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의 봄 24 : 현충일의 의미 11 (6.25 전쟁, 한국전쟁 10)
북악 둘레길에서 바라본 성북동 전경
인천 상륙 작전과 서울 수복, 그리고 북진
개요
맥아더와 인천 상륙 작전
맥아더는 미합참과 해군의 반대에 논리적이며 자신감 있게 설득하여 인천으로 상륙작전 지역을 결정하고, 미해병 1사단 등 상륙부대를 편성하여 부산에서 승선시키는 한편 상륙함대를 집결시키고 있었다. 양동작전으로 원산만 일대 기만기동, 장사 일대 양동상륙이 실시되는 한편 상륙 본대는 서해안을 돌아 인천으로 이동하여 월미도를 향하여 함포가 불을 뿜어면서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었다. 불루비치와 래드비치에 상륙을 시작한 연합군은 인천시내를 소탕하고 경인가도를 따라 서울로 진격하고 있었다. 김포공항을 점령하고 일부 부대는 수원비행장을 점령하기 위하여 남으로 공격하였다. 행주대교 일대에서 도하한 연합군은 서울 서쪽을 향하여 공격하였고 서울남부, 동부 방향 등 세 방향으로 서울을 압박하였다.
'생명의 항해 사진전'-야간사격하는 미주리 호
(서울=연합뉴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을 지켜보는 맥아더 장군(위). 201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60주년 기념식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는 맥아더 장군을 재현한 모습(아래).
2010.9.15 << 연합뉴스 DB >>
서울 수복 작전
1950년 9월 15일 인천 월미도에 상륙한 유엔군은 인천과 여러 섬들을 장악하고 서울로 진격했다.
국제연합의 결의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우방 여러 나라의 파병이 이루어지면서 대한민국의 국군과 유엔군의 전력은 적을 압도하기에 이르렀으며, 9월 15일에는 인천에서 국군과 유엔군의 대규모 상륙작전이 이루어져 전세를 뒤엎게 되었다.
상륙 부대의 선봉에 선 미국 해병 제1사단과 국군해병대는 9월 18일 김포 비행장을 탈환한 다음, 행주나루터의 맞은편에서 한강을 건넜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영등포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해병대의 뒤를 따라 진격한 미군 제7사단은 남쪽으로 내려가 시흥·안양·과천 등을 점령하고, 관악산을 끼고 돌아 서빙고와 뚝섬 맞은편에 이르렀으며, 그곳에서 한강을 건너갈 채비를 갖추었다. 한편, 낙동강 전선에서 총반격으로 들어간 국군과 유엔군은 9월 20일부터 적진을 돌파하기 시작하였다. 경부가도를 따라 적을 추격하면서 북상하던 미군 제1기병사단의 선발대는 9월 26일 오산 북쪽에 이르러 남하중이던 미군 제7사단 선발대와 합류하였다. 곳곳에서 퇴로가 끊기게 된 적의 패잔병들은 험준한 산악을 타고 38선 이북으로 달아나기에 급급하였다. 9월 20일 새벽 행주나루터를 강습하여 강을 건너간 한미 해병대는 이튿날 수색을 지나 서울의 서쪽 변두리를 감싸고 있는 안산·와우산·연희고지 일대로 진격하였다.
적은 9월 23일까지 사흘 동안 끈질긴 저항을 계속했으나, 9월 24일 한미 해병대는 함재기(艦載機)와 포병의 압도적인 화력 지원을 받아 최후의 돌격을 감행한 끝에 이튿날인 25일 마침내 이 고지들을 빼앗았으며, 그곳에서 서울시가를 굽어볼 수 있게 되었다.
때를 같이하여 서빙고와 뚝섬 일대에서도 한강 도하작전이 진행되었다. 미군 제7사단 제32연대가 남산과 왕십리 쪽으로 돌입하는 사이 국군 제17연대는 서울의 동쪽 용마산 일대의 능선을 타고 북으로 올라가 망우리고개를 점령하였다. 시가전은 마포·남산·왕십리 등 여러 곳에서 동시에 있었으며, 밤이 깊어지면서 시내 한복판으로 좁혀졌다 이날밤 북한 공산군은 퇴로가 완전히 봉쇄될 것을 두려워하여 서울을 사실상 포기하고 주력을 의정부 쪽으로 퇴각시키면서 후위 부대로 하여금 저항을 계속하게 하였고, 서울 시가 전투는 26일에도 시내 전역에서 계속되었다.
9월 27일 새벽 국군 제17연대와 해병대 용사들은 중앙청으로 돌입하여 태극기를 게양했으며, 그 잔당을 소탕하고 9월 28일에는 적치하에서 신음하던 서울시민을 완전히 구출하였다. 반격이 개시된 지 2주일이 채 안 되는 9월 28일 정오, 감격의 수도탈환식이 국회의사당에서 거행되었다.
북진
북한군 지휘부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인천이나 군산, 진남포, 원산을 상륙 가능지역으로 판단하고 있었으나 상륙부대가 교두보를 확보하기 전에 반격부대를 투입하는데는 위치선정이 너무 멀었다. 인천에 상륙한 연합군 상륙부대는 경인가도를 따라 서울로 진격하자 북한군 지휘부는 가용병력을 서울 서쪽과 남쪽 방향으로 투입하여 초인적인 저항을 시도하고 있었다.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소식이 북한군 전선에 전파되자 낙동강 전선의 적은 보급로와 퇴로가 차단될 것이 예상되자 전선 지휘체계가 일시에 마비되면서 각부대는 무기와 장비를 버리고 태백산맥 등 산간 도로를 따라 소부대 단위로 북상 도주가 시작되었고 일부 부대는 지리산 등 산간지역으로 숨어들어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였다. 아군은 낙동강을 넘어 북으로 추격전이 부대별로 경쟁적으로 실시되었다. 9월28일 서울이 수복되고 맥아더는 38선 돌파문제를 고심하다가 트루만 대통령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한만국경으로 전 연합군에게 북진을 명령했다. 연합군은 평양을 단숨에 점령하고 계속 북진하여 선봉부대인 한국군 6사단이 압록강변에 도달하게 되고 미해병 제1사단은 흥남-원산일대에 상륙하여 장진호를 향하여 깊숙히 진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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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 1사단
한편 미 본토에서는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 성공 소식이 전해지자 워싱톤은 몰론 전국이 2차대전 후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마치 고대 로마시대 제2차 포에니전쟁시 약관의 20대의 로마장수 '스키피오'장군의 로마 원정군이 한니발의 카르타고군을 북아프리카 지역 '자마회전'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전 로마시민이 미치도록 열광하듯이...
그러나 '설치관계'의 한반도의 맹주 중공군이 만주지역에 집결되고 있었고 야음을 틈타서 북한지역으로 20만명 이상이 잠입하고 있었다. 미 공군은 항공정찰로 만주지역에 집결하는 중공군의 모습만 확인 되었지만 야음을 틈타서 북한지역으로 잠입하고 있는 중공군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한미군은 신속한 추격 및 전과 확대로 한만국경까지 진격하였으나침투한 중공군에게 후방이 차단되면서 치열한 후퇴작전이 전개되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 야간 침투.우회.포위 전술에 연함군은 막대한 희생과 손실을 입으면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장진호까지 원거리 우회 포위 기동을 하던 미해병 1사단은 중공군 9병단의 침투.포위 전술로 유담리, 하갈우리, 고토리 지역으로 3등분 되어 중공군의 줄기찬 공격을 막아내면서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퇴로를 뚫었고 하갈우리 야전 비행장에서 부상자를 후송하였다. 장비 대부분을 방기하고 병력만 겨우 함흥으로 철수한 미군은 병력, 보급품, 장비, 물자, 피난민을 해상으로 배를 이용하여 덩크르크에 버금가는 철수작전을 전개하게 된다. 1.4후퇴의 시작이었다.
평걍을 포기하고 38도선까지 물러난 유엔군은 서울을 다시 빼앗기는 등 뺏고 빼앗기는 지리한 공방전을 계속하면서 휴전회담시까지 쌍방이 서로 인적, 물적 피해를 감수하다가 휴전이 성립되면서 한국전쟁은 막을 내리게 된다.
인천상륙작전
인천 상륙 작전(仁川上陸作戰, Battle of Incheon)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15일 UN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의 주도로 시작된 상륙작전으로, 한국 전쟁 전반의 전세를 뒤집는 계기가 되었다. 작전 암호명은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이었다.
맥아더는 1950년 6월 29일, 전쟁발발 4일 뒤 한강방어선을 시찰하며 인민군의 후방에 상륙, 병참선을 차단하고 낙동강을 통해 반격에 들어간다는 기본 전략을 세웠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미 해군은 인천항의 간만의 차가 평균 7미터로, 항에 상륙하기 전에 월미도를 먼저 점령해야 하는데다 선단의 접안지역이 좁아 상륙 후 시가전이 불가피한 점 등의 이유로 상륙작전의 최악의 지형이라며 완강히 반대하였다. 해군 일부 인사들이 작전성공률이 5천대 1이라며 격심하게 반대하는 와중에, 맥아더는 이런 난점이 오히려 적의 허점을 찌르는 기습이 될 수 있다며 끝까지 인천상륙을 주장, 결국 8월 28일 미합참본부로부터 승인을 얻었다.
