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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남의 봄 25 : 현충일의 의미 12 (6.25 전쟁, 한국전쟁 11)

 

 

 

강남의 봄 25 : 현충일의 의미 12 (6.25 전쟁, 한국전쟁 11) 

 

 

                                                                     북악 둘레길에서 바라본 성북동 전경

 

 

 

 중공군의 개입과 1.4 후퇴, 서울 피탈 및 재수복, 휴전까지 공방전 

 

 

중공군의 개입과 1.4 후퇴

 

중공군 참전

중국군이 한국에서 이룬 "승리"를 보여주는 중국의 포스터

 

 

북한군의 남한침공 이틀 후, 그리고 중공군 개입 3개월 전인 1950년 6월 27일, 트루먼 대통령은 중공으로부터 대만을 보호하기 위해 대만해협으로 미해군 제7함대를 급파하였고, 같은 해 8월 4일, 마오쩌둥은 소련정치국에 중화인민의용군의 준비가 완료되는 대로 전쟁에 개입할 것임을 보고하였다.

 

8월 20일 저우언라이 총리는 UN에 "한국은 중국의 이웃나라이므로...중국인은 한반도 상황에 개입해야만 한다."는 내용을 통보하였으며 중립국 외교관을 통하여 "중국의 안전을 위하여 UN의 한국전 개입을 방해할 것"이라 미국에도 통보하였으나 트루먼 대통령은 "UN을 협박하기 위한 뻔한 시도"로 결말을 내렸다.

 

1950년 10월 2일, 한국군이 38선을 통과한 다음날, 소련 정치국은 중공군 개입을 승인하였고 후에 중공군은 미군 폭격기가 북한을 향하던 중 중공의 영공을 침범하였기 때문이라 주장하였다.

 

9월 모스크바에서 저우언라이 총리는 외교와 개인적 노선을 동원해 스탈린에게 군사와 물자지원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이를 지체함에 따라 마오쩌둥도 예정을 변경하여 한국전 개입을 1950년 10월 13일에서 19일로 연기하였다. 소련군은 또한 공중엄호를 서방공군과의 전쟁경험을 위한 전선에서 100km 이상의 거리에서만 허용하였으나 이용된 미그-15s기는 UN의 제공권에 큰 위협을 가하였다.

 

1950년 10월 8일, 미군의 38선 이북으로의 진군 다음 날, 마오쩌둥은 중화인민해방군 북방지역군에게 중화인민의용군 휘하로 편입하여 한국을 침공할 것을 명령하였다.

 

중공인민의용군의 야간진군과 오전 5시30분 이전까지 전개된 대공위장술, 그리고 이어진 주간진군팀의 다음 야영지 수색은 미 항공수색의 의용군 포착을 어렵게 하였다. 주간진군동안 항공기가 포착되면 사라질 때까지 병사들은 미동을 정지한 채 있도록 하였고 그러한 전략은 3사단을 만주의 안퉁에서 한국전쟁지역까지 460km를 19일동안 이동시키는 것이 가능하게 하였고 반면 산악지대를 행군로로 선택한 다른 사단은 18일동안 29km를 행군하는데 그쳤다.

 

그 동안, 1950년 10월 10일, 제 89전차대대는 제1기갑사단에 포함되는 등 UN군은 기갑을 강화하고 있었다. 10월 15일, 비교적 약한 북한인민군의 저항에 맞서 제7기갑연대와 제70전차대대는 남천잠을 획득하였고, 10월 17일 평양으로 가는 주로의 우측측면으로 우회하여 황주를 공략하였다. 이틀 후, 제1기갑사단은 평양을 점령하였고 1950년 10월 19일, UN군은 북한 공략에 성공하였다.

 

1950년 10월 15일, 맥아더 장군은 태평양 웨이크 섬(Wake Island)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중공군이 개입하기에는 이미 늦어 침공가능성이 적다고 의사를 밝혔고 중공군은 만주에 30만, 압록강변에 10~12만5천 명의 군이 포진해 있으며 그중 반 정도가 압록강을 넘어 남진할 수도 있으나 "공중지원 없이 그들이 평양으로 진격할 경우 대패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두 번의 작은 충돌 후, 1950년 11월 1일 북한진영 깊숙이에서 첫 번째 대규모 미-중 전투가 벌어졌다. 수천의 인민의용군이 곳곳에 산재한 UN지휘부대를 북쪽, 북서쪽, 서쪽 3개 방향에서 삼자창 전법으로 포위, 공격하여 방어태세의 측면을 괴멸시켰다. (운산전투). 11월말, 서부진영 청천강 유역에서 인민의용군은 몇몇 한국군 사단과 남아있던 UN군의 측면을 괴멸시켰고 UN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터키여단이 중국국경의 군우리에서 방어에 성공함에 따라 미8군은 퇴각로를 확보하였고 중화인민의용군의 진격을 4일간 늦출 수 있었다. 동부진영의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 전투에서는 중공군의 삼지창 전법에 익숙하지 못했던 3 미 제7보병사단의 연대전투단(3000명)과 미 제1해병사단이 5군단의 지원사격하에 겨우 탈출에 성공하였다. 이는 10배에 달하던 중국군 제9병단(7개 사단 병력, 12만 명 규모)에 포위되어 전멸 위기를 겪었다가, 간신히 성공한 후퇴 작전으로 미군측이 15,000명의 사상자를 낸 전투이다.

 

초창기의 전방 인민의용군은 중화기나 승무원 탑승의 경기갑이 전혀 없었으나 빠르게 그들의 이러한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켰다. 일반적으로 사용된 전법은 50명 규모의 소대에서 200명 규모의 중대 등 작은 규모의 부대를 침투시켜 여러 분대로 나눈 후, 한 분대가 미군의 퇴각로를 차단하는 사이 남은 분대는 전방와 측면을 합동공격하는 것이었다. 방어세력이 결국 패하여 후퇴할 때까지 전방위 공격을 줄기차게 한 후 중공군은 다음 소대위치의 측면으로 몰래 이동하여 같은 전법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대공세 국면에서는 경험이 풍부한 경보병이 박격포 이상의 중장비의 도움 없이 공격을 주도하였고 이들 중공군은 수십 년 동안 중일전쟁과 국민당과의 내전을 통해 잘 훈련된 모습을 보였으며 야간기습에 특히 뛰어났고 무엇보다도 군사위장에 능통하였다. 순찰대는 UN군의 위치추적에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이들 부대의 후면으로 이동, 퇴각로를 차단한 후 삼자창 전법으로 전방위 대공세를 가하는데 뛰어났다. 또한 하치 시키라 불리는 전법도 구사하였는데 이는 V자 진형을 구축하여 적군을 진형 가운데로 끌어들인 후, V자의 입구를 막아 퇴각로를 차단, V자 좌우측면이 적군을 포위, 섬멸하는 전법이었다. 이러한 전법은 온정, 운산 그리고 초산 전투에서 큰 성공을 보였다.

 

11월 말, 인민의용군은 UN지휘본부를 북동부 북한에서 38선 이남까지 밀어내었다. 북한으로의 진격 때보다 빠르게 퇴각한 UN군은 북한 동부해안에 위치한 흥남시 주변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구조를 기다렸다. 1950년 12월, 193척 분량의 UN군과 물자(군인 105,004명, 민간인 98,000명, 차량 17,500대, 물자 350,000톤)이 탈출하여 부산에 정박하였고 1950년 12월 16일, 트루먼 대통령은 대통령 성명으로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1951년 1월, 중화인민의용군과 북한인민군은 제 3단계 공세(중공군 동계 대공세)에 들어가 UN군을 비밀리에 포위, 공격하는 야간전술을 펼쳤다. 공격에는 요란한 나팔과 징이 동원되어 작전전달과 적군을 혼란시키는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전법을 처음 목격한 UN군은 중공군 동계작전에 압도되어 1951년 1월 4일, 서울을 중공군에 빼앗기게 되었다.

 

게다가 미8군의 워커 장군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것이 군의 사기저하를 불러오게 되고 이러한 차질에 맥아더 장군은 중국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후 이로 인해 발생한 방사선 낙진지역을 중공군의 보급로 차단에 이용할 것을 고려하게 된다. 하지만 곧 워커장군의 대체로 투입된 카리스마적인 매튜 리지웨이 중장이 후속 사령관으로 임명된 후 유혈이 낭자했던 미8군은 곧 다시 회생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에 중국 공산당이 투입한 군사는 92만6천명이나 되어 UN군과 한국군을 모두 합친 것과 비슷한 규모였다.

 

 

 

연합군의 패전과 철수

 

연합군의 파죽지세 공격이 중지되고 위력수색만 실시토록 전군에 하달되어 공격을 멈추고 중공군을 찿는데 정보력이 집중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연합군 후방에 나타난 중공군은 연합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시작하였다. 청천강 일대에 나타난 중공군이 포위전술로 연합군의 후방차단이 시도되자 미군과 연합군은 무기와 장비를 버리고 신속하게 철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미군은 장비와 무기는 물론 병력도 심대한 손실을 입고 후퇴하기에 바빴다.

 

한편 장진호 가까이 '고토리'까지 진격한 미 해병 제1사단은 추위와 싸우며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죽음의 계곡을 수없이 지나면서 많은 장비와 병력 손실을 입고 천신만고 끝에 흥남에 도착하여 피난민과 같이 철수하게 된다.

