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우면산의 봄 11 본문
우면산의 봄 11
지난 겨울 눈 내린 우면산 등산길, 날씨가 더워지는 요즘 시원함을 느껴보자!
눈내렸던 고개길, 지금은 초록 옷으로 갈아입고 여름을 재촉하고 있다.
부패와 역사
부패는 인류 역사와 같이 궤를 같이하면서 성장하여 왔으며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재물에 대한 탐욕은 끝이 없으며 삶의 수단이며 원천적으로 재물을 떠나서는 부귀영화를 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부패는 우리 역사속에서도 시대를 막론하고 나라의 지도층이 앞장서서 권력과 힘을 앞세워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는 것으로 일관하여 왔다. 재물은 권력을 만들 수 있었으며 권력은 다시 재물을 만들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변이 일어나면 기존 권력층의 재산과 가솔들은 모두 정변에 성공한 자들의 것으로 분배되었다. 그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나누어 갖고 처자식들은 노비로 전락하여 성공자들의 집안에 귀속되었다. 그들은 온갖 권세를 누리며 호의호식하면서 문벌을 키워나갔으며 대대손손 번영을 누리다가 다음 정변에 몰락하는 비운을 겪게 된다.
등산로에 외로이 피어 있는 산수유
비운의 왕 광해군!
광해군은 보위에 오를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광해군은 선조의 후궁 공빈 김씨의 소생으로 서출인데다가 장자도 아닌 차자였다. 그렇다고 부왕인 선조가 총애한 것도 아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신립이 충주 탄금대에서 패전했단느 비보를 듣게되자 황급히 비내리는 날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뒤로하고 임진나루를 건너 개성을 거처 선조가 평양성에 당도하자 대신들이 국난의 위기를 내세워 세자를 책봉할 것을 간곡히 주청하자 하는 수 없이 광해군을 세자로 지명했다.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분조를 맡겼다.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고 함경도와 강원도 일대를 순행하면서 근왕병을 모집하는 한편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선조는 전란 와중에 명나라에 세자책봉을 여러차례 주청하였으나 명나라는 적자도 아니며 그것도 차자라는 이유로 싸늘하게 거절했다. 1592년부터 1604년까지 13년 동안 다섯 차례나 주청사가 북경에 갔으나 모두 거절 당했다. 당시 명나라 사정상 차자인 광해군을 승인할 경우 명 황제 신종이 아직 황태자를 결정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더구나 승인을 하지 않았다. 명나라는 장자인 임해군을 왕세자로 정하도록 강요했으나 임해군은 성질이 포악하여 대부분의 군신들이 반대하고 있었기에 광해군을 세자로 주청하였던 것이며 선조는 승인했던 것이다.
선조는 임란 후 재위 33년(1600년)에 의인왕후가 사망하자 새로운 왕비를 맞아들이면 적자를 볼 수 있다는 점과 임진란을 자초한 군왕인 자신보다 조정과 민간에서 더 많은 신망을 얻고 있던 광해군을 엄격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이때 선조의 나이는 48세 였다. 새 왕비를 맞아들여 적자를 생산하고픈 마음이 절실하였을 것이다. 결국 2년 후 선조는 50세 나이에 18세인 이조좌랑 김제남의 딸을 새 왕비로 맞아들였다. 선조 사후 인목대비로 추존된 새 왕비는 결혼한 지 4년 뒤인 선조 39년(1606년)에 마침내 비운의 영창대군을 낳았다.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선조의 마음은 빠르게 적자에게 기울었다. 광해군은 적자가 태어나자 선조의 더욱 심한 냉대에 억장이 무너지는 듯 하였을 것이다.지난 세월이 허무하고 부왕인 선조의 변심에 불화가 치밀어 올랐을 것이다.만약 영창대군을 세자로 다시 책봉하였다면 광해군은 어떠한 행동을 했을 까? 아마 일찌기 족새를 채워 죽게 만들었거나 반정을 도모했을 것인지도 모른다.
선조가 재위 41년(1608년)만인 57세의 나이로 운명했다.선조가 운명 직전 영창대군의 앞날을 부탁하기 위해 전임대신 일곱 명을 불렀다. 영의정 유영경은 현임 대신만 불렀다고 속인 후 혼자 선조의 유언을 들었다. 선조가 광해군에게 보위를 불려줄 것 뜻을 밝히자 유영경은 완강히 반대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자 광해군에게 전위하는 교서를 자신의 집에 감추어 두고 소북파인 병조판서 박승종과 공모한 뒤 군사를 동원하여 대궐을 둘러쌌다.