상륙작전은 동해에서 미군함 미주리호로 삼척 근처에서 상륙작전준비로 오인시키기 위한 공습을 시작했고, 서해에서는 서해 최적의 상륙지점으로 간주된 군산시에서도 상륙작전과 비슷한 수준의 포격을 수차례 실시하는 등의 기만작전으로 시작되었다. 9월 4일 상륙지점인 인천을 고립시키기 위한 공습이 시작되었으며, 상륙 당일인 9월 15일까지 지속되었다. 9월 14일에는 영덕군에 장사 상륙 작전이 실시되었다.
이와 동시에 맥아더는 고의로 군산상륙작전이라는 거짓정보를 흘렸으며 이 정보에 속아넘어간 인민군들은 군산의 방어를 강화하였고 그 결과 다른 지역의 방어력이 감소하였다.
9월 15일, 작전개시일에 함정 206척, 7만여 명을 동원하여 영종도 근처에 집결, 작전이 시작되었다.
작전의 제 1단계는 월미도의 점령으로 시작되었다. 새벽 5시에 시작된 공격준비사격에 이어 미 제5해병연대의 3대대가 전차 9대를 앞세우고 월미도 전면에 상륙하였다. 월미도는 2시간만에 완전히 미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미군은 부상 7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으며, 인민군은 108명이 전사, 106명이 포로로 잡혔고, 네이팜탄 투하 및 기총소사로 민간인의 피해가 컸다.
제2단계는 국군 제17연대, 미군 제7사단, 미군 제1해병사단의 주도로 인천반도 공격으로 이어졌다. 인민군 제18사단과 인천의 경비병력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미군 제1해병사단과 국군 해병 제1연대는 성공적으로 인민군의 주력이 규합할 시간적 여유를 빼앗아버리며 인천 장악에 성공하였다.
인민군이 38선에서 낙동강 방어선까지 진격하는데 81일이 걸렸지만, 인천상륙 이후 아군이 38선까지 돌아오는데 15일이 걸렸으니 적의 배후를 불의에 공격한 인천상륙작전의 크나큰 성과다.
월미도의 비극
9월 10일부터 13일 아침까지의 공격으로 많은 민간인들이 죽었다.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가 10명이고, 실종자와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사람을 포함하면 실제 희생자가 10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진실화해위원회는 추산했다.
작전의 제1단계는 월미도의 점령으로 시작되었다. 새벽 5시 시작된 공격 준비 사격에 이어 미 제5해병연대 3대대가 전차 9대를 앞세우고 월미도 전면에 상륙하였다. 월미도는 2시간 만에 완전히 미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미군은 부상 7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으며, 인민군은 108명이 전사하고 106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어 제2단계로 국군 제17연대, 미군 제7사단, 미국 1 해병사단이 주도한 인천반도 공격이 이어졌다. 인민군 제18사단과 인천 경비병력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미군 제1해병사단과 국군 해병 제1연대는 인민군의 주력이 규합할 시간을 성공적으로 빼앗아버리며 인천 장악에 성공하였다. 그 후 서울을 빼앗긴 지 3개월 만인 9월 28일에 서울을 되찾았다. 이어 달아나는 인민군을 뒤쫓아 38선을 돌파하여 10월 10일에는 원산을,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했다. 이어, 10월 26일에는 서부는 청천강 북부와 압록강의 초산에 이르렀고, 중부는 장진호까지 진격했으며, 동부는 압록강의 혜산진까지 진격했다. 또한 11월에는 두만강 일대까지 진격하였다. 한편, 김일성은 정부와 인민군을 미리 10월 9일에 북쪽으로 거의 모두 철수시킨 다음에 10월 12일부터 평양에서 철수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지금의 자강도의 중심지인 강계를 임시수도로 정했다.
서울수복전투
서울 수복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 |||
미국 해병대가 서울에서 북한군 수색 작전을 펼치고 있다. | |||
날짜 | 1950년 9월 15일 - 9월 2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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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서울 및 서울 인근 지역 | ||
결과 | UN군, 대한민국 국군의 승리 서울 수복 UN군 및 대한민국 국군의 반격 시작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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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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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수복 전투(-收復 戰鬪)는 한국전쟁의 전투 중 일부로, 1950년 9월 15일 실시된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 이후 9월 28일까지 서울 수복을 위해 치러진 전투이다.
1950년 9월 15일 인천 월미도에 상륙한 유엔군은 인천과 여러 섬들을 장악하고 서울로 진격했다.
국제연합의 결의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우방 여러 나라의 파병이 이루어지면서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의 전력은 적을 압도하기에 이르렀으며, 9월 15일에는 인천에서 국군과 유엔군의 대규모 상륙작전이 이루어져 전세를 뒤엎게 되었다.
서울 진격
상륙 부대의 선봉에 선 미국 해병 제1사단과 국군해병대는 9월 18일 김포 비행장을 탈환한 다음, 행주나루터의 맞은편에서 한강을 건넜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영등포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해병대의 뒤를 따라 진격한 미군 제7사단은 남쪽으로 내려가 시흥·안양·과천 등을 점령하고, 관악산을 끼고 돌아 서빙고와 뚝섬 맞은편에 이르렀으며, 그곳에서 한강을 건너갈 채비를 갖추었다. 한편, 낙동강 전선에서 총반격으로 들어간 국군과 유엔군은 9월 20일부터 적진을 돌파하기 시작하였다. 경부가도를 따라 적을 추격하면서 북상하던 미군 제1기병사단의 선발대는 9월 26일 오산 북쪽에 이르러 남하중이던 미군 제7사단 선발대와 합류하였다. 곳곳에서 퇴로가 끊기게 된 적의 패잔병들은 험준한 산악을 타고 38선 이북으로 달아나기에 급급하였다. 9월 20일 새벽 행주나루터를 강습하여 강을 건너간 한미 해병대는 이튿날 수색을 지나 서울의 서쪽 변두리를 감싸고 있는 안산·와우산·연희고지 일대로 진격하였다.
연희 고지 전투
적은 9월 23일까지 사흘 동안 끈질긴 저항을 계속했으나, 9월 24일 한미 해병대는 함재기(艦載機)와 포병의 압도적인 화력 지원을 받아 최후의 돌격을 감행한 끝에 이튿날인 25일 마침내 이 고지들을 빼앗았으며, 그곳에서 서울시가를 굽어볼 수 있게 되었다.
한강 도하 작전
때를 같이하여 서빙고와 뚝섬 일대에서도 한강 도하작전이 진행되었다. 미군 제7사단 제32연대가 남산과 왕십리 쪽으로 돌입하는 사이 국군 제17연대는 서울의 동쪽 용마산 일대의 능선을 타고 북으로 올라가 망우리고개를 점령하였다. 시가전은 마포·남산·왕십리 등 여러 곳에서 동시에 있었으며, 밤이 깊어지면서 시내 한복판으로 좁혀졌다 이날밤 북한 공산군은 퇴로가 완전히 봉쇄될 것을 두려워하여 서울을 사실상 포기하고 주력을 의정부 쪽으로 퇴각시키면서 후위 부대로 하여금 저항을 계속하게 하였고, 서울 시가 전투는 26일에도 시내 전역에서 계속되었다.
서울 수복
9월 27일 새벽 국군 제17연대와 해병대 용사들은 중앙청으로 돌입하여 태극기를 게양했으며, 그 잔당을 소탕하고 9월 28일에는 적치하에서 신음하던 서울시민을 완전히 구출하였다. 반격이 개시된 지 2주일이 채 안 되는 9월 28일 정오, 감격의 수도탈환식이 국회의사당에서 거행되었다.
장사상륙작전
장사 상륙 작전 (한국 전쟁의 일부) | |||
날짜 | 1950년 9월 14일 - 9월 2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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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경상북도 영덕군 | ||
결과 | UN군, 대한민국 국군의 상륙 성공, 이후 철수, 하지만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에 기여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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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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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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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규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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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 상륙 작전또는 장사동 상륙 작전은 1950년 9월 14일 경상북도 영덕군 장사리에서 벌어진 상륙작전이다. 작전명 174라고도 한다. 대한민국군의 학도병으로 구성된 772명이 장사에 상륙하여 국도 제7호선을 봉쇄하고 조선인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데 성공하였으나, 보급등의 문제로 철수하였다. 인천 상륙 작전의 양동작전으로 실시되어 양동작전으로서는 성공하였다.
사실상 미8군에게 떨어진 명령이었으나 바쁘다는 명분으로 작전명 174을 대한민국 학도병들에게 맡긴 것이다. 총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772명 중 사망과 부상을 당한 학도병을 제외하면 모두 행방불명 상태이다.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한 후 고립된 학도병들을 구출하러 배를 보냈지만, 죽기 전까지 싸웠던 북한군(북한군 2개 사단 정예부대)에 의해 대부분 전사했다. 배가 상륙하면 배까지 위험해질 가능성이 있어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학도병들이 상륙했던 배는 1997년 3월 쯤에 난파선으로 발견 되었다.
