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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1,053 : 해방과 건국 13 (한국전쟁과 전후복구 2)

 

 

 

한국의 역사 1,053 : 해방과 건국 13 (한국전쟁과 전후복구 2)

 

 

  


위태로운 피란길
중공군의 대공세로 다시 피란길에 오른 서울 시민들이 한강을 건너고 있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등에 봇짐을 메고 뗏목을 엮어 만든 부교에 몸을 맡겼다(1951년 5월 29일).


선물 받는 '집 없는 천사'
미국 해군들이 경북 포항의 전쟁고아들에게 줄 선물을 트럭에서 내리고 있다. 안내판에는 '집 없는 천사들을 기르는 곳'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1953년 5월 5일).


얼음장 같은 이 강물만 건너면 …
늙은 아버지를 업고 차가운 강물(충북 청주 일대)을 건너는 아들의 모습이 애처롭다. 이런 장면은 전쟁 중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1951년 1월 14일).

 


인적사항 목줄 맨 북한군 포로
포로로 잡힌 북한군 병사들이 새로 배급될 옷을 기다리고 있다. 포로들의 인적 사항을 자세히 기록한 목걸이가 눈에 띈다(1950년 10월 2일).

 

 

한국전쟁(6.25전쟁)과 전후복구(1950~1959) 2

 

 

2. 전후 50년대 남한의 사회와 문화

      

이승만정부는 전쟁 중 임시수도인 부산에서 국민들의 반공정서를 이용하여 독재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온갖 비상수단을 동원하였다. 1951년 12월 국민회, 대한청년단, 노동총연맹, 농민총연맹, 대한부인회 등 우익단체를 토대로 여당인 자유당을 조직하고, 1952년 7월 계엄령을 선포한 가운데 이승만의 재선을 위한 야당의원들을 헌병대에 연행하고, 백골단을 비롯한 압력단체들을 동원하여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통과된 새 헌법에 기초하여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되고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함태영이 당선되었다.

 

대통령에 재선된 이승만은 영구집권을 위한 정비작업에 들어가, 야심이 있는 이범석계열을 자유당에서 제거하고, 충성심이 강한 이기붕으로 하여금 자유당을 이끌게 하였다. 그리하여 전쟁이 끝난 1954년 11월 27일 대통령 중임제한을 철폐하는 개헌안을 표결에 부쳤다. 개표 결과 개헌에 필요한 136표에서 1표가 모자라 부결되었으나, 이승만 추종자들은 사사오입의 궤변을 들어 통과시킴으로써 국민들의 빈축을 샀다.

 

새 헌법에 기초하여 1956년 5.15 선거가 치러지고, 이승만은 세 번째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야당인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가 '못 살겠다. 갈아보자.' 라는 구호를 내걸고 인기가 높아져 있던 차에 갑자기 사망하고, 평화통일과 혁신노선을 내세운 진보당의 조봉암 후보가 전체 유효표의 30%를 차지하였으며, 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장면 후보가 이기붕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는 등 큰 파란을 일으켰다. 이승만의 인기는 농촌을 제외하고 도시 지역에서는 급락하고 있었다.

 

위기에 몰린 이승만정부는 민주당을 제외한 혁신계 정치인들을 좌익 혹은 간첩으로 몰아 탄압에 나섰다. '신국가보안법'이 제정되고(1958.12), '반공청년단'이 조직되었으며(1959.1), 냉전정치를 종식시키려던 진보당  조봉암을 간첩혐의로 사형에 처하였다(1959.7). 장면을 지지하였던<경향신문>도 폐간시켰다(1959.4). 이승만과 자유당은 마침내 1960년 3월에 실시된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추악한 부정선거로 몰고감으로써 마침내 4.19 학생 시민혁명을 유발하고 말았다.

 

한편 한국전쟁(6.25 전쟁)은 원래부터 취약하던 남한의 경제기반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실업과 일플레가 극심한 가운데, 미국의 원조가 전후복구사업을 크게 도왔다. 미군정기에도 4억여 달러의 원조가 있었지만, 자유당 집권기에는 31억 달러의 원조가 제공되었다. 원조물품의 절반 정도는 원자재와 중간재였고, 4분지 1은 농산물이어서 식량의 어려움을 덜어주었다. 그러나 미국의 원조액의 절반은 군사원조에 충당되어 산업재건에는 적극적으로 기여하지 못했다.

 

미국 원조에 의하여 성장된 산업은 주로 소비재공업이었다. 이른바 삼백산업이라 하여 밀가루, 설탕, 면화산업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리고 몇몇 기업이 정부의 특혜 속에 삼백산업을 일으켜 점차 재벌로 성장하였고 뒤로는 정치자금을 제공하였다. 5~8%의 경제성장이 50년대말까지 지속되었고 소비재산업의 성장으로 극도의 궁핍은 어느정도 벗어났으나, 산업의 대외의존도가 90%에 이르고 공업생산은 일제말기의 절반수준을 넘지 못하였다. 단지 쌀농사만이 일제시대 생산수준을 넘어섰다. 특히 규모가 큰 수력발전소가 모두 북한에 위치한 관계로 남한의 전기사정은 극히 어려웠으며, 1960년 당시 농촌의 82%, 서울의 39%가 전기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50년대 말을 고비로 하여 경제성장이 가속화되고, 장기경제발전계획이 수립되었음을 기억해 둘 만하다. 1958년부흥회 안에 '산업발전위원회'가 설치되고, 1960년 4월 15일에 '3개년경제발전계획시안'이 국무회의에서 승인되었다. 이 계획은 며칠 후 자유당정권이 몰락하면서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으나, 그 후 민주당정권과 박정희정부의 경제개발은 이에 기초한 것이다.

