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남의 봄 6 : 기황후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평가 5

 

 

강남의 봄 6 : 기황후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평가 5

                                            '드라마 역사왜곡 부분에 대하여......'

 

 

 

 

 

 

 

 

 

기황후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평가 5

   '역사 왜곡 부분에 대하여......'

 

 

 

드라마 <신돈>에서 기황후에 대한 역사왜곡

 

연재소설을 작가 제성욱씨가 역사소설 <기황후>를 집필하면서 상당한 자료를 모아 왔는데, 2006년 당시 MBC에서 역사 드라마로 방영중인 <신돈>이 역사적 사실 왜곡이 극심하다는 주장이 담긴 글을 <코리아 포커스>에 실은 바 있다.

 

당시 방영된 <신돈>에서 제성욱씨가 인터뷰에서 밝힌 기황후에 사실 왜곡이 얼마나 심한 것인가를 논해 본다.

▲ <신돈>의 기황후
ⓒ iMBC

 

 

우선 드라마 <신돈>에서 등장하는 원나라 황제인 순제의 인물 설정이 역사적 사실과 다른점은 당시 기황후의 남편인 원나라 황제 순제는 불과 서른에 불과한 나이지만, 드라마에서는 60이 넘은 노인으로 나온다. 무려 30년 이상의 나이차이가 나는 것으로 묘사된 것으로 나왔다.

기황후의 정적인 다나실리 황후의 아들로 나오는 '쿤란'은 가상 인물로 나오는데  실제 다나실리 황후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런데도 '쿤란'이라는 가상적 인물을 내세워 보탑실리와의 로맨스를 억지로 만들어내고 있는바, 이는 원나라 황실의 족보 자체를 왜곡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가장 큰 문제는 기황후가 사실과 다르게 그려져 있다는 점인데, 황제가 퇴폐와 환락에 빠져 정사를 뒤로 미루게 만든 것을 기황후가 지시하고 주도한 것으로 묘사한 것이 사실과 다르다. 황제가 '계급무계궁'이라는 곳을 지어 놓고 그곳에서 쾌락에 빠진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순전히 그 밑의 신하인 합마와 노적사와 같은 간신들로 인한 결과였다. 기황후는 황제의 마음을 돌려 나라를 바르게 세우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그래서 황제를 유혹한 합마와 노적사까지 처단할 정도였다. 그 계급무계궁을 폐하게 만든 것도 바로 기황후였다. 드라마의 왜곡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연대의 불일치는 둘째 치고라도, 기본적인 사실 또한 제대로 그리지 않고 있다고 하였다.

기황후를 바라보는 드라마의 시각은  이러한 왜곡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는 드라마에서 기황후는 시종일관 재물을 탐하고 권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고려를 핍박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너무나 다르다고 했다.

▲ <신돈>에서 기황후 역할을 맡은 배우 김혜리
ⓒ iMBC

기황후의 인물됨됨이는 드라마에서처럼 원나라 황제 순제가 쾌락과 방탕에 빠져 있었던 반면 기황후는 틈틈이 <여효경>과 <사서>를 읽었으며, 역대 황후들의 덕행에 대해 공부했다. 또한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진상품 중에서 진귀한 식품들은 먼저 태묘에 보내 제사를 올리게 한 뒤에야 비로소 먹을 정도였다.

또 그녀는 황제를 대신하여 백성들을 위무하는데 심혈을 기울인 황후였다. 당시 원나라 전체에 대기근이 일어 사망한 사람이 20만이 넘었다. 이에 기황후는 사재를 모두 털어 시체를 거두게 하여 경도 11문 밖에 묻어 장사지내 주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대규모 수륙대회(水陸大會)를 열어 그들의 영혼을 위로해주기까지 했다. 이 대기근을 위해 그녀는 2만7090냥을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사용했고, 쌀 560여 가마를 풀어 허기를 면하게 했다. 불심이 깊었던 그녀는 화엄당 보수공사를 벌였을 때 1백만 냥을 시주했으며, 고려 금강산의 장안사에 엄청난 돈을 보내어 70여 칸 규모로 중건하도록 했다.

