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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실록 : 제3대 대무신왕 본문
고구려 실록 : 제3대 대무신왕
(재위:서기 18년 10월- 서기 44년 10월, 26년)
제3대 대무신왕
유리명왕에게는 6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째 도절은 유리명왕의 화친제의에 반대하다 원인을 알 수 없이 죽었다. 둘째 혜명은 황룡 왕이 선물한 활을 부러뜨린 사건으로 유리명왕의 명에 따라 자결했다. 이에 세째 아들 무휼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제3대 대무신왕이다.
무휼은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하여불과 10세 되던 해인 유리명왕 32년(서기 13년) 11월에 고구려를 침략한 부여군을 방어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 무휼은 적을 산골 깊숙히 끌여들여 골짜기에 적을 가두고 기습전을 펼치는 계책을 내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 11세 되던 해에는 태자에 책봉되어 유리명왕을 대신하여 군사와 국정에 관한 일을 맡아 보았으며 4년 뒤인 서기 18년 10월 무휼은 유리명왕의 뒤를 이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과감한 팽창정책을 펼쳐 나간다.
오늘은 고구려의 역대왕 계보도는 다음과 같다.
고구려 왕 계보도 (삼국사기에 의거)
해모수═╤═유화부인(하백의 딸)
│
소서노═╤═ 1.추모(bc37~19)═╤═예씨부인
│ │
┌┴┐ 2.유리명왕(bc19~ad18)═╤═송양왕의 딸
비류 온조 │
┌─┬─────┬────┬────┼─────┐
도절 해명 3.대무신왕(무휼) 여진 4.민중왕(해색주) 재사═╤═부여태후
(ad 19~ 44) (44~48) │
갈사국왕녀═╣ ╠═ 원비 ┌──────┼─────┐
호동 5.모본왕(? ? ? ). 6.태조왕(궁) 7.차대왕(수성) 8.신대왕(백고)
(49~53) (54~146) (146~165) (165 ~ 179) │
┌┴┐ │ │
막덕 막근 추안 ㅣ
┌────────┬───────────┬─────────────┴─┐
9.고국천왕(이이모) 발기 ╔═10.산상왕(연우)═╤═후녀(주통부인) 계수
(179~197)║ ║ (197~227) │
╚ 우씨왕후(우소의 딸)═══╝ 11.동천왕(교체)(227~248)
┌────────────────────┼──┐
관나부인(장발미녀)══12.중천왕(연불)(248~270) ═╤═연씨왕후 예물 사구
│
┌───────┬──────────────┴───┬──┬──┬─┐
(??) 13.서천왕(약로)(270~292) ═╤═우씨왕후(우수의 딸) 달가 일우 소발 공주(?)══명림홀도
┌─────────┴──────┐ (부마도위)
14.봉상왕(상부)(292~300) 돌고
┌┴┐ │
(?) (?) 15.미천왕(을불)(301~331)
├───────────┐
16.고국원왕(사유)(331~371) 무
┌────────┴────┐
7.소수림왕(구부)(371~384) 18.고국양왕(이연)(384~391)
│
19.광개토대왕(담덕)(391~412)
│
20.장수왕(거련)(413~491)
├──────┐
조다 승천
│
21. 문자왕(나운)(491~519)
┌──────────────────┴─────┐
22.안장왕(흥안)(519~531)══한씨미녀 23.안원왕(보연)(531~545)
│
24.양원왕(평성)(545~559)
│
25.평원왕(양성)(559~590)
┌──────────┬────────┬───┐
26.영양왕(원)(590~618) 27.영류왕(건무)(618~642) 태양 평강공주═온달(부마도위)
│ │
환권 28.보장왕(보장)(642~668)
┌──┬──┼──┬──┐
복남 임무 덕남 덕무 안승
자살,타살 등 일찍 죽은 왕자 타살된 왕, ══ 부부관계 |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는 2대 유리왕의 아들이자,6대 태조왕의 생부입니다.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돌고(固, ?~293)는 13대 서천왕의 차남으로 형인 14대 봉상왕에 의해 죽음을 당합니다.15대 미천왕의 생부입니다.
