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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의 봄 3 : 기황후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평가 2

 

 

강남의 봄 3 : 기황후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평가 2

  

                                                                                         강남고속터미널 사거리 전경

 

 

기황후에 대한 새로운 평가 2

 

원나라 말기와 혜종(순제), 그리고 북원의 종말

 

혜종
원나라의 제11대 황제
본명 보르지긴 토곤 테무르
재위 1333년 7월 19일 ~ 1370년 5월 23일
대관식 1333년 7월 19일
출생일 1320년 5월 25일
사망일 1370년 5월 23일
전임자 원 영 린친발
후임자 원 소종 아유르시리다르
왕조 원나라

 

원 혜종(元 惠宗, 1320년 ~ 1370년) 혹은 원 순제(元 順帝)는 원나라의 제11대 (재위: 1333년 ~ 1368년)이다. 순제(順帝)는 명나라가 그를 호칭할때 사용하는 시호이고, 정식 묘호는 혜종(惠宗), 시호는 선인보효황제(宣仁普孝皇帝)라고 하며, 휘는 보르지긴 토곤 테무르(한자孛兒只斤 妥懽 帖睦爾 패아지근 타환 첩목이, 몽골어:  Тогоонтөмөр)이다. 고려인 출신 공녀 기씨를 제2황후로 책봉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생애

 

생애 초반

토곤 테무르는 중앙아시아에 머물던 쿠살라와 투르크 카를룩(葛邏祿) 족의 추장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나라는 아유르바르와다가 죽은 뒤부터 1333년 토곤 테무르가 즉위할 때까지 13년간 7명의 황제가 차례로 교대하는 내부 혼란 사태가 발생했다. 다수의 황족이 황위를 둘러싼 항쟁 끝에 쓰러진 뒤, 광서에서 추방생활을 보내던 토곤 테무르가 즉위함으로써 겨우 제위가 안정되었다.

 

 

즉위

원 혜종

 

그러나 토곤 테무르는 이 시기 권력을 장악하던 킵차크 친위대 사령관 엘 테무르에게 묶여 있어, 엘 테무르가 병사할 때까지 정식으로 즉위할 수 없었다. 거기에 엘 테무르의 사후에는 아스트 친위군 사령관인 바얀이 엘 테무르의 유아를 살해하고 황제를 능가하는 권력을 장악했고, 1340년에는 바얀의 조카 토구다가 백부를 쿠데타로 살해하고 그 권력을 빼앗는 등, 원나라의 궁정은 거의 군벌의 내부 항쟁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성인이 된 칸의 권력을 둘러싼 대립이 더해져 1347년부터 1349년까지 토구다가 추방당하는 등 중앙 정국의 혼란은 계속되었다. 이 정치 혼란 속에서 어느덧 유럽에 유행하던 흑사병과 비슷한 것으로 보이던 전염병이 원나라에 유행하였고, 차례로 천재지변이 농촌을 황폐화했다.

 

그러나 중앙 정부의 권력 다툼에 마음을 빼앗긴 권력자들은 이에 대한 유효한 대책을 충분히 실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내는 급속히 황폐화되고, 원나라의 차별정책 아래 놓였던 옛 남송인의 불만과 상업 중시의 원나라의 정책이 만들어낸 경제 착취에 괴로워하던 농민의 궁핍 등이 원인이 되어 지방에서는 급속히 불온한 움직임이 높아져만 갔다.

 

마침내 1348년, 현재의 신장 지역인 차가타이 한국 동부 지역의 유력 가문인 도그라트(Duglaht) 부에서 투글루크 티무르(Tughlugh Timur)를 옹립하면서 차가타이 한국은 동서로 분열되고 말았다. 동차가타이 한국(모굴리스탄 한국)의 첫 번째 칸이 된 투글루크 티무르가 잠시 차가타이 한국을 통합하고, 여러 부족의 아미르들을 격파하기도 했지만, 이 일시적 통합은 그가 죽은 1363년에 붕괴되고 말았다.