고려 여인이 원나라 황실의 주인으로 머무는 동안 그 영향은 정치적인 부분에만 그치지 않았다. 수많은 원나라의 여인들이 기황후가 입었던 고려의 저고리와 치마를 앞다투어 입게 되어 복식 쪽에 선풍적인 유행을 일으켰고, 이런 영향은 음악을 비롯해서 생활 풍속, 음식에 이르기까지 고려양으로 불리며 다양하게 퍼져갔다.

우리나라의 전통 한과의 일종인 매작과와 비슷한 음식이 전해지고 고려병, 고려다식, 고려조청이 전해졌다. 이를 역사적으로 고려양(高麗樣)이라고 한다. 이를 보면 기황후는 사실 오늘날 거세게 일고 있는 한류(韓流)의 원조격인 셈이다. 이처럼 기황후는 고려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인물이었으며, 그녀의 존재 덕분에 고려가 간신히 국체를 유지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또 기황후는 충렬왕 이후 80여년간 계속되던 공녀 징발을 금지토록 했고, 환관의 징발을 축소했다. 뿐만 아니라 원의 조정과 고려에서 공공연하게 거론된, 고려를 원에 속한 하나의 성으로 만들자는 '입성론(立省論)' 논의를 잠재워 폐지하기도 했다. 그때 만약 기황후가 입성론을 막지 못하여 고려가 원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홍건적에 의해 원이 망하면서 그들은 고려까지도 원이라 하여 우리 땅에까지 명나라가 세워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그녀는 우리말을 고수하여 원나라에 있는 고려 출신의 사람에게는 항상 고려말을 잊지 않도록 했다. 그녀가 없었다면 현재 우리는 한국어 대신 중국어를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드라마에서 이런 역사 왜곡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기황후가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원나라와 명나라의 사관(史官)들에 의해서다. 원나라는 고려 출신의 공녀가 정후 자리에 오르고, 그 아들까지 황제에 오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기황후를 사리사욕만 채우고 권모술수에 능한 여인으로 저평가했다.

명나라 또한 원을 오랑캐족이라 칭하여 그 마지막 황제의 어머니인 기황후를 원을 망하게 한 장본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따라서 이 드라마에서 보이는 기황후에 대한 평가는 순전히 이런 중국의 사관을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인 것이다. 고려 이후에 들어선 조선 또한 기황후를 극도로 폄하했다. 원을 밀어내고 건국한 명에게 사대를 행했던 조선은 고려를 멸망시킨 장본인으로 명나라가 평가절하 하듯이 조선도 기황후에 대한 사실을 왜곡한 명의 사관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 그래서 우리 역사서에는 기황후에 대한 기록이 고려 공녀 출신이라는 한 두마디 정도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시대를 잘못 만나, 힘없는 나라에 태어나 당시 권문세가 집안이었지만 원하지 않는 공녀로 차출된 그녀는 분명 인간적으로 불행한 여자였다. 하지만 기황후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뛰어난 혜안과 명철한 두뇌로 자신에게 다가온 모든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나라 궁중에서 궁녀로 출발하여 대원제국을 30여년간 천하를 호령한 위대한 여장부였다. 당시 천하는 원나라에 의해 지배되었고, 그 원의 황실을 손아귀에 넣은 기황후에 의해 움직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로치면 입양한 한국 여자 아이가 미국 사회에서 자수성가하여 미국 대통령의 퍼스터 레이디가 된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실로 우리 역사에 기황후처럼 세계사 전체에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신돈>이라는 드라마는 한 인물을 제대로 평가하기는 커녕 기존의 역사조차 왜곡하며 한 인물을 철저히 난도질하고 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있던 기황후에 대해 최초로 언급했다는 점은 높이 산다. 그렇다 해도 많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우리 민족의 위대한 인물인 기황후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갖게 하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이렇게 비판하는 근거는 <원사>나 <고려사절요>와 같은 역사적 사료들을 통해서다. 2005년부터 기황후란 인물을 중심으로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면서 드라마 <신돈>의 내용이 실제 역사와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했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기황후>가 드라마 <정도전>과 함께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드라마 '기황후' 역사왜곡 논란

 

 
문화방송(MBC)이 50부작으로 기획한 드라마 <기황후>가 큰 화제를 몰면서, 월화 드라마 시청률 1위를 차지했다. 이 드라마는 제작 발표회 단계에서부터 역사왜곡 논란에 휩싸였다. 담당 PD가 "기황후에 대한 기록 자체가 상당히 단출하고, 원나라의 역사 자체가 그렇게 많이 남아있지 않다. 기황후 내용은 전적으로 작가의 창작에 의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들이 하려고 하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드라마라고 했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역사드라마를 단순히 드라마로 생각하지 않는 데 문제가 있다.

