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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1,055 : 해방과 건국 15 (4.19 혁명과 제2공화국 2)

 

 

 

한국의 역사 1,055 : 해방과 건국 15 (4.19 혁명과 제2공화국 2)

 

 

  

                                                     ▲4.19혁명 당시 대학생들의 시위 모습 

 

  

4.19 혁명과 제2공화국 2

 

2. 민주당 정부(1960.8~1961.5)

 

제2공화국(第二共和國)은 1960년 6월 15일부터 1961년 5월 16일까지 불과 11개월간 존속했던 대한민국의 두 번째 공화 헌정체제이다. 제2공화국 체제는 1960년 4·19 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된 후, 허정 과도정부(1960년 4월 27일 ~ 6월 14일)를 거쳐 6·15 개헌에 의해 설립된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한 내각제 기반의 헌정체제이다. 대통령은 윤보선, 국무총리는 장면이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후, 민주당이 주도한 국회는 내각 책임제양원제를 권력 구조의 핵(核)으로 헌법을 개정하였다. 이 헌법에 따라 총선거가 실시되어 민주당장면 내각이 들어섰다. 민주당 정권은 자유주의 정치이념을 기반으로 경제개발계획을 통한 산업입국을 꾀했으나, 장면의 민주당 신파와 윤보선의 민주당 구파 사이의 정치적 갈등으로 이러한 계획을 구체화할 정치적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고 4·19 혁명을 계기로 분출된 각계 각층의 요구에도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였다. 장면정권은 군사반란의 조짐을 보고받고도 미국에 기댄 안이한 판단으로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사반란세력에 속수무책으로 정권을 탈취당하였고, 결국 제2공화국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 붕괴되었다.

 

 

제2공화국

1960 ~ 1961
국기
국기
국가: 애국가
대한민국의 위치
수도 서울특별시
공용어 한국어
정부 형태
과도 정부 수반
대통령
국무총리
내각책임제
허정
윤보선
장면
4·19 혁명
 • 6·15 개헌
5·16 군사정변
1960년 4월 19일
1960년 6월 15일
1961년 5월 16일
면적
 •
 • 내수면 비율
 
100,210 km² (108위)
0.3%
통화 대한민국 환

제2공화국을 이끌었던 장면 총리

 

 

 

 

과도정부 수반과 제2공화국의 초대 총리를 지낸 허정

 

 

4·19 혁명 이후 국회는 민주당의 주도로 1960년 6월 15일 내각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6·15 개헌) 이 개헌안이 통과된 직후 제2공화국 헌법에 따른 민의원, 참의원 선거를 통해 새로운 정부를 구성할 때까지 임시 국무총리에는 4월 27일 이후 내각수반을 맡았던 허정이 선출되었고, 허정8월 12일 대통령이 선출 때까지 대통령 권한대행을 계속 겸임하였다. 1960년 8월 12일, 국회 양원합동회의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이 당선되었다.

 

제1공화국의 이승만 1인 독재체제에 대한 거부감이 컸던 민주당은 대통령중심제가 아닌 의원내각제4·19 혁명이후의 새로운 헌법체제로 채택하였다.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제2공화국의 정무(政務)적 실권은 국무총리에게 있었고, 대통령은 형식적인 국가원수였다. 그 밖에 국민의 기본권 보장 강화, 국회 양원제, 지방자치제 실시 등을 제2공화국 헌법의 특징으로 들 수 있다.

 

민주당정부는 4·19 혁명에 따른 다양한 개혁 요구에 소극적으로 대응한데다 장면의 민주당 신파와 윤보선의 민주당 구파 간 파벌 갈등까지 벌여 정치적 기반이 약화되어 정책적 실행이 원활하지 못했고, 이승만 자유당정권 청산 문제에도 과감하지 못했다.

 

1961년 5월 16일, 제2공화국은 소장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사반란세력이 벌인 5·16 군사쿠데타로 붕괴되었다. 5·16 군사쿠데타로 제2공화국 헌법은 효력이 정지되었고, 대한민국 헌정(憲政)은 이후 1963년 12월 27일 제3공화국이 출범하기 전까지 국가재건최고회의군정(軍政) 체제로 들어간다.

 

 

정치

 

1960년 8월 19일 장면 총리인준 직후, 장면 총리와 윤보선 대통령

 

제2공화국 정부는 '자유화'의 원칙에서 다양한 분야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4·19 혁명 이후 이승만정권 아래에서 억압되었던 각계 각층의 열망이 활발한 정치활동과 노동조합의 결성을 통한 노동운동 등의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또한, 정치활동의 규제가 풀리면서 혁신세력을 중심으로 각종 단체가 만들어졌다. 4·19 혁명 주체가 아닌 장면정권은 4·19 혁명을 주도했던 학생·시민들의 이러한 다양한 활동은 최대한 보장하였으나, 그들의 요구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특히, 3·15 부정선거의 주모자와 4·19 혁명의 전후에 있었던 일련의 시위에서 군중들을 살상한 관련자를 처벌하라는 요구가 점점 강해져 1960년 10월 11일에는 4.19부상자 50여명 등이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민주반역자를 처벌하는 특별법의 제정을 호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10월 17일, 민의원에 특별처벌법의 제정 근거를 마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헌법 부칙 개헌안이 제출되어 11월 29일에 반민주행위 처벌을 목적으로 하는 소급입법의 근거가 되는 제4차 헌법개정이 이루어졌고, 이를 근거로 12월 31일에는 '반민주행위자 공민권 제한법'이 제정되었다.

 

 

윤보선 대통령

 

'자유화'의 바람은 남북관계에 대한 변화의 열망으로도 나타났다. 북진통일론이 국시(國是)나 다름없던 이승만정권 하에서 이야기할 수 없었던 '평화통일론', '중립화 통일론', '남북협상론' 등 남북교류와 통일에 관한 여러 주장들이 대두되었다. 1961년 1월, 참의원에서 여운홍 의원은 남북협상을 공개적으로 제기했으며, 특히 학생운동세력과 혁신세력은 독재 타도의 여세를 몰아 직접 접촉을 통한 남북협상을 전개하려 시도하였다. 1961년 5월 13일, '민주자유통일'이라는 학생단체가 정부의 개입을 배제하고 판문점에서 '남북학생회담'을 가질 것을 제안하였는데, 사회 일각에서는 평화통일이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마저 팽배했다.

 

불과 9개월 존속한 당시의 장면정권은 이러한 다양한 사회적 요구와 들뜬 분위기에 적절히 대응하고 관리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구파의 윤보선 대통령은 제2공화국 정부가 각계에서 분출된 자유화 요구로 정권 초기현상을 겪고 있는 와중에 명목상의 국가원수임에도 공공연한 간섭과 비난성명으로 장면정권에 부담을 주는 등 제2공화국 정부의 정치기반은 취약했다. 또한, 연이어 벌어지는 시위를 정부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자 사회혼란에 대한 우려도 커졌다.

 

 

제2공화국의 대통령 윤보선(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총리 장면

 

 

윤보선장면공무원 인사국군통수권을 두고 극심하게 대립했다. 정권 인수의 3개월만인 1960년 12월까지 장면자유당정권에 적극 부역한 경찰관 4천500명 등 다수의 공무원을 해임하였다. 그런데, 그 빈자리의 상당수는 민주당 당원출신으로 채워졌다. 윤보선은 공무원 인사가 있을 때마다 민주당 구파를 안배할 것을 압박하며 인사문제에 개입하는 한편으로 민주당 구파는 장면의 인사를 '정실인사', '부정부패'라고 비난했다.

 

특히, 국군통수권을 두고 벌인 두 사람의 권력다툼은 군사반란의 빌미로 작용했다. 제2공화국 헌법 제61조제1항은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군을 통수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었으나, 제72조에서는 '선전(宣戰), 강화(講和), 계엄안(戒嚴案), 계엄해제, 군사(軍事)에 관한 중요사항 및 각군 참모총장의 임면(任免)'은 국무총리를 의장으로 하는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치도록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군통수권의 실질적 행사자가 누구인지가 명확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으로 군(軍)통수권에 관한 구체적인 하위법률의 제정과 정비가 필요했음에도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대립으로 5·16 군사쿠데타가 발생할 때까지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그 해 2월 17일 장면이 임명한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쿠데타 발생 후 이틀만에 군사반란세력과 한패가 되었다. 결국,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국무총리 장면은 수녀원으로 숨고, 대통령 윤보선은 자기에게는 '군통수권이 없다'며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와 주한 미국 대리대사가 요청한 쿠데타 저지 목적의 병력동원 허가를 거부함으로써 군사반란을 사실상 방조하는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모습을 보여 헌정질서 중단을 초래케 했다.

 

 

경제

제2공화국은 경제분야에 있어서 4·19 혁명 직후의 사회불안 요인과 노동운동, 시위의 증가 등 경제 불안요소 때문에 경제성장이 정체되었다. 실업률과 물가가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1960년 가을부터 1961년 봄까지 미국 달러화에 대한 대한민국 환(圜)화의 가치는 절반으로 폭락했다. 한편, 제2공화국 정부는 경공업과 농업의 생산력 증가, 실업자 해소, 국토개발 등을 목표로 한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입안하였으나, 5.16 군사쿠데타로 이를 집행할 수 없었다.

 

 

외교

장면정권은 이승만정권 하에서 진전이 없었던 한일국교정상화 교섭을 재개하여 일본 자민당 대표단의 방한을 실현시켰다.

 

1960년 7월, 손원일(당시 주서독 대사) 특사 일행은 콩고 공화국 독립식전에 참석 후 카메룬, 토고, 기니, 말리, 나이지리아, 모로코 6개국을 친선 방문하고, 상호간의 이해증진과 외교관계 수립에 관하여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

 

 

연혁

  • 1960년 3월 15일 : 3·15 부정선거(제4대 대통령선거), 마산 3·15 의거.
  • 3월 18일 : 내무부장관 최인규, 치안국장 이가학 사임.
  • 4월 11일 : 마산상업고등학교 입학생 김주열 시신 발견.
  • 4월 18일 : 4·18 고려대학생 피습 사건
  • 4월 19일 : 4·19 혁명
  • 4월 26일 : 대통령 이승만, 오후 1시 하야 발표.
  • 4월 27일 : 대통령 이승만, 국회에 사임서 제출. 외무부장관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 출범.
  • 5월 29일 : 이승만, 하와이 망명.
  • 6월 15일 : 제3차 헌법개정. 제2공화국 출범
  • 7월 29일 : 국회의원 총선거
  • 8월 12일 : 국회 양원합동회의, 대통령으로 윤보선 선출.
  • 8월 16일 : 윤보선 대통령, 구파인 김도연을 국무총리로 지명. 다음날(8월 17일) 부결.
  • 8월 18일 : 윤보선 대통령, 2차로 신파인 장면을 국무총리로 지명.
  • 8월 19일 : 국무총리로 장면 선출.
  • 8월 23일 : 장면 총리, 새 정부 조각(組閣).
  • 9월 12일 : 제1차 개각(구파의 인사불만 무마 위해 구파 5명을 장관으로 인선).
  • 10월 11일 : 부정선거 및 4·19 혁명 살상 관련자 처벌 요구하며 4.19부상자 50여명 등이 국회의사당 점거.
  • 11월 29일 : 반민주행위자 처벌을 목적으로 제4차 헌법개정.
  • 1961년 2월 27일 : 국토건설단 창단.
  • 3월 23일 : 윤보선 대통령, 장면 총리에게 사퇴 요구. 민주당 신구파간 대립 격화.
  • 5월 16일 : 5·16 군사쿠데타
  • 5월 18일 : 박정희의 주도로 비상통치기구인 국가재건최고회의 발족(의장: 장도영, 부의장: 박정희).
  • 5월 19일 : 대통령 윤보선, 오후 8시 30분 하야 발표. 다음날(5월 20일) 오후 6시 번복 회견.
  • 5월 21일 : 쿠데타 직후 도피중이었던 국무총리 장면, 내각총사퇴 발표.
  • 1962년 3월 23일 : 대통령 윤보선 하야.

 

 

 

윤보선, 그는 누구인가?

 

윤보선(尹潽善, 1897년 8월 26일 ~ 1990년 7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정치가이자 전 대통령이다. 국회의원1948년 12월 15일부터 1949년 6월 5일까지 서울 시장을 지냈고,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1960년 8월 13일부터 1962년 3월 23일까지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일시적으로 참여하였고, 신규식의 권고로 영국 유학을 다녀왔다. 미군정기제1공화국의 야당 정치인이었으며 국회의장 이승만의 비서관과 서울특별시장, 상공부 장관,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거쳐 제2공화국에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대통령 사퇴성명을 발표했다가 민주당 정권이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군부에서 대통령직에 있어달라는 요구를 수락, 사퇴성명을 번복했다.

 

1962년 3월 하야 이후부터는 반독재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였으며, 박정희를 군부 내 좌익 프락치라고 규정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제5대 대통령 선거제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기도 하였다. 이후 한일회담 반대운동, 민주회복국민선언, 명동구국선언 등에 참여하였으며, 군사정권하에서 여러번 기소와 재판에 회부되었다. 조선 선조 때의 문인인 윤두수의 후손으로 대한제국의 관료 윤웅렬의 종손이며 윤치호의 종질이다. 윤치왕, 윤치창은 그의 당숙이었고, 윤치영은 그의 숙부였으며 영선군의 사위 윤원선은 그의 동생이었다. 윤일선, 윤영선 등은 그의 사촌이었다.

 

그는 임시의정원의 최연소 의원이기도 했고, 허정, 이갑성과 함께 3.1절광복절 기념식 때 늦게까지 초대된 독립운동가 중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다는 평가와 5·16 군사 정변 협력 논란이 양립하고 있다. 5·16 군사 정변을 방조했다는 의혹을 받아왔으나 제3공화국제4공화국박정희의 라이벌이었으며, 3공과 유신시절 내내 민권투쟁에 앞장섰고, 각종 사회사업에도 참여하였다. 김영삼·김대중이 등장하기 전까지 야당을 이끌었으며 '선명야당'을 강조하였다.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자(字)는 경천(敬天), 호(號)는 해위(海葦)이다. 해위라는 호는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영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스승인 신규식이 지어준 것으로 "바닷가 갈대는 바람에 휘날려도 꺾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칭타칭 '정신적 대통령', '영국 신사', '재야 대통령'으로도 불렸다.

 

 

윤보선
윤보선
윤보선
대한민국 대한민국제4대 대통령
임기 1960년 8월 13일 ~ 1962년 3월 23일
국무총리 허정 (1960)
장면 (1960 ~ 1961)
전임: 이승만(제3대)
후임: 박정희(제5대)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출생일 1897년 8월 26일(1897-08-26)
출생지 대한제국 대한제국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
사망일 1990년 7월 18일 (92세)
사망지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매장지 대한민국 대한민국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
정당 민주당 → 무소속
<퇴임 이후>
무소속 → 민정당민중당신민당
학력 에든버러대학교 고고학과 학사
별명 자(字)는 경천(敬天)
호(號)는 해위(海葦)
별칭은 정신적 대통령, '영국 신사', '재야 대통령'
종교 장로교
배우자 공덕귀
자녀 윤완구, 윤완희, 윤상구, 윤동구
부모 아버지 윤치소, 어머니 이범숙
웹사이트 해위 윤보선 기념사업회

 

 

 

 

생애

윤보선은 3백 석 이상을 걷는 대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또한 윤보선의 집은 증조할아버지 윤취동 이후 다시 아버지 윤치소가 이재와 수완에 밝아 대농토를 꾸렸다. 큰아버지 윤치오가 친구들의 빚보증을 섰다가 막대한 빚을 졌지만, 아버지 윤치소의 재력으로 그의 집안은 거지가 되는 것을 면하였다.

