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고구려 수도 이전 본문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고구려 수도 이전

두바퀴인생 2008. 8. 31. 23:52

 

 

                             고구려의 수도 이전

 

 

                              

 

수도이전 지도가 없어서 고구려의 지도를 대신하여 올립니다.

 

여러 가설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국사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내용이 마치 정설인 것처럼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 이병도 학풍의 학계에서 주장하는 설일 뿐이지 정설은 아닙니다.

 

 고구려 첫 도읍지에 대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졸본, 광개토대왕릉비문에서는 홀본, 위서에서는 홀승공성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들 세 지명은 졸본을 지칭하므로 첫 도읍지는 졸본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졸본의 위치에 관련한 설들을 보면, 첫번 째는 오녀산성 설과 두번 째는 요동설 두 가지 입니다.

 

오녀산성 설은 지금의 만주 환인 북쪽 환인분지 안에 있는 이 오녀산성엔 적석총(돌무지무덤)을 비롯한 많은 고분군이 산재해 고구려 첫 도읍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설은 오녀산성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고, 다른 유적지의 출현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가변적인 추론임에 불과한 한계성 때문에 요동설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요동설은 삼국유사를 쓴 일연의 주장으로 그는 (유사 고구려전)에서 "고구려는 졸본부여이다. 더러는 졸본주가 지금의 화주(함남 영흥) 또는 성주(평남 성천) 라고 하지만 이는 모두 잘 못이다. 졸본주는 요동 지역에 있다." 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다시 삼국사기에

 

"이세적이 밤낮을 쉬지 않고 요동성을 공격하기 12일 째에 당나라 왕이 정병을 이끌고 합세하여 성을 수백 겹으로 둘러싸니 북과 고함 소리가 천지를 흔들었다. 성에는 주몽의 사당이 있고, 사당에는 쇠사슬 갑옷과 섬모가 있었는데 -후략-"

 

이 기록엔 요동성에 주몽의 사당이 있다고 했습니다. 국조의 사당이 첫 도읍지에 있거나, 궁성에 있었다면 요동성은 당시 궁서이 아니었음으로 첫 도읍지여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지만 이는 국조의 사당이 궁성 또는 첫 도읍지에 있었다는 가정이 사실로 입증될 때, 성립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록엔 쇠사슬 갑옷과 섬모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주몽의 것이거나, 아니면 주몽과 관련된 중요 인물이 남긴 세상에 단 하나 뿐인 것이고 중요한 곳에 보관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요동성이 첫 도읍지였다면 가능한 사실로 추론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 하나가 발견됩니다. 고려 시대 요동과 고구려 건국 당시의 요동은 차이가 있습니다. 현 교육 과정의 국사 교과서의 요동과 요서는 요하의 동쪽이냐, 서쪽이냐에 따라 요동과 요서를 분리하여 고구려는 단 한번도 요서로 진출하지 못한 것으로 작위되어 있습니다. 1970년대 국사 파동 시절, 임승국 교수님은 요동과 요서의 기준을 쉽게 말해 만리장성 동, 서를 기준으로 했다고 주장하셨고,

 

 『산해경』엔 "요수는 위고의 동쪽을 나와서 동남으로 발해에 흘러들어가며 요양에 들어간다." 고 쓰여 있습니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22년 봄 2월, 수나라 양제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였다. 여름 4월 양제의 행차가 탁군의 임삭궁에 도착하니 사방의 군사들이 모두 탁군으로 모였다. (영양왕 22년)"

 

이 기록의 탁군은 현재의 북경입니다. 수나라 군사 113만 대군은 이듬해 정월에 고구려로 진격하였고, 출정식은 40일이나 걸렸는데, 이 사이 양광의 군대는 요수에 이르렀습니다.

 

탁군에서 동쪽으로 40여리를 가면 난하가 나옵니다. 하지만 요하는 1300여리를 가야 도착이 가능합니다. 때문에 양광이 탁군에 군사를 집결시킨 것은 난하를 건너기 위함입니다.

 

즉, 난하가 당시 수와 고구려의 경계였음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삼국유사엔 현재의 요하를 당시엔 압록수라 불렀다고 쓰여있습니다.   따라서 난하 일대에 고구려 첫 수도인 졸본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유리왕 대에 이르러 정국 타개책의 일환으로 설지에게 명하여 새로운 수도를 물색하게끔하여 위나암으로 천도합니다. 졸본은 적의 침입에 용이한 위치에 있었음으로 멀리 떨어진 어딘가로(?) 천도를 합니다. 집안 설, 다물도 설 등의 여러 가설들이 있지만 확정된 설은 없습니다.

 

 산상왕 13년 고구려는 위나암에서 환도성으로 천도합니다. 명재상 을파소의 주도하에 198년 부터 축성 공사에 들어갑니다. 명분은 동한의 혼란으로 야기될 수 있는 전쟁을 대비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는 동한의 몰락을 이용하여 고조선의 고토를 회복한다는 것이었습니다. 209년에 천도한 환도성에 대한 서로 다른 많은 설이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은 『북사』의 기록을 인용하여 집안의 홍석라자라 비정하였고, 중국의 사학자들은 집안의 산성자산성으로 주장하였습니다. 현대 사학계 일부에서는 집안의 국내성과 환도성은 이름만 다를 뿐 같은 곳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요사』에는 환도성이 위나암성으로부터 '서남 200리에 있다.' 고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나암성의 위치 조차 알 길이 없으므로 환도성의 위치 역시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동한의 몰락으로 고구려는 영토를 확장하고자 하였을 것이고, 당연히 중국 세력과 가까운 곳으로 산상왕은 천도를 감행하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요사의 기록은 설득력을 잃습니다.