 

1348년 절강의 방국진이 해상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차례로 반란이 일어나, 1351년에는 가노에 의해 황하의 개수공사를 시키던 백련교도인 홍건적이 봉기했다. 1354년 대규모 토벌군을 이끈 토구다가 그가 강대한 군사력을 가지는 것을 두려워한 토곤 테무르에 의해 경질되어 살해당하자, 이것을 칸의 권력회복과 맞바꾸어 군벌에게 의지하던 원나라의 군사력을 크게 약화시키게 되었다. 이때 홍건당에서 두각을 나타낸 주원장(朱元璋)이 기타 반란자들을 차례로 쓰러뜨리고 화남을 통일해 1368년 난징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명나라를 건국하였다.

 

 

대도 탈출

주원장은 즉위하는 동시에 대규모의 북벌을 개시하여 원나라의 수도 대도(大都)에 육박했다. 1368년주원장이 건국한 명나라에 의해 수도인 대도를 빼앗기고 몽골 고원에 있는 상도(上都)로 천도하였다.

 

하지만 1369년 상도도 명나라가 점령해, 혜종은 상도의 북쪽에 있는 응창부(應昌府)로 천도를 하였다. 그리고 1년 뒤인 1370년에 혜종은 황태자 아유르시리다르에게 칸 지위를 물려주고 응창부에서 사망하였다.

 

명나라에게 쫓겨 수도를 북쪽에 있는 응창부로 천도하였지만, 북원은 여전히 몽골 고원을 중심으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1634년 후금에게 공격당해 공식적으로 멸망하였다.

 

 

가족 관계

  • 황후: 다나슈리-원의 공신 엘 테무르의 딸로 첫 왕후. 다나슈리 일가를 내칠 때 폐출되어 사사됨
  • 황후: 바얀 후투그-옹기라트 씨족
  • 황후: 기황후- 고려인, 보현숙성황후(普顯淑聖皇后)
  • 아들: 아유르시리다르 빌레그트 칸
  • 아들: 오왕(吳王) 바얀 테무르(伯顔帖木兒)
  • 아들: 촉왕(蜀王) 투센 테무르(都先帖木兒)
  • 아들: 익왕(益王) 토구스 테무르(塔古思帖木兒)
  • 아들: 제왕(齊王) 옌타이(燕台)
  • 아들: 초왕(楚王) 코타이라(和台剌)
  • 딸: 정국공주(鄭國公主): 진동무성왕(鎭東武成王) 박공목소특(博供穆素特)에게 하가(下嫁)
  • 딸: 초국공주(楚國公主): 요왕(遼王), 옹기라트 소보치만수트(色坪持滿思特)에게 하가
  • 딸: 연국공주(燕國公主): 정남충성왕(征南忠成王), 옹기라트 쇼샤크부타이카바이(礎朔克布台可巴)에게 하가
  • 딸: 완국공주(宛國公主): 평북무헌왕(平北武獻王), 옹기라트 시킴(時金)에게 하가
  • 딸: 촉국공주(蜀國公主): 안평왕(安平王), 파통격만(把通格滿)에게 하가
  • 동생: 여양왕 찰한특목이(勵梁王 察罕特穆爾): 원 혜종의 동생
    • 조카: 영랑공주 민민특목이(領朗公主 敏敏特穆爾): 여양왕의 딸. 원 혜종의 조카

 

 

                                                                                      테헤란로 새벽 전경

 

 

북원제국

 

대원 제국
大元
1368 ~ 1388  
 
 

 
수도 상도 (1368년1369년)
응창 (1369년1370년)
합랍화림 (1371년1388년)
공용어 몽골어
정부 형태
황제
923년 ~ 926년
926년 ~ 933년
전제군주제

아유르시리다르 빌레그트 칸
토구스 테무르 칸
국교 티베트 불교
샤머니즘
정부수립
 • 성립
•멸망

1368년
1388년

 

북원(北元)은 원나라명나라주원장에게 밀려 몽골 고원의 초원으로 돌아간 이후의 시기를 부르는 말이다.

