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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의 봄 5 : 기황후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평가 4

 

 

강남의 봄 5 : 기황후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평가 4

 

 

                                                                                향기로운 라일락, 기황후를 보는 듯......

 

 

지금까지 시대별로 한민족 여성들의 이기적 유전인자를 가진 대표적인 여성들을 살펴보았고, 그중 대표적인 여성 중 역사속에 기록이 희미하여 우리들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고 거의 잊혀졌으나, 최근 한 방송사 드라마에 의해 다시 되살아난 '기황후'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였다. 

그녀는 고려의 뼈대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조상이 고종의 사위였던 명문귀족 집안 여성으로 강제인지 자발적인지 몰라도 원나라 공녀로 끌려갔다. 그녀는 원나라 대도 궁중에서 고려 환관 고용보의 도움으로 황제를 시중드는 군녀로 발탁되었고 뛰어난 인물 탓에 황제 혜종의 총애를 받아 그의 아들을 낳게 된다. 그녀는 황제의 지원과 보호속에 후궁이 되어 당시 궁중 내부의 정치적인 권력쟁탈의 혼란한 정국 가운데서 수차례 위기를 맞았으나 살아남아 황후에 오르게 된다. 원나라 말기 명나라를 세운 반란군의 거두 주원장에 쫓겨 북쪽 몽고 초원으로 피난가서 그녀는 기록에 사라진다. 아마 명나라군과 전투 와중에 포로가 되어 죽은 것으로 판단되며 혜종이 죽자 혜종의 뒤를 이어 그녀의 아들(소종)이 북원 황제에 올라 북원이 멸망할 때까지 원나라 말기부터 북원 멸망까지 살펴보았고, 또 당시 원나라 지배를 받고 있던 고려 왕실과 조정의 변화 과정, 즉 충렬왕에서 공민왕까지 고려와 원나라 황실 및 기황후와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 보았다.

 

이제는 기황후에 대해서 그녀가 과연 어떠한 삶을 살았고 왜 공녀로 끌려 갔으며 기황후에 대한 드라마 상 역사왜곡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문헌상 우리가 알고 있는 원나라와 고려와의 사실 관계, 원나라 공녀의 실상, 고려사 실록의 과장돠거나 왜곡된 부분까지 살펴보려 한다.

 

사실 기황후에 대해서는 실록에 나와 있는 기록이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그러나 방송 작가가 '기황후'라는 드라마를 제작하면서 그녀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던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녀가 고려의 여성으로 원나라에 끌려가 공녀가 되었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원혜종의 총애를 받아 황제의 아들을 낳고 후궁에서 황후에 오르기까지 파란만장한 그녀의 삶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비록 역사의 한 페이지도 채우지 못한 그녀의 삶이 였지만 그녀는 고려 여성으로 당시 세계 최대 강대국이었던 원나라 황제의 황후가 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녀의 열정과 지혜, 임기응변, 권모술수, 목표의식, 포용력, 용인술 등이 특히 뛰어난 여성이었다는 점이다. 위기를 기회로 이용하는 그녀의 뛰어난 용기와 임기응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다양하게 구사하였던 전략전술, 상대를 꾀뜷어 보는 혜안, 강한 적을 포용하면서도 적을 넘어뜨리는 기막힌 용인술 등등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기에도 그녀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특별한 재능과 지혜를 구비한 여성이었다. 단지 흠이라면 기씨 집안을 위해 몽고군을 동원하여 공민왕을 제거하기 위해 고려를 침범하게 한 사실이다.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그녀의 이러한 가족 사랑은 조국에 대한 사랑보다 공민왕 개인에 대한 복수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녀가 빈민구제를 한 사실, 고려 권신들이 몽고에 예속되기를 간청하였지만 강력하게 거부한 사실, 고려 공녀 차출을 금지시키고 공납을 폐지시키고 고려의 자주독립을 옹호하며 고려를 보호하려고 노력한 사실 등을 보면 그녀의 조국 사랑은 누구보다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녀의 이러한 열정적이고 이기적인 인자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여성들에게도 잠재되어 내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면 기황후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고 드라마 '신돈' 과 '기황후'에 나타난 역사왜곡 사실과, 몽고지배 당시 몽고와 고려와 관계를 사실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향기로운 라일락 모습, 기황후처럼 강력한 향기를 내뿜는 꽃이다

 

 

기황후, 그녀는 누구인가?

 

 

기황후(중국어: 奇皇后, 1315년경 - 1369년)는 원나라 혜종황후였다. 몽골명은 솔롱고 올제이 후투그( 한자肅良合 完者 忽都 숙량합 완자 홀도)이며, 존호는 보현숙성황후(普顯淑聖皇后)이다. 고려 출신의 여자로, 고려후기의 무신 기홍영의 증손녀이자 고려 고종의 사위인 기온의 종손녀였다. 원나라에 바쳐지는 공녀 중의 한사람이었으며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高龍普)의 주선으로 황궁의 궁녀가 되었다가 원 혜종의 총애를 얻어 귀빈으로 책봉되고, 훗날 혜종의 뒤를 이어 황제로 등극하는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를 낳았다. 정적관계였던 제1 황후 타나실리가 역모죄로 사사되자 외국인은 정궁으로 삼을 수 없다는 재상 메르키트 바얀의 반대를 견뎌내고 제2 황후가 되었고, 1365년에 제1황후인 곤기라트 출신의 바얀 후투그가 사망하자 제1 황후로 등극하였다. 이후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를 황태자로 옹립하였고,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개편해 심복인 고용보를 초대 자정원사(資政院使)에 임명한 뒤 고려인 출신 환관과 고려인 출신 관리 및 일부 몽골관료들을 포진시켜 자신의 친위대로 삼았다.