 

그의 조부 윤영렬은 삼도 토포사를 지낸 고관으로, 윤영렬이 삼남 토포사로 부임했을 때 그의 일가는 충남 아산에 거주하고 있었다. 머리가 좋고 기억력이 비상하였던 그는 유아기 때 '조부가 토포사로 직인을 찍거나 먹찰 하는 것, 집안에서 사무를 보며 죄수들과 병사들이 드나드는 모습'을 기억하였다. 그 뒤 집안에서 선생을 두고 한문을 익혔다. 할아버지 윤영렬은 틈틈이 그들 형제를 불러 충과 효를 강조하고 삼국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다. 이때 그는 유비의 의로움과 관운장의 전공치적과 그의 충의에 감동받았다 한다. 할아버지 윤영렬은 그의 고조부 대에 약주가 과하여 가세를 기울게 하였다 하여 술을 입에 대지 말라고 훈계를 여러 차례 하였다. 이 때문에 윤보선은 여행지에서나 정계 입문한 뒤에도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총명하고 명석했던 그는 한편으로 아쉬울것 없는 환경에서 자라 성격적으로 다소 고집이 센 측면도 갖게 되었다.

 

7,8세 때 집안 어른들의 대화를 엿듣고 한국이 일본에 진 국채를 갚기 위해 노력하나 조선 조정의 재정이 딸리므로 국민의 헌금을 바란다는 것이 보도된 이후, 국민 전체가 그 헌금을 위해 금주금연 운동을 벌였다는 것을 들었다. 어린 그는 헌금운동에 참여하고자 점심을 절식하고 그 값을 돈으로 타낼 작정을 하였다가 할머니와 어머니를 염려케 하였다.

 

10세 때 집 근처의 교동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1910년 4년 과정의 교동보통소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충무로일본인 거류민들이 설립하 일출(日出)소학교에 5학년으로 편입학하였다. 한일합방 후 귀국해서 1년간 경성 기독교 청년회 총무로 있던 이승만을 만났다. 한국인 최초의 박사이고 철학박사라는 점에 이끌려 그를 존경하기도 했으나 1950년 이후에는 정치적으로 그와 갈라서게 되었다.

 

그의 선조들은 당색으로는 서인노론 계열이었는데, 서얼 가문이었지만 아버지 윤치소나 조부 윤영렬로부터 가계와 선조들의 이야기를 훈육받고 자란 그는, 양반가의 후예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일출소학교 5학년에 편입학한 뒤 1912년 일출소학교를 졸업하였다. 소학교 시절의 윤보선은 드러나지 않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한편으로 국채보상운동 등이 일어났을 때는 스스로 작은 용돈을 모아서 보내기도 했다.

 

 

약력

  •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충청남도 선거구)
  • 192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 1937년 첫 부인 여흥 민씨 사별
  • 1938년 2월 18일 조모 한진숙 상(喪)
  • 1939년 11월 4일 조부 윤영렬
  • 1944년 2월 20일 부친 윤치소
  • 1945년 한국민주당 창당발기위원
  • 1946년 민중일보 사장
  • 1947년 민중일보사 사장 재선
  • 1947년 우남 이승만 박사 기념사업회 회장
  • 1947년 한영협회 회장
  • 1948년 이승만 국회의장 비서실장
  • 1948년 5월 10일 : 제헌 국회의원(충남 아산) 낙선
  • 1948년 12월 8일 충무공 이순신 기념사업회 창립 발기인
  • 1948년 12월 서울특별시 시장
  • 1949년 상공부장관
  • 1950년 대한적십자사 총재
  • 1950년 12월 피난민구호대책협의회 위원, 같은 날 협의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 1952년 민주국민당 서울시지구당 위원장
  • 1954년 제3대 민의원
  • 1958년 제4대 민의원
  • 1959년 민주당 상임위원
  • 1960년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다. 구파의 지도자 신익희 ,조병옥의 사망으로 구파의 지도자가 되어 신파의 지도자 장면과 대립하다.
  • 1960년 국회의 간접선거로 제4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선출되다.
  • 1961년 3월 청와대시국수습4자회담을 주최하였다.
  • 1961년 3월 12일 서울 청량리 1동 동사무소 창고의 홍국직업소년학교에 스코필드(한국명 석호필)과 함께 방문하였다.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이 교사로 일하던 이곳을 세상에 알리고자 석호필은 대통령에게 방문을 청하는 편지를 썼고, 윤보선은 스코필드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여 왔다.
  • 1961년 5월 5·16 군사 정변을 추인하였다.
  • 1961년 10월 26일 브라질 대사에 신임장 봉정을 봉정하고, 군대를 사열하였다.
  • 1961년 10월 28일 농촌지도자들과 면담, 이어 적십자 청소년, 한미연합사령관 슈프 대장과 면담.
  • 1961년 10월 28일 유엔의 날 축사 발표
  • 1962년 3월 22일 정치정화법에 항의 하여 사퇴하였다.
  • 1963년 민정당 대표 최고위원
  •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 입후보
  •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 1965년 1월 23일 외무부 장관 김용식을 만나 면담하다.
  • 1965년 2월 19일 장택상 등과 함께 대일 굴욕외교 반대 데모를 주관하다.
  • 1966년 신한당 총재
  • 1967년 제6대 신민당 대통령 후보자 출마
  • 1969년 6월 18일 모친상
  • 1971년 신민당 탈당, 선명야당의 기치를 들고 박기출, 장준하 등과 국민당 창당, 국민당 총재 취임
  • 1973년 유신 정권에 의해 국민당, 강제 해산당함
  • 1974년 비상보통군사법회의에서 민청학련 사건 배후 조종 혐의로 제소되었다.
  • 1974년 군사재판에서 징역 15년 구형,항소 기각 징역 3년에 집행 유예 5년 확정
  • 1977년 항소 후 대법원에서 명동사건 상고 기각 원심 확정되었으나 이때 윤보선 등 고령자는 형집행 정지되었다.
  • 1979년 민족사바로잡기국민회의 의장
  • 1979년 YMCA 위장 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었다.
  • 1980년 1월 YMCA 위장결혼식사건 선고 공판에 출석하였다.
  • 1980년 형집행 면제
  • 1980년 2월 29일 복권되었다.
  • 1981년 고령으로 정계 은퇴
  • 1982년 1월 4일 국무총리 유창순의 방문을 받았다.
  • 1983년 보신각 새종 중주(中鑄) 위원회 위원장
  • 1983년 9월 23일 서울 어린이대공원에서 열린 고하 송진우동상 제막에 참석하였다.
  • 1984년 3월 13일 고려청자헌납위원회 고문
  • 1984년 4월 백사 이윤영 회고록의 서문을 짓다.
  • 1985년 1월 17일 연세대학교 강당에서 열린 백낙준의 추모 예배에 참석하였다.
  • 1986년 민족사바로잡기국민회의 의장(재선)
  • 1987년 윤치영의 구순기념 논문 봉정식에 참석하였다.
  • 1988년 윤관장군기념사업회 명예회장
  • 1989년 병으로 요양하였다.
  • 1989년 석오 이동녕 기념사업회 회장
  • 1991년 사후 회고록 《윤보선회고록:외로운 선택의 나날들》 2집 출간

 

 

사상과 신념

명문가라는 자존심과 더불어 양반의 권위주의적인 사고를 갖고 있어 대단히 자기중심적이었다. 그의 정치관은 흑백 양자택일이었기 때문에 일단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도무지 타협을 모르고 한 길로만 내달았다.

 

 

민주주의 보편타당론과 상식주의

윤보선은 항상 비서관과 젊은이들에게 민주주의는 물과 공기와 같은 것으로서 어느 나라에서든 보편적이고 타당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민족적 민주주의, 우리식 민주주의, 한국적 민주주의, 일민주의 등을 거짓 민주주의로 규정하고, 민주주의의 원칙을 그대로 적용할 것을 역설했다. 다만 무조건 다수의 의견이 민주주의라는 주장에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소수의 의견이라고 하더라도 상식적이고 타당하다면 그것을 따를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라는게 그의 설명이었다.

 

그는 매사에 상식을 강조하였다. 비서관 김준하에 의하면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일을 할 때 잊어서는 안되는 마음가짐을 꼼꼼히 설명했다. 그때 대통령이 내세운 것은 상식이었다.'고 증언하였다.

 

그는 "민주주의의 종주국인 영국에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기본이 되는 헌법이 따로 없다. 그들은 '상식'을 헌법으로 대치한다. 사고와 행동의 잣대를 상식으로 삼으면 나라의 일이나 개인 생활이나 정상적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김준하 비서관은 이를 그의 '첫 가르침'이라 회상하였다.

 

 

국익을 위한 초당적 협력

그는 국익을 위해서는 초당적인 협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62년 군사 정권 집권 초, 미국의 잉여농수산물 무상 지원을 시도하면서 야당인사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자 김병로 등은 반대했지만 윤보선과 장택상은 적극 동조하였다. 오히려 윤보선은 "그것은 가인이 잘못 생각한 것"이라며 일침을 놓기도 했다.

군사 정권에서 도움을 요청한 밀사가 장택상을 방문하였다. 밀사는 장택상에게 정부대표가 아닌 개인자격으로 비밀리에 미국을 설득해서 식량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다음날 아침 장택상 가인 김병로를 찾아가 상의하였다.  김병로장택상과 군사정권 인사 사이에 오고 간 말을 듣고 나더니 난색을 보였다. 그는 "비록 국민의 식량 문제라고 할지라도 미국 잉여 농산물이 한국에 때맞춰 들어오고 보면 이 군사정권이 오래 지속될 것이 아닌가"하고 말하면서 "좀더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다. 장택상은 그자리에서 나와 즉시 안국동 윤보선댁을 찾아가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장택상이 김병로가 '나의 도미하는 문제에 대하여 난색을 표하더라'고 덧붙였더니 윤보선은 대뜸 '그게 무슨 말이냐?'면서 김병로가 잘못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것은 가인이 잘못 생각한 것으로 문제가 국민의 식량 문제인만큼 누구 심부름이든 가릴 것 없이 하루빨리 미국에 가서 힘닿는대로 해결지어야 한다."고 강경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주한미국대사는 장택상이 정부대표 자격이 아니면 받아줄수 없다고 했고 결국 실패했다. 장택상이 기자회견까지 마치자 윤보선은 직접 환송한다고 자택까지 불러서 저녁 대접까지 해 주었다. 그러나 군사정부에서는 장택상에게 취소됐다고 연락했고, 장택상과 윤보선은 분개했다. 그는 국익을 위해서라면 일단 정당을 초월해서 협력을 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군사정권 기간 내내 그는 당리당략보다는 국민의 생존권이 우선이라 판단했다. 특히 식량이나 약품과 같은 문제에 있어서는 정치싸움보다는 일단 협력할 것을 역설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대한 불신

윤보선은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반감과 불신이 대단하였다. 강원룡에 의하면 '윤보선 씨는 박정희 반대운동을 벌였지만 사상적으로는 대단히 뿌리깊은 반공입니다. 박정희가 무너질 때까지 재야 인사들의 민주화운동을 지지하며 힘을 합했지만, 내심 이 사람들의 행태를 보면 도저히 안심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소위 운동권이 성공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고. 이것이 전두환 정권을 멀리 하지 않은 이유 가운데 하나예요.라고 지적했다. 강원용은 오히려 박정희가 좌익이며 위험 인물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강원룡에 의하면 그는 한때 이범석과 가깝게 지냈던 김정례와도 가까이 지냈다고 하였다.

 

 

서구 사회에 대한 충격

그는 영국 생활과 유럽 생활 중 영수증을 잘 주고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워하였다. 이는 한국인들은 영수증을 받지 않으면 바가지를 씌운다는 점과 적당히 바가지를 씌우는 상술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변모하였다.

 

'중국으로부터 들은 말이 있어 내 딴에는 중요한 물건과 현금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되어 가방에 넣어 수하물로 부쳤는데, 내 수하물을 취급하는 사람이 어찌된 일인지 하물표(영수증)를 발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짐표를 요구했더니 하물취급하는 사람이 도리어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보며, "당신 짐은 글래스고에 가서 찾으면 되지 않소? 표는 무슨 표요?"하고 주지 않았다. 그는 잔뜩 의심하고 경계하였다.

 

글래스고 시에 도착해서는 마중나와 있는 윤치왕에게 이를 걱정해서 말했더니, 윤치왕은 그를 이끌고 따라오라며 화물차가 있는 방향으로 갔다. 윤치왕은 그에게 짐을 가지고 가자고 하였다. 영국인들은 각자 자기 짐만 집어가지고 가는 것이었다. 남의 짐도 좋은것이 있다 싶으면 가져가는 조선인들의 습성을 봐온 그는 이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나는 이 허술한 사실에 어안이 벙벙하였다.'고 한다. '그때 영국은 이만큼 탄탄한 사회구조에 이미 서 있었으니 10전어치 물건을 사고도 반드시 영수증을 주고받아야만 하는 사회에서 온 이 동양인에게 그 사회가 어떻게 보였을까.'하며 이를 오래도록 부끄럽게 여겼다.

 

 

정신혁명론

그는 한국 사회가 진정한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려면 정신적인 혁명부터 이룩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부도덕성과 비정직성으로 들었다. 윤보선은 '조국의 근대화'가 아니라 '조국의 민주화'와 '정신적 근대화' 역시 병행되거나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대의의 원칙에 기반한 의회주의, 보통선거, 정당간의 공정한 경쟁을 통한 정부 구성을 이행할 것을 여러번 촉구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는 박정희와 그의 유신을 반민족, 반민주, 반민생, 빈민권 세력으로 규정하였다. 그는 원칙을 강조하되, 그 원칙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상식을 제시했다.

 

윤보선은 박정희박정희 정권의 경제 개발의 후유증이 한국 사회의 비윤리적이고 그릇된 사고와 의식, 타성과 풍조를 심었다고 진단했고, 국민들 스스로 씻어내고 정신혁명을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박정희 정권의 정책이 부패와 퇴폐의식을 조장했고, 결과만을 중시하는 풍조를 남기는 등 한국 사회에 악영향을 끼쳤다고 봤다.

 

 

형사들이 교회에서의 감시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있는 윤보선의 자택은 대지 1천400평에 99칸의 거대한 한옥이다. 3.1 구국 선언, 민주화 운동 단체 가입, 크리스찬아카데미, 민주화이후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날조한 사법살인으로 확인된 인혁당 사건, YMCA 위장 결혼 사건 등 민주화 운동에 참여·지원하거나 민주화운동 탄압에 연루되어 때문에, 그가 출석하던 안동교회중앙정보부형사들의 감시, 사찰대상이 되었다. 안동교회는 윤보선의 아버지인 윤치소가 설립하여 헌당에 참여한 예장통합장로교회이다.

 

그의 집인 안동장 앞에도 중앙정보부는 3층 높이의 초소를 세워두고 그의 집 출입자들을 감시하였다 한다. 윤보선은 이를 대단히 불쾌히 여기면서도 박정희가 죽고 난 뒤, 이를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였다.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제1대 총선 국회의원(아산시) 제헌 한국민주당 14.2% 7,069표 4위 낙선
제2대 총선 국회의원(아산시) 2대 민주국민당 선거결과가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음 낙선
제3대 총선 국회의원(종로) 3대 민주국민당 32.4% 9,485표 1위 종로구 국회의원 당선
제4대 총선 민의원(종로구) 4대 민주당 63.2% 22,780표 1위 종로구 국회의원 당선
제5대 총선 민의원(종로구) 5대 민주당 81.9% 31,924표 1위 종로구 국회의원 당선
제4대 대통령 선거 대통령 4대 민주당 82.2% 208표 1위 대한민국 제 4대 대통령 당선
제5대 대통령 선거 대통령 5대 민정당 45.1% 4,546,614표 2위 낙선
제6대 총선 국회의원(전국구) 6대 민정당 20.1% 1,870,976표 14명 전국구 국회의원 당선
제6대 대통령 선거 대통령 6대 신민당 40.9% 4,526,541표 2위 낙선
제7대 대통령 선거 대통령 7대 국민당

사퇴

 

기념 거부

윤보선은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중 취임기념우표와 기념주화가 없는 유일한 대통령이기도 하다. 1960년 8월 대통령 취임 후 취임기념우표 발행 건의가 들어왔으나 그는 살아있는 인물을 도완할 필요가 있느냐며 거절하였다 기념 주화의 발행에 대한 건의 역시 거절하였다. 또한 그는 대통령 취임 후 각료에게 각하 라는 명칭은 자제할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얼굴이 도완된 주화 발행 역시 거부했다. 그는 우표와 화폐에는 나라에서 기념할만한 인물을 넣는 것이 상식이라며 반대의 이유를 밝혔다. 다만 1960년 8월 27일1961년 8월 27일의 청와대에서의 대통령 탄신일 기념행사(의전에 의한 행사)는 수용하였다.

