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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이라는 조작된 이야기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이라는 조작된 이야기

 

 

 

 

 

                          

 

살라딘은 누구인가?

 

살라흐 앗 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살라딘:1137~1193) 는 이슬람제국의 수호자로써 예루살렘을 기독교도들로부터 탈환하고 이 곳을 지켜내었다.

살라딘은 1137년에 티크리트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의 삼촌이 사고를 저지르는 바람에 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갓 태어난 살라딘은 다른 곳으로 추방되고 말았다. 추방된 살라딘의 가족은 다마스쿠스의 새 지도자인 누르 앗 딘(누레딘)
의 부하가 되었다.

20대가 된 살라딘은 누레딘에게 새로운 명령을 받는다. 이집트를 정복하고 통치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살라딘이 이집트를 정복하고 있을 때 누르 앗 딘이 죽게 되었다. 살라딘은 어린 새 지도자를 폐위시키고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치하는 아이유브 왕조의 창시자로 등극하게 되었다.

한편, 주변의 기독교 왕국이었던 예루살렘 왕국이 혼란스럽게 되었다. 새로 왕위에 오른 기(Guy) 왕은 무능력하고 정통성이 없었던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정통성을 묻게 되었고, 그나마 그 정통성의 주체였던 왕비마저 사망하자 제후들이 왕을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살라딘은 이 왕국을 노리기 시작했으나, 굳이 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기독교 성주였던 레지날드 드 샤티옹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는 메카로 순례를 가고 있던 살라딘의 여동생을 납치하고 호위병과 대상일행을 죽이고 약탈한 것이었다. 살라딘은 이 일로 하여금 기독교도들과 전쟁을 하게 되었다.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들은 하틴의 뿔이라는 곳에서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그런데 기독교도들이 진을 친 곳은 물이라고는 한 방울도 없는 곳이었다. 살라딘은 밤에 기독교도들이 보는 앞에서 모래에 물을 버렸다.

결국 기독교도들은 패배를 하였고, 기왕과 샤티옹이 포로가 되었다. 살라딘은 기왕을 포함한 기독교도들을 극진히 대접해 주었다. 하지만 샤티옹은 살라딘의 앞으로 끌려왔다. 살라딘이 샤티옹에게 물었다.

 


▲ 다마스커스 거리의 살라딘 장군 동상


 

정치와 종교의 구분이 없는 이슬람

이슬람은 인간이 신에게 완전히 복종하고 현세와 내세에서 신이 가르치고 인도해 준 생활양식을 그대로 다르는 종교이다. 이슬람은 단순한 신앙체계만을 일컫는 종교 용어가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인간 활동 전체를 포함하는 생활 그 자체이다. 따라서 이슬람은 종교와 세속 모두를 포함하는 생활 그 자체이다. 따라서 이슬람은 종교와 세속 모두를 포함하는 신앙과 실천의 체계를 의미한다.

 

기독교나 불교 등 대다수의 종교가 세속적인 삶보다 내세를 강조하고 인간생활의 육체적인 면보다 정신적인면을 중시하고 있는 데 반해, 이슬람은 현세의 삶을 내세의 삶과 동일시 한다. 현세의 삶에서 이슬람은 올바른 삶과 구체적인 삶의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이슬람이 종교와 정체(세속)를 모두 포함한다는 인식은 중동인들의 역사와 생활,의식구조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이러한 이슬람의 정치와 종교 합일현상은 우리는 정교일치라 부른다.

 



 



 

                                     살라딘의 군대와 발리안의 기사단이 처음 맞붙는 카락성 전투.

 

사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지구상 대부분의 국가들은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여 국가를 구성하고 있으며, 정치에서 종교를 배제시켰다. 그 이유는 중세의 기독교가 지배하던 세계는 한마디로 암흑시대였다. 모든 것이 종교적인 논리로 전개되고 패쇄된 종교적인 교리에 집착하여 문명의 발전은 고사하고 아집과 독선에 사로잡혀 여러 나라들이 성지회복을 빌미로 7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를 시도하였으나 결국은 실패로 끝난것도 종교를 빙자한 인간들의 탐욕을 억제하지 못하고 분열되었기 때문이었다. 또 절대적인 권력이 부패하듯이 종교적인 전제정치로 말미암아 종교인들이 지배하는 정치는 부패의 극치를 달리게 되었으며 백성들은 토탄에 빠지는 결과를 불러왔다는 점이다. 그래서 국가의 발전은 고사하고 모든 문화와 문명이 정체되어 종교가 정치를 지배하는 경우에는 역사의 퇴보는 물론 인류 발전에 엄청난 저해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종교를 바탕으로 정치 공동체를 설립했으며, 그 공동체는 처음부터 이슬람교이자 국가였다. 따라서 무슬림들에게는 정치와 종교의 일치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슬람이 정치.종교.사회.문화.군사 등 모든 영역을 다 포함하고 있다는 데 동의한다.