원산상륙작전
원산 상륙 작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원산에 대한 미군의 상륙작전이다.
원산 상륙 작전 | |||
날짜 | 1950년 10월 10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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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함경남도 원산시 | ||
결과 | 미 해병대의 원산 상륙 성공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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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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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장군의 오퍼레이션 원산을 명령에 따라 1950년 10월 2일 원산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다. 미군과 대한민국 국군은 포항 전선을 출발하여 하루 평균 15마일의 속도로 원산을 향해 돌격했다. 해군의 전폭적인 함포 사격과 측방 보급은 원산으로의 진격을 한결 더 수월하게 해 주었다. 10월 9일, 국군과 미 해병대는 원산만 입구에서 접전을 벌였고, 10월 10일에 원산 전체를 점령하게 되었다.
오퍼레이션 탈리보드
오퍼레이션 탈리보드는 미국 육군의 원산 상륙 작전이다. 오퍼레이션 원산에 이어서, 미국 육군이 뒤따라 상륙한 작전이다. 육군 3사단은 10월 2일, 38선을 돌파하고 양양에 동해 사령부를 설치하고 원산으로의 진격을 계속했다. 이후 국군은 고성, 통천 등에서 거센 저항을 받았으나 진격 8일 만에 원산 남부에 도착했다. 인민군은 고립된 지형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험준한 산지를 이용해 저항을 계속했다. 10월 10일, 원산 시가지에는 아침부터 접전이 시작되었다. 10월 13일, 원산 비행장을 점령하고 10월 14일, 원산 점령을 선포한 후 원산 상륙 작전은 끝났다.
평양전투
평양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 |||
날짜 | 1950년 10월 18일 ~ 10월 20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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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평남 평양 | ||
결과 | 대한민국과 미국의 승리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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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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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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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전투는 한국 전쟁 당시 1950년 10월 18일 ~ 10월 20일 국군과 미군이 북한군을 물리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 평양을 탈환한 전투이다.
38선을 돌파한 이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 평양을 향한 진격경쟁을 벌이고 있던 미 제 1군단 예하 한국군 제1사단, 미 제1기병사단, 미 제24사단 등 각 사단은 10월 17일 현재 평양 외곽지대를 서남으로 가로 지른 언진산맥.마식령 산맥의 남단과 멸악산맥 등 산악지대에서 저항하는 적을 격파하고, 한국군 제1사단이 율리 일대에 미 제1기병사단이 황주에 각각 진출함으로써 평양까지 40km 내외로 포위망을 압박하였다.
즉 군단 우익으로서 평양 동남방으로 진격한 제 1사단은 제 12연대가 상원 율리 일대에, 제 11연대가 초귀동- 상원 일대에 진출함으로써 적의 평양 최후방어선을 향한 공격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제 15연대는 조공으로서 율리로부터 평양 동북방을 우회공격하게 되어, 율리에서 삼등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다음, 군단 중앙의 미 제1기병사단과 좌익의 미 제 24사단간의 진격경쟁은, 『사리원에 먼저 진출하는 사단으로 하여금 평양공격의 선두에 서도록 한다.』라는 군단장 프랭크 W. 밀번(Milburn) 소장의 포고에 따라 우선 사리원으로의 진출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런데 기병사단에 배속된 영 제27여단이 10월 17일에 사리원을 탈환함으로써 미 제24사단은 재령으로부터 사리원을 향하였던 진격이 정지되고, 미 제 1기병사단이 평양공격에 앞장서게 되었다.
같은 날 밤, 기병사단의 제7기병연대는 서흥 지방으로부터 진격하여 황주를 탈환하였으니, 이로써 기병사단은 평양남방 40km에서 진격을 서두르게 되었다.
아군이 38선을 돌파할 무렵에 맥아더 UN군 총사령관과 월턴 워커 미 제8군사령관은 승리의 상징이 되는 평양탈환의 계획을 구상하였다.
즉 미 제1군단에 주공을 담당시키고 원산에 상륙할 미 제7사단으로 하여금 서진하여 평양동북방을 공격케 하려는 대전략구상이었다. 여기에서 주공의 임무를 부여받은 밀번 미 제1군단장은 38도선으로부터의 북진에 있어서 기동력이 좋은 미 제 1기병사단으로 하여금 중앙에서 선두로 진격케 하고, 제1사단은 그 우익을 진격시켜 평양에 육박케 하고 있었다.
이때 북한군은 멸악 산맥 일대의 외곽방어선이 돌파되고 붕괴상태에 빠졌으나, 사령관 소장 최인이 평양방어사령부를 설치하고, 대동강 남북안 및 동평양일대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한 다음, 완강한 저항을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적의 저항은 그들의 각 기관이 철수함에 있어서 시간적 여유를 얻음과 아울러 패적의 후퇴를 엄호하기 위하여 아군의 전진을 지체시키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즉 미 제 8군 G-2의 판단은, 적이 차기작전에 대비하여 주공이 청천강 이북으로 철수하는 동안 각목상의 방어를 기도하리라는 것이었다. 또한 지형 상으로도 대동강은 적에게 천연적인 방어선으로 이용될 수 있으나, 그 유역인 평양주변에 전개된 평야는 열세한 화력과 기동력으로 방어전을 계속하기에는 불리한 조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미 산악 지대를 돌파한 제 1사단과 미 제 1기병사단은 각기 전차를 선두로 낙랑평야의 동단을 관통하여 평양에 돌입할 것을 계획하였다.
전투 과정
10월 18일
사단은 이날 이른 아침부터 진격을 시작하였는데, 정면에서는 완강한 적의 저항으로 진격이 부진하였으며, 우회공격 중의 제 15연대는 미약한 적의 저항을 물리치면서 신속하게 진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즉 주공인 제 12연대는 제1중대와 제3중대가 엄호하는 미 제6전차대대의 전차군을 선두로 제 2대대를 우익공격제대로, 제 3대대를 좌익공격제대로 하여 대동리를 목표로 진격하였는데, 대동리 남쪽 도로좌우에 솟아 있는 반용산과 관음산의 기성진지에서 저항하는 2개 대대규모의 적을 일거에 격파한 다음, 10:00까지는 이미 대동리를 탈환하였으며, 연대는 계속 패적을 추격하였던 바, 대동리 북쪽 1km 지점에서 다시 1개 연대규모의 적과 교전케 되었다.
이때 적은 대동강지류인 남강으로부터 다시 갈라진 상원강반을 방어선으로 삼아 그 서북안의 능선일대로부터 6대의 전차와 7문의 곡사포 및 16문의 직사포 등의 지원을 받으면서 4~5선의 중첩배치로서 최후 복곽적인 다선 저항을 기도하였다.
특히 적 제 1선의 저항은 완강하여 아군의 치열 무비한 공격에도 뚫리지 않고 있었으며, 아군의 진격로에는 많은 적의 지뢰가 매설되어 도처에서 폭발하는 전황이었다. 그리하여 연대는 이 완강한 적의 저항을 끝내 돌파 분단한 다음, 날이 저문 뒤에야 강변에 진출하였으니, 대동리로부터 1km정도의 전진에 8시간이나 소요된 셈이었다.
한편 동북방을 우회 공격케 된 제 15연대는 이미 전날에 율리로부터 북진을 시작하였거니와, 미약한 일부 패적의 저항을 격파하면서 삼등에서 송가리 쪽으로 서진하여 신장리 일대를 거쳐 삼청동-광청리-승호리 일대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즉 제 1대대는 삼등을 거쳐 신장리 부근에 진출하였을 즈음, 4대의 적 전차 엄호 하에 저항하는 2개 중대규모의 적을 공격하여 이를 단숨에 격파한 다음, 전차1대의 엄호를 받으며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광청리 부근가지 진출하였다.
그리고 제 2대대는 삼등-덕산 탄광-송가리로 진격하여 이날 11:00에 제 7중대가 화천리에 진출함으로써 전 대대가 한곳에 합세한 다음, 저항하는 2개 중대규모의 적을 격퇴하는 즉시로 이 패적을 운학동서북방 2km 부근까지 쉴 새 없이 추격하였다.
제3대대도 삼등을 거쳐 서진하였는데, 도중에 일부 패적의 저항을 격파하면서 광청리 부근으로 진출하였다. 또 직할대는 이날 새벽에 일부 패적의 지연행동이 약간 있었으나 이를 물리치면서 무난히 대동강의 남강 지류를 건넜으며, 화천리부근에서 1개 중대규모의 적으로부터 사격을 받게 되자 곧 이를 격퇴한 다음, 17:00에 승호리 일대에 진출하여 군화속의 물을 털었다.
10월 19일
전날에 시작된 제12연대의 상원강 일대 적 방어선에 대한 공격은 차가운 가을비를 무릅쓰고 밤새 계속되어 날이 밝기 전에 거점편성의 적 방어진지를 완전히 탈취함으로써 끝이 났다.