 

<기황후> 제작진이 <고려사> 봤더라면…

그 동안 '기황후'의 역사왜곡에 대한 부분은 주로 기황후, 기황후의 족벌 세력, 충혜왕 등 에 국한되어 있었다. 즉 국내에서는 기황후를 필두로 기 씨 일족이 조국인 고려에 온갖 악행을 저지른 악녀와 그 가족으로 이해되고 있었고, 충혜왕은 극악무도한 악행을 저지른 대표적인 퍠륜의 암군인데 전혀 다른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에 국한되어 있다. 또 엉성한 전투장면도 봐주기 힘든 부분이 있지만 제작비의 한계라고 보고 넘어갈 수도 있다. 이 점들은 이미 많이 지적되었기 때문에 여기서 새삼 다룰 문제는 아니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몽골의 대제국(원나라)과 고려와의 관계에 관한 문제이다.

특히 몽골의 일개 장군이 고려왕을 하대한다거나 공녀(貢女)에 대해서 지나치게 묘사된 부분이 문제다. 마치 공녀가 국가적인 시련인 듯이 묘사되어있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원나라는 고려에 공녀라는 매우 야만적인 요구를 해왔다. 공녀란 말 그대로 여자를 공물로 바치는 것이다. 원나라의 공녀 요구는 80년간 정사에 남아 있는 것만 50여 회에 이르고 왕실이나 귀족이 개인적으로 요구한 일도 허다하였다고 한다.(네이버 인물 한국사, 기황후)"라고 알고 있다.

MBC의 기획 의도를 보면 "원나라로 끌려간 공녀들의 삶은 가혹하고 참담했다. 궁중의 시녀가 되거나 고관대작의 첩실이 되는가 하면, 유곽에 팔려나가 망조가 깃든 힘없는 나라는 더 이상 이국 땅에 끌려간 제나라의 백성을 보호하지 못했다. 기황후도 여느 공녀처럼 아무런 영문도 모른채 운명의 질곡 속에 내던져 져야만 했다"라고 한다. 이 글을 쓴 사람들이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읽었더라면 이런 글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

ⓒMBC 드라마 <기황후> 홈페이지 갈무리

그렇다면 공녀에 대해서 제대로 된 사실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들이 공녀에 대한 기록을 제대로 찾아보고 드라마를 썼더라면, 이런 드라마가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고려사절요>에 나타난 공녀의 송출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자.

▲ <고려사절요>에 나타난 공녀 기록.(려증동(1990)에서 재구성]) ⓒ김운회

<고려사절요>의 기록에 따라 살펴보면, 전체적으로 충렬왕 때 몰려 있고, 고려 원종 15년 3월부터 공민왕 5년까지 전체 82년간 원나라로 간 여인들의 수는 800여 명 미만으로 나타나고 있다. 공식적으로 나온 수는 713명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1274년에서 1276년까지 3년간 전체의 91%가 공녀로 갔으며 이후 80여 년간은 매년 거의 1∼2명의 수준임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드라마에서 그리는 시기는 충혜왕의 시기인데 이 당시는 공녀가 거의 없는 수준으로 그 숫자도 알려져 있지 않을 정도였다.

1년에 1∼2명이 고관대작들의 요청으로 공녀로 가는 것이 드라마의 작가나 PD가 말하는 것처럼 "망조가 깃든 힘없는 나라는 더 이상 이국 땅에 끌려간 제나라의 백성을 보호하지 못했다."라고 비분강개한다면, 이들이 아는 역사 지식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결국 공녀는 고려와 갈등이 많았던 초기에 일종의 전리(戰利)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몽골은 고려를 친인척으로 대했지만 초기에 고려가 몽골에 대해 지속해서 괴롭힌 데에 대한 일종의 보복성 조치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드라마의 시대인 충혜왕 당시에는 이미 공녀가 거의 사라진 상황인데 공녀 문제를 마치 국가적 문제인 듯 심각하게 다룬 것 자체가 무지의 소치이다.