 

 

 

평가와 비판

 

긍정적 평가

박정희 집권 16년간 비타협적인 자세를 견지했다. 제3공화국 당시 박정희대선 경쟁자이자 박정희제3공화국, 제4공화국 16년 동안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을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대학교수 겸 역사학자 서중석은 그가 박정희와 정면으로 붙은 것을 높이 평가한다. 정통 야당을 고수하며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인사로도 평가된다. 또한 박정희 정권에서 추진한 경제정책의 기초를 마련한 것 역시 실패하기는 하였지만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인혁당 사건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의 복권 운동을 벌인 점은 학생운동가들로부터 높이 평가받는다.

 

그가 추진하려던 경제개발 계획에 관련하여 '경제정책 프레임은 비록 미완이었지만 박정희 정권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꽃을 피워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내는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도 있다. 논리적이고 사리가 밝은 사람이었다 는 평가도 있다. 반박정희 투쟁에 있어서의 그의 비타협적인 자세는 원칙을 고수하는 민주주의자, 합리주의자라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으나 반면에 융통성이나 타협능력이 부족하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다.

 

비서관이었던 김준하는 평하기를 '그분이 1960년 제2공화정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대변인을 맡게 되어 5·16군사정변을 함께 맞게 되고 그 이후 반독재 투쟁에도 뒤따르게 됐다. 그분은 영국신사라는 별명에 걸맞게 성격이 온화하고 따뜻하셨다. “관습법 국가인 영국에서는 상식이 곧 헌법”이라면서 매사를 보고 결정하는 기준으로 상식을 내세웠다. 또 무슨 일이든지 한번 결정하실 때는 오래 심사숙고하신 후에 결정을 내리시고 일단 한번 결정하면 요지부동으로 강직하게 밀고 나가셨다.' 한다. 이어 김준하는 그가 지극한 효자였다고 평하였다. 아침 저녁으로 노모에게 꼭 문안을 드리고 노모의 건강을 체크했다. 5·16 아침 비서들이 대통령에게 청와대를 피하도록 권유했을 때 그것을 거부한 이유 중의 하나도 자기 혼자만 피신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다.

 

 

부정적 평가

5.16 관련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켜내지 못하고 군부에 정권을 넘겨주었던 나약한 정치인으로도 그려진다. 고집있는 자유주의자 라는 시각도 있다. 한영우는 5.16 군사정변 당시 그의 묵인적 행동을 지적, '이 사건(5·16군사 정변) 중심으로 그를 이해한다면, 그는 한국민주당에서 민주국민당, 그리고 민주당과 신민당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보수 야당에서 구파 계열을 대표하는, 한 파벌의 정치인일 뿐이다.'라고 보았다.

 

친일파 집안의 덕으로 학창시절과 어렵지 않은 환경에서 수학한 것을 비판하는 시각도 있다. 그가 친일파라는 비난도 있으나 그가 직접적으로 친일행위에 가담하지 않았으므로 친일파로 보기는 어렵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윤보선은 자유주의자였지만 현실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원칙론만 되풀이했다 는 비판도 있다.

 

정대철은 '그가 내심 5·16 쿠데타를 지지했다. 그렇지만 겉으로는 지지성명 요구를 거부하는 등 반대했다는 기록도 남겼다. 노회한 정치인의 처세라 아니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5ㆍ16쿠데타가 일어난 지 1년이 되는 시점에서 당시의 한 신문은, 쿠데타 주체의 한 사람이었던 유원식의 말을 인용해 윤보선은 이미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 군인들과 교감하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쿠데타를 승인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폭로했다. 이러한 폭로는 "올 것이 왔구나"라는 해석을 둘러싼 논쟁을 일으켰다. 5·16 군사 정변을 방조, 묵인했다는 의혹과 비판은 계속 제기되고 있다.

 

 

장면과의 갈등 관련

서중석은 민주당 신파의 지도자였던 장면 국무총리가 일을 못하게 된 큰 이유가 윤보선이 딴지를 걸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승만 정권 말기의 자유당의 장기집권을 비판했고 박정희제3공화국 유신 체제에 정면도전하였으며, 1970년대 내내 인혁당 사건, 크리스찬 아카데미, 김상진 할복 사건, 명동구국민주선언, YMCA 위장 결혼식 사건 등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를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또한 수시로 내사를 당하고 감시인이 따라붙는 등의 고초를 겪었던 점 등을 높이 평가해 왔다. 그러나 제5공화국 이후에는 협력적으로 변하면서 재야인사 및 신민당계 인사들의 비난을 사기도 했다.

 

4.19 혁명 직후 대통령 권한대행이자 내각 수반, 국무총리였던 허정(許政)은 'UN군 측의 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성공했고, 장면 내각의 총사퇴와 함께 혁명정부가 정권을 정식으로 인수했다. 나는 윤 대통령이 적어도 장면 정부와 운명을 같이할 정도의 양식은 갖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나, 그는 그대로 대통령의 자리에 눌러 앉아 있었다.'고 비판했다.

 

 

기타 비판

허정은 그가 야당 대열에 복귀할 자격이 있느냐며 수시로 공격했다. 허정은 자신의 회고록에도 '1963년 1월 초 정치정화법이 해제되었다. 그리고 63년 1월 2일 김병로, 윤보선 등이 모여 민정당의 발기에 합의했다. 허정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윤보선 씨의 성급한 정치활동 재개는 나로서는 선뜻 납득이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허정에 의하면 윤보선은 혁명정권과 한 동안 같이 일한 사람인 만큼, 혁명 세력과 대결하는 야당 대열에 복귀하기에는 시기상조라는 생각이었다'고 기술하였다.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 당시, 매카시즘 공세를 일으키다가 되려 역공세당했다는 비판적인 지적도 있다. 6.25 사변 당시 이른바 '빨갱이 파문'과 '연좌제'로 심한 상처를 안고 있던 사람들 입장에서 윤보선의 '매카시즘 대선 전략'은 과거의 상처만 되살린 꼴이 되어 버렸고 이들은 도리어 '박정희가 억울하게 빨갱이로 몰린다'는 동정심을 가져 박정희에 지지표를 쏟았다. 결국 박정희는 15만표차로 당선되었는데 여기에는 윤보선의 '매카시즘 공략'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6대 대선 당시 윤보선은 민중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선 출마를 고집하여 또다시 야당의 분열을 일으켰다 고 보는 시각도 있다. 7대 대선에서도 출마하였으나 후보사퇴를 피하려고 박기출에게 양보한 점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인 박정희에게 협력했다는 이유로 숙부 윤치영에게 수인사나 목례도 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처럼 대한 점도 비판받고 있다.

 

윤보선은 이승만의 권위주의와 박정희의 권위주의적인 행동에 대해 권위주의, 전체주의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런데 전북대학교 신방학과 교수 강준만에 의하면 윤보선도 권위주의적이라는 것이다. 강준만은 "권위주의적인 윤보선과 다툼을 싫어하는 장면의 대조적인 성격"이라고 비평하기도 했다. 강준만은 그를 '명문가라는 자존심과 더불어 양반의 권위주의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으며', 대단히 자기중심적이었다.['고 평하였다.

 

 

인물평

 

그는 쉽게 누군가에게 호감을 주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번 자기 사람이 되면 각별하게 챙기고, 그의 가족의 생일, 기일까지 챙기는 자상함을 보였다. 그러나 김남 비서관의 결혼식에 장면이 온다는 말을 듣고 가지 않으려다가 선우종원이 만류하는 바람에 참석하였다. 이것이 사람들 뒤에 들어가면서 그가 김남 비서의 결혼식을 기피하더라는 말들만 돌고 돌았다.

 

냉정하고 합리적이라는 인물평이 있다. 한편 그가 권위주의적이고 조선시대의 양반적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평도 있다. 명문가라는 자존심과 더불어 양반의 권위주의적 사고를 갖고 있어 대단히 자기중심적이었다. 그의 정치관은 흑백 양자택일이었기 때문에 일단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도무지 타협을 모르고 한 길로만 내달렸다. 1960년 8월 29일 민정시찰 시 각료들을 불렀다가 월권행위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자존심을 중히 여기는 명사형 정치인이라는 평가도 있다. 옳다고 믿는 것은 끝까지 밀어붙이는 성격이었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그전까지 윤보선은 "영국 에든버러 대학을 나온 신사다.", "대부호 명문집 아들이다" 이렇게만 알았는데, 이주 잘못 안 것이었다 한다. 서중석은 그가 상당히 정치적이었고 야심도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것을 알게 된 것은 대통령이 된 직후 내각 책임제하의 수반이었던 장면 국무총리와 싸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고 했다.

 

서중석은 윤보선이 1960년 4·19 혁명이 나기 전까지는 세상에서 잘 몰랐는데 대통령이 되었다고 봤다. 서중석은 '윤보선처럼 박정희와 정면으로 붙은 사람은 없다'며 '그것을 보면 사람은 겉보기하도 다르'다고 평가했다.

 

깔끔하고 말쑥한 신사였던 그는 나이가 들어서도 아랫배가 나오지 않았고, 피부결이 늘어지지도 않았다. 눈가 주변에 약간의 주름과 검버섯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나이에 비해서 상당히 젊어보이는 편이었다. 젊은 아내와 어린 아들들 탓에 그는 자신의 외모에도 각별히 신경썼다. 1950년미국을 방문했을 때 윤보선은 최기일을 면담했다. 최기일에 의하면 '윤보선의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아서 나는 그이를 싫어했지만 계속 만나고 이야기하면서 조금씩 그와 가까워졌다. 내가 미국에 유학을 왔을 때 그는 미장 그릴에서 점심 대접을 하기도 했다. 윤보선은 후덕한 사람은 아니지만 논리적이고 사리가 밝은 사람이었다'는 평을 내렸다.

 

 

의혹과 반론

 

5·16 군사정변 추인에 대한 의혹

윤보선 본인은 5·16 군사정변을 승인할 의도가 없었다고 주장하였으나 제2공화국의 국가원수임에도 5·16 군사정변을 추인 내지는 저지하지 않았다는 비판론이 제기되고 있다. 더 나가 학생혁명만 혁명이고 군사혁명은 혁명이 아니냐고 항의했다고도 한다. 그가 5·16 군사 정변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주장 외에 지지는 하지 않았다는 반론도 있다.

 

5월 16일 윤보선은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과 마샬 그린 주한미대리대사를 만났다. 그들은 이미 "장면 총리가 영도하는 합법적인 한국 정부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두 사람은 윤보선에게 쿠데타군을 무력으로 진압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윤보선은 "국군끼리 전투를 벌여 서울이 불바다가 되면 인민군이 기회를 노려 남침한다."며 끝까지 반대했다. 주한미국대사 그린은 마지막 경고로 "각하의 이번 결정으로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군부통치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윤보선의 의지는 변하지 않았다.

 

5.16 군사 정변이 터지자 그는 1군사령관 이한림 1군단장 임부택 등에게 비서관들을 보내 "국군 끼리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 안 된다"면서 진압하지 말라고 했다는 의혹도 있다. 장면은 윤보선이 1군 사령관 이한림에게 자신의 비서관들을 보내 진압을 만류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군사정변 당시 장면의 포기로 사실상 국군통수권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38선 전방부대를 서울로 보내 군사 정변을 저지하지 않았고, 박정희국군통수권 이양 요구 당시 "올 것이 왔다"라는 말과 함께 순순히 국군통수권을 이양한 것 때문에 그가 군사정변을 묵인하는 대신 박정희와 대통령 중심제 개헌을 매개체로 타협을 보려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사학자들이 있다. 왜냐하면 내각 책임제 치하에서 대통령은 별 볼 일없는 자리였기에 이에 분개한 윤보선이 박정희와 타협하였다 한다.

 

 

5.16 군사정변 방조 의혹

윤보선의 정변 방조 의혹은 1962년 5월 유원식이 제기하였다. 유원식은 인터뷰에서 '윤보선이 이전부터 쿠데타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았고 이를 방조했다'고 주장하자, 윤보선은 이를 부인하며 '혼란한 장면 정부하에서 무슨 사태가 터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쿠데타가 일어났다기에 그렇게 말했을 뿐'이라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윤보선의 자신의 회고록인 《외로운 선택의 나날들:윤보선 회고록》에서 유원식과는 만난 적이 없으며, 유원식이 자신을 모함하는 것이라며 반박하였다.

 

윤보선은 내각책임제 하에 정부 수반으로서 실권을 행사했던 장면 총리의의 실권을 부러워하여 5·16 군사정변을 방조 내지는 묵인했다는 분석도 있다. 국가원수 신분으로서 정치적 라이벌인 장면의 몰락을 바라며 제2공화국 붕괴를 방관했다는 이러한 주장은, 야당 지도자로 활동 중이었던 윤보선에게는 도덕적으로 치명적이었다. 윤보선 측은 5·16 군사정변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이를 사실상 승인했다는 의혹을 전면 부인하여, 유원식의 주장이 사실인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김도연으로부터 폭동발생, 정변 음모 등의 정보를 입수하고, 김도연에게서 들은 정보를 국무총리 장면에게 알려 철저한 대응을 지시하였다는 증언도 있다. 그러나 장면은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에게 알아보니 별일이 아니다. 걱정할 것 없다'고 반응했다고 한다.

 

장면은 윤보선이 비서관들을 보내 쿠데타 진압을 저지시켰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장면은 윤보선 대통령이 비서관들을 1군 사령관 이한림에게 보내서 쿠데타 진압을 저지하도록 했다 는 것이다. '국군 통수권을 쥐고 있는 대통령의 태도가 이러한 것을 알고눈 쿠데타가 진압되리라는 희망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는게 장면의 주장이다.

 

5월 16일 5·16 군사 정변을 진압하러 온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학생혁명도 군사혁명도 똑같은 국민들이 일으킨 똑같은 혁명이다. 당신네 케네디 미국의 대통령장면 국무총리와 같은 가톨릭 신자라고 해서 학생혁명은 인정하고 군사혁명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윤보선이 5·16 군사 정변을 지지한다고 생각한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박정희, 장도영, 김종필 등을 진압할 생각을 포기했다.

 

1961년 5월 17일 낮 11시 두 사람은 쿠데타에 대한 대통령의 견해를 듣고자 했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윤보선에게서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대통령은 그의 견해가 매그루더 장군과 나의 견해와는 다르다고 말했다. 현정부에 대한 불만과 환멸은 광범위하게 퍼졌으며, 국민들은 더 이상 장면 내각의 약속을 믿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매그루더 미8군사령부 사령관은 미국 합참의장에게 비밀문서를 보냈다.

윤 대통령은 16일 오전 청와대를 방문한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에게 군사계엄 선포는 반대하지만 군사혁명을 무산시키는 어떠한 단호한 조치도 반대한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하오에 매그루더 미8군사령관과 마셜 그린 주한미대리대사와 3시간 가까이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윤 대통령은 장면 정권의 무능력과 부패상 등 급박한 현안과 직결되지 않은 문제를 거론하면서 거국내각 구성을 주장했다.

장면의 비서관이었던 박종률은 후일 그의 태도가 애매했다고 봤다. 박종률에 의하면 ‘윤 대통령이 쿠데타를 인정한 것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박종률에 의하면 당시 국방차관인 우희창으로부터 들은 말을 인용, 윤보선은 명백하게 쿠데타를 인정하고 진압을 반대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우희창 역시 매그루더 대장에게서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올 것이 왔구나'

접견실에서 박정희 일행을 만난 윤보선은 “올 것이 왔구나” 라는 말로 입을열었다. 혼자 하는 말이었지만 소리가 워낙 커 다른 사람들도 그 말을 들었다.

 

현석호는 대통령의 입에서는 듣기에 민망한 혹독한 말들이 거침없이 쏟아져나왔다. 요약을 하면 장면 총리는 진작에 물러났어야 했으며 민주당은 무능했다는 얘기였다.

 

현석호는 회고록에서 윤보선은 이 말에 이어 나라를 구하는 길은 이 길밖에 없었다 면서 장면 정부에 비난을 퍼붓고 박정희의 거사에 찬사를 보냈다고 했다.

나라를 구하는 길은 이 길밖에 없었습니다. 박 장군은 위대한 일을 했습니다.

군부에 의해 청와대로 온 현석호는 윤보선의 이 발언을 가리켜 ‘한마디 평생토록 잊지 못할 말을 했다’고 진술했다.

