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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대통령의 기적?...

 

 

[강천석 칼럼] '대통령의 기적(奇蹟)'을 기다리며

조선일보 | 기사입력 2007-06-21 19:12 기사원문보기

 대통령 임기의 마지막 해는 ‘마지막’의 연속이다. 국회에 나가 연설하면 ‘마지막 국회 연설’, 예산안을 제출하면 ‘마지막 예산’, 외국 대통령이나 총리와 만나면 ‘마지막 정상회담’이 된다. 마치 임종(臨終)이 머지않은 노인네 같다. 주위에서 다들 그렇게 대하고, 본인의 마음과 생각도 차츰 그런 분위기에 익어간다. 한 해의 허리가 꺾이는 6월을 넘기면, 시간은 더 쏜살같이 흘러간다. 대통령은 누구나 그 ‘시간의 기차’에 실려 대통령으로서의 마지막 날에 가 닿는다.


 미국 42대 대통령 빌 클린턴도 2000년 1월 19일 그날을 맞았다. 시계 바늘이 19일 자정에서 20일 새벽 1시 쪽으로 다가설 무렵, 클린턴은 혼자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았다. 10시간 후면 당선자 조지 워커 부시가 43대 대통령으로 취임선서를 하게 된다. 8년 전 부시의 아버지는 대통령 집무실 책상 위에 새 대통령 클린턴의 앞날을 축원(祝願)하는 따뜻한 편지를 남기고 떠났다. 클린턴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편지는 잘 써지지 않았다.


 클린턴의 머릿속 필름은 자꾸만 지난 8년, 그 가운데서도 마지막 한 해 주변을 서성댔다. 속이 부글거렸다. 8년 세월을 대통령· 부통령으로 함께했던 앨 고어가 유권자 투표에선 부시를 50만표 차이로 이기고도 선거인단 투표에서 져 낙선했다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수긍이 가지 않았다. 연방대법원이 말썽 난 플로리다주(州)의 재검표를 중단시키지만 않았더라면 분명 선거 결과는 뒤집혔을 거라고 믿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두 달이 다 되도록 당선자를 가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던 연방헌법과 주(州)헌법이 구멍투성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클린턴은 공개적으론 입 한번 뗄 수 없었다. ‘나의 전력(全力)을 다해 합중국 헌법을 보전하고(preserve), 보호하고(protect), 수호할(defend) 것을 엄숙히 선서한다’고 했던 대통령으로서 헌법과 대법원 결정에 삿대질을 할 수는 없었다. 클린턴은 미국 국민이 고등학교만을 졸업한 트루먼을 위대한 대통령으로, 헌법에 해박(該博)했다던 닉슨을 최악의 대통령으로 꼽는 판단 기준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헌법 지식이 아니라 헌법에 대한 존경심이었다. 더구나 불미스런 스캔들로 탄핵 위기에 몰렸던 화상(火傷)의 기억이 생생한 그로선 감히 헌법 곁에서 불장난을 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클린턴 머릿속에선 마지막 해의 연설 녹음 테이프들이 화면과 함께 돌아갔다. “저는 50년 전 폭풍우 치던 날 남부 작은 마을에서 청상과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제 가슴은 그런 저에게 꿈을 실현할 기회를 주었던 여러분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1999년 8월 민주당 전당대회연설)


 “미국의 신비(神秘)스런 민주주의 덕분에 아칸소주 시골 꼬마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습니다.”(2000년 1월 마지막 고향방문 연설)


 200년 미국 역사에서 대통령 자리에 올랐던 사람은 42명에 지나지 않았다. 클린턴은 임기의 마지막으로 다가갈수록 연설 때마다 그런 은혜를 베풀어 준 조국과 국민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빼놓지 않았다. 이런 마음이 그에게 동지와 적의 경계선을 넘어설 여유와 유머감각을 되찾아 주기도 했다.


 “의원 여러분, 공화당 의원이나 민주당 의원이나 유전학적으론 99.9% 똑같습니다. 현대과학이 확인해 준 이 사실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1999년 1월 국회 연두연설)


 클린턴의 귓속에선 ‘당신 인생에서 최고의 시간이 끝났다는 게 두렵고 아쉽지 않으냐’는 어느 기자의 마지막 질문이 여태 윙윙대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정직하게 대답했다. “늘 대통령 시절이 그리울 겁니다. 고통스럽던 때조차 대통령이라는 사실이 좋았습니다.” 그러고선 부시에게 남길 편지를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동쪽 창문으로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을 마지막 역으로 싣고 갈 ‘시간의 기차’가 속도를 내고 있다. 노 대통령은 지난 60년간 국민이 직접 대통령으로 뽑았던 6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런 대통령이라면 한 밤 집무실 책상을 홀로 마주할 때 이 방문을 따준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과 대한민국 헌법에 감사한 마음이 들어야 마땅하다. 그게 정상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런 당연지사(當然之事)를 불가능한 기적을 기다리듯 애타게 기다리면서 나라의 평화를 꿈꿔야 하는 서글프고 고단한 국민이다.


[강천석 ·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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