얼마 뒤 이 사실이 정인홍과 이이첨 등 대북파에게 발각되었다.이들은 임종 직전의 선조를 찿아가 유영경을 강력히 처벌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선조는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운명하고 말았다. 선조가 죽자 유영경은 인목대비를 찿아가 속히 왕비의 명령을 발표해 영창대군을 즉위시킨 뒤 수렴청정에 나설 것을 종용했다.
순간 24세의 인목대비는 순간 크게 흔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16년 동안 세자 자리에 있던 33세의 광해군을 제치고 강보에 싸인 두 살짜리 영창대군을 후계자로 발표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고 판단했다.소북파인 박승종이 병권을 장악하고 있으나 자칮 선왕의 유명을 날조한 역도로 몰려 떼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고 판단하고 광해군을 즉위시킨다는 언문 의지를 내렸다.
일단 위기를 넘긴 광해군은 즉위하게 되었고 명나라의 조선 국왕 승인도 어렵사리 받아냈다. 광해군은 천신만고 끝에 보위에 올랐지만, 즉위한 뒤에도 안팎의 여러 도전을 받아 커다란 곤경에 처해 있었다. 당시 광해군을 절대적으로 지지한 세력은 정인홍을 수장으로 한 대북파였다. 광해군 3년(1611년) 정인홍이 희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의 문묘종사를 거부했을 때 성균관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자 이들 유생들을 과감하게 축출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에 다른 붕당과 유생들은 광해군과 대북파를 한 묵음으로 배척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에 더욱 기름을 부은 사건이 발생했는데, 바로 '칠서의 옥사사건'이었다. 조령에서 동래의 은장수를 살해하고 은 수백냥을 강탈한 사건이 발생했다. 은장수의 하인이 끈질기게 추적하여 강도들을 찾아내 관가에 고발하자 관군이 출동해 강도들을 검거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강도들은 명문가의 서자들이었다. 이들 중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박순의 서자인 박응서도 있었다. 이들 서자 일곱 명은 '서얼금고법' 때문에 벼슬길이 막히자 불만을 품고 있던 중 서자 출신인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크게 기뻐하며 즉시 서얼금고법을 풀어줄 것을 청원했으나 거절 당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자신들은 윤리가 필요없는 '무륜당'이라 칭한 뒤 조령에 다니는 장사치들을 약탈하며 살아 왔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 박응서는 취조과정에서 선조의 장인인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과 몰래 통해 양식과 무기를 준비해 영창대군을 임금으로 받들려고 도모했다고 고변했다. 이를 조사한 정항이 이 사실을 광해군에게 보고하자 광해군이 직접 중죄인을 심문했다.
그 결과 박응서가 무고한 모든 인사들이 일제히 투옥되었다. 김제남은 영창대군의 사주를 들고 무당집을 찿아가 군왕의 운세를 물어보았다는 이유로 참형을 당했으며 영창대군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광해군은 영창대군의 처벌만은 피하고자 했으나 대북파가 강경하게 들고 일어나자 서인으로 강등해 강화도에 위리안치했다. 얼마 뒤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강화부사 정항이 영창대군을 방바닥을 뜨겁게 하는 방법으로 살해(증살)했다.
인목대비에 대한 탄압은 이보다 늦게 시작되었다. 대북파는 폐모를 주청했다. 대북 세력은 인목대비를 아에 제거하고자 했으나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고 죽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광해군은 조선의 5대 궁궐 가운데 경복궁을 제외한 창덕궁,창경궁,경운궁,경덕궁의 4대 궁궐과 지금은 사라진 인경궁을 포함하여 모두 다섯 개 궁궐을 중건하거나 새로 지었다. 이는 어려운 임란 후 경제 상황에서 얼마나 궁궐 건축에 집착하였는지를 반증하고 있다. 궁궐 건축은 왕권 강화를 위한 것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의 황폐한 경제 사정을 외면하고 민생을 황폐하게 만들었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광해군은 대북파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으나 정권을 완전히 장악한 대북파와 북방 문제로 의견이 대립되자 대북파에게 끌려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차츰 대북파와 일정한 거리를 두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서인을 등용하기 시작했다. 광해군은 소북파와 서인을 등용하여 대북파를 견제하고자 했으나 이는 무력을 기반으로 한 서인 세력을 키워주는 꼴이 되어 반정의 힘을 키워주는 셈이 되고 말았다.
만주 지역에서 임진란 전부터 꾸준히 성장하기 시작한 여진족 '누르하치'는 마침내 광해군 8년(1616년)에 국호를 '대금', 연호를 '천명', 수도를 '홍경'으로 정한 뒤 명나라에 대한 복수전을 공식 표명했다. 누르하치는 푸순을 공략하여 점령했다. 이에 놀란 명나라는 바로 대규모 토벌군을 파견 준비하면서 조선에게 후금의 배후를 치도록 원병파견을 요구했다.