 

친정인 기씨 일족을 통해 고려 왕실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명에 쫓겨 북으로 밀려나면서 그 영향력이 얼마 못 가 사라졌다.  개혁군주 공민왕에 의해 친몽세력 제거에 따라 친몽 세력이며 기황후의 친오빠로 절대적인 세력을 떨치고 있던 기철 등 세력이 모두 살해되자, 원 혜종을 사주하여 충선왕의 서자 덕흥군을 왕으로 지명하여 공민왕을 제거하기 위해 몽고군 1만을 동원하여 고려를 침공하였으나 압록강, 평안도 일대에서 최영.이성계의 고려군에 패해 실패하였다.

 

태자인 아유르시리다르의 비(妃) 역시 고려여인으로 정하여 권씨(權氏)를 태자비로 삼았다.

 

 

 

 

 

 

생애 

 

 

출생과 가계

 

본관은 행주이다. 기순우의 후손으로, 그녀의 부친은 사후 영안왕에 추증된 기자오(奇子敖)이고, 어머니는 전서 이행검의 딸 이씨이다. 오빠로는 기식(奇軾), 기철(奇轍), 기원(奇轅), 기주(奇輈), 기륜(奇輪) 등이 있었다. 또한, 그녀는 원나라의 황제인 혜종의 배우자이며, 북원의 아유르시리다르 빌레그트 칸의 어머니이다. 몽골명은 올제이 후투그(Öljei Khutugh, 完者 忽都)였다.

 

종고조부 기윤위는 희종 때인 1211년 왕준명, 우승경 등이 최충헌을 제거하려 할 때 최충헌을 구출하였으며, 이후 최충헌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고조부 기윤숙은 상장군과 중서.문하성의 양성의 관직을 지내고 문하시랑 평장사에 이르렀으며, 증조부 기홍영은 좌우위보승낭장을 지내고 사후 은청광록대부 상서좌복야에 추증되었다. 종증조부 기홍수문하시랑을 역임했고, 기홍영의 아들이자 할아버지 기관의 형제였던 기온(奇蘊)은 고려 고종의 부마였다.

 

첫째 기식은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기철이 사실상의 장남이었다.

 

 

고려의 공녀 차출

원나라에서는 해마다 고려공녀를 차출해갔다. 그런데 공녀의 명단에 그녀가 있었다.

 

목은 이색은 "공녀로 선발되면 우물에 빠져 죽는 사람도 있고, 목을 매어 죽는 사람도 있다"고 말할 정도로 비참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침착했고 오히려 걱정하는 자신의 부모를 위로하였다.

 

자원한 공녀길은 아니지만 이왕 뽑힌 이상, 이를 새로운 인생의 계기로 삼겠다고 결심했다. 세계를 지배하는 원나라이니 만큼 더 많은 기회가 있으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공녀로 원나라에 가게 되어 대도의 황궁에 도착하였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그녀는 원나라 궁중에서 궁녀로 생활 중 부처에게 기도하였다. 이때 고려인 출신 내시 고용보(高龍普)를 만나게 된다.

 

원 황실에 포진한 고려 출신 환관들의 대표였던 고용보는 기씨 소녀같은 인물이 뛰어난 궁녀가 꼭 필요했다. 기씨 소녀라면 황제 혜종을 주무를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고 그녀를 적극 추천하여 혜종의 다과를 시봉하는 궁녀로 만들었다.

 

 

 후궁 생활

 

 

 

 

원대의 대도

 

 

 

 

1333년(충숙왕 복위 2) 고려인 내시 고용보의 추천으로 황태자궁에 배치되고, 혜종의 눈에 띄게 되어 승은을 입게 된다.

 

명종의 장자로서 황태자였던 토곤 테무르(혜종)는 1330년 7월 한때 원 황실 내부의 싸움에 패배해 인천 서쪽 대청도에 유배된 적이 있었다. 1년 5개월을 대청도에서 보낸 그는 원나라로 돌아가 2년 후에 황제에 즉위한다. 동아시아에서 동유럽에 이르는 세계제국의 후계자에서 고려의 작은 섬에 유배되었던 기억은 어려운 시절에 대한 향수와 어우러져 기씨에 대한 호감으로 작용했다. 원 혜종의 이러한 호감은 기씨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기씨는 혜종을 통해 자기 뜻을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타나실리는 채찍으로 기씨를 매질할 정도로 질투가 심했으나, 기씨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혜종을 내세워 타나시리와 싸웠다. 타나실리의 친정에 불만을 갖고 있던 혜종은 기씨의 의도대로 1335년 승상 바얀과 손잡고 타나실리의 친정을 황제역모사건에 연루시켜 제거했다. 그리고 타나실리에게 사약을 내렸다.

