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고구려 실록: 차대왕-신대왕-고국천왕 본문
고구려 실록 : 제7대 차대왕-제8대 신대왕-제9대 고국천왕
제7대 차대왕 실록(재위 서기 146년 12월-165년 10월, 18년 3개월)
폭군 차대왕의 즉위와 피의 숙청
태조를 몰아내고 차대왕이 왕위에 오르자 고구려 조정은 피바람에 휩싸인다. 차대왕은 즉위하자 측근들을 요직에 배치하고 반대세력을 제거하는 한편, 걸림돌이 되는 왕족들을 가차없이 죽였다. 이로인해 조정은 혼란에 휩싸이고, 피의 숙청으로 권력을 독차지한 차대왕은 폭정을 계속한다.
오늘은 고구려의 역대왕 계보도는 다음과 같다.
고구려 왕 계보도 (삼국사기에 의거)
해모수═╤═유화부인(하백의 딸)
│
소서노═╤═ 1.추모(bc37~19)═╤═예씨부인
│ │
┌┴┐ 2.유리명왕(bc19~ad18)═╤═송양왕의 딸
비류 온조 │
┌─┬─────┬────┬────┼─────┐
도절 해명 3.대무신왕(무휼) 여진 4.민중왕(해색주) 재사═╤═부여태후
(ad 19~ 44) (44~48) │
갈사국왕녀═╣ ╠═ 원비 ┌──────┼─────┐
호동 5.모본왕(? ? ? ). 6.태조왕(궁) 7.차대왕(수성) 8.신대왕(백고)
(49~53) (54~146) (146~165) (165 ~ 179) │
┌┴┐ │ │
막덕 막근 추안 ㅣ
┌────────┬───────────┬─────────────┴─┐
9.고국천왕(이이모) 발기 ╔═10.산상왕(연우)═╤═후녀(주통부인) 계수
(179~197)║ ║ (197~227) │
╚ 우씨왕후(우소의 딸)═══╝ 11.동천왕(교체)(227~248)
┌────────────────────┼──┐
관나부인(장발미녀)══12.중천왕(연불)(248~270) ═╤═연씨왕후 예물 사구
│
┌───────┬──────────────┴───┬──┬──┬─┐
(??) 13.서천왕(약로)(270~292) ═╤═우씨왕후(우수의 딸) 달가 일우 소발 공주(?)══명림홀도
┌─────────┴──────┐ (부마도위)
14.봉상왕(상부)(292~300) 돌고
┌┴┐ │
(?) (?) 15.미천왕(을불)(301~331)
├───────────┐
16.고국원왕(사유)(331~371) 무
┌────────┴────┐
7.소수림왕(구부)(371~384) 18.고국양왕(이연)(384~391)
│
19.광개토대왕(담덕)(391~412)
│
20.장수왕(거련)(413~491)
├──────┐
조다 승천
│
21. 문자왕(나운)(491~519)
┌──────────────────┴─────┐
22.안장왕(흥안)(519~531)══한씨미녀 23.안원왕(보연)(531~545)
│
24.양원왕(평성)(545~559)
│
25.평원왕(양성)(559~590)
┌──────────┬────────┬───┐
26.영양왕(원)(590~618) 27.영류왕(건무)(618~642) 태양 평강공주═온달(부마도위)
│ │
환권 28.보장왕(보장)(642~668)
┌──┬──┼──┬──┐
복남 임무 덕남 덕무 안승
자살,타살 등 일찍 죽은 왕자 타살된 왕, ══ 부부관계 |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는 2대 유리왕의 아들이자,6대 태조왕의 생부입니다.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돌고(固, ?~293)는 13대 서천왕의 차남으로 형인 14대 봉상왕에 의해 죽음을 당합니다.15대 미천왕의 생부입니다.
. 장수왕의 아들인 조다(助多)는 생부인 20대 장수왕이 413~491년 오래 재위하는 바람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먼저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이 21대 문자왕(文咨王/?~519)으로 즉위하였습니다.
