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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남의 봄 27 : 현충일의 의미 14 (6.25 전쟁, 한국전쟁 13)

 

 

 

강남의 봄 27 : 현충일의 의미 14 (6.25 전쟁, 한국전쟁 13) 

 

 

                                                                     북악 둘레길에서 바라본 성북동 전경

 

 

 

 미국의 전쟁 종식 노력과 휴전 

 

 

미국의 전쟁 종식 노력

 

UN에서의 설득 작업

 

그러나 소비에트 연방중화인민공화국 측은 6.25 전쟁이 대한민국의 선제 공격으로 발발했다고 주장했다. 8월 1일, 안보 이사회의 8월 의장국이었던 소련 측 대표 말리크는 이사회에 출석했다. 의장석에 앉은 소련 측 대표 말리크는 그 동안의 한국 사태에 대한 안보리의 모든 결의가 무효임을 선언하였다. 그는 “안보 이사회의 상임 이사국인 소련과, 또 상임 이사국으로서 당연히 참석해야 할 중공 대표가 없는 동안에 통과된 결의안은 하나도 인정할 수 없다” 고 주장하였다.

 

대한민국 측 대표 단장 장면은 8월 유엔 안보리 회의에서도 옵서버 자격으로 자리 잡고 앉으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리크는 끝내 장면의 착석을 거부했다. 또한 말리크는 “6‧25 동란은 북괴군의 남침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반대로 한국군의 북침”이라며 “미국이 한국군을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주장하였다. 소련 측 대표의 이런 역선전을 미리 예상한 장면은 미국 측 대표 오스턴과 짜고 한국 전선에서 노획한 소련제 소총 한 정을 증거물로 제시하고 반박하였다. 말리크는 “이번 싸움은 한국 사람끼리의 싸움이지 소련은 전혀 관련이 없다”며 “소련군은 이미 1947년에 완전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철수했고, 이번 동란에 소련에서는 총 한 자루 보내 준 일이 없다”고 단언했다. 미국 측 대표 오스틴은 장면이 한국 전선에서 가져온 ‘1950년 소련제’라는 철인이 찍힌 소총을 증거물로 제시하였고, 소련 측이 제시한 대한민국의 북침 주장과 소련의 불개입 주장은 논파당하였다.

 

장면 대표는 9월에 열린 UN 안보리 이사회에도 참석하는데, 9월 안보리 의장국은 영국이었다. 9월 1일, 글랜드윈 접 영국 측 대표가 안보 이사회의 사회를 맡자 장면은 착석과 발언권을 달라고 미리 요구했다. 의장은 “당사국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장 대사에게 착석을 허한다”고 선언하여 장면 대표는 무난히 착석하였다. 의장으로부터 발언권을 얻은 장면 대표는 “그 동안 갖은 모욕을 당하면서도 나는 할 말을 못하고 참아 왔다”고 말문을 열어 소련을 공박하였다. 소련 대표 말리크는 “규칙 발언!”이라며 그의 발언을 제지하려 들었다. 이어 말리크는 그에게 “도대체 저 자가 누군데 무슨 자격으로 저 자리에 감히 앉아서 발언을 하는 것이냐?”며 “저 자는 이승만 도당의 괴뢰”라고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장면은 말리크의 욕설에 대해 취소하라고 항변하였다.

"대한민국에는 이승만 도당이라는 것은 없고 나는 헌법에 의해 합법적으로 당선된 대통령의 임명을 받아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해 이 자리에 의장의 초청으로 착석했노라."

그는 약 40여 분간 공산권의 “대한민국의 북침” 주장과 “한국민들끼리의 내란”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연설을 했고, 이는 국제사회에 생방송으로 중계되었다.

 

 

 

맥아더와 트루만의 갈등

 

군인이 전쟁에서 종합적인 판단력이 필요한 것은 한 분야만 보는 좁은 안목은 전체를 그르치기 쉽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전쟁에서 패배를 초래한다.