그런데 연대는 어느 부대보다도 완강한 적의 저항을 받았을 뿐 아니라, 진격로에도 가장 많은 대인·대전차 지뢰가 매설되어, 전진 도중 사단참모장 석주암 대령이 탑승한 지프차가 지뢰접촉으로 참모장이 다리를 부상당한 바도 있거니와, 백선엽 사단장은 그들뿐만이 아니라 보병 자신들까지도 지뢰제거에 솔선종사토록 지시하여야 했었다.
그러나 이제 적의 평양방어선은 와해되었으며, 연대는 전차를 선두로 제 1·2·3대대의 행군대열이 줄을 지어 평양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10:00에 교외에 진출하였을 무렵 다시 도로좌우에서 저항하는 2개 대대규모의 적과 부딪쳤으나 미 제 6전차대대 C중대 전차의 활동과 후방 각종 포병화력, 지원사격 및 우천을 무릅쓰고 출격한 항공기의 폭격으로 두 시간 내에 제 2대대와 제3대대가 이를 격파하였다.
그 동안에도 연대는 진출을 서둘러 11:00에 제 1대대로부터 동평양에 선착으로 돌입한 다음, 각 대대가 선교리일대에 진출하여 12:30~12:45까지는 대동교 남북방의 대동강 남안에 부대를 배치하여 본평양에 입성하였다.
이와 거의 같은 시각에 미 제 5기병연대의 선두부대도 남평양에 돌입하였는데, 감격에 젖어있던 백선엽 사단장은 대동교 남쪽 교차로에서 미 제 5기병연대를 따라 온 밀번(Milburn) 군단장과 게이(Gay) 미 제 1기병사단장에게 상황을 보고 하였다.
이때 제 11연대는 사단 우익공격제대로 전진하여, 선발 제 3대대(대대장 소령 정영홍)가 12:25에 평양비행장을 탈환하였다. 즉 제 11중대장 김봉건 대위는 진격 도중에 노획한 적의 군마로 1명의 기마대를 편성하였는데, 이를 지휘하여 선두로 10:30~11:00에 비행장에 돌입한 다음 잔류한 수 명의 적을 사살하거나 사로잡았으며, 이를 대대장에게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약1시간 반 뒤에는 대대주력이 비행장에 진출하였던 것이다.
전날 밤 늦게 마산리에서 대동강의 북강을 건너기 시작한 우익 제 3대대가 이날 05:00에 이르러 도하를 완료하였으며, 제1대대가 10.30에 삼산동에서, 새벽에 이천리로 진격한 좌익의 제 2대대는 08:30에 하수리로 각각 대동강의 북강을 건너 모단봉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즉 제3대대는 대안에서 사격을 가하는 1개 중대규모의 적에 대하여 1개 중대로써 응사케 하여 도하를 엄호시키고 주력은 하류로 넘어 대안에 건너가 적을 격퇴한 다음, 도중에 저항하는 일부 패적을 포로로 잡으면서 북사리를 지나 동북방으로부터 모단봉을 공격하였다.
또 제1대대도 북사리를 거쳐 14:00에 평양에 돌입하여 제 3대대 우측에서 모단봉부근을 공격하였으며, 제 2대대는 전날 설학동 북쪽에서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147고지-101고지를 탈취한 다음, 제 6·7중대를 진격시켜 제 3대대의 좌측에서 모단봉일대를 공격하였다.
당시 이 일대에는 연대규모의 적이 수많은 인공호와 천연 동굴에 잠복하여 끝가지 저항하였으나, 아군의 끈질긴 공격에 마침내 북한군은 전의를 잃게 되고 15:00까지에는 모두 격파되었다.
더욱 용약하게 된 연대는 즉시 시내를 진출하기 시작하였는데, 제 3대대는 먼저 김일성대학 안으로 약진하여 15:30 저항하는 1개 대대의 적을 마침내 격퇴한 다음, 이곳에 대대관측소를 설치하였으며, 중화기중대가 그 부근에 배치되어 적의 퇴로를 차단하면서 패적을 소사하였다.
제2대대는 제6중대를 서쪽으로 우회하여 시내에 돌진케 하고 제 7중대는 대동강기슭을 따라 약진시켜 북한 정부의 내각본부를 점령케 하였던 바, 거의 같은 시각에 그곳에 진출한 제 11중대와 선후를 가리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은 제7중대가 먼저 태극기를 그 건물 높이 게양하였으며, 태극기를 미처 가져오지 못하였든 제 11중대는 이에 뒤질세라 북괴의 인민위원회의 안으로 돌진하여 그곳에 태극기를 게양하게 되었다.
한편 이날 직할대도 동평양비행장을 점령한 다음, 대동강을 건너 연대 주력과 합류하였으니, 17:30까지 연대는 평양시내의 중요건물을 거의 모두 다 수중에 넣게 되어 적들도 차츰 멀리 사라지는 것이었다.
10월 20일
평양 점령 다음 날에도 가을비는 아직도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으며, 사단은 제 11·12연대도 본평양에 돌입하여 일부 북한군 잔당들을 척결한 다음, 방어시설이 튼튼하게 되어있는 적의 각 기관을 비롯하여 전 시가를 10:00까지 완전히 점령하였다. 그리고 제7사단 8연대는 서북방을 평정하였으며, 미군은 여러 가지의 수습대책을 백선엽 사단장에게 문의하거나 통고한 다음에 비로소 행하였다.
한편 아침에 시청을 수색하던 제15연대 9중대의 박종순 소위는 방공호에서 북한군에 의한 우익 학살 현장을 발견하였다. 또 한편 평양상업학교 출신인 동 연대 제11중대의 한 소위는 피난을 간 부모를 만나기도 했다.
이제 사단은 평양을 가장 먼저 탈환한 공세에 따라 여러 가지 상훈을 받게 되었거니와 우선 전 부사관과 병 특별진급으로 698명의 부사관과 병이 1계급 진급하였으며, 각 대대장들도 중령으로, 김점곤 중령과 제 15연대장 조재미 중령도 이날부로 대령으로 각각 진급하였을 뿐만 아니라, 백선엽 사단장은 밀번 군단장으로부터 미국의 은성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각 연대본부와 사단사령부는 모두 평양에 진출하였으며 이날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는 미 제8군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에게『한국군을 조속히 국경에 도달케 하라』고 명령하였으며, 미 제187공수연대는 적의 퇴로차단과 미군포로구출을 목적으로 평양 동북방 37km의 순천에 강하하였다.
결과 및 영향
사실 대한민국이 서울을 수복할 때부터 이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부,기관,부대,수뇌부가 평양에서 철수준비를 하고 있는 상태였으며 10월 9일부터 평양 철수를 본격적으로 실시하였는데 그 중 일부 인민군은 만주의 하얼빈이나 만주 국경으로 빠져나가기도 했다. 그리고 김일성 역시 10월 12일에 평양에서 덕천으로 피했다가 임시 수도 강계 근처로 도망가고 없는 상태라 이미 평양은 텅 빈 거리와 마찬가지였다. 평양을 점령했지만 미국이 평양 통치권을 실행했는데 이는 트루먼 대통령 쪽에선 38선 이남만 대한민국 통치가 가능하고 평양은 별개 도시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UN군사령부는 평양에 군정을 실시할 준비를 하였으며, 10월 21일에 맥아더 원수는 평양 비행장에 비래하여 미군 중 제1착을 한 제5기병연대의 F중대 등 미군을 사열하였다.
유엔군은 계속 북진하여 미 제1군단은 신의주-수풍댐 지역으로 계속 북진케 되었으며, 이에 따라 제1사단은 수풍댐을 목표로, 미 제24사단은 선천으로 진격케 되었다.
그리고 새로 군단에 편입된 제7사단은 예비대로, 미 제 1기병사단은 평양 경비를 담당하게 되었다.
희천전투
희천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 |||
날짜 | 1950년 10월 20일 ~ 10월 2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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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성천 - 개천 - 희천 | ||
결과 | 한국군 승리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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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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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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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천-개천-희천 전투는 한국전쟁 중인 1950년 10월 23일에 국군 제2군단 제6보병사단 7연대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8사단의 1개 연대를 물리치고 희천을 수복한 전투이다.
제6사단은 평양을 공격해 탈취하라는 명령을 받은 다음, 10월 15일 원산-덕원을 출발하여 10월 18일 22:15에 제7연대 제2대대는 양덕을 점령해 확보하고 전과를 확대하면서 계속 성천까지 진격하였다.
하지만 10월 19일 12:00에 이르러 제1사단과 UN군부대가 이미 평양을 탈환하였기 때문에, 사단은 군단장 명에 의하여 진격방향을 바꾸어, 성천으로부터 순천-개천-희천 쪽으로 진격하게 되었다.
제6사단장 김종오 준장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육본 작명 제218호에 의한 제2군단 작전계획에 따라, 제7연대와 제19연대를 공격제대로 하고, 제2연대를 예비대로 공치한 다음, 순천-개천-안주를 공격하는 즉시로 희천 쪽으로 진격을 계속토록 하였다.