고구려 : BC 37년 개국~AD 668년 멸망 (28代 725년간)
순번 |
왕명(이름) |
재위 연도 |
재위 기간 |
혈통 관계 |
1 |
동명성왕(주몽) |
BC37년~BC19년 |
18년 |
해모수와 하백의 딸인 유화부인의 외아들. 부인은 예씨<자-2대 유리>와 연씨<소서노 자-비류, 온조> 고구려 개국시조이며 초대 군주. |
2 |
유리명왕(유리) |
BC19년~AD18년 |
37년 |
주몽과 왕후예씨의 장남. 부인은 송씨<자-도절, 해명, 3대 무휼, 여진, 4대 해색주>와 화희와 치희와 후비 |
3 |
대무신왕(무휼) |
AD 18년~44년 |
26년 |
유리와 왕후송씨의 3남. 부인은 원비인 비류국 여인<자-5대 모본왕>과 갈사부여의 갈사왕의 손녀 해씨<자-호동> |
4 |
민중왕(해색주) |
AD 44년~48년 |
4년 |
유리와 첫째 왕후송씨의 5남. 무휼의 동생. 부인은 성씨불명 |
5 |
모본왕(해우) |
AD 48년~53년 |
5년 |
무휼과 성씨불명 비류국 여인 사이의 차남(호동의제). 부인은 원비 |
6 |
태조왕(궁) |
AD 53년~146년 |
93년 |
유리왕(琉璃王)의 손자이며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와 부여태후 금씨 사이의 아들로 모본왕(慕本王)이 죽은 뒤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7세에 즉위함.119살에 서거하여 한국 왕 중 최장수 왕이며 93년간 통치한 최장수 재임군주임. 부인은 성씨불명<자-막근, 막덕> |
7 |
차대왕(수성) |
AD 146년~165년 |
19년 |
고추가 재사와 부여태후 금씨와의 2남으로 태조왕의 동생. 부인은 성씨불명<자-추안> |
8 |
신대왕(백고) |
AD 165년~179년 |
14년 |
고추가 재사와 부여태후 금씨와의 3남으로 차대왕의 동생. 부인은 성씨불명<자-발기(拔奇). 9대 남무, 발기(發岐), 10대 연우, 계수> |
9 |
고국천왕(남무) |
AD 179년~197년 |
18년 |
신대왕의 차남으로 이름은 남무(男武) 혹은 이이모(伊夷謨)라 한다. 부인은 우씨 |
10 |
산상왕(연우) |
AD 197년~227년 |
30년 |
신대왕의 아들이자 고국천왕의 동생으로 고국천왕이 아들이 없어 즉위하였다. 부인은 소후후녀<자-교체(동천왕)> |
11 |
동천왕(교체) |
AD 227년~248년 |
21년 |
산상왕과 소후후녀의 아들. 아명은 교체, 휘는 우위거(憂位居) 또는 위궁(位宮)라함 부인 성씨불명<자-12대 연불, 예물, 사구과 후궁 동해녀 |
12 |
중천왕(연불) |
AD 248년~270년 |
22년 |
동천왕 아들.243년(동천왕 17) 태자가 되었고, 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부인은 연씨<자-13대 약로, 달가, 일우, 소발>과 관나부인<자-?> |
13 |
서천왕(약로) |
AD 270년~292년 |
22년 |
중천왕과 왕후연씨의 차남. 부인은 우씨<자-14대 상불, 15대 을불> |
14 |
봉상왕(상불) |
AD 292년~300년 |
8년 |
서천왕과 왕후 우씨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 |
15 |
미천왕(을불) |
AD 300년~331년 |
31년 |
서천왕과 왕후 우씨의 차남. 부인은 주씨<자-16대 사유, 무> |
16 |
고국원왕(사유) |
AD 331년~371년 |
40년 |
미천왕과 왕후 주씨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17대 구부, 18대 이연> |
17 |
소수림왕(구부) |
AD371년~384년 |
13년 |
고국원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 |
18 |
고국양왕(이연) |
AD 384년~391년 |
7년 |
고국원왕의 차남. 부인은 성씨불명<자-19대 담덕> |
19 |
광개토대왕(담덕) |
AD 391년~412년 |
21년 |
고국양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20대 거련, 승평> |
20 |
장수왕(거련) |
AD 413년~491년 |
78년 |
광개토대왕의 장남. 475년 백제 한성(漢城) 함락하고 개로왕 살해. 481년 신라 8성을 점령. 영토가 남은 아산만과 죽령(竹嶺), 서는 요하, 동은 홋카이도 훈춘, 북은 카이위안 개원까지 확장해 고구려 최전성기를 이루었다. 부인은 성씨불명<자-조다, 승천> |
21 |
문자명왕(나운) |
AD 491년~519년 |
28년 |
장수왕의 손자(조다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22대 흥안, 23대 보연> |
22 |
안장왕(흥안) |
AD 519년~531년 |
12년 |
문자명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 |
23 |
안원왕(보연) |
AD 531년~545년 |
14년 |
문자명왕의 차남. 부인은 성씨불명<자-24대 평성, 세군> |
24 |
양원왕(평성) |
AD 545년~559년 |
14년 |
안원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양성> |
25 |
평원왕(양성) |
AD 559년~590년 |
31년 |