 

한국전쟁시 맥아더 장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유엔군이 마지막 사투를 벌이는 순간에 이미 전쟁 초기부터 구상하였던 인천 상륙 작전을 미 합참의 극렬한 반대에고 불구하고  그들을 설득하여 실시한 결과 작전은 성공하여 한국 전쟁의 전환점을 만든 사람이다. 미 합참은 최대 9미터가 넘는 인천의 조수 간만의 차, 좁은 수로, 수많은 수중 장애물, 상륙지역의 협소, 적의 저항 등으로 인해 상륙이 불가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참모들로 하여금 사전 충분한 정보를 판단케 하였는데, 조류와 지형, 날씨, 시기를 고려하여 가능성을 판단토록 했다. 그리고 인천상륙의 가장 결정적인 점은 수도 서울을 점령함으로써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낙동강 전선에 주력하고 있는 대부분의 인민군의 주력을 한꺼번에 섬멸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의 결단은 정확했고 미래를 보는 예측력이 매우 뛰어났던 장군이었다. 남들은 물론 참모들 중에서도 불가능하다고 극구 반대하는 상황에서 그는 가능성을 찿았던 것이다. 태평양 전쟁의 영웅! 그의 인기는 트루만을 능가하는 상태였고 트루만은 그것이 매우 불편편하였던 것이다. 웨이크 섬에서 대통령 트루만을 만난 맥아더는 먼저 자신이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트루만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는 최종적인  한국 전쟁의 목표는 적의 격멸은 물론 북한의 지휘부를 소멸시키는 것이며 한반도 통일이라고 했다. 공산군이 더 힘이 커지기 전에 중공을 견제하기 위해서 만주 폭격을 주장했고 필요시 핵폭탄까지 고려했다. 그러나 트루만은 3차 세계대전을 염려하여 맥아더의 건의를 거부했다. 그리고 트루만은 두 사람의 견해차가 큰 것을 알고 돌아와서 고심끝에 그를 유엔군 사령관직에서  해임했다. 우둔한 정치 지도자와 가장 군인다운 군인이었던 전쟁 영웅과의 차이점이다. 그것은 고대 사치와 항략에 빠져 무능하던 지중해 강대국 카르타고 조정과 포에니 전쟁의 영웅 한니발 장군과 같은 경우일 것이다.

 

조선의 눈물은 계속된다.

 

 

맥아더와 트루만 갈등

당시 서울을 수복하고 38선 돌파하여 북진하는 문제를 맥아더 장군은 고민하고 있었다. 중공군의 개입문제였다. 그러나 맥아더는 중공군이 그리 쉽게 미군을 상대로 전쟁에 개입할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본의 패전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모택동이 일본 제국주의를 괴멸시킨 미국을 상대로 감히 전쟁을 벌일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강력하게 북진을 주장했다. 맥아더 장군의 생각은 만일에는 중국과 전쟁도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어쩌면 같은 공산국가인 소련과도 동시전쟁을 감수해야 한다. 핵무기 사용 문제도 생각하고 있었다.  이 문제는 자신이 결정할 수는 없는 문제로 생각하고 트루만 대통령과 태평양상의 한 섬에서 만나 상의하게 된다.

 

트루만 대통령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중국과 전쟁을 두려워 했다. 그리고 소련과 동시전쟁은 더더욱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세계 3차대전은  불을 보듯 뻔하다. 소련.중국 등 전 공산권이 대동단결하고  미국을 위시한 전 민주주의 국가들이 또다시 세계 3차대전의 불구덩이에 뛰어 들어야 한다? 아니지... 미국과도 멀리 떨어진 아시아의 조그만한 반도 한국, 그기에다 미개한 반쪽나라 신생국 한국을 위해서 미국이 중국과  전쟁을 치루기에는 명분이 약했고 실익도 별로 였다. 그리고 세계 3차대전을 치루게 될 지 모르는 대 재앙을 초래할 빌미를 미국이 제공한다는 자체가  현재의 미국 대통령인 자신이 책임지기에는 역사의 지탄을 받기는 싫었다. 그리고 맥아더 장군이 원하는대로 만주를 폭격하고 중공군의 전쟁개입을 차단하고 중국이 별다른 항의나 반격없이 그리고 소련의 전쟁개입도, 공산권의 대동단결과 대미국 전쟁불사도 없이 한반도를 미군과 연합군이 무력으로 통일시킨다면 맥아더의 인기와 갈채는 대통령인 자신과 비교가 되지 않게 될 것이다. 본래대로 한반도는 북한의 침략만 물리치고 38도선에서 현상유지가 더이상 아무런 손실없이 일본을 지키는 완충지대로 한국의 역활만 생각하면 되며 그것이 정치적으로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도 바람직 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전쟁영웅의 칭호를 받고 있던 맥아더 장군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과를 최대한 확대하고 싶었고 내친김에 완전한 승리를 원했다. 군인은 군사적인 안목으로 전략을 구상한다. 미국의 전술핵무기를 사용하거나 공군으로 하여금  만주지역을 폭격할 수 있도록 승인을 요구했다. 그래서 한국민에게 강대국에 의해서 반쪽이 된 반쪽나라가 아닌 북쪽의 공산세력을 완전히 제거시키고 완전한 한나라로 만들어 주고 싶었을 것이다. 한국민을 위해서도 그것이 바람직한 것이며 공산진영의 교두보를 허용할 수는 없었다. 중국이나 소련이 함부로 쉽게 미국과 대항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위력을 알고 있을 것이며 유사시에는 원폭사용도 불사한다. 완전한 승리! 그것만이 전쟁을 지휘하는 군사지도자가 바라는 최종목표이다. 어정쩡한 휴전이란 있을 수 없다. 자신은 휴전을 생각하지도 않고 있으며 한번 시작한 전쟁은 적 군사력의 완벽한 괴멸과 지휘부의 완전한 소탕이다. 그래야만 두번 다시 이민족에 불행을 막을 수 있으며 민주주의의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트루만 대통령은 태평양 외딴 섬에서 맥아더 장군과 만나 서로의 생각과 견해를 나눈 결과 엄청난 차이가 있슴을 확인하게 되고 그를 결국 극동군 사령관직에서 해임시켜야 하겠다는 결심하게 된다. 