 

이처럼 이슬람이 기독교와 다른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바로 정교일치의 이론이다. 현대 이슬람에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자신의 국가에 대해 요구하고 있는 중요한 주장들 중에는 이슬람 법률인 '샤리아'의 채택과 이슬람 국가의 수립에 있다. 여기에 이슬람 국가의 수립이란 바로 정치와 종교가 일치하는 원래 이슬람 공동체의 수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의 망령

 일찍이 서구인들은 무슬림에 의한 정복사업을 소위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슬람의 호전성과 종교의 강압적 전파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서구인들이 이교도에 대한 적개심과 확산되는 이슬람 세력에 대한 위기감에서 만들어낸 용어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이슬람에 대한 역사와 이슬람교에 대한 우수성에 대해서 비난하면서 자신들의 종교가 더 우수하다는 점을 강조하여 왔다. 세계사를 기술하는 가운데도 이슬람 역사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술보다 대략 기술로 이슬람의 역사를 축소하거나 거의 무시하여 기술하여 왔으며 무슬림의 호전성과 문명의 퇴패성을 부각하기에 모든 면에서 노력하여 왔다는 사실이다. 

 

이슬람의 전파는 무슬림의 종교적 의무이다. 하지만 무력에 의한 이슬람 전파에 대해서 어떠한 흔적도 꾸란에서 발견할 수가 없다. 오히려 꾸란에서는 분명한 단어로 상반되는 원칙을 주장한다. 즉 "종교에는 어떠한 강요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비해 기독교도들이 그들 종교의 전파를 위해 갖은 애를 다 쓰는 모습과 상당히 대조적이다. 가장 늦게 시작하여 짧은 기간에 그토록 많은 이스람교가 확산되었다는 점은 무엇인가 다른 차별성이 있다는 점을 기독교가 인정하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슬람이 무력으로 전파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역사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이슬람교는 발생하자마자 급속히 전파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비잔틴과 페르시아의 수탈과 착취에 시달리던 시대적 상황이 이슬람의 진출을 오히려 환영하였고 이슬람 정복 과정에서 강재 개종은 실제로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무슬림들은 피정복민들의 문화나 관습 및 종교 등을 보장해 주는 대가로 그들에게 무슬림보다 더많은 세금만을 요구했다. 따라서 피정복민들의 입장에서도 이슬람 세력의 진출을 막을 아무런 이유가 없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많은 자유와 평등이 주어지는 이슬람으로의 대량 개종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최대 세력판도.

 

이슬람 정부는 세금 감면을 노리는 대량 개종을 막기 위하여 오히려 개종금지백서를 발효하여 국가 수입의 증대를 위해 피정복민의 개종보다 공납을 요구했다. 그런데 이 공납 액수도 비잔틴이나 페르시아의 수탈에 비하면 가벼운 것으로 이슬람 제국 하에서 기독교인과 유대교인들은 종교의 자유와 경제적 기득권을 향유했다.

 

다시 말해 무력에 의한 이슬람 전파는 없었다. 이슬람 세력이 진출했던 지역은 이슬람 세력의 후퇴 후에도 원래 있었던 종교로 돌아 가거나 다른 종교로 돌아서지 않았음은 물론 오늘날까지도 이슬람 문화권으로 남아 있다. 만일 무력에 의한 종교의 전파가 있었다면 이슬람 세력이 후퇴한 후에 그 지역 주민들은 즉시 이슬람교를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이 지역들은 아랍인들의 철수 후에 오히려 이슬람이 더 번성하여 그후 많은 이슬람 학자들을 배출했다. 만일 이 지역에서 배출된 학자들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이슬람 신학이나 철학,사상 등의 이슬람 학문은 발전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슬람은 발생한 지 100년도 안 된 짧은 시간 동안 지금의 중동은 물론 북아프리카로부터 중앙아시아,동남아시아,인도,중국을 비롯하여 스페인을 위시한 유럽까지 점령하였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칼이 아니라 여러 사상과 문화를 수용하고자 했던 융화력과 관용성이었다.

 

좌로부터 호웨이탓의 족장 아우다 아부타이(Auda abu Tayi , 안소니 퀸), T.E.로렌스(Thomas Edward Lawrence), 하리스족 족장인 알리(Sherif Ali Ibn El Kharish, 오마 샤리프)이다.