전투 과정
순천 탈환
10월 20일 제7연대는 제1대대와 제2대대를 공격제대로 하고, 제3대대를 예비대로 하여, 이날 07:00에 도보로 성천을 출발하여 순천 쪽으로 진격하던 중 최전방에서 진격하는 연대 수색대로부터 적정보고를 받게 되었는데, 그에 의하면 북한군은 이미 순천 북쪽으로 퇴각하고 저항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연대장은 즉시 연대 전 병력을 차량으로 전술적 기동을 하여 급진시킴으로써 이날 20:00에는 이미 순천으로 돌입하였다.
그런데 미 제11공정사단 제187연대는 이날 14:20에,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동시에 미군포로를 구출할 목적으로 순천 서남쪽 3.2km 지점에 공연투하 하였는데, 이날 제7연대 주력이 순천으로 돌입하자, 서로 얼싸 안고 반가워하였다.
이때 공수대원들은 우리가 노획한 소련제 권총과 다발총을 기념물로 줄 것을 희망하기에 노획품의 일부를 넘겨주기도 하였다. 이곳 순천에는 적의 후방사령부가 있던 곳으로서 적은 황급히 패주하면서 많은 보급품을 그대로 남겨둔 채 패주하였다.
이때 노획한 보급물자는 대부분 아군이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서 다가 올 월동준비에 사용할 계획이었다.
개천 전투와 순천 탈환
10월 21일 제7연대 제2대대는 이날 06:00에 개천 남쪽 15km지점까지 진격하였는데, 이곳에서 1개 중대규모의 북한군과 부딪히게 되었다. 대대장은 즉시 대대 전 화력을 집중함과 동시에 일제히 이 적을 추격해 섬멸토록 명령하였다.
이때 북한군은 주변 산악지대로 분산해 패주하면서 산발적인 저항을 기도하였으나, 대대장은 더 이상의 추격을 중지시키고 개천 쪽으로 서서히 전투를 위한 전진을 계속토록 하였다.
한편 예비대인 제3대대는 순천에서 제1대대와 제2대대를 초월하여, 북쪽 50km 지점에 있는 개천을 이날 안으로 점령, 확보하라는 요지의 연대장의 명령을 받았다.
따라서 대대장은 대대 전 병력을 제9중대, 제10중대, 제12중대, 그리고 제11중대의 순으로 개천을 향해서 차량으로 급속도로 진격토록 하였다.
그런데 도중에서 1개 대대규모의 적이 도로상을 이열 종대로 북상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자, 대대장은 예하 각 중대장과 대대참모들을 모아 놓고, 현재 대대가 처해 있는 상황으로서, 개천까지 진격해야 하는 시간이 급하기 때문에, 연대장의 명령수행을 시간 내에 완수하기 위하여서는, 부득이 이 북한군과 교전할 여유가 없다는 결론을 얻고 대대장은 적 행군대열의 중앙을 그대로 돌파하여 개천까지 급진할 것을 결심하였다.
대대장 인성관 중령은 차량화된 전 대대를 적 행군대열의 중앙으로 돌파, 전진토록 하면서 자동차 위에서 크게 외치며 투항과 항복을 권유했다.
이에 급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북한군은 대부분 총을 버리고 사방팔방으로 흩어졌으며, 일부는 주변 산악지대로 패주하고 말았다. 따라서 대대는 1발의 소총도 쏘지 않고 개천까지 진격하였다.
뒤 이어 연대 수색중대가 개천으로 전진하던 중 도중에 이 대대와 조우하였던 적으로부터 기습을 받아 예기치 않았던 손실을 입었으나, 곧 이 적을 격파하고 개천까지 진격하였다. 이 무렵 연대 주력은 순천-개천 사이를 전진하고 있었다.
한편 제19연대는 이날 13:30에 순천을 출발하여 용원리까지 전진한 다음, 부대정비에 임하고 있었으며, 전날 저녁 성천까지 전진한 제2연대는 이날 08:00시 제3대대, 제1대대, 그리고 제2대대 순으로 성천을 출발하여 순천 쪽으로 전진하던 중, 22:00시에 이르러 각 대대는 은산을 통과하여 순천까지 진격하였고, 연대본부와 사단 사령부는 이날 21:00에 은산까지 약진하였다. 한편 포병대는 공격제대의 진격을 근접지원하기 위해 순천으로 약진하였다.
이때 순천 남쪽에서 굴속에 숨어 있던 양민들을 놓아 주고 식사를 제공해 주었는데, 이들은 지금까지 고생한 보람을 느끼는 듯 기뻐 날뛰었다.
또한 대대장 김성 소령은 포탄보급이 제대로 안되었기 때문에 인접 미군 포병대대를 방문해서, 미군이 보관하고 있는 포탄을 나누어 주도록 요청하였던 바, 그들이 보관하고 있는 포탄 800발 중 400발을 분배받아 사용하였다.
개천 전투와 영변 탈환
10월 22일 제7연대 제3대대는 전날 밤 상황이 계속되면서 날이 밝자, 이번에는 신안주 쪽에서 1개 사단규모의 북한군이 개천 쪽으로 행군대열을 지어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였다.
대대장은 쌍안경으로 적정을 살펴보니, 북한군은 패잔병의 대열로써 후미에는 전차 10대가 뒤따르고 있었다. 대대장은 즉시 대대 전 병력을 개천 서남쪽으로 은밀히 기동시켜 장방일대에 배치하고, 급습을 가하여 적을 섬멸코자 하였다.
북한군은 국군의 이와 같은 시도를 모르고 선두부대가 교량 중간에 이르렀을 때, 대대장은 미리 계획된 신호탄을 발사함으로써 일제히 집중사격을 가하였다.
북한군은 불시에 기습을 당하자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패주하였으나, 아군의 이미 계획된 화망에 걸려 대부분 격멸, 분산되었다. 이때에 북한군은 수적으로 우세한 병력이었으나, 전의를 상실하고 방황하는 패잔병의 집단으로서, 아군의 기습공격에 부딪혀 오합지졸이 된 채 산지사방으로 패주하였다.
대대는 전장정리도 할 사이 없이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이날 07:00 제7연대 주력과 같이 희천 쪽으로 진격을 계속하였다.
한편 제19연대는 이날 12:00에 용원리를 출발하여 개천까지 전진하였는데, 제3대대는 105mm 곡사포대와 대전차포대의 지원을 받아 영변 쪽으로 진격을 계속하던 중, 이날 19:30에 1개 중대규모의 북한군과 부딪히게 되자 대대는 지체하지 않고, 곧 돌격대형으로 전개하는 동시에 일제히 적진을 향하여 돌진한 다음, 북한군을 일거에 격파하고 영변을 점령, 확보하는 즉시로 주변일대의 경계에 임하였다.
결과 및 영향
동부전선의 수도사단은 10월 22일 북청-중양리-신흥가도를, 그리고 좌측 제1사단은 안주와 개천 중간지점까지 각각 진격 중이었다.
한편 제6사단 사령부는 10월 22일 밤 사단 주력의 급진에 따라 개천까지 약진하여 다시 구장동으로 전진할 준비를 갖추었다.
장진호 전투
장진호 전투 (한국전쟁의 일부) | |||
장진호 전투 중 중공군 저지선을 뚫고 이동하는 미 해병대. | |||
날짜 | 1950년 11월 26일 ~ 12월 1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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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함경남도 장진호 | ||
결과 | 중공군의 승리 미국군의 전술적 승리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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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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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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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규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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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長津湖戰鬪)는 한국전쟁 중인 1950년 겨울, 미국 1 해병사단이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임시수도인 강계를 점령하려다 오히려 장진호 근처의 산 속 곳곳에 숨어있는 중국군 제9병단(7개 사단 병력, 12만 명 규모)에 포위되어 전멸 위기를 겪었다가, 간신히 성공한 후퇴 작전이다. 1950년 11월 26일부터 12월 13일까지 진행되었다. 본 전투의 이름의 장진(長津)은 영어로는 일본어 독음을 따서 Chosin(ちょうしん)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당시 한국어 지도가 없고 일본어 지도뿐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도 사건 당시, 미국의 뉴스위크지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하였다.
미군의 전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으며, 1 해병사단 외에 미국 육군 7사단 병력 일부도 함께 하였다. 이 후퇴작전을 통해서, 미 해병1사단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의 중국군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중국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흥남 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흥남 철수는 193척의 군함으로 군인 10만 명, 민간인 10만 명을 남쪽으로 탈출시킨 사건을 말한다. 흥남 철수의 작전시작한 날은 바로 대한민국이 평양에서 철수한 날이었다. 또한 흥남 철수 작전이 바로 1.4 후퇴의 시작이었다.
미 해병1사단의 이 퇴각작전으로 중국군을 저지함으로써 한국군과 유엔군, 피란민 등 20만명이 남쪽으로 철수할 수 있었으며, 서부전선의 미 8군이 중국군을 방어할 수 있었다. 장진호 전투로 인해 중국군의 함흥 지역 진출은 2주간 지연됐고 중국군 7개 사단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경과
평양 수복 후, 맥아더 사령부는 중국군이 개입할 가능성이 없다는 전제하에서 압록강을 향한 대대적인 포위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극동 사령부는 한반도 북부의 험난한 자연과 기후, 그리고 중국군 개입에 대한 철저한 대비없이 이 포위작전의 북쪽 주공을 미국 1 해병사단에게 맡겼다.