양원왕의 아들. 제일부인 성씨불명<자-26대 원, 평강공주>. 제2부인 성씨불명<자-27대 영류왕, 28대 보장왕> |
26 |
영양왕(원) |
AD 590년~618년 |
18년 |
평원왕의 제일부인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환치> 수나라 문제와 양제가 30만과 113만 대군으로 침공해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대승해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됐다. |
27 |
영류왕(건무) |
AD 618년~642년 |
24년 |
평원왕의 제이부인의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환권> |
28 |
보장왕(보장) |
AD 642년~668년 |
26년 |
평원왕의 제이부인의의 차남. 제1부인 성씨불명<자-복남, 임무, 덕무> 제2부인 성씨불명<자-안승>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에 의하여 왕위에 올랐으며, 당나라와 신라 연합군의 파상적인 공격을 받아 고구려가 멸망하자 체포되어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복국(復國)을 꾀하였다가 실패한 뒤 사망한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 |
차대왕은 유리명왕의 여섯째 아들 재사의 차남이며, 태조의 동복 아우로 태조 초기에 수렴청정을 했던 태후 해씨 소생이다. 서기 71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수성이다. 친형 태조의 총애를 받아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서기 121년부터는 국정을 도맡았다. 이후 권력을 독식하며 왕위 찬탈을 꿈꾸다가 서기 146년 12월 태조를 압박하여 상왕으로 물러앉히고 고구려 제7대 왕에 올랐다. 그 때 그의 나이 76세였다.
왕위에 오른 차대왕은 즉위 2개월 만인 2월에 우선 자신의 최측근인 관나부 우태 미유의 작위를 패자로 격상시킨 후 좌보에 임명하였으며, 3월에는 정적 고복장을 사형에 처했다. 고복장이 죽자 좌보로 있던 목도루는 병을 핑계삼아 퇴직을 자청한다. 차대왕은 목도루가 존경받던 신하지만 퇴직을 청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측근인 환나부 우태 어지류의 직위를 대부부로 격상시켜 좌보로 임명하였다. 또 자신의 왕위 찬탈에 큰 역활을 한 비류나부의 양신을 조의에서 우태로 작위를 격상시켜 중외대부에 재수했다. 이렇게 하여 조정은 차대왕의 측근들로 채워졌다.
이렇게 자신의 독재체제를 구축한 차대왕은 서기 148년 3월에는 태조왕의 근신들이 끓임없이 역모를 도모할 것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조카이자 태조왕의 맏아들인 막근태자를 죽인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왕의 둘째 아들 막덕은 스스로 목숨을 끓는다.
차대왕의 폭정은 날로 심해졌으며, 그의 향락으로 인해 백성은 굶주림과 학정에 고통받고 간신들은 부패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같은 폭정이 계속되던 서기 165년 3월, 차대왕의 폭정에 두 아들이 무참하게 죽는 것을 보면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분노와 노기로 가득찬 세월을 별궁에서 보내던 태조왕은 결국 119세로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그해 10월 드디어 차대왕의 폭정도 종말을 고한다. 연나부 조의 명림답부가 주동이 되어 정변을 일으켜 차대왕을 시해했다. 이 정변에는 차대왕의 측근들도 가담하였는데, 차대왕의 폭정이 얼마나 극악하였는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제8대 신대왕 실록(재위 서기 165년 10월-179년, 14년 2개월)
신대왕의 즉위와 조정의 안정
명림답부의 정변으로 차대왕이 제거되고 신대왕이 등극함에 따라 고구려 백성들은 폭정의 그늘에서 벗어난다. 신대왕은 화합책을 도모하여 정국을 안정시키는 한편 백성들에게 위무정책을 추진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둔다. 그러나 국제정세의 급변에 따라 동한과 패권다툼이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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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왕은 고추가(조선시대 대원군에 해당) 재사의 셋째 아들이며, 태조와 차대왕의 이복 동생이다. 서기 89년에 태어낫으며, 이름은 백고(백구)이다. 누구의 소생인지는 알 수 이없으나, 차대왕 재위 때에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산 속에 몸을 숨겼다가 서기 165년 10월 차대왕이 제거되자 77살의 노구로 고구려 제8대왕에 추대되었다.
