기도 하다.
시민 사회자의 유쾌한 사회로 이틀 동안 열린 영상제는 막을 내렸다. 어느 덧 10회를 바라보고 있는 영상제를 둘러보니 감회가 새롭다. 지난 영상제의 슬로건에는 이 행사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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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제 1회 퍼블릭액세스 시민영상제의 슬로건은 ‘시민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였다. 2회 때는‘시민이여 캠코더를 들어라’, 3회는 ‘캠코더로 세상을 말하자’. 4회 ‘캠코더로 상상력을 높여라’, 5회 ‘캠코더로 세상을 바꾸자’까지, 초반 이 행사는 다소 선동적이고 계몽적인 슬로건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중반을 넘기면서 퍼블릭액세스는 ‘다양함’과 ‘소통’, ‘상상력’등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세상을 바꾸자고 소리 높이지 않아도, 이미 카메라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성찰하면서, 자신을 변화시키고, 다양한 삶을 긍정하는 영상의 힘을 알아챘는가 보다. 이번 영상제에 영화를 출품한 어느 감독이 말하길“나 하나가 바뀌는 게 세상이 바뀌는 시작인 것 같다”고 한다.
바로 그거다. 기특한 카메라의 발칙한 상상들이 모여 세상을 바꾸고, 나를 바꾸고, 결국 세상을 긍정할 수 있게 되는 것, 퍼블릭액세스는 그런 이들의 상상력을 모아 내고, 펼쳐 주고, 함께 나누는 진정한 소통의 장이다.
이 꽉 막힌 불통의 시대에 열린 소중한 시민의 행사. 내년에 열릴 제10회 퍼블릭액세스는 또 어떤 소통의 공간이 될까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서초동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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