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고구려 실록: 제25대 평원왕 실록 본문
고구려 실록: 제25대 평원왕 실록
(재위: 서기 559년~590년 10월, 31년 7개월)
평원왕의 화친정책과 수나라 강성
평원왕은 양원왕의 맏아들로 이름은 '양성'이다(중국사서에는 '탕'으로 기록).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치 않으며, 모후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양원왕 13년(557년)에 태자에 책봉되었고, 559년 3월에 양원왕이 죽자 고구려 제25대 왕에 올랐다.
평원왕이 즉위 당시 고구려의 국력은 상당히 위축된 상태였다. 한반도 쪽에서는 신라가 세력을 확대하여 함경도 지역까지 진출한 상태였고, 대륙의 서쪽 변경에서는 북주와 돌궐 등이 압박을 가해오고 있었다. 이처럼 양쪽 변방이 모두 위협을 받자 고구려 조정에서는 어느 쪽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대응을 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양원왕은 재위시의 지나친 국력 소모로 고구려의 군사력은 광개토왕 이후 최악의 상황이었다. 고구려는 이같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국경을 접하고 있던 북제와 남쪽의 진나라 등과 화친을 맺고 이들 압박세력을 경계했지만 그다지 큰 도움을 얻지는 못했다. 이에 따라 평원왕은 즉위 이후 줄곧 주변 국가에 대해 온건한 태도를 보이면서 가급적이면 전쟁을 기피하는 경향을 보였다.
평원왕은 즉위 이듬해인 560년 북제와 진나라 사신을 맞아 화친을 맺었으며, 그해 2월에는 졸본으로 가서 동명성왕의 사당에 제를 올리고 돌아오는 길에 자신이 머무른 지역의 죄수들을 대거 방면하여 민심을 진작시켰다.
그러나 평원왕은 행로는 순탄하지 않았다. 561년 6월에는 대홍수가 발생하여 경제적 파탄을 예고하더니, 563년에는 가믐이 오랫동안 계속되어 민심을 흉흉하게 하였다. 이에 평원왕은 평시 음식을 줄이고 산천에 제단을 마련하여 기우제를 올리는 등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하는 자세를 보임으로써 민심을 수습한다.
이 무렵 한반도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치열한 패권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진흥왕 즉위 이후 과감한 팽창정책을 실시하여 영토를 확장한 신라는 지속적으로 백제를 압박하였다. 이에 백제는 가야, 왜 등과 동맹을 맺고 신라에 대항하였으나 무섭게 달아오른 신라의 기세를 꺽지는 못했다. 더구나 신라는 562년에 대가야를 점령하고 백제의 후미를 위협하는 한편 왜에 사신을 보내 백제와 왜의 동맹관계를 와해시키는 정책을 구사하였다.
신라의 성장은 고구려에도 매우 위협적이었다. 신라의 진흥왕은 568년에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영토에 황초령순수비와 마운령순수비를 건립하여 그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확인하였는데, 이는 고구려로서는 매우 비위가 상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서쪽 변경을 압박하는 돌궐, 거란, 북주 등으로 인해 신라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을 할 수가 없었다. 이에 평원왕은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570년 왜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사절단은 570년 4월에 고구려를 출발하여 그해 7월에 왜에 도착하였고, 572년 7월에 귀국하였다. 이들 사절단은 왜 조정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고, 결과적으로 화친을 맺는데 성공한다. 이는 곧 왜를 통해 신라의 후미를 공략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크다란 외교적 성과였다.
사절단이 왜에서 돌아올 즈음 평원왕은 오랫만에 경제적인 안정을 누리며 궁실을 중수하는 작업을 명해 놓고 있었다. 또한 패하 벌판으로 나가 사냥을 즐기며 한가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해 8월에 가뭄이 한동안 계속되더니 메뚜기 떼가 농토를 덮쳐 민간경제를 무너뜨렸다. 이에 평원왕은 즉시 궁궐 중수 작업을 중단시키고 사냥을 비롯한 향략생활을 멈추고 민간경제 회복에 나섰다.
평원왕이 민간경제 회복에 부심하고 있을 때, 그동안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넘보고 있던 북주가 요동을 침략하였다. 이에 평원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북주군과 대항하였고, 마침내 배산에서 북주군을 격퇴하여 난국을 수습하였다. 이 전쟁에서 온달이 두각을 나타내어 평원왕의 사위로 인정받고 대형의 직위에 오른다.