 

"올 것이 왔다"는 발언에 대하여 유원식도 같은 진술을 했다. 후에 유원식이 5·16 군사정변 직전에 대통령 윤보선과 만나 정변 계획에 대한 교감을 나누었으며 정변 소식을 들은 윤보선은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주장을 내놓아 논란이 일었다.

 

허정에 의하면 UN군이 작전권을 장악하고 있는 한국에서 군사혁명이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안도감도 있었으나 군사혁명은 성공해 가고 있었다. 매그루더 UN군 사령관의 원대 복귀 호소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허정의 증언에 의하면 그 무렵 매그루더 사령관과 주한미국 대리대사가 허정을 찾아갔다. 그들의 말로는 군사혁명의 저지를 위해 UN군 병력을 동원할 허가를 받으려고 혁명이 일어난 직후 대통령 윤보선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때 장면 총리는 은신 중이어서 윤 대통령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3시간 여에 걸쳐 병력 동원을 허가해주기를 간청했으나 윤 대통령은 끝내 허락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국헌 준수를 서약하고 대통령에 취임한 만큼, 지금 병력 동원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의무의 포기가 하닌가'하고 힐문 조차도 했다는 것이다.

 

"올 것이 왔구나"를 둘러싼 논쟁은 1980년대까지 계속되었고, 윤보선이 죽을 때까지 그의 활동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고,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반론

 

그의 비서관을 지냈던 김준하에 의하면 그는 5·16 군사 정변에 협력하지 않았다고 증언하였다. 김준하에 의하면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내통하거나 묵인한 일은 결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국군통수권이 없었던 윤 대통령은 마셜 그린 주한 미 대사와 카터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에게 미군을 동원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는 등 피를 흘리지 않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애썼다”고 덧붙였다. 김씨는“정치군인들의 치밀한 사전계획과 장면 정권의 무능과 분열 때문에 쿠데타 세력이 집권에 성공했다' 고 증언하였다

 

또 그는 일부 '혁신세력이 주도한 야간 데모 등 사회적 혼란, 물가 폭등과 경제 파탄,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의 태도 등이 쿠데타의 빌미가 됐다'는 것이다. 또한 그가 5·16 군사 정변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거나 군인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지 않았던 점도 있어 그를 협력자라 보기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

 

 

일화

대학시절 고고학을 택한 이유로 그는 고고학을 선택한 배경에 대해 그는 "인간으로서 내용을 충실히 하고 인간의 도리를 깨우쳐주는 학문"으로 순수과학을 할 생각이었으며, 그 가운데 고고학을 택했다고 한다. 양반가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던 윤보선과 장택상박정희가 자신의 가계와 가난한 가정 환경에 대한 열등감을 가진 것을 간파하고 이를 경멸하였다.

 

1961년 1월 1일 신정한국조폐공사 사장 선우종원세배 방문을 받았다. 그러나 세배를 받은 후 윤보선은 우표 두장을 가져와 도완을 문제삼았다. 소가 도완된 우표는 61년은 신축년으로 소의 해였고, 색실로 꽃버선이 도완된 우표를 들고 와, 소(丑)을 내세워 윤씨인 자신을 모독하고 버선을 인쇄해 보선이라는 이름을 놀리는 저의가 어디 있느냐며 항의하였다. 선우종원우표 샘플을 올리는 방법과 절차와 과정을 상세히 설명해야 했다.

 

1961년 자신의 비서관 김남의 동생 김상협의 결혼식이 있었다. 김상협조폐공사 직원이기도 했는데, 조폐공사 사장 선우종원으로부터 결혼식 참석 부탁을 받자 그는 '국무총리 참석하나요'라고 되물었다. 온다는 답변을 받자 그는 나는 안가겠소라고 서슴없이 대답했다. 선우종원은 저와 한직장에 근무하는 데다가 인촌 선생의 아들의 혼사인데 어떻게 그럴수 있느냐며 항의하여 가까스로 달래자 참석하였다.

 

1960년대 중반 윤보선은 유진산을 사쿠라 라고 공격했고 이는 유진산의 별명이 되었다. 이후 한국 정계에서 여당과의 타협론을 벌이는 정치인에게는 사쿠라 라는 별명이 붙여지는 시초가 되기도 했다.

 

윤보선은 풍수설을 맹신하였다. 윤보선이 1990년 사망했을 때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않고 충남 아산군 음봉면 동천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그는 자신이 죽어 묻힐 자리, 즉 신후지지를 미리 만들어놓고 즐겨 찾았다.

 

눈 질환과 호흡기 질환이 있던 윤보선은 안과이비인후과를 자주 다녔다. 그중 그는 당시 서울에 있던 정귀섭 안과·이비인후과 단골이었다.[201] 정귀섭 안과와 이비인후과는 윤보선 외에도 이승만, 그의 당숙 윤치호도 단골이기도 했다.

 

사망 직전까지 허정, 이갑성과 함께 3.1절과 광복절 기념식에 초대된 독립운동가 중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전직 대통령의 자격으로 초대되는 것이었으나 전직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그는 독립운동가 자격으로 초대될 수도 있었다.

 

 

가족 관계

 

윤보선의 당숙 좌옹 윤치호

 

그의 둘째딸은 그의 스승이자 독립운동가신규식의 장남과 결혼하여, 스승 신규식과는 사돈간이 된다. 또한 독립운동가 민필호, 신명호, 김준엽은 사위 신준호를 통해 인척관계를 형성한다. 음악가방송인 남궁연은 그의 동생 윤완선의 외손자였다.

  • 증조부: 윤취동(尹取東, 1798년 ~ 1863년)
  • 증조모: 고령신씨(高靈申氏, 증조부 윤취동의 본처
  • 증조모: 안동김씨(安東金氏,? - ?, 조부 윤영렬, 종조부 윤웅렬 형제의 생모)
    • 대고모: 해평윤씨(1835년 - 1920년) - 윤영렬 일대기, 윤상공 선정록의 저자
    • 대고모부: 이원시(李源始), 본관은 용인
      • 내종고모 : 용인이씨
      • 내종고모부 : 이정구(李鼎九), 본관은 우봉
    • 종조부: 윤웅렬(尹雄烈, 1840년 - 1911년)
  • 조부: 윤영렬(尹英烈, 1854년 4월 15일 - 1939년 11월 4일)
  • 조모: 청주한씨 한진숙(韓鎭淑, 1851년 ~ 1938년 2월 18일), 한말 전라도 관찰사경상도 관찰사, 육군 참장을 지낸 한진창(韓鎭昌)의 누이
    • 백부 : 윤치오(尹致旿, 호는 동암(東庵), 1869년 8월 5일 ~ 1949년 12월 2일)
      • 사촌 여동생: 윤시선 尹時善, 1898년 5월 30일 ~ ?), 화가, 1950년 납북됨
      • 사촌 매제: 민원식 (독립운동가)( ? - ?) - 대한제국의 문신 민영환의 6촌인 민영철의 셋째 아들, 독립운동가 우사 김규식의 보좌진
    • 삼촌 : 윤치성(尹致晟, 1875년 음력 3월 2일 - 1936년 양력 8월 11일)
    • 삼촌 : 윤치병(尹致昞, 1880년 음력 6월 4일 - 1940년 양력 1월 24일)
    • 삼촌 : 윤치명(尹致明, 1885년 음력 9월 - 1944년 양력 4월 21일)
    • 삼촌 : 윤치영(尹致瑛, 1898년 2월 10일 ~ 1996년 2월 9일)
      • 사촌 동생 : 윤기성
      • 사촌 동생 : 윤성선
      • 사촌 동생 : 윤인선(尹仁善, 1948년 ~ )
        • 5촌 조카 : 윤인구(尹寅求, 방송인, 1973년 ~ )
    • 고모: 윤활란(尹活蘭, 4남 3녀를 둠)
    • 고모: 윤노덕(尹老德, 1889년 6월 14일 - 1979년 11월 24일, 다른 이름은 윤정숙(尹貞淑), 정동교회 최초의 여성장로 역임.)
    • 고모부: 이병림(李丙琳), 사학자 이병도의 6촌 형, 1남 4녀
      • 고종사촌 : 이영희, 이화여자대학교 음과대학 교수
      • 고종사촌 : 이달희
      • 고종 매부 : 한상준, 제6대 한양대학교 총장
  • 부: 윤치소(尹致昭, 호는 동야(東野), 1871년 8월 25일 ~ 1944년 2월 20일)
  • 모: 이범숙 (李範淑, 호는 명사(明師), 본관은 전주, 1876년 ~ 1969년 6월 18일, 교회 권사이기도 했다.)
    • 남동생: 윤완선(尹浣善, 1901년 2월 18일 - 1970년 5월 23일)
    • 제수: 이순정(? - 1998년 7월 20일)
      • 조카딸: 윤연경(尹演慶, 이화여자대학교 음대 학장 역임)
      • 조카딸: 윤남경(尹男慶, 1931년 - 2008년 3월 19일)
      • 조카: 윤정구
      • 조카딸: 윤상경
      • 조카사위: 남궁식,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 교수
        • 외종손: 남궁연, 방송인 겸 음악가
        • 외종손: 남궁진
      • 조카: 윤혜구
    • 남동생: 윤원선(尹源善, 1910년 10월 27일 - 1971년 12월 16일)
    • 제수: 이진완(李辰琬, 1916년 - 1997년, 영선군 이준용의 서녀, 흥선대원군 증손녀)
      • 조카딸: 윤유명
      • 조카: 윤응구(1938년 - )
      • 조카: 윤덕구
      • 조카딸: 윤경자
      • 조카사위: 배재호
    • 남동생: 윤한선(尹漢善, 1912년 8월 21일 - 1972년 10월 14일)
    • 제수: 김정현(? - 2007년 8월 21일)
    • 남동생: 윤택선(尹澤善, 1914년 11월 20일 - 1998년 4월 6일)-서울 안동교회 장로 역임
    • 제수: 이기화(? - ?)
      • 조카 : 윤창구(, 1941년 12월 18일 ~ 1991년), 화학자
    • 남동생: 윤형선(尹瀅善, 1917년 4월 2일 - ?)
    • 제수: 이덕자
    • 제수: 변은영
      • 조카: 윤순구
    • 여동생: 윤예경(尹禮卿, 1905년 6월 1일 ~ 2001년) - 이능섭과 결혼
    • 여동생: 윤의경(尹義卿, 1912년 9월 28일 ~ ?) - 오진영과 결혼
      • 조카: 오태근(경제학 박사, 1934년 ~ 2010년 3월 29일)
    • 여동생: 윤계경(尹桂卿, 1918년 2월 13일 ~ 2011년 3월 22일))
    • 매제: 이재영(李宰寧, ? ~ 2006년 2월 19일), 역사학이병도의 조카, 이병묵(李炳默)의 아들
  • 아내: 여흥민씨(驪興 閔氏, 1894년 ~ 1937년)
    • 첫째 딸: 윤완구(尹琓求, 1913년 12월 31일 ~ 2007년 3월 26일, 남흥우의 아내)
    • 사위 : 남흥우(南興祐, 1913년 6월 7일 ~ )
      • 외손녀: 남혜경(南惠卿, 1938년 ~ , 이화여대 졸)
      • 외손녀사위: 강성욱(? - ?, 어학자, 고려대학교 불문학과 교수)
      • 외손녀: 남혜정(南惠貞)
      • 외손녀사위: 전봉수(전우구조사무소장)
      • 외손자 : 남기방(南基邦, 1941년 ~ , 린나이코리아 사원)
      • 외손자 며느리 : 최영진(서울대 농대 졸업)
      • 외손자 : 남기윤(南基潤, 1946년 ~ ,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법학박사, 광운대 교수)
      • 외손자 며느리 : 임영수(이화여대 졸업)
    • 둘째 딸 : 윤완희(尹完嬉) 화가. 신준호의 아내,
    • 둘째 사위 : 신준호(申俊浩, ? - ?), 독립운동가 신규식(申圭植, 1879~1922)의 장남
      • 외손자 : 신중수(申中秀, 1941년~), 독일 거주.
      • 외손자며느리 : 이의균(1943년 ~ )
      • 외손자 : 신흥수(申興秀, 1943년 ~ , 동원데어리푸드 직판부장)
      • 외손자며느리 : 양향숙(1950년 ~ )
      • 외손녀 : 신경수(申瓊秀, 1939년 ~ )
      • 외손녀사위 : 이동환(1938년 ~ , 미국 뉴저지에 거주)
      • 외손녀 : 신문수(申文秀, 1944년 ~ )
  • 아내: 공덕귀(孔德貴, 1911년 4월 21일 ~ 1997년 11월 24일, 권사)
    • 첫째 아들: 윤상구(尹商求, 1949년 ~ ) 기업인, 사회기관단체인, 건축자재 사업가.
    • 첫째 며느리: 양은선(梁恩仙, 1954년 ~ ,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 손녀: 윤영란
      • 손녀 사위: 문윤회
      • 손자: 윤일영
    • 둘째 아들: 윤동구(尹同求, 1952년 7월 12일 ~ )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
    • 둘째 며느리: 최영선(崔映仙)
  • 당숙 : 윤치호(尹致昊, 호는 좌옹(佐翁), 1864년 12월 26일 ~ 1945년 12월 6일, 한말의 개혁·계몽운동가)
    • 6촌 : 윤영선(尹永善, 호는 오당(梧堂), 1896년 12월 25일 - 1988년 2월 6일) 제3대 대한민국 농림부 장관
  • 당숙 : 윤치왕(尹致旺, 호는 남포(南圃), 1895년 2월 17일 ~ 1982년 12월 21일)
  • 22촌 손항 : 윤택영 (尹澤榮, 1876년 ~ 1835년), 순정효황후의 아버지
  • 22촌 손항 : 윤덕영 (尹德榮, 1873년 ~ 1940년 10월 18일)
  • 외할아버지 : 이재룡(李載龍, 중추원 의관 역임)
  • 장인 : 민영철 (閔泳喆, 1864 ~ 1912, 첫 부인 여흥민씨의 아버지, 사촌누나 윤시선의 시아버지이기도 하다.)
  • 장인 : 공도빈 (孔道彬, 공덕귀의 아버지)
  • 장모 : 방말선 (方末線, 공덕귀의 어머니)
  • 사돈 : 신규식(申圭植, 1880년 음력 1월 13일 ~ 1922년 양력 9월 25일)
  • 사돈 : 조정완
    • 사돈 : 신명호(申明浩, )
    • 사돈 : 민필호(閔弼鎬, 1898년 2월 7일 ~ 1963년 4월 14일, 독립운동가, 사위 신준호의 매부)

 

 

 

장면, 그는 누구인가?

 

장면(張勉, John Myeon Jang, 1899년 8월 28일 ~ 1966년 6월 4일)은 일제 강점기의 교육자·종교가·번역가·출판인·문인이자 대한민국의 종교가·외교관·교육자·정치인이다. 1956년 5월 15일부터 1960년 4월까지 대한민국제4대 부통령이었다. 1950년 11월 23일부터 1952년 4월 23일까지 제2대 대한민국 국무총리를, 1960년 8월 19일부터 1961년 5월 17일까지 내각책임제 상황에서  제7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에는 천주교 선교 사목 활동과 언론 활동, 용산신학교, 동성상업고등학교, 계성국민학교, 혜화유치원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광복 이후 정계에 투신하여 1946년 민주의원 의원,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 1948년 대한민국의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48년 12월 7일부터 12월 12일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제3차 UN 총회에 한국대표단 수석대표로 파견되어 국제사회에 대한민국 정부의 승인을 얻어냈다.

 

1948년 제3차 UN 총회 한국 대표단 수석대표와 1951년 10월 제6차 UN 총회 파견 수석대표로 다녀왔으며, 대통령 바티칸특사를 거쳐 제1대 주미 한국대사 등을 지내고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미국군과 UN군의 한국전 참전을 호소하여 성사시켰다. 1950년 8월과 9월 UN 안보리에서 ‘한국 전쟁은 내전이며 미국남한의 북침’이라는 소련 측의 주장을 논파하기도 하였다.

