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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의 봄 4 : 기황후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평가 3

 

강남의 봄 4 : 기황후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평가 3

                      '원 지배 당시 고려 조정'

 

 

 

기황후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평가 3

 

 

원 지배 당시 고려 조정

 

1. 원의 정치 소용돌이 속에 선 충선왕


원종의 태자(훗날의 충렬왕)는 원종 15년(1274) 5월 원제국의 수도인 대도에서 원 세조 쿠빌라이의 공주인 쿠툴룩 켈미시와 결혼했다. 당시 태자의 나이 39세. 공주는 16세였다. 공주는 원 무종때 제국대장공주로 추봉했다.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는 23세나 나이 차이가 났는데도 불구하고 충렬왕은 공주를 어려워 했다. 공주는 유흥을 즐기는 충렬왕에게 충고를 많이 했다. 또한 백성들의 삶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흉년이 들었을 때 쿠빌라이에게 서신을 보내 식량 원조를 받기도 했다.


충렬왕 원년 공주가 아들을 낳았다. 그가 훗날의 충선왕이다. 충렬왕 3년 세자로 책봉되었고, 충렬왕 4년 공주는 세자를 안고 대도로 가서 원 세조 등 가족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당시 원 세조의 둘째 아들 짐킨이 황태자였는데, 황태자비 발리안 예케치는 세자에게 이지르부카(젊은 황소)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충선왕은 어린 시절을 원에서 보냈다. 이후 고려에 돌아와 짧은 기간 선양을 받았다가 원 황실에 의해 다시 원으로 불러들여져 생애의 대부분을 원에서 보내게 된다. 충선왕의 일생에는 원 강성기에 고려가 처해 있던 상황이 그대로 집약되어 있다.


충선왕은 어려서부터 총명함과 강직한 성품으로 주목을 받았다. 다음은 고려사에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충렬왕 9년 2월 충선왕의 나이 겨우 아홉 살이었는데 충렬왕이 충청도 방면으로 사냥을 나가려 하자 갑자기 울었다. 유모가 까닭을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한데다 농사철이 다가왔는데 부왕께서는 어찌 멀리 사냥이나 떠나려 하는가'


그 후에 충선왕이 헤진 베옷을 입은 사람이 땔나무를 지고 궁문으로 들어 오는 것을 보고 사람을 시켜 물었다. 그는 자신이 장작서의 기인이라고 대답했다. 충선왕이 그를 보며 말했다. "나는 좋은 의복을 입고 있는데 백성들의 형편은 저러하니 내 마음이 어찌 편안하겠는가."


또 한 노비가 동리 아이들의 연을 빼앗아 왕에게 바치니 충선왕이 물었다.

"이 연을 어디서 얻어 왔느냐? 노비가 사실대로 대답했다. 왕은 "어찌 하여 남의 물건을 빼앗아다가 나에게 바치는가?" 하고 책망하고 곧 돌려주라고 명했다.


염승익이 일찍이 천일이라는 관상을 보는 사람을 데려왔었는데 천일이 충선왕의 관상을 보고 나서 "인자스러운 눈매를 가지고 있어 매나 사냥개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했다. 왕이 마침 곁에 있던 박의를 돌아다보며 "매양 우리 아버지께 매사냥을 권하는 놈이 바로 이 늙은 개로다" 라고 했다. 박의가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하고 물러갔다.


충렬왕 13년 9월 충렬왕이 연경에 머무를 때 충선왕을 연경으로 불렀다. 10월 전라도 왕지별감 권의가 은 40근과 호랑이 가죽 20장을 충선왕에게 바치고 여비에 보태 쓰라고 하니 충선왕이 "이 물건들은 모두 백성들에게 약탈하여 그들의 원한을 산 것이니 나는 이것을 가지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사람을 시켜 모두 물건 임자에게 돌려주었다.


충선왕이 어릴 적에 내관 원혁의 무릎 위에 앉아서 한담을 하는데 원혁이 충선왕에게 "임금이란 모든 것을 세밀히 살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전하는 너무 지나치게 총명하시니 조금 너그러운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라고 했다. 충선왕이 이말을 듣고 성을 냈다. "너희들이 나를 어리석고 우둔하게 만들어 손아귀에 넣고 떡 주무르듯 하려는가" 원혁이 두려워 했다.


충렬왕 22년 11월 충선왕은 대도에서 원 황태자 짐킨의 장남인 진왕 감말라의 딸인 보타시린 공주와 혼인했다. 이듬해인 충렬왕 23년 제국대장공주가 39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했다. 충선왕은 귀국하여 생전에 제국대장공주의 속을 썩이던 무리들을 베어 죽이거나 귀양 보냈는데, 이 과정에서 충렬왕이 아끼던 후궁 무비도 피살되었다. 충격을 받은 충렬왕은 양위를 했고, 충렬왕 24년 충선왕은 23세의 나이로 왕이 되었다.


 

1298년 23세의 나이로 즉위한 충선왕은 교서를 내려 혁신책을 밝혔다.


1) 국가에 공이 있는 자와 그 자손을 우대할 것

2) 부정한 방법으로 대토지를 소유하고 탈세를 일삼는 자들을 고을 수령이 조사하여 토지를 본 주인에게 돌려 줄 것.

3) 각지의 공물을 감할 것.

4) 근래에 양민을 압박하여 천민을 삼으니 이를 엄금할 것.


당시 고려는 원의 요구에 따라 칭호와 관호를 제후국의 것으로 고친 상태였다. 충선왕은 이를 황제국의 것으로 복구했다. 고려의 내정을 혁신하려는 포부가 있던 충선왕은 의외의 문제로 8개월 만에 부왕인 충렬왕에게 왕위를 돌려 주었다. 충선왕은 보타시린 공주보다는 조인규의 딸인 조비와 금슬이 좋았는데 이것이 보타시린 공주의 질투를 일으킨 것이다. 원 황실은 충선왕 부부를 대도로 불러들였다.

대도에서 충선왕은 황태자 짐킨의 둘째 아들인 다르마발라의 아들인 카이산, 아유르발리파드라 형제와 침식을 같이했다. 


1294년 원 세조 쿠빌라이가 세상을 떠났다. 황태자 짐킨은 1286년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짐킨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인 다르마발라는 이미 사망했고, 충선왕의 장인인 장남인 진왕 감말라와 셋째 아들 테무르가 생존했다. 이중 황제의 자리는 테무르가 이어 받았다. 그가 성종이다. 


성종은 1307년 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황태자도 없는 상태였다. 이후 제위를 둘러싸고, 성종의 사촌인 안서왕 아난다와 조카인 카이산과 아유르발리파드라 형제 사이에서 분쟁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승리한 카이산이 황제가 되니 그가 무종이다. 이 과정에서 충선왕은 무종을 옹립하는 위치에서 공을 세웠고, 이로 인해 심왕에 봉해지고, 태자대부와 부마도위 직의 벼슬을 받았다.


1308년 7월 충렬왕이 세상을 떠나자 충선왕은 고려왕으로 즉위하여 심왕을 겸임했다. 복위한 충선왕은 새로운 정책을 밝히는 교서를 내렸다.

돌이켜 생각하건대 나의 선조가 건국하던 초기에는 법도가 모두 구비되었는데 점차 후대로 내려오면서 질서가 문란해졌고 또 근래에는 간신이 발호하여 나라의 정권을 농락하니 질서와 규율이 파괴되었으며 공사의 전민들을 모두 탈취하고 있다. 인민들은 먹을 것이 없고 국고는 고갈되었으며 권세있는 자들만이 부유하여 창고가 넘치니 내가 이것을 몹시 가슴 아파하는 바이다. 이에 사신들을 파견하여 토지를 조사하고 조세와 부역을 이전의 법대로 공평하게 결정하려 한다.

 

 

이어 충선왕은 전농사에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1) 전농사에서 저축한 미곡은 다만 흉년에 대처하기 위하여 준비한 것인데 간혹 관직 없는 자들이 함부로 구입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낭비되는 일이 적지 않다. 전에 쌀을 내주도록 지시하신 모두 사항을 모두 봉하여 두고 쌀을 내어 주지 말 것.