신대왕은 맏형인 태조보다 42살 아래이며, 둘째 형인 차대왕보다는 18살 아래이다. 백고는 차대왕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한 인물이었다. 그는 차대왕을 찿아가서 만류하나 차대왕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태조를 상왕으로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다. 차대왕이 왕위를 차지하자 백고는 산속으로 몸을 피하여 은둔한다. 누군가 반정을 도모하다 실패하기라도 하면 반드시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백고의 예상은 적중했다.
서기 165년 10월 연나부 조의 명림답부가 주동이 되어 반정이 일어났고, 폭군 차대왕은 반정세력의 칼에 목이 달아났다. 명림답부는 정권을 장악한 뒤에 차대왕의 근신들을 포섭하여 백고를 새 왕으로 추대할 것을 결정하고 사방에 백고를 �기위해 사람을 풀었다. 얼마뒤 백고가 궁궐로 돌아오자 반정공신들이 옥새를 바쳤다. 백고는 관례에 따라 세번 거절한 뒤에 옥새를 받아들여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고구려 제8대 신대왕이다.
왕위에 오른 신대왕은 우선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리고 백성들에게 위무정책을 시행했다. 그 결과 차대왕의 측근들을 포함하여 대다수의 죄수들이 사면되었다. 차대왕의 태자 추인은 정변이 나자 산 속으로 도망을 가서 숨어 지내다가 이 소식을 듣고 산에서 내려와 궐문앞에 무릎을 끓고 사면을 요청하였다. 이에 신대왕은 추인에게 양국군이라는 봉작과 봉토를 내리고 평생토록 편안히 살도록 배려했다. 이는 화합정책의 표방하기 위하여 새 정권 명림답부 일파가 화합을 알리는 징표였다.
신대왕은 조정의 행정제도를 대폭 개선하였다. 재상격인 좌.우보 제도를 없애고 국상제를 도입하여 초대 국상에 명림답부를 임명하였다. 국상제를 도입한 것은 그만큼 왕의 권한이 축소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막강한 권력을 쥐게된 명림답부는 행정권은 물론 병권도 주어졌다.
그구려 조정이 명림답부에 의해 장악되고 있을 무렵 국제정세는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었다. 북방에는 선비 세력이 날로 팽창하여 남하하고 있었고, 부여와 동한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고구려, 부여,선비,동한의 변방에는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서기 167년 봄에 부여 왕 부태가 무역마찰로 인한 문제로 고구려,선비의 묵인하에 군사 2만을 동원하여 한의 현도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현도 태수 공손역의 방어전으로 부여군이 물러났다.
이러한 사이 고구려는 선비와 연합하여 동한의 유주와 병주를 공격하였으며 동한은 현도 태수 경림에게 군사를 내주어 응전하게 하였다. 그 후 고구려 연합군과 동한군은 한동안 밀고 밀리는 소모전을 지속하다가 화의조약을 맺고 일시적으로 휴전하였다.
동한은 휴전을 파기하고 서기 172년 신대왕 8년 11월에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나 고구려의 방어벽을 뚫지 못하고 맥없이 퇴각하다가 좌원에서 고구려군에 의해 전멸한다(좌원대첩).