 

1368년 원 순제(토곤 테무르)는 대도(大都)를 버리고 만리장성 북쪽의 상도(上都)로 패주했다. 1370년 토곤 테무르는 응창(應昌)에서 훙거했다. 이로써 중국은 명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토곤 테무르의 아들인 원 소종(元昭宗)은 외몽골로 들어갔고 1372년에 명의 원정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쿠쿠 티무르가 죽고, 나하추가 명에 항복하자 북원의 세력은 더욱 쇠퇴하고, 1388년 브이르 노르의 동북에서 명군에게 대패하였으며, 소종의 뒤를 이은 동생 토구스 테무르도우라 강 기슭에서 살해되었다. 이로써 쿠빌라이 가문은 단절되었다.

 

 

북원에 대한 시각

몽골의 역사
Монголын түүх
Three Naadam riders.jpg
고대
  • 흉노(기원전 209년 ~ 155년)
  • 탁발부(93년 ~ 234년)
  • 유연(330년 ~ 555년)
  • 돌궐(552년 ~ 744년)
  • 회흘(742년 ~ 848년)
  • 견곤(539년 ~ 1219년)
  • 거란(4세기 ~ 11세기)
중세
  • 대거란국(907년 ~ 1125년)
  • 카마그 몽골(1120년 ~ 1206년)
  • 중세 몽골 부족(900년대 ~ 1207년)
  • 몽골 제국(1206년 ~ 1271년)
  • 원 제국(1271년 ~ 1368년)
  • 북원(1368년 ~ 1691년)
  • 할하(1388년 ~ 1635년)
  • 되르벤 오이라트(1399년 ~ 1636년)
  • 중가르 칸국(1635년 ~ 1758년)
  • 청 제국(1636/91/1758년 ~ 1911년)
근현대
  • 몽골 국가 혁명(1911년)
  • 복드 칸국(1911년 ~ 1924년)
    • 북양정부(1919년 ~ 1921년)
  • 몽골 인민 혁명(1921년)
  • 몽골 인민 공화국(1924년 ~ 1992년)
  • 몽골 민주 혁명(1990년)
  • 몽골국(1992년 ~ 현재)

일반적인 중국사의 서술에서는 토곤 테무르가 북쪽으로 이동함으로써 원 황조는 끝난 것으로 보았으나, 토곤 테무르의 대칸 정권은 이후에도 몽골 고원에서 존속했다. 거기에 왕조의 연속성을 보더라도 원 황조는 1368년을 기점으로 멸망이라고 말할 수 없었고, 그 후의 원 왕조는 북원이라 부르면서 이때까지의 원나라와 구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토곤 테무르의 두 아들이었던 아유르시리다라토구스 테무르가 차례로 황제의 지위를 이었고, 명나라는 당연히 이 즉위를 인정하지 않고, 별칭을 이용했다.

 

 

북원의 역대 칸

북원 황제 연표
묘호 원 시호(<명 시호>) 몽골 시호 생전 칸호 이름 재위기간 연호
원 혜종 선인보효황제
(宣仁普孝皇帝)
<순황제(順皇帝)>
오하트 칸
(烏哈噶圖 汗)
토곤테무르 칸
(妥懽帖睦爾 汗)
보르지긴 토콘테무르
(孛兒只斤 妥懽帖睦爾)
1368년1370년 지정(至正)
원 소종 무승화효황제
(武承和孝皇帝)
빌레그트 칸
(必里克圖可汗)
아유르시리다르 칸
(愛猷識里達臘汗)
보르지긴 아유르시리다르
(孛兒只斤 愛猷識里達臘)
1370년1378년 선광(宣光)
영효황제
(寧孝皇帝)
애제(哀帝)
우스칼 칸
(兀思哈勒可汗)
토구스 테무르 칸
(脫古思帖木兒汗)
보르지긴 토구스테무르
(孛兒只斤 脫古思帖木兒)
1378년1388년 천원(天元)
조리그투 칸
(卓里克圖汗)
보르지긴 이수데르
(孛兒只斤 也速迭兒)
1389년1392년
엥크 칸
(恩克汗)
보르지긴 엥크
(孛兒只斤 恩克)
1392년1394년
니구라스크치 칸
(尼古埒蘇克齊可汗)
보르지긴 에르베크
(孛兒只斤 額勒伯克)
1394년1399년
보르지긴 군테무르
(孛兒只斤 坤帖木兒)