 

 

 

제2황후 등극과 황자 출산

1339년 황자 아유르시리다르를 낳았다. 이전의 황후 타나실리가 당기세의 반란으로 1340년 폐위된 후 기씨를 황후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실권자 메르키트 바얀이 그것을 반대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원 혜종(순제)을 조종해 바얀의 축출을 기도했고, 황제를 찾아가 통곡하며 바얀과 궁궐내 그의 심복들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주장하였다. 기씨의 하소연을 들은 혜종은 자신의 스승 사라판과 손잡고 바얀을 탄핵, 축출하는데 성공했다.

 

1340년 2월 메르키트 바얀(伯顔) 세력이 숙청된 뒤 4월 드디어 제2황후로 책봉되었다. 그녀가 제2황후로 되면서 친정아버지와 할아버지, 증조부에게 왕(王)의 작위가 추증된다. 아버지 기자오(奇子敖)는 영안왕(榮安王) 또는 경왕(敬王)이고, 할아버지 기관(奇琯)의 시호는 미상이고, 증조부 기홍영(奇洪潁)은 인왕(仁王)에 추증되었다.

 

원 혜종은 특별히 한림학사를 보내 기자오의 묘비를 지어주었다. 어머니는 영안왕 대부인(大夫人) 작위를 받았고 기철은 원나라의 관직과 함께 고려의 정승으로 임명됐다. 더불어 기철은 덕성부원군, 동생 기원은 덕양군에 봉해졌다.

 

기씨의 성공에는 고려 출신들을 주축으로 철저하게 현지화 전략을 펼친 것이 주효했다. '원사(元史)'는 그녀가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먼저 칭기즈 칸을 모신 태묘(太廟)에 바친 후에야 자신이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현지화 전략으로 명분을 축적하면서 원의 황실을 장악했던 것이다.

 

황후가 된 뒤 곧 반대세력을 몰아내고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이름을 바꾸고 여기에 고려인 출신 환관과 고려 유민, 고려인 유학생들을 등용하여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며, 이를 배경으로 자신의 친위대로 활용하게 된다. 그녀는 흥성궁(興聖宮:현 베이징 중남해 자리)에 거주하면서 황후부속기관인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개편해 심복인 고용보를 초대 자정원사(資政院使)로 삼았다. 자정원은 기황후를 추종하는 고려 출신 환관들은 물론 고려인 출신 관료들, 몽골 출신 고위관리들도 가담해 자정원당'이라는 강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했다.

 

 

 

 

 

 

 

선정과 대규모의 아사 사건

 

 

 

 

부군 원 혜종

 

 

그녀는 고려 출신 환관 박불화(朴不花)를 이용하여 황제 혜종에게 아유르시리다르를 황태자로 책봉하도록 압박하였고, 1353년, 마침내 아유르시리다르는 황태자가 되었다. 또한 그녀는 고려 출신 환관 박불화를 군사 통솔의 최고책임자인 추밀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만들어 군사권까지 장악했다.

 

공녀였던 그녀는 힘없는 백성들의 고초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원사 후비열전’은 1358년 북경에 큰 기근이 들자 기황후가 관청에 명해 죽을 쑤어주고, 자정원에서는 금.은.포백·곡식 등을 내어 십여 만 명에 달하는 아사자의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규모 아사자가 발생하는 것은 원제국의 위기였다. 그 때, 원나라 내부에서는 황태자의 지지자와 반대자 사이에 내전이 있었고, 반 황태자파의 지도자 볼루드 테무르는 결국 1364년 수도 대도를 점령하였다. 아유르시리다르는 황태자 지지자인 코케 테무르(擴廓 帖木爾)에게 달아났지만 기황후는 볼루드 테무르의 포로가 되었다.

 

 

 고려와의 갈등

당시 원나라는 징기스칸의 확장정책으로 징기스칸의 병력이 닫는 곳은 모두 징기스칸의 휘하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고려는 30년간의 항쟁으로 직접적인 합병은 면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기황후는 대원제국의 제2황후를 거쳐 황태자를 낳고 제1황후가 된 것이다. 기황후가 황후가 되기전 원나라는 고려의 조정을 마음대로 조정하였다. 원나라의 승인이 없이는 고려 왕도 되지못한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30년간의 항쟁으로 합병은 면했지만 고려는 원나라의 속국이었다.