 

 

장면
張勉

국무총리 시절 장면
출생 1899년 8월 28일(1899-08-28)
대한제국 대한제국 한성부 서서 적선방 공조후동계 공후동(現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적선동)
사망 1966년 6월 4일 (66세)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사인 간장염, 당뇨병
거주지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국적 대한제국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대한민국 국적
미국 미국 영거주권(前)
별칭 초명은 장지태(張志兑)
아호는 운석(雲石)
세례명은 요한(Johan)
영문명은 John Myeon Jang·존 면(John Myeon)
일본식 이름은 다마오카 쓰토무(玉岡 勉)
학력 미국 뉴욕 맨해턴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법학박사
직업 교육자·종교가·출판인·공무원·외교관·정치가
종교 천주교
배우자 김옥윤
자녀 슬하 6남 3녀
차남 장진, 차녀 장의숙, 4남 장익, 5남 장순
부모 장기빈(부), 황루시아(모)
친척 동생 장발, 동생 장극, 누이동생 장정혜, 누이동생 장정온, 누이동생 장정량, 조부 장치응, 조모 박 구네곤다, 사돈 한창우, 사돈 친척 김철규 신부, 처질녀 김교임 수녀
서명
Chang Myon signature.jpg
웹사이트 운석 장면 박사 기념관

 

1946년 과도입법의원 의원 재직 중에는 국대안(국립대학교 설치안)을 발의하여 성사시켰고, 공창제 폐지를 주창하여 가결시켰다. 1948년 UN 총회대한민국의 승인을 요청하는 한국 대표단의 수석대표로 회의에 참석하여 국제사회에 대한민국 정부의 승인을 얻어냈고, 한국 전쟁 때는 UN과 국제사회에 대한민국을 도와줄 것을 호소하여 지원을 이끌어냈다. 호헌동지회의 조직과 민주당 결성에 참여하였다. 군사정권에 실각한 이후 1990년대부터 재평가 여론이 나타나고 있으며 1999년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장면은 청렴하고 깨끗한 정치가라는 평가와 무능하다는 비판이 공존하고 있다. 본관은 인동(仁同)으로 초명은 지태(志兑), 는 운석(雲石)이다. 종교는 천주교로서 세례명은 ‘요한’(John)이며, 따라서 장 요한으로도 불리고, 장면 스스로도 영문명은 존 면(John Myeon)이라 했다. 일제 강점기의 창씨개명은 ‘다마오카 쓰토무’(玉岡 勉)이다. 한성부 출신으로 그가 성장한 정치적 고향은 인천이었다.

 

 

연보

  • 1916년 5월 20일 서울 중림동 성당에서 김상집의 딸 김옥윤과 결혼
  • 1917년 수원고등농림학교 졸업
  • 1918년 4월 용산 천주교 소신학교 강사
  • 1919년 기독교청년회(YMCA) 영어학교 졸업
  • 1920년 미국 맨해튼 가톨릭대학 영문학과 입학
  • 위장 질환으로 1년 휴학
  • 1925년 미국 맨해튼 가톨릭대학 영문학과 졸업
  • 1925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교황청의 한국인 순교자 시복식 방문
  • 1925년 귀국하여 천주교 평양교구 설정 준비작업에 참여하며 메리놀 외방전교회 신부들의 한국어 강사로 활동
  • 1925년 평안남도 소재 메리놀 센터 학당(Marynoll Center House)의 한국어 어학교수로 부임
  • 1927년 평양교구 설정, 평신도 대표로 사목활동에 적극 참여
  • 1928년 평양천주교청년회 회장
  • 1931년 서울 동성상업학교 교사, 서무주임(실장)을 겸함
  • 1936년 박준호 교장의 별세로 서울 동성상업학교 교장에 취임
  • 1937년 4월 1일 혜화유치원장
  • 1939년 4월 계성보통소학교 교장을 겸임
  • 1939년 9월 20일 천주교서울교구 청년회연합회 회장에 피선
  • 194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영회에 참여
  • 1946년 2월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원
  • 1946년 10월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에 입후보, 당선
  •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에 입후보
  • 1948년 5월 30일 제헌국회의원 당선
  • 파리에서 열린 제3차 국제연합 총회(UN 총회)에 대한민국 대표단 단장으로 파견하여 대한민국 정부의 승인을 요청하여 성사시킴
  • 1948년 12월 바티칸비오 12세의 지원을 바탕으로 각국 대표단을 찾아다니며 대한민국 정부 승인, 설득 작업
  • 1949년 대통령 특사로 교황청을 방문
  • 1949년 초대 주미 대한민국 대사로 부임
  • 1950년 호주· 뉴질랜드·필리핀 파견 대통령 특사로 순방외교 활동
  • 1950년 5월 호주 방문까지 모두 마치고 미국으로 귀환
  • 1950년 6월 27일 미국 체류 중 북한의 남침 소식을 접하다.
  • 1950년 6·25전쟁 직후 미국과 UN에 한국의 자유를 지켜줄 것을 호소하여 파병을 성사시킴
  • 1951년 제2대 국무총리
  • 1951년 로마 교황청 표창 수상
  • 1952년 간장 질환으로 총리직에서 사직
  • 1952년 원내 자유당 인사들의 리더로 활동, 내각 책임제 개헌 후의 국무총리 추대파와 이승만을 대신할 제2대 대통령후보로 추대하는 파가 나타남
  • 1952년 발췌개헌안이 통과되고 추대 움직임 실패, 경향신문사 고문직에 임명
  • 1952년 조봉암의 신당 영입의사를 거부
  • 1952년 5월 부산정치 파동 때 미군의 도움으로 미군 병원으로 피신
  •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
  • 1955년 신익희, 곽상훈, 윤보선 등과 민주당 조직
  • 1955년 민주당 최고위원
  • 1956년 5월 부통령에 출마하여 러닝 메이트 신익희의 사망으로 고전을 치룸
  • 1956년 5월 부통령에 당선
  • 1956년 9월 시공관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권총 저격, 손목 관통상을 당했으나 경상에 그침
  • 1959년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에 피선
  • 1960년 3월 대통령 후보 조병옥의 러닝 메이트로 부통령에 입후보했지만 낙선
  • 1960년 4월 23일 부통령직 사임
  • 1960년 5월 제5대 민의원
  • 1960년 8월 18일 제7대 국무총리로 선출
  • 1961년 1월 1일 정치인 풍자의 자유를 허용하는 담화를 발표
  • 1961년 1월 국토건설단 창단
  • 1961년 5월 16일 5·16군사정변이 일어나자 피신
  • 1961년 5월 20일 총리직 사직
  • 1962년 이주당(二主黨)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
  • 1963년 재건 민주당에 참여,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
  • 1965년 간장염으로 성모병원에 입원
  • 1966년 5월 정정법 해제
  • 1966년 간장염으로 사망

 

 

 

장면 총리 가톨릭 성인 추대 운동

김수환 추기경은 생전 장면을 가톨릭 성인(聖人)으로 추대하는 운동을 주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했다. 동성상고 동문회의 한 관계자는 “추기경님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선생님은 성인(聖人) 반열에 오르셔야 할 분’이라며 장 전 총리에 대한 진실을 밝히려 애쓰셨는데 뜻을 이루지 못해 눈을 감으며 아쉬우셨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2006년 장면 전 총리 서거 40주년 미사를 장익 주교와 김수환 추기경이 공동으로 집전했다. 당시 김 추기경은 “장 전 총리는 성인의 지위에 오를 만한 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해 장 전 총리에 대한 각별한 마음을 나타냈다.

 

김 추기경은 과거 장 전 총리 탄생 100주년 기념미사를 집전하는 자리에서 “성인 추대를 교회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운석은 미국 유학시절 세계 가톨릭 내 신앙조직인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평신도로 가입한 데 이어 이 수도회를 국내에 소개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1990년대부터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는 운동을 추진했다. 1999년 8월에 김추기경은 강론을 통해 "장면 박사는 정치인으로나 신앙인으로 모범적이고 거룩한 분이었다"고 회고한 뒤 "교회 차원에서 시복(諡福:죽은 뒤에 복자품에 올리는 일) 혹은 시성(諡聖:성인품에 올리는 일)이 추진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그러나 성사시키지 못한다.

 

 

 

논란과 의혹

 

친일 논란

총리까지 역임한 장면이 창씨개명을 했고, 학교 다닐 때 신사참배도 하였지만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 이사직을 맡았던 경력 때문에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던 것은 일제강점기에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이 매월 첫째 주를 애국주일로 정해 ‘무운장구기원미사제’를 지냈으며 미사 후에는 시국에 대한 강론을 갖고 미사 후 단체로 신궁 또는 신사참배를 갖도록 독려했다는 데에 있었다.

 

또한 1999년 정운현의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에서 친일파로 지목된 이래, 2004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파 708인에 선정되었다. 1940년 7월 동대문경찰서에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서 국방 헌금을 냈고 1941년 8월 7일 종교계의 총동원을 논의하는 종교계 시국간담회에 노기남과 함께 천주교 대표로 참석했다.

 

1943년 6월 16일 동성상업학교 교유와 생도들로부터 모금한 항공기 구입비 130여 원을 동대문경찰서에 냈다. 1944년 9월 국민동원총진회 중앙위원을 맡았다 는 것이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로마 가톨릭 부문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2009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진상규명위)에서는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분류하지 않았다.

 

한편 추기경 김수환 자신도 학도병으로 신사참배는 물론이고 창씨개명까지 했으면서 “장면은 단순히 신자 대표자로 활동한 것”이라고 적극 옹호하였는데 2005년 10월 21일 동아일보와의 기자회견에서 장면, 노기남, 김성수 등이 친일파로 선정되자 김수환은 이를 옹호하고 나섰던 것, 당시 김수환은 기자회견에서 장면, 노기남, 김성수를 변호하였는데 그는 일부 민간단체에서 친일파로 선정한 것에 대해 “노기남 대주교는 천주교 대표로 되고, 신자 대표로는 장면 박사가 되어 본인 의지와는 상관없음”을 해명하고, “단순히 친일이라고 판단을 내리는 것은 너무나 가벼운 행동이며 어른들에 대한 모독이다. 저(김수환) 또한 학도병을 갔다 왔고, 창씨개명과 학교 다닐 때 신사참배도 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했을 것”이라며 객관성이 결여된 위치에서 친일파 선정 기준에 의문을 제기하고 옹호하였다.

 

 

친일 의혹

1960년 8월 19일 국회에서 장면의 총리 지명 동의안 표결이 있기 직전, 김두한이 장면의 친일경력을 문제삼기도 했다. 김두한은 장면에게 역사적인 귀한 표를 던져서는 안 된다는 내용과 장면의 창씨명을 적은 전단을 뿌리고, 만일 장면을 총리로 뽑는다면 여의도 의사당을 불살라 버리겠다고 외쳤다.

 

한편 김수환은 그가 조선총독부로부터 학생들을 구하기 위해 오버한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김 추기경이 졸업반인 5학년 때의 일화가 전해진다. 일제에 대한 울분을 참지 못했던 학생 김수환은 ‘수신(修身) 시간’에 ‘황국신민으로서 소감을 쓰라’는 시험문제를 받았다. “황국신민이 아니어서 소감이 없다.”라고 답했다고 밝히고 있다.”

 

김수환에 의하면 장면의 배려로 오히려 무사했다 한다. '결국 교장이던 장 전 총리에게 불려가 뺨을 맞았다. 장 전 총리가 김수환 학생을 호출해 일부러 꾸짖은 것은 ‘이대로 가다가는 큰 재목 하나를 잃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수신 담당 선생에게 선처를 부탁하기 위해서도 절차가 필요하기도 했다.' 김수환은 퇴학을 각오했는데 오히려 도쿄의 가톨릭계 대학인 조치(上智)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김 추기경이 대구교구 장학생으로 일본 유학을 떠난 것도 장 전 총리의 추천 덕택이었다하여 개인적인 감정이 엿보인다.

 

 

반론

장면이 조선총독부에 협력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 일제 치하 천주교가 선교활동의 자유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일제의 지배를 인정하는 동시에 신자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반대했던 바, 신앙심이 깊은 장면으로선 그 노선을 따랐을 뿐 장면을 친일파로 보긴 어렵다는 시각이 있다.

 

2005년 10월 21일 김수환 추기경은 '일제는 태평양전쟁 말기 우리나라를 국민총동원체제로 끌고 가면서 여러 단체를 만들어 각 단체의 기존 책임자를 대표로 내세웠다. 그때 장면 박사는 대표적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신자단체의 대표가 됐는데 단순히 이를 두고 친일로 매도하는 것은 너무나 가벼운 일이다.'고 반박했다. 김 추기경은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져야 하지 않느냐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성경 말씀대로 ‘너희들 중 죄 없는 사람이 돌을 던져라’라는 말을 해 주고 싶다”면서 “당신들 아버지가 창씨개명을 안했거나 학교 다니면서 신사참배 안한 사람 있거든 이분들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덧붙였다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 후보 명단에 장 전 총리를 올렸다. 이때 김수환은 “각 종교단체 대표를 내세웠던 일제 말기 정책에 따라 대표적 가톨릭 신자였던 장 전 총리는 어쩔 수 없이 대표가 됐는데 이를 두고 친일로 매도하는 것은 너무 가볍다”이라며 강한 유감을 표시했었다. 김 추기경은 “선생님(장 전 총리)이 나를 살리시려고 일본인 선생들 앞에서 ‘오버’를 하신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한 동성상고 동문회 관계자는 “추기경님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선생님은 성인(聖人) 반열에 오르셔야 할 분’이라며 장 전 총리에 대한 진실을 밝히려 애쓰셨는데 뜻을 이루지 못해 눈을 감으며 아쉬우셨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언론과의 갈등

민족일보2월 8일에 체결된 한미경제원조협정2월 28일 국회에 통과되기까지 7회에 걸쳐 사설을 통해 집중타를 가하였다. 비판이 격렬하자 장면은 민족일보가 정권을 무너뜨린다고 생각했다. 장면의 공보 비서였던 송원영은 회고록에서 민족일보는 창간 직후부터 계속 도각(倒閣) 공세를 폈다고 회고했다.

 

1961년 2월국무원 사무처에서 장면 정권에 대한 비난을 계속하던 민족일보에 대한 인쇄중단을 지시했다. 이는 연일 장면 정부를 비난하는 논설을 내보내자 공보 비서 송원영을 보내서 기사를 빼달라고 사정하기도 했으나 호응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민족일보는 곧 제2공화국의 언론 탄압이라며 다시 공세를 퍼부었다.

 

한편 측근이자 사돈인 경향신문한창우 등은 그에게 인사청탁을 했으나 그는 인사청탁을 거절하였다. 비서관이었던 박종률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한창우 사장은 장면 총리에 대해 심기가 불편했지요. 주일공사 등에 대한 인선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불평도 많이 하고 그랬지요. 당시 경향신문이 장면 정권에 대해서도 혹독하게 비판했어요. 사돈간 치고는 너무 심하다 할 정도로 말입니다”라고 회고했다.

 

 

4.19 관련자에 대한 미온적인 처벌 문제

4.19 의거3.15 부정선거 당시 학생 시위 진압자에 대한 미온적인 처벌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가 자유당 관련자 처벌에 미온적이었던 배경에는 미국의 요청도 존재하였다.

 

미국은 허정 과도정부 시절부터 총리 허정민주당 최고 대표위원인 장면에게 보낸 서한에서 "한국의 4월 민주혁명은 계급혁명이 아니며, 계급혁명이 되어서도 안 된다. 이는 비민주적인 이승만 독재정권을 타도하는 데 있었다. (중략)..... 미국의 원조가 사실상 한국 경제의 동맥 역할을 하고 있으니, 설사 부정축재자들이 이 정권 하에서 원조자금, 세금포탈, 부정 금융대부, 그리고 여타 수단과 집권당에 아부로 인한 이권 취득으로 치부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이의 국고환원, 범칙금에 의한 부정재산 회수가, 쿠바카스트로 정권이 사유 개인재산을 몰수한 것과 같은 행위로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장면은 당초 정치보복이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며 자유당계 인사들에 대한 처벌에는 반대하였다. 다만 부정선거 관련자들 선에서 처리하려 하였다.