고구려 왕 계보도 (삼국사기에 의거)
해모수═╤═유화부인(하백의 딸)
│
소서노═╤═ 1.추모(bc37~19)═╤═예씨부인
│ │
┌┴┐ 2.유리명왕(bc19~ad18)═╤═송양왕의 딸
비류 온조 │
┌─┬─────┬────┬────┼─────┐
도절 해명 3.대무신왕(무휼) 여진 4.민중왕(해색주) 재사═╤═부여태후
(ad 19~ 44) (44~48) │
갈사국왕녀═╣ ╠═ 원비 ┌──────┼─────┐
호동 5.모본왕(? ? ? ). 6.태조왕(궁) 7.차대왕(수성) 8.신대왕(백고)
(49~53) (54~146) (146~165) (165 ~ 179) │
┌┴┐ │ │
막덕 막근 추안 ㅣ
┌────────┬───────────┬─────────────┴─┐
9.고국천왕(이이모) 발기 ╔═10.산상왕(연우)═╤═후녀(주통부인) 계수
(179~197)║ ║ (197~227) │
╚ 우씨왕후(우소의 딸)═══╝ 11.동천왕(교체)(227~248)
┌────────────────────┼──┐
관나부인(장발미녀)══12.중천왕(연불)(248~270) ═╤═연씨왕후 예물 사구
│
┌───────┬──────────────┴───┬──┬──┬─┐
(??) 13.서천왕(약로)(270~292) ═╤═우씨왕후(우수의 딸) 달가 일우 소발 공주(?)══명림홀도
┌─────────┴──────┐ (부마도위)
14.봉상왕(상부)(292~300) 돌고
┌┴┐ │
(?) (?) 15.미천왕(을불)(301~331)
├───────────┐
16.고국원왕(사유)(331~371) 무
┌────────┴────┐
17.소수림왕(구부)(371~384) 18.고국양왕(이연)(384~391)
│
19.광개토대왕(담덕)(391~412)
│
20.장수왕(거련)(413~491)
├──────┐
조다 승천
│
21. 문자왕(나운)(491~519)
┌──────────────────┴─────┐
22.안장왕(흥안)(519~531)══한씨미녀 23.안원왕(보연)(531~545)
│
24.양원왕(평성)(545~559)
│
25.평원왕(양성)(559~590)
┌──────────┬────────┬───┐
26.영양왕(원)(590~618) 27.영류왕(건무)(618~642) 태양 평강공주═온달(부마도위)
│ │
환권 28.보장왕(보장)(642~668)
┌──┬──┼──┬──┐
복남 임무 덕남 덕무 안승
자살,타살 등 일찍 죽은 왕자 타살된 왕, ══ 부부관계 |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는 2대 유리왕의 아들이자,6대 태조왕의 생부입니다.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돌고(固, ?~293)는 13대 서천왕의 차남으로 형인 14대 봉상왕에 의해 죽음을 당합니다.15대 미천왕의 생부입니다.
. 장수왕의 아들인 조다(助多)는 생부인 20대 장수왕이 413~491년 오래 재위하는 바람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먼저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이 21대 문자왕(文咨王/?~519)으로 즉위하였습니다.
고구려 : BC 37년 개국~AD 668년 멸망 (28代 725년간)
순번 |
왕명(이름) |
재위 연도 |
재위 기간 |
혈통 관계 |
1 |
동명성왕(주몽) |
BC37년~BC19년 |
18년 |
해모수와 하백의 딸인 유화부인의 외아들. 부인은 예씨<자-2대 유리>와 연씨<소서노 자-비류, 온조> 고구려 개국시조이며 초대 군주. |
2 |
유리명왕(유리) |
BC19년~AD18년 |
37년 |
주몽과 왕후예씨의 장남. 부인은 송씨<자-도절, 해명, 3대 무휼, 여진, 4대 해색주>와 화희와 치희와 후비 |
3 |
대무신왕(무휼) |
AD 18년~44년 |
26년 |
유리와 왕후송씨의 3남. 부인은 원비인 비류국 여인<자-5대 모본왕>과 갈사부여의 갈사왕의 손녀 해씨<자-호동> |
4 |
민중왕(해색주) |
AD 44년~48년 |
4년 |
유리와 첫째 왕후송씨의 5남. 무휼의 동생. 부인은 성씨불명 |
5 |
모본왕(해우) |
AD 48년~53년 |
5년 |
무휼과 성씨불명 비류국 여인 사이의 차남(호동의제). 부인은 원비 |
6 |
태조왕(궁) |
AD 53년~146년 |
93년 |
유리왕(琉璃王)의 손자이며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와 부여태후 금씨 사이의 아들로 모본왕(慕本王)이 죽은 뒤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7세에 즉위함.119살에 서거하여 한국 왕 중 최장수 왕이며 93년간 통치한 최장수 재임군주임. 부인은 성씨불명<자-막근, 막덕> |
7 |
차대왕(수성) |
AD 146년~165년 |
19년 |
고추가 재사와 부여태후 금씨와의 2남으로 태조왕의 동생. 부인은 성씨불명<자-추안> |
8 |
신대왕(백고) |
AD 165년~179년 |
14년 |
고추가 재사와 부여태후 금씨와의 3남으로 차대왕의 동생. 부인은 성씨불명<자-발기(拔奇). 9대 남무, 발기(發岐), 10대 연우, 계수> |
9 |
고국천왕(남무) |
AD 179년~197년 |