 

 


'생명의 항해 사진전'-전사자의 시체

 

 

중공군의 공세로 전선은 38도선 까지 남으로 계속 밀리고 있었다. 그러던중 '맥아더 장군'이 극동군 사령관직에서 트루만 대통령에 의해 해임되고 후임 '릿지웨이 장군'이 부임하였다. 전선은 서울이 다시 중공군에게 피탈되고 다시 수복하는 등 38선 일대에서 지루한 공방전이 계속되었고 현리전투, 지평리전투, 백마고지 전투, 다솔산 전투, 저격능선 전투 등 철의 삼각지에서는 뺐고 빼았기는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한편 휴전이 제안되어 판문점에서 지리한 휴전회담이 진행되다가 3여 년 간 진행되던 한국전쟁은 종국을 맞이하게 된다.

 

 

중공군의 참전 과정

 

 
'항미원조'를 외치는 중국 시위대의 모습

 

 

항미원조(抗美援朝), 북조선을 도와 미국을 몰아내자”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를 역전한 유엔군과 한국 연합군은 통일에 한발짝 다가선 듯했다. 하지만, 이러한 통일의 염원은 1950년 10월 13일, 중국군이 개입을 결정하면서 다시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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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의 상이군인 수첩에서 발견된 6.25전 참전인의 사진

유엔군의 참전 이후 김일성에게 중국의 개입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단둥(丹東) 항미원조(抗美援朝) 기념관에는 김일성이 모택동에게 6.25전쟁 군사지원을 요청한 편지가 전시돼 있다.

 

이에 따르면, 김일성과 박헌영은 1050년 10월 1일 조선노동당 주앙위원회 명의로 작성한 이 편지를 마오쩌둥에게 보냈으며,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수세에 몰린 북한군의 다급한 처지가 기록돼 있다.

 

 앞서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으로 패주하면서 중국 망명정부 수립을 준비 중이던 김일성은 ‘경애하는 마오쩌둥 동지’ 앞으로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 위험상태를 극복할 수 없다."며 "중국인민해방군이 직접 출동해 지원해 달라.”고 적었다.

 

미국의 언론인이자 역사가인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콜디스트 윈터’에서 중국 참전 결정의 모습이 상세히 기록했다.

 

당시, 마오쩌둥(毛澤東)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고 동이 틀 때까지 줄담배를 피웠으며, 중국과 한국의 지도를 하염없이 쳐다봤다. 하지만, 갈수록 중국이 참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뚜렷해졌다. 타이완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고, 미군과의 정면충돌을 피하고 싶었다.

 

그는 이번 전쟁의 승패가 가져올 정치적 여파를 꼼꼼히 계산했다. 미군이 참패를 맛볼 것이라 확신했다. 국공내전을 치르느라 쇠약해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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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19일, 중국 인민지원군들은 압록강을 건너 조선전장으로 달려갔다. 중국이 내세우는 6.25전쟁 참전의 대의명분은 ‘미국에 대항해서 북한을 돕는’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이었다. 이러한 것은 구체적으로는 제7함대를 파견해 타이완 해협을 봉쇄하고,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를 지지한다는 내용의 6월 27일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성명에 정면대항하는 이른바 ‘미·중 전쟁’의 선전포고였다.

 

중국측 자료에 따르면, 6.25전쟁에 참전한 중공군 규모는 79개 보병사단과 12개 공군사단, 16개 포병사단, 10개 공병사단, 10개 전차연대 등 모두 합치면 300만명에 이른다. 최고조에 이른 1953년 4월부터 7월까지는 일시에 130만명의 병력이 투입됐다.

 

이때의 상황을 백 장군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전혀 새로운 전쟁’이라고 술회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38선을 넘어 북진하더라도 중국의 개입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중공군의 참전이라는 현실을 제때 직시하지 못했다. 이로써 유엔군과 한국 연합국 자유진영은 다시 후퇴를 거듭하게 되고, 결국 흥남철수와 1.4후퇴를 맞게 된다.

 

지난번 서울 인사동 갤러리 떼에서 진행중인 '전쟁과 일상'전에 전시 된 중국군의 훈장과 상이군인임을 증명하는 수첩은 한국전쟁이 중국에게도 중요한 전쟁이었음을 말해준다.

 
전쟁 당시 그들이 입은 솜을 넣은 군복, 비상식량이었던 미숫가루를 담은 자루와 순모로 만든 군용담요, 항미원조의 구호가 적힌 법랑과 컵 등 군용물품을 보면 당시 아무런 준비가 없었던 남한에 비해 철저한 준비 끝에 북한을 도와 한국전쟁에 개입했음을 알 수 있다.

 

육군교육사령부의 ‘한국전의 기동전 분석’ 자료에 따르면 중공군 병사는 통상 하루 치 식량을 휴대했고 대대와 연대에서 각각 이틀 치 추가식량을 보유했다. 중공군 전투식량인 초면(炒麵)은 미숫가루와 비슷했다. 미군 보병사단은 식량 등 하루 보급품이 600t인 데 비해 북한은 60t, 중공군은 50t에 불과했다.

 

겨울에는 야전상의를 뒤집어 입고 눈밭을 다니며 폭격을 피했다. 그들은 한국인의 기억에서 흰색 망토 같은 천을 두른 무뚝뚝한 사람들로 남았다. 전쟁 당시 사용했던 물품들을 당시 6·25전쟁에 나선 중공군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중공군의 모든 물품에는 ‘항미원조’ 문구가 선명하다.

 

중국 측의 공식 통계로 6·25전쟁에서 전사한 중공군은 18만3108명이다. 미군 전사자 5만4246명과 유엔군 전사자 2143명을 합친 것보다 3배 이상 많은 수치다.얼마전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자매지인 환구시보는 한국전쟁 전문가 상하이대 화동사범대 선즈화 교수의 말을 인용해 "한국전쟁은 북한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소년의 스탈린이 승인하면서 초래됐다"고 보도했다. 중국 정부의 기관지가 6.25를 남침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미군에 대항해 북한을 도왔다며 정당성을 주장했던 그들이 남침을 인정하는데 꼬박 60년이 걸렸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3년 동안 밀고 밀리는 피눈물나는  희생을 치르면서 한반도는 다시 한번 초토화 되었고, 수백만 명이 넘는 사상자와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다. 휴전이 되었지만 아직도 평화회담이 체결되지 못한채 전쟁 지속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로부터 62년! 눈물과 갈등의 세월을 보내면서 한국은 정치적인 혼란과 혼돈을 거듭하면서 5.16 이후 경이적인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성장을 일구었고, 눈부신 성장 결과 세계 10대 무역 강국, IT 최강국, 문화예술 강국으로 발돋음하면서, 지난 반세기 동안 인고의 고통스런 세월을 지나 이제는 어느 정도 삶이 풍요해졌고, 많은 국민들이 비만과 다이어트를 걱정하며 식사량을 줄이는 기이한 세상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화폐개혁 등 경제실패, 핵무기/재래식 무기 등 군사강국을 지향해 오면서 국력의 대부분을  쏟아붓다보니 주민 생활은 극도의 굶주림과 가난으로 탈북자가 줄을 잇게 된 것이다. 그들도 그런 상태로는 절대로 오래 갈 수 없다는 점을 마음속으로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후삼국시대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의 경우와 너무나 비슷한 상황이 북한에서 지금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가난의 평등을 가져온 공산주의 경제체제의 문제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지난 소련을 위시한 동구 공산권이 무너진 경우를 보고 잘 알면서도 체제붕괴의 두려움 때문에 중국처럼 개혁.개방을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북한 주민은 인권 탄압, 학살, 고문, 처형, 배급제 등으로 주민들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핵무기 개발에 전력을 쏟고 있으며 저강도 전력을 대량 양성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북한의 인권,  탄압,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 실상을 한국의 좌파 부류들은 외면하고 있으며 한국 정부는 그들의 능멸전술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무능한 전략.전술로 일관하고 때리면 맞고 터지며 죽어나가도 대량보복 한 번 제대로 못하는 바보같은 평화주의자들이다. 탈북자들의 눈물이 두만강 압록강 물이 되어 동해로 서해로 흘러가고 있는 세월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6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2008년 한국통계정보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6.25'전쟁'을 일으킨 나라를 묻는 질문에 '북한'이라고 제대로 답한 학생은 59.9%에 불과했다. 특히, 초등학생 35.1%는 "한국이 일으켰다"며 북침설를 주장했다.또한, 2004년 국방부가 실시한 입대장병 의식조사에서는 75%가 반미감정을 드러내며 공산주의에 비해 자유민주주의가 우월하다고 답한 장병이 36%에 불과했다고 하니, 대한민국체제에 대한 불신과 북한체제에 대한 수용적 태도가 밑바닥에 깔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6.25전쟁에 대한 이해 미흡과 친북적 인식은 대한민국의 안보에 우려스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6.25전쟁 발발 62주년,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들이 아직 너무나 많다.

 

 

 

 

연합군의 북진 그리고 패퇴와 1.4 후퇴

 

1·4 후퇴(1·4後退)는 한국 전쟁 중이던 1950년 12월말에서 이듬해 1월초 사이, 중공군의 공격으로 국제 연합군의 주력이 서울에서 물러나고 공산 진영이 서울을 재점령한 사건을 가리킨다.