 

자유당시절의 50년대는 남한사회의 전통질서가 밑바닥에서 해체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일제시대에도 유교전통이 강한 남한사회는 양반중심의 권위질서가 지방과 농촌에 남아 있었고, 북한은 남한과는 다른 서민적, 기독교적 기풍이 강했다. 그런데 수백만의 북한주민이 월남하여 남한사회의 각 분야에서 활약하고 지도자로 부상하면서 양반문화의 권위는 급속도로 붕괴되어 갔다. 더욱이 한국전쟁 중 수백만의 서울시민이 남쪽으로 피난하여 서울문화의 지방확산이 촉진되어 이 또한 지방사회의 양반문화를 해체시키는 기능을 하였다. 이와 같이 민족대이동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지방문화의 해체, 권위질서의 붕괴, 양반 지주계급의 소멸로 급속한 수평사회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변동은 사회발전의 활력소로 작용하였으나 한편 전통과 권위가 무너진 무질서와 가치관의 혼란을 초래하는 요인이 되었다.

 

미국의 경제원조와 함께 홍수처럼 밀려들어온 미국문화도 남한사회의 가치관과 생활풍속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사상이 전통적 가치관을 해체시키면서 근대시민정신을 고양시킨 것도 사실이지만, 서양문화에 대한 맹목적인 수용으로 숭배가 지나쳐 고유한 전통을 총체적으로 비하하는 민족허무주의적 사고가 팽배함으로써 주체성의 상실을 가져왔다. 이는 일제 식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남한 사회의 문화풍토를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당시 뜻있는 지식인들 사이에는 문화식민지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3. 50년대 북한의 권력강화와 사회주의정책

     

북한에서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김일성과 노동당의 독재가 한층 강화되었다. 북한정권이 처음 수립될 당시에는 당이나 내각에서 계파가 다른 공산주의자들이 어느 정도 안배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쟁을 치르면서 김일성계를 제외한 다른 계파의 인물들이 차례로 제거되기 시작하였다.

 

먼저, 허가이를 비롯한 소련계가 전쟁중인 1950년 10월 당조직을 잘못 정비한데 대한 책임을 이유로 제거되었고, 이해 연말 평양방위를 잘못한 책임을 지고 연안파의 김무정 장군이 군에서 숙청되었다. 1953년에는 부수상 박헌영과 당비서 이승엽을 비롯한 남로당계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사업이 벌어졌다. 이들은 종파분자이자 미제국주의 스파이로서 쿠테타음모를 시도했다는 등의 혐의가 씌워졌다. 이로써 월북한 남한 좌익의 원로, 중진들이 김일성과 권력투쟁에서 패배를 당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김일성의 입장에서 다음 단계의 거북한 경쟁자는 연안파 인사들이었다. 김일성은 한국전쟁 후 스탈린노선을 모델로하여 자립경제를 목표로 중공업과 경공업의 병진정책을 밀고 나갔으나, 연안파의 최창익과 박창옥 등은 집단지도체제와 인민생활 향상을 위한 경공업우선정책을 주장하여 마찰을 빚었다. 이들은 1953년에 스탈린이 사망하고, 후르시쵸프와 브레즈네프가 등장하여 스탈린을 비판하고 나서자 이에 자극을 받아 유연한 수정주의노선을 주장하다가, 1956년 종파주의, 사대주의, 교조주의, 반혁명주의로 낙인을 받아 권력에서 밀려났다. 김일성이 '주체'를 강조하고 나선 것이 이 무렵으로서 소련의 영향을 차단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남로당계와 연안파가 제거됨으로써 일제시대 조국광복회 관련 인사들이 주축이된 이른바 갑산파만이 남았다. 그런데 갑산판마저 군비지출과 경제정책에 대한 이견을 이유로 1967년에 제거되어 북한은 김일성파의 독무대로 변하고 말았다. 나맘에서 이승만이 권력이 강화되는 것과 북한의 김일성 권력 강화는 서로 병행하면서 극단적인 대결구도를 이루면서 전후 복구사업을 추진하였다.

 

전쟁의 피해는 미군의 공습을 더 받은 북한측이 심하였다. 1953년의 공업생산은 1949년의 64%로 감소하였다. 북한은 전후복구와 자립적 민족경제 확립을 목표로 하여 1954년부터 '경제부흥 3개년계획', 1957년부터 '1차 5개년계획'을 연속적으로 세우고, 중공업과 경공업의 병진정책을 밀고 나갔으며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상당한 원조가 제공되었다. 그리고 주민들의 생산노동참여를 경쟁시키기 위해 이른바 '천리마운동'(1957)과 '3대혁명운동'(1958)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북한 경제에서 중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1960년 당시 70%를 넘어서게 되고, 1954~1960년 기간중 연평균 성장율은 20% 내외의 고속성장을 하였다. 그리하여 제철, 기계, 조선, 광업, 전기, 화학 등의 분야에서는 남한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현격한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50년대 후반 남한에서 '북진통일론'이 고개를 숙이고, '평화통일론'이 대두하게 된 것은 이러한 사정과도 관련이 있었다.