18년 |
신대왕의 차남으로 이름은 남무(男武) 혹은 이이모(伊夷謨)라 한다. 부인은 우씨 |
10 |
산상왕(연우) |
AD 197년~227년 |
30년 |
신대왕의 아들이자 고국천왕의 동생으로 고국천왕이 아들이 없어 즉위하였다. 부인은 소후후녀<자-교체(동천왕)> |
11 |
동천왕(교체) |
AD 227년~248년 |
21년 |
산상왕과 소후후녀의 아들. 아명은 교체, 휘는 우위거(憂位居) 또는 위궁(位宮)라함 부인 성씨불명<자-12대 연불, 예물, 사구과 후궁 동해녀 |
12 |
중천왕(연불) |
AD 248년~270년 |
22년 |
동천왕 아들.243년(동천왕 17) 태자가 되었고, 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부인은 연씨<자-13대 약로, 달가, 일우, 소발>과 관나부인<자-?> |
13 |
서천왕(약로) |
AD 270년~292년 |
22년 |
중천왕과 왕후연씨의 차남. 부인은 우씨<자-14대 상불, 15대 을불> |
14 |
봉상왕(상불) |
AD 292년~300년 |
8년 |
서천왕과 왕후 우씨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 |
15 |
미천왕(을불) |
AD 300년~331년 |
31년 |
서천왕과 왕후 우씨의 차남. 부인은 주씨<자-16대 사유, 무> |
16 |
고국원왕(사유) |
AD 331년~371년 |
40년 |
미천왕과 왕후 주씨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17대 구부, 18대 이연> |
17 |
소수림왕(구부) |
AD371년~384년 |
13년 |
고국원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 |
18 |
고국양왕(이연) |
AD 384년~391년 |
7년 |
고국원왕의 차남. 부인은 성씨불명<자-19대 담덕> |
19 |
광개토대왕(담덕) |
AD 391년~412년 |
21년 |
고국양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20대 거련, 승평> |
20 |
장수왕(거련) |
AD 413년~491년 |
78년 |
광개토대왕의 장남. 475년 백제 한성(漢城) 함락하고 개로왕 살해. 481년 신라 8성을 점령. 영토가 남은 아산만과 죽령(竹嶺), 서는 요하, 동은 홋카이도 훈춘, 북은 카이위안 개원까지 확장해 고구려 최전성기를 이루었다. 부인은 성씨불명<자-조다, 승천> |
21 |
문자명왕(나운) |
AD 491년~519년 |
28년 |
장수왕의 손자(조다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22대 흥안, 23대 보연> |
22 |
안장왕(흥안) |
AD 519년~531년 |
12년 |
문자명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 |
23 |
안원왕(보연) |
AD 531년~545년 |
14년 |
문자명왕의 차남. 부인은 성씨불명<자-24대 평성, 세군> |
24 |
양원왕(평성) |
AD 545년~559년 |
14년 |
안원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양성> |
25 |
평원왕(양성) |
AD 559년~590년 |
31년 |
양원왕의 아들. 제일부인 성씨불명<자-26대 원, 평강공주>. 제2부인 성씨불명<자-27대 영류왕, 28대 보장왕> |
26 |
영양왕(원) |
AD 590년~618년 |
18년 |
평원왕의 제일부인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환치> 수나라 문제와 양제가 30만과 113만 대군으로 침공해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대승해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됐다. |
27 |
영류왕(건무) |
AD 618년~642년 |
24년 |
평원왕의 제이부인의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환권> |
28 |
보장왕(보장) |
AD 642년~668년 |
26년 |
평원왕의 제이부인의의 차남. 제1부인 성씨불명<자-복남, 임무, 덕무> 제2부인 성씨불명<자-안승>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에 의하여 왕위에 올랐으며, 당나라와 신라 연합군의 파상적인 공격을 받아 고구려가 멸망하자 체포되어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복국(復國)을 꾀하였다가 실패한 뒤 사망한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 |
|
평원왕의 화친정책은 내부적으로 평화를 정착시키고 외부적으로 신라를 고립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이 당시 신라도 북제, 왜 등과 화친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큰 효과를 얻지는 못했다.