 

1·4후퇴
(한국 전쟁의 일부)
날짜 1951년 1월 4일
장소 서울
결과 공산군서울 점령
교전국
국제 연합 국제 연합

대한민국 대한민국
미국 미국
타이 타이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
터키 터키

영국 영국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
대한민국 이형군

대한민국 백선엽
미국 더글라스 맥아더
미국 매슈 리지웨이
타이 타이 보병
터키 터키 여단

중국 마오쩌둥

중국 펑더화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리권무

 

 


 

 

1950년 12월 제2차 청천강 전투장진호와 같은 곳에서 벌어진 공산진영의 예상치 못한 강력한 반격에 부딪친 한국군과 미군은 38도선 이북에서의 대대적인 철수를 계획하였다. 이후 대한민국12월 4일평양을 철수하고, 이를 평양 철수 작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2월 14일부터 24일 사이에 동부 전선의 한국군 12만과 피난민 10만이 흥남 부두에서 해상으로 철수하였는데, 이를 가리켜 흥남철수라고 한다. 장진호 전투에서 중국군 속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미국 1해병사단12월 24일에 흥남에서 철수했고, 1월 4일에는 서울을 다시 내주었다. 1월 7일에는 수원이 함락되었다.

 

 

원산폭격

 

 

 

에식스급 항공모함에서 이륙한 2대의 F9F-2B 팬더 전투기가 원산 상공을 비행중이다.

 

인민군은 계속 남진했으나, 한국군은 이미 병력과 장비를 정비하여 반격 태세를 갖추었다. 유엔군과 이승만 대통령은 북쪽 땅인 원산 등 기타 지역에 폭격을 가했다. 그러나, 12월 9일원산에서 철수하였다.

 

 

 

 

운산-영변 전투

운산-영변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날짜 1950년 10월 24일 ~ 10월 31일
장소 평안북도 운산, 영변
결과 중공군의 승리
교전국
대한민국 대한민국
미국 미국
중국 중화인민공화국
지휘관
대한민국 백선엽 제1사단장 준장
대한민국 최영희 제1사단장 준장
대한민국 김동무 제11연대장 대령
대한민국 김소 제1대대장 소령
대한민국 차갑준 제2대대장 중령
대한민국 정영홍 제3대대장 중령
대한민국 김점곤 제12연대장 대령
대한민국 한순화 제1대대장 중령
대한민국 조성래 제2대대장 중령
대한민국 김기용 제3대대장 중령
대한민국 조재미 제15연대장 대령
대한민국 유재성 제1대대장 중령
대한민국 김진위 제2대대장 중령
대한민국 안병건 제3대대장 중령
미국 윌리엄 H. 헨닉 미 제10고사포단장 대령
미국 존 S. 그로우든 미 제6전차대대장 중령
불명
병력
약 1만 명 제32사단
제117사단
제39사단
피해 규모
600명 (UN 추측) 유엔군 1149명
국군 530명
2000명 (중공군 추측)

 

 

운산-영변 전투는 한국 전쟁 중기 북한 동부전선에서 진격을 계속하여 한만국경선을 눈앞에 둔 국군은 운산-영변 지역에서 중공군과 벌인 접전으로 중공군의 세력을 과소평가한 국군은 물자부족과 열악한 조건 속에 진격을 감행함으로써 중공군에 의해 포위당하는 형세에 몰리게 되었으며, 많은 손실과 함께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전투 과정

 

10월 26일

중공군이 개입한 지 이틀째가 되던 10월 26일 전선에 변화가 오기 시작하였다. 조재미 대령이 이끄는 제15연대는 삼탄천 북쪽 고지의 중공군을 공격하였는데, 중공군의 역습을 받아 약간 뒤로 물러난 상태에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존 S. 그로우든(John S. Growden) 중령이 이끄는 미 제6전차대대는 탄약과 연료 부족으로 이의 재보급을 위해 제15연대를 지원하던 중 D중대를 남쪽으로 이동시켜야 했다.

 

제12연대는 선전하여 운산의 서쪽 고지를 확보하고 있었으나, 그 사이에 1개 연대 규모의 중공군이 운산 북방 10km 일대까지 남하하여 진지를 구축 중에 있었고, 그 일부는 남면천까지 진출함으로써 운산-용산동 간의 사단 주보급로가 차단되었다. 이에 사단예비대로 운산 남쪽에 있던 제11연대가 일부 병력으로 이들 중공군을 공격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날 중공군은 서서히 운산을 포위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 다음날 사단은 10대의 미 공군 수송기(C-119)에 의한 공수보급을 받음으로써 공격을 계속할 수 있었다. 새로이 탄약을 보급 받은 제15연대는 262고지-199고지-212고지를 연하는 북위 40도선까지 진격하였고, 김점곤 대령이 이끄는 제12연대도 남면천 방향으로 경계를 강화하여 부대를 재배치하였다. 한편 운산 남쪽에서는 김동무 대령이 이끄는 제11연대가 이날 오후 운산-용산동간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있는 중공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다.

 

 

10월 28일

이때 운산국민학교에 위치한 전방지휘소에서 중공군의 상황을 직접 파악한 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사단 정면의 중공군은 완전한 정규군 1개 사단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즉각 밀번 군단장에게 제보하였다. 10월 28일의 운산의 전황은 비교적 소강상태를 유지하였으며, 각 연대는 진지강화와 수색활동을 전개하였고, 중공군도 적극적인 행동을 삼가면서 다음 전투를 대비하는 것 같았다. 이날 제12연대는 다시 2명의 중공군을 생포하였는데, 이들도 중공군의 대부대가 침입하였다는 내용을 진술함으로써 10월 25일 최초로 생포한 중공군 포로의 진술내용이 사실로 확인된 셈이었다. 그러나 미 제1군단의 정기 정보보고서는 “중공군이 출현한 것은 사실이나 이는 정규편제의 부대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지원한 의용군으로 생각된다.”고 기술하고 있어 미군측은 중공군에 대한 최초의 판단을 바꾸거나 중공정규군 개입을 믿으려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사단의 우측방 인접 부대인 국군 제2군단은 이날 중공군의 포위작전으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초산까지 진격한 제6사단의 각 연대가 중공군 제40군의 포위공격으로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더구나 운산 북방 10km 지점의 구봉산(九峰山)에서는 제2연대 2대대가 중공군에게 포위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미 제8군사령관 월턴 워커(Walker) 장군은 운산 정면의 부진한 전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평양을 경비중인 미 제1기갑사단 허버트 R. 게이(Gay) 소장으로 하여금 국군 제1사단을 초월 전진하여 압록강으로 진격하도록 명령하였다.

 

제1사단은 10월 29일 새벽부터 포병의 탄막사격과 긴밀한 항공지원을 받으면서 서북방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중공군은 비록 소화기와 수류탄 및 박격포 등 화력과 장비 면에서 열세였지만 교묘하게 위장한 깊은 참호 속에 워낙 완강히 저항하여 사단의 공격은 조금도 진전이 없었다. 제15연대가 공격하던 262고지와 제12연대 정면의 용포동(龍浦洞) 북쪽 고지는 아무리 포격과 폭격을 반복하여도 끄떡도 하지 않았으며, 국군이 접근할 때마다 중공군은 수류탄을 국군의 머리 위로 퍼부어댔다.

10월 30일

 

그런데 이날 저녁 무렵에 미 제1기갑사단의 전위가 되어 평양을 출발한 제8기갑연대가 용산동에 집결하여 북진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튿날 10월 30일 제15연대는 사단의 우측에서 공격을 계속하였으나 오히려 적에게 점차적으로 압박을 당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국군의 두 배에 달하는 병력으로써 좌우로 우회하여 연대를 포위하려고 하였다. 제11연대 또한 이날 밤에 수차례의 공격을 받고 격전을 벌였으나 병력의 열세로 부득이 1km 정도 동남쪽으로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편 이날 아침 제1사단과 임무를 교대하기 위하여 북진 중이었던 미 제1기갑사단의 주력이 용산동에 집결을 완료하게 되어 사단장은 전날 이곳에 도착해 있는 제8기갑연대를 운산으로 진출시키고 제5기갑연대로 하여금 그 후방을 엄호하도록 하였다. 이 사단의 임무는 국군 제1사단을 초월하여 삭주 방면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측방의 붕괴소식에 이어 운산 서남방에 수 미상의 중공군이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으며, 미 제 8군정보참모는 북진하고 있는 제 8기갑연대장과 참모들에게 운산에서 아군을 공격하나 적은 중공군일 가능성이 크다고 경각심을 환기시켰다. 또한 사단을 지원하고 있는 미 제10고사포단장 윌리엄 H. 헨닉(William H. Henning) 대령도 증거를 제시해 가면서 정면의 적은 중공군이 틀림없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연대는 이날 오후에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운산에 도착했다.

 

10월 31일

사단은 10월 31일 오전부터 미 제 1기갑사단과 교대를 시작하면서 중공군과의 공방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미 제1기갑연대의 제3대대는 한국군 제11연대와 남면천변에서, 그리고 제2대대는 운산 서측방의 국군 제1연대의 좌측 대대와 교대를 오전 중에 완료하였다. 그러나 전날 밤부터 중공군은 국군 제15연대 정면에 강력한 압력을 가하는 동시에 제12연대의 우측 제2대대도 계속 공격을 가해 왔다. 따라서 동 대대와 교대하기로 되어 있던 미 제1대대는 우선 그 후방의 진지를 점령한 후 한국군을 지원할 태세를 갖추었다.