 

한편 북한의 농업도 크게 변하였다. 1946년 소위 '민주개혁'으로 이루어진 토지재분배는 토지사유를 인정하여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하여 토지의 사적 경영을 사회주의 경영으로 바꾸는 사업이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전쟁이 끝난 1953년부터 농업협동화에 의한 협동농장 건설이 추진되어 1958년에 완료되었다. 이 사업이 끝나자 북한은 다시 협동농장의 규모를 더욱 확대하여 한 개 협동농장의 규모가 평균 80호에서 3백호로 커졌다. 농업협동화를 계기로 북한은 토지사유를 부정하고 사회주의 의 기초를 다지는 단계로 나가게 되었다.

 

북한은 농업협동화와 병행하여 개인수공업과 상업도 협동화를 추진하여 영세한 개인 상공업자들을 집단화시켰다. 천리마운동은 농업과 상공업에도 적용되어 한동안 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왔다. 그러나 사회주의적 생산방식은 시간이 흐를수록 기술개발이 저조해지고 주민의 생산의욕이 감퇴하면서 1960년대 중반 이후로는 생산력이 저하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새벽 하늘 샛별처럼 나타났다 사라져간 역사속 인물들

 

역사는 도도한 강물처럼 흘러가고 인간 개개인은 객체가 되어 역사의 물줄기 일부분을 형성하는 듯하다. 해방정국의 혼란한 가운데 남북으로 갈라진 한반도에는 사상과 이념이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주관대로 자신의 인생길을 선택하였다.  어떤 이는 가문이 뛰어난 명문가 출생이고 어떤 이는 부자집 출신이며 어떤 이는 소련, 중국, 미국 ,영국 등 해외문물을 익힌 유능한 인재도 있었고 어떤 이는 갖은 고생을 하면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며 헌신하였

다. 또 독립군 군자금을 대고 무기를 마련하여 독립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고 어떤 이는 중국군에 투신하여 고위 장성에 오르기도 하였고 또 대부분 무리를 지어 각종 단체를 만들어 힘을 배양하기도 했다. 그래서 임정파, 민족주의자파, 사회주의자파, 중국파, 소련파, 미국파, 중도파, 친일파 등 지도층은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면서 자신들의 신념대로 무리를 지어 힘을 조직하고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독립국가 건설에 투신하였다.

 

강대국의 힘에 의해 지난한 일제식민시대가 청산되고 해방이 되어 이 땅에 광명이 찿아왔다. 조선은 힘이 없었기에 일제에 나라가 망했고 우리들 스스로 힘으로 일제를 이 땅에서 물리치지도 못했다. 역사는 항상 힘을 가진자만이 역사를 주도하였고 세계를 지배하였다. 우리는 각자 흩어져 무리를 지어 분열과 내분으로 아까운 세월을 다 보내고 통합된 힘을 배양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임시정부도 승인받지 못했고 독립군이 무력으로 해방을 달성하지도 못했다. 청산리.봉오동 전투의 승리가 있었으나 일부에 불과했고 한만국경선 근방에서 소규모로 일제 파출소나 불태우고 일경 몇 명 죽이는 게릴라전으로 만족한 국내진공작전이 전부였다.

 

역사의 흐름속에 개인은 무력하지만 무리를 이루어 힘을 가진자만이 다음 시대의 주인공이 되었다. 아무리 유능한 인재, 아무리 뛰어난 무장, 이무리 뛰어난 사상가, 아무리 뛰어난 민족주의자라도 힘 앞에서는 무력하게 쓰러져 갔다. 자신의 힘이 부족하면 강대국의 힘을 이용하여 권력을 잡았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무리들은 가차없이 처단하였다. 역사에는 정의도 불의도 정통성도 없다. 오로지 힘을 가진자만이 정의이며 정통성이고 힘이 없는 자는 불의로 전락하는 것이 진리인 듯하다.

 

새벽 하늘을 밝히는 샛별처럼 찬란한 빛을 발하다가 서서히 사라져가는 별처럼 역사속 인물들이 수없이 나타났다 사라져 갔다. 이미 그들은 조상들이 묻힌 이 땅에 백골이 진토되어 이 땅의 흙이 되었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분노하고 궐기하고 시위하며 권력에 맞서 싸우는 것,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분신하고 투쟁하면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루 세끼에 배가 부르듯이 역사속에서 권력을 잡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은 어쩌면 한순간인지도 모른다. 찰라의 한순간을 위해 자신의 생각대로 자신의 신념대로 평생을 투신하여 살아가는 것이 인생인 듯하다. 그 길이 잘못된 길이던 잘 된 길이던 고난과 고통의 길이 될 수도 있고 승리와 영광의 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어느 길이 바른 길이었는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누가 어떤 길을 선택하던지 그것은 개개인이 스스로 머리와 가슴 속에 형성된 사상과 이념에 따라 선택하는 길일 것이다.