그러한 관계로 고려 조정에서는 고려 스스로 원나라의 1개성으로 들어가자는 논의가 활발했던 때가 기황후가 황후가 되기전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기황후가 원의 황후가 되면서 고려조정에서 스스로 원의 속국. 1개의 성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논의는 중단된 것이다. 그것은 기황후가 황후가 되면서 고려침략의 두려움이 해소 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는 기황후가 고려의 자주권을 보장해준 역할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황후가 된 후, 고려 조정에서는 기황후의 오빠 기철을 덕성부원군에 봉하게 되지만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고려조정은 어떻게든 대원제국의 침략을 받지않고 안전하게 살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대원제국 황후인 기황후의 오빠 기철을 등에 업고 고려왕실의 안정을 꾀하고자 먼저 작위를 내린것이 덕성부원군 이라는 벼슬이었다. 또 원나라는 기철에게 고려를 통제하던 상주기관인 정동행성의 수장으로 임명하게 된다. 이렇게 권력이 기철에게 집중되면서 권겸을 비롯한 많은 당시의 권세가들이 기철의 수중에 들어간다. 결국 이것은 고려 스스로 왕권을 약화시키는 단초를 제공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당시 고려왕실이 원의 조정을 받는 허수아비 왕실인 상황에서 어쩔수없는 선택이었다. 이로 인해, 기철을 비롯한 친원파. 당시 주류층의 권세가들은 황후의 세에 힘입어 고려 조정에서 정대적인 권세를 누리게된다.

 

이에 고려 공민왕1356년 원나라가 약화되는 틈을 타서 기철을 비롯한 친원파 권겸 등을 숙청하게 된다. 1364년 이로인해 기황후는 공민왕을 폐위하고 타시 테무르(충선왕(공민왕의 조부)의 서자(庶子) 셋째 아들 덕흥군(공민왕의 삼촌)를 고려의 왕으로 세우려고 고려로 몽고군 1만의 군사를 보냈지만, 압록강을 건너던 중 최영 등 고려군에게 폐퇴하게 된다.

 

원래 공민왕은 10년간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었던 인물이었는데, 원이 고려왕을 내정할때의 기준에 들지 않던 것을 기철이 적극 천거하여 고려왕이 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기황후는 자신의 오빠 기철이 공민왕에 의해 참살된 것에 대해 더욱 격분한 나머지 몽고군 1만의 군사를 고려인 장수 최윤에게 맏겨 보내서 공민왕을 폐위시키기 위한 출정이었던 것이다.


기황후는 당시 집안의 멸족 소식을 접하고 극도로 분노하였으며 그녀는 원 혜종을 설득하여 공민왕에 대한 복수를 요구하였고, 1364년(공민왕 13년) 원나라 황제는 기황후의 뜻에 따라 '공민왕을 폐하고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왕으로 책봉한다'고 교시를 내렸다. 그러나 자신의 명이 고려에 먹혀들지 않자 기황후는 덕흥군에게 원나라 군사 1만명을 주어 고려 정벌을 명한다. 이들은 평안도 지방까지 진출하였으나 최영·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대에 패하여 물러났다.

 

 

 제1황후 책봉과 최후

1365년, 제1 황후인 곤기라트 출신의 바얀 후투그가 죽은 후에 기황후는 결국 제1황후가 되었다. 이는 이민족 출신을 황후로 책봉하지 않는 원나라의 전례를 깨뜨리고 정후가 된 것이었다.

 

 

하늘 아래 사람의 도리로 부부만한 것이 없다. 황후는 천하의 어머니로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를 내조하는 것 또한 고금의 도리다. 이제 그대 솔롱고씨(肅良合氏)는 천하의 어머니로 공경스럽고도 근검절약하는 행동으로 천하를 이끌고 황가를 빛냈으니, 이제 옥채옥보(玉채玉寶)를 내려 황후로 삼노니 더욱 힘써 짐을 보좌하여 영원한 복이 되도록 하라.

원 혜종의 교지

 

 

기황후는 고려국 금강산 장안사에 거액의 내탕금(內帑金: 판공비)을 내어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키고 많은 불상을 봉안하였다. 그녀는 특별히 며느리도 고려 출신 여성으로 정하여 권씨(權氏)를 황태자비로 삼게 했다.

 

1368년, 주원장의 25만 명나라 대군이 대도를 점령하자 북원으로 전락한 원나라는 응창부(應昌府)로 천도를 하였다. 기황후도 이때 응창으로 이동하였다. 그 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는다. 응창은 내몽골 자치구에 있는 타알 호수(Lake Taal) 근방에 위치했었다.

 

1368년 응창에서 포로가 되고 1369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1370년, 남편인 혜종이 죽고 그의 아들 아유르시리다르가 황좌를 계승한다. 그러나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는 후사를 남기지 못했고 그녀가 친히 간택함 며느리 권황후는 딸만 1명 낳았다. 이로써 그녀의 후손은 끊어졌다.

 

 

 

사후

한국의 경기도 연천군 상리(上里)에는 기황후의 묘로 알려진 고분(古墳)이 있다.그녀의 시신은 조선으로 운구되어 경기도 연천현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시신이 언제 조선에 운구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금강산 장안사에는 그녀의 위패가 봉안되어 넋을 기리기도 했다.

 

경기도 연천군에 안장된 뒤 그녀를 제향하는 큰 재실이 있어 그 주변은 재궁동(齋宮洞) 또는 쟁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현재 경기도 연천군에는 연천읍 상1리에 기황후 묘가 존재하고 있으나, 한국전쟁으로 비석과 석물을 잃어버렸고 비지정문화재라 하여 보존처리되지 않고 있다.