 

종교와 폭력은 분질적으로 양립될 수 없다. 종교가 종교임을 포기하기 전에는 사랑과 평화를 자신들의 이념으로 추구하는 것이 상례이다. 종교로서의 이슬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슬람은 그 어느 종교보다도 평화와 평등, 그리고 형제애를 강조하고 있으며 이슬람의 역사가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이슬람 사상은 극단을 배격하는 동양적인 중용사상이며, 이는 꾸란에서 서술되고 있는 사상이기도 하다. 오늘날 이슬람 세계에서 대표적인 원리주의 집단으로 낙인되고 있는 무슬림 형제단 운동의 사상이론가인 '까라다위'도 현대 이슬람 부흥운동 가운데서 가장 강력하고 광범위한 조류는 이슬람적 중용 조류라고 지적하였다.

 



▲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 – 데이빗 린 감독, 피터 오툴, 알렉 기네스, 안소니 퀸 주연

 

평화와 중용에 바탕을 둔 이슬람에서 무모한 폭력이란 있을 수 없다. 중동을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 세계는 동.서의 틈바구니에 끼어 역사상 빛나는 역활도 수행했지만 너무나 많은 핍박을 받아왔다. 특히 18세기 이후 서구 제국주의 하에서 받은 고통은 그들이 인내해 낼 수 없을 만큼 혹독한 것이었다. 무슬림들이 서구의 핍박을 벗어나기 위해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이슬람 공동체라는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폭력적인 방법에 의존하는 급진파나 극단파가 생겨나기도 했지만 이들은 결코 전체일 수도 없고 더구나 그들의 행동이 합법화 될 수는 없다.

 

서구에서는 이러한 소수의 급진파나 극단파들을 원리주의라 부르며 이 원리주의 원인이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으로 상징되는 이슬람교의 호전성 때문이라고 오도했다. 게다가 호전성이 이슬람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분쟁과 폭력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비약시켜 선전해 왔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출발한 이슬람은 그후 1세기도 채 안 된 기간동안 서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인도, 북아프리카는 물론 서부 유럽에 이르는 거대한 세력권을 형성하였고, 동으로는 파미르 고원을 경계로 중국의 당나라와 접경하였고, 710년에는 오늘날의 파키스탄의 모체가 되는 신드 주와 인도의 펀자브 주까지 진출하였다. 751년에는 고구려 출신의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가 이슬람군에게 패퇴당함으로써 중앙아시아 전역이 이슬람화되어 오늘날까지도 이슬람의 영향이 내륙아시아 전체에 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서로는 비잔틴 제국에 대한 강력한 공격을 감행하여, 비잔틴의 군소 속령을 차지하고 두 차례나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기도 했다.북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정복에도 관심을 기울여, 베르베르족을 복속시킨 후 711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지금의 스페인 지역인 이베리아 반도의 서코트 왕국을 멸망시켰다. 이로써 스페인은 15세기 말까지 이슬람 제국의 한 부분으로 이슬람 문화를 유럽에 전파하는 교두보 역활을 하였다. 이슬람군은 여세를 몰아 피레네 산맥을 넘어 지금의 프랑스 지역인 프랑크 왕국을 공략하였으나, 732년 샤를르 마르텔의 군대에 의해 저지당함으로써 유럽 중심부의 이슬람화는 실패하였다.

 

이와 같이 단시일 내에 정복사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당시 침체된 아라비아 일대의 상업과 목축업이 늘어나는 이슬람 공동체의 생존에 충분치 못했음으로 이주지와 비옥한 경작지의 획득, 공납지의 확대, 안정된 교역로 확보 등이 절실히 요구되었던 것이었다. 또한 비잔틴과 페르시아 제국과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경제가 피패해졌고, 양 제국의 강압적인 통제정책과 과중한 조세수탈은 민심의 이반을 가져왔다. 이에 반해 이슬람교는 새 정복지에서 살륙과 직접통치보다는 공납과 간접통치를 선호하였는데 이 정책은 정복주민의 환영을 받았고 이로써 무혈 정복사업은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이슬람 세계는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르게 전파되어 공간적으로는 주변 문화의 수렴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는 고대 문화까지도 재생시켜 이슬람 문화라는 종합문화를 창출하였다.

 

이슬람 문화가 빠르게 전파된 가장 큰 이유는 특유의 융화력이다. 아랍인은 정복을 통하여 역사상 최초로 오늘날의 인도와 중국의 경계선 지역, 그리스,이태리 및 프랑스의 변경 지역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통합했다. 이 방대한 지역을 한동안은 군사적.정치적 권력을 통하여, 그후 훨씬 오랜 기간 동안은 아랍어와 이슬람 종교를 통하여 한덩어리로 묶어 놓았다.