. 장수왕의 아들인 조다(助多)는 생부인 20대 장수왕이 413~491년 오래 재위하는 바람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먼저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이 21대 문자왕(文咨王/?~519)으로 즉위하였습니다.
고구려 : BC 37년 개국~AD 668년 멸망 (28代 725년간)
순번 |
왕명(이름) |
재위 연도 |
재위 기간 |
혈통 관계 |
1 |
동명성왕(주몽) |
BC37년~BC19년 |
18년 |
해모수와 하백의 딸인 유화부인의 외아들. 부인은 예씨<자-2대 유리>와 연씨<소서노 자-비류, 온조> 고구려 개국시조이며 초대 군주. |
2 |
유리명왕(유리) |
BC19년~AD18년 |
37년 |
주몽과 왕후예씨의 장남. 부인은 송씨<자-도절, 해명, 3대 무휼, 여진, 4대 해색주>와 화희와 치희와 후비 |
3 |
대무신왕(무휼) |
AD 18년~44년 |
26년 |
유리와 왕후송씨의 3남. 부인은 원비인 비류국 여인<자-5대 모본왕>과 갈사부여의 갈사왕의 손녀 해씨<자-호동> |
4 |
민중왕(해색주) |
AD 44년~48년 |
4년 |
유리와 첫째 왕후송씨의 5남. 무휼의 동생. 부인은 성씨불명 |
5 |
모본왕(해우) |
AD 48년~53년 |
5년 |
무휼과 성씨불명 비류국 여인 사이의 차남(호동의제). 부인은 원비 |
6 |
태조왕(궁) |
AD 53년~146년 |
93년 |
유리왕(琉璃王)의 손자이며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와 부여태후 금씨 사이의 아들로 모본왕(慕本王)이 죽은 뒤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7세에 즉위함.119살에 서거하여 한국 왕 중 최장수 왕이며 93년간 통치한 최장수 재임군주임. 부인은 성씨불명<자-막근, 막덕> |
7 |
차대왕(수성) |
AD 146년~165년 |
19년 |
고추가 재사와 부여태후 금씨와의 2남으로 태조왕의 동생. 부인은 성씨불명<자-추안> |
8 |
신대왕(백고) |
AD 165년~179년 |
14년 |
고추가 재사와 부여태후 금씨와의 3남으로 차대왕의 동생. 부인은 성씨불명<자-발기(拔奇). 9대 남무, 발기(發岐), 10대 연우, 계수> |
9 |
고국천왕(남무) |
AD 179년~197년 |
18년 |
신대왕의 차남으로 이름은 남무(男武) 혹은 이이모(伊夷謨)라 한다. 부인은 우씨 |
10 |
산상왕(연우) |
AD 197년~227년 |
30년 |
신대왕의 아들이자 고국천왕의 동생으로 고국천왕이 아들이 없어 즉위하였다. 부인은 소후후녀<자-교체(동천왕)> |
11 |
동천왕(교체) |
AD 227년~248년 |
21년 |
산상왕과 소후후녀의 아들. 아명은 교체, 휘는 우위거(憂位居) 또는 위궁(位宮)라함 부인 성씨불명<자-12대 연불, 예물, 사구과 후궁 동해녀 |
12 |
중천왕(연불) |
AD 248년~270년 |
22년 |
동천왕 아들.243년(동천왕 17) 태자가 되었고, 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부인은 연씨<자-13대 약로, 달가, 일우, 소발>과 관나부인<자-?> |
13 |
서천왕(약로) |
AD 270년~292년 |
22년 |
중천왕과 왕후연씨의 차남. 부인은 우씨<자-14대 상불, 15대 을불> |
14 |
봉상왕(상불) |
AD 292년~300년 |
8년 |
서천왕과 왕후 우씨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 |
15 |
미천왕(을불) |
AD 300년~331년 |
31년 |
서천왕과 왕후 우씨의 차남. 부인은 주씨<자-16대 사유, 무> |
16 |
고국원왕(사유) |
AD 331년~371년 |
40년 |
미천왕과 왕후 주씨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17대 구부, 18대 이연> |
17 |
소수림왕(구부) |
AD371년~384년 |
13년 |
고국원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 |
18 |
고국양왕(이연) |
AD 384년~391년 |
7년 |
고국원왕의 차남. 부인은 성씨불명<자-19대 담덕> |
19 |
광개토대왕(담덕) |
AD 391년~412년 |
21년 |
고국양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20대 거련, 승평> |