 

 

 

 

 

 

 

 

 

기황후의 묘

 

기황후 묘 또는 기황후 능중국 원나라의 마지막 황후인 기황후의 능이다.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상1리 산145에 소재해 있다. 그러나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아 주변지역은 경작지와 민묘가 들어서는 등 훼손되어 있는 상태이다. 주변에는 마정승 묘와 이정승 묘로 알려진 고분 2기가 존재하고 있으나 역시 비지정문화재로 있다.

 

기황후는 죽기 전 고국에서 장례를 치루기를 원한다 하여 시신은 고려로 운구되어 경기도 연천현에 장사하였다. 그녀의 묘소가 안장되어 있고, 기황후 묘의 재실인 재궁이 있었다 하여 주변 지역은 재궁동(齋宮洞)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그 뒤 실전되었다가 조선중기부터 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에도 연천현 동쪽에 기황후의 묘소가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졌고, 1656년 사학자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이 편찬한 <동국여지지>(東國與地志)에는 속전원순제기황후묘(俗傳元順帝奇皇后墓)라 하여 기황후능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고 있었다.

 

상리 상리초등학교에서 옥계리 방향으로 가는 길 오른쪽 재궁동 언덕에 있으나 한국전쟁으로 곡장과 비석, 석물 등이 모두 실전되었다. 비지정문화재라 하여 보존처리되지 않고 있으며, 묘소 주변은 경작지로 활용되고 있고 민간인 묘소가 들어서 있다. 주변 지역에는 기황후의 측근 또는 친척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고분군인 마정승묘, 이정승묘 등이 존재하고 있으나 역시 보존처리되지 않고 있다.

 

 

 재궁동의 유래

기황후의 능과 재실이 있던 지역은 재실, 재궁에서 이름이 유래하여 재궁동(齋宮洞)이라 불렸다. 이는 발음이 순화되어 쟁골이라 불리기도 했고, 아랫쟁골, 윗쟁골 등으로 마을이 나뉘기도 했다.

 

기황후능 동쪽에는 마정승 묘(馬政丞 墓)와 이정승 묘(李政丞 墓)로 알려진 고분 2기가 존재한다. 기황후의 측근이나 가까운 사람들의 묘역으로 추정되나 매장자의 정확한 신분은 알 수 없고 이 고분들 역시 방치되어 있다.

 

마정승묘는 기황후 묘소의 동쪽, 아랫쟁골과 쟁골 사이, 북쪽으로 뻗어 나온 산부리에 있다. 이는 단지 전설상에 마정승 묘라 전해 올 뿐, 피장인의 이름과 관직 등 자세한 내용이 전해오지 않고 있다. 봉분은 허물어져 형태를 알아볼 수 없고, 마을 주민들의 제보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 때까지 봉분 아래 도로변에 있었던 비석 또한 논 속에 매몰되어 있다. 이정승 묘(李政丞 墓)는 마정승 묘의 동쪽, 산부리 끝에 있는 고분으로, 상석·문관석 등의 석물이 남아 있으나, 매장된 인물이 정확히 누군가는 알수 없다. 

 

 

가족 관계

  • 고조부 : 기윤숙
  • 종증조부 : 기홍수(奇洪壽, 1148년 ~ 1209년)
  • 증조부 : 기홍영(奇洪潁)
  • 종조부 : 기온(奇蘊)
  • 조부 : 기관(奇琯)
  • 친정아버지 기자오, 영안왕에 추증
  • 친정어머니 영안왕후 이씨, 전서 이행검(李幸儉)의 딸
    • 친정오빠 기식(奇軾)
    • 친정오빠 기철(奇轍)
    • 친정오빠 기원(奇轅)
    • 친정오빠 기주(奇輈)
    • 친정오빠 기륜(奇輪)
  • 남편 : 원 혜종
    • 아들 : 원 소종
    • 며느리 : 권황후
      • 손녀 : 이름 미상
      • 손녀 사위 : 예쉬데르

 

 

 

 

 

 

기황후,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 

 

원 제국을 장악한 고려 처녀, 기 황후

 

대원제국의 마지막 황후인 기 황후는 고려 여인이었다. 그녀는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쥐고 원나라의 권부를 휘두르는 황후였다. 황후가 이렇게 실권을 장악하고 대륙을 뒤흔든 경우는 중국역사에서도 드문 일이다. 그녀는 고려 출신 환관과 힘을 합하여 고도의 통치술을 발휘, 원 순제의 총애를 입어 원 황실을 휘어잡았던 것이다.

 

30년간 원 황실을 장악한 기황후
북경 서남쪽 75km 거리에 위치한 운거사는 세계적인 불교 문화유산들이 많은 곳으로서 1300 여 년 전에 세워졌다. 운거사 뒤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석경산은 전체가 거대한 돌산인데, 수나라에서 명나라에 이르는 천 여년 동안 승려들이 직접 산에 올라 새긴 석경들이 굴속에 보관돼 있다. 현재 석경이 보관된 굴은 모두 7개, 그중 화엄당만이 일반인에게 개방돼 있다. 그런데 7개의 석굴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경판들 중에서 '고려'라는 이름과 고려 승려 '혜월'의 이름이 발견되었다.