 

                 

 

그러므로 아랍인들이 만든 진정한 기적은 군사적인 정복보다는 오히려 정복된 지역을 이슬람화한 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슬람교는 서로 불화 관계에 있었던 두 문화, 즉 그리스,로마 및 고대 중근동의 다양한 지중해 문화와, 인도 및 중국 문화와 오랜 접촉을 가진 페르시아 문화를 융합시켰다. 서로 다른 수많은 인종, 신앙 및 문화가 이슬람 영역 내에 공존함으로써 하나의 새로운 이슬람 문명이 생성되었고 아랍적인 이슬람의 독특한 색채를 띠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이슬람 사회에서 다양성이 존재하게 된 이유는 중세 기독교 세계에서도 �아보기 힘든 상대적인 관용성 때문이며 이 관용성이야말로 이슬람 문화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무슬림은 이교도들에게 그들의 종교를 그대로 인정해주면서 종교생활을 보장해 주었다. 전쟁에 패하면 남자들은 죽임을 당하고 여자들은 노예로 팔려가던 시절에 이러한 조치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다만 무슬림들은 비무슬림들에게 일정한 사회적.법적인 차등정책을 실시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비무슬림들에게 인두세라는 조금 더 많이 부과하는 세금이었다. 그러나 이 인두세 역시 그 당시 비잔틴이나 페르시아 제국 에서 내던 고율의 세금보다 적었기 때문에 일반 국민들은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이처럼 무슬림은 비무슬림들에게 종교,문화를 그대로 인정해 주면서 세금만 조금 더 많이 받았을 뿐 간접통치를 통해서 다른 일체의 간섭은 배제하여 그들이 이슬람 문화 창조에 공한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이러한 융화력과 관용성은 이슬람 세력과 문화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역사,지리,철학,천문학,대수,물리,화학,의학,연금술 등 고대 문명을 그대로 전수받아 번역하는 등 중세 유럽이 암흑속에서 긴 터널을 지낼 동안에 세계 문화의 정체성을 이어왔으며 이러한 이슬람의 문화가 유럽에 전파되어 르네상스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양의 문화 교류를 이슬람이 담당함으로써 세계 문화의 다양화와 일체화에 기여했다.

 

이 세상에 절대불변의 진리같은 종교가 있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종교의 속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슬람이 단지 불변의 진리, 꾸란을 주장함으로써 변화되는 현실에 적응력이 떨어지고 꾸란을 불변의 진리로 인정하여 무조건 복종토록 함으로써 새로운 사상과 창의적인 사고를 막고 있다는 점은 어느 종교나 만찬가지이나 정체된 종교적인 사고로 인하여 창의성이 결핍된 사회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 발전을 더디게 가져온 결과이기도 하다. 순수한 종교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기존의 어떤 종교보다도 평등과 관용,평화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매우 합리적인 종교로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종교의 한계는 편협된 그들의 종교관에 세상의 모든 진리를 묶어두려는 속성을 벗어나지는 못한다는 점이 문제이다. 이러한 점이 종교가 갖는 한계이며 범주이다. 이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그들의 교리대로 절대복종만으로 강조하고 그에 벗어나는 어떠한 이념과 사고, 행동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종교의 편협한 틀을 벗어나지 않는한 더 이상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들 종교가 갖는 이러한 속성은 바꾸기는 힘들 것이다. 종교가 없는 사회를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나 인간의 이성을 무디게 만들고 그들의 교리와 종교적인 생활만을 강요하다보면 인간들은 그 종교에 종속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종교던지 인간이 평화롭고 편안하게 더불어 잘 살아갈 수 있는 정신적인 지침으로 그 역활만 기대하면 될 것이다. 그 이상은 인간생활을 침해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최상의 종교란 존재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진리도 변하고 사상도 변하기 때문이다. 유대교,기독교나 천주교,이슬람교는 결국 한뿌리에서 태어난 형제들이며 그들 각각이 주장하는 교리는 오십보 백보이다. 그들이 긴 순교 역사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지구상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으나 서로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서 질시하며 비난하고, 전쟁을 일으켜 서로 싸우고 죽이고 정복하며 씨를 말리는 학살은 물론 추방까지 서섬치 않은게 사실이며 지금까지 인류 역사의 큰 줄기를 이루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들이 정치권력과 부합되면서 급속히 부패하기 시작하였고 그래서 중세의 암흑기를 초래하였듯이, 이땅의 불교가 정치권력과 영합하여 귀족화되면서 부패하듯이 종교가 계급화, 권력화, 재산 욕심으로 탐욕화한다면 반드시 부패하기 마련이다. 또한 그들 각자의 종교적인 편협한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간의 교리문제로 이단시하며 배척하는 것은 종교가 갖는 가장 나쁜 특성이며 그 좋은 예로 십자군 전쟁을 통하여 역사에서 가장 극명하게 보아왔다. 그 어떤 종교도 이 세상의 진리를 대신할 수가 없다. 그것은 단지 다단계의 사업설명을 듣고 뛰어든 욕심과 공짜 심리에 가득찬, 그리고 결국에는 피해를 보고 자신을 한탄하는 불쌍한 보통 인간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