물론 공녀의 수치가 적다고 해서 이들의 행위가 나쁘지 않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치 일제강점기 정신대식으로 끌려간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되며 일부에서처럼 지나치게 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위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인들은 짝이 없는 여인들이었고 상당수의 고려 처녀들은 원나라 귀족 집으로 들어갔고 과부들은 일반 평민의 집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기자오(奇子敖)의 따님은 원황제 순제(順帝)의 황후가 되어 태자를 낳아 황태후가 되었고(이 분이 바로 기황후이다), 김심(金深)의 따님은 원황제 무종(武宗)의 총애를 받았고, 조서(趙瑞)의 따님은 총신의 아내가 되었다.

 

원나라와 고려의 관계, 드라마와 완전히 달라

공녀 문제는 단지 원나라만의 문제는 아니었고 명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명나라의 성조(영락제)는 즉위하자마자 조선의 여자들이 부드럽고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는 사람을 여러 차례 조선으로 보내어 여자들을 뽑아오게 했다. 성조 당시 궁인들은 330명(1차), 2800 명(2차) 등이 변을 당하여 몰살되었는데 이때 조선 여인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또 성조는 죽으면서도 순장(殉葬)을 명하여 13명의 비빈을 순장시켰는데 여기도 조선 여인이 있었다.

역사상 가장 큰 만행 중의 하나인 순장은 조선의 선비들이 오매불망 부모의 나라라고 숭배하던 명나라 태조 주원장에서 시작되어 성조 이후 인종(仁宗), 선종(宣宗)때까지 계속되다가 1464년 영종(英宗)이 죽으면서 유조를 내려 비빈들의 순장을 금지함으로써 겨우 폐지됐다.

이상을 보면 이 드라마의 작가나 PD가 역사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몽골에 대한 왜곡된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드라마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것은 몽골에 대한 비하로 연결될 수가 있다.

이러한 역사 왜곡은 조선 후기 광해군의 실각 이후 절정을 이루고 있다. 인조(仁祖) 이후 정권의 실세들이 자기들의 실정(失政)을 은폐하기 위해 시대착오적인 각종 역사 왜곡을 자행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이들에게 중국과 조선을 제외하면 모두 오랑캐였다. 한족(漢族)에게 자신도 동이(東夷)라는 오랑캐이면서도 말이다. 이들이 이후 동이라는 말이 가지는 긍정성에 찾기 위해 온갖 역사의 쓰레기통을 다 뒤지는 풍토를 만들게 한 것이다.

당시의 몽골대제국은 군대가 갈 수 있는 곳이면 모두 정복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지배하고 있었던 지역에서 유독 고려(高麗)만이 독립국으로 남아있었다. 당시의 지도를 보면, 세상은 오직 원나라(몽골 대제국·Mongol Great Empire)과 고려(Korea)만이 있는 듯하다.

▲ 대몽골 제국과 고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2006)

이것을 지금까지 학교에서 배워온 대로 고려가 몽골에 대항할 정도로 강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객관적인 국력의 수준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나라의 남송 정벌 과정에 대한 많은 기록들이 남아있다. 금나라와 남송을 멸망시킬 정도의 나라가 고려가 강성해서 멸망시키지 않았다고 착각하면 곤란한 일이다.

역사를 꼼꼼히 살펴보면, 드라마와는 반대로 세계를 무력으로 짓밟은 원나라가 고려와의 관계 속에서는 이상하리만큼 고려에 우호적이었고 관대하였다. 몽골이 전쟁을 거쳐 정복한 나라를 부마국(駙馬國)으로 삼은 경우는 없다. 대부분 몽골의 통치자들은 사신을 죽이거나 자기들에게 대항한 군주에 대해서는 철저히 보복하는데 고려처럼 부마국으로 삼고 국체(國體)를 유지시켜준 것은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같은 경우가 다른 지역에서 발생했을 때는 대량 학살과 전국토의 초토화(焦土化)를 시킨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행태를 보인다.