 

 

 

 

 

 

 

 

 

 

 

 

 

 

 

북원 제2대 소종(昭宗, 1338년 ~ 1378년, 재위: 1370년 - 1378년)은 북원의 제2대 황제이며 원나라로는 12대 황제, 몽골 제국의 대칸으로는 17대 대칸이다. 원 혜종과 고려 출신 기황후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아유르시리다르이다.

 

그 역시 어머니 기황후의 권유로  고려 출신 여성 권씨(權氏)와 김씨(金氏)를 맞이하여 황후로 삼았다. 다른 묘호는 철종(哲宗)이고, 시호는 무승화효황제(武承和孝皇帝)이다.

 

 

 

생애

 

생애 초반

아유르시리다르는 원 혜종기황후의 아들이며, 1353년에 황태자가 되었다. 기황후는 고려 출신 환관 박불화(朴不花)를 이용하여 혜종이 아유르시리다르를 황태자로 책복하도록 압박하였다.

 

몽골은 고려를 병합하지는 않았지만,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奇轍)이 왕권을 압박하자 고려의 공민왕(恭愍王)은 1356년 일격에 기씨일족을 멸하였다.

 

 

황태자 시절

1364년 기황후는 오빠 기철 등 기씨 집안을 몰살시킨 공민왕을 제거하기 위해  덕흥군를 고려의 왕으로 세우려고 고려로 몽골군 1만 군대를 보냈다. 그러나 고려를 침공하던 몽고군은 이는 미리 알고 대기하던 최영 등 고려 군대에 의해 압록강 일대에서 격파되었다.

 

그때 황태자의 지지파와 반대파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고, 황태자에게 반대하던 파의 지도자 볼라드 테무르가 결국 1364년 수도를 점령하였다. 볼라드 테무르는 다통에서 대도로 진군하여 칸 휘하의 군대를 무너뜨리고 중앙정부를 장악하였다. 황태자 아유르시리다르는 타이위안에 있던 그의 지지자인 코케 테무르에게 달아났지만, 그의 어머니인 기황후는 볼루드 테무르의 포로가 되었다.

 

황태자 아유르시리다르는 타이위안으로 달아나 코케 테무르의 지지를 구하였다. 1365년 황태자는 코케 테무르와 함께 볼라드 테무르를 공격했고, 볼라드는 부하에게 배반을 당한 뒤, 코케 테무르에게 사살되었다.

 

기황후는 코케 테무르의 지지를 통해 아유르시리다르를 황제로 즉위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선왕 토곤테무르의 제1황후였던 바얀 후투그가 죽은 후에 기황후는 제1황후가 되었다.

 

그리고 1368년, 원나라는 대도에서 퇴각함으로써 중국에서 물러나고 북원으로 전락한다. 어머니 기황후의 뜻에 의하여 고려 출신 여성 권씨와 김씨를 황후로 맞이하니 [권황후]와 [김황후]이다. 그러나 [권황후]는 아들을 낳지 못했고, 딸만 1명 얻었으며, [김황후]는 아들 매적리팔라(買的里八刺)를 얻었다.