그 무렵, 중국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는데, 577년 북주 왕 우문옹이 북제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제4대 왕인 우문빈이 등극하여 몇 개월 만에 죽자 외척인 양견이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양견은 그 이듬해에 지방의 제후들을 제거한 후에 제5대 왕인 우문천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또한 국호를 '수(隋)'로 고치고 장안에 도읍을 정하였다.
중국의 이 같은 변화에 따라 평원왕은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양견의 인물 됨됨이와 정책 방향을 엿보게 하였다. 귀국한 사신의 보고에 의해 양견이 매우 야심찬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평원왕은 전쟁에 대비하였다. 이를 위해 우선 백성들의 부역을 대폭 줄이고 양잠과 농사를 지원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는 한편 지속적으로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그들의 동태를 살피도록 하였다.
수나라 양견은 처음에는 고구려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우선 남쪽의 진을 먼저 공략해 중국을 통일하겠다는 생각을 했고, 이를 위해서도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구려는 이같은 야심찬 양견을 경계하고 있었으며 고구려 평원왕은 586년 양원왕이 쌓은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겨 수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고구려의 예상대로 양견은 588년에 남쪽의 진을 공략하여 이듬해 강남지방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중원통일의 꿈을 이루었다. 이 소식을 접한 평원왕은 곧 있을 수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군량미를 비축하고, 군사를 늘리면서 전쟁에 대비했다. 양견은 590년에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수나라에 조공을 요구하였지만 평원왕은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결과 수나라와 전쟁은 불가피해졌다.
이렇듯 수와의 전쟁 준비에 분주하던 평원왕이 590년 10월 생을 마감하는 바람에 고구려는 한층 더 어려운 상황에 몰렸다.
평원왕은 두 명의 왕후에게서 3남 1녀를 낳았다. 제1왕후는 태자 원(영양왕)과 평강공주를 낳았으며, 제2왕후는 왕자 성(영류왕)과 대양왕(보장왕의 아버지)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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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서도 소리극 <온달장군과 평강공주> 공연
일곱 번째 도읍지 장안성과 그 위치
평원왕은 서기 586년 도성을 평양성에서 장안성으로 옮긴다. 이로써 고구려는 장수왕이 427년에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긴 이래 159년 동안 계속되던 평양성 시대를 마감한다.
평원왕이 도읍을 장안성으로 옮겨간 586년은 수나라가 대국으로 성장하여 중국 통일을 꿈꾸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고구려는 수나라가 강남의 진나라를 멸하고 반드시 침략해올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따라서 장안성으로 옮긴 것은 수나라 침입에 대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고구려의 새 도성이 된 장안성은 서기 552년에 양원왕에 의해 축성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성이 건립되기 한 해 전인 551년에는 돌궐이 침략하여 신성과 백암성을 공격하였고, 이 때문에 고구려군이 서쪽 변방에 군사를 집결시킨 사이에 신라가 한반도 쪽 변경을 침략하여 10개 성을 탈취했다. 또한 550년에는 동위가 무너지고 북제가 건립되었으며, 서위 왕조 역시 몰락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라 중원의 정세는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 같은 어려운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양원왕은 장안성을 축성하였는데, 이는 곧 장안성이 전쟁 발발시 이용할 요새였음을 의미한다. 대대적인 전쟁 발발을 예상한 양원왕은 평양성보다 훨씬 더 견고하고 안전한 도성을 필요로 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장안성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양원왕은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기지 못했는데, 그가 재위시에는 축성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으며 양원왕 사후에도 평원왕에 의해 꾸준히 축성 작업이 지속되어 마침내 도성의 면모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평원왕은 장안성으로 천도 후 4년만에 사망하지만, 그를 계승한 영양왕은 수나라에 대해 선제 공격을 감행하고, 백제와 신라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공세를 취한다. 장안성으로의 천도는 고구려인들에게 기세를 펼치게 해 주었으며 큰 힘을 불어 넣어 주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고구려인들에게 이처럼 자심감을 심어준 장안성은 어디 있는 것일까? 장안성의 위치에 관련하여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 양양왕 9년, 왕이 말갈 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침공하였으나, 영주 총관 위충이 우리 군사를 물리쳤다. 수나라 문제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한 왕 양과 왕세적 등을 원수로 임명하여 수륙군 30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여름 6월, 문제가 조서를 내려 왕의 관직을 삭탈했다.