 

한편 한국군 제 1사단의 최초 계획에 의하면 제11연대는 미군과 교대하고 난 다음 위기에 처해 있는 제15연대를 증원할 예정이었으나, 이때 사단의 우측 배후를 엄호해주고 있는 한국군 제8사단 16연대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는 긴급히 구룡강(九龍江) 동안으로 이동하여 동 연대와 연결하고 이곳 방어에 임함으로써 사단의 우측 배후를 방비하게 되었다. 그런데 중공군은 제39군 주력이 운산 부근을 향하여 남하하고 있었으며, 이때 그들은 주위의 여러 곳에 산불을 질러 그 연기로 유엔군의 공중관측을 차단하고 그들의 부대이동을 은폐하려 하였다.

 

이 무렵 미 제8군의 맨 좌측방은 순조롭게 진격하고 있었는데 즉 미 제24사단은 서해안 도로를 따라 신속히 진격, 제21연대는 곽산을 거쳐 천을 통과하였고, 제5연대는 구성을 점령한 후 수풍을 향해 북진하고 있었으며, 정주에 있던 제10연대도 구성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동 사단은 압록강을 향해 계속 진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청천강 계곡으로부터 위급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미 제8군은 국군 제7사단과 제8사단을 구장동의 동서로 연한 방어선에 배치하고자 하였으나 그 전에 돌파를 당하였다. 따라서 중공군의 대군이 곧 청천평야에 출현할 것을 예상하면, 국군 제2군단이 이용가능한 진지는 원리(院里) 일대밖에 없는 셈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미 제8군사령부에는 전황이 미 제1기갑사단은 운산으로 증원하여 전세의 호전을 기대했던 전날과는 다른 국면으로 변화되고 있음을 간파한 듯 지금까지의 낙관적인 분위기가 사라졌다. 워커 장군은 밀번 미 제1군단장에게 운산의 전황을 주시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병력을 과소평가하는 미 제8군의 종전의 입장에는 변화가 없었다.

 

 

결과 및 영향

운산-영변의 전투의 결과로 국군은 일시적으로 중공군을 공격하여 전진하였으나 이는 곧 있을 대대적인 중공군의 공격으로 이어졌으며, 물자부족과 북부 산악지방의 추위 속에서 악전고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선 지휘관들의 제언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의 개입을 과소평가한 지휘부의 오판에 따라 많은 손실을 입게 되었으며, 이후 동부전선의 국군은 흥남을 통하여 해상철수를 하기에 이른다.

 

 

초산전투

 

초산 전투
(한국전쟁의 일부)
날짜 1950년 10월 23일 ~ 10월 26일
장소 평안북도 초산
결과 국군의 승리
교전국
대한민국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
대한민국 유재흥 제2군단장 소장
대한민국 김종오 제6사단장 준장
대한민국 임부택 제7연대장 대령
대한민국 김용배 제1대대장 중령
대한민국 김종수 제2대대장 중령
대한민국 인성관 제3대대장 중령
대한민국 김성 포병 제16대대장 소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무정 제2군단장 중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오백룡 제8사단장 소장



초산 전투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 중부 전선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따라 계속 북진한 국군 제2군단의 제6사단이 청천강 계곡을 진격해 초산 지역까지 점령한 전투로서 압록강변까지 진격할 수 있는 기초를 닦은 전투이자 처음으로 중공군이 개입한 전투이기도 했다.

 

제6사단은 어느 사단보다도 빨리 청천강 계곡을 급진하여, 10월 23일 밤에는 이미 희천에 돌입한 다음, 다시 서쪽으로 그 예봉을 돌리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임부택 대령이 이끄는 제7연대가 가장 선두에서 진격을 재촉하고 있었다. 연대는 서쪽으로 돌진하여 극성령을 넘어 회목동-판하동을 목표로 계속 진출할 준비를 갖추었다.

 

각 대대는 단독으로 진격로를 개척하면서 패적에 육박하고 있었는데, 그 최종 목표인 초산까지는 불과 80km정도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작전계획

유재흥 소장이 이끄는 제2군단장은 압록강변을 제압하면서 한.만 국경선을 감시함으로써 국토통일을 완수하려는 작전개념을 김종오 준장이 이끄는 제6사단으로 하여금 수풍댐으로부터 서쪽지역을 담당토록 하고, 이성가 준장이 이끄는 제8사단으로 하여금 그 동북측으로 만포진방면을 담당토록 하였다.

이에 따라 제6사단장 김종오 준장은 제7연대를 우일선으로 하여 초산을 목표로 진격토록 하고, 함병선 대령이 이끄는 제2연대를 좌일선으로 하여 벽동을 목표로 돌진토록 하는 동시에 박광혁 중령이 이끄는 제19연대를 예비대로 공치케 하였다.

 

제7연대장은 사단의 우일선 연대로서, 김용배 중령이 이끄는 제1대대를 선두대대로 하고, 김종수 중령이 이끄는 제2대대와 인성관 중령이 이끄는 3대대 순으로, 극성령을 넘어 회목동-판하동-고장을 점령해 확보한 다음, 계속하여 초산으로 돌입함으로써 압록강변을 확보케 하고, 제1대대로 하여금 초산을 점령케 하는 동시에 이어서 연대 주력은 초산으로 진격토록 하였다.

 

 

전투과정

10월 23일

제7연대 제1대대는 희천을 점령, 확보한 다음 연대 작전계획의 변동으로 인하여 대대장 김용배 중령은 요지 다음과 같은 명령을 예하 각 중대에 하달하였다

 

"이대용 대위가 이끄는 제1중대는 대대의 일부로써 방향을 바꾸어 서쪽으로 진격하여 극성령을 넘고, 회목동-풍양-고장을 거쳐, 초산을 점령하는 즉시로 압록강 국경선을 경비하라."

 

이에 따라서 제1대대는 희천-영변 쪽에서 북쪽으로 패주하는 북한군을 계속 추격하여 이를 격멸하면서, 이날 14:00에 희천을 출발하여 극성령 부근에서 준동하는 1개 소대규모의 적을 일거에 격파한 다음, 20:00에 회목동까지 진격하였으며, 제2대대는 제1대대에 뒤따라 또한 이에 뒤질세라 진격을 재촉하고 있었다.

 

한편 제3대대는 연대본부와 같이 구장동에서 차량으로 태평을 경유하여 이날 13:15에 온정리까지 진격한 다음, 계속 회목동 쪽으로 진출하던 중 18:00에 이르러 용연 남쪽 관대동에서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최후 저항을 감행하려는 1개 대대규모의 북한군과 부딪혀 30분 간에 걸친 교전 끝에 북한군을 서쪽 멀리 대암봉 쪽으로 물리치면서 승승장구로 용연까지 진격하였다.

 

10월 24일

제7연대 제1대대는 전날 이래로 진격을 계속하던 바, 이날 주식을 위한 두 시간의 휴식과 부대정비를 끝마친 다음, 제3중대를 선두로 제1중대, 제2중대 순으로 초산을 향해 급진하였으며, 제2대대는 제1대대에 뒤질세라 그 뒤를 따라 급진 중이었다.

 

이리하여 양강동을 통과할 무렵, 도로 양쪽 고지에서 병력미상의 북한군으로부터 불시에 기관총의 집중사격을 받았는데, 선두에서 약진하고 있던 제3중대는 즉시 박격포의 포문을 열어 집중탄으로 북한군을 제압하는 동시에 연대장은 제1대대를 우측으로, 그리고 제2대대를 좌측으로 급히 전개하여 도로 연변을 따라 퇴각하는 북한군의 머리 위에 사정없이 총포의 세례를 퍼부었으며, 판하동에 이르기까지 그 화력을 멈추지 않았다.

 

이곳에서 연대는 1개 소대의 강력한 수색대대를 편성하여 북한군의 수색에 임하였는데, 이날 23:00에 수색대에 입수된 첩보는 태천 부근에 중공군이 출몰하였다는 예기치 않았던 소식이었다.

 

 

10월 25일

제7연대는 판하동에서 고장에 이르는 가도를 따라 진격하면서, 어제 저녁에 잡은 포로들로부터 입수한 정보에 의하여, 풍장 동남쪽 고지 일대에 배치되어 있는 북한군 2개 중대규모의 병력에 대하여 81mm 박격포의 일제 집중사격을 가하여 분산시켜 패주케 하는 즉시로 풍장을 확보한 다음 계속 급진하여 18:00에 고장 남쪽 안곡동까지 진출하였다.

 

북한군은 고장을 사수할 목적으로 동북쪽 야산 일대에서 1개 대대규모의 방어진지를 점령하는 한편, 그 남쪽 부평동에 1개 중대, 그리고 고장 북쪽 가마봉에 1개 중대, 또 그리고 그 서쪽에 1개 중대병력을 각각 배치하여, 국군의 예봉을 꺾어 보고자 사력을 다하는 듯이 보였다.