 

 

대통령 취임 음모론

장택상은 장면이 비밀리에 사람들과 손을 써서 대통령에 취임하려고 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장택상에 의하면 1952년 UN총회에 같이 갔을 때 비밀리에 사람들과 연락해서 대통령이 되려고 계략을 썼다는 것이다. 장택상에 의하면 허정에게서 장면이 대통령이 되려고 음모를 꾸몄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가 파리 제6차 UN총회에서 귀국한 직후 허정은 침울한 표정으로 "내 방으로 갑시다. 가서 들으면 잘 알 것이오."라고 대답하면저 장택상을 자신의 집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한다. 허정에 의하면 "장면 씨가 국회의원 김모, 김모와 몇몇 사람을 통하여 간접 선거에 자기가 대통령으로 입후보할 것을 논의하였고 또 파리 체류 중에도 연락 부절(不絶)로 끊임없는 모의를 하였다."는 것이다. 허정이 전한 말 외에도 장택상은 파리 제6차 UN총회 직후 장면의 태도가 수상했다고 주장하였다.

 

택상에 의하면 내가 제6차 유엔 총회에서 임무를 마치고 본국을 향해 떠나올 때 장면 씨는 그 때까지 병석에 있었다. 그리고 장면은 그에게 "나는 이곳에서 스위스 전문의를 만나 몇 개월 간 치료를 받고 본국으로 돌아갈 터이니 장 부의장은 먼저 떠나가라."고 말하여 우리는 헤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로스엔젤레스로 온다는 말을 들으니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불과 수 일이 지난 저녁 나절 장면 총리가 탄 비행기는 로스엔젤레스의 비행장에 도착하였다 한다.

 

그런데 장택상에 의하면 이때 장면은 본국으로 같이 귀국하자고 했다가 다시 말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장면 총리는 LA에서 나를 만나자 즉시 하는 말이 "나는 스위스로 가기로 여정을 작정하였으나 본국으로 돌아가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어서 예정을 바꾸어 이 곳으로 오게 된 것"이라고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는 것이다.

 

택상은 장면이 대통령 자리에 뜻을 두고 있었다고 판단했다. 그는 '나는 장면 총리와 파리에서 한 호텔에 있으면서도 좀 이상스러운 눈치는 보았었지만 그가 대통령을 꿈꾸고 있는 줄은 전연 눈치채지 못하였다. 정면 씨가 총리를 퇴직한 후에는 의당 있을 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현직으로 있으면서 자기 상사의 앉은 자리를 파헤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고, 더구나 일국의 재상으로서 있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있어서도 안될 일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5·16 군사 정변 관련

장면은 그의 총리 재임기간 동안 10여 차례나 쿠테타 정보를 보고받거나 입수했다. 근거 없는 설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정보였다. 장면은 그때마다 미국 타령을 했다. 그는 매번 “미군이 있는데 어떻게 쿠데타를 하겠소”라는 말로 대응했다. 쿠데타를 일으킬 세력으로 지목된 사람은 이범석 계열, 박정희 계열, 그 외에 군부 지도자들이 지목되고 있었다.

 

1961년 봄 장면은 족청계 거사설을 가지고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을 불러 사실확인을 했다. 그러나 장도영은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계속 조사하겠다고만 대답했다.

 

1960년 12월 김도연으로부터 정변 음모를 전달받은 윤보선은 장면에게 정변 준비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장면은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에게 알아보니 별일이 아니랍니다. 걱정할 것 없다”라고 대응하였다. 장면 내각은 ‘4·19 폭동설’에 대비해 군에 대해 폭동진압훈련을 지시했다. 소장 박정희 등을 주동으로 하는 군부 세력은 만일에 폭동이 발생하면 그것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군을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불행중 다행으로 4·19 당일 폭동이나 데모가 없자 정변계획은 지하로 잠적할 수밖에 없었다.

 

5월 16일 정변 소식을 듣고 장면 총리는 일가족을 이끌고 주한 미국대사관으로 피신하였으나 주미대사관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장면 총리는 가족들을 피신시킨 뒤 자신은 카르멜 수녀원으로 피신하였다. 장면의 처 김옥윤은 장면 사후, 미국 대사관이 장면의 신분을 알고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고 증언하였다. 카르멜 수녀원에 은신한 이후 3일간 연락이 두절되었다가 5월 18일 대통령 윤보선이 군사 정변을 추인했음을 확인하자, 장면은 수녀원을 나와 내각총사퇴 의사를 발표한다. 당시 박정희의 배후를 최경록 육군참모총장과 외무장관 정일형으로 의심하기도 했던 그는 총리의 행방을 묻는 외무장관 정일형의 전화 소식을 듣고도 행방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는 수시로 족청계 쿠테타설, 박정희 쿠데타설 등의 소식을 접하였다. 그러나 군부는 미온적으로 대응하였고 그 역시 쿠테타 모의설을 접하였으나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무능력이 아니라는 설

장면은 자신이 무능력했다는 주장에 대해 내각 출범 후 19일째 되는 날부터 쿠데타를 기도했는데 무능할 기회를 주기라도 했느냐고 반박하였다.

 

민의원 김영구는 "사실 억업됐던 자유를 풀어주니까 여러가지 반응이 나왔습니다. 방종으로 흘렀다고나 할까요.이를 극복하지 못해 군부세력이 틈을 타 쿠데타를 일으키는 소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하긴 장면정부가 무능해서 쿠데타가일어난 것만도 아니지요.군부세력은 이승만정부 때부터 쿠데타를 계획해왔으니까요."라고 증언하였다. 그에 의하면 군인들은 이미 이승만 정권 때부터 쿠데타를 기도했다는 것이다.

 

 

흥사단 관련설

서북 출신으로 구성된 흥사단계열의 인물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흥사단의 핵심 인물들과 같은 고향이었으나 그는 흥사단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국무총리와 원내 자유당 시절부터 원내 자유당 외에 흥사단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이후 그는 흥사단 계열로 분류되었고, 민주당 신파 계열에서 조차 그를 흥사단계로 보았으나 본인은 이를 부인하였다. “세간에서는 나를 신파에서도 흥사단(興士團) 계열이라고 보는 이가 있었다. 이는 전혀 낭설이다. 나는 흥사단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흥사단에 가입한 일도 없고 흥사단과 연관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흥사단 계열에서 나를 지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내가 흥사단 계열이라는 지목을 받을 이유는 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흥사단에서 가입 요청이 들어오기도 했지만 그는 가입을 거절했다.

 

 

 

1공화국 당시 대선출마, 내각제 개헌 의혹

 

이승만 측근들의 주장

이승만의 측근들은 그가 2대 국무총리 재직 시부터 이승만 축출 모의에 적극 개입했다고 비판했다. 윤치영은 장면이 이승만의 환국을 끝내 막아버렸다고 했다. 이승만의 측근인 윤치영은 그가 이승만 박사를 세 번이나 제거하려 했다고 비판했다. “리박사 제거 음모를 꾸민 것은 휴전 반대와 반공포로 석방 때부터 두차례나 되고, 4.19를 빙자해서 끝내는 세 번째에 이승만 제거를 성공을 시켰다”며 그를 비판하였다. 윤치영은 그가 내심 대통령이 될 야심을 품고 있었다고 확신하였다.

 

장택상은 자신이 허정으로부터 장면이 대통령 출마를 시도했다는 증언을 들었다고 하였다. 허정으로부터 장면이 국회의원 김모 등과 몇사람을 통하여 간접선거에 자기가 대통령으로 입후보할 것을 논의하였고, 또 파리 체류 중에도 연락 부절로 끊임없는 모의를 하였다는 것이다 장택상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파리 유엔 총회때 장면과 한 호텔에 있으면서도 이상한 눈치를 봤었지만 대통령을 꿈꾸고 있는 줄은 전연 눈치채지 못했다고 하였다. 장택상은 장면이 대통령직에 야심이 있었는지 모른다고 의심하였다. 장택상은 “장면이 총리에서 퇴직한 후에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겠지만 현직으로 있으면서 자기 상사의 앉은 자리를 파헤친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고, 더구나 일국의 재상으로서 있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 있어서는 안될 일”이라고 비판하였다.

 

이승만의 비서를 지낸 박용만은 장면이 이승만 밑에서 국무총리직에 있을 때부터 야당 의원들과 서로 충분히 통하고 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고 주장했다. 박용만에 의하면 개헌공작이 구체화되괴 실현단계에 있던 1952년 4월 20일 장면이 이박사에게 국무총리 사표를 제출하였다. 장면이 국무총리직을 사임한 그때는 이미 개헌공작은 다 되어 있었으며 법적인 절차만 거치면 개헌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도록 충분한수를 확보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박용만은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서 임기가 끝나는 해인 이때 ‘내각책임제 개헌이 되어 자신이 거세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고 하며 자신을 거세하고 실질적인 실권자가 될 국무총리 자리에 자기가 이제까지 제일 신임하고 사랑했던 장박사가 된다고 하는 사실 앞에서 더욱더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이박사는 가장 신임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가장 심하게 배신을 당했다는 생각을 가졌었다고'주장했다. 박용만은 “만약 전쟁중이었던 그 때에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통과되고 장박사가 국무총리가 되어 국정을 맡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고 의혹을 제기하였다. “스트롱 맨 이박사같이 평화선을 선포하고, 세계 여론과 압력을 일축해서 반공포로를 석방하고 북진통일을 끝까지 고집하며 휴전협정을 반대하고, 미국을 위협(?)해서 전후복구와 경제재건에 많은 원조를 받아 왔었을까? 이런 실없는 생각을 해보면서 나는 4․19 전후 장면 정권 때를 상기해 보기도 했다. 장면 정권 때는 또 그만 두고라도, 5·16 군사 쿠테타 직후 미국 정부측과 유엔군 총사령관이 며칠을 두고 국무총리 장박사를 찾았건만 겁에 질린 장총리가 여수도원에 숨어 있다가 며칠 후에 겨우 얼굴을 내밀고 정권을 넘기겠다고 선언하던 그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면 입맛이 쓰다”는 것이다.

 

 

장면의 반론

부산정치 파동 당시 병원선 피신 주장에 대해 미국 육군병원에 입원하여 4개월간 치료를 받았던 장면은 병원선엔 가 본 일이 없다 고 항변하였다. 장면에 의하면 부산 정치 파동 당시 신병으로 미군 병원에 입원한 것이며 병원선에 피신한 일은 없다는 것이다.

 

장면은 “후일, 서독 병원으로 사용한 부산에 있는 미국 육군병원에서 4개월간 치료를 받았다. 외부와는 일체 연락이 없었고 외부인의 출입도 금했다. 이것을 병원선에 피신하여 음모라도 꾸미고 있던 것처럼 억측을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병원선에 숨어 사람들을 시켜, 그때 대통령에 또 나서는 이 박사의 낙선 운동을 계획했다니 언어 도단이다” 라고 억울함을 주장하였다. 한편 오위영은 자신과 곽상훈(郭尙勳), 권중돈(權仲敦), 서범석(徐範錫) 제씨와 함께 수차에 걸쳐 은밀히 선거 전략을 추진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정치 파동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고 회고하기도 했다.

 

 

다른 야당 인사의 증언

한편 장면 본인의 의사와는 관련없이 곽상훈 등 야당 의원들은 장면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 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곽상훈에 의하면 “그 무렵에 오위영 씨 댁에 모여 차기 대통령 선거에는 고집 불통이요, 심술쟁이인 이 박사를 몰아내고 운석을 대통령으로 앉힐 계획을 진행시켰다. 그 당시의 헌법에 정‧부통령 선거는 직선제가 아니라, 국회에서 얼마든지 이 박사를 몰아낼 수 있었다. 우리는 압도적인 사전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나는 당시의 국무 총리인 장 모씨에게 우리의 취지를 밝히고 도장을 찍도록 권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도장을 찍어 주지 않았다” 는 것이다.

 

곽상훈에 의하면 내각책임제로 바꾸고 장면을 그 내각책임제 하의 국무총리로 추대할 계획이었다 한다. '그날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 박사에게 너무나 가혹하게 하는 것 같았다. 당시에 그는 비록 실정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과거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한때는 사형 직전에 구사 일생으로 탈옥한 일도 있지 않는가? 그리고 지금 전시인데 갑자기 내각 책임제로 개헌하고, 또 이 박사까지 몰아내는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해치우기란 용이한 일이 아닐 것 같았다.'는 것이다. 이어 곽상훈은 '이 박사를 실권 없는 상징적인 대통령 자리에 그냥 둔 채, 내각 책임제로 개헌해서 운석을 중심으로 한 인물 본위로 잘 다스리면 국가 장래를 위해 좋을 것이란 나대로의 결론을 내려, 그 이야기를 했다가 젊은 과격파들에게 묵살당하고 말았다. 걱정은 됐지만 대의에 따라야 하겠기에, 다시 장 모씨를 만나러 그의 국무 총리실로 갔더니, 신임 이 모 장관이 이미 와서 무엇인가 비밀히 숙의 중이었다. 나는 이 박사의 참모들에게 “손 맞게 일들 잘하시오. 성사하는 날 내가 국회에서 잘 알아서 할 테니…” 하고, 혼란한 정국을 바로잡고 참신하게 일하자는 뜻에서 한마디 넌지시 했다.'고 하였다.

 

 

국립묘지 이장 논란

1999년 6월 4일 장면 총리 서거 33주년 기념일에 정치인 박지원은 김수환 추기경에게 취임인사차 예방하고 김수환 추기경에게 “장면 전 총리의 포천묘소를 국립묘지로 이장할 것을 제의하면서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여론의 반발과 무응답으로 장면의 국립묘지 이장건은 무산되고 말았다.

 

 

사상과 신념

그는 총리가 되고서도 어머니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기도 하는 등 복종이 몸에 밴 인물이었다.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견해

장면은 공산주의사회주의를 구분해서 판단했다. 사회주의 사상은 부분적으로는 수용해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공산주의에는 부정적이었다. 1961년 4월 6일의 신문 주간 연설에서 그는 합법적인 사회주의는 보장해야 된다고 했다.

 

"사회주의가 공산주의와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공산주의는 폭력을 정권 탈취의 수단으로 삼는 데 반해, 사회주의는 비폭력 의회주의를 통해 정권을 잡는 것을 기도하는데 있다. 는 것이다. 그런 한에 있어서 사회주의는 자유 민주주의와 똑같이 우리 나라에서 법률의 보호를 받으며 정당 활동을 할 권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의 이익에도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다고 확신 한다"는 것이다.

 

1961년 3월의 공개 담화에서는 공산주의 진영에게 기왕의 파괴적 태도를 청산하고 UN 결의의 모든 조건을 성실하게 이행 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본질적으로 공산주의사회주의는 평등이라는 이름하에 인간의 자유와 개성을 억압하는 사상이라고 봤다. 특히 인간의 존재를 유물론과 변증법, 무신론으로 해석하는 것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봤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통해 극복될수 있다고 내다봤다.

 

 

언론의 자유 보장

장면은 기자회견을 주 1회로 정례화했다. 국무총리실 공보비서관 송원영에 따르면, 장면의 주례 기자회견은 20여 평 되는 작은 방에서 열렸기 때문에 기자들이 내뿜는 담배연기가 장면의 얼굴에 사정없이 밀려오기도 했다. 이를 보다못한 비서관들이 기자들에게 아버지도 없느냐고 따로 불러서 주의를 주기도 했다. 그런데 장면은 흡연은 개인의 취향인데 그것을 왜 그대가 혼내느냐며 오히려 비서관들을 책망하였다.

 

1961년 2월 4일 장면은 반도호텔에서 열린 관훈클럽 창립 4주년 기념모임에 초청받아 ‘언론의 자유와 그 책임’을 주제로 강연한다. 장면은 “약간 과장해서 말하면”이라고 전제한 뒤 “북조선 괴뢰의 앞잡이들이 ‘조선인민보’나 ‘해방일보’를 발행하겠다고 등록신청을 해도 막을 도리가 없을 만큼, 완전한 언론출판의 자유가 허용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무책임하고’,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며’, ‘독선적인’ 언론이 횡행하는 현실을 우려했다. 장면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모든 압제에 반대해야 하는 것과 같이, 자유가 자유 그 자체를 파괴하도록 방임해서도 안 된다”는 말로 연설을 끝맺었다. 무절제한 언론에 대한 이 경고를 관훈클럽은 훗날 발간한 ‘40년사’에서“언론에 경종을 울리는 진지하고도 의미심장한 내용이었다”고 평가했다.