 

 

맥아더와 한국 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인민군은 서옹진반도에서 동주문진에 이르는 38선 전역에 걸쳐 남침을 개시했다. 트루먼대통령의 긴급명령을 받은 일본점령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대만·필리핀·인도차이나 등의 방위에 대비하는 조치를 취했다. 27일에는 유엔총회에서 북한을 침략군으로 규정하고 유엔군 파견과 42개국의 지원을 결정했다. 때마침 소련대표는 유엔 상임이사국으로 중공이 들어와야 한다고 총회에 계속 불참하고 있었다. 그래서 거부권은 행사되지 못했다. 29일 맥아더 장군은 수원비행장에 내렸다. 60년 전의 일이다. 맥아더도 수원시민도 잊지 못할 날일지 모른다. 맥아더는 군용 지프차를 타고 선글라스와 파이프를 물고 한강으로 향했다.

 

패잔병과 피난민이 남하하는 모습을 보며 한강전선을 시찰했다. 맥아더 장군은 그해 1월 26일 70회 생일을 맞이한 노병이었다. 애치슨 미국무장관이 기자회견을 통해 아시아의 방위선에 38선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발표를 한 것은 그보다 2주 전이었다. 이 발언으로 한국전쟁은 미국의 유도전이라는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그 뒤의 자료에서 미국은 49년 중국을 통일한 모택동 정부와의 외교관계를 위해 방위선을 남하시켰다는 점이 해명되기도 한 것이다.

 

어쨌든 이 발언으로 오판한 스탈린과 김일성의 합작품이 6·25침략이었다. 이 논쟁은 스탈린이 몸통이고 김일성이 깃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맥아더는 7월 31일 대만을 방문한다. 그리고 트루먼 대통령의 대만중립화정책을 변경시켜 장개석 군대의 유엔군 합류와 본토공격 등을 구상한다. 그러나 트루먼은 특사로 해리먼을 보내 맥아더의 구상을 중지시킨다. 맥아더는 이를 개탄한다.

 

그는 9월 12일 사세보 기지에서 맥킨리호를 타고 인천으로 와 상륙작전을 지휘했다. 9월 29일 맥아더는 탈환한 서울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남한의 행정권을 이양한다. 10월 2일 한국군과 유엔군은 드디어 38선을 돌파하고 북진을 개시했다. 우리 국민은 궐기대회를 열어 북진을 결의한다. 맥아더는 이에 힘을 얻었다. 10월 15일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은 웨이크섬에서 회담을 갖는다. 대통령과 군 사령관이 첫 대면 하는 자리라 더욱이 대통령이 비행기로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다. 맥아더는 해외파견 14년간의 군 생활이었기 때문에 1945년 4월에 취임한 대통령과 상면하지 못했던 것이다. 미국이란 나라의 모습이다.

 

이 회담에서 맥아더는 차기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아이젠하워는 바보라고 말했다. 맥아더는 다시 만주폭격을 요구했다. 그러나 트루먼은 3차대전의 위험성을 들며 반대한다. 맥아더는 공산권의 타파는 아직 군사력이 약한 현시점이 적격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뜻은 관철되지 않았다. 미국 내에서도 맥아더를 전쟁광으로 비판하는 소리도 나왔다. 마침내 12월 중공군은 인해전술로 유엔군을 후퇴시켰다.