 

딸은 후일 쿠빌라이칸의 형제 아리크부케의 5대손 예쉬데르에게 시집간다. 아들은 1370년 5월 16일 모후(母后)인 [김황후]와 더불어 명나라 이문충(李文忠)군에 포로가 되어 북평(北平)으로 끌려갔다가 1374년 9월 방환(放還)되었다.

 

1370년 혜종 토곤 테무르가 사망하자 아유르시리다르는 몽골고원의 카라코룸에서 황좌를 계승했다. 실각당했던 코케 테무르는 새로운 북원 황제의 세력에 참여해서 황제의 호위를 수행하였다. 코케 테무르가 이끄는 북원의 군대는 1372년, 사막에서 서달(徐達)이 이끄는 명군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때 명군이 2만 명 정도 피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간쑤성에서 다시 서달과 대적할 때 북원군은 심하게 몰려서 고비 사막으로 달아나야 했다.

 

코케 테무르는 북원군을 거느리고 다시 중국으로 진군하였고, 북원의 영향력을 산시성(山西省)까지 팽창시켰다. 그러나 그는 1375년 사망하고 말았고, 1378년에는 황제 아유르시리다르도 사망하였다. 그들의 죽음 이후에 북원은 급격히 힘을 잃었고, 중국 진출을 단념해야 했다.

 

 

 

가계

  • 부왕 : 원 순제
  • 모후 : 기황후
    • 황후 : 권황후 / 고려 권겸의 딸
      • 딸 : 이름 미상
      • 사위 : 예쉬데르, 쿠빌라이 칸의 형제 아리크부케의 5대손
    • 황후 : 김황후 / 고려 김윤장의 딸
      • 아들 : 매적리팔라(買的里八刺)

 

 

 

 

북원 제3대 평종(元平宗, ? ~ 1388년)은 북원의 제3대 황제(재위: 1378년 - 1388년)이다. 이름은 토구스 테무르이다. 시호는 영효황제(寧孝皇帝)이고, 이와는 별도로 천원제(天元帝), 애제(哀帝)라고도 불리며, 몽골식 재위명은 우스칼 칸(Uskhaal Khan)이다. 순제 토곤 테무르의 4남이며, 어머니는 바야우트 씨이다. 원 소종의 이복 동생으로, 본시 익왕(益王)으로 불렸다.

 

 

생애

형인 소종이 죽자 유조를 받아 조카들 대신 황위에 즉위하였다. 치세동안 중원회복을 노리며 계속 명나라를 북에서 압박하였는데 잘라이르부의 나하추(納哈出)는 소종 치세 이래로 북원에 협력하였으나 1387년 나하추는 명나라에 항복하여 해서후(海西侯)에 봉해졌다.

 

북원의 좌익 역할을 든든히 해주고 있던 나하추의 배신으로 북원은 상당한 곤경에 빠졌다. 1388년 그는 부이르 누르에서 명나라의 습격을 당하였고 결국 카라코룸으로 탈출하다가 투울 강 근처에서 예쉬데르에게 살해당했다. 이로써 북원제국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그를 살해한 예쉬데르는, 세조의 동생 아리크부케의 5세손이며 그의 형인 소종의 사위로 알려져 있으나, 계보 소실로 인해 그의 장남이자 후계자로 알려진 엥크(恩克)와 예쉬데르가 동일인물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북원멸망 -할하제국

 

예쉬데르(1358년 ~ 1392년)는 조리그투 엥케 칸이란 호칭이 있다. 북원이 멸망한 이후에 할하제국의 몽골의 대칸이다.