 

 이는 사실로 드러납니다. 산상왕의 서진 정책은 동천왕 시대에 이르러 서기 242년의 안평 공격, 245년 동해국 복속 사실 등은 삼국지연의가 역사가 아닌 허구맹랑한 소설일 뿐 이며, 교과서의 그림은 거짓임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247년 동천왕은 38년간의 환도성 시대를 마감하고 평양으로 수도를 옮깁니다. 관구검의 침입으로 환도성이 잿더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동천왕은 평양성을 쌓던 해 곧바로 천도를 감행합니다. 평양성이 완공도 되기 전에 급하게 종묘,사직을 옮겼다는 뜻으로 환도성이 무너지고 없는 상태에서 동천왕이 택한 불가피한 상황인 것입니다.

 

 평양도 마찬가지로 확실한 정설은 없습니다. 단지 여러 가설들 중 설득력이 높은 가설을 취하는 것이죠.

 

삼국사기엔

"평양이라는 지방은 본래 선인 왕검의 택지였다. 어떤 사람은 동천왕이 왕검에 도읍을 정했다고도 말한다."는 기록을 통하여 동천왕의 평양은 고조선의 왕검성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평양이라는 지명은 여럿 발견됩니다. 낙양에서 황하만 건너면 바로 맞닿는 임분, <요사>에 등장하는 요양현, 대동강 기슭의 평양,  『당서』에 등장하는 광녕현의 평양, 『금사』속의 함평 등등의 수 많은 평양이 존재합니다.

 

 일찌기 연암 박지원은 평양이 고조선 시대에 도읍이 있었던 곳을 부르는 일반 명사라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고구려가 고조선 시대의 평양 중 한 곳에 도읍을 옮겼다는 유추가 가능합니다. (단 동천왕 당시 고구려의 세력은 대동강 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현재 북한의 평양은 여기서의 평양과는 무관합니다.)

 

동천왕의 평양은 환도성이 불탔기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천도한 곳 일수 있습니다. 그 것은 고국원왕이 평양성의 증축과 동황성 축성을 위해 일시적으로 환도성을 보수하여 도성을 옮긴 사실에서도 증명됩니다. 즉, 동천왕은 쓰러져가는 환도성을 보며 근처의 평양으로 임시로 옮긴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위나암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지요.

 

  고국원왕은 임시방편으로 옮겨온 평양성에서 모용황(선비)의 침략을 우려하고, 견고하지 못한 평양에서 복구한 환도성으로 천도하였고, 전쟁 중 손실로 평양 동황성으로 다시 천도합니다.

 

 84년 후, 고구려의 장수왕은 내부적으로 왕권의 위상을 높이고 조정을 일신하기위해 평양성으로 천도합니다. 일반적으로 북한의 평양, 이른바 국내성으로 알고 있는 이 설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 거리가 있습니다. 이와 함께 동반되는 패수의 현 이름에 대해서도 여러 설들이 난립되어 있습니다.

 

대개의 학자들은 고조선 및 고구려의 수도 평양을 대동강변의 평양으로 설정하였는데, 막상 광개토왕이 백제군과 싸운 곳이 패수였다는 기록에 기존의 청천강 설, 대동강 설을 스스로 뒤집고 예성강 설을 내세웠습니다. 그 것은 청천강을 패수로 볼 경우 평양이 패수 남쪽에 있게 됩니다. 그런데 삼국사기 근초고왕 편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여 패수에서 패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패수는 본래 백제 땅에 있던 강으로 해석이 되게 됩니다.

 

또 설사 백제가 패수 남쪽 만을 지배했더라도 고구려는 접경지역에 도읍을 두었다는 이상한 해석이 가능케 합니다.

 

 그러나, 사마천의 사기 조선전을 보면 패수는 연나라와 조선의 경계였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삼국사기 근초고왕 편의 패수는 바로 대륙백제와 고구려의 싸움을 대륙백제의 존재를 몰랐던 김부식과, 일제 시대 반도사관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현 북한의 평양은 한반도 남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 광개토왕의 하평양 건설과 부합되는 내용이지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후에 평원왕은 서기 586년에 도성을 평양성에서 장안성으로 옮깁니다. 이 장안성은 근 30여년간 축성작업이 계속 이어진 대규모 건설 작업이었습니다. 이는 수나라의 침입을 대비하여 선왕인 양원왕 대 부터 지속된 작업이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수나라 양견이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하는(고구려의 말갈군 1만의 선제 공격에 대응한)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 한 왕 양의 군대가 유관에 도착하였을 때, 장마로 인하여 군량미의 수송이 중단되었다. 이에 따라 군중에 식량이 떨어지고 전염병이 돌았다.  주나후는 동래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성으로 오다가 풍파를 만나 선박이 거의 유실되거나 침몰되었다." (주나후는 풍파를 맞은 게 아니라, 강이식 장군의 활약으로 수군이 전멸한 것을 삼국사기는 오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평양성은 장안성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으로 봅니다. 만약 장안성이 반도에 있었다면(북한의 평양)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산둥의 위해에서 띄웠을 것이지 동래에서 띄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적어도 이는 평양이 요동반도를 거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고, 이는 평양이 요동반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 펌, 서초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