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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무슬림은 왜 그렇게 미국을 싫어하는가?

 

 

무슬림들은 왜 그렇게 미국을 싫어하는가?

 

 

                                                                         중동의 일출과 A-10 전투기

                                              출동! 에어울프...아니 링크스, 영국 링크스(스라소니) 헬리콥터가

                                               바스라 장악 임무를 띄고 먼지를 일으키며 이륙하고 있다


 
 
 
 
 

전쟁의 처참함 - 보병 제 3사단 소속 미군들이 부상당한 한 이라크 여인에게 다가가고 있다. 미군은 유프라테스강 위의 다리를 장악하기 위해 이라크군과 총격전을 벌였고 이 와중에 여인이 다친 것. 여인은 피를 흘리고 있으며 허리 아래 부분에 총상을 입었다

 

美, 바그다드 남쪽 힌디야 진입 - 미 지상군이 31일 바그다드 남쪽으로 8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유프라테스강 근처 힌디야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

"연합군-이스라엘 상대 자살 공격" - 얼굴을 가린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인 ‘이슬람 지하드’조직원들이 사담 후세인의 초상화를 흔들고 이라크와의 연대의식을 표출. 이 단체는 31일 “자살폭탄 공격을 감행할 자원자 수십명을 바그다드에 보냈다”고 주장 했다

美공군 안토니 코스타(버밍햄 출신)씨가 건승을 기원하며 폭탄에 사인을 하고 있다

 

 

무슬림들이 미국을 싫어하는 이유

무슬림들이 미국을 지구상에서 가장 타락하고 퇴폐한 문화를 가진 국가로 간주하여 배척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무슬림들이 미국에 대한 반감은 사실상 그 역사적 뿌리가 그리 길지 않다. 물론 현대 미국의 퇴폐적인 성문화나 극단적인 물질주의 문명에 대한 반감이 그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인 뿌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얽힌 문제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아브라함을 시조로 한 형제간이다. 현대로 치면 종중산인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을 두고 같은 혈통인 친족간에 선조 땅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다툼을 벌이고 있는 남들이 보면 추악한 행태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 미국이 끼어들어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원하고 나서면서 유엔의 분할안이후이스라엘과 4차에 걸친 중동전쟁을 치루면서 아랍의 자존심이 완전히 구겨졌던 것이다.

 

중동 지역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 터키 제국이 패배하고 아랍권은 여러 국가로 나누어 졌다. 그러자 영국을 비롯한 서구 유럽 제국들이 석유 자우너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중동지역에 앞다투어 진출하면서 대부분 유럽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석유 시추권을 얻어내기 위하여 그들 임의대로 '레드 라인'을 설정하여 그들의 마음대로 중동지역을 분할하여 차지하기 시작하였고 협박,강압,반군 지원,정권 전복 등의 식민통치의 맛을 보았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를 당했음에도 이후 이 지역에 진출한 미국에 대한 반감이 영국과 프랑스보다 큰 것은 바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얽힌 문제에 미국이 직.간접 개입하면서 표면으로 표출되었다.

 

 

기원후 70년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에 반기를 들었다가 예루살렘과 마사다가 수년간 저항하다가 최종적으로 함락되면서 저항이 종식되자 유대인들은 로마에 의해 쫓겨나거나 스스로 떠난 이후 십자군 원정 기간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기간 동안 팔레스타인들이 이 땅의 주인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19세기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유대인들이 그들과 화합하지 못하고 그들끼리 집단적으로 모여 살며 유대교의 문화를 유지하면서 경제적으로 부를 누리던 유대인들에 대한 일반 민중의 반감이 고조되면서 이른바 '안티세미티즘(반유대주의)'을 국내통치수단의 하나로 도입하게 되고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정치적인 반유태주의에 대한 박해는 결국 유대인으로 하여금 '시온주의'라는 자구책을 강구하게 하였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오스만 터키 제국 내 아랍 연방의 하나였는데 세계 유대인 협회가 창설되어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원대한 꿈을 가지고 세계 각지의 유대인들의 지원하에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비밀리에 이주토록하여 정착촌을 건설하는 방법으로 국가건설 준비를 하게 된다.

 

영국은 1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아라비아 로렌스' 소령으로 하여금 아랍인들을 동원하여 이 지역에서 반터키 운동을 촉발시켜 전쟁에서 승리하려 하였다. 그리고 전쟁에 승리할 경우 유대인과 아랍인들에게 각각 터키 지배로부터 독립국가 건설을 지원하겠다는 이중의 비밀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전쟁 승리 후 이러한 약속을 이행할 수 없었던 영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위임 통치령으로 편입하였다. 이후 대규모 유대인이 이주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지역에서 두 민족간에 처절한 갈등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2차 대전 후 영국은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령을 유엔에 이관하게 되고 1947년 유엔은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의결하게 된다. 아랍인들은 이러한 일련의 모든 과정이 미국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여 분노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 분할이 유대인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어서 이 지역 올리브 농장과 곡창지대의 80%, 아랍인 공장의 40%가 유대인에게 배정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스라엘 건국 이후 팔레스타인은 난민 지위로 떨어지게 되었고 그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는 심각한 분쟁이 발생했다. 1948년 5월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한 다음날 전쟁이 발발했다. 그러나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이 압도적인 승리를 하였고, 그 후 발생한 4차 전쟁 때까지 아랍진영의 일방적인 패배로 그들은 여지없이 자존심을 구기고 말았다.