 

  

  

이범석

이범석

출생 1900년 10월 20일
대한제국 대한제국 한성부 용동
사망 1972년 5월 11일 (71세) 새벽 5시 43분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성모병원 521호
사인 병사(심근경색)
거주지 대한제국 대한제국중화민국 중화민국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별칭 호는 철기(鐵驥), 자는 인남(麟男), 다른 이름은 왕운산, 인남, 철기(哲琦), 이국근(李國根), 이국진(李國鎭)
학력 중국 윈난 육군강무학교 졸업
직업 독립운동가, 군인, 사상가, 정치가, 정당인
종교 대종교
배우자 김마리아
자녀 아들 이부흥, 아들 이인종
부모 아버지 이문하(李文夏), 어머니 연안 이씨(延安 李氏), 계모 김해 김씨(金海 金氏)
친척 손자 이규준, 손자 이규원, 할아버지 이인천, 자형 신석우, 자형 이기환, 이복 남동생 이범혁, 이복 제수 박유순, 증조부 이목연, 종조부 이인명
웹사이트 철기 이범석 기념사업회
이범석
1900년 10월 20일 ~ 1972년 5월 11일
태어난 곳 대한제국 한성부
죽은 곳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별명 호는 철기(鐵驥), 자는 인남(麟男), 다른 이름은 왕운산, 인남, 철기(哲琦), 이국근(李國根), 이국진(李國鎭)
복무 중화민국 육군, 대한독립군 대한광복군
복무 기간 1940년 9월 ~ 1946년 6월
최종 계급 대한광복군 중장
주요 참전 청산리 전투, 중일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서훈 내역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
기타 이력 북로군정서 중대장, 대한민국 정부 1대 국무총리, 국방부장관, 주중화민국대사, 내무부장관
철기 이범석
1900년 10월 20일 - 1972년 5월 11일
태어난 곳 대한제국 대한제국 경성부
죽은 곳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
별명 호는 철기(鐵驥), 자는 인남(麟男), 다른 이름은 왕운산, 인남, 철기(哲琦), 이국근(李國根), 이국진(李國鎭)
복무 대한민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복무 기간 1929년~1933년, 1936년~1940년
최종 계급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육군 소장
지휘 중국 동북항일군, 제3로군
주요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기타 이력 중국 동북항일군 작전과장, 육군 제3로군 참의급(參議級) 고급참모(중국군 소장)겸 중국군 제3집단군 제50군단 참모처장, 제3집단군 55군단 참모처장. 전역후 한국 광복군 육군소장 임관

 

이범석(李範奭,리범석, 1900년 10월 20일 ~ 1972년 5월 11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가, 나치즘 신봉자이다. 고등학교 재학 당시 중화민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북로군정서 등지에서 항일독립활동을 하였으며, 북로군정서 연성대장으로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기도 했다. 그 뒤 소련과 만주에서 활동하던 중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국 광복군의 중장으로 광복군 참모장과 제2지대장 등을 지냈다. 1945년 귀국을 시도했다가 강제로 상해로 되돌려보내졌고 1946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 안호상과 함께 조선민족청년단을 결성하여 활동하였고 반공주의 정치 활동을 하였다.

 

김구의 남북협상에 반대하여 이승만에 협력, 단정 수립에 동참하여 1948년 7월 31일 부터 1950년 4월 20일까지 제1대 대한민국 국무총리를 역임하였고 8월 15일부터는 국방부 장관도 겸임하였다. 이후 주중화민국대사와 내무부 장관을 거쳐 1952년 제2대 부통령 후보에 출마했고, 1956년 제3대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이승만의 견제로 낙선하였다. 1960년 이후에는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탈당, 국토통일원 고문 등을 역임했다.

 

한국의 초기 나치 연구자의 한 사람이기도 했다. 세종대왕의 5남 광평대군(廣平大君)의 17대손이며 이문하의 아들이다. 호는 철기(鐵驥), 자는 인남(麟男)이며 다른 이름으로는 왕운산(王雲山), 인남(麟男), 철기(哲琦), 이국근(李國根), 이국진(李國鎭) 등이 있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경성부에서 태어났다.

 

 

 

이기붕

 

이기붕

출생 1896년 12월 20일(1896-12-20)
조선 조선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후산리
사망 1960년 4월 28일 (63세)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경무대
사인 총살
거주지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별칭 호 만송(晚松)
직업 정치가
종교 개신교
배우자 박마리아
자녀 아들 이강석, 이강욱
이강희
친척 사촌 형 이기룡

 

이기붕(李起鵬, 1896년 12월 20일 ~ 1960년 4월 28일)은 대한민국정치인이다. 이승만(李承晩)의 비서, 국방부 장관, 서울특별시 시장, 국회의장직을 역임하였다. 호는 만송(晚松), 조선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 이보(李補)의 후손으로, 흥선대원군의 측근이었다가 임오군란에 연루되어 처형된 이회정(李會正)의 증손이었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충청북도 괴산군 출생이며 한성부에서 성장하였다.