<고려사(高麗史)>에서는 원나라의 고려에 대한 짝사랑에 가까운 사항들이 비일비재하다. 당시 원나라의 지배층들의 고려에 대한 심경을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 실려 있다.

즉 원나라(대몽골제국) 조정은 고려가 원나라에 대하여 잘못한 바에 대하여, "거란을 평정하고 찰자(剳刺)를 죽인 뒤로부터 일찍이 한 번도 사자를 보내 궐하로 오지 않았으니 이것이 죄의 하나요, 사신에 명하여 훈언과 성유를 가지고 가게 하였는데 문득 감히 되돌려 보냈으니 이것이 죄의 둘이요 너희들이 (황제의 사신인) 저고여를 모해하고 이에 만노의 민호가 이를 죽였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것이 죄의 셋이요 너희에게 진군을 명하고 이어 너희 군신으로 하여금 입조케 하였는데 너희는 감히 항거하고 해도로 들어가 숨었으니 이것이 죄의 넷이요 너희들의 민호로서 구집되지 아니한 현재의 수를 감히 망주하였으니 이것이 죄의 다섯이다."라고 힐난했지만 고려 조정은 이에 대해 심각하게 대응하고 있지 않다.

<고려사>에서는 원나라가 거란을 고려를 위해 처리해주었으며 사신 저고여를 죽인 것에 대해서 엄중히 문책하는 듯하면서도 "황제의 성지에는 말씀하기를 만약에 너희들이 전쟁을 바란다면 우리도 함께 싸워 끝까지 갈 것이나 만약에 투항해 온다면 전에 이미 투항해 온 자들과 마찬가지로 대할 것이다. … 황제의 대국토에서는 몽골인들은 사방의 땅들을 모두 수취하였는데 설령 투항해 오지 않는 나라들도 모두 점령해버렸다. 너희들이 투항해 오지 않는다면 이미 투항해 온 사람들도 함께 타멸해 버리겠다. … 그러나 너희가 투항해 온다면 그 뒤에는 우리들은 단지 한 집안이 될 뿐 아니라 그 이상으로 친밀해질 것이다." 라고 하여 도대체 원나라의 궁극적인 의도는 무엇인지 알기도 어려울 정도로 횡설수설하고 있다.

그리고 수십 년의 긴 세월 동안 원나라의 코앞에 있는 나라가 항복도 아니고 항전도 아닌 상태로 있는 나라도 없었을뿐더러, 원나라의 강력한 협박에도 고려에서의 대응은 이상할 정도로 여유롭다. 이런 대목들은 <고려사>의 도처에 나타나고 있다.

<고려사>에는 "황제께서 말씀하시기를 고려국이 만일 실로 출항하면 비록 닭 한 마리 개 한 마리도 죽이지 않도록 할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해도를 공격하여 파멸케하라 하시었으니 지금 국왕과 태자가 서경에 나와 항복하면 우리는 곧 군대를 돌려 회군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도 왕이 말하기를 "나는 이미 늙고 병들어 멀리 갈 수는 없는 일이다."라 하고 이에 영안공 희와 지중추원사 김보정을 보내어 차라대(車羅大)의 병영으로 가게 하였다.

또 같은 부분의 기록에 "무술에 차라대가 몽골대 등 50인을 보내왔다. 기해에 제포궁에 행차하여 객사를 인견하니 그가 말하기를 "태자가 육지로 나와서 (항복하면) 저희 군사는 당연히 물러갈 것입니다"라고 하자 왕이 말하기를 "태자가 병이 있으니 어찌 능히 나갈 수가있느냐?" 라고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원나라와 고려의 관계는 드라마에서 보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역사에 대한 왜곡이 심한 한국 사회에서 드라마 작가들이 일상적으로 고등학교에서 배운 정도의 지식 정도만으로 제작하기에 앞서 좀 더 공부하고 몽골 관련 전문 학자들에게 자문하고서 드라마 제작에 임했으면 이런 이상한 드라마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