한 왕 양의 군대가 유관에 도착하였을 때 장마로 인해 군량미 수송이 중단되었다. 주나후는 동래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성으로 오다가 풍파를 만나 선박이 거의 유실되거나 침몰되었다.'
이 기사는 수나라 왕 양견이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의 도성을 공격하려 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당시 고구려의 도성은 장안성이었고, 수나라 장수 주나후가 바다를 건너 평양성을 공격하려 한 것은 바로 장안성을 공격하려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를 보면 장안성을 평양성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두 성은 지근거리에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위 지도에서 보면 수나라의 중국 통일은 그 기반이 북주이다. 북주는 북주 무제라는 왕 때 대부분의 중국을 통일하면서 이것이 수나라로 계승된다. 북주의 무제는 철저한 유학위주의 정책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하였으며, 북주 지방은 중국의 전통적인 군사, 경제적 중심지인 위수분지의 관중, 장안지방을 통치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위수분지는 실제 중국 후한 이래 정치적 중심지인 낙양과는 거리가 좀 있던 지역이였다. 이 지역은 정치적 중심지와 거리가 있어서 전란이나, 정쟁에 휩싸이지 않고 국력을 꾸준히 키울 수 있는 변방이면서도, 경제력이 뒷받침되는 지역이었다. 거기에 장안을 중심으로 한 위수분지는 천연의 요새이자, 북방 기마술을 배우고, 군사력을 증강시키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주의 무제는 유학을 중심으로 도교와 불교를 철저히 억압하였다. 즉, 귀족적인 성격이 강했고, 자체 평등 교리를 내포하고 있는 불교를 폐불사건으로 탄압하고, 구겸지 이래 유행하던 도교도 국가가 막아 버리면서, 오로지 충 사상을 강조하는 국가주의적 유교로 사회사상을 통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강경책은 곧 지방 세력들의 반발을 가져오게 되며 북주는 무제가 죽은 뒤, 혼란에 빠져 북주의 총관직에 있던 <양견>에게 선양의 형식으로 국가를 물려주게 되는데, 이 양견이 바로 수의 건국자 <문제>이다.
수문제의 중앙집권적 통일 국가 체제 정비
수문제는 중국을 통일하면서 중앙집권적 통일 국가를 위한 기반을 마련하려고 노력하였다. 우선 중앙체제를 3성 6부제로 정비하였는데, 이 제도는 이후 당나라와 동아시아에 전파되어 동아시아 공통의 중앙체제로 정착되었으며 우리나라도 신라부터 조선까지 이 체제로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다.
다음으로 지방제도는 주, 군, 현 제도를 정비하여 주, 현 제도로 정비한다. 원래 중국의 지방제도는 진시황이 만든 군, 현 제도이다. 그런데, 지방관으로 파견된 자사의 권한이 커지면서 군, 현을 통제하는 <주>가 후한 때 생겼다.
수문제는 지방관의 세력을 아예 국가행정체계에 편입하려고 <주>를 국왕권 직속 행정구역으로 개편하며 중복되는 행정구역인 군은 아예 없애버리고 주의 행정관인 자사는 국왕 직속으로서 행정권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군사적인 기능은 국가가 장악하게 된다. 그리고, 자사는 지방관이 향품에 따라 관리를 추천하는 9품중정법에서 제외시켜서 관리 임명도 국가가 직접 임명하였다.
따라서 새로운 관리 임명법이 필요했는데, 이에 따라 실시된 법이 바로 <과거제도>라는 새로운 관리임명제도이다. 향론이나, 향품이 관직을 좌지우지 못하게 하기 위해 지방에서 추천은 할 수 있으나, 모든 관직은 시험에 의해 선발하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이 시험이라는 것도 면접이 중요한데다가 채점관들이 기존 관료인 관계로, 완전한 능력 위주의 시험은 아니였으며 과거제도의 시행으로 종 9품이상 모든 지방관은 자사가 아니라 국가가 직접 임명하는 제도로 바뀌었다.
수대의 과거제도는 선거제도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지방 주군에서 추천된 인사를 수도에서 과목에 따라 시험보는 제도를 말하며 이 과거제도는 수재, 진사, 명경과로 나누어 실시했고, 당대 이후 청나라까지 중국의 관료등용제도로서 정착된다.