 

상해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접시닦이 등을 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아이오와데이버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이승만의 지시로 자유당의 창당을 주도하였다. 1951년 김성수 등 한민당을 야당으로 차던진 이승만이 새롭게 자유당을 결성할 때 그것을 도와, 신당의 중앙위 의장에 추대되어 당의 실권을 잡고, 1954년에는 국회의장이 됨과 동시에 자기 아들 강석을 이승만의 후계자로서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보냄으로써 이승만의 뒤를 이어 최고의 권력자로 군림하고, 그의 거처가 서대문 경무대라 불릴 정도로 권력을 쥐게 되었다.

 

1956년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고 1960년에 실시한 1960년 정부통령 선거로 당선되었으나 부정선거임이 밝혀지면서 사퇴하였다. 그해 4월 28일 아들 이강석에 의해 권총으로 살해되었다. 호는 만송(晩松)이다.

 

 

 

신익희

 

신익희

서울시 강동구에 위치한 해공 신익희 선생 동상
출생 1892년 6월 9일(1892-06-09)
대한제국 조선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서하리
사망 1956년 5월 5일 (63세)
대한민국 대한민국 충청남도~전라북도 (기차 안)
사인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
거주지 대한제국 조선 경기도 광주, 대한제국 대한제국 한성부일본 제국 일본 제국 도쿄 시일본 제국 일본 제국 한성부→[중화민국 중화민국 상하이난징스촨성 충칭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 종로구 종로6가 낙산장(駱山莊)
국적 조선, 대한제국 대한제국, 중화민국 중화민국, 대한민국 대한민국
별칭 자는 여구(如耉), 호는 해공(海公)·해후(海候), 별칭은 왕방평(王邦平)·왕해공(王海公), 왕방우, 임방호(壬邦乎)
학력 일본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부
직업 교육자, 군인, 정치가, 독립운동가
배우자 부인 해영 이승희, 해화 김순이, 중국 여성 사씨(정인)
자녀 아들 신하균, 딸 신정완, 딸 신씨(요절)
부모 아버지 신단, 어머니 풍양조씨, 전주이씨, 어머니(생모) 정경랑
친척 큰아버지 신식(申植), 이복형 신보희(申輔熙)·신규희(申揆熙)·신필희(申弼熙)·신정희(申庭熙), 친형 이름 미상(출생직후 요절), 신재희(申宰熙), 조카 신정균, 조카 신해균, 종손 신창현, 사돈 이시영
웹사이트 해공신익희 기념사업회

 

신익희(申翼熙, 1892년 6월 9일 ~ 1956년 5월 5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 정치인이다. 중국군인으로도 있었다. 일본 유학 후 귀국, 3·1 만세 운동에 참여한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상하이 임시정부의 창설에 참여하였다. 중화민국 육군 중장, 대학 교수 등을 지냈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임정 초대 법무부 차장, 외무부 차장, 내무부장 등을 지냈고, 영어 학원의 강사와 아편 장수로도 활동했다.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각료로 입각하고, 1945년 2월에는 임정 내무부 산하 경위대를 조직했다. 1945년 12월 귀국 후 정치공작대를 조직하였으며 독립촉성국민회, 반탁운동과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북한백의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8년 김구, 김규식의 남북협상론에 반대하여 이승만의 단정수립에 참여했다.

 

1948년 5월 5.10 제헌국회의원 총선거에 당선되어 제1대, 2대, 3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48년 7월에는 초대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국회의장 이승만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자 국회의장직을 계승했다. 건국 초기에는 이승만을 지지하여 친이승만 정당인 대한국민당을 창당하여 활동했으나, 이승만의 전제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껴 탈당, 민국당 창당에 참여했다. 1954년 김성수, 조병옥, 윤보선, 장면, 박순천 등과 함께 호헌동지회민주당 창당에도 참여하였으며 제3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선거 유세중 열차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미군정기의 한국의 정치결사단체인 백의사정치공작대의 지휘자이기도 했다.

 

교육 계몽에 뜻을 두어 대학 설립운동을 추진했으며, 국민대학(현 국민대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하며, 초대 학장을 지냈다. 본관은 평산으로 (字)는 여구(如耉), 는 해공(海公), 해후(海候). 별칭으로는 중국에 체류 중 사용한 가명인 왕방평(王邦平) 또는 왕해공(王海公), 왕방우(王邦牛), 임방호(壬邦乎) 등이 있다. 경기도 광주시 출신.