 

2) 세력 있는 자들이 처음에는 국가에서 준 것이라 하여 토지를 점유하고 나중에는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것이라고 구실을 붙이는 자와 족정 수가 본래의 수보다 많은 자는 각 도의 무농사가 모두 다시 계산하여 전농사에 조세를 납부하도록 할 것.

 

3) 경기 8현의 녹과전과 구분전 이외의 기타 조세는 속히 징수하여 저축할 것.

 

충선왕은 국정 쇄신에 열의를 보였지만, 귀국하지는 않았다. 대도에 머물며 원 국정에 관여하는 것이 고려의 국익을 위하는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1310년 무종은 고려에 보낸 제서에서 고려의 독립적 지위를 보장했다

짐이 보건대 천하에서 자기의 인민과 사직을 가지고 왕위를 누리는 나라는 오직 삼한뿐이다. 우리의 선왕 때로부터 그 후 거의 100년에 가까운 기간에 부자가 계속 우리와 친선관계를 맺고 있으며 또 서로 장인과 사위관계로 되었다. 이미 공훈을 세웠고 또 친척이 되었으니 응당 부귀를 누려야 할 것이며 어떤 나라보다 먼저 국교를 맺었으니 추숭하는 예절을 어찌 늦출 수 있겠는가.


 

 

무종은 재위 3년 반만에 세상을 떠났다. 뒤를 이어 동생 아유르발리파드라가 즉위했다. 그가 인종이다. 인종은 무종세력을 축출하면서 자신의 제위를 확고히 하고자 했다. 원의 정세가 급변하자 충선왕은 세자에게 고려왕 지위를 양위했다. 그가 충숙왕이다. 양위를 했지만 충선왕은 상왕으로서 고려 국정을 계속 주도했다. 원의 황제 인종은 우승상 직을 제의할 정도로 충선왕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다.

 

1316년 충선왕은 심왕의 자리를 조카인 왕고에게 물려준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320년 인종이 사망하고, 아들인 시데빌라가 즉위한다. 그가 영종이다. 즉위한 영종은 할머니였던 흥성태후 세력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영종은 충선왕을 흥성태후 세력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결국 충선왕은 영종에 의해 티베트로 유배되었다. 충선왕의 유배생활은 영종이 죽고 태정제가 제위에 오르면서 끝이났다. 

 

태정제가 즉위하자 심왕 왕고의 측근이었던 유청신과 오잠은 고려를 원의 지방으로 편입해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입성론은 이후에도 몇 차례 제기되었는데 이때가 가장 심각했다. 대도로 돌아온 충선왕은 심왕 측의 입성 책동을 듣고 크게 한탄했다고 한다. 충선왕은 태정제를 만나 입성 책동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충숙왕 12년의 일이다. 이후 충선왕은 귀국하지 않고 대도의 저택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325년 5월 5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다음은 이제현의 사평이다.

성품이 현자를 좋아하고 악한 자를 미워했으며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아 무엇이든지 한 번 듣고 본 것은 죽을 때까지 잊어버리지 않았다. 매양 선비들을 모아 놓고 옛날 국가들의 흥망에 대해서와 임금과 신하들의 잘하고 잘못한 점을 논평하고 연구하기를 부지런히 하여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어진 사람을 좋아하고 악한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타고난 성품이었다.

 

 

 

1328년 7월 태정제가 36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이후 제위계승을 둘러싼 내전이 벌어지고, 킵차크 부족의 지도자였던 엘 테무르가 지지한  톡 테무르가 최후의 승자가 되어 제위를 계승한다. 그가 문종이다.


 

톡 테무르가 황제가 된 그 무렵에 충숙왕은 세자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준다. 그가 충혜왕이다. 충혜왕은 문종을 옹립한 공으로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있던 엘 테무르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충혜왕은 1330년 4월 관서왕 초이발의 장녀 즉 덕녕공주와 결혼했다. 피로연이 엘 테무르의 집에서 열린 것을 보면 이 결혼은 엘 테무르가 주선한 것 같다.

 

왕위에 오르자 마자 충혜왕은 원조정 일각의 입성 책동 음모와 맞서야 했다. 1330년 윤 7월 낭장 김천우가 귀국하여 "원 조정에서 전정동행성좌우사 낭중 만인 장백상의 서장에 의하여 우리나라에 행성을 설치하는 것을 의논 하려 합니다"라고 보고했다. 충혜왕은 서둘러 엘 테무르에게 입성 논의를 막아달라는 서신을 보냈다.

 

충혜왕 원년인 1331년에는 주테무르부카와 조고이란 자가 사단을 일으켰다. 이들은 문종에게 "요양행성과 고려가 공모하여 토곤 테무르(톡 테무르의 형인 코실라의 장남으로 당시 고려의 대청도에 유배와 있었다.)태자를 받들어 모반하려 한다." 고 무고했다. 12월 원의 사신이 와서 대청도에 유배 중인 토곤 테무르를 소환했고, 이듬해인 1332년 정월에는 상왕인 충숙왕을 복위시켰다.

 

문종은 치세 3년만인 1332년 사망했다. 문종이 사망하자 토곤 테무르가 황제가 되니 그가 바로 순제다. 순제는 즉위하자 숙모가 되는 보타시리 황후(문종의 아내)를 태황태후로 봉하고 그를 위하여 휘정원을 설치했다. 이때 휘정원사인 고려인 환관 투만아르가 고려인 궁녀 기씨를 천거하여 순제를 시중들게 했다. 

 

1335년 바얀은 엘 테무르 가문을 숙청하고 국정을 장악했다. 그리고 1339년 충숙왕이 별세했다. 왕위를 계승한 충혜왕은 원에 사신을 보내어 승인을 요청했다. 그러나 바얀은 엘 테무르와 가까웠던 충혜왕의 복위를 반대하며 심왕 왕고를 고려왕으로 추천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화공주 간음 사건이 일어났다. 경화공주는 원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충혜왕이 반대했다. 경화공주는 좌정승 조적을 불러 실상을 말했다. 심왕 왕고를 추대하려고 했던 조적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1339년 8월 24일 밤 조적은 군사 천여 명을 데리고 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정변은 충혜왕에 의해서 진압이 되었다. 패배한 심왕 일파는 바얀에게 사정을 전했고, 바얀은 사신을 파견해 충혜왕을 체포하여 원으로 압송했다.

 

1340년 정월 충혜왕은 원의 형부에 갇혔다. 이때는 톡토의 바얀 제거 모의가 무르익은 때였다. 톡토는 순제의 측근과 모의하여 바얀 제거를 모의하였고, 2월초 바얀을 축출하는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 왕가노, 시레반 등 기황후의 측근들이 깊이 관여했다. 톡토는 충혜왕의 복위를 주청했고, 이를 받아들여졌다. 톡토는 개인적으로도 고려와 가까웠다. 톡토의 처는 고려인이었고, 기황후의 측근인 왕가노의 처도 고려인이었다. 바얀이 제거되자 순제는 기씨를 제2황후로 책봉했다. 

 

원의 귀족과 고위 관리 가운데 고려 왕실이나 귀족과 혼인 인척관계를 맺은이가 많았고, 궁중에는 고려인 환관이 다수였다. 당시 몽골 귀족사회는 고려인을 처나 첩으로 거느리지 못하면 명문 귀족 행세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충혜왕은 복위 직후 '편민조례추변도감'을 설치했다. 이는 권세가에게 피해를 본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재정을 충실하게 하기 위해, 시장에 직영 점포를 차리게 하고, 국내의 상인들과 제휴했다. 측근과 상인을 원에 보내어 내탕금으로 교역을 하게 했다. 또한 공신전과 없어진 사찰의 사원전을 내고에 소속시키게 했는데, 이 조치로 기씨 가문이 큰 피해를 입었다. 

 

1343년 8월 원으로간 기철, 이운, 조익청 등은 원의 중서성에 충혜왕 폐위와 고려에 행성 설치를 요구했다. 원의 순제는 충혜왕 폐위에 동의했고, 충혜왕은 원의 사신에 의해 체포되어 유배되는 도중 사망했다.