1950년 10월 26일
미국 1 해병사단은 유엔군의 북진에 맞추어 서부전선부대와 접촉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장진호 방면 진출을 위해 원산에 상륙하였다. 처음에 동부에 있었던 미국 10군단과 미국 1 해병사단은 장진호쪽으로 북상하게 된다. 미국 1 해병사단은 북한군의 정부가 도피중인 강계를 점령하기 위해 장진호로 북진하게 된다(하지만, 미국 10군단은 11월에 중국군의 습격, 강추위로 인해 철수했다).
11월 2일 수동(水洞) 전투
함흥 북방 수동 일대에서 미국 1 해병사단 7연대 1대대와 북한의 수도 평양에서부터 후퇴한 인민군 344전차대대 잔존 병력과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중 일부 중국군 포로가 발견되어 중국군 이 한국 전쟁에 개입하고 있다는 첩보가 사실로 확인되었다. 당시 동경의 극동 사령부 (FEC, Far East Command)는 CIA와 기타 정보기관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압록강에서 160km 후방인 수동에서 발견된 중국군은 소수의 지원병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정보참모 윌로비 (Charles A. Willoughby) 소장을 통해 11월 3일 16,500명에서 34,000명 가량의 중국군이 북한에 들어와 있다고 발표하였다. 하지만 중국군은 그 시점에서 제 9병단의 12개 사단과 제 13병단의 18개 사단, 대략 30만명이 이미 북한에 들어와 있었다. 제 7연대는 수동 전투 이후 진흥리까지 진출하는데 꼬박 닷새를 보냈고, 3,000 명의 연대 병력 중 전사 50명, 부상 200명의 피해를 입었고 중국군은 1,500명이 전사한 걸로 파악하고 있었다.
포위기동의 북쪽 날개
11월 7일 ~ 11월 26일
7연대 병력은 별다른 전투없이 11월 7일 황초령 문턱에서부터 15일에는 장진호 남단 하갈우리를 거쳐, 25일에 장진호 서편 유담리에 진출하였다. 26일에는 7연대는 장진호를 중심으로 서쪽, 5연대는 하갈우리 북방, 1연대는 후방을 담당하는 형태로 배치되었다. 이 기간 동안 스미스 사단장은 하갈우리에 보급품을 비축과 야전활주로 건설을 지시하였다. 한편, 서부전선에서 중국은 11월 24일에 제 4야전군 예하 13 병단(약 18만명)과 제 3야전군 예하 9병단(12만명)을 미 8군 전면과 미 10군단 1 해병사단 전면에 배치하였고 11월 25일에는 미 8군의 우측을 공격하여 한국군 2군단이 붕괴될 위기에 처하였다. 또한 미 2 보병사단도 공격을 받아 당일에만 4,000 여명의 병력과 사단 포병장비 대부분을 잃었다.
중국군의 포위
11월 27일
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의 명령으로 해병 1사단은 당일부터 5연대를 주공으로 포위기동의 북쪽 날개로써 미 8군을 포위하고 있던 중국군을 격퇴하고 미 8군과 함께 낭림산맥 서쪽으로 공격할 예정이었으나 계획과 달리 포위작전의 방어부대인 미 8군이 중국군의 공격으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중국군은 9병단 8개 사단 약 6만여 명의 병력을 장진호에 집결시켰다. 이중 3개 사단은 유담리에 대한 공격을 준비 중이었고 1개 사단(80사단)은 하갈우리 포위를 위해 해병 1사단의 우측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미 7보병사단 31연대전투단에 대한 공격을 준비 중이었다. 당일 연합군 병력은 해병과 해군위생병 13,500명과 육군 4,500명에 불과하였다.
- 중국군의 유담리 공격
- 27일 밤, 중국군 제79 및 제89사단은 유담리에 대하여 공격을 개시하고 이 공격으로 인해 미국 1 해병사단 7연대 E중대와 중국군 제 79사단 235연대가 서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 중국군의 31연대전투단(일명:Task Force Maclean)에 대한 공격
- 27일 밤 11시경부터 중국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장진호 동안에 산재해 있던 연대 산하 3개대대는 유무선 통신이 전혀 연결되지 않았아 제각기 중국군과 맞서야 했으며 해병대와 서로 협조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 공격으로 32연대 1대대, 후동 지휘소의 제31연대 전차중대, 제31연대 3대대, 그리고 제57야전포병대대이 큰 피해를 당했다.
11월 28일
중국군은 27일 밤부터 28일까지 미 해병 16개 소총중대 가운데 3개 중대를 격멸하고 많은 고지를 탈취하였다. 이틀에 걸친 공격으로 중국군은 3개 사단(79, 89, 59사단)이 미국 1 해병사단을 세 개의 조각으로 분산시켜 각 부대를 유담리, 하갈우리, 고토리로 각각을 고립시겼으며 부대 간의 연결도로도 차단하였다. 제5해병연대와 제7연대는 신속히 방어로 전환하여 병력을 절약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해병 5연대 2대대는 오후부터 철수를 개시하여 밤8시에는 서남쪽 산으로 철수를 완료하고, 좌는 제7해병연대 3대대, 우는 제5해병연대 3대대와 연결하여 진지 편성을 마쳤으나 중국군 제58사단이 미 해병 1사단과 보병 7 사단의 사령부가 위치해있고 주요 보급기지 역할을 하고 있는 하갈우리를 포위하고 유담리, 고토리와의 연결을 차단하여 포위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이틀에 걸친 공격으로 중국군 제79, 89사단은 전력을 재편성중이어서 미 해병 5, 7연대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실시할 능력이 없었다.
- 극동사령부의 판단
- 에드워드 알몬드 미 제 10군단장은 이날 하갈우리의 미 사단사령부와 장진호 동안에 위치한 31연대전투단의 맥클린 대령을 방문하여 한반도 북부에 중국군 2개 사단은 존재하지 않으며 전날 공격한 부대는 패잔병들이므로 적에게 빼앗긴 고지를 탈환하고 북쪽을 향한 공격을 재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알몬드는 흥남으로 돌아오는 도중 동경에서 열리는 전쟁대책회의에 참석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 회의에서도 10군단은 계속 진격해야 한다는 의견을 계속 피력하였으나 다음날 새벽에 끝난 회의에서 10군단은 함흥-흥남지역으로 병력을 집중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극동사령부도 중국군의 개입을 워싱턴에 보고하였고 워싱턴도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하려는 맥아더 사령부의 계획을 승인하였다. 연합군 사령부 일부는 미 8군이 계속 후퇴함에 따라 흥남에서 미 10군단을 철수시키는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11월 29일
- 31연대전투단(페이스 특수임무부대)
- 27일부터 공격을 시작한 중국군은 28일 자정무렵부터 중국군 80사단의 예하 부대로 새로운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 전투로 연대장이 포로로 잡혀 전사하였고 페이스 중령이 새로운 지휘관이 되었다. 10군단은 이른 아침에 해병 1사단 스미스 소장에게 해병 1개 연대를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로 이동시켜 페이스 부대를 구출하고 하갈우리-고토리 간의 도로를 개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오후 8시 27분 기준으로 장진호 지역의 모든 병력은 스미스 소장의 작전통제하에 두게 하였다. 미 7 보병사단 부사단장이 헨리 호즈 준장도 스미스 소장에게 구조요청을 보냈지만 제5, 제7 해병연대는 중국군 3개 사단에의해 유담리에서 포위 고립되어 있었으며 하갈우리에는 고토리까지의 주보급로를 개통할 병력은 물론 하갈우리 방어에도 병력이 부족하였다. 알몬드 장군은 아직 장진호의 전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미스 소장은 호즈 준장에게 페이스 부대는 병력을 모아 하갈우리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갈우리 방어작전
11월 28일
하갈우리 방어는 제1해병연대 3대대가 맡고 있었다. 하갈우리에는 육군, 해군, 해병대, 한국군 등 58개 부대 3,913명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10명 이하로 구성된 선발대나 파견대였기 때문에 통합 지휘가 필요하여 이날 오후 3시 경에 3대대장이던 리지 중령이 하갈우리지역 방어작전의 통합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하갈우리 방어 전면은 약 2,200m였다. 하갈우리 방어를 위해 제11포병연대의 2대대 D포대가 지원하였다.
- 남서면 전투는 H중대와 I중대가 중요 전면을 담당하고 있었다. 밤 10시부터 시작된 공격으로 0시 경에는 중국군 172연대가 H중대 전면을 돌파하였고 사단장 숙소에까지 기관총 사격을 받았다. 0시 30분경에 공병과 운전병으로 편성된 약 50명의 예비대가 역습을 감행하여 일부지역을 회복하고 저지진지를 점령했다. I중대는 진지강화를 한 덕분에 돌파는 당하지 않았고 아침6시 30분에 주저항선을 회복했다.