광해군은 명나라에 대해서 별로 좋지 않는 감정이 있었다. 비록 임란 때 지원군을 보내 조선을 도와주었으나 이는 결국 명나라의 울타리를 치는 전략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사사건건 명나라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고 자신의 즉위를 거절하며 명나라 조사관을 파견하여 실태를 조사하는 등 사절단이 올 때 마다 엄청난 은화를 요구하거나 재물을 강요하기도 하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행패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명나라의 출병 요구를 광해군은 반대했으나 이이첨 등 비변사 신료들이 명의 보은에 보답해야 한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정인홍 등도 출병 원칙에 동의하였으나 광해군은 파병을 거절하는 완곡한 표현의 답신을 보내도록 하였다. 요동경략 '양호'가 답신 내용을 문제 삼아 북경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 이에 광해군은 비변사의 반발이 심해지자 할 수 없이 징병은 하되 병력이 국경을 넘지 않고 끝까지 국내에 머물도록 하기 의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마저 양호의 저지로 무산되자 마침내 병력 파견을 결정했다. 광해군은 도원수 강홍립에게 가능하면 명나라 장수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조선군 독자적으로 행동할 것을 지시했다.
조선 군사는 명나라 장수 유정의 지휘 아래에 배속되어 후금의 수도인 홍경을 향햐 전진하던 중 그해 3월에 벌어진 '심하전투'에서 후금군의 습격을 받고 크게 지고 말았다. 명나라 군대 '개철총병 두송'이 공을 탐내어 경솔하게 진군하다가 패전한 전투로 조선군사는 심하전투에서 무려 8활이 넘는 9천여 명이 전사했다. 강홍립은 곧 남은 병사들과 같이 후금군에 투항했다. 심하전투를 포함하여 당시 명나라 군대가 후금군과 싸운 전투를 총칭하여 '사르후 전투'라고 하며 이 전투는 사실상 명.청 교체를 결정하는 전투가 되었다.
조선이 비록 심하전투에서 패했지만, 드세게 성장하는 후금과 직접 충돌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광해군의 외교 책략이 탁월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광해군은 명이 요구한 원군을 파견하면서도 희생을 최소화해 어려울 때 도와준 은혜를 교묘한 방법으로 갚았다. 한편 후금에 대해서는 시종 '기미책'을 적용해 직접 충돌하는 것을 피했다.
광해군 재위 15년(1623년) 3월에 일어난 인조반정은 조선 후기의 역사를 규정짓는 결정적인 분기점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인조반정은 명분이 약한 데다가 반정 세력 또한 도덕적으로 결함이 많고, 국가의 이익보다 당의 이익을 앞세웠다는 점에서 출발부터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광해군 때 권세가에게 토지를 빼앗긴 많은 사람들이 반정 이후에 이를 돌려받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반정 세력은 일부만을 국고로 환수하고 나머지 대부분은 일종의 전리품으로 간주해 나누어 가졌다. 이에 실망한 백성들이 '상시가'를 지어 부르며 반정 세력을 비난했다. 단지 주인이 바뀌었을 뿐이라는 점이었다.
반정 세력의 부조덕성을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부도덕한 자들이 일으킨 거사가 정당성을 얻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반정은 일종의 성공한 쿠테타로 평가되었다. 이후 조선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눈을 감은 채 쇠락하게 된 것이다. 두 차례의 호란 이후 극단적인 명분론을 내세운 서인 세력이 폐쇄적으로 권력을 독점했기 때문이다.
봄꽃들의 군무
이렇게 조선은 부패의 골을 깊이하며 내부적으로 썩어가고 있었다. 사대부들은 성리학의 공리공론에 집착하며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서 당쟁으로 서로 죽이고 죽으며 임금의 의지대로 정책을 추진하기에는 신하들의 권력이 너무 비대하게 성장하여 그 뿌리를 제거하기에는 왕권의 힘이 너무나 미약하였다. 그들은 임금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권력을 휘두르며 그들끼리 무리를 지어 의견이 다르면 분당하여 새로운 당을 만들고 빌미를 찿게되면 상대방을 무고하여 숙청하기를 반복하면서 가문의 번영을 누리며 호의호식하면서 살았다. 벼슬을 사고파는 관행은 부패한 사회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그들이 부임한 임지에서는 더 많은 재산을 축척하기 위해서 갖은 방법으로 백성들을 수탈하는 탐관오리들이 넘쳐났다. 그래서 백성들은 노예처럼 살면서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이 농사를 지어도 대부분 빼앗기고 아무리 억울한 일이 있어도 하소연도 힘든 사회였다. 이렇듯 관리들이 백성들을 착취하니 백성들은 노예같은 삶을 살아 갈 수 밖에 없었고 결국에는 고향을 떠나 도적집단이 되어 유량생활을 하는 방법 뿐이었다.