 

충혜왕이 급사하자 덕녕공주의 소생으로 대도에서 숙위하고 있던 8세의 장자 왕흔이 뒤를 이으니 그가 충목왕이다. 충목왕이 왕위에 오르자 계림군공 왕후와 좌정승 김영돈이 중심이되어 정치도감이 설치되었다. 정치도감은 사회경제적 폐단을 제거하려는 개혁기구였는데, 이들은 부원 세력의 대표인 기씨 집안 처벌에 나섰다. 이에 기황후는 정동행성을 통하여 정치도감의 활동에 제동을 걸었다.

 

1348년 12월 충목왕이 1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왕위를 계승한 것은 충혜왕의 아들 왕저였다. 그가 충정왕이다. 이 무렵 원제국에서는 대대적으로 한족의 반란이 일어났다. 원제국이 혼란에 빠지고 나이 어린 충정왕이 고려의 국정을 수행하는 것은 무리라는 여론이 비등하는 가운데 1351년 10월 순제는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강릉대군을 고려왕에 봉했다. 그가 바로 공민왕이다.

 

 

  

 

 

공민왕 시대

 

 

1. 충혜왕

충혜왕과 공민왕 형제는 충숙왕과 덕비 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충혜왕은 충숙왕 2년(1315년)에 태어났고, 공민왕은 충숙왕이 상왕으로 물러난 충혜왕 즉위년(1330년)에 태어났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15살 차이였다.

 

충숙왕은 재위 8년 되는 해인 1321년 심왕파의 정치공세로 인해 연경에 억류되었고, 4년후인 충숙왕 12년(1325년)에야 겨우 고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사건 이후 정치에 흥미를 잃은 충숙왕은 장자인 충혜왕에게 양위를 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이때가 1330년이었고, 충혜왕의 나이 16세였다. 공민왕이 태어난 해 이기도 했다.

 

충혜왕은 성격이 호방했고, 사냥과 주색을 즐겼다. 또한 당시 원의 문종이 즉위하는데 일조하였고 그래서 원 조정의 실력자였던 엘 테무르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1330년 4월 충혜왕은 관서왕 초이발의 장녀 즉 덕녕공주와 결혼을 했는데, 피로연이 엘 테무르 집에서 열릴 정도였다. 

 

그러나 왕위에 오르자마자 충혜왕은 위기를 경험해야 했다. 첫 번째 위기는 주테무르부카와 조고이의 무고였다. 이들은 원 황제 문종에게 "요양행성과 고려가 공모하여 토곤 테무르 태자를 받들어 모반하려 한다." 고 무고를 한 것이다. 당시 토곤 테무르 태자는 고려 대청도에 유배중이었다.

 

두 번째 위기는 아버지 충숙왕이었다. 충숙왕은 자신의 측근들이 충혜왕 세력에 밀려나는 것을 보자 양위한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결국 1332년 원 황제 문종을 설득하자 문종은 충숙왕을 다시 고려 왕으로 복위할 것을 명하는 조서를 반포했고, 이에 따라 충혜왕은 왕위를 박탈당하고 원에 소환되었다. 드라마 기황후에서 나오는 배우 주진모가 왕위를 박탈당한 충혜왕의 배역을 하고 있다.

 

원에서도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충혜왕을 후원하던 엘 테무르가 바얀과 정쟁에서 죽고 바얀이 정권을 잡았는데, 문제는 바얀이 엘 테무르와 친했던 충혜왕에 대해 적대적이었다는 것이었다. 연경에서 충혜왕은 위그르 부인과 사랑에 빠져 황제를 호위하는 임무를 빼먹곤 했는데, 바얀은 이를 빌미로 충혜왕을 발피(건달을 뜻하는 몽골어)라고 부르며 충혜왕을 야박하게 대했다.

 

충혜왕을 야박하게 대한 것은 부왕 충숙왕도 마찬가지였다. 충숙왕은 아들 충혜왕을 부를 때마다 "발피, 발피" 하며 야박하게 대했다. 어린 공민왕은 아버지와 형의 갈등을 보며 성장했을 것이다. 이것이 공민왕의 성장기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장남을 못마땅하게 여긴 아버지 충숙왕이였지만, 1339년 충숙왕은 임종을 맞아서는 충혜왕에게 왕위를 계승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그해, 충혜왕의 경화공주 간음 사건이 발생한다.

 

부왕의 장례가 끝나고 두달 후 충혜왕은 충숙왕의 몽골족 출신 왕비인 경화공주를 찾았다. 그날 밤. 왕은 측근들을 시켜 공주를 꼼짝 못하게 붙든 다음 강간을 했다. 수치심에 휩싸인 경화공주는 심왕파인 조적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심왕 왕고를 추대하려던 조적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조적은 경화공주가 거처하는 영안궁에 백관을 불러 모으고, 병력을 집결시켜 놓고 심왕을 추대하려는 준비를 했다. 

 

그러나 조적의 정변 소식을 들은 충혜왕은 급히 근위병력을 모아 직접 말을 타고 달려가서 활을 쏘며 반군을 진압하는 바람에 조적의 반란은 실패하고 말았다.

 

패배한 심왕 일파는 원의 실력자인 바얀에게 사정을 전했다. 바얀은 충혜왕 폐위를 결심했고, 1340년 충혜왕은 원 사신에게 체포되어 원의 형부에 갇혔다. 그러나 바얀이 실각하고, 톡토가 집권하면서, 충혜왕은 다시 복위할 수 있었다.

 

복위 직후 충혜왕은 편민조례추변도감을 설치해 권세가에게 피해를 본 백성들을 구제하려 하였다. 또한 시장에 직영 점포를 차리고, 국내 상인들과 제휴하는 등 교역의 이득으로 재정을 확충하려 하였다. 그리고 1343년에는 공신전과 없어진 사찰의 사원전을 내고에 소속시키게 했다. 이 조치로 기씨 가문이 큰 피해를 보았다.

 

1343년 8월 기철, 이운, 조익청 등은 원의 중서성에 충혜왕이 탐음하고 부도하니 고려에 행성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다. 기철의 배후에는 기황후가 있었다. 기황후는 순제를 움직였고, 순제는 충혜왕 폐위를 결심했다.


 

 

 

 

2. 폐위된 충혜왕

1343년 11월 타적, 내주등 원의 사신이 고려에 왔다. 충혜왕이 아프다며 마중을 나가지 않자, 고룡보가 말했다.

 

"황제께서 왕이 예의가 바르지 못하다고 항상 말씀하십니다. 만약 나가 맞이하지 않으시면 황제는 더욱 의심할 것입니다."

 

그러자 충혜왕은 교외로 나가 타적 등 사신을 맞이하고 정동행성에서 황제의 사면령을 들었다. 그때였다. 타적과 내주 등이 갑자기 달려들어 충혜왕을 결박했고, 원 사신 일행과 왕의 시위부대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타적 등은 충혜왕을 낚아채 말에 태워 달렸다. 고려의 국왕이 원이 보낸 특수요원들에게 납치 된 것이다.

 

충혜왕의 권한은 정지되었고, 고룡보가 국왕을 대리해 정무를 처리했다. 기황후의 오빠 기철은 정동행성 이문소의 책임자가 되었다. 충혜왕이 원의 수도로 끌려오자 순제가 힐난했다.

 

"네가 임금이 되고도, 백성을 못살게 함이 너무 심하니 너의 피를 천하의 개에게 먹이더라도 죄를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짐이 살생을 좋아하지 않아 유배를 보냄에 그치니 나를 원망하지 말고 가라."

 

결국 충혜왕은 살아서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귀양 가는 도중인 다음해 정월 악양에서 사망하고 말았는데, 일설에는 독살당하였다고 한다.

 

원에 의해서 고려의 왕이 폐위가 되고, 납치가 되며 귀양을 가다가 독살을 당하는 상황. 이것이 당시 고려의 현실이었다. 나이 어린 공민왕은 이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과연 공민왕은 무엇을 느끼고 생각했을까?

 

 

 

 3. 조카에게 패배하다.

1344년 충혜왕이 원에서 살해당했을 때 공민왕의 나이는 15세였고, 충혜왕의 장자(후일의 충목왕)는 8세의 어린애였다. 그리고 원이 선택한 것은 8세의 충목왕이었다. 기황후와 기씨 가문은 고려에 보다 강한 영향력 행사를 원했고, 이 때문에 나이 어린 충목왕이 선택된 것이었다.