 

 

생애

1388년 토구스 테무르를 살해하자, 혈통이 단절된 북원은 멸망하고 대칸에 등극한 자가 예쉬데르인데, 예쉬데르는 쿠빌라이가 맏형 몽케(헌종)가 죽은 후 권력 다툼을 벌였던 막내동생 아리크부케의 가문 출신이다. 이수데르가 투쿠스 테무르를 살해하고 대칸위에 오른 것은 아릭부케가 쿠빌라이에게 패한 지 124년 만이었다. 이수데르가 토쿠스 테무르를 살해하고 대칸 위에 오를 때 오이라트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몽골제국 초기에는 흥성을 하던 오이라트부의 역할이 쿠빌라이시대 이후에는 역사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케가 대칸 자리를 놓고 싸울 때, 오이라트부는 아리크부케 진영에 섰기 때문이다.

 

1388년 토구스 테무르가 살해됨으로써 북원의 멸망과 쿠빌라이 가문은 몰락하게 되는데, 아리크부케의 후손 이수데르가 대칸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동부 몽골 지역도, 오이라트 부족도 각자 내부에서 권력 이양을 위한 변화가 급속히 진행이 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1399년 오이라트부의 수령 우게치가 쿠빌라이 계통의 칸을 제거함으로써 동서 몽골 간에 대립이 시작되었으며 이후 혼란의 시기가 십여 년간 이어졌다.

 

1392년 동생 엘베크는 형 조리크트 칸에 이어서 대칸에 즉위하였다.

 

 

 

 

 

대원제국의 붕괴와 북원제국의 수립과 멸망 

 북원제국은 대원제국(대몽골제국)이 명제국의 황제 태조 주원장의 군대에 멸망해 몽골 고원의 초원으로 돌아가 세운 대제국이다.

 

1368년 원제국 순제(토곤 테무르)는 화산같이 밀고들어오는 주원장의 군대에 제도(帝都) 대도(북경)를 미끼삼아 만리장성 북쪽의 몽골고원으로 군대를 피신시켰다. 대륙은 명제국의 군대가 장악했다.

 

일반적인 고대 중국사의 서술에서는 토곤 테무르의 북쪽으로의 이동에 의해 원제국은 끝난 것으로 보았으나, 토곤 테무르의 황제 대칸정권은 이후에 몽골 고원에서 군사력을 집중시키며 강해졌다.

 

거기에 제국의 연속성을 보더라도 원제국은 1368년을 기점으로 멸망이라고 말할 수 없고, 이후의 원제국은 북원제국이라 부르면서 이때까지의 원제국과 구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허나, 토곤 테무르의 두 아들인 아유르시리다라와 토구스 테무르가 차례로 황제의 지위를 이었고, 명제국은 당연히 이 즉위를 인정하지 않고, 별칭으로 부를 걸 강요하자 전쟁이 발발했다.

 

1368년 명군의 공격을 받은 원제국 황제 순제(順帝)는 대도(大都)를 버리고 상도(上都)로 피하였으며, 1370년 응창(應昌)에서 죽었다.

 

그 아들 원제국 황제 소종(昭宗)은 외몽골로 들어갔고 1372년에 명제국의 원정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했으나 쿠쿠 티무르가 죽는 바람에 나하추가 명제국에 항복을 선언하였고, 서아시아를 지배하던 강성하던 북원제국의 세력은 위축하기 시작했고, 1388년 브이르 노르의 동북에서 명군에게 대패하였으며, 소종의 뒤를 이은 동생 토구스 테무르도 도우라강 기슭에서 자객에게 암살되었다.

 

이로써 무사가문이자 황제가문이던 쿠빌라이 가문의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다.

 

 

대원제국 말엽의 혼란스러운 정쟁과 황족들과 귀족들간의 치열한 권력다툼과 내분으로 인한 정쟁은 제국을 안으로부터 무너뜨렸고 분열된 제국은 새로 발흥한 명나라에 싸움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자멸한다.

 

제국의 붕괴로 원래 자신들의 강역인 막북(외몽골)의 초원으로 되돌아간 후에도 거의 150여년간 지속된 몽골제국의 징기즈칸 후손이던 황금씨족의 위상은 몽골백성들에게만은 변함이 없어 비록 다른 세력이 초원의 권력을 잡아도 근세 왜국의 천왕을 대리한 막부정권처럼 형식상으로라도 대칸은 황금씨족에서 뽑아야만 하는 불문율이 아닌 불문율이 있었다.