개마무사
동한은 좌원대첩 이후 오랫동안 고구려를 넘보지 못하였다. 좌원대첩에서 승리한 고구려 국상 명림답부의 나이는 당시 106세였다. 백발이 성성한 노구를 이끌고 노익장을 과시하던 그에게도 죽음이 �아왔다. 결국 노환으로 누워있던 답부는 서기 179년 9월에 11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러자 신대왕은 자신이 직접 답부의 빈소를 �아와 애도하고, 7일간 조회를 중지하였다. 그 후 신대왕도 그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다가 3개월 뒤인 그해 12월에 생을 마감하였다. 개인적으로는 선생이고, 정치적으로는 든든한 후견인이었으며, 사상적으로는 동지였고, 자신의 생명을 구해주고 왕위까지 등극시킨 명림답부의 죽음은 아흔 살을 넘긴 신대왕에게는 참아내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해 12월에 신대왕도 9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제9대 고국천왕 실록(재위 서기 179년 12월-197년 5월, 17년 5개월)
고국천왕의 개혁과 외척의 반발
고국천왕의 즉위는 고구려 조정에 개혁 바람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즉위시 조정은 연나부와 환나부 출신의 외척들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고국천왕은 외척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개혁을 단행한다. 하지만 외척들이 반발하여 '좌가려의 난','발기의 난'이 발발하여 위기를 맞기도 하지만 이를 극복하고 을파소와 같은 뛰어난 인물을 등용해 사회변혁을 시도한다.
고국천왕은 신대왕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남무, 별호는 이이모였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으며 모후도 밝혀지지 않았다. 서기 176년 신대왕 12년 3월에 형인 발기를 제치고 태자에 책봉되었다가 3년 뒤인 서기 179년 12월에 신대왕이 사망함에 따라 고구려 제9대 왕에 올랐다.
<삼국사기>에는 그에 대해 "키기 9척이고, 풍채가 웅장하며 힘이 셌다. 사무처리에 있어 관용과 예리함을 겸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가 말해주듯 그는 문무를 겸비하였고, 과단성과 부드러움을 고루 갖춘 개혁적인 인물이었다.
고국천왕은 즉위하자 곧 능력 중심으로 조정을 개편할 뜻을 품는다. 그러나 외척들의 힘은 왕권을 능가할 정도로 탄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단은 외척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연나부 출신 아내 우씨를 왕후로 책봉하고 친밀관계를 유지한다.
그런 가운데 서기 184년 요동 태수가 고구려를 침공한다. 당시 동한은 서기 107년 이후 100여 차례나 계속되던 농민봉기가 마침내 폭발하여 그해 2월에 황건군의 대봉기로 이어져 동한의 영재 유굉은 관군을 동원하여 봉기군을 진압토록 하였으나 봉기군은 8개월이나 버티며 전국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그해 10월, 마침내 황보숭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봉기군은 진압되었다. 당시 고구려는 동한의 혼란한 틈을 타서 현도와 요동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을 것이고, 이를 염려한 동한 조정은 요동태수를 시켜 침공토록 했다. 요동 태수의 고구려 침공은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전술로 먼저 공격하였는데, 시기는 봉기군 진압 그 전후가 될 듯하다.
동한군이 고구려 영내 요서 지역 깊숙히 들어오자 고구려군은 고국천왕의 막내 동생 계수가 대적하였는데, �번째 싸움에서 동한군이 승리한다. 이에 동한군은 기세가 등등하여 요동으로 밀려왔다. 이에 고국천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가 좌원에서 동한군에 대응하였다. 좌원에서 벌어진 이 두 번째 싸움에서 동한군은 대패하고 말았다. 당시를 <삼국사기>는 싸움의 결과를 "적의 머리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고 함으로써 동한군의 패배가 심대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싸움 이후 동한군은 더 이상 고구려 땅을 넘보지 못하였으며 고국천왕은 독자적인 힘을 형성한다. 왕권이 강화되자 고국천왕은 오랫동안 벼르고 있던 일을 시작하는데, 그것은 횡포와 전횡을 일삼고 있던 외척세력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당시 외척세력 중에서 우두머리는 좌가려와 어비류였다. 고국천왕이 외척세력을 제거하려는 것을 눈치챈 이들은 연나부에 속한 네 명의 관료들과 힘을 합쳐 그해 9월에 반란을 일으켜 점차 세력을 확대하여 다음해 4월에는 도성을 공격하였다. 이에 고국천왕은 직접 병력을 수습하여 반란군을 진압하고, 마침내 왕권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왕권 회복 후 고국천왕은 대대적인 정계개편을 시도한다. 그는 각 나부의 귀족들을 영입하던 종래의 관례를 버리고 능력 중심으로 인재를 뽑고자 하였다. 나부체제 대신 방향부 체제를 확립하여 동부.서부.남부.북부로 나누고, 4부에 명령하여 국상을 추천토록 하였다. 대신들은 동부의 안류를 추천하였으나 안부는 자신은 국상의 자격이 없다며 서압록곡의 좌물촌에 살고 있는 을파소를 천거하였다.