 

모택동은 스탈린이나 김일성의 간청도 있었겠지만 맥아더의 주장으로 위협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1951년 서울을 재탈환했으나 4월 12일 맥아더는 트루먼에 의해 사령관직에서 해임됐다. 맥아더의 만주폭격에 대해 불안했을 것이다. 그가 떠나는 날 새벽 200만 일본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환송했다. 일본의 오늘은 실로 맥아더의 도움이고 6·25전쟁 덕분이었다.

 

그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미국인들의 환영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4월 19일 맥아더는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연설을 했다. 대통령에 의해 해임된 군 사령관이 미국 국회에서 퇴임연설을 한 것이다. 이것이 미국의 참모습인 모양이다. 그는 외쳤다. “공산주의 위협은 세계적인 것, 아시아 유화정책으로는 유럽에서도 반공이 안된다. 대만도 다시 중국 본토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고 연설을 마쳤다. 그는 실로 52년간의 군인생활을 마친 것이다.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라는 말은 그의 말이 아니고 미국 군가의 후렴이다. 우리 군가 ‘전우의 시체를 넘어…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와 엄청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1962년 맥아더는 미육군사관학교를 방문, 사열을 받고 연설하고 훈장을 받았다. 그의 생애는 이렇게 마쳤다. 그는 이승에서 6·25 60주년을 기념하며 미의회가 천안함 침몰사건과 관련해 북한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의결한 것을 하늘에서 지켜보았을 것이고, 우리 국회의 천안함 대북결의안 채택은 불투명한 채 참전국과 참천용사들에 대한 감사결의안만을 의결하는 모습에 그의 심경도 불편하리라.

 

얼마전 조갑제씨가 쓴 글에서 맥아더와 트루만에 대해서 밝힌 내용이 있었다. 그의 글에 의하면 실제로 한국을 구한 사람은 맥아더가 아니라 트루만이었다고 했다. 우리는 맥아더에 대해서 영웅적인 면모만 일고 있으나 실제는 트루만이 한국 전쟁에 빠른 결심으로 미군 투입을 승인했고 유엔의 참전 결의를 얻어냇다. 그러나 당시 맥아더는 도쿄의 안락한 시무실에서 한반도에 대한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 군정장관 하지 중장이 보고하면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모든 것을 일임하고 북한군의 침략 보고를 접하고도 별로 위급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 한참 후배인 미군의 합참의장 등 군 수뇌부도 맥아더의 요구나 요청에는 항변 한 번 못하고 상급 지시를 내릴 때도 결례가 되지 않도록 무척 신경 썼다고 한다. 맥아더는 트루만의 귀국 지시에 불응하고 합참의 지시도 묵살하기도 하였다. 인천상륙작전도 그의 고집으로 결정되었고 당시 대부분의 군수뇌부에서는 반대하였다고 한다. 다행히 상륙작전이 성공하였고 전세를 뒤집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자 그의 영웅적인 면모는 더욱 미 국민들에게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트루만이 맥아더는 극동지역 황제로 군림하려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언론을 잘 이용하였고 홍보나 선전에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중공군의 개입 정보를 수없이 보고받았지만 개의치 않고 북진을 명령했다. 그러다가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실제보다 10분지 1 수준 정도로 예상했다고 하며 그 규모가 엄청난 것을 알고사는 유엔군을 전선에서 이탈하여 한강 이남까지 지리한 철수를 명령했다. 맥아더는 유엔군이 계속 밀린다면 유사시 한반도에서 유엔군을 철수할 생각을 했고 트루만은 싸움에서 질 때까지는 철수는 안된다고 했다. 그는 유명한 미 의회 연설이 끝나고 청문회에서 그의 그동안의 거짓말과 오류가 낱낱이 밝혀지자 미국민들은 그를 떠났다고 했다.        

 

 

맥아더 장군의 마지막 의회 연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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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ral Douglas MacArthur's

"Old soldiers never die" Speech

(April 19,1951)

 

 

 

국회에서의 마지막 연설

 

대통령 각하, 의장님, 그리고 고명하신 의원 여러분

  저는 깊은 겸양과 자부심을 가지고-즉 저보다 먼저

이 자리에 섰던 위대한 미국 역사의 건설자들의 궤적을

따르고자 하는 겸양과,

이 입법부의 토론장(국회의사당)이 지금까지 고안된

가장 순순한 형태로 인간의 자유를 대표한다고 생각하는

자부심을 가지고 이 연단에 섰습니다.