 

명의 흥기로 톡-테무르(토곤-테무르Tohon-Temur, 원 혜종=순제)가 1368년 8월 주원장 휘하의 정로대장군(征虜大將軍) 서달(徐達)이 이끄는 북진한 25만 명군에 대도大都를 빼앗기고 연이어 1369년 서달 휘하의 이문충이 이끄는 명군에 상도를 상실하여 화려했던 상도는 명군의 조직적인 파괴로 잿더미가 되어렸고 이로인해 몽골세력들은 현재의 내몽골일대까지 위협받게 되었다.

 

또한 톡-테무르(토곤 테무르)가 상도를 벗어나 북으로 피난하는 도중에 1370년 5월 응창에서 향년 51세의 나이로 병사하여 여름수도와 겨울수도를 상실한데 이어 구심점을 잃은 몽골인들은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이에 기황후와 톡-테무르(토곤-테무르Tohon-Temur) 사이의 아들 아유시리다라(Ayur-Siridara)는 고비사막 이북의 초원으로 돌아가 1371년 막북의 카라코룸에서 북원을 세우고 스스로 ‘빌릭투 칸’이라 칭하고 북원의 첫 번째 대칸이 되어 초원에 다시 뿌리를 내리면서 몽골세력을 규합해 재정비하고 다시 과거의 제국의 강역을 회복코자 했다.

 

대원제국의 잔여세력을 북변에서 몰아내면서 북진한 명군의 대장군 서달(安徽省,鳳陽출신)은 한편으로는 쓸모없어져 허물어진 과거 국경의 장성을 다시  보수하는데 1369년 거용관(居庸關)의 개축도 서달에 의해 이루어진다.

 

한편, 남경에서 황제에 오른 명의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은 초원으로 물러가 다시 재정비하기 시작한 몽골인들이 다시 돌아올 것을 근심하여 북원제국을 멸망시키고 화근을 뿌리뽑고자 북원을 멸망시킬 대규모 원정군을 조직한다.

 

당시, 명의 수도는 1대 홍무제와 2대 건문제(建文帝)때까지 반란을 일으킨 숙부 연왕(燕王) 주체(3대황제 영락제)가 남경성을 함락시키고 건문제와 함께 궁전을 모두 불태워 버릴때까지는 장강 이남의 남경이었다. (정난의 변)

 

1372년 홍무제는 중로군, 동로군, 서로군의 15만 대병을 동원하여 그의 유능한 장수들인 서달, 이문충, 풍승을 3로 원정군의 사령관으로 각각 임명한 후 3로로 진격하여 사방에서 카라코룸의 북원세력을 향해 포위해 북상하여 북원제국을 멸망시키고자 했다.

 

이에 북원군은 대칸인 '빌릭투 칸'과 그의 동생 '터구스-테무르(Togus-Temur)'의 영도하에 명군과 격전을 치르며 명군은 서로군을 제외하고는 서달의 중로군이 톨라강가에서 거의 전멸에 가까운 몰살을 당하고 동로군이 연이어 패배하므로써 2로의 대군이 모두 무너진다.

 

따라서, 서로군만으로는 북원과 대결이 불가해 홍무제는 명군의 후퇴를 명하게 되며 사실상 이 기회에 북방을 안정시키고 천하를 완전히 통일코자 하던 홍무제의 희망은 무너진다.

 

몽골사료에 따르면 대원제국의 멸망속에서 초원으로 돌아와 다시 과거의 유목제국들 처럼 막북에 북원제국을 수립하고 전열을 재정비하여 남방에서의 명의 위협을 물리친 ‘빌릭투 칸’은 1378년 41세의 나이로 조용히 눈을 감는다.