<중수 화엄당 본기>에는 혜월 스님이 원말에 화엄당 보수공사를 벌였을 때 자정원사 고용보가 백만냥을 시주했다고 기록돼 있다. 자정원이란 기 황후가 필요한 자금관리를 하던 기구이다. 고려 환관 고용보는 자정원 초대원사를 지내면서, 기 황후가 원실의 정쟁에서 부각될 수 있는 경제적 뒷받침을 해주었다.

<원사(元史)> <후비 열전>에는 모두 10명의 황후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그 중 기황후가 고려인이라고 적고 있다. 기 황후의 본관은 행주 기씨이다. 행주 기씨 집안의 72대 손 기자오(奇子敖)는 3남3녀를 두었다. 그 중 기황후는 막내딸로서 그녀는 원의 황태자까지 낳았다. 행주 기씨 기자오의 막내딸이 어떻게 원나라로 건너가 원의 황후가 될 수 있었을까?몽고는 1231년(고종 18년)부터 30 여년에 걸쳐 무려 7차나 공격을 해왔다. 그때마다 고려는 치열한 대몽 항전을 벌였으나 장기간의 침입을 견디다 못해 고종 46년 몽고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오랜 기간 저항한 덕분에 몽고에 복속되지 않고 자체적인 국호와 정권을 인정받았지만 이때부터 고려에는 원나라의 공주가 왕비로 오는 것을 비롯해서 다양한 형태의 내정간섭이 시작된다. 원의 가장 야만적인 요구중의 하나가 바로 공녀(貢女)이다. 원의 요구에 따라 수많은 고려여인들이 원으로 끌려가게 되는데, 행주 기씨 집안의 막내딸 역시 이런 시대의 희생양이 되어 공녀의 신분으로 가게 된 것이다.

기씨는 공녀로 징발돼 원나라에 끌려가 궁중에서 차 따르는 일을 하였다. 고려여인들은 신분에 따라 극소수가 원의 제왕이나 고위 관직의 처첩이 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궁중의 시녀로서 허드렛일을 하며 일생을 보내거나 더 심한 경우는 술집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고려는 <과부처녀추고별감>이라는 직제까지 두고 공녀를 선발했다. 원은 공녀뿐 아니라 고려 출신의 환관들도 상당수 요구했다. 왜 그랬을까?

몽고인들은 몽고인 지상주의 원칙 하에 통치하면서 최상 신분층은 몽고인, 중상층은 색목인, 하층 부류는 한인을 두었다. 중국의 강남 출신들의 정권참여가 거의 배제된 상황에서 제국을 이끌어 가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고려인들의 학문적인 소양과 정치적인 경륜을 중시하여 등용한 것이다. 원 세조는 고려인이 우수한 민족이라고 기술할 만큼 고려인은 3등급 이상의 대우를 받았다. 그들은 한자를 알고 기본적인 학문의 소양을 갖춘 고려인을 황궁 안에 두기 위해 끊임없이 환관과 공녀를 요구했다. 원나라는 1275년이래 80여 년에 걸쳐 계속 공녀를 요구하여왔다. 나중에는 고려여인을 아내로 갖는 것이 원나라 대신들 사이에 일종의 유행처럼 돼서 원 조정뿐만 아니라 원나라의 대신들, 관료, 장군들이 개인적으로 공녀를 요구하기까지에 이른다. 고려말의 유학자 이 곡이 쓴 <공녀반대 상소문>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공녀로 선발되면 혹은 우물에 빠져 죽거나 목메 죽고 피눈물을 흘려 실명하는 자도 많았다." 당시 고려인들이 공녀로 징발되는 것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그 참혹한 정상이 잘 드러나 있다.

 

대청도에 유배왔던 원 순제
인천 앞의 대청도는 고려시대 원나라의 유배지로 쓰인 곳이다. <고려사>에 보면 충혜왕 원년 "원 명종의 태자 토곤 테무르(순제)가 11세의 나이로 (대청도로) 유배를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명종의 장자로서 황태자였던 토곤 테무르가 1330년 7월 원 황실 내부의 싸움에 패배해 인천 서쪽 대청도에 유배되어 1년 5개월을 머물고 나서 귀국 후 2년 만에 황제에 즉위하였다. 고려의 작은 섬에 유배되었던 기억은 어려운 시절에 대한 향수와 어우러져 기씨에 대한 호감으로 작용했다. 순제는 총명하고 지혜로운 궁녀 기씨를 매우 총애했다.