 

 

 

조봉

 

조봉암
曺奉岩

출생 1899년 9월 25일
대한제국 대한제국 경기도 강화군 선원면 지산
사망 1959년 7월 31일 (60세)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오전 11시 3분경
사인 교수형
거주지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 거주하였음
국적 대한제국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대한민국
별칭 호 죽산(竹山).
학력 소련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직업 독립운동가, 사회주의 운동가, 정치인
정당 조선공산당민주주의독립전선 → 이정회 → 대한국민당 → 무소속 → 진보당
종교 없음(무신론자)
배우자 김금옥, 김조이
자녀 딸 조호정, 딸 조의정, 딸 조임정, 아들 조규호
부모 아버지 조창규(曺昌奎), 어머니 유씨(劉氏)
친척 형 조수암, 동생 조용암

 

조봉암(曺奉岩, 1899년 9월 25일 인천 강화 ~ 1959년 7월 31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이자 진보적 정치가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호는 죽산(竹山)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출신이다. 일제 강점기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 동방 공산대학 2년 수료하고, 1925년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을 때, 조직중앙위원장을 지냈으며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가 되었다. 그해 공산청년회 대표로 중국 상하이(上海)를 경유하여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하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서 2년간 수학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소련, 중국, 만주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며 공산주의 운동을 하였다. 상하이와 국내를 오갔으며 1927년에는 임정 요인들을 상대로 민족유일당 운동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노농총연맹조선총동맹(勞農總聯盟朝鮮總同盟)을 조직하고 문화부책에 선출, 상하이에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 한국인 대표에 임명되고 ML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32년 9월 상하이 프랑스 불조계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 국내로 송환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하고 출옥하였고, 출옥 후 인천에서 지하 노동단체를 조직, 비밀리에 활동하다가 1945년 1월 다시 검거되었다. 해방과 동시에 석방되어 조선공산당, 건국준비위원회 인천부지부, 민족주의 민주전선 인천부지부 등에서 활동하였으나 1946년 5월 박헌영(朴憲永)과의 갈등을 계기로 사상전향하여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하였고 남북협상 노선을 걷다가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48년 7월 국회 헌법기초위원장으로 헌법 제정에 참여한 뒤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 제1대 농림부장관과 제2대 국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농림부 장관 재직 당시 지주에게 예속된 농지들을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농지개혁을 주관하여 성사시켰다. 1948년 이후 윤치영(尹致暎) 등과 이정회, 대한국민당 등에서 활동하였고, 제2대 대통령 선거에는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했고,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30%라는 지지율을 얻어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1958년 상인 양명산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자금을 건네 받았다는 혐의로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재심결과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의 사형집행은 당대에도 사법살인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2011년 1월 20일 대한민국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내려 복권되었다.

 

2011년 국가보훈처는 조봉암이 1941년 일제에 150원의 국방헌금을 냈다는 당시 매일신보의 신문기사가 나왔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심사를 보류하였다.

 

 

 

허가이

허가이
許哥而

허가이. 1952년 8월 촬영.
출생 1908년 3월 18일(1908-03-18)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하바롭스크
사망 1953년 7월 2일 (45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
사인 총상
학력 로모노소프 대학교
배우자 최니나 베드로브나
자녀 장녀 허넬라, 차녀 허리라, 2남

 

허가이(許哥而(또는 許哥誼(허가의)), 러시아어: 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Хегай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헤가이[*], 1908년 3월 18일 ~ 1953년 7월 2일)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노동운동가 · 공산주의자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소련파 위원으로, 함경북도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부모를 따라 소련으로 이주하여 로모노소프 대학교를 졸업하였고, 우즈베키스탄에서 살았으며 8·15 광복 후 귀국한 뒤 월북하여 소련파의 거물로 활동하였다. 1951년 11월부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부총리를 지냈으나, 1953년 3월경 숙청된 후 자살하였다. 러시아어 이름은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헤가이(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Хегай)로, '허가이'는 성씨 '헤가이'를 음차한 것일 뿐 본래 러시아어 이름만 있었다.

 

 

 

김무정

 

무정
1905년 ~ 1952년 10월
김무정.jpg
태어난 곳 대한제국 대한제국 함경북도 경성군
죽은 곳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별명 무정, 김무정
복무 조선의용군
최종 계급 조선의용군 총사령관
지휘 조선의용군
주요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기타 이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민족보위성 차관, 1946년 보안간부훈련대대부 포병담당 부사령관, 1948년 2월 조선인민군 제2지휘소 사령관, 조선인민군 제2군단장, 평양방위사령관
무정
1905년 ~ 1952년 10월
태어난 곳 대한제국 대한제국 함경북도 경성군
죽은 곳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복무 조선의용군
최종 계급 조선인민군 육군 중장
지휘 조선인민군 제2지휘소, 제2군단, 평양방위사령부
주요 참전 한국 전쟁
기타 이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민족보위성 차관

 

무정(武亭) 또는 김무정(金武亭, 1905년 ~ 1952년 10월)은 중국 화북 지방에서 활동하던 한국의 독립운동가였고 해방 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군인, 정치가를 역임했다. 한국 전쟁 때는 조선인민군 제2군단장으로 활약했다. 본명은 김무정(金武亭)이며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태어났다. 보통 성을 빼고 무정이라 부른다.