 여기에 전 인류의 희망과 열망과 신념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저는 어떤 당파적인 명붑을 옹호하고자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닙니다.

(중략)

저는 저물어 가는 인생의 황혼기에 어떤 적의나 비통함에서가 아니라

단지 마음에 품은 한 가지 목적 곧 내 조국을 섬기고자 하는 의도에서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대통령께서 대한민국에 대한 지원에 개입하려는 결정을 하기에 앞서

저와 상의하지는 않으셨지만, 그 결정은 군사적인 관점에서 보건대

올바른 것으로 입증되었습니다.

 말씀드리는 바와 같이 그 결정은 우리가 침략자를 격퇴시키고

그들의 군사력을 격감시킴으로써 올바른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우리의 승리는 완벽했으며 우리의 목적은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었습니다.

그때 중공군이 수적으로 우세한 지상군을 동원하여

개입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전쟁과 전혀 새로운 상황을 야기시켰습니다.

이 상황은 우리 군이 북한 침략자들에 맞서 배치되었을 당시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상황은 외교 분야에서 군사 전략의 현실적 조정을 허용하도록

새로운 결정을 요구했습니다.

이 결정들은 조속히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누구도 제 정신으로는 우리 지상군을 중국 대륙에 보내는 것을

찬성하지 않을 것이고, 이런 일은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지만,

만약 우리의 정치적 목적이 처음의 적을 물리쳤듯이

이 새로운 적도 물리치는 것이었다면 이 새로운 상황은

전략을 과감하게 수정할 것을 긴급하게 요구했습니다.

한국의 비극은 군사적인 행동이 그 영토 한계 안으로만 제한되어 있어

우리가 구해 내려는 그 나라가 전면적인 해상 폭격과

공습의 파괴적인 영향으로 고통을 받게 되어 있고

반면에 적의 은신처는 그런 공격과 참화로부터 전적으로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더욱 고조되고 있습니다.

세계의 여러 나라들 중 한국만이 지금까지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모든 것을 건 유일한 나라였습니다.

한국인의 훌륭한 용기와 불굴의 정신은 필설로는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들은 노예가 되는니 차라리 죽음을 무릅쓰기로 했습니다.

그들이 저에게 했던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Don't scuttle the Pacific." "태평양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저는 한국에서 싸우고 있는 여러분의 아들들을 막 떠나 왔습니다.

그들은 그 곳에서 온갖 시련을 감당했으며

저는 그들이 모든 면에서 참 훌륭하다고

기탄 없이 여러분께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그들을 보호하고 이 야만적인 전쟁을 최소한의 시간 손실과

인명피해만으로 명예롭게 끝내고자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늘어가는 유혈사태는 저에게 더없이 깊은 고통과

불안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 용맹스런 병사들은 제 생각과 기도 속에

항상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저는 52년간의 군복무를 끝마치려 하고 있습니다.

세기가 바뀌기 직전에 제가 군에 입대했을 때,

그것은 소년시절의 제 모든 희망과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제가 웨스트포인트의 평원에서 선서한 이래 세상은 여러번 바뀌었고,

희망과 꿈이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만 저는 아직도

'노병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 갈 뿐이다'라고

자신 있게 선포했던

그 당시 병영 최고의 애창곡들 가운데 한 곡의 후렴구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노래의 노병처럼,

저는 이제 군인으로서의 이력을 마감하고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자 했던 한사람의 노병으로서

다만 사라져 갑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사라져가는 노병 맥아더장군

(연설 후 국회를 떠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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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군사적 안목과 정치적 안목을 이야기한 것이다.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맥아더 장군의 판단을 당연시 생각할 수 있으나 트루만 대통령의 정치적 안목과 판단은 인류의 또다른 큰 불행을 자초하지는 말자는 안목이다. 물론 트루만의 안목과 생각대로 결과적으로는 한반도가 원래대로 반쪽씩 현상유지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한반도는 반쪽씩 나누어지게 되었고 남과 북은 반세기 넘게 서로 사상과 체제를 달리하면서 아귀다툼을 벌이며 죽고 죽이는 살륙을 진행해 오고 있다.  조상을 잘못 만난 탓으로 오늘의 불행을 당하고 있는 이러한 민족의 불행은 우리들의 몫이 되었다.