- 동부고지(이스트 힐)전투는 제1해병연대 G중대는 방어할 예정이었으나 고토리에서 하갈우리로 들어가다가 중국군의 강력한 공격 때문에 좌절되었다. 제10전투공병대대 D중대를 주축으로 방어를 하였으나 29일 새벽2시부터 시작된 공격으로 미 제10군단 사령부 경계부대인 한국군 1개 소대를 돌파한 뒤 중국군은 하갈우리 방어진지 관측이 가능한 동부고지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였다.
포병과 박격포를 동원한 화력 지원으로 중국군의 공격을 막아내었으며 이 전투 와중에도 방어진지 내에서는 활주로 공사가 계속되고 되었다.
11월 29일
하갈우리는 2개 중대 병력의 규모가 방어하고 있었으며 동부고지는 3개 소대가 겨우 진지를 유지하면서 중국군과 대치중이었다.
- 죽음의 계곡
- 하갈우리 방어를 위해 오전9시 45분, 전차 29대와 일반 차량 141대 등 다수의 차량을 보유한 드라이스데일 특수임무부대가 남쪽 고토리로부터 북쪽 하갈우리를 향해 진격을 개시했다. 매복 중인 중국군 제 58사단의 강력한 저항으로 부대는 공격개시 후 4시간 동안 겨우 4km밖에 전진할 수 없었다. 오후 1시 50분, 눈보라와 강풍의 악천후 속에서 부대는 F4U 코르세어기 2대의 엄호 하에 전차부대를 선두로 공격을 재개했다. 오후4시 15분, 부대는 고토리 북방 6.5km지점에서 도로 유실과 노면 상의 탄흔 등의 장애로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부대장은 스미드 사단장에게 보고하였으나 증원군없이는 하갈우리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스미스 사단장은 전진을 계속하라고 명령했다. 극심한 전투 속에 드라이스데일 중령과 부관이 부상을 당했고 종대 중반에 위치한 탄약차량이 공격을 받았다. 이 화재로 인하여 도로가 폐쇄되었고 부대의 절반 가량이 후방에 고립되었다. 고립된 후방부대는 영국 코만도부대원 일부, 제31연대 B중대의 대부분, 그리고 사단 사령부 및 보급정비부대의 주력이었다. 최고 선임자인 사단 군수참모 보좌관인 아더 챠이데스타 중령이 차량종대에게 고토리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으나 고토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그룹의 전차와 트럭을 제외하고는 4개의 그룹으로 분산되어 방어진지를 구축해야 했다. 다행히 후방 2개 그룹은 다음날 새벽 2시 30분 경에 고토리로 귀환하였으나 전방의 2개 그룹은 중국군에 항복하였다. 선두 부대는 후속부대가 포위된 지 모르고 계속 전진하여 29일 저녁7시 15분 하갈우리에 도착하였다. 하갈우리에 약 300명의 보병과 100명의 전차병이 증강됨으로써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을 수 있었으나 드라이스델 특수임무부대는 전투력의 3분의 1을 상실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날은 드라이스데일부대가 하갈우리 남쪽에서 교전한 것 외에 큰 전투는 없었으며 중국군 제58, 제59사단의 일부가 다음날인 30일의 하갈우리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11월 30일
오전 8시에 미군이 소대와 배속된 공병 2개 소대로써 중국군이 점령한 동부고지를 공격했지만 큰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밤 0시부터는 중국군이 전날보다 강력한 화력과 인원으로 남쪽의 I중대정면과 동부고지의 G중대 정면을 공격하였다. I중대는 비행장을 직접 방어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뢰, 철조망, 조밀한 화망 구성으로 가장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어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였다. 동부고지에 위치한 G중대는 중국군의 공격으로 중대장이 부상당하였으나 12월 1일 새벽에 영국 코만도부대를 동부고지에 투입하여 역습을 감행 아침 9시경에는 전날의 진지를 회복하였다. 11월 28일부터 시작된 하갈우리 공격으로 양측은 미군 전사상자 315명, 중국군 전사상자 8,500여 명 가량으로 추정된다.
포위망 탈출
11월 30일
장진호 서쪽의 160Km 지점에서는 미 8군단 보병 제2 사단이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후퇴하고 있었다. 미 8군단의 퇴각과 미 해병사단의 위기로 인해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가 원자폭탄을 쓸 수 있게 허락할 수도 있다고 말하였다. 새로운 전황보고를 받은 10군단은 이날 오후 7시 30분 군단을 함흥-흥남지역으로 집결하고 제1해병사단은 먼저 하갈우리-수동간의 도로를 확보하면서 하갈우리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사단은 제5해병연대가 유담리 방어를 담당하고 제7 해병연대는 하갈우리까지의 도로를 개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해병 7연대와 5연대는 하갈우리로의 철수를 위해 병력을 재 배치하였다.
12월 1일
이날 아침, 미 해병사단은 제5해병연대 3대대를 전위부대로해서 제 5, 7 해병연대를 유담리-하갈우리 간의 도로를 경유하여 신속하게 하갈우리로 전진하도록 명령하였다. 오전 8시부터 해병 5연대 3대대를 시작으로 철수를 시작하였다.
- 전위부대
- 오전 9시에는 해병 7 연대 3대대는 도로상의 주력부대가 1542고지의 동쪽을 통과할 때까지 엄호하기 위해 1419고지, 1542고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정상을 정복하지 못하고 그 동쪽 경사면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중국군 제79사단 235연대의 4개 대대도 이날 아침부터 다음 날 새벽에 걸쳐서 1542고지의 동쪽 경사면의 제7해병연대 3대대에 대하여 공격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G와I중대의 병력은 200명 남짓으로 줄어 들었다. 중국군은 12월 1일 심야부터 새벽까지 철수 부대와 전위부대인 제5해병연대 3연대에 대해서도 맹렬한 공격을 가해 I중대의 병력이 20명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타격을 주었다.
- 측위부대
- 제5 해병연대 1대대가 북쪽을 향해 진지를 점령하고 유담리분지와 장진호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밤 9시 경부터 중국군 소수병력에 의한 침투는 밤새도록 지속되었다. 대대는 2일 정오가 지나서 진지를 철수하여 주력종대의 좌측방을 엄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제7해병연대 1대대는 영하 31도의 혹한과 적설을 뚫고 밤 9시에 1419고지로 출발했다. 이때, 1대대는 미군으로는 드물게 야간 산악행군을 감행하여 중공군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 제 1대대는 1520고지 동쪽 경사면에서 중국군 약 1개 소대를 격멸하고 12월 2일 새벽 3시 경에 재편성을 완료하였다. 부대를 정지 시키자마자 피로에 지친 병들은 그대로 눈 위에 쓰러져 추위도 적탄도 아랑곳 없이 잠을 자려고 하여 장교와 부사관들은 이들을 깨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갈우리의 야전활주로가 완성되어 부상자에 대한 후송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 페이스 특수임무부대
- 중국군은 12월 1일 자정무렵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31연대 3대대의 방어선을 돌파하였다. 오전 9시 경에 가진 연대 참모들과의 회의에서 페이스 중령은 약 30대의 트럭과 3,000여 명의 병력을 하갈우리로 철수시키기로 결심하고 제 1해병단의 근접항공지원에 맞춰 오후 1시 경에 바탕으로 하갈우리로 출발하였다. 출발과 동시에 도로 양편에 위치한 중공군은 사격을 받았고 항공지원을 한 코르세어기가 네이팜탄을 너무 빨리 터트려 아군 행렬 내에서 폭발하였다. 이로 인해 부대의 전술적 통제가 무너졌고 퇴각 도중에 밤이 되어 항공지원이 끊기자 페이스 중령을 포함한 부대원 대부분이 사살당했다. 육군이 아닌 해병 전방 항공통제관인 스탬포드 대위가 남은 병력 1000여 명을 인솔하여 하갈우리에 간신히 도착하였다.
12월 2일
새벽 6시경, 해병 7연대 1대대는 5일동안 고립되어 있던 F중대 구출을 위해 1653고지(덕동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여 F중대와 합류에 성공하였다. F중대는 5일동안 전사 26명, 실종 3명, 부상 89명의 총 118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중대 장교의 7명 중 6명이 부상을 입었고 병 전원이 동상과 설사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 후위 부대
- 해병 5연대 2대대는 1276고지를 중심으로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주력이 통과한 후에는 그 후위가 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이날 0시경부터 중국군은 1276고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해병 좌측 1개 소대가 포위되기도 했으나 전투기의 야간 근접지원으로 정오까지 중국군과 능선 쟁탈전을 되풀이하면서 차량종대의 통과를 엄호했다. 이후 대대는 코르세어 전폭기의 엄호를 받으면서 후위로 출발했다.
- 차량종대
- 도로를 통해 후퇴하는 부대는 해병포병은 3개 대대(제1, 3, 4대대)로서 합계 48문, 차량 400~500대였다. 중국군은 주요 고지를 점령한 미군과 미 항공단의 공중지원으로 도로 주변에서 소규모 공격에 주력하였다. 이날 밤에도 포병 제3대대를 공격하여 105mm포 1문과 차량 여러 대를 파괴했다.