 

연대는 안곡동으로부터 차량을 이용하여, 제1대대를 고장 동쪽으로, 제2대대를 서쪽으로, 그리고 제3대대를 정면에서 각각 전개토록 하여 일제히 공격을 결행하였는데, 북한군은 독전까지 감행하면서 단말마의 최종발악을 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두 시간 이상에 걸친 치열한 교전 끝에 이 적은 강계 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였으며, 연대는 20:30에 고장 일대를 점령, 확보하게 되었다. 이로써 한.만 국경선에서 30km를 남기게 되는 선까지 진출하게 된 연대는, 좌우 인접부대와 충분한 연락을 유지하지 못한 가운데 적진 깊숙이 진격하였기 때문에 곧 적의 반격에 대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제2대대로 하여금 고장 서쪽 일대에, 그리고 제3대대로 하여금 고장 북쪽 고지 일대를 각각 점령케 하여, 사주경계에 임하도록 하면서, 적정을 수색토록 공치하였다. 한편 제2연대는 이날 온정리 서북쪽 동림산을 향해서 진격하던 중 중공군 제40군의 제118사단, 제119사단, 제120사단과 불시에 부딪치게 되었는데, 피아간에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게 되어 총포성이 산야를 흔들고 꽹과리와 피리소리가 들짐승을 놀라게 했다

 

 

이 무렵 압록강변의 한 뱃사공의 말에 의하면 10월 20일 중공군 5명이 말을 타고 만포진-위원을 거쳐 연락차 창성으로 간다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으며, 만포진에는 중공군이 3일간에 걸쳐 뗏목으로 밤새도록 압록강을 건넜다는 것이다.

 

이날 사단장 김종오 준장은은 초산 제7연대는 이날 중으로 초산을 점령하고 압록강선진격을 직접 진두지휘하기 위하여, 선발대로 진격 중인 제7연대 제1대대로 가는 도중 차량 사고로 인하여 부상하였으나, 사단장은 후송을 거부하고 들것에 실린 채로 계속 작전을 지휘하고 있었다.

 

 

10월 26일

을 확보할 목적으로, 제1대대로 하여금 초산 쪽으로 급진토록 하고, 연대 주력은 고장 주변의 요지를 확보하여 북한군의 반격에 대비토록 한 다음, 제1대대가 초산을 완전히 확보하는 즉시로 연대 주력을 초산으로 전진시킬 계획이었다.

 

 

북한군은 낙동강선의 신녕 부근에서 계속하여 지연전을 전개한 오백룡 소장이 이끄는 제8사단의 각 연대 혼성부대로서 도합 1개 연대규모의 병력으로 초산 주변지역을 최후까지 방어하고 있었다.

 

제1대대는 제3중대를 선두로 하고, 제1중대, 제2중대 순으로 국경지대의 초설이 덮인 산야를 따라 급진하던 중, 초산 남쪽 6km 지점에서 적의 기관총사격을 받았다.

 

제3중대는 차량에서 하차하는 즉시로 전개하여 제1중대와 병행해 공격을 감행하였는데, 이때에 81mm 박격포는 차량 위에서 그대로 적에 대하여 집중사격을 가하였으며, 산병(散兵)들은 북한군의 진지를 향하여 급히 포위태세를 취하면서 1시간여에 걸친 교전 끝에 북한군의 방어선을 포위해 돌파하였고, 대대는 전장을 정리할 여유도 없이 다시 제1중대를 선두로 하여 진격을 계속하였으며, 대대장 김용배 중령은 제3중대의 선두에서 진두지휘하였다.

 

이렇게 하여 김용배 중령이 직접 지휘하는 제1중대는 대대의 최선두에서 굉음도 요란하게 초산을 통과하는 즉시로 곧 압록강변을 향하여 돌진하던 중, 동쪽 고지로부터 또다시 북한군의 기관총 사격을 받았으나, 즉시 응사함과 동시에 과감한 돌격으로 북한군을 격파하고, 14:15에 이르러 드디어 강 언덕 높이 태극기를 꽂는 데 성공하여 대대가 한.중 국경선까지 진출하는 최선진의 영예를 획득하였고, 이것은 광복이후 건국된 대한민국 정부가 분단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압록강까지 국토를 잠시나마 수복한 유일한 일이었다.

 

제1중대장 이대용 중위는 신도장으로부터 좌로, 제1소대, 제2소대 그리고 제3소대의 순으로 배치하여 국경선 감시에 임하도록 하였다.

또한 제1대대의 주력은 초산 경계에 임하고, 연대 주력은 고장 부근에서 적의 반격에 대비해서 철저한 사주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결과 및 영향

 

제7연대 1대대 1중대장 이대용 대위는 신도장으로부터 좌로, 제1소대, 제2소대 그리고 제3소대의 순으로 병력을 배치하여, 강변을 경계토록 하였고, 대대 주력은 초산으로 이동하여 초산 주변경계에 임하였다.

 

한편 좌측 제2연대는 벽동을 목표로 서북방으로 진격 중이었으며, 10월 26일 미 제10군단은 원산에 대거 상륙하였고, 서부전선의 UN군 부대는 평양 북방 80km 지점 박천에서 대령강을 도하하여 미 제24사단의 일부 부대는 태천으로 진격 중이었다.

 

 

 

온정리 전투

온정리 전투
(한국전쟁의 일부)
1950년 10월 25일 ~ 11월 1일까지의 중공군 개입 지도
1950년 10월 25일 ~ 11월 1일까지의 중공군 개입 지도
날짜 1950년 10월 24일 ~ 10월 30일
장소 평안북도 온정리
결과 중공군의 승리
교전국
대한민국 대한민국 중국 중화인민공화국
지휘관
대한민국 유재흥 제2군단장 소장
대한민국 김종오 제6사단장 준장
대한민국 함병선 제2연대장 대령
대한민국 석순천 제1대대장 소령
대한민국 이성훈 제2대대장 대리 대위
대한민국 송대후 제3대대장 소령
대한민국 임부택 제7연대장 대령
대한민국 김용배 제1대대장 중령
대한민국 김종수 제2대대장 중령
대한민국 인성관 제3대대장 중령
대한민국 박광혁 제19연대장 대령
대한민국 김준교 제1대대장 소령
대한민국 김욱전 제2대대장 중령
대한민국 박철 제3대대장 소령
대한민국 김성 포병 제16대대장 소령
중국 펑더화이
중국 이천우 제13병단 사령관
중국 한선초 제40군장
중국 등악 제118사단장
중국 남센원 제119사단장
중국 서국부 제120사단장
병력
약 1만 명 약 4만 명


온정리 전투한국 전쟁 중기 북한 동부전선에서 국군의 제일 선봉으로 진격하던 김종오 준장이 이끄는 제6사단이 국경까지 진출했으나 대대적으로 침공하는 중공군에 의해 고전을 면치 못하는 철수한 전투이자 초산 전투와 함께 국군이 중공군과 첫 접전을 치른 전투이다.

 

절대적인 수적 열세로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던 국군은 온정리를 방어하기 위해 치열한 접전을 펼쳤으나 수적 열세와 다른 전선의 상황으로 인하여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중공군의 한국 전쟁 개입 문제가 국내외적으로 주시되고 있던 1950년 10월 미경에 유재흥 소장이 이끄는 제2군단 예하의 김종오 준장이 이끄는 제6사단은 최선봉에선 진격사단으로서 덕천-구장동 진격 전투에서 승리한 다음 더욱 박차를 가하여 일선연대로 하여금 한만국경에 까지 북진을 계속토록 하고 사단은 10월 24일 13:00에 희천에 이르렀다.

 

한편 지휘체제가 마비되고 재편성의 시간적 여유를 얻지 못한 전구내의 북한군은 패잔혼성부대(제1사단, 제6사단, 제42사단 등)로서 극도로 사기가 저하되고 대부분의 전투력이 상실되어 구명회생하기에 급급하였으며 특히 오백용 소장이 이끄는 북한군 제8사단의 잔여 혼성부대는 연대 규모로서 초산 전투에서 최후의 저항을 기도하였으나 김용배 중령이 이끄는 제7연대 1대대의 과감한 진격으로 궤멸 분산됨으로써 드디어 선봉연대인 임부택 대령이 이끄는 제7연대는 10월 26일 14시 15분에 감회어린 국경에 다다랐다.

 

그러나 비밀리에 압록강을 건넌 중공군이 동림산(1165고지) 일대에서 불의에 그 마각을 드러내고 사단의 전진축선 상에 나타남으로써 전선은 일조에 그 공방양상을 달리하게 되었다.

 

 

작전계획

제2군단 및 제6사단의 작전계획에 따라 10월 24일 온정리를 점령한 함병선 대령이 이끄는 제2연대는 북한군 잔당에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고 신속히 진격하여 압록강 남안의 벽동까지 진출할 계획으로 예하의 송대후 소령이 이끄는 제3대대를 기동대대로서 화력에 중점을 두어 선두에서 차량행군으로 조속히 진격토록 하고 석순천 소령이 이끄는 제1대대와 이성훈 대리 대위가 이끄는 제2대대는 도보로서 잔적을 격멸하면서 후속토록 하여 북진을 계속하려 하였다.

 

그러나 불의에 중공군과 장동 부근(온정 북방 8km)에서 접적하게 되어 치열한 교전을 전개한 끝에 병력의 상대적인 부족과 지형의 제약으로 인하여 할 수 없이 그 주력이 다시 온정리로 이동하게 되었을 때 제6사단장 김종오 준장은 요지 다음과 같은 명령을 하달하였다.

 

작전명령
『① 사단은 남림산 일대에 출몰한 적을 격멸한 다음 이미 계획된 임무를 수행하려 한다.

②제2연대는 온정리를 확보하여 방어에 임한 후 명에 따라 진격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
③제19연대는 현위치에서 부대를 신속히 이동하여 풍중리 양강동-501고지(YE 505 554)를 점령한 다음 계속 공격할 준비를 하라.