  

1368년, 국운이 100년을 넘지 못했던 원나라는 주원장이끈 반란군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요, 금, 서하등의 소수민족 정권과는 달리, 마지막 황제인 원순제(元順帝) 토군 테무르(妥歡帖睦爾)는 전사하지도 않았고, 자살하지도 않았으며, 왕족과 남은 부대를 이끌고 자기 조상이 일찌기 나라를 일으킨 옛땅인 몽골고원으로 물러났다. 그들은 중국에서 외래정권으로써 그대로 몸을 빼서 물러난 "기적"을 이룬 것이다.

 

이는 징기스칸부터 거의 미친듯이 확장하여 몽고제국의 국경이 넓었고, 칸국, 부락이 수도 없이 들어섰는데, 원나라는 그 중 몽골제국의 일부분만을 차지하고 있었고, 원나라의 황제는 몽골제국의 대칸이기도 했으며, 몽골의 각 칸국과 부락에 대하여 종주권을 행사하였었기 때문이다. 원나라의 멸망은 몽고제국으로 하여금 중국의 영토만을 잃었을 뿐이고, 몽고제국 자체는 여전히 존재하였던 때문이다.

 

원순제는 원나라 황제중 드물게 한문화에 깊이 접촉했던 사람이다. 대도성이 함락된 후 황망하게 북으로 도망갔는데, 그 타격은 매우 컸을 것이다. 비록 여전히 몽고각부의 대칸이었으나, 그는 나라를 버리고 고향으로 되돌아가 우수를 달래기 힘들었을 것이다. 특히 명나라군대는 그에 대하여 계속 공격을 멈추지 않았으니, 더구나 편안히 세월을 보낼 수도 없었다. 마침내 1370년 5월 23일, 그는 비분과 우울함을 안고 사라무룬강변의 응창(應昌)에서 사망한다.

 

원순제의 아들인 애유식리달랍(愛猷識里達臘)은 부친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카라코룸(哈拉和林)에서 즉위한다. 그는 북원정권을 다시 8년간 유지하면서, 병사를 훈련시켜 언젠가 다시 중국의 황제위에 오를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그는 이 희망을 실현할 수 없었을 뿐아니라, 몽고지구로 깊이 진입해오는 명나라 군대의 공격을 지속적으로 받아야 했다. 1372년, 명나라의 대장군 서달(徐達)은 카라코룸을 공격한다. 이 몽고황금가족의 대본영은 권력과 영광의 상징이었는데, 명나라 군대에 짓밟힌다면, 몽고제국은 세계역사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리하여 몽고인들의 저항은 아주 격렬했다. 그러나, '만리장성'으로 칭해지던 서달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왔다. 애유식리달랍은 거의 절망적인 지경에 이르렀다. 다행히, 명나라 대군은 전선이 너무 길어지게 됨에 따라 뒤를 받쳐주지 못하여 투라강변에서 저지되고 만다.

 

1378년, 애유식리달랍은 여한을 안고 사망한다. 그의 동생 투구스 테무르(脫古思帖木爾)가 제위를 승계한다. 이 세번째 북원황제가 지배하는 영토는 이미 몽고제국이 처음 건국될 때의 수준으로 좁아졌고, 조상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은 전혀 가능성이 없어보이게 되었다.

 

1388년, 10만명의 명나라군대가 남옥(藍玉) 대장의 지휘하에 하러카강과 커르룬강의 사이, 베르호의 남안에서 투구스 테무르의 군대를 대파했다. 북원의 여러 왕, 평장사이하 관리 3천여명 및 병사 7천여명은 포로가 되었고, 투구스테무르는 도주한 후 그의 부하장수에 의하여 목졸려 죽는다.

 

이번의 실패는 황금가족-쿠빌라이가족의 북원정권으로 하여금 몽고인들의 심중에서 지고무상의 지위를 상실해버린다. 그리하여 대다수의 몽고부락은 그로부터 분리하여 독립을 선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