 

 

 

박헌영(조선의 레닌)

 

박헌영
朴憲永

1946년의 박헌영.
(이 사진은 박헌영의 딸 박 비비안나가 소장 중.)
출생 1900년 5월 28일?대한제국 대한제국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333번지 빗돌마을
사망 1955년? 12월 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특별시(?)
사인 처형(총살, 화기에 의한 사망)
거주지
  • 대한제국 대한제국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333번지 빗돌마을
  •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 경성부
  • 중화민국 중화민국 난징
  • 중화민국 중화민국 상이
  •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 경성부
  • 소련 소련 모스크바
  •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 경성부
  •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대덕군 대전읍
  •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광주부
  • 대한민국 미군정 한국 서울특별자유시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특별시
국적 대한제국 대한제국
일본 제국 일본 제국 대한민국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별칭 아호는 이정 또는 이춘, 자는 덕영
별명 이두수, 이춘, 왕양옥, 박건일 , 김성삼
학력 경성고등보통학교 졸업
직업 사상가, 독립운동가, 혁명가, 언론인, 작가, 노동운동가, 정치가
종교 (없음)무신론자
배우자 주세죽(이혼), 정순년, 이순금, 윤레나(본명- 윤옥)
자녀 박 비비안나(본명 박영), 아들 (이름 미상)?, 아들 박병삼(법명 - 원경(스님)), 딸 박 나타샤, 아들 박 세르게이
부모 아버지 박현주, 생모 이학규(아버지의 소실), 적모 최씨(아버지의 본처), 서모 이름 미상
친척 사위 빅토르 마르코프, 이복형 박지영, 조카 박병석, 이복누이 박신기, 이복누이 박간난, 사촌 형 박건영, 5촌 조카 박병일, 사촌 동생 박자영
박헌영
1900년 5월 28일? ~ 1955년 12월 5일?
태어난 곳 대한제국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333번지 빗돌마을
죽은 곳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특별시
별명 아호는 이정 또는 이춘, 자는 덕영
다른 이름은 김성삼, 이두수, 이춘, 왕양옥, 박건일
복무 조선인민군
최종 계급 Lieutenant General rank insignia (North Korea).svg인민군 육군 중장
지휘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주요 참전 한국전쟁
기타 이력 북한 부총리 겸 외무장관, 조선로동당 부위원장, 남조선로동당 위원장, 조선공산당 당수 겸 총비서

 

박헌영(朴憲永, 1900년 5월 28일? 충청남도 예산 ~ 1955년 12월 5일?)은 한국독립운동가, 언론인·노동운동가·혁명가·정치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정국에서는 조선공산당남조선로동당의 당수로 활동하였고, 좌우합작운동에는 반대하였으나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1948년 월북 이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공산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이자 반 기독교 운동가로, 마르크스-레닌주의자이기도 한 그는 몰락 양반 가문 출신 지주 박현주(朴鉉柱)의 서자(庶子)로 태어나 일제 강점기에는 사회주의 운동가로 활약하였으며, 조선공산당의 지도자였다. 투옥과 출옥을 거듭하였으며 수감 중 한번도 동료와 조직책을 누설하지 않았다. 1927년의 재판에서는 의 조직과 당원을 진술하라는 가혹한 고문과 폭행을 당하면서 광인이 되어 인분을 먹고, 소리를 지르는등 행동으로 정신이상자로 풀려나기도 했다. 조선공산당고려공산청년회의 주요 인사였고, 1930년대에도 계속 조선공산당의 창당, 조직활동을 하다가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받았다.

 

1940년 이후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피해 광주의 벽돌·기와 공장의 노동자로 위장 취업하여 지하 활동을 통해 공산당 재건운동 조직을 지도하였다. 1945년 이후 해방 정국에는 조선공산당을 재건한 뒤 건국준비위원회, 민주주의 민족전선 등에서 좌파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1948년에 월북했으며, 같은 해 4월에 열린 남북협상에 참여하였으나 남한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이후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수립 뒤에는 부수상 겸 외무장관 등을 지냈으나 김일성에 의해 한국전쟁을 패전으로 몰고간 미국제의 간첩이란 이유로 숙청, 희생되었다. 기독교를 침략 제국주의의 아편으로 보고 신랄하게 비판을 가하였으며, 일제 강점기 때 끝까지 전향하지 않고 항일 운동을 계속하였다.

 

일제에 의한 다섯 번에 걸친 조선공산당 탄압 이후 당이 해체되면서, 1927년 12월부터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의 지도자이자 한국인 공산주의자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체포와 수배, 도피, 은신 중에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추진, 1945년 8월 광복 직후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다. 그러나 소련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에 힘입은 김일성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세우고, 북조선분국을 중심으로 북조선로동당을 창건한 뒤, 당대 당의 통합으로 조선로동당이 되면서 박헌영이 조직한 조선공산당은 와해되었다. 해방 정국에서 좌우 합작 운동을 무성의하고 무원칙한 야합으로 간주하여 반대하기도 했다.

 

아호이정(而丁, 而靜), 이춘(而春)이며, 자는 덕영(德永)이다. 별칭은 조선의 레닌, 암흑 속의 별, 비운의 혁명가 등이었다. 또한 그는 이두수, 이춘, 왕양옥, 박건일(朴健一), 김성삼(金成三)이라는 가명을 쓰기도 하였다. 충청남도 예산군 출신. 본관은 영해(寧海)이다.

 

 

 

리승엽

 

리승엽
李承燁

출생 1905년 2월 8일
대한제국 대한제국 경기도 부천군
사망 1954년 7월 30일 (49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특별시
사인 사형
국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학력 경기도 인천고등상업학교 중퇴
직업 정치인
소속 조선공산당 인민검열위원장

 

리승엽(李承燁, 1905년 2월 8일 ~ 1954년 7월 30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치인이다. 그는 조선공산당 창설에 관여하였고 조선로동당의 초대 정치 위원을 지냈으며 박헌영(朴憲永)의 최측근이기도 했다.

