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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우리들의 슬픔

노정권 '망가진 신호등'

[변용식 칼럼] 노정권, '망가진 신호등'
[조선일보 2006-08-14 21:08]    

[조선일보]

교통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 빨간 불과 파란 불이 동시에 켜졌다면?달리던 자동차의 운전사가 액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를 동시에 밟았다면? 당연히 혼란과 충격이 발생할 것이다. 바로 지금 우리 국민이 처한 상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권 말기의 현상인지는 몰라도, 정부 안의 사람들은 제각기 큰 소리를 내며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다.대통령, 집권 여당 대표, 한국은행 총재, 경제부총리, 공정거래위원장 모두가 제각기 마이웨이다. 안보분야, 경제분야 가릴 게 없다. 도대체 지휘탑이 어디인지, 실제 정부가 가려고 하는 방향은 어느 쪽인지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정책의 신호체계가 뒤죽박죽이다. 정부 내에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서로 다른 의견이 있더라도 토론과 조정을 거쳐 하나의 일관된 정부정책으로 수렴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지금 정부 안의 힘 있는 사람들은 마치 봉건 영주들처럼 자신들의 구역에 말뚝을 박아 놓고 제각각 국민에게 다른 신호를 보내 혼란을 생산해 내고 있다.

안보분야부터 보자. 국방장관은 여러 차례 “우리 군은 2012년이 되어야 전시 작전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하지만 대통령은 “지금도 작통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말했다.한 가지 문제에 대통령과 국방장관이 정반대의 신호를 내보내고 있다.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이며,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하나. 국민에게 정부는 오직 하나다. 국방장관 정부 따로 있고, 대통령 정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정부로부터 한 가지 통일된 신호가 나와야 국민은 앞날을 예측하면서 살 수 있다.

청와대 내부의 신호등도 마비됐다. 두 명의 특별보좌관 언행을 보라. 평소 한 사람은 평등을, 또 다른 한 사람은 시장을 중시하는 발언을 했다. 그래서인지 한 특보는한·미 FTA(자유무역협정)를 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며 다니고 있고, 다른 특보는 왜 해야 하는지 설명하고 다닌다.이런 코미디가 또 어느 나라 정부에 있겠나. 국민들 눈엔 청와대가 두 개 있는 셈이다. 두 사람 다 미국 하버드대학 박사 출신이니, 사람들은 누가 옳은 말을 하고 있는지 더 헷갈릴 것이다. 온건파와 강경파 정도의 의견차이라면 모른다. 청와대 두 특보는 지금 정반대 방향으로 각개전투를 하고 있다. FTA 음모설 같은 루머가 왜 안 나오겠는가. 더 이상한 것은 대통령이 인사를 통해 이런 혼란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집권 여당 대표가 모처럼 기업인들에게 손을 내밀며 제안했던 ‘뉴딜’의 운명이야말로 정책 신호체계의 전면 붕괴와 다름없다. 집권당의 대표와 당 간부들은 연일 경제단체를 찾아다니며 “재계가 투자를 해주면 기업인 사면도 해주고, 출자총액제한제도(출총제)도 없애 주겠다”고 약속했다. 과거사 타령이나 하고, 툭하면 기업을 타박하던 여당 간부들이 기업인들과 밥 같이 먹고 어깨동무하며 경제를 같이 고민하는 장면은 아무리 정치 쇼라 해도 보기에 좋았다. 하지만 웬걸, 청와대와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정반대의 신호가 켜졌다. 청와대는 “왜 우리와 협의를 안 하고 추진하느냐. 과연 당의 정체성과 맞는 것이냐”며 싸늘한 반응을 보였고, 8·15특사에서도 주요 기업인들을 빼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공정위는 출총제보다 더 무서운 순환출자를 금지하겠다고 나섰다. 뉴딜은 허공에 떴다. 기업인들은 정부의 누구와 대화해야 할지 당황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은행 총재도 존재를 나타냈다. 경기하강을 예고하는 경제연구소 리포트가 연일 발표되고, 재정경제부, 여당의 직간접적인 금리동결 압력 속에서도 그는 배짱 좋게 금리인상을 단행했다. 정부 압력을 물리치면서까지 금리정책의 신호체계를 확립하려 한 그의 일관성과 소신은 높이 사 줄 만하다. 오히려 금리결정 권한이 없는 정부 사람들이 한마디씩 잘못된 신호를 보냄으로써 시장을 혼란에 빠뜨렸다. 정책의 신호체계가 깨진 것은 정부 내 리더십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념 중시와 현실 중시파의 괴리도 원인이다. 신호체계가 고쳐지지 않으면, 무정부 상태가 온다.

(변용식·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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