 

서구의 정치 경제에 예속되는 것에 대한 분노와 한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자본주의 대표성을 띤 미국의 지원에 의해 계속된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무참하게 당한 아랍 세력은 미국을 대표한 제국주의를 싫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쏘지 마세요" - 30일 이라크 남부의 바스라 외곽에서 아이를 안고 피난가던 이라크인 남자가 항복의 뜻으로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이라크인을 감시하라 - 31일 이라크 중부 나시리야에서 제15 해병원정대 소속 미군들이 이라크인 3명을 감시하고 있다

저도 물좀 주세요 - 31일 한 어린이가 이라크 남부 사프완에서 영국군이 나누어주는 식수를 받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바스당 내부로 진입 - 31일 제7기갑여단 Z부대 소속 영국군들이 이라크 남부 바스라에서 아랍의 사회주의 정당인 바스당 사령부로 진입하고 있다

 

걸프전의 배경과 진짜 이유

1990년  8월 2일 이라크 후세인은 전격적으로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합병을 선언하였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합병하면서 내세운 논리는 역사적.문화적 동질성이었다. 원래 이라크와 쿠웨이트는 고대부터 같은 행정구역에 속했고, 두 나라는 같은 아랍 민족이며 이슬람 국가이기에 동일한 문화를 지니고 있다.

 

쿠웨이트 알-사바 왕가는 1760년경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쿠웨이트로 이주하였다. 오스만 터키 제국 통치하에 있던 쿠웨이트는 석유 자원을 탐내고 있던 영국의 페르시아 만의 군사 기지로 영국군이 주둔하면서 1899년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이후 석유 생산으로 자립 능력을 갖게된 알-사바는 1961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지만 1960년대 초부터 이라크는 쿠웨이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쿠웨이트 알-사바는 영국의 보호령을 다시 받아들였으며 1963년 압둘라 알-사바는  쿠웨이트 왕으로 취임하였다.

 

"숨바꼭질 하고 있어요" - 바그다드의 한 이라크 어린이가 공습으로 생긴 대문 구멍 사이로 머리를 내놓으며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다

포화속의 모자 - 바스라 외곽서 한 난민 여성이 아들을 안고 있다. 그 뒤로 영국 해병 제 40 특공대원들이 탱크를 타고 지나는 모습이 보인다.

폐허와 빨래 - 귀신이라도 나올 법한 음산한 이 마을은 바스라 인근 지역. 이 지역에 투입 성공한 영국 해병대들은 폐허지 기둥에 끈을 묶은 뒤 밀린 빨래를 널고 있다

 

이러한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에게 빌미를 제공한 결과가 되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 다국적군은 '사막의 폭풍 작전'을 개시하게 되고, 이로 인해 걸프전쟁이 시작되었다.

 

1991년 1월 17일 시작된 걸프전쟁은 최첨단 장비가 동원된 정보전쟁이었다. 걸프전이 시작되자 이라크의 후세인은 이라크군의 쿠웨이트 철수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및 1967년 전쟁 점령 지역으로부터 철수를 연계시키며 이스라엘에 미사일 공격을 감행하였다.이는 아랍 국가들을 자기편으로 끌여들이려는 후세인의 계산이었으나 미국은 이스라엘을 자제시키고 아랍 국가들을 분리시키면서 이라크에 대한 고립 작전을 추진하였다.

 

                                                                          생수통 한병으로 머리 감기.

                           단잠 - 美 3보병사단 기갑연대 소속 게리 와코 일병이 전투를 앞두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포로 아버지와 아들 - 101공수부대 관할 나자프 포로수용소에 갇힌 이라크 남자가 자신의 아들(4세)을 안심시키고 있다. 그는 나자프 전투 도중 아들과 함께 붙잡혔는데 美軍 역시 이들 부자가 헤어지는 것을 원치 않아 부자가 함께 있을 수 있도록 배려 한 것

 

 

후세인은 이스라엘과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이중적인 정책을 비난하면서 주변 아랍국들의 지지를 호소하였으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내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호언장담하던 후세인이 다국적군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모습을 눈으로 보면서 아랍권의 일치 단결은 도모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중동의 원유 매장량은 세계 전체 매장량의 67%를 차지하고 있다. 걸프전 당시 미국은 전체 원유 수입의 2.6%를 이라크로부터,1.0%를 쿠웨이트로부터 수입하고 있었다. 미국은 이라크에 대해 눈독을 들이고 있었는데, 지정학적으로나 지질학적인 면에서 이라크 땅은 석유위에 떠 있는 섬과 같은 곳으로 세계 최대 석유 매장지임을 잘 알고 있었으며 역대 정권의 브레인들이 향후 세계 지배는 석유 지배자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연구 보고서가 정부에 제출되었 있었다.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유들 중에는 석유 쿼트량과 유가문제, 그리고 쿠웨이트의 이라크 원유 불법 체굴 문제, 생산량 할당 문제, 국경선 문제 등 여러 분제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다.