기씨 궁녀가 황제의 사랑을 받자 당시 제1황후였던 타나시리는 기씨를 매우 질투했다. 야사의 기록에는 채찍으로 때릴 뿐 아니라 인두로 몸을 지지기까지 했다고 적고 있다. 당시 황후인 타나시리는 순제의 아버지를 죽인 문종의 측근신하 당채시의 딸로 순제는 타나시리와 사이가 매우 나빴다. 그런데 1335년, 원 황실에 커다란 정변이 일어났다. 타나시리 황후의 형제들이 순제에 대한 모반사건을 일으키고 타나시리 황후도 이 사건에 얽혔다는 이유로 사약을 받아 세상을 뜨게 되었고, 순제는 궁녀 기씨를 황후로 책봉할 시도를 하였으나 여의치 못했다. 몽골족은 태조 징기스칸이래 옹기라트 가문에서 황후를 맞이하는 전통이 있었다. 이에 따라 순제 5년(1337) 황실 전통에 따라 옹기라트 가문의 빠앤후두가 황후가 되었으나 기씨는 좌절하지 않았다.

1337년, 궁녀 기씨는 순제의 아들을 낳아 유리해졌다. 원 궁중을 장악하고 있던 고려 환관들도 발빠르게 움직였다. 고려인의 한문수준과 역사지식은 뛰어났다. 이런 이유로 고려환관은 궁중 내부에서 계책을 짜며 지배자의 역할을 했다.<원사 환관전>에는 두 명의 환관이 입전 돼 있다. 그 중 한 명인 박불화는 고려출신 환관으로 기 황후의 측근으로서 기 황후와 동향이다. 이런 고려인 환관들을 비롯해 고려를 없애고 원나라의 직속 성으로 만들자는 입성론(立城論) 논의를 막기 위해 고려정부까지 기 황후의 황후책봉에 발빠르게 움직였다.

1339년 기씨 궁녀는 드디어 원제국의 황후가 되었는데, 그것은 신분 등급이 엄격한 몽고사회에서 "몽고족이 아니면 황후의 자리에 오를 수 없다" 는 규칙을 깬 파격적인 일이었다. 기 황후는 이후 25년 간 제2 황후의 자리에 있다가 1365년 제1 황후가 세상을 뜨자 제 1 황후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는데, 실권을 장악하고 많은 일을 한 것은 제2 황후의 자리에 있을 때부터였다.

고려여인이 원나라 황실의 주인으로 머무는 30여 년 동안 그 영향은 정치적인 부분에 그치지 않았다. 고려시대 그려진 불화(佛畵)들을 보면 저고리가 허리선까지 내려오는 치마 저고리를 입은 사람들을 본다. 2부식의 치마 저고리 양식, 고려의 저고리양식이 둔분선 길이나 허리길이의 저고리에 치마였기 때문에 그 양식을 입은 사람 수만 명이 원 황실의 멤버가 되면서 복식에 영향을 끼쳤다. 이것은 몽골의 전통적인 양식과는 구분되는 것으로서 중국사람들은 고려양(高麗樣)이라고 부른다.

고려양에 대한 기록은 원나라의 기록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고려양은 비단 복식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 음악을 비롯해서 생활 풍속, 음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퍼져갔다. 우리나라의 전통 한과의 일종인 매작과와 비슷한 음식이 아직까지 전해지고 고려병, 고려 다식, 고려 조청이 전해졌다. 그리고 북경에는 고려인의 집단거주지인 고려정이 있었다. 비록 부마국으로 강화를 맺었지만 고려와 원제국의 활발한 교류 속에서 고려의 선진문화는 더욱 빛을 발했다.고려 여인이 원나라의 황후로 앉아 있고 수많은 고려여인이 원나라로 건너갔던 이 시기, 고려의 문화는 " 고려양 " 또는 "고려국양"이란 이름으로 원나라 곳곳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북경에서 선정을 베푼 기황후
징기스칸이 몽고족을 완전 장악하면서 중국의 통일과업을 시작한 것이 1206년, 통일이 완성된 것은 징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 때인 1271년이다. 쿠빌라이가 대원제국을 건설한때로부터 본다면 원 제국이 존속한 것은 약 100여 년에 불과하다. 때문에 실질적으로 대원제국의 황제의 황후였던 인물은 몇 명이 안 되는데, 이 중 기 황후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고 실권을 행사한 기간이 30년 정도이니까 대원제국 전체를 놓고 볼 때도 상당한 기간이다.

기 황후가 제 2 황후의 자리에 오른 1339년 이후 기황후는 주로 흥성궁에 살았다 . 그녀는 시간이 나면 <여효경>과 < 사서>를 보며 역대 황후들의 좋은 덕행에 대해 공부하고,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진상품 중에서도 진귀한 것들은 먼저 태묘에 제사지낸 뒤 먹었다고 <원사 후비 열전>은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순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식견을 가지고 사회 안정과 인재의 적재적소 배치에 대해 고민했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 자금성의 건청문 자리는 옛 원나라 황궁의 본당인 대명전이 있던 자리이다. 명은 옛 원의 황궁 자리에 새롭게 궁을 건설하면서 황궁의 보호를 위해 황궁 주변의 흙을 파내어 하천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파낸 흙을 연춘각에 매립하여 만들어진 인공 산이 지금의 경산이다. 원나라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원의 흔적을 철저히 파괴한 것이다. 중국 고위관료들의 거주지인 중남해지구 역시 원래는 기황후의 거처인 흥성궁 자리였지만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다.