20 |
장수왕(거련) |
AD 413년~491년 |
78년 |
광개토대왕의 장남. 475년 백제 한성(漢城) 함락하고 개로왕 살해. 481년 신라 8성을 점령. 영토가 남은 아산만과 죽령(竹嶺), 서는 요하, 동은 홋카이도 훈춘, 북은 카이위안 개원까지 확장해 고구려 최전성기를 이루었다. 부인은 성씨불명<자-조다, 승천> |
21 |
문자명왕(나운) |
AD 491년~519년 |
28년 |
장수왕의 손자(조다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22대 흥안, 23대 보연> |
22 |
안장왕(흥안) |
AD 519년~531년 |
12년 |
문자명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 |
23 |
안원왕(보연) |
AD 531년~545년 |
14년 |
문자명왕의 차남. 부인은 성씨불명<자-24대 평성, 세군> |
24 |
양원왕(평성) |
AD 545년~559년 |
14년 |
안원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양성> |
25 |
평원왕(양성) |
AD 559년~590년 |
31년 |
양원왕의 아들. 제일부인 성씨불명<자-26대 원, 평강공주>. 제2부인 성씨불명<자-27대 영류왕, 28대 보장왕> |
26 |
영양왕(원) |
AD 590년~618년 |
18년 |
평원왕의 제일부인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환치> 수나라 문제와 양제가 30만과 113만 대군으로 침공해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대승해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됐다. |
27 |
영류왕(건무) |
AD 618년~642년 |
24년 |
평원왕의 제이부인의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환권> |
28 |
보장왕(보장) |
AD 642년~668년 |
26년 |
평원왕의 제이부인의의 차남. 제1부인 성씨불명<자-복남, 임무, 덕무> 제2부인 성씨불명<자-안승>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에 의하여 왕위에 올랐으며, 당나라와 신라 연합군의 파상적인 공격을 받아 고구려가 멸망하자 체포되어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복국(復國)을 꾀하였다가 실패한 뒤 사망한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 |
한나라에서 왕망이 왕위를 찬탈하고 신나라를 세운 이후 중원은 왕망군과 농민군의 전쟁에 휩싸인다. 이에 따라 국제정세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고구려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영토확장을 위한 정복전쟁에 나선다. 그러나 후한의 출현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대무신왕이 왕위에 오를 무렵 왕망의 신나라는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부패한 정권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반기를 든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산동 지방의 '번승'이 일으킨 <적미의 난>과 녹림산에서 '왕광'과 '왕봉'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녹림의 난>이다.
이러한 혼란기를 틈타 대무신왕은 대대적인 팽창정책을 감행한다. 대륙의 맹주였던 한나라의 붕괴와 한나라를 붕괴시킨 왕망 정권의 몰락은 곧 북방의 맹주를 자처하던 고구려와 부여에겐 영토확장의 기회였다.
부여의 대소왕은 고구려 대무신왕과의 대결에서 패배하고 고구려 장수 괴유에게 목이 베인다. 대소의 죽음은 부여에 엄청난 타격을 안겨 주는데 왕을 잃은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고, 왕위 다툼에서 밀려난 대소의 막내 동생은 부여를 탈출하여 압록곡 부근에 '갈사부여'를 세운다. 또한 대소의 사촌 동생이 백성 만여 명을 대리고 고구려에 귀순해 온다.