 

공민왕의 첫 번째 좌절이었다. 그러나 1348년 공민왕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찾아온다. 충목왕이 12세라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당시 공민왕의 나이 열아홉. 공민왕의 경쟁 상대는 충목왕의 이복동생으로 충혜왕과 희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난 11살 충정왕이었다. 공민왕은 이번에는 자신이 있었다. 충정왕은 충목왕 과는 달리 몽골공주의 소생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원이 선택한 것은 조정하기 쉬운 어린 충정왕을 택했다. 공민왕의 두 번째 좌절이었다. 고려의 왕위계승을 원이 결정하는 상황. 공민왕은 가슴 속 울분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공민왕은 왜 자신이 선택되지 못하는 지를 생각했다. 이유는 원 황실이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불신이었다. 이 불신을 만회하기 위해서 1349년 10월 원 황실 위왕의 딸인 노국대장공주와 혼인한다. 또한 기황후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기씨 세력을 보호할 것을 맹세한다.

 

당시 원의 상황도 공민왕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1348년 10월 방국진의 난을 시작으로 원 제국에서 대대적으로 한족의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이중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이 1351년의 유복통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백련교도의 난이다. 이들 백련교도들은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둘러 홍건적이라 불렸다. 홍건적의 난으로 원제국이 혼란에 빠지자 원의 승상 톡토는 공민왕을 고려의 왕으로 즉위시켜, 유사시 원제국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했다. 원 순제와 기황후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원제국이 혼란에 빠진 지금 고려 내부의 갈등을 수습하고 원을 돕기에는 충정왕은 너무 어렸다. 순제와 기황후는 결단을 내렸다.


 

 

4. 공민왕의 시대가 열리다.

1351년 10월 원은 충정왕을 물러나게 하고, 공민왕을 고려 국왕에 책봉했다. 강화도로 유폐된 충정왕은 공민왕 원년 3월 열네 살의 나이에 독살당했다. 공민왕 시대는 이렇게 조카의 피를 묻힌채 시작되었다.

 

왕이 된 공민왕은 원 과의 관계를 재정립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원에 의해서 고려의 왕좌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지켜보았다. 자신 역시 원의 도움을 받아 왕이 되지 않았던가. 이 관계를 청산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왕위 역시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 기회는 다가오고 있었다.

 

 

 5. 원에 군대를 파견하다.
1351년 홍건적의 난을 시작으로 원제국은 대대적인 한족의 도전을 받았다. 1353년 소금상인이던 장사성이 강소성 고우를 점령하자, 원의 승상 톡토는 즉각적인 진압을 결정했다. 장사성이 점거한 태주에서 고우에 이르는 지방은 대운하와 인접해 있고, 이 대운하를 통해 대도를 비롯한 북방의 식량을 공급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톡토는 고려에도 사신을 보내 파병을 요구했다. 톡토가 공민왕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원나라와 고려 두 나라는 서로 우호관계를 맺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제 한족들이 크게 일어나 반란을 일으키고 있으므로 나는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남쪽을 정벌하게 되었으니 왕께서는 용맹한 장수와 정예병을 지원해 주셨으면 합니다.

 

 

 

공민왕은 이 요구를 받아들여, 유탁, 염제신, 최영, 안우, 이방실, 인당, 김용, 정세운 등 당대 최고의 장수 40명과 2만 3천 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고려군은 각지에서 장사성의 반군과 치열하게 격전을 벌였다. 특히 회안성 전투에서는 이권, 최원 등 6명의 장수가 전사하는 격전 끝에 성을 사수했다. 이 전투에서 최고의 영웅으로 떠오른 장수가 바로 최영이다. 최영은 두세 번이나 창에 찔려 부상을 당하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싸워 승리를 일궈냈다.

 

공민왕 4년 5월 원정군에 참여했던 장군들이 귀국하여 왕에게 원의 정세를 보고하자, 공민왕은 이제야 원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때가 왔음을 느꼈다.


 

 

 

 

6. 숙청

공민왕 5년(1356) 5월 왕은 잔치를 연다는 핑계로 친원세력의 거두인 기철, 노책, 권겸을 불렀다. 기철은 기황후의 오빠였고, 노책은 딸이 원 순제의 후궁이었으며, 권겸은 딸이 원의 기황후의 아들이며 황태자인 아이유시리다라의 아내였다.

 

기철과 권겸이 도착하자, 경천층, 황석기, 신청등이 왕에게 아뢰었다. 공민왕은 결단을 내렸다. 왕이 허락하자, 강중경, 목인길, 이몽대 등이 거느린 장사들이 철퇴를 휘둘렀다. 기철은 즉사했고, 권겸은 피해서 달아나다 궁문에서 살해되었다. 이어서 기철과 권겸 휘하의 군사들과 금위병들 사이에서 시가전이 벌어졌다. 강중경은 병사들을 이끌고 노책의 집을 습격해 노책을 살해했다. 숙청은 성공으로 끝났다. 기철, 노책, 권겸의 가족들 역시 대부분 죽음을 당했다. 

 

숙청이 끝나자, 공민왕은 숙청의 정당함을 강변했다. 친원파를 제거한 공민왕은 이어서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던 정동행성 이문소를 혁파했다. 그해 6월에는 원의 연호를 쓰지 않았고, 7월에는 고려의 관직제도를 황제국의 위상에 걸맞게 복원했다.

 

이제는 빼앗긴 영토를 되찾을 때였다. 


 

 

7. 영토 수복

공민왕은 인당을 서북면병마사, 유인유를 동북면병마사로 임명하여 그들로 하여금 각각 압록강 서쪽의 8역참과 쌍성총관부를 공격하게 하였다. 

 

인당의 고려군은 공민왕 5년 6월 압록강을 넘어 원의 파사부 등 3개 요충지를 격파했다. 신채호가 쓴 <동국거걸> '최도통전'에는 이 때 최영의 활약이 대단했음을 전한다. 한편 유인우가 이끄는 고려군은 7월에 동북면의 쌍성을 함락하여 이 일대를 99년 만에 수복했다. 공격 당시 이곳에 있던 이자춘과 이성계 부자가 내응하여 도움을 주었다. 이성계가 고려사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원은 고려가 기황후의 집안을 숙청하고 국경까지 넘어 영토를 침공한데에 분노했다. 원은 80만 대군을 보내 복수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반란에 시달리고 있던 원이 그정도 병력을 동원할 능력이 없음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공민왕에게 원의 협박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 부담에 대한 공민왕의 해법은 인당을 처형하는 것이었다. 공민왕은 압록강을 넘어간 군사행동은 인당의 독단적 결정이었다며, 인당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목을 베어버렸다. 한 장수의 목숨으로 원의 압력을 회피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공민왕의 행동이었는 데, 책임을 장수인 부하에게 전가하고 죽이는 등 배신을 때리는 행위였다. 인당의 처형은 고려 무장들 뇌리에 깊숙이 남았을 것이다. 떠오르는 전쟁의 신 최영은 자신의 상관이 억울하게 죽는 것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신채호는 <동국거걸> '최도통전'에서 최영이 인당 처형 이후의 행적을 상세하게 적고있다.

 

 

 

8. 불타는 서경
공민왕이 즉위 초 강력한 반원정책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은 중국대륙을 휩쓸고 있던 홍건적 때문이었다.

 

1351년 백련교주 한산동은 황하 치수공사로 모인 인부를 선동하여 반란을 시도했다. 한산동은 봉기 직전 모의가 누설되어 살해되지만, 그의 제자인 유복통은 봉기에 성공한다. 봉기에 성공한 유복통은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를 북송의 마지막 황제인 휘종의 8대손이라고 선전하며 북송국을 세웠다. 그리고 1357년에는 개봉을 점령하여 대송국의 수도로 삼았다.

 

유복통은 중국 점령을 위해 3개 군단을 발진시키는데, 동로군은 산동,하북 방면으로 중로군은 산서, 섬서 방면으로 서로군은 섬서,감숙 방면으로 진군했다. 이중 고려와 충돌한 것이 중로군이다.