제6사단장 준장 김종오

 

이상과 같은 명령을 받은 제2연대는 온정리에서 계속 병력을 수습하여 방어에 임하였으며 제19연대는 급히 출동하여 명시된 지점으로 병력을 이동하고 북한군을 격멸코자 하였으나 각 대대는 계획된 작전에 성공하지 못한 채로 오히려 온정리를 북한군의 수중에 맡기게 되자 제2연대는 즉시 태평으로 이동하여 재편성 한 다음 반격을 가하려 하다가 군단의 청천강선 방어 계획에 따라 개천으로 이동하였으며 제19연대는 최후까지 온정리를 고수하려 하였으나 역시 군단의 계획에 따라 개천으로 이동하였다.

 

 

전투 과정

10월 24일

제6사단 2연대는 함병선 대령이 지휘하여 이날 08:00에 구장동을 출발하였는데 제1대대를 선두로 하여 제3대대-제2대대의 순으로 태평을 경유하여 온정리로 향하였다.

 

선두의 제1대대가 이날 18:00에 온정리부근에 다다랐을 때 그곳 동북방 6km 지점인 559고지 일대에서 북한군 2개 중대의 패잔병으로부터 사격을 받고 즉시 진격하여 이를 격퇴한 다음 19:40에 온정리로 돌입하여 자체경계를 하면서 숙영하였으며 제3대대는 이보다 먼저 19:00에 온정리에 돌입하여 북한군의 잔당을 격퇴하고 내무서를 급격한 끝에 각종 서류를 노획하였다.

 

이때 국군의 진출 상황을 알지 못한 북한군의 유선망을 도청함으로써 비로소 중공군 출현에 대한 첩보를 얻게 되었으며 대대는 곧 이를 보고하는 한편 온정리 후사면의 326고지 일대를 점령하고 경계에 임하였다.

10월 25일

제2연대는 전날 전 연대가 온정리에 집결하여 숙영을 하고, 이날 아침에 전열을 갖추어 출동준비를 한 다음, 이성훈 대위가 지휘하는 제2대대를 선두로 09:00에 온정리를 출발하여 우선 북진으로 향하도록 하였으며, 제1대대는 제2대대의 뒤를 이어 도보로서 11:00에 온정리를 출발하였고 제3대대는 야포 및 대전차포로 증강한 기동대대로서 차량화하여 11:00에 출발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12:00에는 기동성 있는 제3대대가 선두가 되어 온정리 북방 약 7km 지점인 장동 부근에 진출하였고 제 2대대는 그 뒤를 따라 490고지 하록인 중흥동에 다다랐으며 후미인 제1대대의 주력은 온정북방 약 3km 지점인 개활지대에 뻗쳐있는 도로를 통과하고 있었다.

 

이때에 중공군은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미리 병력을 은밀히 배치하여 놓고 잠복대기토록 하다가 제2연대의 주력이 12:00에 이 지점을 통과하게 되자 일제히 화력을 집중하면서 포위 공격을 가하게 되었다.

 

즉 연대 정면의 사단 규모의 병력으로 추산되는 중공군은 동림산(1165고지)를 배후로 도로변의 대소능선 상에 그 주력을 매복시켰으며 온정과 북진 사이를 흐르는 구룡강을 건너 도리산(841고지) 일대의 주요 거점에 연대 규모의 병력을 매복시켰다가 좌우 동시에 기습전법을 감행하게 된 것이다.

 

이때 제6사단의 2연대장인 함병선 대령은 이 당면의 추로를 격멸하는 즉시로 계속 진출하기 위하여 각 대대로 하여금 정신감투토록 격려질타 하였으나, 시체의 언덕을 만들면서도 계속되는 중공군의 반복공격과 유리한 지형을 이용한 중공군의 사면포위로 전황은 시시각각으로 불리하여 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모든 전황이 급변하게 되자 사단에서는 제2연대로 하여금 온정리에서 계속 진지를 고수토록 하고 예비대인 박광혁 대령이 이끄는 제19연대를 급거 부접토록 배치하였다.

10월 26일

제2연대의 1대대는 전날에 이어 온정리에서 철야로 고수방어에 임하고 있었으며 제3대대는 온정중학교에서 계속 병력을 집결하는 동시에, 일부 집결된 병력과 장비를 연대 직활대와 합동으로 온정리의 후사면에 있는 157고지로 이동시켜 사주방어에 임하였으나 중공군은 우세한 병력을 믿고 그들의 상투수단인 우회와 포위전법을 감행하기 위하여 이날 초경부터 구룡천을 잠도한 다음 온정 동남방 약 4km 지점인 535고지의 좌전방으로 이동시켜 온정리를 사면으로 포위하였다가 이날 04:00부터 일시에 함성과 총포성으로 기세당당하게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1:5의 열세와 우세의 정면대결로 피아간에 치열한 교전을 치룬 끝에 157고지의 국군 진지일각이 무너지게 되고 계속하여 온정중학교가 기습을 당하자 때마침 집결 중이던 제3대대가 이 광란 속에 휘말려 들어가 암흑 속에서 혼란상태를 이루게 되었으며 중공군의 후속병력은 이틈을 타서 사면으로 온정리를 침공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제 1대대의 모든 장병들은 총검과 단도로서 육박전을 전개하며 끝까지 결사분투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일부병력이 분산상태에 빠지게 되자 부득이 적의 추격을 저지하면서 연대의 주력 제1대대 및 연대본부는 내평의 향교동 방면으로 철수하였으며 제3대대의 일부 병력은 희천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이와 동시에 490고지에서 철야 방어하고 있던 제2대대는 연대의 주력이 태평으로 이동함으로 말미암아 중공군의 포위에 고립되어 사면의 중공군으로부터 압박을 받아 위험한 상태에 놓이게 되자 05:00에 진지를 돌파분단하고 구룡천을 건너 운산 방면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10월 27일

제2연대는 태평으로 이동한 다음 제 1대대를 사주경계토록 하는 한편 전날 희천 방면으로 이동한 제3대대를 신속히 태평으로 집결토록 배치하였다. 연대장 함병선 대령의 명을 받은 제3대대는 희천에서 병력을 수습하는 즉시로 태평으로 하여 진격하다가 묘향산에서 노영을 하였으며, 제2대대는 서쪽으로 30여km 떨어진 운산부근의 용전리에 18:00에 도착하여 잔여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었다.

 

한편 제19연대는 김준교 소령이 이끄는 제1대대를 양강동까지 진출시켜 제7연대의 배후로 침습하려는 중공군을 저지하였으며 김욱전 소령이 이끄는 제2대대는 07:00에 풍중리 일대를 점령하여 중공군의 후속부대를 억류견제 하였고 박철 소령이 이끄는 제3대대는 07:30에 접적한 중공군을 격파하고 501고지에 이르렀으나 19:00에는 1개 대대 규모의 중공군이 다시 침공하였으므로 치열한 교전 끝에 이를 진전에서 격퇴하고 계속 고수작전에 임하였다.

10월 28일

제2연대는 태평에서 계속하여 분산병력을 집결시키고 있었으며, 묘향산에서 06:00에 출발한 제3대대의 주력이 12:00에 태평에 도착하게 되자 제 1대대와 제 3대대의 재편성을 끝마치고 사주경계에 임하였으며 제2대대는 이날 13:00에 용문을 출발하여 원리를 향해 기동하고 있었다.

 

한편 제19연대는 온정리를 다시 탈환하기 위하여 제1대대를 양강동으로부터 동림산록의 용연동으로 진출시켜 제 2대대와 함께 협공할 준비를 갖추도록 하였으며, 제2대대는 계속 풍중리에서 방어에 임하고 있을 때 18:00에 내습한 약 1개 중대 규모의 중공군을 격퇴하고 제1대대와 함께 온정리로 진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때 제3대대는 계속 501고지에서 중공군의 진출을 저지하고 있었으며 온정리를 확보한 중공군은 병력을 증강하여 희천을 침공할 기도 하에 동진을 재촉하며 이날 18:30에는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으로 상투적인 야간침습을 감행하여 왔다.

 

이때 제3대대는 화력을 집중하여 결전을 강요한 끝에 일단 이를 저지 격멸하는데 성공 하였으나 중공군은 계속 병력을 증강 투입하여 완강히 공격을 계속하는 한편 대대를 포위 하려고 전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10월 29일

제2연대는 전방의 제19연대 상황이 불리하여 전면적으로 위협을 받게 되자 재편성된 제1대대와 제3대대의 병력을 태평남방 3km 지점의 346고지 부근으로 이동하고 방어진을 형성하였으나 18:00에 사단으로부터 『구장동으로 집결하라』는 긴급명령을 받고 이동하기 시작 하였으며 제 2대대는 03:00에 원리에 도착하여 휴식을 한 다음 13:00에 개천으로 향하였다.

 

한편 제19연대는 제2대대가 02:00에 불의의 기습을 받아 혼란 상태에 빠지자 김준교 소령이 지휘하는 제1대대를 직동으로 급히 이동케 하여 중공군의 측후방으로부터 지원공격토록 하였다.