이 무렵 중원에서는 한 왕조의 후예인 '유연'과 '유수' 형제가 한의 재건을 맹세하고 신의 군대와 격돌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서기 23년에 마침내 왕망을 제거하고, 2년 뒤 서기 25년에 유연의 동생 유수가 유연을 제거하고 한의 왕으로 등극한다.
중원이 이러한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는 가운데 고구려는 안으로 관제를 정비하고 밖으로는 꾸준히 팽창정책을 추구하여 서기 26년 10월에는 '개마국'을 복속시키고, 같은 해 12월에는 '구다국'을 복속시켰다. 이 때 대무신왕은 직접 정벌전쟁에 나서 개마국 왕을 죽이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팽창정책이 가속화 되고 있을 무렵 유수는 한의 요동 태수를 앞세워 고구려를 침략한다. 서기 28년 한의 요동 태수가 백만의 군사를 이끌고 위나암을 향해 밀려들자, 고구려 조정은 수성전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한의 요동군은 위나암을 겹겹이 에워싸고 장기전 태세에 들어갔다. 이 때 좌보로 있던 재상 '을두지'는 적이 위나암성의 물이 고갈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판단하고 연못의 잉어를 수초에 싸서 적장에게 보냈다. 그러자 적장은 단시일 내에 성을 점령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물러난다.
이에 대무신왕은 팽창정책을 지속하여 낙랑을 정복하는데 선봉에 선 사람은 바로 대무신왕의 둘째 아들 왕자 '호동'이었다. 호동은 낙랑 정복을 위해 낙랑 왕 최리의 딸과 결혼을 하면서까지 철저하게 정복야욕을 숨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호동은 낙랑 정복의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대무신왕의 �째 왕후가 자신의 아들을 태자에 책봉시키기 위해 간계를 꾸미는데, 바로 왕자 호동이 자신을 간통했다는 계략에 누명을 쓰게 되자 , 결국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로부터 5년 후 대무신왕은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낙랑을 복속시키게 된다.
하지만 고구려의 낙랑 복속은 후한의 반발에 부딪힌다. 후한은 낙랑 지역이 원래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돌려 줄 것을 요구한지만 고구려는 이에 응하지 않는다. 이에 후한의 유수는 서기 44년에 바다를 통해 낙랑 지역에 군사를 투입하였고, 결국 고구려는 낙랑지역을 후한에게 다시 빼았기게 된다.
<삼국사기>는 이 사건 이후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 때의 살수는 한반도의 청천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요서 지방의 강을 가르킨다고 보아야 한다.
낙랑국의 위치에 대한 이설들
낙랑(樂浪)이라는 말을 풀이해보면 '물결을 즐긴다'는 뜻이 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파도를 즐긴다'는 뜻이다. 이는 곧 낙랑이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음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낙랑은 바다를 끼고 있는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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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이라는 이름이 처음 언급된 <한서>에는 한사군의 순서가 진번,임둔,낙랑,현도 순으로 되어 있다. 이 배열은 아마도 한나라의 수도 장안에서 가까운 순서에 따랐을 가능성이 높다. 이 논리에 의하면 낙랑은 현도보다는 한나라에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설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최근 한 역사학자의 박사 논문에서 비정한 한사군의 위치는 당시 문헌을 근거로 지리적인 거리를 연구한 결과 위의 그림과 같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논문에 대해 거리 단위가 시대별로 다른점을 들어 이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많다. 그만큼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서 한반도 일대라느니, 압록강 일대 및 만주지역 일대라느니, 난하, 갈석산 일대를 포함하여 북경과 요서 지역일대라는 주장들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그런데 <후한서>의 '부여국'편에는 "부여국은 현도의 북쪽 1천리에 있다."고 쓰여 있다. 다시 말해서 현도는 부여국의 남쪽 경계로부터 1천 리 남쪽에 있다는 뜻이 된다. 또 <후한서>는 "부여의 남쪽은 고구려와 접한다."고 했다. 따라서 현도는 고구려의 서남쪽에 있어야 한다.그러나 <후한서> '동옥저'편에는 현도둔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옥저의 땅을 현도군으로 삼았다. 후에 이맥들의 침략을 받게 되자 군을 고구려의 서북으로 옮기고, 다시 옥저를 현으로 삼아 낙랑의 동도위부에 예속시켰다."