 

가끔 '대통령 유시'나 발표하고 기자회견은 1년에 한 두차례 하는데 그쳤던 이승만과는 달리 기자회견을 매주 한차례 정례화했다.그럴 때면 전 각료를 동원하다시피해 갖가지 질문에 답했다. 또, KBS라디오를 통해 ‘주례 국정보고’도 방송했다. 매주 토요일 오후 7시 30분에 시작한 이 방송에서 장면은 민주당 정부의 방침을 국민들에게 설득조로 이야기했다. 장면은 오히려 대화와 설득을 통하여 국정을 운영하려 하였고, 한편으로는 언론을 통한 홍보를 적극 이용하려 하였다.

 

교육, 신앙구국론

장면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악한 존재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인간을 올바른 길로 계도하고 이끌거나, 인간의 본성을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은 교육과 신앙의 힘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는 신앙과 교육이 낙후된 조선을 개화시킬수 있는 길이라 확신하였다. 미국 유학 중 그는 '국내에서 우리가 민족에 이바지하는 길은 민간 교육 사업이 더욱 효과적이며 첩경이라는 신념을 가지게 되고, 민족 도덕을 앙양시키기 위해서는 종교적 신앙에 깊이 뿌리를 박아야겠다고 깨닫게 되었다.' 그는 나라가 낙후된 것은 배우지 못한 탓이라 보고 교육을 통해 깨닭음을 주어야 하는 것이며, 신앙을 통해 미신을 버리고 경건함과 도덕의 길로 사람을을 인도해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전체주의에 대한 거부

장면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나치즘, 파시즘, 페미니즘 등을 극도로 혐오하였다. 장면은 이들 사상이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침해하고 파괴하는 악질적인 사상으로 규정하였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병립할 수 없다는 점과 나치즘과 히틀러, 파시즘,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심한 혐오감을 드러냈다. 그는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자유주의이며 어떠한 형태의 전체주의도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강연과 계몽 연설을 통해 장면은 민주주의 국가라면 표현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보장해야 되는 바, 전체주의적인 사상을 용납할 수는 있을지라도 공산주의, 사회주의, 나치즘, 파시즘, 페미니즘과 같은 사상이 사회 주류 사상이 되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막아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는 이러한 사상들이 그리스도교를 극도로 혐오하거나 부정하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봤다. 장면은 개신교에 대해서는 같은 형제이므로 포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전체주의적인 사상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반감과 거부감을 드러냈다.

 

 

소급입법 적용 반대

과거의 죄악에 대한 소급입법 적용을 반대하였다. 4.19 혁명 당시 사망한 사망자의 유가족들은 관련자 처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장면은 소급입법을 반대를 반대했다. 소급입법안 적용은 민주주의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며, 자칫 정치보복의 논리와 연좌제로 흘러갈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의 소급입법 반대 주장은 끝내 묵살당했지만, 후일 대통령 김대중은 그의 소급입법안 적용에 반대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장면은 소급입법은 정치보복을 위한 선례를 남길 뿐이라며 반대하였다. 1960년 10월 7일부터 시작된 3.15 부정선거 관련자 재판과 10월 8일 석방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었다. 장면은 10월 8일 재판 결과에 대해 "그것이 법조문에 의한 공정한 판결이었는지는 모르나 국민 감정에 미치는 영향도 참작했어야" 했다면서 형량이 너무 가볍다고 크게 화를 냈다.그러나 그는 소급입법에는 반대했다. 장면은 "끝내 보복을 위한 소급입법을 고집한다면 스스로 당을 떠날지도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소급 입법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민의원 의장과 수습 위원들이 데모대 대표들에게 언질을 준 바도 있고, 국민적 여론이 고조되어 다시 입법에 착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전화로나 혹은 직접 자유당의 숙청 혹은 정치적 보복 을 강요했다. 그러나 장면은 서명을 거부했고 소급입법안은 결국 민의원참의원에서 결정하게 되었다. 장면은 직접 민의원 회의와 참의원 회의에 나가서 소급입법은 안되며 과거의 헌법 부정과 정치보복의 악순환을 불러올 뿐이라며 감정적인 정치보복의 선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호소하였다.

 

장면의 단호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세는 개헌에 의한 특별법 제정이었다. 장면 정부는 수동적인 입장에서, 장면 개인은 피동적 입장에서 '견딜 수 없는 고역'을 겪는 사이 소급입법은 통과 되었다.장면의 결사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급입법안은 민의원 233명 중 찬성 191, 반대 1, 기권 2, 무효표 9, 참의원에서는 찬성 44, 반대 3, 무효 3, 불참 6으로 국회를 통과하고 만다.

 

 

자유민주주의관

그는 항상 자유를 강조하였다. 그는 늘 범죄행위와 반역행위 이외에는 어떠한 형태의 자유든 존중되어야 한다는 의사를 피력하고 다녔다. 이는 국가나 정부가 침해할 수도 없고 침해해서도 안되는 것이 국민의 자유 라는 것이다.

 

그는 국민 스스로가 직접 자유의 소중함을 느끼고 지켜나가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론과 학설로 배운 자유는 혼란을 일으키지만 경험으로 체득한 자유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단단한 초석이 되는 것이다. 자유가 베푼 혼란과 부작용에 스스로 혐오를 느낄 때 진실한 자유를 얻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1960년 3월대구 유세문에서도 정치결사의 자유와 범죄행위와 반역 이외에는 어떠한형태의 자유를 누려야 된다 등의 자유를 연설문에서 유독 강조했는데, 그의 이러한 평소 소신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유와 방종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조광은 "장면 박사는 이 따에 단군 이래 최초로 민주주의라는 신화를 역사적 현실로 바꿔놓은 인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유당 독재체제 아래 위축됐던 각 이익집단과 사회단체들이 분출해내는 욕구를 권위주의적인 방법으로 억누르지 않았습니다. 대화라든지 협력을 통해 자율적으로 해결하려는 방법을 취했습니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공개채용제도 도입

1960년 8월 제2대 국무총리 취임 직후 그는 공개채용 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리하여 각종 인사 채용때 공개 경쟁 채용의 원칙이 도입되었다. 5대 민의원 김영구에 의하면 '공개채용에는 사심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입학시험 보듯 한 거니까요.그때 뽑힌 사람들이 나중에 거의 전부 장·차관을 했습니다.유능한 사람을 시험 쳐서 뽑았으니까 그대로 키우니 인재가 된 거예요.'라고 진술하였다.

 

이를 두고 고려대 한국사학과교수 조광은 '그 청렴성은 정권에서 담보됐습니다.공채제도 하나만 예를 들어도 그렇습니다.이는 공정성과 효율성을 전제해야 시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검찰, 경찰 중앙수사부 신설론

2공화국 당시 정보력 부재에 견디다 못한 측근들이 정권 안정을 위해 군검경 세 기관의 합동의 특별기구를 만들자고 건의하였지만, 장면은 "자유당 때의 김창룡 특무대장이나 김종원이를 만들 수 없다."며 한사코 반대했다. 그러나 장면 총리는 일찍부터 경찰이나 검찰에 특별 수사 기관을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960년 9월 23일의 시정 연설에서 그는 '경찰 기구의 개편과 함께 대검찰청 안에 중앙 수사국을 발족시켜 각종 정보기관을 연결 조정하는 한편, 과학적인 수사 방법으로 공산 괴뢰 무장 간첩의 남침 방지와 색출은 물론 범죄 수사의 완벽을 기하려 한다. 며 특별 수사 기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한편 3월 그는 자유주의에서 한발 후퇴, 깡패와 혁신세력 소탕을 추진한다. 3월 초부터 장면은 강력한 정치를 하기 위해 경찰을 통해 혁신분자와 깡패 리스트를 작성, 5월 19일 국가비상사태 비슷한 것을 선포, 혁신계와 깡패들을 일제 검거한다는 계획 아래 그 리스트를 작성해 놓고 D데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5월 16일의 5.16 군사정변으로 무산되고 만다.

 

그는 언제든 사회를 위협할만한 세력이 등장한다면 엄히 다뤄야 된다는 의사를 드러내기도 했다. '사회 질서가 지나치게 문란해져서 국가 안녕을 유지할 수 없는 단계에까지 이른다면 그때 가서는 단호한 조처를 취할 준비와 계획을 별도로 세워야 된다 는 것이었다. 이를 두고 혁신세력 및 보수세력은 절대적인 자유를 보장한다면서 권력기관을 통해 통제하려 든다며 비아냥을 가하기도 했다.

 

 

경제 정책

경제개발 계획을 수립해 나갔다. 경제개발 정책을 수립하여 식량 증산과 장기불황으로 발생한 실직자, 고등학교 졸업, 대학 졸업 후 미취직자들의 구제를 위한 국토 건설 개발을 추진하려고 하였다. 또한 미취직 대학생들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국토개발사업을 추진, 국토의 건설을 위해 국토건설본부를 조직하고 스스로 본부장에 취임하여 지도하였으며, 청년 실직자 및 미취직 고졸, 대학 졸업생들을 기간요원으로 채용하여 일자리를 창출하고 장준하, 김석훈 등의 실무인사들을 기용해 국토건설본부 기간요원 관리와 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1960년 4월 재무부 장관 김영선미국으로 파견하여 경제안정 지원기금의 일부인 2천여 만 달러를 수령받아왔고, 장면도 1961년 7월 도미를 계획하고 있었다. 

 

 

민족성에 대한 견해

그는 한민족의 민족성을 고쳐야 된다고 보았으며, 그는 “우리의 민족성은 신앙으로 고쳐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으로만 이 혼란을 극복할 수 있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부패하고 요령피우기를 좋아하는 근성은 반드시 버려야 된다고 생각했고, 그는 민족성의 개조의 방법으로 합리주의와 가톨릭 신앙, 교육 계몽을 제시하였다. 평신도이면서도 천주교 신학 지식이 해박했던 그는 천주교 서적을 손수 한글로 번역하기도 했다.

 

 

신학 지식

해박한 신학 지식을 지녔던 그는 각종 가톨릭 서적이나 라틴어로 된 서적을 손수 한글과 한자로 번안, 번역하였다. 또한 고대 이스라엘 등 히브리 지역의 각종 신화와 전설, 민담에 대해서도 해박하였다.

 

 

여성 편력

그의 여성 편력은 깨끗하였고, 결혼생활 50년 간 한 차례도 외도하지 않았다 한다. 천주교 교리에서 금지한 행위는 절대로 범하지 않았던 그는 누구에게도 대개 있을 법한 외도를 하거나 한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다 한다.[193] 18세에 부모의 중매로 만난 천주교 신자인 김옥윤과 서울 중림동 성당에서 결혼하여 6남 3녀를 두었으며 일생 동안 외도를 하지 않았다. 결혼식장에서 조차 얼굴을 못본 아내와 그는 50년 간 해로하였으며, 결혼 50주년 기념 선물을 준비하였으나 금혼식을 보기 직전에 사망하였다.

 

학창 시절 동급생들이 기방에 출입할 때에도 그는 기방 출입을 삼가하였다. 성인이 된 뒤에도 여색을 멀리한 것은 변함없었다. 그의 측근이었던 현석호에 의하면 그가 동성 상업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당시 동성고등학교는 입학하기가 몹시 어려운 때였다. 그때 서울 종로 경찰서 고등 주임이 하루는 장면을 찾아와서 친지 되는 학생 한 사람을 입학하게끔 부탁을 했다. 귀찮도록 매일 졸라 대어 두고 보자고 해놓고 부탁한 학생의 시험 성적을 보니 커트라인에서 달랑달랑했다. 장면은 직원 회의에서 얘기를 하고 입학을 시켜 주었다. 일본인 고등 주임 나까이는 제 딴엔 몹시 고마웠던지 그를 장충단 모 일류 요리집으로 모셔 한턱을 냈다.

 

 

국토건설단

1960년 10월부터 경제개발 및 국토건설, 대학 졸업 후 미취직자, 고등학교 졸업 미취직자를 구제하기 위한 국토건설단 수립을 구상하고 실현하였다. 초대 단장으로 취임하여 장준하 등 사상계 동인들을 발탁, 이론 교육과 정신교육 측면을 담당하게 하였고 그들에게 경영하게 하였으나, 5·16 군사 정변 이후 군정은 국토건설단을 불량배나 범죄자, 예비역 군인들로 대체하였다.

 

 

외교 활동

 

대 북한 관계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대한민국 중심의 통일의지를 표명하였다. 1950년대 장면의 통일관은 이승만의 멸공통일, 승공통일론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나, 1960년 초의 통일방안에 있어서는 무력을 배제한 평화적 통일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1961년 3월 북한의 총리 김일성이 제시한 연방제 통일안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김일성이 연방제 통일안을 내놓자 이를 부정하였고, 외무장관 정일형을 통해 이를 반박하게 했다.

 

대 미국 관계

대체적으로 미국과의 우호적인 관계 유지를 천명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 당시에는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과 미 국무성, 국제 사회를 대상으로 설득하여 한국 전쟁 시 미군과 유엔 다국적군의 참전을 적극 이끌어냈다. 한국 전쟁 이후에도 미국과의 적극적인 관계를 유지함과 동시에 미국 원조의 경제개발 정책을 추진, 유지해 나갔다. 한때 미국에서는 이승만을 강제퇴진 시킨 뒤 그를 한국의 통치자로 세울 것을 계획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친미 정책이 미국 의존정책이라는 비판적인 시각도 병존한다. 강준만은 그를 지독한 숭미주의자 라며 혹평을 내리기도 했다.

 

대 일본 관계

제1공화국 기간 중에 이승만 정권의 강경한 반일 외교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이었고,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의 대가로 일본과의 재수교 압력을 받으면서 제2공화국 초반부터 일본과의 회담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일본과의 무리한 협상 노력은 극우극좌 양측으로부터 친일파, 친일 정권 이라는 오해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한일 외교 재개의 대가로 장면 내각에서 보상금을 28억 5천만 달러 를 요구하자 일본이 거절함으로써 장면 내각의 한일 협정은 무산되고 말았다.

 

5대 민의원을 지낸 김영구에 의하면 '처음 한·일관계 정상화 교섭 때 장면은 처음 일본에 배상금을 100억달러 요구하였다 이때 일본정부가 깜짝 놀라 “그 절반 정도면 안되겠느냐”고 했습니다.교섭 당사자의 말을 들으니 50억달러는 무난했고 아마 70억∼80억달러는 받으리라고 생각하였다.' 한다.