 

이라크는 미국이 공격시 유전 지대를 폭파하겠다고 공언했으며 실제로 행동에 옮겼다.그로인해 환경 재앙이 페르시아 만에 가공할 환경 문제로 부각되어 각 국가들이 환경안보를 국가안보정책에 포함시키기도 하였다.

 

걸프전의 발발로 중동 지역은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대결의 원인이었던 인종,종교,국경,사회 갈등 이외에 아랍인들 간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갈등을 겪게 되었다. 중동 지역에서 발생하는 영토 문제, 종교 문제,이념적 갈등 문제,석유자원 배분 문제 등은 이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내부적 갈등이 아니라 세계 질서를 재편하려는 서구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농단에 의해 유발되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세상이 멸망해도 나는 내 일을 하련다" - 포성을 뒤로 하고 나시리야 마을로 향하는 이라크 양치기

포화속 피란 - 연일 펼쳐지는 미-영 연합군과 이라크군의 접전 속에 바스라 시민들의 목숨건 피난 행렬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 모자도 전란을 피해 몸만 가까스로 빠져나와 고달픈 피란 행렬에 끼게 된것

 

 

 

이러한 과정에서 중동의 약소국인 아랍국가들은 강대국의 석유 이권 쟁탈전의 희생양이 되어 왔다.이란.이라크.사우디아라비아 등의 나라들이 석유 국유화를 내세우다 정권이 전복되고 강대국에 순응하는 대표자로 하여금 정권을 잡게 하는 등 강대국의 암약은 실로 비밀리에 실행되곤 하였다. 멕시코를 비롯한 남미의 석유 생산국가들의 정권 전복의 여러 상황이나 유고 내전도 카스피해 유전을 탐내고 있던 미국의 주도하에 진행되었으며 송유관 설치및 보호를 내세우며 유고 내전에 개입하였고 코소보 보호를 빌미로 군사기지를 설치하는 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유고는 군소국가로 분리되고 인종.종교적인 갈등 관계를 이용한 미국의 주도면밀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또 아프칸 전쟁도 미국의 카스피해 석유 송유관 설치에 협조하지 않았던 탈레반 정권이 결국에는 권좌에서 �겨나고야 말았던 것이다.

 

중동의 아랍인들 중 상당수는 좌절과 패배, 그리고 상실감과 굴욕감을 느끼고 있다. 아랍인들이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원론적으로 비난하지만 간접적으로 동조하고 잇는 이유는 미국과 이스라엘 등 강대국에 대한 저항과 서구 제국의 식민주의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이 내재되어 있다.

 

이스라엘과의 4차례 전쟁에서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한 아랍인들 중 일부는 후세인의 행동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를 제 2의 '살라딘(십자군 전쟁의 아랍 영웅), 아랍의 대의를 위한 성전의 수행자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구는 그를 살인자, 과대망상 환자로 모든 메스컴에서 묘사하며 선전하였다.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유로는 중동 지역의 정치적.군사적 공백기를 틈타 지역 패권을 장악하려는 설, 미국이 파놓은 함정에 후세인이 결려들었다는 설, 미국이 전쟁을 고의로 유도했다는 설이 있다. 실제로 미정권의 고위 인사가 후세인에게 후세인이 어떠한 행동을 하던지 미국은 중립을 지킬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던 말을 믿고 침공하였다는 설도 있다. 이란-이라크 전쟁도 미국이 애매한 정보를 후세인에게 흘려 이란과 전쟁을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 그래서 결국 후세인은 참으로 순진하였던 인물이었던 같다.후세인이나 이란의 모사데크,팔레비, 아프칸의 탈레반 등의 많은 아랍권의 정치 지도자들이 석유 국유화, 석유 독립, 유가 자율화 등 자기 목소리를 내는 순간 소리없이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거나 미국의 침공으로 권좌에서 �겨났던 것이며. 그들 모두가 강대국들의 정치적 농단에 희생양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미국에 대항하여 끝까지 버티고 있는 사람은 그 나라가 석유가 나지 않거나 소규모 생산밖에 못하는 쿠바의 카스트로, 리비아의 카다피 대통령, 북한의 김정일이 될 것이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