 

 

 

최창익

 

최창익
출생 1896년
조선 함경북도 온성 남양면
사망 1957년 10월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
사인 사형 (옥사)
거주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특별시에 거주하였다.
국적 대한제국 대한제국,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별칭 최창석(崔昌錫), 최창순(崔昌淳), 최동우(崔東宇), 이건우(李建宇), 최태현
학력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
직업 군인, 독립운동가, 사회주의 운동가, 정치인
종교 무교
배우자 허정숙
자녀 아들 최동국
친척 장인 변호사 허헌, 손자 최원도

 

최창익(崔昌益, 1896년 ~ 1957년 10월)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며 공산주의자이다. 일본 유학 중인 1923년부터 노동운동에 종사하다가 1925년 이후 공산주의단체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계속된 탄압, 검거를 견디지 못하고 1934년 망명하였다. 중국에서 김원봉 등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등에서 항일활동을 하다가 그의 노선에 반발하여 탈퇴, 1936년 6월 조선청년전위동맹을 조직하였다. 그 뒤 김원봉 일파와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결렬, 화북으로 건너가 무정(武亭), 김두봉 등과 조선독립동맹에서 활동했다.

 

8·15 해방 이후 38선 이북으로 귀환하였으며, 1946년 1월 조선독립동맹을 개칭해 '조선신민당'을 창설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3당 합당에 참여하는 등 연안파의 중진으로 활동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에 참여했다가 그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에 참여하여 재정상, 부수상 겸 재정상, 1955년 국가검열상 등을 역임했다.

 

56년 8월 김일성의 독재화를 비판하다가 8월 종파 사건에 연루되어 남로당박헌영의 공격에 동참했지만 그해 9월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었다. 중국의 국방부장 펑더화이가 그를 변호하여 사형은 모면하였으나 그해 10월 재투옥 후 옥사한다. 독립운동 시 가명은 최창석(崔昌錫), 최창순(崔昌淳), 최동우(崔東宇), 이건우(李建宇), 최태현 등을 사용하였다. 변호사 허헌의 딸 허정숙의 남편이다. 함경북도 출신.

 

 

 

박창옥

 

박창옥(朴昌玉, ? ~ 1958년)은 소비에트 연방의 교육자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초기의 정치인이다.

 

일찍이 러시아로 건너가 생활하였다. 하바롭스크조선사범대학교을 졸업한 후 교원생활을 하였고, 1945년 10월 소련파의 거물로 활동하였다.

 

1954년 3월 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이 되었으나 김일성에 의해서 '주체'를 상실한 교조주의, 형식주의자의 대표적인 표본으로 비판받게 되었다. 1956년 8월 반김일성운동을 펴다가 실패하였고 56년 8월 30일조선노동당 중앙위 8월 전원회의에서 연안파 최창익 등과 함께 김일성의 일인독재화를 지적하며 김일성을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이는 '8월 종파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이는 김일성으로 하여금 연안파, 국내파, 소련파 모두를 숙청하는 빌미를 제공했고, 박창옥도 그해 9월 숙청되었다.

 

 

 

조만식(조선의 간디)

 

조만식

출생 1883년 2월 1일
대한제국 대한제국 평안남도 강서군
사망 1950년 10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
사인 처형
국적 대한제국 대한제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별칭 호 고당(古堂)
학력 일본 정칙영어학교
직업 독립운동가, 사상가, 정치가
종교 개신교(장로교)
배우자 박씨, 이의식, 전선애
자녀 아들 조칠숭, 아들 조연명, 아들 조연창, 아들 조연흥, 아들 조연수, 딸, 조부선, 딸 조선영
부모 아버지 조경학(趙景學), 어머니 경주김씨 김경건(金敬虔)
친척 여동생 조은식
웹사이트 http://godang.goorm.net

 

조만식(曺晩植, 1883년 2월 1일 ~ 1950년 10월 15일?)은 한국독립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교육자·종교인·언론인·시민사회단체인·정치인이다. 22세에 개신교에 귀의한 이후 상업과 종교활동에 종사하다가 1919년 3.1만세운동과 중국 출국실패 등으로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오산학교에서 교사와 교장으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하에 교육활동과 물산장려운동· 국내민간 자본으로 대학설립 추진 운동인 민립대학 기성회 운동, YMCA 평양지회 설립, 신간회등 주도하였다. 1945년 8월 15일 민중들의 지지와 호응을 받아 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역 위원장에 참여했고, 11월에는 한국최초의 개신교 정당인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초대 총재를 지냈다. 1945년 12월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다가 1946년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된 뒤 한국 전쟁김일성 측근세력에 의해 살해되었다.

 

해방 정국에서 북조선지역에서 지도적인 개신교 민족주의자였으며 평안도 개신교도들을 비롯해서 민중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기도 했다. 국산 물산장려운동과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하여 조선의 간디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하였으며, 아호는 고당(古堂), 본관은 창녕, 종교는 개신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