 

또 제1대대가 직동에 도착하여 06:00부터 공격을 시작하게 되자 동림산록의 405고지 일대에서 1개 대대 규모의 적이 완강히 저항하므로 제2중대를 정면에서 견제토록 하는 한편 제1중대로서 온정리로 통하는 도로 양측에 중공군을 추격한 다음 제 2대대를 지원하였으며 제3중대는 제4중대의 지원 하에 장동 뒷산의 중공군을 공격토록 하였으나 중공군은 완강히 저항할 뿐만 아니라 계속 증원하여 11:00에는 인해전술을 감행 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쌍방간에 치열한 혈전이 전개되었으나 중공군은 독전대의 총부리 앞에 몰려 주문을 읽으면서 광란하므로 제1대대 마저 드디어 분전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10월 30일

이날 제2연대는 전연대가 개천에 도착하여 제1대대와 제2대대는 부대를 재정비 하였으며 제3대대는 군단명령에 따라 개천의 경비에 임하였다.

한편 제19연대는 제3대대가 온정리 일대에서 병력을 수습하여 사주경계를 실시하고 있다가 명에 의거 유상동을 경유하여 개천으로 이동하였고 제1대대 및 제2대대의 분산병력도 적진을 돌파하고 속속 개천에 도착되고 있었다.

 

 

결과 및 영향

10월 24일부터 10월 30일까지 7일간에 걸친 초산온정리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로 제6사단은 약 4:1의 대병력과 불의에 대치하게 되어 선전감투를 하였으나 급작스럽게 침공한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인하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목전에 두고 국경에서 물러서야 하는 쓰라림을 겪었고 특히 제7연대는 부연대장 최영수 중령, 제2대대장 김종수 중령, 제3대대장 조한섭 소령이 포로가 되었으며 중대장 12명 중 5명이 전사했다.

 

10월 25일 반격전을 개시한 중공군은 10월 26일 온정리를 탈환하고 제7연대가 초산고장에서 물러서자 계속하여 501에서 제19연대 3대대의 방어진을 돌파하여 희천으로 향하는 동시에 그 주력은 병요지지 상의 요충인 청천강선으로 남진을 계속하였다.

 

즉 중공군 제40군의 주력은 온정리와 태평을 침공한 다음 우익 제8사단의 정면으로 침입한 중공군 제38군과 희천에서 합류하여, 국군의 제7사단 및 제8사단이 형성하고 있는 청천강 방어선의 종심깊이 침습을 감행하며 계속 남하를 기도하였고, 좌익 제1사단의 정면으로 침공한 중공군 제39군은 운산을 거쳐 영변개천으로 침략을 계속하였다.

 

이때의 중공군은 산악지대에서 준동하던 북한군의 패잔병과 합세하여 인해전법을 감행하며 수도 평양에 이르는 요충인 청천강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하여 광분하고 있었다.

 

 

제1차 청천강 전투

 

제1차 청천강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날짜 1950년 11월 3일 ~ 11월 5일
장소 평안북도 청천강과 주변 지역 일대
결과 전략상 유엔군의 승리
교전국

대한민국 대한민국
미국 미국

영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

중국 중화인민공화국
지휘관
미국 월턴 워커 미 제8군 사령관 중장
미국 프랭크 W. 밀번 제1군단장 소장
미국 존 H. 처치 제24사단장 소장
미국 존 L. 트론모튼 제5연대장 대령
미국 네드 D. 무어 제19연대장 대령
미국 리처드 W. 스테픈스 제21연대장 대령
미국 허버트 R. 게이 제1기갑사단장 소장
미국 마르셀 B. 크롬퀘즈 제5기갑연대장 대령
미국 윌리엄 A. 해리스 제7기갑연대장 대령
미국 레이몬드 D. 팔머 제8기갑연대장 대령
영국 바질 A. 코드 영 제27여단장 준장
영국 A. M. 맨 미들섹스 대대장 중령
영국 G. L. 넬슨 아가일 대대장 중령
오스트레일리아 I. B. 버거슨 호주군 대대장 중령
대한민국 백선엽 제1사단장 준장
대한민국 김동빈 제11연대장 대령
대한민국 김점곤 제12연대장 대령
대한민국 조재미 제15연대장 대령
중화인민공화국 이천우 제13병단장
중화인민공화국 송상근 제38군장
중화인민공화국 강옹휘 제112사단장
중화인민공화국 당청산 제113사단장
중화인민공화국 적중유 제114사단장
중화인민공화국 오신천 제39군장
중화인민공화국 장길성 제115사단장
중화인민공화국 왕양 제116사단장
중화인민공화국 제117사단장 불명
중화인민공화국 한선초 제40군장
중화인민공화국 등악 제118사단장
중화인민공화국 남센원 제119사단장
중화인민공화국 서국부 제120사단장
중화인민공화국 증택생 제50군장
중화인민공화국 조학정 제148사단장
중화인민공화국 용약 제149사단장
중화인민공화국 왕가선 제150사단장
중화인민공화국 소신괴 제66군장
중화인민공화국 성소보 제196사단장
중화인민공화국 제197사단장 불명
중화인민공화국 제198사단장 불명
병력
약 4만 5000명 약 15만 명


 

 

 

제1차 청천강 전투한국 전쟁 중기 11월 초 북부로 진격하던 국군이 중공군과 조우하여 격전을 벌인 전투로 수적 열세 속에서 격전을 치른 국군은 인해전술로 침공하는 중공군에 맞서 급박한 상황 속에서 전투를 벌였다.

 

국군은 수적 열세로 인해 후방의 부대를 급거 전방으로 이동시키는 필사적인 전투를 벌여 중공군을 격퇴하고 진격하였으나 이후, 철수를 거듭할 수밖에 없게 된다.

 

1950년 10월 24일 맥아더(MacArthur) 라인의 철폐선언에 따라 만포진-신의주의 한만국경선을 목표로 무제한진격을 개시한 미 제8군은, 10월 25일김종오 준장이 이끄는 제6사단의 함병선 대령이 이끄는 제2연대와 미 제1군단의 우익인 백선엽 준장이 이끄는 제1사단이 각각 온정리 전투운산-영변 전투에서 중공군 대부대와 접전하여 격전을 벌임으로써 새로운 양상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박부택 대령이 이끄는 제6사단 7연대는 초산까지 진격하였다가 명령에 따라 반격을 시작하여 두만강변에서 또 다시 중공군의 급습으로 분산된 데에 이어 제2연대를 증원한 김익렬 대령이 이끄는 제6사단 19연대와 고근홍 대령이 이끄는 제8사단 10연대가 온정리 부근에서 중공군의 공세로 큰 타격을 받았다.

 

한편 운산으로 진격한 제 1사단이 완강한 중공군의 저항으로 진격이 계속 지연되자 미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Walton H. Walker) 중장은 프랭크 W. 밀번(Frank W. Milburn) 소장이 이끄는 미 제1군단 예비로써 평양-진남포 경비 임무를 담당 중이던 허버트 R. 게이(Hobart R. Gay) 소장이 이끄는 미 제1기갑사단을 운산으로 진출시켜 제1사단을 초월하는 즉시로 한만국경선을 목표로 진격토록 하였다.

 

이와 동시에 평양을 탈환한 다음 미 제1군단의 작전 통제 하에 주력을 후속 중이던 신상철 준장이 이끄는 제7사단을 유재흥 소장이 이끄는 제2군단에 복귀시켜 전열을 가다듬게 하였으며, 후방지역의 패잔병을 격멸 중이던 미 제9군단(미 제2, 제25사단)의 급거북상을 명령 하였다.

 

작전계획

미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은 중공군 제38, 제40군의 공세가 제2군단 정면으로 집중하여 청천강 남안의 요충인 개천-군우리 부근의 전황이 긴박하여지자 미 제1기갑사단을 청천강 남안으로 철수시켜 군우리 정면의 전황에 대응한 반격부대로 배치하는 한편, 미 제2사단의 선견부대인 제9연대와 미 제1군단의 일부병력을 제7사단에 증원케 하고 제2군단 주력(제6, 제8사단)으로써 덕천-백탑산선에 대한 반격을 감행토록 배치하였다.

 

이와 동시에 미 제1군단은 일부병력으로 박천 부근의 대령강안주 북방에 교두보를 확보케 하여 우선 청천강 북안에서 중공군의 침공을 저지케 하는 일방 군단주력은 청천강 남안에서 재편성토록 하였는데 이는 제2군단 주력의 덕천-백탑산선 반격으로 군우리-개천정면의 위협을 배제하고 전선을 정리하는 대로 총반격으로 이행하여 일거에 한만국경선까지 진격하고자 하는 것이 그 작전방침이었다.

 

 

전투 과정

11월 3일

이날 군단은 미 제1기갑사단을 고성리(안주 동북쪽 3km)로 철수시켜 군우리 정면의 위기에 대응케 하는 한편, 네드 D. 무어(Ned D. Moore) 대령이 이끄는 미 제24사단 19연대를 청천강 북안에, 바질 A. 코드(Basil A. Coad) 준장이 이끄는 영 제27여단과 호주군 대대를 박천 부근의 대령강 양안에 각각 교두보진지를 확보케 함으로써 청천강 북안에서의 적의 예봉을 꺾을 태세를 갖추었으며 입석-영변선에서 중공군 3개 사단의 집중공격을 과감하게 저지 중이던 제1사단은 신안주를 목표로 철퇴하기 시작하였다.