 

이 대목에서 고대 로마시대 '포에니 전쟁'을 떠 올리게 한다.

 

이탈리아 반도 끝 메시나 해협 건너 시칠리아섬에 그리스 도시국가 '메시나'가 이웃도시인 '시라쿠사'가 당시 해양 강대국인 '카르타고'를 등에 업고 '메시나'를 공격하게 된다. 이에 '메시나'는 로마에 구원을 요청하게 되는데 로마 원로원은 갑론을박 끝에 이탈리아 반도의 위협을 방치할 수 없는 관계로 당시 신생국이던 로마는 힘은 부족하지만 '메시나'를 지원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포에니 전쟁'은 제1차 시칠리아 쟁탈전, 제2차 한니발 전쟁, 제3차 카르타고 멸망까지 장장 150여년 동안 로마제국이 풍전등화의 위기를 겪는 등 엄청난 희생을 치루면서도 마지막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게 되었고 그후  약 2000년 동안 지중해 일대와 에스파냐, 프랑스.독일.영국,  동유럽, 그리스 및 소아시아, 이집트,북아프리카 일대를 지배하는 강대국으로 자리메김하는 결과가 되었다.

 

 

 

 

 

한국의 휴전 반대

 

3월 24일 이승만은 한만국경까지 진격하기 전에 정전은 안 된다고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한편, 동부(강원도 쪽)에서 중국 인민해방군과 조선인민군이 강릉까지 밀고 내려오자, 유엔군은 이 전선을 지원방어하였고, 좀 지나자, 유엔군은 전전선에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결국, 중국 인민해방군, 조선 인민군이 뒤로 크게 밀려, 유엔군은 38선을 넘었고 유엔군은 방어선을 쳤다. 바로 이것이 지금의 휴전선이다. 하지만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전쟁은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소련이 전쟁에 부분적으로 참전하였다. 이제부터 한국전쟁은 국제전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휴전 협정

 

이승만1951년 6월 9일 38선 휴전의 결사반대를 선언하였고 6월 27일 소련의 휴전안을 거부하였다. 1951년 7월에 휴전 회담이 개시된 후 세계 전쟁 사상 처음 보는 제한 전쟁(정전이 되면 각기 점령 지역에서 국경이 정해지는 조건으로 싸우는 전쟁)이 벌어졌다. 1951년 9월 20일 이승만은 휴전 수락의 전제조건으로 중국 인민지원군 철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무장해제, 국제 연합 감시 하 총선거를 요청하였다. 군사분계선 문제는 이미 1952년 1월 27일에 타결되었으며, 1952년 5월에 이르러선 포로교환 문제를 제외하곤 거의 대부분 의제에 합의하였다.

 

한국 전쟁 중 2년 동안 이렇다 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개입으로 전선이 고착화하자, 중화인민공화국을 부담스러워한 미국은 현상유지 차원에서 휴전협정을 추진하였다. 소련이 부분적으로 참전하자, 세계 여러나라들은 한국 전쟁이 머지않아 냉전체제와 한국의 통일을 위한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거라는 가능성이 커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엔군과 중국 인민해방군은 얼른 이 한국전쟁을 중단하고, 정전을 하기로 했었다. 미국소비에트 연방중화인민공화국 측과 휴전을 논의한다. 1952년 3월 이승만은 분단 상태에서의 휴전은 한국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주장하며, “민족국가로 생존하기 위해 단독으로라도 계속해 싸워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고집하며 휴전에 협조하지 않았다. 유엔군과 한국군이 반격하였고 인민군압록강까지 북쪽으로 물리쳤을 때, 이승만은 한국을 분단시킬 여러 번의 정전 제안에 동의하기를 거절하였고 이 때문에 연합국들로부터 인기를 잃게 되었다. 이승만국제연합의 도움으로 통일된 한국의 지도자가 되기를 희망하였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완전히 제거하는 데 방해가 되는 어떤 평화 협정에도 반대하였다. 또한 그는 중국에 대응하여 좀 더 강력한 방법이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미국이 폭격을 하는데 망설이는 것에 대해 화를 내곤 하였다.

 

그리고 또한,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의 죽음으로 정전 회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어, 1953년 3월 19일 소련 내각은 '한국 전쟁을 정치적으로 마감한다.'는 결정을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통보하면서 부상포로의 우선 교환에 동의하도록 지시(또는 요청)했다.