12월 3일
전선에 눈이 내려 약 13cm의 적설량을 기록하였다. 이날 아침 해병 7연대 1대대는 덕동고개의 동쪽 고지에 위치한 중국군 1개 대대를 공격하여 오전 10시 30분 경에 진지를 점령하였다. 오후1시, 해병 5연대 3대대는 덕동고개에 도착하여 해병 7연대 1대대와 합류했다. 11월 30일부터 시작된 작전으로 전위대대는 약 56%의 병력 손실을 잃었다. 덕동고개에서 하갈우리까지는 항공지원단의 엄호를 받으며 해병 7연대 1대대를 선두로 하여 철수하였다. 저녁 8시 경에 선두부대가 하갈우리에 도착하였다.
12월 4일
맨 후위인 해병 7연대 3대대가 하갈우리진지에 도착 완료한 것은 이날 오후 2시 경이었다. 해병대가 유담리에서 하갈우리까지 약 22km를 돌파하는데 선두는 59시간, 최후미는 77시간이 소요되었다. 한 시간에 약 286m 내지 370m, 즉 1km를 전진하는데 평균 2시간 40분에서 3시간 30분이 걸린 셈이 된다. 부상자는 약 1500명(이중 약 600명은 들것에 실려야하는 중상자였다)이었는데 한명도 남기지 않고 전원 후송했으며 그 중 3분의 1은 비전투 손실로서 주로 동상환자였다. 155mm야포 9문과 골짜기에 굴러 떨어진 지프차 몇 대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장비를 철수 시킬 수 있었다. 한편, 같은 날인 12월 4일 대한민국 국군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실제 수도였던 평양에서 철수했다.
12월 5일
하갈우리에서는 1일부터 이날 밤까지 약 4,000여 명의 부상자가 일본으로 후송되었다.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은 평양-원산간의 방어선 형성이 불가능하여 이날 평양에서 철수하였다.
12월 6일
이날 오후 2시 40분 경 하갈우리 통신 중계설비가 해체되었다. 오후 6시에는 야전활주로가 폐쇄되었다. 그때까지 4,312명이 후송되었으며 시신 173구도 함께 후송되었다. 미 수송기를 통해 보급품을 지원받은 미국 1 해병사단은 차량 1,000대를 이용해 중국군 9병단의 포위망을 뚫고 하갈우리에서 고토리로 후퇴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12월 4일에 가장 마지막으로 후퇴함으로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도 평양을 수복하였다.
12월 7일
자정 무렵에 1만여 명의 병력과 1천대 이상의 차량이 하갈우리를 빠져나와 약 40시간 만에 고토리에 모두 도착하였다.
12월 9일
미 10군단은 모든 유엔군은 흥남지역으로 철수하라는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1950년 12월 10일
오전 6시, 미국 1 해병사단의 행군 행렬이 함흥에 도착하기 시작했고 12월 11일 저녁까지 최종부대가 함흥에 도착했다. 흥남에서는 14일부터 24일까지 유엔군 12만명과 피난민 10만명이 해상으로 철수하였다.
피해 및 전투 환경
-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미국 1 해병사단은 전사상자 3,637명 비전투전사상자 3,657명을 기록했고 비전투사상자 대부분은 동상환자였다. 중국군 9병단은 장진호 전투로 무력화되었는데 10월 15일부터 12월 15일까지 전사 25,000명, 부상 12,500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했다.
- 양쪽 군대 모두 절반 이상 심한 동상에 걸렸다. 당시 개마고원 장진호 일대는 고도 1000미터의 산악지형으로서, 낮기온 영하 20도, 밤기온 영하 32도였다.
- 당시의 혹독한 추위로 인해 중기관충은 반드시 부동액을 채워야 했고 경기관총은 불발을 방지하기 위해 목표가 있건 없건 주기적으로 사격을 해야 했다. M1총은 윤활유가 얼어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엷게 발라야만 했다. 공중에서 투여되는 보급품도 땅 표면에 부딪혀서 깨지는 바람에 탄약의 경우는 25% 정도만이 사용 가능한 상태였다. 차량도 일정간격으로 가동을 시켜주지 않으면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땅 표면도 두껍게 얼어있어 참호를 파거나 축성을 하는 일은 극심한 노동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동상 방지였는데 전투나 작업 후에 땀을 흘리고 나면 발과 발싸개 사이에 얇은 얼음막이 생겨 양말을 갈아신지 않을 경우 대부분 동상에 걸렸다. 부상자를 위한 수혈관이나 모르핀도 얼어버려 사용이 어려웠으며 부상자를 위한 붕대로 함부로 갈 수 없었다. 전투식량도 일일이 녹여 먹을 수 없어서 얼음조각이 있는 상태로 먹었기 때문에 전투 기간 내내 병들은 심한 장염과 설사에 시달렸다. 계속되는 전투로 침낭에 들어가 잠을 자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는데 적의 기습에 대비해서 침낭 속에 잘 때에도 지퍼를 잠그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 미 해병대는 전사한 전우의 명예를 생각해서 죽음을 무릅쓰고 부상자와 시신을 회수하는 전통이 있다. 동료 전사자의 시신을 거두기 위해 또다른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 당시 전시에 동원된 중국군 사단은 6,500명에서 8,0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포병은 미군의 공습 때문에 대부분 후방에 둔 채 투입되었다. 당시 중국 9병단의 임무는 서부전선에서 미 8군단과 대치 중인 제 13병단의 측면을 방어하는 것과 장진호 부근의 미 10군단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중국군은 11월 초 미 제1 기병사단과의 전투 이후에 미군 보병은 보급이 끊기면 전투의지가 약화되고 후방과 연결이 차단되면 후퇴하며 야간 공격에 취약하다고 분석하였다.
기타
- USS 초신 : 장진(長津)을 영어로 Chosin 이라고 부른다. 일본 발음이다. 타이콘데로가급 이지스 순양함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미 7함대 소속이다. 한국말로 하면 "장진함"이다.
- Chosin Few : 장진호 전투의 생존자 모임. 1983년에 발족되었다.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남은 몇 안되는 전우"라는 뜻이다.
- 초신 퓨(Chosin Few)가 조직한 "장진호 전투 동상 위원회"의 노력으로, 장진호 전투의 생존용사 가운데 4,000여 명이 47년 만인 1997년에, 비로소 미국 원호청의 동상 후유증 보상을 받게 되었다. 그동안 동상 후유증은 보상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 미국에서 출간된 한국전쟁에 관한 다수의 책 가운데는 반드시 장진호(Chosin Reservoir)전투가 상세하게 설명돼 있다. 심지어 장진호전투 자체에 관한 단행본만도 3권이나 된다.
-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이 전투와 미국 해병대를 칭송했다.
“ | 한국전 당시 미국 1 해병사단은 북한의 장진호 부근에서 중국군 10개 사단에 포위됐지만 적의 7개사단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둬 해병대의 위대한 전통을 세웠다. 2004년 12월 7일, 진주만 피습 63주년 기념, 미국 부시 대통령의 미국 1 해병사단 방문연설 |
흥남 철수 작전
흥남철수작전(興南撤收作戰)은 중국인민지원군이 한국 전쟁에 개입하여 전세가 불리해지자, 1950년 12월 15일에서 12월 24일까지 열흘간 동부전선의 미국군 제10군단과 대한민국 국군 제1군단을 흥남항에서 피난민과 함께 선박편으로 안전하게 철수시킨 작전이다.
유엔군 사령부는 중국인민지원군의 공세로 인해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12월 4일에 대한민국이 평양에서 철수하고, 이어 12월 6일에 조선인민군이 평양을 수복하자, 1950년 12월 8일 흥남 철수 지시를 내렸다. 12월 15일 미국 1 해병사단을 시작으로 12월 24일까지 열흘간 철수가 이뤄졌다. 장진에 머물렀던 미국 1 해병사단도 12월 24일에 마지막으로 흥남에서 철수하였다.
흥남 철수 작전에서 대한민국 국군 제1군단과 미군 제10군단의 장병 100,000명과 차량 17,000대, 피난민 약 100,000명과 350,000t의 군수품을 안전하게 동해상으로 철수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철수작전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흥남 철수 작전 마지막에 남은 상선이었다.(온양호가 가장 마지막에 흥남부두를 떠났다) 미 10군단의 민간 고문중 하나였던 현봉학 씨와 10군단의 지휘관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 그리고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의 결단에 따라 선적했던 무기를 전부 배에서 내리고 피난민 1만 4천여명을 태워 남쪽으로의 철수에 성공함으로써, 가장 많은 사람을 태우고 항해한 배로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있다. 또한, 절박한 피난길 중에 사람많아 비좁은 배에서 5명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도 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흥남철수작전기념비가 있는데, 거기에 총 10만의 목숨을 구한 6명의 영웅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장진호 전투 평가
미군의 전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장진호 전투 미 해병1사단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의 중국군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중국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흥남 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 후퇴작전이 1.4 후퇴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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