 

존 H. 처치(John H. Church) 소장이 이끄는 미 제24사단은 군단 작명에 따라 전날 영 제27여단의 엄호 하에 이구동-정차동에서 반격을 시작하였는데 제19, 제5, 제21연대순으로 대령강을 도하하여 사단 CP를 백석현(안주 동북쪽 5km)에 개설하고 리처드 W. 스테픈스(Richard W. Stephens) 대령이 이끄는 제21연대를 사단 예비로 백석현에 배치한 다음, 제19연대를 청천강 북안에 배치하여 교두보진지를 점령케 하였고, 존 L. 트록모튼(John L. Throckmorton) 대령이 이끄는 제5연대를 군우리로 급진시켜 제7사단을 증원토록 하였다.

 

영 제27여단은 태천-정주에서 미 제24사단의 반전을 엄호한 다음, 이날 박천으로 전진, 여단 CP를 서미력리 부근에 개설하고 A. M. 맨(A. M. Man) 중령이 이끄는 미들섹스 대대를 박천-미력리 일대에 배치하여 대령강 동안을 연하여 침습하는 중공군을 저지케 하였고 G. L. 닐슨(G. L. Neilson) 중령이 이끄는 아가일 대대는 동문리 일대에 배치하여 대령교와 도하점을 확보하는 한편 1번 작전로를 제압토록 하였다. 한편 여단을 직접지원중인 미 제61포병대대는 대령교 동안에 진지를 점령하고 지원태세를 갖추었다.

 

I. B. 퍼거슨(I. B. Ferguson) 중령이 이끄는 호주군 대대는 전날 정주에서 미 제24사단의 철수를 엄호한 다음, 이날 박천으로 전진하여 대령강 서안의 옥녀봉(111고지)에 진지를 점령하고 대령교와 도하점을 확보하였다.

 

제1사단은 10월 25일 이래로 운산과 입석 동북방에서 격전을 전개하며 중공군 3개 사단의 집중공격을 저지하고 미 제 1기갑사단의 철퇴를 엄호한 다음, 군단작명에 따라 영변을 거쳐 신안주를 목표로 철퇴 중에 있었다.

 

군단 우인접인 제2군단 예하 박승일 대령이 이끄는 제7사단은 제5연대를 우일선으로 하여 535고지(군우리 동쪽 8km)에, 이기건 대령이 이끄는 제3연대를 좌일선으로 하여 비호산(622고지)에 각각 배치하여 계속 침공하는 중공군 제38, 제40군과 격전을 반복하고 있었으며 김용주 대령이 이끄는 제8연대는 용현리에 위치하여 사단후방경계를 담당하는 한편 덕천-군우리도를 확보하였다.

11월 4일

미 제24사단은 이날 비호산-군우리정면에 대한 중공군의 공세와 때를 같이하여 구룡강을 도하한 중공군의 측후방 공격으로 주진지전방 7km에 진지를 점령한 제19연대의 로버트 L. 리(Robert L. Rhea) 중령이 이끄는 제1대대가 중과부적으로 청천강을 건너 안주로 철퇴하였고, 야간에는 계속된 적의 침공으로 제19연대의 주진지가 혼전상태에 빠지게 되자 사단장 처치 소장은 사단 예비인 제21연대에 역습을 준비하도록 명령하였다.

 

한편 군우리 부근에서 제7사단을 증원한 제5연대는 적의 거센 공세를 격퇴하고 군우리를 계속 확보하였다. 즉 구룡강변의 약산현 일대에 진지를 점령한 제19연대 1대대는 이날 새벽, 구룡강을 도하한 중공군 제39군 예하 2개 대대 규모의 중공군으로부터 측후방 공격을 받고 1시간에 걸쳐 격전을 전개하였으나 계속되는 중공군의 압박으로 차량과 중장비를 유기한 채로 청천강을 건너 안주로 향하였다.

 

연대장 무어 대령은 임석동-경각동일대에 배치중인 제3대대를 즉각 제1대대에 증원하도록 배치하였으나, 이 대대가 관동에 진출할 무렵, 매복 중이던 1개 대대 규모의 중공군의 기습으로 대대는 원진지로 다시 복귀하고 말았다.

 

한편 계속하여 구룡강을 도하한 사단 규모의 적은 오후에 이르러 검각산(223고지)과 저동 일대로 우회 침습하여 연대 주력을 위협하자, 연대는 사단 포병의 직접지휘 하에 격전을 전개하고 중공군의 침습을 과감하게 저지하였으나, 이날 밤에 서측배가 돌파됨으로써 밤새도록 혼전을 거듭하였다. 이에 사단장 처치 소장은 사단 예비인 제21연대를 11월 5일 미명을 기하여 중공군의 서측방을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영제 27여단은 지난 11월 3일 저녁, 박천 부근에 교두보진지를 점령하고 접적 없이 소진상태를 유지하던 중, 이날 새벽에 대대규모의 중공군의 남호동(박천 남쪽 2km)을 점령중인 미 제61포병대대를 기습함으로써 불효전이 시작되었다. 대대는 포수를 제외한 탄약수 이하의 전병력으로 사주방어진지를 편성하고 격전을 반복하는 일방, 포는 영거리사격으로 응전하였으나 일파 우일파의 제파돌격으로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에 여단장 코드 준장은 대령강 서안을 고수중인 아가일 대대로 급히 증원토록 하여 이 적을 구축하는데 성공하고 재편성을 서둘렀으며 아가일 대대는 계속 제61포병대대의 엄호임무를 담당하였다. 오후에 이르러 전술한 바 한선초 군단장이 이끄는 중공군 제40군 예하 제1개 사단 규모의 중공군이 박천 북쪽의 미들섹스 대대와 대령강 서안의 호주군 대대를 동시에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여단은 미 제61포병대대의 치열한 근접지휘 하에 격전을 계속하다가 역부족하여 한때 서미력리 부근 진지의 실함까지 보았으나 대령강 동안으로 철수한 호주군 대대의 과감한 반격으로 마침내 진지를 회복하였다.

 

호주군 대대는 이날 오후에 중공군 1개 연대 규모의 포위공격을 받고 격전을 전개하던 중, 영 제27여단장 코드 준장의 명령에 따라 대령강 동안으로 철수한 다음, 서미력리 부근 고지를 전통적인 총검돌격전으로 공격하여 여단이 실함하였던 진지를 회복하는데 성공하였으나 12명이 전사하고 64명이 사상하였다.

 

대대는 영 제27여단의 철수에 따라 신안주 북안의 연봉리로 전진하여 이날 밤에 여단을 추격한 중공군의 야습을 과감한 공방전으로 격퇴하였다.


 

 

결과 및 영향

11월 5일 24:00를 기하여 일제히 전선을 이탈하기 시작한 중공군은 구장동-운산-태천선의 적유산맥 남록으로 후퇴하여 차기공세를 준비하는 한편 북한군으로 수용진지를 편성케 하여 방어태세를 가장함으로써 UN군으로 하여금 그들이 만주로 철수한 것으로 오판케 하여 진격의지를 재연하도록 유도하는 듯이 판단되었다.

 

미 제1군단은 적의 이러한 퇴거에 따라 미 제 1기갑사단을 영변으로, 미 제24사단을 용산동으로, 그리고 영 제27여단은 박천을 거쳐 대령강 동안을 따라 각각 위력수색을 감행케 하였으며 제1사단은 박천으로 진격하였다. 미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위력수색의 순조로운 진전과 맥아더 원수의 지도에 따라 11월 15일을 기하여 소위 크리스마스 작전을 단행하고자 계획하였다.

 

즉 공격개시선을 인처리-희천-온정-운산-태천-납청정으로 정하여 제2군단은 희천에서 강계-만포진으로, 새로이 전선에 투입하게 될 존 B. 코울터(John B. Coulter) 소장이 이끄는 미 제9군단은 운산-온정을 거쳐 초산-벽동으로, 그리고 미 제1군단은 압록강하류로 각각 진격하도록 규제하고 공격 개시선까지의 진격을 독려하였으나 병참물자의 확보와 미 제9군단의 북상이 지연됨으로써 공격개시일을 11월 24일로 연기하였고 11월 19일에 이르러서는 공격 개시선을 현 접촉선으로 수정시달 함으로써 각 군단은 진격을 중지하고 부대를 재배치하면서 다시 공격준비를 하기에 이르렀다.

 

 

 

 

제2차 청천강 전투

 

평양 철수
(한국 전쟁의 일부)
청천강에서 진격하는 중국군.
청천강에서 진격하는 중국군.
날짜 1950년 11월 26일 ~ 12월 4일
장소 청천강
결과 중화인민공화국의 대승
교전국
대한민국 대한민국
미국 미국
영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
터키 터키
중국 중화인민공화국



 

 

11월 25일-28일의 청진강 전투 지도.

 

 

제2차 청천강 전투한국전쟁에서 중공군청천강에서 유엔군과 벌인 두번째 전투를 말한다. 중공군은 이 전투에서 대승함으로써 UN군은 평양에서 철수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마오쩌둥1950년 10월 4일한국 전쟁 개입을 결정하고, 중공군10월 19일압록강을 건너 10월 25일대한민국 국군과 벌인 온정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에 UN군청천강까지 병력을 철수하여 상황을 지켜보았고, 중공군 역시 병력을 뒤로 물렸다.

 

제1차 청천강 전투에서 잠시 유리한 전황을 만들었던 UN군11월 26일부터 전개된 중공군의 인해전술 대공세로 청천강에서 후퇴하였고, 12월 2일에는 평양에서 철수하였다. 대한민국 국군12월 4일에 평양에서 철수함으로써 12월 6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평양에 재입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