 

1953년 5월 30일 이승만아이젠하워에게 보낸 친서에서 다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요구하였다. 이승만은 휴전 협정을 방해할 목적으로 수감된 포로들 중 반공포로들을 대규모로 석방했다.(1953년 6월 18일) 전격적인 반공포로 석방에 격분한 미이승만을 제거할 작전을 계획한다.

 

주로 개성금강산에 이르는 곳에서 전투가 계속되다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소련을 통해 휴전을 제의하였고 유엔군 측의 승인으로 휴전이 되었다. 1953년 7월 27일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 만에 한국 전쟁은 휴전으로 매듭이 지어졌으며, 현재까지 그 효력이 이어지고 있다. 휴전 협정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다시 서울에 올라와서, 휴전협정 4조 60항은 협정 체결 후 3개월 안에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고위급 관계국 정치회의를 개최할 것을 쌍방 정부에 건의했다. 그 직후인 1953년 8월 28일 제7차 국제 연합 총회결의 711호를 통해 휴전협정을 인준하고 협정 4조60항이 건의한 대로 한반도 통일을 위한 정치회의가 개최되는 것을 환영한다고 선언했다.

 

2007년 남북 정상 회담은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으나 이명박 정부 이후 상황이 급변하여 금강산 민간인 관광객 피살사건, 천안함 사건, 연평도 포격사건 등과 북한의 핵실험 등으로 인한 지속적인 갈등으로 남북관계가 경색되었다. 2013년 3월 5일 북한의 3차 핵실험에 따른 UN의 대북 제재 추진과 한미 합동 군사훈련 키 리졸브에 반발해 북한은 인민군 최고사령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키 리졸브 훈련이 개시되면 정전협정을 백지화할 것이라고 선언했으며 11일 훈련이 개시되자 정전협정의 백지화를 선언했다.

 

 

휴전 협정 이후의 충돌

 

휴전 협정 이후 크고작은 국지도발 및 무력충돌이 여러번 있었다. 1968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김신조를 앞세워 청와대 침투를 시도한 사건이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경찰과 민간인을 포함해 인명피해가 있었다. 또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강릉 잠수정 사건 등으로 충돌이 게속되었다.

 

1990년 이후에는 북방한계선부근에서 수차례의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1999년에는 서해 연평도 부근에서 제1연평해전이 있었으며, 2002년 한일 월드컵 기간 사이에 비슷한 지점에서 제2연평해전이 발발하였다.

 

2008년에는 금강산에서 대한민국관광객 1명이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2009년에는 대청해전이 발발하였다. 2010년에는 천안함 침몰 사건연평도 포격이 발생하였다.

 

 

 

 

망명 정부 계획

 

한때 이승만은 일본 야마구치 현에 망명정부를 설치하는 방안도 세우고 있었다. 정권 관리들은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야마구치현에 망명정부 수립의사를 일본에 전달했으며, 일본 정부는 야마구치현 지사 다나카에게 6만여명을 수용할 시설 및 식량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당시 다나카 지사는 현의 소학교를 망명정부 시설로 확보하는 방안과 일본 정부에 대해 특별 식량배급요청 여부를 검토하기도 했다. 1950년 6월27일 이승만은 대통령과 내각으로 구성된 망명정부를 일본에 수립하는 방안을 주한 미국 대사에게 문의해왔고, 이는 그대로 미 국무성에 보고되었다.

 

한편, 미국은 방어선이 무너질 때 대한민국 정부와 군인 60만 명을 이동시켜 서사모아 제도 근처의 사바이섬이나 우폴루섬에 새로이 '신한국'을 창설한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의 결과

 

3년 1개월에 걸친 한국 전쟁은 한반도 전체를 폐허화했고, 참전한 외국의 병력에까지 극심한 해를 입었으며 이때 사용된 폭탄의 수는 불분명하지만 1차 세계대전에 맞먹는다고도 하고 그렇지 않다고도 한다. 한국전쟁은 그 밖에도 약 20만 명의 전쟁 미망인과 10여만 명이 넘는 전쟁 고아를 만들었으며 1천여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되어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했다.

 

소련의 통계에 따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11.1%에 해당되는 113만 명의 인구가 전쟁을 통하여 사망하였고, 양측을 합하여 250만 명이 사망하였다. 80%의 산업시설과 공공시설과 교통시설이 파괴되었고, 정부 건물의 4분의 3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으며 가옥의 절반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미군은 약 54,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이는 베트남 전쟁 때보다는 약간 적은 수이지만 훨씬 짧은 시기에 발생하였다.