 

중로군은 만리장성을 넘어 북진하다가 원나라의 상도인 개평부를 점령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그러나 원의 반격을 받아 상도에서 밀려나고 주력이 양분되면서 하북으로 돌아갈 퇴로가 단절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대송국 마저 와해되면서 중로군은 돌아갈 곳 없는 군대가 되어버렸다.

 

갈 곳 없는 군대가 할 수 있는 일은 안정된 근거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미지의 땅으로 가는 일 뿐이었다. 그 미지의 땅이 바로 고려였다.

 

공민왕 8년(1359) 12월 모거경이 이끄는 4만의 홍건군이 압록강을 넘어 고려를 침공했다. 홍건군의 공격으로 의주와 정주가 순식간에 점령당했다. 안우가 모귀가 이끄는 홍건군 부대를 격파하는 전공을 올리기도 했지만 전체적 전황은 불리했다. 이런 상황에서 도원수 이암이 고려의 제2수도이며 북방 방어의 핵심인 서경에 입성했다.

 

이암이 이끄는 군사는 2000명에 불과했고, 주력군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암은 서경을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창고를 불사르고 요충지로 퇴각하려고 했다. 이때 호부낭중 김선치가 나서서 식량을 그대로 두고 가자고 했다. 그러면 적이 장거리 이동으로 피로하여 안주할 것이고 아군 주력군이 도착하면 그때 공격하자고 했다.

 

이것은 홍건적의 속성을 꿰뚫은 탁월한 판단이었다. 홍건적은 이전에 고려를 침범했던 거란이나 몽골과는 달랐다. 그들은 갈 곳 없는 군대였고, 근거지를 찾아 떠돌아 다니는 군대였기에 그런 그들에게 먹을 것과 따뜻한 집이 주어진다면? 그들은 진격을 멈출 것이고, 그 사이 고려는 시간을 벌 수 있다.

 

고려군이 서경에서 물러나자 김선치의 예측대로 홍건적은 서경에 눌러 앉았다. 그사이 고려군은 군을 재편성할 수 있었고, 2만의 병력을 집결시킨 후 서경탈환에 나섰다. 여기서 비극이 발생한다. 고려군의 공격이 임박함을 느낀 서경의 홍건적은 포로로 잡은 고려인 1만명을 학살한 것이다.

 

 

 

9. 함종 전투

서경은 싑게 수복되었다. 이암의 뒤를이어 도원수가 된 이승경의 공격 명령에 안우, 이방실, 김득배, 최영등이 이끄는 고려군은 총공세를 펼쳤고, 홍건적은 서경을 포기했다. 이어 함종에서 고려군과 홍건적은 정면충돌을 했는데 여기서 고려군은 홍건군 2만을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둔다. 고려군은 홍건적을 모두 압록강 너머로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함종 전투의 승리로 고려는 1차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쳤다. 고려는 이것이 끝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이었다. 갈 곳 없는 군대인 홍건적은 근거지를 찾기 위해서라도 언제든지 다시 고려를 침공할 수 있었다.

 

 

 

 

10. 천고에 남은 원한이 붓끝에 묻혀오누나
1361년 10월 상도 탈환에 실패한 홍건적 주력군은 동진을 결심한다. 반성, 파두반, 관선생, 주원수, 사유이 등은 20만 홍건군을 이끌고 고려를 향해 내달렸다. 안우, 이방실 등은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홍건군과 격돌하여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홍건군에게 결정적 타격을 입힐 정도는 아니었다. 결국 안주 전투에서 고려군은 대패하면서, 고려군 주력은 절령으로 집결하였다.

 

11월 16일 절령 방어선에 도달한 홍건적은 만여 명을 절령의 목책에 매복시켰다가 다음날 새벽 철기 5천명으로 책문을 급습하여 돌파에 성공했다. 이 전투에서 고려군은 대패하여 안우와 이방실은 단기로 퇴각해야 했다.

 

패배는 가혹한 희생을 낳았다. 절령에는 군인 뿐 아니라 3개 주와 5개 군의 전 주민이 집결해 있었다. 그 참상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흐리고 비오는 날이면 귀신이 나타나 원통함을 호소하여, 국가에서 이들의 한을 가라앉히고자 여단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는 전설이 내려올 정도였다.

 

절령 방어선이 무너지자, 공민왕은 11월 19일 개경을 떠나 남쪽으로 피난길을 떠난다. 홍건적이 개경에 입성한 것은 11월 24일이었다. 개경에 입성한 홍건적은 남녀를 불문하고 태워 죽이고 임산부의 젖가슴을 구워 먹는 등의 온갖 잔악한 짓을 저질렀다. 고려의 위기였다.

 

 

 

11. 개경 수복 작전

11월 24일 개경이 함락당했다. 그리고 12월 15일 공민왕은 안동에 도착했다. 정세운이 공민왕에게 왕이 스스로 책하여 백성에게 사죄하는 애통교서를 내리자고 청했다.

 

고려사에 의하면 개경수복작전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건 정세운이었다. 이 때문이었을까? 공민왕은 총병관을 김용에서 정세운으로 교체한 후, 각지에 군대 모집을 지시한다. 나라의 모든 국력을 끌어모아 고려는 20만의 병력을 모을 수 있었다.

 

20만 대군은 정세운의 지휘 아래 안우, 이방실, 김득배, 최영, 이성계 등 고려군 최고의 장수들과 함께 1월 17일 개경에 집결하였다. 1월 18일 새벽 권희와 이성계는 기병을 이끌고 숭인문을 공격하여 성문을 여는데 성공한다. 이를 틈타 장수들이 사방에서 공격하자, 홍건적은 개경탈출을 결정한다. 그리고 예상외의 역공을 취한다.

 

홍건적이 탈출한 방향은 숭인문과 그 위쪽의 탄현문이다. 이 지역은 고려군이 공격해온 곳이었다. 홍건적은 고려의 예상을 뒤엎고, 숭인문과 탄현문 쪽으로 역공을 취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성계가 죽을 뻔한 위기를 겪을 만큼, 고려로서는 예상하지 못한, 홍건적으로서는 사활을 건 작전이었다.

 

두 차례의 홍건적의 침략을 고려는 물리쳤다. 이 과정에서 큰 공을 세운 정세운과 삼원수(안우, 이방실, 김득배)는 고려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공민왕에게는 이것이 문제였다.

 

 

 

12. 토사구팽
홍건적을 대파하고 개경을 수복한 고려군, 총병관 정세운과 도원수 안우, 원수 이방실, 김득배는 개선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전장을 다녔던가? 고려의 평화를 위해서 옆구리에 칼 찬자의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던가?

 

이제 쉴 수 있겠구나?, 이제 고려에도 평화가 온 것인가 하는 생각에 젖어 있을 때 그들에게 김용이 공민왕의 밀서를 보냈다. 정세운을 제거하라는 것이었다.

 

밀서를 받은 안우와 이방실은 왕의 명이니 따를 수 밖에 없다고 했다. 반면 김득배는 정세운을 체포해 왕에게 압송해 왕의 처분을 받자고 했다. 그러나 안우와 이방실이 강력하게 주장하자, 결국 김득배 역시 정세운 제거에 동참한다.

 

정세운 제거 변란 소식을 들은 공민왕은 사면령을 내렸다. 그리고 여러 장수들에게 왕이 임시로 머물고 있는 상주행궁으로 올것을 명했다. 삼원수 등 장수들은 왕명을 따라 남하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안우였다.

 

안우가 상주행궁에 들어서자, 김용이 목인길에게 인도하게 했다. 안우가 중문에 이르자, 김용이 문을 지키는 장사들에게 명령했다.

 

"안우의 머리를 내리쳐라."

 

안우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차고 있는 주머니를 세 번 두드리며 크게 부르짖었다. "공격을 조금만 늦추어라. 원컨대 주상 앞에 가서 주머니 속의 문서를 바친 후에 죽음에 나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장사들은 안우의 외침을 무시하고 철퇴를 내리쳤다. 안우의 죽음과 함께 정세운을 죽이라는 밀서도 사라졌다. 안우가 죽자, 공민왕은 이방실과 김득배를 잡는 자에게 관직을 세 등급 올려준다는 포고문을 내렸다.  이방실과 김득배 역시, 안우와 비슷한 최후를 맞이했다.