 

 

외교적 성과

1948년 8월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 시 국제사회에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승인을 설득하여 성사시켰다. 공산권 국가의 반발과 제3세계 국가들의 냉담한 반응 속에 그는 미국과 프랑스, 영국을 비롯한 각국의 UN 총회 대표자들을 찾아다니며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여 승인을 얻어냈다. 그의 유창한 영어 실력 외에 그의 참여로 교황청과 각국의 천주교 인사들의 협력과 승인 부탁이 작용하기도 했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국제사회의 한국 문제 개입 및 한국 전쟁 파병을 성사시켰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수도 서울이 3일만에 점령당하였다. 전화로 전황을 접한 그는 미국의 상원과 하원 및 미국 국무부를 설득, UN과 국제사회에도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줄 것을 호소하여 한국 전쟁 파병을 이끌어냈다.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제1대 총선 국회의원(종로구) 초대 무소속 57.06% 23,188표 1위 국회의원당선.png
제4대 부통령 선거 부통령 4대 민주당 46.4% 4,012,654표 1위 대한민국 제 4대 부통령 당선
3.15 부정선거 부통령 5대 민주당 17.5% 1,843,758표 2위 무효
제5대 총선 국회의원(용산구) 5대 민주당 69.6% 29,098표 1위 국회의원당선.png

 

 

가족 관계

  • 증조부: 장한후(張漢後)
  • 증조모: 진주강씨(晋州姜氏, 영세명 : 안나)
    • 종조부: 장치목(張致穆)
  • 할아버지: 장치응(張致應, 영세명 : 도밍고)
  • 할머니: 박 구네곤다(구네곤다, 춘천박씨)
    • 큰아버지: 장규빈(張奎彬, 요한)
    • 큰어머니: 함 루시아(루시아, 양근 함씨)
      • 사촌 형: 장지윤(張志允, 스더왕)
        • 당조카: 장명선(張明善)
      • 사촌 여동생: 장려재 (張麗才, 수산나)
  • 아버지: 장기빈(張箕彬, 레오, 1878년 ~ 1959년)
  • 어머니: 황 루시아(루시아, 1878년 ~ 1954년)
    • 첫째 남동생: 장발(張勃, 루수, 호는 우석(雨石), 미국명 토머스 장(Thomas Chang), 1901년 4월 3일 ~ 2001년 4월 8일, 서양화가)
    • 둘째 남동생: 장극(張剋, 발로, 호는 하석(霞石). 미국명 폴 장(Paul Chang), 1913년 4월 8일 ~ , 항공화학자·교수)
    • 첫째 여동생: 장정혜(張貞慧, 1904년 2월 19일 ~ 1975년 9월 26일)
    • 둘째 여동생: 장정온(張貞溫, 장 앙네다, 수녀, 1906년 10월 18일 ~ 1950년, 한국 전쟁때 납북)
    • 셋째 여동생: 장정량(張貞良, 1910년 3월 17일 ~ )
    • 넷째 여동생: 장정순(張貞順, 1916년 4월 10일 ~ )
  • 부인: 김옥윤(金玉允, 1901년 ~ 1990년)
    • 첫째 아들: 장영(張英, 1920년 7월 2일 ~ 1922년 음력 4월 6일)
    • 둘째 아들: 장진(張震, 요셉, 1927년 2월 10일 ~ , 서강대학교 생물학과 명예교수)
    • 며느리 : 김종숙(베로니카, 1934년 ~ )
    • 셋째 아들: 장건(張建, 1932년 2월 26일 ~ , 미국 거주)
    • 며느리: 한광희(1935년 ~ , 언론인 한창우의 딸)
      • 손자 : 장윤(1970년 ~ )
    • 넷째 아들: 장익 (張益, 십자가의 요한, 1933년 11월 20일~ , 로마 가톨릭 주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 다섯째 아들: 장순(張純, 1935년 10월 17일 ~ , 미국 보스턴 리지스 대학교 정치학 교수·베이징 대학 초빙 교수, 미국 거주)
    • 며느리 : 아나리사 페르스트(독일인)
      • 손자 : 장인(1967년 ~ )
      • 손자 : 장현(1975년 ~ )
    • 여섯째 아들: 장흥(張興, 1939년 9월 20일 ~ , 벨기에 루벵 대학 철학박사, 파리은행 은행원, 프랑스 거주)
    • 며느리: 마리 오딜 오베르(1948년 ~ )
      • 손자: 장훈(1971년 ~ )
      • 손자: 장문(1974년 ~ )
      • 손자: 장원(1976년 ~ )
      • 손자: 장은(1982년 ~ )
    • 첫째 딸: 장명숙(張明淑, 안나, 1918년 8월 10일 ~ 1919년 8월 2일)
    • 둘째 딸: 장의숙(張義淑, 베네딕타, 1930년 2월 21일 ~ 로마 가톨릭 수녀, 미국 거주)
    • 셋째 딸: 장명자(張明子, 데레사, 1941년 10월 3일 ~ 1987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빌라노바 대학교 도서관학 석사)
    • 사위: 공영길(1933년 ~ )
      • 외손녀: 공은혜(1972년 ~ , 변호사)
      • 외손녀: 공은영(1974년 ~ , 회계사)
      • 외손자: 공요한(1975년 ~ , 변호사)
  • 조카: 장현숙(張賢淑, 루이사, 1933년 3월 30일 ~ )
  • 외할아버지: 황성집(黃聖集)

 

 

평가

 

고결한 인격자라는 시각, 편협하다는 시각, 무능력하고 나약하다는 시각 등이 있다.

 

긍정적 평가

인물평으로는 총명하고 지성적이라는 평가가 있다.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과 수호에 발군의 역할을 한 외교관이며 1948년 9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UN에 대한민국 정부 승인을 성사시킨 것과 1950년 6월부터 한국 전쟁 당시 미국과 국제 사회를 설득하여 미군과 UN군의 한국 전쟁 참전을 이끌어낸 점이 높이 평가된다. 단독정부 수립이후 남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승인을 이끌어냈고, 6·25 전쟁 시 미군과 유엔군의 파병을 이끌어내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국공로자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최초로 의원내각제를 실시하였다는 평가와, 정부수립 후 최초로 민주적 선거절차에 의한 정권교체라는 의미를 둘 수 있다. 박정희 정권은 5·16 군사정변 이후 장면을 부정, 부패 무능의 상징이라 주장하였으나 박정희는 장면 내각 출범 이후 19일 뒤부터 군사 정변을 모의하였다. 군사 정권은 장면의 통솔력 부족과 무능력함을 집중적으로 조명했으나 이는 장면에게 부여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반론로 제기되고 있다.

 

한국헌법사를 쓴 김영수에 의하면 “급변하는 정치적 현실 속에서 이익의 조직화를 이루어 내는 능력을 갖고 있던 이승만과는 달리 안정적인 정치 상황 속에서만 장기적인 정책을 입안하고 수행하는데 적합한 행정적 인물이다. 그는 경제와 외교 분야에 상당한 의욕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라고 평가를 내렸다.

 

언론인 봉두완은 그의 업적은 “건국의 주도자로서 국제사회에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로 자리매김한 외교적 성과에 있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 “해방과 함께 그는 입법위원회 의원, 제헌의원으로 활동했으며 대한민국의 정통성 확립을 위해 제3차 유엔 총회에 한국 수석 대표로 참가, 대한민국의 국제 승인을 이끌어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봉두완은 그를 ‘청렴함’과 ‘온화함’의 상징으로 평가하였다. 바티칸 특시 당시 지원과 협력을 얻어낸 것에 대해 “지원자의 협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것은 장면의 인품과 신앙의 힘이 음양으로 작용한 것”이라고 보았다. 경향신문의 편집국장을 지낸 이원교와 장면의 측근이었던 송원영은 “장면 박사야 말로 이 나라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속죄양이었다”라고 평가하였다.

 

대한민국의 가톨릭 추기경 김수환의 증언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 당시 동성고등학교의 교장이었던 그는 일본인 장학관이 방문했을 때 학교 학생 김수환은 “나는 황국신민이 아니어서 소감이 없다”며 발표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장면 교장은 김수환 학생을 불러 체벌을 가하였으나 김수환은 “선생님께서 나를 살리시려고 일본인 선생들 앞에서 ‘오버’를 하신 것”이라며 증언하였다. 한편 김수환에 의하면 “선생님은 성인(聖人) 반열에 오르셔야 할 분”이라고 평가하였으며 친일파로 지목된 것을 안타까워 하였다. 김수환은 그 뒤 장면이 친일파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2009년 2월 16일 사망하였다. 한국 현대사가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국민경제를 발전시키며, 분단을 극복하려는 방향성을 갖는다고 한다면, 그 방향성을 제대로 지킨 제2공화국 정부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는 평가도 있다.

 

15대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1999년에 ‘운석 장면 박사 탄신 100주기 추모미사’에 참석하여 추모사를 발표했다.

 

14대 대통령 김영삼은 “박정희는 역사적 죄인으로 쿠데타가 없었으면 그가 나라를 잘 이끌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강원용은 기독교도 연맹에서 활동할 때 그를 보았다고 하며, 그는 본래 정치는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권모술수를 쓰지 않은 몇안되는 정치인이라는 시각도 있다.

 

허동현 교수는 장면이 “이승만의 최대의 협력자였다”라고 보았다. 더구나 그는 “당시 냉전논리적 반공 이데올로기는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남한의 지식인들 대다수의 지지를 얻었던 정치적 이념”이었으며, 장면은 “남한에 대한 국제적 승인과 6.25 전쟁시 유엔군의 파병을 이끌어내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국공로자”라고 평가하였다. 노길명 교수는 “장면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가톨릭신앙이 결합되어 있는 분으로, 미국 유학을 통해 자유와 평화에 대한 열망을 지니게 되었고, 해방 후에 그가 택할 수 있었던 국가형태는 당연히 자유민주주의 국가였다”고 부연 설명하였다. 한편 노 교수는 해방 이전에는 정치적으로 무관심하던 교회가 해방 이후에 적극적인 정치참여에 나서게 되었으며, 장면이 가톨릭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이 당시 교회가 반공주의 사목정책을 선택하였기 때문에 “신앙인으로서 장면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며, 교회의 방침에 따라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 밖에 근면하고 청렴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부정적 평가

 

5·16 군사 정변을 막지 못한 일로 무능하다, 나약하다는 평가가 있다. 정치적으로 부패하였다는 평가가 있으나 이는 장면 내각 출범 직후 18일 만에 5·16 군사 정변이 모의되고 있었으므로 논리상 타당하지 않은 평가라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의 강준만 교수는 “그가 검소하고 온화하였지만, 나약하고 의타적이었다”라고 평가하였다. 우유부단했다는 평도 있다. 미국측 문헌에는 지적이고 유능하며 합리적이요, 유순한 인물로 묘사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푸단 대학 교수의 곽정평(郭定平)은 장면의 민주당 정권이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과 마찬가지로 부패하고 무능했기 때문에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질서를 확립할 수 없었다고 보았다.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강준만은 “장면은 직업을 잘못 찾은 사람이었다. 그는 종교인이 되었으면 딱 어울렸을 사람이었다” 장면은 지독한 숭미주의자였다. 는 평도 내렸다. 강준만은 그가 리더십과도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고 보았다.

 

‘우유부단’, ‘무능’, ‘나약’이라는 비판에 대해 봉두완은 “이러한 꼬리표가 쉽게 떼어지지 않는 것은 1960년 4월의 피로 쟁취한 민주주의의 불씨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는 원망과 질책 때문”으로 분석했다. 김영삼은 장면이 참 무능하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김영삼은 그가 “무능력자였습니다. 쿠데타를 당한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평가할 가치가 없습니다”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그 밖에 강력하지 못했던 리더십에 대한 비판이 있다. 그러나 이 비판에 대해서는 민주주의 원칙을 최대한 지키려 했다는 반론도 상존한다.

 

경희대학교 허동현 교수는 “다만 그가 개인적으로는 교육자의 역할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일제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교육활동은 할 수 없었”으며 교회적으로는 일제의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중간에서 도맡아 방어하는 역할을 전담했기 때문에 신앙적인 이유로 일제에 저항할 수 없었노라”고 변론했다.

 

언론인 양호민은 그가 퇴폐적이고 향락적이며 그가 기용한 인물들 역시 '민족해방투사에 기여한 독립투사는 하나도 없고', 그는 '정치적으로 식견도 없고 경륜도 없다'고 비판을 가했다. 그에 의하면 "첫째, 민주당 내각에는 소극적으로나마 민족해방운동의 투사를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당시 아(시아)·아(프리카) 신생국의 지도층은 대개 반(反) 제국주의적 독립운동에서 혁혁한 경력을 쌓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집권당으로서의 민주당이 대중의 마음으로부터 존경받을 만한 정신적 권위를 가지지 못했음은 당연했다. 둘째, 민주당은 보수 정당으로서 자체의 이상과 경륜을 가지지 못하고 정치는 현실이라는 구실을 내세우며 잔재주로 눈가림을 해 이권을 찾기에만 바빴다. 경륜도 식견도 이상주의도 없는 퇴폐한 집단으로부터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릴 에너지는 나올 수 없다. 셋째, 민주당은 훈련과 기율과 정신적 통합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따라서 그 지도체제는 극도로 문란했으며 사색당쟁의 양상을 방불케 하는 당내의 복잡한 파쟁이 속출해도 이것을 통제하고 내부적 단결을 회복할 지도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말기의 민주당은 오합지중으로 타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일본 저술가 겸 사회운동가 정경모는 수녀원 피신을 두고 “도망한 지 5일째에 모습을 나타내어 학생들의 선혈로 얻어진 한국 사상 유일한 민주주의 정권을 너무도 간단히 박정희 앞에 내밀어 그것을 이양하는 서약서에 서명하였다”며 “피노체트에게 습격당해도 최후까지 저항하여 기관총을 쏘면서 죽어간 칠레살바도르 아옌데에 비해 그 말로가 너무도 교활해 한국인으로써 부끄럽다” 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정경모는 제1공화국 당시 장면을 개인적으로 도와주기도 했었다.

 

한편 장면의 역할에 대한 비판론도 있다. 그에 의하면 '실제로 장면 정부는 국민이 데모할 수 있는 자유를 터놓았으며, 정치적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국민에게 보여주었다. 얼마 안 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 기간에 우리 국민이 경험한 민주주의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민주주의의 방향에 대한 지표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장면 정부의 긍정적인 면모는 한국 국민의 정치의식의 성장에 관계된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선상의 것이지 장면 정부와 장면 개인에 대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의회민주주의의 발전'이나 '언론의 자유'는 장면의 정치사상에서 도출된 것이 아니고 민권이 얻은 것이었다. 장면 정부는 그 물결에 따라가고 있는 조각배에 지나지 않았다. 그 조각배와 같은 면모는 장면 정부의 마지막 장이 되는 61년 5월 16일 새벽의 행적에 여실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상대적 평가

 

5대 민의원을 지낸 김영구는 '장면박사가 평화시에는 훌륭한 재상이 될 수 있지만 난세에는결국 어려웠다는 말들을 하는데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요.하지만 장박사는인간적으로,정치적으로 훌륭한 분입니다. 상대방 파트너들이 나빴지요.그같은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으면 쿠데타에 빌미를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평하였다.

 

윤보선과의 비교

 

이덕일은 5·16후 윤보선과 그의 행보를 비교하여 평가하였다. 그에 의하면 장면은 쿠데타를 막지 못한 역사의 죄인이란 죄의식 속에 참회하다가 죽어간 반면, 윤보선은 ‘올 것이 왔다’던 쿠데타세력의 박정희 후보와 1963년과 67년 두 차례 대결했으나 패배했다며 대조적으로 평가하였다. 또, 이덕일은 “현실적으로 대통령에 대한 꿈을 접었을 무렵인 1980년대에는 전두환 정권에 협력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쿠데타 후 두 사람의 삶은 현재 우리 정치의 낙후성의 한 원인을 말없이 웅변해준다”라고 평가하였다.

 

이덕일은 "장면은 1960년대 한국 상황에서는 등장이 너무 빨랐던 미래형 정치가이다. 자유민주주의에의 신념과 종교적 경건함이 밴 구도자적 정치가인 장면은 2000년 현재에도 시기상조일지 모를 정도로 선진적인 정치가였다."라고 평가하였다.

 

박정희와의 비교

박정희와 비교하여 적극적이지 못함을 지적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만약 장면 총리가 책임성이 강한 지도자였다면 개인의 안위를 위하여 수도원으로 피신할 것이 아니로,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연락해야 했을 것이고, 그의 각료와 자신을 지지하는 장성들에게도 연락하여 사태를 저지하는 방향으로 노력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신뢰하는 미대사관측과 주한미군사령부와 연락을 취하여 보다 높은 차원에서 사태해결책을 찾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장 총리는 어떤 곳에도 연락하지 않았고 대응책을 구하지도 않았다.

 

또, '그런 면에서 15일 밤부터 새벽까지, 갖가지 위험을 무릎쓰고 쿠데타군을 독려 지휘한 박정희와 장면은 좋은 대조가 된다. 박정희는 장면에게 유리하였으되 그에게는 불리했던 조건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역사를 그의 편으로 바꾸어 놓았고, 20년 강압통치의 신화를 만드는 장을 열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기타 평가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조광은 한 대담에서 '각종 한국사 개설서를 들춰보았는데 자유당에서 민주당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부정 일변도로 기술했습니다.연구가 축적되지 않은 상황에서 잘못 평가한 것이지요.저는 장면정부가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이 아니었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부패,무능은 쿠데타이후 군사정권이 정당성을 강변하려고 조작한 것입니다' 라고 평하였다.

 

그는 민주의원과 과도입법위원회 의원으로 있을 무렵부터 이승만으로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은 바 있다. 이승만은 자신이 대통령직을 내놓을 경우, 자신 대신 대통령이 될 인물로 장면과 조병옥을 꼽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 두 사람의 도덕성과 능력, 그리고 애국심(특히 미국에 대한 독립적인 자세)을 의심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 있는 나라를 맡기느니 차라리 욕을 더 먹더라도 자기가 좀 더 오래 집권하면서 나라를 보위하고 그 기반을 다지는 것이 대한민국을 위해 낫다고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