 

 

 

대한민국 피해 

 

 

거창 양민학살 사건

 

 

미국의 통계에 따르면 60만 명이 전쟁 중에 사망하였고, 전체 참전국의 사망자를 모두 합하면 2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인의 사망자는 백여만 명이 넘으며 그중 85%는 민간인이다.

 

또한 미군에 의해 피난민들이 학살당한 노근리 학살사건, 거창 주민들이 조선인민군 부역자로 몰려 학살당한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한국군의 대표적인 전쟁 범죄보도연맹 사건, 산청·함양 양민학살 사건, 강화 양민학살 사건, 대중선동으로 조선인민군들이 우파들을 죽인, 소위 인민재판 등의 전시 민간인 학살피해자, 즉 전쟁 범죄 피해자들도 발생했다. 이러한 민간인 피해 및 전쟁범죄 사건의 규모는 극히 최근에 공개된 것이다.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은 이승만 정권의 평판을 크게 실추시키는 실정으로 비판받았다.

 

한국 전쟁으로 인해 한반도 전체가 폐허가 되었으며 특히 일제가 만들어 놓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역의 대규모 공업지역은 융단폭격을 당해 완전히 소실되었다. 한강의 다리는 모조리 끊어졌으며 수많은 전쟁고아가 양산되었다.

 

전쟁을 통해, 대한민국은 미군의 주둔과 미국의 경제지원으로 군사적·경제적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고, 전쟁 이전부터 있었던 반공주의가 더욱 극심해져, 이승만은 이를 독재정권 유지에 이용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피해

전쟁 과정과 전쟁 이후에 김일성은 한국 전쟁의 책임을 박헌영, 김무정 등 자신의 정적들에게 전부 뒤집어씌우고 숙청하여 자신의 정적을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게 됨으로써 '김일성 유일체제'의 기반을 닦았다. 그리고 전쟁 기간 동안 점령지 주민에 대해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으며, 이는 RG 153의 미군 전쟁범죄조사국(The War Crimes Branch) 문서들에서 드러났다.

 

공산주의적인 산업화 즉, 통제경제에 따른 산업화를 더욱 급속하게 추진할 수 있는 계기를 얻었으나 급진적인 단기정책들의 효과는 미비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적인 상황이 1960년대 이후로 대한민국과의 비교에서 매우 악화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이 만들어 놓은 대규모 공업단지가 폭격으로 인해 완전히 소실되었으며 한국 전쟁 직전까지 대한민국보다 공업이 발전한 선진국이였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러한 피해, 이후 족벌독재, 군사력 증강에만 집중하게 되어 1970년대에는 경제가 역전되어 대한민국보다 후진국이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후 복구를 위해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10억 루블을 지원받았으며,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8억 위안을 지원받았다.

 

 

 

미국 피해

 

 

 

303 고지 학살 사건

 

 

미국
은 한국 전쟁에 가장 많은 군사를 지원하였고, 윌리엄 F. 딘 장군을 비롯한 상당수의 미군들이 전쟁포로로 잡혔다. 또한 이 과정에서 총살된 미군의 숫자도 많았다고 한다.

 

 

중화인민공화국 피해

중화인민공화국은 사회주의 진영을 지키고 미군을 위주로한 UN군에 패하지 않으므로 일본항복 후 또 다시 한번 국제위상을 제고시킨다. 하지만 엄청난 사상자를 냄으로써 이기지도 지지도 않은 전쟁을 치르게 되였다.

 

 

기타 UN군 피해

 

UN군에는 미국 이외에 영국, 캐나다, 터키, 그리스 등이 소속되어 1만명 이상을 파병하였다. 터키군은 1만4936명을 파병하였고, 724명이 전사하였다.

 

 

포로 송환 문제

 

종전 후 북한은 모든 유엔군 포로들을 송환했다고 주장하나 아직도 미송환 국군 포로가 존재하고 있으며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 포로들도 전부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평가

 

대한민국을 비롯한 세계 대부분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이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기 위한 차원에서 38도선 전역에 걸쳐서 대한민국에 대한 무력 침공을 감행하였다는 남침설을 정설로 보고 있다.

 

3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숨지거나 다치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국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에 서로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팽배하게 되어 한반도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면서, 지금 2013년 현재 까지도 휴전선에 의한 분단대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