 

홍건적을 격파하고 고려를 구한 영웅들. 그들은 왜 이렇게 죽은 것일까? 

 

 

 

13. 공민왕과 김용

공민왕의 밀서를 보낸자 김용. 김용과 정세운은 공민왕이 북경에 있을 때부터 호종했던 연저수종공신이었고, 군부의 주도권을 쥐고 경쟁하던 라이벌 관계였다. 처음 홍건적이 쳐들어왔을 때, 총병관은 김용이었다. 그러나 절령방어선에서 패배하고, 개경까지 빼앗기면서, 김용은 해임되고 그 자리에는 정세운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정세운은 개경 수복에 성공했다.

 

김용으로서는 불안했다. 이제 군 내부의 실질적 권력은 정세운이 장악할 것이다. 김용은 이것이 두려웠다. 권력에 밀려나는 것이 두려웠던 김용은 거짓밀서를 보내, 정세운을 제거하고, 이어서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른 즉 자신의 잠재적 라이벌이 될 수 있는 삼원수마저 제거한 것이다.

 

이것이 다일까? 정세운과 삼원수의 죽음에 관한 음모의 전부일까? 김용이 머리일까? 아님 그 역시 진짜 배후는 따로 있는 것일까?

 

안우가 죽은 것은 상주행궁이었다. 안우의 처절한 외침을 공민왕은 듣지 못했을까? 왜 공민왕은 이방실과 김득배에게 진상을 묻지 않고, 즉결처형을 명령했던 것일까?

 

고려사 신돈 열전에는 공민왕의 성격을 "천성이 의심이 많고 잔인해서 심복대신이라도 권세가 커지면 의심해서 죽였다고"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역사를 보면 어리석은 군주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뛰어난 신하를 두려워 하고, 결국엔 죽인다는 것이다. 홍건적의 침략을 물리친 정세운과 삼원수는 백성들의 지지를 받으며 영웅으로 떠오를 것이 분명했다. 공민왕은 이것이 두려웠을지 모른다. 그래서 자신의 심복인 김용으로 하여금 제거하게 했던 것은 아닐까?

 

안우와 이방실은 왜 공민왕의 밀서를 아무런 의심없이 믿었던 것일까? 처음에 반대했던 김득배 역시, 왕이 이런 명령을 내렸을리 없다는 식의 말을 하지 않았다. 공민왕의 시기심과 배신의 속성을 무장들 역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즉위 초 인당을 희생양으로 삼아, 원의 압력을 피했을 때부터 신하들은 알고 있었다. 공민왕이 토사구팽의 달인임을 삼원수는 이번에 사냥되는 사냥개가 정세운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민왕의 머릿속에는 삼원수 역시 토사구팽의 대상이었다.

 

삼원수 제거 이후 발생하는 흥왕사의 변 역시, 공민왕이 배후에 있는 친위쿠테타일 확률이 높다. 흥왕사의 변으로 권력의 핵심으로 공민왕에게 당당히 'no'라고 말할 수 있었던 시중 홍언박이 제거되었다. 흥왕사의 변이 진압된 이후 체포된 김용은 심문하던 임견미에게 "내가 8년 동안 서열 3위의 재상을 지내면서 이루지 못한 것이 없었는데, 어찌 임금을 범하는 마음을 가졌겠는가. 다만 홍시중을 제거하고자 했을 뿐이네"이렇게 말했다.

 

흥왕사의 변은 김용이 보낸 자객일당이 흥왕사 행궁을 습격해 공민왕을 시해하려 했던 사건이었다. 변란이 일어나자, 공민왕은 명덕태후의 침실에 들어가 숨었고, 노국공주가 그 문 앞에 앉아 가려주었으며, 왕의 침실에는 환관 안도적이 왕을 대신해 누워 있었기에 목숨을 건졌다고 고려사는 기록한다.

 

문 앞에 노국공주가 앉아 있었다는 것은 그 안에 공민왕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김용이 보낸 자객들은 그 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왕을 죽이려는 의도는 없지 않았을까? 국문장에서 김용의 말처럼 흥왕사 변란의 진짜 목적은 공민왕이 아니라 막강한 권신으로 성장한 홍언박이 아니었을까?

 

흥왕사의 변란이 진압된 직후, 김용은 술에 취해 염제신에게 "삼환을 제거했지만 즐겁지 않은 것은 무엇때문일까요?"말했다.

 

삼환에 대해 어떤 사람은 홍언박, 정세운, 삼원수라고 추측했다. 그리고 이 삼환은 김용이 아니라 공민왕의 근심이었다. 강력한 힘을 가진 권신들, 나라의 기둥이 될만한 신하이나, 왕에게는 위협적인 존재들, 뛰어난 신하를 포용할 능력이 없던 공민왕에게 그들은 제거의 대상이었고, 김용은 제거를 위한 공민왕의 사냥개였다.

 

김용이 우울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제는 자신의 차례임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그 예감대로 김용은 제거되었고, 김용이 죽던 날 공민왕은 눈물을 흘리며,

 

"이제 믿을 만한 자가 누가 있겠는가" 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의심이 많고, 잔인했으며 충실한 신하라도 언제든 버릴 수 있는 군주 공민왕. 그의 집권 후반기를 장식할 마지막 희생양이 남아있었다. 바로 신돈이었다.

 

    

   

 

14. 공민왕과 신돈의 첫 만남

옥천사 노비의 아들 신돈과 고려의 국왕 공민왕. 이 둘의 첫 만남은 어땠을까? 기록에 의하면 어느날 공민왕의 꿈에 자객이 나타나 공민왕을 위협하자 스님이 나타나 자객을 제압했다고 한다. 다음날 공민왕이 어머니 명덕태후에게 간밤의 악몽을 야기하고 있을 때, 왕실의 외척이었던 김원명이 신돈을 데리고 와서 왕에게 소개했다. 공민왕은 신돈을 보더니 꿈에서 자신을 구해준 스님과 똑같았기에 깜작 놀랐다고 한다.

 

이후 공민왕은 신돈을 가까이 했는데, 재상 정세운과 이승경이 요승이라며 신돈을 살해하려 하였고, 이후 신돈은 한동안 도피 생활을 해야 했다.

 

하룻밤 꿈의 인연 때문에 공민왕은 신돈을 기용해 전권을 맡겼던 것일까? 아니다. 공민왕은 신돈을 이용해서 왕권을 넘어서고, 고려를 좀먹고 있던 권문세족들을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15. 간악한 도당들

"간악한 도당들이 남의 토지를 겸병함이 매우 심하다. 그 규모가 한 주보다 크기도 하고, 군 전체를 포함해 산천으로 경계를 삼는다. 남의 땅을 자신들이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은 땅이라고 우기면서 주인을 내쫓고 땅을 빼앗아 한 땅의 주인이 대여섯 명이 넘기도 하며, 전호들은 세금으로 소출의 팔구할을 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간악한 도당이 고려 말의 개혁 대상인 권문세족이다. 권문세족은 고려의 전통 가문과 무신정권기 득세한 가문, 무신정권 때 관리로 진출한 가문과 원나라 지배 이후 성장한 가문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들은 도평의사사를 장악해 정치권력을 독점했다. 이들 권문세족이 한자리에서 모여 결정한 사항을 왕이라고 할지라도 함부로 거부할 수 없었기에 권문세족의 힘은 사실상 왕 위에 있었다. 오늘날로 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대기업 주인들이 해당될 것이다. 당시 권문세족들은 재력과 권력을 모두 가졋으나 오늘날에는 재력만 가진 것이 대기업주들이지만 권력은 재력과 상통하므로 재력이 곧 권력이 된다.