안류의 천거에 따라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불러 우태의 작위를 주고 중외대부에 임명하려 하였으나 을파소는 중외대부라는 직책으로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며 사양하자 그 마음을 헤아린 고국천왕은 그를 국상에 임명한다.
을파소를 국상에 임명하자 조정 대신들과 외척들은 불만을 드러낸다. 그러나 고국천왕은 '국상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친족까지 징벌하겠다'는 엄명을 내려 더 이상 불만을 토로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 후 을파소는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하여 백성과 조신들의 신망을 동시에 얻으며 과감한 개혁을 실행한다. 능력에 따라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국사처리에 있어서 상벌 규정을 명확히 히고, 환곡제도를 마련하여 백성들의 경제적 안정을 꾀하였다.
을파소의 뛰어난 정치력으로 고구려 사회가 정치.경제적으로 안정을 유지하고 있을 때, 동한의 중원에서는 엄청난 회오리가 몰아치고 있었다.
당시 중국 정세
184년 황건적의 난 이후 하북의 농민들은 동한 왕조에 반대하여 끓임없이 봉기를 일으켰는데, 그들 중 장연이 이끄는 흑산군은 흑산을 근거지로 한 농민군 연합체로 무려 1백 만에 달하는 무리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그 위력이 대단하였다. 그 외에 익주의 오두미도, 청주.서주 등지의 황건적 잔당세력이 동한 왕조를 위협하고 있었다.
어려운 형국이 계속되는 가운데 189년 동한 영제 유굉이 죽고 외척 하진이 정권을 장악하여 나이 어린 유변(소제)을 왕으로 세워 정권을 농단하려 하자 환관세력들이 만만치 않아 하진은 원소와 결탁하여 환관들을 대거 참살하려는 모의를 꾸미는데, 이 계획이 발각되는 바람에 하진이 환관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원소는 군대를 이끌고 궁성에 난입하여 환관 2천 명을 참살하고 환관정치를 종식시킨다. 그러나 이 같은 유혈사태는 양주의 군벌 동탁의 세력을 키우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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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탁은 궁성을 장악하고 있던 원소를 몰아내고 유변을 폐위시키고 당시 9살이던 영제의 아들 유현(헌제)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이후 동한은 동탁의 손아귀에 들어갔지만, 동탁도 오래가지 못하였다.
서기 192년 동탁의 수하 왕윤과 여포가 동탁을 살해하고, 파벌싸움으로 각처의 군벌들이 대두하여 동한은 몰락하고 군벌들의 세력타툼 시기인 삼국시대를 맞는다.
이 무렵, 고구려의 접경 지역인 한나라 요동에는 공손탁, 유주에는 공손찬이 세력을 형성하여 고구려와 대치하고 있었다. 당시 공손탁은 하북성과 요서 지역 일부를 점유하여 고구려 변방을 압박하고 있었는데, 고국천왕의 형인 발기가 공손탁에 의지하여 왕위 찬탈 계획을 꾸민다.
발기는 고구려 조정에서 소외받던 소나부(연노부)와 결탁하여 소나부 산하 백성 3만여 호를 이끌고 공손탁의 아들 공손강을 찿아가 항복한다. 그리고 비류수 근처에 진을 치고 있다가 공손강으로부터 군사를 지원받아 고구려 도성을 친다. 하지만 공손강의 군사는 고구려군에게 패퇴하였고, 발기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공손강의 영토로 도망쳤다.
이듬해 197년에는 동한의 만은 한족들이 내란을 피해 피난길에 올라 고구려 변방으로 몰려들자 이들을 받아들여 4부에 분산 배치하고, 변방 지역의 군사를 증강하여 엄히 지켰다.
이렇게 백성들의 안위와 국방에 전력을 쏟던 고국천왕은 서기 197년 5월에 생을 마감한다.
-서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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