이 기록에서는 현도가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겨 갔다고 했다. 이는 같은 책 '부여국'편의 "부역국은 현도의 북쪽 1천 리에 있다.", "부여의 남쪽은 고구려와 접한다."는 기록과 모순된다. 또 이 기록을 바탕으로 하면 군의 위치가 상황에 따라 옮겨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후한서>의 편자가 고구려 땅을 자신들이 지배했다는 논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현도의 위치를 조작했을 것이라는 의심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그 어떤 기록도 현도군이 한반도 안에 있었다는 주장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또한 낙랑이 현도보다 한의 장안에 더 가까이 있었다는 논리를 여기에 대입한다면 낙랑 역시 한반도 안에 있을 수 없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낙랑의 위치를 알려주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한나라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았아 군현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대무신왕 27년 9월)
"왕이 장수를 보내 한나라 요동 서안평현을 습격하여 대방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빼앗아
돌아왔다."(태조 94년 8월)
이 두 기록을 분석해 보면 낙랑의 위치는 더욱 명확해진다. 대무신왕 27년(서기 44년)9월에 한나라가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낙랑은 고구려 대무신왕 20년에 정복한 곳이다. 그렇다면 낙랑은 한에 복속되었다는 뜻이고, 그 때부터 102년 후인 제6대 태조 94년(서기 146년) 8월 기사에 언급되는 낙랑 태수는 바로 한이 서기 44년에 정복한 낙랑 지역의 태수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고구려군은 낙랑 태수 부인을 한의 요동 서안평현에서 붙잡아 왔다. 이는 서안평현에 낙랑 태수가 있었다는 뜻이고, 낙랑 역시 한의 요동 서안평현에 있었다는 뜻이 된다.
황해도 안악3호분 안 칸 동북벽 회랑의 대행렬도. 말을 탄 기병중 철갑으로 무장한 개마기병을 화면 중앙 위아래로 각각 4명씩 찾을 수 있다. -사진제공 이태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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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요동은 난하 동쪽, 라오허(요하) 서쪽 지역을 의미하므로 낙랑은 난하와 라오허 사이에 있으면서 난하쪽으로 지우친 바닷가에 있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러한 결론은 대무신왕 27년 기사에 나오는 '살수'는 현재 북한에 있는 청천강이 아니라 라오허 강과 그 주변의 어떤 강을 가르킨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는 612년에 벌어지는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 청천강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려준다.
하지만 한의 요수를 현재의 황하로 설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대표적인 기록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 5대 모본왕 2년 기사이다.
"2년 봄, 장수를 보내 한의 북평, 어양,상곡,태원을 습격했다. 그러나 요동 태수 채용이 은혜와 신의로써 대접하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이때 고구려가 점령한 북평, 어양, 상곡은 현재의 북경 근처이며, 태원은 당의 이연이 일어났던 곳으로 황하 조금 못미처에 있는, 현재의 태원시이다. 그리고 북평을 제외하고는 모두 난하 서쪽에 있다. 그런데 이곳을 고구려가 점령하자 한 왕 유수는 요동 태수를 보내 화친을 제의한다. 이들 지역은 모두 한나라의 요동에 속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며 요수는 바로 황하가 되는 셈이다.
이렇게 황하를 한나라의 요수로 설정할 경우 낙랑은 황하와 라오허 사이에 있으면서 황하쪽으로 지우친 바닷가에 있어야 한다. 또 살수는 라오허와 황하 사이에 있는 어떤 강을 지칭하게 되는데, 황하와 라오허 사이에 난하를 포함하여 큰 강만도 5개 이상 있으므로 그 중 하나를 살수로 보면 될 것이다.
-서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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