자사의 권한이 행정만으로 축소되면서, 이제 군사권은 총관부라는 새로운 부서로 넘어갔다. 또 자사의 부패를 막기 위해 풍속을 관찰하는 관리들을 계속 지방에 파견하였다.
조세 제도를 개혁
수문제는 통일 한 뒤 황제권 강화를 위하여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할 필요가 있었고, 3성 6부제와 율령제를 통해 그것을 완성하려 했다. 문제는 이러한 중앙집권에는 엄청난 자금이 든다는 점이었으며 특히, 수대에는 남북통일 이후 남방 경제력을 북방 수도로 끌어들이기 위해 대운하를 건설했다.
수문제는 위진남북조 시대 갈라져있던 남방경제와 북방경제가 통합하는 것만이 국가경제 재건을 이룰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수문제는 대운하 자금을 고대적 <인두세>로 메우려 하였는데, 즉, 북위 이래 실시되던 균전제를 통해 조세원을 확보하려고 한 것이다. 균전제에서 실시되던 조, 용, 조를 걷고, 이 조세를 걷기 위해 호구조사, 호적정리를 실시합니다. (검색어로 북위 균전제를 검색하면 자세히 보실 수 있습니다.) 이 호구조사를 통해 모든 개개 호를 국가가 통제하기 위해 실시한 것이 <삼장제도>이다.
삼장제란 다섯 집을 1보로 하여 보장을 뽑고, 다섯 보를 1리로 하여 이장을 뽑고, 네 리를 1당으로 하여 당장을 뽑는데, 이러한 각각의 장들은 책임지고 해당 지역의 조세를 국가에 납부해야 합니다. 또 각각의 보, 이, 당장들은 서로 감시하면서 국가 통제에 따르도록 한 제도입니다. 삼장제는 조세 부과라는 측면에서 균전제와 조용조 제도를 연결해주는 제도이다.
이 삼장제롤 통해 체계적이 된 향촌 조직은 국가가 토지를 통해 세금을 걷는 균전제와 연결됩니다. 그리고 균전제도는 토지와 집, 인구수를 계산하여 군역자를 내야 되므로, 균전제는 곧 부병제도와 연결됩니다. 즉, 쉽게 말해서 <병농일치제>가 확립된 것이다.
대운하를 건설
수나라 하면 딱 떠오르는 것이 바로 이 대운하 건설이다.
대운하는 수문제의 뒤를 이은 수양제 때 본격적으로 이루어 진다. 대운하를 건설하는 목적인 발달된 강남의 경제력을 북쪽으로 수송하기 위함이었다. 즉, 양자강의 풍부한 쌀을 소비도시인 장안과 낙양으로 옮겨 국가 재정을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대운하를 지음으로서 오랜 기간 분열된 중국의 남조, 북조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위 지도를 보면 대운하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운하를 연결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황하와 회수를 연결하고(통제거), 다시 회수에서 양자강을 연결하고(한구), 다음으로 북경을 연결하고(영제거), 항주를 연결하는(강남하)가 있다. 그리고, 그 운하의 연결점들에는 모두 큰 도시인 항주, 장안, 낙양, 북경 등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 도시들이 바로 중국 소비의 중심지들이다.
이 운하는 경제적 목적도 중요하지만, 수나라가 망한 이후에는 조운로, 교통로로 더 많이 이용된다.
수나라의 무리한 정책은 멸망을 초래
수나라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단 2대에서 망했다는 점이며 진시황의 진나라와 비슷하다. 망한 이유도, 망국기의 상황도 상당히 흡사한데, 수 양제는 진시황처럼 무리한 대외원정을 실시했다. 특히 중국 통일로 인하여 북방민족을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돌궐 원정의 성공으로 극에 이르게 되며 특히 수나라가 고창국을 점령한 사건은 서역 무역로의 개척과 함께 중국식 조공 질서가 확립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수양제는 서역과 북방 정벌 이후 동방 원정을 시도하는데, 이 당시는 광개토 - 장수왕 이후 고구려가 동북아의 패자로서 군림하던 시기였다. 수양제는 고구려 원정을 실패하면서 급격히 국내 반대파들에게 압력을 받게 되는데, 고구려 원정 실패는 대운하 건설로 인한 민심 이반문제도 대두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수나라는 결국 같은 계통의 집단인 이연의 당나라로 넘어가게 된다.