 

공민왕은 이들 권문세족이 장악한 도평의사사 때문에 여러 차례 굴욕을 당해야 했다. 공민왕 11년 공민왕이 총애하는 신하에게 충청도 공주 창고의 쌀을 하사한다는 친필 문서를 내렸지만, 지방장관인 안렴사 이지태가 양부 즉 도평의사사를 거치지 않고 왕명이 내려왔다는 이유로 군량을 내주는 일을 거절하는 일이 있었다. 공민왕 13년에는 왕실재정 창고인 풍저창의 책임자 정득년에게 쌀을 환관에게 하사하도록 명령했지만, 정득년 역시 왕명이 양부를 거치지 않았다며 거부했다. 왕명조차 권문세족이 장악한 도평의사사사를 경유해야 하는 상황, 공민왕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처럼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던 권문세족은 그 힘을 자신들의 사익을 채우는데 사용했다. 

 

산천을 경계로 삼을 정도의 거대한 농장은 권문세족의 사익 추구의 결과물이었다. 이들의 거대한 농장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탈법적인 방법들을 동원한 결과물이었다. 농민에게 고리대를 놓아 갚지 못하면 토지를 빼앗는 것은 온건한 방법에 속했으며, 무력을 사용해 토지를 약탈하거나 강점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렇게 형성된 대규모 농장은 "당시 권귀와 환관들이 모두 사전을 받아 많은 것은 2~2천 결에 이르렀는데, 각기 좋은 땅을 차지하고도 모두 부역은 한 푼도 내지 않았다."는 고려사의 기록처럼 이들 농장은 세금을 내지 않았다.

 

고려의 토지제도는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 즉 수조권을 개인이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정부가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사전과 공전으로 나누었는데, 권문세족들이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아 형성된 거대농장들은 모두 사전으로 나라에 세금을 내지 않았다. 

 

권문세족들의 대토지 독점은 자영농의 몰락을 가져왔다. 자영농의 몰락과 대규모 농장 형성은 국가 조세체계의 붕괴로 이어졌다. 또한 농장 소속의 노비가 되어 공납과 부역을 면제받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긴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권문세족의 노비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는 곧 병농일치의 국방체계 붕괴였고, 고려라는 국가 시스템의 붕괴였다.

 

공민왕 역시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홍건적의 침략, 몽골의 간섭 등 외부적 문제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공민왕은 이 문제를 해결해 줄 파트너를 찾았다. 그 파트너가 바로 신돈이었다.

 

 

 

 

 

16. 사부가 나를 구원하고 내가 사부를 구원할 것이다.
왜 신돈이었을까? 그 이유를 공민왕은 이렇게 말한다.

 

"왕이 재위한 지 오래되었으나 많은 재상이 뜻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일찍이 생각하기를, 세신 대족(世臣大族)은 친당(親黨)이 뿌리를 연하여 서로 가려 덮어주고, 초야(草野)의 신진(新進)은 실상을 속이고 행실을 꾸며서 명망을 취하여 귀현(貴顯)하기에 이르면 대족에 혼인하여 그 처음을 깡그리 버리고, 유생(儒生)은 나약하여 굳셈이 적은데다 또 문생(門生)이니 좌주(座主)니 동년(同年)이니 부르며 끼리끼리 무리를 이루어 사정(私情)에 따르므로 이 세 부류는 모두 쓸만하지 못하다 하고, 세상을 떠나 독립(獨立)해 있는 사람을 얻어 인순(因循)의 폐단을 개혁하려 하였다. 그러던 차에 신돈을 보고 나서 그는 도를 얻어 욕심이 적으며, 또 미천한 데에서 나와 친당(親黨)이 없으므로 일을 맡기면 마음 내키는 대로 하여 돌아보거나 거리낄 것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중 가운데서 뽑아내어 국정을 맡겨 의심치 않았다."

- 동사강목 -

 

신돈은 이른바 아웃사이더 였다. 기존의 기득권 네트워크에 속해 있지 않은 옥천사 노비의 자식으로 백성들의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개혁의 필요성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약자의 대리자. 그래서 였다. 신돈이라면 권문세족에 휘둘리지 않고, 공민왕을 대신해서 전면적 개혁을 추진 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판단한 것이다.공민왕은 사심없이 강력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참신한 인재를 구하려고 노력했던 중 궁여지책으로 만난 사람이 바로 승려 신돈이었다. 

 

고려사에는 공민왕이 신돈에게 개혁을 추진해 줄 것을 요청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공민왕이 신돈에게 승려의 신분을 버리고 벼슬하여 세상 일 구하기를 청하니, 신돈이 겉으로는 탐탁지 않아하면서 왕의 뜻을 더욱 굳건하게 하였다. 왕이 다시금 요청하니 신돈이 아뢰기를, '일찍이 제가 들어본 바에 따르면, 국왕과 대신이 참소와 이간질하는 말을 많이 믿는다 하오니, 이와 같은 일이 절대로 없어야만 세상에 복과 이익을 줄 수 있습니다.' 라고 했다.             

 

이에 왕이 손수 맹세하는 글을 썼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사부가 나를 구원하고 내가 사부를 구원할 것입니다. 생사를 같이하여 다른 사람의 말에 서로 의혹을 품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부처님과 하늘이 이를 증명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고려사 열전 신돈 -

 

고려사에서 공민왕에 대하여 "왕은 시기심이 많고 잔인하여 심복 대신이라 할지라도 권세가 강해지면 반드시 꺼려 목을 베었다"고 전한다. 고려사절요에도 "처음에 유숙이, 왕이 의심과 시기가 많아서 공신 중에 목숨을 보전한 자가 적음을 보고, 자기의 지위와 권세가 이미 한도에 차서 장차 화가 닥칠 것을 두려워하여 여러 번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원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신돈은 이러한 왕의 성격을 몰랐을까? 인당, 정세운, 김용, 삼원수 처럼 자신 역시 효용가치가 다하면 제거될 수 있다는 생각을 신돈 역시 했을 것이다. 그래서 각서를 요구했다. 부처님과 하늘에 멩세코 서로 의혹을 품지 않고 서로를 지키겠다는. 그러나 굳건한 맹세는 훗날 티끌과 같은 먼지가 되버린다.

 

 

 

 

17. 신돈과 공민왕

권문세족의 힘과 그들의 사익추구가 고려를 병들게 하고 왕권을 위협한다는 것을 공민왕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공민왕은 권문세족과 본격적 힘 겨루기를 본인이 직접하지 않았다. 이 껄끄럽고 부담스러운 작업은 신돈에게 맡기고, 자신은 죽은 노국공주의 영전에 들어앉았다. 모든 책임은 신돈에게 미루고 공민왕이 신돈에게 맡긴 역할은 기존의 정치판을 뒤엎어, 왕권을 위협하는 권문세족과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과정에서 성장한 무장세력들을 숙청하는 악역이었다. 신돈이 그 역할을 받아들인 것은 고려를 개혁하고자 했던 개인의 열망 때문이었다.

 

김헌식은 자신의 저서 "신돈 미천하니 거리낄 것이 없네"에서 신돈이 구상한 개혁 로드맵을 이렇게 정리한다. 1단계는 왕과 가까워 진다. 2단계는 문서화를 통해 왕의 신임을 약속 받는다. 3단계는 공식적 직책을 통해 행정적 권한을 갖고, 4단계는 권문세족들을 철저히 응징하는 것이며, 5단계는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6단계는 새로운 세력을 육성하는 것,  마지막 7단계는 지방의 권력까지 통제하는 것이었다.

 

신돈의 권력은 왕의 전폭적인 신뢰가 그 기반이었다. 이는 강점이기도 하면서 약점이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공민왕은 배신의 아이콘이었기 때문이다. 신돈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문서로 된 약속을 요구했던 것이지만, 비정한 정치계에서 문서로 된 약속은 얼마나 구속력을 가질 수 있을까?


 

 

18. 숙청

"신돈이 국정에 참여하여 권세를 잡은 지 30일 만에 훈친과 명망 있는 자를 파면해 내쫓았고, 재상과 대간의 임명이 모두 그 입에서 결정되었다."

- 고려사절요 -

 

"신돈은 상벌의 권한을 제 손에 쥐고 은혜와 원수를 가려서 꼭 보복했으며, 세가대족들을 거의 몰살, 살육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호랑이처럼 여겼다."