북경 시내에는 기 황후의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흔적이 남아있다. 원나라 말년 대규모의 기근이 들어 대도 안에서만 20만의 인구가 굶어죽고 시체가 나뒹굴었다. 기황후의 자금내원인 자정원에서 기황후의 명으로 돈을 내어 시체들을 운반해서 경도 11문밖에 묻었다. 뿐만 아니라 기 황후는 대규모의 구호사업도 함께 펼쳤으니 정치의 전면에 나선 기황후의 면모를 볼 수 있다.

막대한 재정이 드는 이런 사업을 기황후가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자정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기 황후는 자신의 정치적 뒷받침이 되는 자정원에 고려인 환관들을 집중 배치할 뿐만 아니라 순제로 하여금 박불화에게는 2품 영록대부의 벼슬을 내리기까지 한다. 원대 재상조차도 영록대부가 되기는 매우 힘든데 환관출신이 그 자리에 임명됐다는 것은 그만큼 기 황후 세력이 셌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 황후의 권력이 이렇게 강해지자 황궁 내에는 자정원파가 생겨나고 이는 황제의 측근들과 대립하기에 이른다. 더구나 순제가 방탕한 생활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자 기황후를 중심으로 한 자정원파는 순제 양위를 도모한다. 고려인 환관 박불화가 앞장서서 황제인 순제에게 왕위를 장성한 황태자에게 넘길 것을 요구하였다. 일종의 쿠데타 모의인 셈이다. 순제의 반발로 양위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순제편에 서서 기황후의 모의를 거부했던 재상이 귀양가는 것으로 마무리지어진다.

자기의 남편이자 원나라의 황제인 순제의 양위까지 도모를 할 정도로 기 황후의 힘이 컸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당시 원 제국은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계속돼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양자강 유역을 비롯해 강남 , 황하 유역 등 반란은 전국 각지에서 계속됐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이 황하유역에서 일어난 홍건적의 난이다. 홍건적은 몽고인들이 가장 멸시했던 한족들로 구성이 돼서 결국 원을 멸망시키는 주요한 세력이 되는데, 원을 멸망시키고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도 이 홍건적에 속해 있었다. 황하유역에서 일어나 강남의 거점인 남경을 점령한 주원장은 이어 군대를 이끌고 무서운 속도로 원의 수도 북경으로 쳐들어오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순제와 기 황후는 북경을 버리고 도피의 길을 떠났다.

 

고국땅 연천에 묻힌 기황후
중국 베이징 도서관 희귀본실에는 기 황후와 원 순제의 최후에 대해 적고 있는 <북순사기>가 있는데, 신하 유길이 도피하는 원 순제를 수행하며 17 개월 동안 쓴 책이다. <북순사기> 에 의하면 원 순제와 황후, 황태자 일행이 대도를 떠난 것은 1368년 7월이다. 도피행로는 상도, 응창을 거쳐 초원으로 이어진다. 도피를 하는 중, 기 황후는 원병을 보내지 않는 고려를 원망하기도 했다고 한다.

1년 6개월의 도피 끝에 몽고의 깊숙한 초원, 카라코롬에 이르러 순제는 나라에 관한 모든 권한을 황태자에게 이양한 뒤 세상을 떠난다. 기황후가 낳은 아유시다리 황태자는 북원의 황태자가 되지만 기황후의 최후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동국여지지》에 의하면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야산에 기황후의 능이 있다고 한다.

명나라가 쓴 <원사>는 물론 <고려사>에도 기 황후를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기 황후가 부정적으로 기록된 데는 기 황후의 오빠 기철도 한몫을 한다. 원 황후의 세력을 등에 업은 기철은 고려 내에서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리며 많은 횡포를 부린다. 충목왕의 개혁정치를 좌절시키기도 했고 또 각지에 농장을 개설해서 수탈, 충혜왕이 체포되어 원에 연행될 때 기철이 앞장선다.

결국 기철은 비밀리에 공민왕에 의해 처형당했다. 기 황후도 고려의 왕을 책봉하는 과정에 개입해 자신이 부리기 쉬운 사람을 세우는 등 고려의 입장에서 볼 때 부정적인 일들을 자행했다. 그러나 충렬왕 이후 80여년 간 계속되던 공녀와 환관의 징발을 금지하는 영을 내린 것, 원 내부에서 종종 제기되던 입성론 논의를 사라지게 한 것은 긍정적인 활동으로 원 순제 때에 이르면 완전히 사라진다. 고려를 원에 직활지로 편입하려고 했던 입성론을 영원히 폐지시킨 것, 경제적 수탈의 축소 등은 고려정부에 긍정적으로 기여한 것들이다.

이제 우리는 기 황후를 좀 더 객관적이고 종합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비단 자랑스러운 역사 속에서뿐만 아니라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역사 속에서도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원 순제의 기 황후, 그녀는 30년 간 대원제국의 실력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