주나후가 배를 띄운 동래는 현재 산동반도의 '봉래'다. 그리고 이곳에서 배로 가장 가까운 곳은 요동반도의 대련의 '여순'이다. 이 사실은 고구려의 장안성이 한반도의 평양성과 무관함을 알려준다. 만약 주나후가 한반도의 대동강 쪽으로 가고자 하였다면 봉래에서 배를 띄우지 않고 산동반도 동쪽 끝단의 '위해'에서 배를 띄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나후의 목적지인 평양성은 적어도 요동반도를 거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고, 이는 평양성이 요동반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같은 결론에 근거할 때 장안성은 평양성 주변 근처에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며 이는 곧 장안성을 평양성이 있던 요양 근처에서 찿아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평강공주와 온달장군
평원왕을 거론하면 평강공주 이야기가 등장한다. 평강공주는 온달이라는 인물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 이야기는 다소 설화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삼국사기> 45권의 '열전'편에 등장하는 '온달'에 관한 기사도 다분히 설화적인데, 그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다.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평원왕) 때 사람인데, 얼굴이 못나고 우스꽝스런 얼굴이지만 마음씨는 고왔다. 그는 집이 몹시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늘 누더기를 입고 다녀 사람들이 그를 '바보온달'이라 부르며 놀려댔다. 이 때 평강왕에게는 어린 딸이 있었는데 어찌나 자주 울던지 평강왕이 공주의 울음을 그치게 할 요량으로 이렇게 말했다. "네가 너무 울어서 항상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너는 커서 사대부의 아내가 되기는 다 글렀다. 그러니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 가거라!" 왕은 공주가 울 때마다 이런 농담을 던지곤 하였다.
어느듯 공주의 나이가 16세 되어 혼기가 차자 평강왕은 딸을 상부 고씨에게 시집보내려 하였다. 그러자 공주가 말하기를 "아버님께서 항상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커서 온달에게 시집가거라.'고 하셨는데 이제 와서 무슨 까닭으로 말씀을 바꾸십니까? 시정의 필부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데 하물며 대왕께서 거짓말을 한대서야 말이 되겠습니까? 예로부터 '임금은 농담을 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상부 고씨에게 시집가라 하신 아버님의 말씀이 잘 못 되었으므로 소녀는 감히 따르지 못하겠습니다."했다. 그러자 평강왕이 불같이 화를 내어 말했다. "네가 정영 내 말을 듣지 않겠다면 내 딸이라고 할 수 없으니 어찌 같이 살 수 있겠느냐? 그러니 네 마음대로 네 갈길을 가거라."
그러자 공주는 많은 패물을 가지고 홀연히 궁궐을 빠져나와 온달의 집을 찿아갔다. 물어 물어 그의 집을 찿아간 공주는 눈먼 노모 앞에 엎드려 절을 하며 아들이 있는 곳을 물었다. 이에 공주의 냄새를 맡은 노모가 말했다. " 내 아들은 가난하고 보잘 것없어 그대같이 귀한 이가 가까이 할 사람이 못 됩니다. 지금 그대의 몸에서는 향기가 나고 그대의 손은 부드럽기가 솜과 같으니 필시 천하의 귀인인 듯한데 누구의 꾐에 빠져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까?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다 못해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려 산에 간 지 오래되었인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공주가 그 집을 나와 산 밑에 이르렀를 때 저만치서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온달을 보았다. 공주가 그에게 다가가 자기를 아내로 맞아들일 것을 애기하니 온달이 불같이 화를 내면서 "이는 어린 여자가 취할 행동이 아니니 그대는 필시 여우나 귀신일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 가까이 오지말라!" 그렇게 온달이 뒤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리자 공주는 혼자서 사립문 밖에서 잤다. 그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다시 들어가 모자에게 그간의 자초지종을 얘시했다. 온달이 우물쭈물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그의 노모가 말했다. "내 자식은 비천하여 귀인의 짝이 될 수가 없고 우리 집은 몹시 가난하여 그대가 거처하기에 적당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공주가 말했다. "옛말에 이르기를 '한 말의 곡식도 방아를 찧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도 꿰멜 수 있다.'고 하였으니 두 사람이 마음만 맞는다면 빈부귀천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이렇게 두 사람을 설득한 공주는 가지고 온 패물을 팔아 땅이며 집이며 소와 말을 사 들였다. 온달이 말을 사러 나갈 때 공주가 이르기를 "말을 살 때는 반드시 나라에 쓸모가 없다고 내다 파는 말을 사되, 병들고 수척한 말을 사 오십시요!" 했다. 온달이 공주의 말대로 말을 골라오자 공주는 정성껏 말을 돌보고 길러 불과 수개월 만에 몰라보게 살이찌고 건장한 말이 되었다. 그 무렵 고구려에서는 언제나 3월 3일을 기하여 낙랑 언덕에 모여 사냥하고 거기서 잡은 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의 신령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날이 되어 평강왕(평원왕)이 사냥을 나갔는데 여러 신하와 5부의 군사들이 수행하였다. 이때 온달도 자기가 기르던 말을 타고 수행하였는데 항상 남보다 앞장서서 달리고 누구보다도 많은 짐승을 잡아서 주위에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그러자 왕이 친히 불러 이름을 물은 후에 크게 놀랐다.