부패는 역사를 통해 살펴보면 어느사회나 만연해 왔다. 그런 사회에서 백성들이 배불리 편안하게 살 수는 없듯이 지금의 우리사회도 사회 지도층이 그것도 최고의 권력자인 대통령까지 부패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조말엽 고종과 민비가 얼마나 부패하였는지는 기록으로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지방 감사 중 가장 로얄자리인 평안감사는 민씨 일족이 거의 대부분 차지하였고 많은 관리들이 재물을 고종이나 민비에게 상납하여야만 관리로 임명되는 부패의 극을 달리고 있었기에 결국 나라가 망하는 비운을 겪게 된 것이다.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패 문제로 검찰에 출두하여 조사를 받았다. 백성들은 너무나 살기힘든 나라였지만 그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대가성이 없는 돈이라며 한 기업주로부터 많은 돈을 받았다. 어떤이는 받은 돈이 전직 전두환,노태우에 비해 10분지 1도 되지 않는다지만 그도 부패의 사슬에서 벗어나기는 힘들 것이다. 그에 대한 시론을 보자!
부패의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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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부패란 인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된 동서고금을 막론한 현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패는 일반적으로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은 후진국에서 더 극심하게 나타난다. 불행하게도 아직 한국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권 핵심부의 비리가 터져나오는 정치적 후진성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부패는 민간으로부터의 수뢰 형태를 띠는 부패와 공금의 사용화 형태를 띠는 부패로 구분되기도 한다. 첫번째 유형은 관료집단이 갖는 선별적 재량권의 경제적 가치로 말미암아 특혜를 받고자 개인이나 민간 기업이 담당 관료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형태로 정경유착의 정도가 심한 국가에서 보편적으로 공공연히 행해지는 현상이다.
정권만 바뀌면 불거지는 비리
두번째 유형인 공금의 사용화 현상은 제도가 문란하고 무엇보다 정부의 중앙 집권력이 강화될수록 그 정도가 심해져 급기야 절대 권력자를 중심으로 하는 범죄행위 형태로 전이됨으로써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한다. 과거 우리나라의 부패 사례를 돌이켜보면 절대 권력자나 그 하부구조인 고위 공직자들 일부가 강력한 권력을 기반으로 비자금을 조성해 해외로 도피하거나, 정치자금으로 유용하는 등의 형태로 부패를 자행한 적이 허다했다. 이러한 형태의 부패는 정치적 타락으로 이어져 건전한 경제·사회윤리를 저해해 사회적 질서와 기강을 문란케 함으로써 경제사회의 위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와 같은 부패의 심각성은 범세계적으로 공유되고 있다. 1997년 12월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뇌물방지 협정을 제정하면서 국제적인 부패방지 운동을 선도하기도 했다. 한국 또한 이러한 운동에 부응해 같은 시기에 공직자윤리법을 개정한 바 있으며 이후 부패방지위원회를 설립, 운용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 등으로 인해 어쨌든 규제 위주 행정과 독점적인 인허가권 오남용으로 정경유착 등 부정부패가 창궐했던 시기에 비해 현재는 공적 부패가 많이 개선돼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전직 대통령의 부패 관련 소식이 다시 터져나와 실로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이번 사건을 기회로 부패에 대한 제도적 차원에서의 예방, 발각 시 엄격한 처벌 적용 그리고 효과적인 교육 실시 등이 자리잡기 바란다. 특히 부방위 활동은 정치적으로 독립시켜 실효를 거둘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물론 한국에서의 부패 문제는 공공 부문의 진정한 개혁 없이는 쉽게 개선될 것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부패의 핵심 요인인 공직에 의한 독점적 재량권 행사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일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뤄질 성격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은 점진적으로나마 공권력의 분권화, 공기업의 민영화 그리고 각종 규제 완화 등을 꾸준히 추진해나가야 할 것이다.
구시대적 고시제도 폐지해야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 앞서 고려의 과거제에서부터 유래한 현재의 고시 제도를 타파하는 일부터 시작하기를 주문하고 싶다. 단 한 차례의 시험만으로 파격적 혜택이 평생 보장되는 현재의 고급 공무원 선발 방식은 결과적으로 선민의식 가득한 지배계층만 양산할 뿐 진정한 근대시민국가의 공복을 창출해낼 수 없으며 더구나 부패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선진사회 도래는 결코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차제에 고시 제도 대신 정부 각 부처가 직능별로 전문 인력을 채용하는 방법을 점차 확대해나가는 방안이 적극 검토되기를 희망한다. 아울러 두번 다시 국가원수가 부패 관련 스캔들에 연루되는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기를 기대한다.
이종원(성균관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