- 고려사 -

 

"사람을 보내어 최영과 이귀수 등을 국문한 뒤 관직을 삭탈하고 멀리 유배하였다.편조(신돈)가 최영 등을 모함하고 내신 김수만과 결탁하여 상하를 이간시켰다. 그의 무리 이득림, 오계남 등을 나누어 보내어 최영, 이귀수를 국문하니, 최영 등이 모두 거짓 자복하고 빨리 형을 시행토록 청하였다. 이에 최영, 이귀수, 양백익, 박춘 등의 관직을 삭탈하고 모두 그 가재를 적몰하고는 먼 곳으로 유배하였다."

- 고려사절요-

 

공민왕이 신돈에게 준 벼슬은 영도첨의사사, 판중방감찰사사, 취성부원군, 제조승록사사, 겸 판서운관사였다. 영도첨의사사는 도첨의사사의 최고재상이었고, 판중방감찰사사는 상장군, 대장군의 회의기구인 중방과 관리를 규찰하는 감찰사의 우두머리였다. 제조승록사사는 승려들을 관장하는 승록사의 우두머리였다. 이러한 막강한 권력을 확보한 신돈은 군부의 실력자 최영을 실각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권문세족을 향해 사정없이 숙청의 칼을 휘둘렀다.

 

이 과정에서 제거된 이들의 면면을 보면 연경에서 공민왕을 호종하여 공을 세우고 왕의 측근이 된 사람, 왜구나 홍건적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공을 세운 사람, 내부 반란을 진압하고 공신이 된 사람, 권문세가의 집안이거나 구 권신인 사람들로 기득권을 옹호하고, 백성들의 토지를 수탈한 무리들이었다. 처절한 응징을 통해 권문세족들을 숙청한 신돈은 다음 단계로 고려 사회 최대의 뇌관을 건드린다. 


 

 

19. 전민변정도감

"그동안 귀족이나 권문세족에게 억울하게 빼앗긴 토지를 백성들에게 돌려줄 것이며, 선량한 백성들을 노비로 부리는 그들을 일벌백계 할 것이며, 억울하게 노비가 된 백성들을 해방시킬 것이다. 잘못을 한 관리가 있다면 그 재산을 몰수하여 가난하고 헐벗은 이들에게 나눠줄 것이다."

 

김현식이 쓴 '신돈, 미천하니 거리낄 것이 없네'에 나오는 구절이다. 실제로 신돈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백성들은 속이 후련했을 것이고 권문세족들은 분노에 이를 갈았을 것이다. 고려사회 최대의 문제, 고려를 썩어가게 만들고 있던 대농장 문제 해결에 신돈은 손을 대었다. 이것이 신돈이 출사한 목적이었고, 공민왕이 신돈을 선택한 이유였다.

 

전민변정도감을 통해 신돈은 권세가들이 불법으로 빼앗은 토지를 백성들에게 돌려주고, 강제로 노비가 된자들을 풀어주는 조치를 단행했다.

 

백성들은 신돈을 성인으로 부르며 추앙했다. 그리고 권문세족들은 신돈을 향해 저주의 칼날을 갈았다. 그 칼날은 이제 신돈의 목숨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20. 신돈 제거 계획

1367년 10월 첨의재상 오인택이 전직 첨의시중 경천흥, 전직 첨의재상 목인길, 삼사재상 안우경, 삼사재상 김원명, 전직 밀직재상 조희고, 개성부 장관인 판개성부사 이수능, 첨의재상 한휘, 상호군 조린, 윤승순 등을 불렀다. 이들의 모의내용은 하나였다.

 

"신돈을 제거해야 한다."

 

이 계획은 판소부시사 강원보의 밀고로 사전발각되었다. 이들은 곧바로 순군부 옥사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고, 남쪽 변방의 관노로 보내졌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이었다. 이듬해인 1368년에도 신돈을 살해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신돈은 자신을 제거하려는 자들에게는 무자비한 응징으로 답했다. 그러나 신돈의 진짜 위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신돈을 노리는 가장 무서운 칼이 이제 조금씩 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바로 공민왕이었다.


 

 

 

 21.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
공민왕은 의심이 많은 군주였다. 동시에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고 맡은바 직무를 충실히 수행한 신하를 배신하는 일이 잦았던 군주였다. 인당, 정세운, 삼원수(안우, 이방실, 김득배), 김용, 홍언박, 유숙 등이 모두 비슷한 운명을 당했다.

 

 『한비자』에 따르면 "만약 왕이 현명한 사람을 등용하면 그 신하는 장차 자기의 현명함을 이용하여 왕을 위협할 것" 이라고 했다. 이것이 공민왕이 신하들을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그 시각에서 신돈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신돈 또한 이같은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신돈은 자신이 권문세족들을 숙청할 수 있는 힘, 권문세족들이 불법으로 빼앗은 토지를 백성들에게 돌려 줄 수 있는 힘의 근원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공민왕 이라는 군주였다. 이것은 다시 말해 공민왕이 그 권한을 회수한다면 그대로 끝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신의 존망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는 자에대한 의구심, 총애하는 신하를 토사구팽식으로 제거했던 공민왕에 대한 의구심, 신돈 역시 그러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사에는 "왕이 자기를 꺼릴까 봐 두려워 반역을 도모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돈이 정말 반역을 도모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신돈은 공민왕에 대해 불안과 공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신돈의 집에 관료들이 모여들고, 신돈을 위해 화산대 즉 불꽃놀이를 했다는 기록. 공민왕은 분명 이것을 위험하게 여겼을 것이다. 공민왕은 신돈 제거를 결심한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사강목 등에 실린 기록을 보면 신돈이 제거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관직을 구하는 자는 모두 신돈에게 붙었는데, 선부의랑 이인이 신돈의 문객이 되어 반역을 모의한 흉악한 계책을 자세히 알고 몰래 명부를 만들어 이를 기록했다. 그리고 일이 급박해지자 한림거사라 칭하고 글을 써서 밤에 재상 김속명의 집에 던진 뒤 변장하고 도망쳤다.


김속명이 이 사실을 아뢰자 왕이 처음에는 오히려 이인을 의심했으나, 신돈의 무리를 잡아 이들을 국문하니 모두 증거가 확실했다. 왕이 명하여 신돈의 무리인 기현, 최사원, 정귀한, 진윤검, 기중수 등을 잡아다 목을 베었다. 드디어 신돈을 수원으로 귀양 보낸 뒤 왕이 탄식하며, "익재가 일찍이 신돈은 바른 사람이 아니므로 반드시 후환이 있을 거라 하더니 그 선견지명을 따를 수가 없구나" 라고 했다.

 

대사성 임박과 판사 김두를 수원으로 보내 신돈의 목을 베고 팔다리를 찢어 사방에 돌리고 개경의 동문에다 목을 매달았다."

 

그리스 역사가, 크세노폰은 "전제군주의 삶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은 공포"라고 했다. 누군가 자신을 해칠지 모른다는 공포, 강하고 현명한 신하을 두려워 하는 마음. 공민왕 역시 그런 불안감 때문에 측근들을 버렸고, 자신이 기용한 신돈 마저도 처참하게 버렸다.


 

 

 22. 공민왕의 죽음

1374년 9월 공민왕은 몸과 마음을 섞었던 자제위 소년들에 처참하게 살해당한다. 최만생이 내리친 검에 골수가 튀어 벽을 뒤덮었다고 한다. 1374년 당시 최대의 권신은 최영과 이인임이었다. '신돈과 그의 시대' 저자, 김창현은 이무렵 최영과 이인임 역시 제거의 위기에 몰리고 있었다고 말한다. 공이 많고 강한 신하를 제거하는 공민왕의 성향을 생각했을 때 자신들 역시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전란의 시대3 - 고려후기편'의 저자 임용한은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가 홍언박의 손자인 자제위 홍륜에게 홍언박의 죽음에 공민왕도 책임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홍륜의 동료들에게는 공민왕이 자제위 모두를 몰살시키려 한다고 속삭이지 않았을까? 두 사람의 견해를 종합한다면, 그 누군가는 이인임과 최영이 될 수도 있다.

 

무리한 해석일 수 있다. 그러나 공민왕의 종착역은 자신이 뿌린 업보라는 느낌이 들게 한다. 공이 많고 충직한 신하들에게 배신으로 답했던, 그의 정치여정의 업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