이 때 후주(북주)의 무제(우문옹)가 군사를 이끌고 요동을 공격하자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에서 맞아 싸웠다. 그때 온달이 선봉장으로 나가 적군 수십 명의 목을 베니, 군사들이 그 기세를 타고 공격하여 대승하였다. 이 싸움에서 온달이 세운 공이 혁혁하니 왕은 그를 가상히 여겨 만인 앞에서 "이 사람이 나의 사위다." 하고 공표하였다. 또한 사위에 걸맞는 예를 갖추어 그를 대접하고 작위를 주어 대형으로 삼았다. 이 때부터 온달에 대한 왕의 신임이 두터워졌고 온달의 위풍이 당당해졌다.
평강왕의 뒤를 이어 양강왕(영양왕)이 즉위하자 온달은 신라에 빼앗긴 고구려 옛땅과 백성들을 되찿아야 한다고 아뢰었다. 신라와의 싸움에서 지신을 보내줄 것을 청하자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온달은 싸움터로 향하면서 다음과 같은 맹세를 하였다. '계림현과 죽령 서쪽의 우리 땅을 다시 되찿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 그렇게 길을 떠난 온달은 아단성 밑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아까운 생을 마쳤는데, 군사들이 그를 장사지내려 하자 영구가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평강공주가 달려와 관을 어루만지며 "생사가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아, 돌아가소서!" 하자 마침내 영구가 움직였다. 양강왕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비통해하였다.'
이상이 <삼국사기>에 나오는 온달과 평강에 관한 기록이다.
이 기록은 구전으로 전해오던 온달설화에 근거한 것으로 보이는데, 온달설화에서는 평강공주가 평원왕의 셋째 딸이며 온달은 숯을 구어 파는 청년으로 묘사되어 잇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그 같은 구체적인 내용은 없고, 다만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마음씨 착한 온달이 평강공주를 통해 새로운 인물로 변화되어 나라의 일꾼이 된다는 내용을 축약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평강공주와 평원왕의 갈등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이 부녀의 갈등은 평강의 친모에 대한 강한 그리움에서 비롯된 듯하다. 평원왕은 두 명의 왕후가 있었는데, 첫번째 왕후는 왕자 원(영양왕)과 공주 평강을 낳고 그들이 어릴 때 일찍 죽은 것으로 보인다. 평강이 첫째 왕후 소생이라는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평강공주와 평원왕의 갈등에 전혀 왕후가 간섭하지 않은 것을 통해 이는 확인된다. 말하자면 두 번째 왕후와 평강공주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이 때문에 평원왕은 딸을 미워했다는 설정이 가능하다.
어릴때 친모를 잃은 평강은 유난히 많이 우는 아이로 묘사되어 있다. 이 때문에 평강왕은 공주에게 버릇처럼 이야기 했고, 평강공주는 그말을 들으면서 자라서 아버지가 정한 혼처에 대해 그 말을 빌미로 거부한다. 이는 단순히 아버지에 대한 반항뿐만아니라 아버지 그늘인 궁궐, 계모인 제2왕후, 이복형제들, 그리고 공주라는 자신의 신분을 벗어나려는 평강공주의 작은 반란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한 청년 온달과 공주의 만남은 역사에 나타난 실존인물이라는 점에서 사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온달이 실존인물이라는 사실은 온달동굴, 온달산성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천연기념물 제261호로 지정된 온달동굴은 온달이 수양을 했다는 전설이 남아있는 곳으로 충북 단양군 영춘면 하리에 있는 석회동굴이다. 이 동굴 위로 돌로 쌓은 산성이 6백여 미터 이어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 온달산성이다. 이 성은 흔히 온달이 운명을 달리한 아단성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일부 학자들은 삼국사기의 아단성이 서울 광장동에 있는 아차산성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그 사실여부가 불분명하다. 또한 온달이 죽은 해에 대해서도 영양왕 원년인 590년으로 설정하고 있지만, 삼국사기에는 영양왕 원년에 고구려와 신라가 전쟁을 치른 기록이 없어 이 역시 확인되지 않고 있다.
-서초동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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