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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남의 봄 22 : 현충일의 의미 9 (6.25 전쟁, 한국전쟁 8)

 

 

 

강남의 봄 22 : 현충일의 의미 9 (6.25 전쟁, 한국전쟁 8) 

 

 

                                                                     북악 둘레길에서 바라본 성북동 전경

 

 

 

초기 전투 ~ 낙동강 전투까지 주요 전투 5

 

 

                                                            

 

 

 

포남 328고지 전투

 

 

포남 328고지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날짜 1950년 8월 14일 ~ 8월 30일
장소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읍 포남리
결과 대한민국의 승리
교전국
대한민국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
대한민국 백선엽 제1사단장 준장

대한민국 최영희 제15연대장 대령
대한민국 김진위 제1대대장 소령
대한민국 류재성 제1대대장 소령
대한민국 안광영 제2대대장 소령
대한민국 이재일 제2대대장 소령(8.20 교대)
대한민국 최병순 제3대대장 소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영호 제3사단장 소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미 상 제7연대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미 상 제8연대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미 상 보충연대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미 상 포병연대장

병력
제15연대 2,000여명 3사단 6,000여명


포남 328고지 전투는 1950년 8월 14일 부터 대구로 진입하기 위해 낙동강을 도하하는 북한군 제3사단을 한국군 제1사단이 포남리에 위치한 328고지에서 저지한 전투로서, 북한군 3사단은 328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공격하였으나 결국 막대한 손실만 입게 되었다. 이 전투로 인해 한국군은 영천방면으로 진격할 수 있었다.

 

 

                           

 

대구 정면을 향하여 주공을 지향한 북한군 제3사단은 약목면 일대에서 도하준비를 완료하고 8월 5일부터 8일 간에 걸쳐서 전차를 선두로 한국군 제1사단 15연대 정면을 공격하였다. 북한군 제3사단은 지휘소를 약목면에 두고 예하 보충, 제7연대, 제8연대와 1개 포병연대, 그리고 20여대의 전차가 지원하고 있었다. 북한군은 일시적으로 강 기슭의 몇 개 고지를 점령하였으나 폭격과 반격으로 인해 끝내 교두보를 확보하지 못하고 막대한 병력 손실만 입은 상태였다. 한국군 제1사단 15연대는 5일 부터 시작된 전투에서 미군의 지원으로 방어선을 고수하였으며 개전 이래 처음으로 3.5인치 로켓포를 장비하게 되어 적 전차 타격이 가능해졌다. 8월 13일 한국군은 육군본부의 전선정비에 의해 현 방어선에서 물러나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8월 14일 한국군 제1사단은 사령부를 다부동 남쪽 9Km지점의 동석동(현 동명리 동명초등학교)에, 15연대는 사령부 북방 약 3Km 지점의 하지동(현 가천리)에 각각 배치하였다. 14일 10:00, 한국군 제15연대는 미 제1기병사단과 좌측에 인접하고, 좌측에는 제12연대와 망정동선에서 접하였다. 제15연대는 328고지를 중심으로 우측능선에 1대대를 좌측능선에 3대대를 배치하였으며 2대대는 예비대로 다부동에서 대기하였다.

 

 

전투 경과

 

8월 14일

약목(若木)일대에서 북한군 제3사단의 증강된 1개연대 병력이 미명에 낙동강을 건너 한국군 제 15연대 진지로 공격을 감행했다. 제1대대와 제3대대는 328고지의 8부능선으로 물러나 배치하였으나 수세의 불리함과 지속적인 포격으로 인한 손실로 14:00에 이르러 남쪽의 464고지로 철수하였다. 재편성을 마친 제1대대와 제3대대는 16:00에 105mm포, 美 전폭기의 지원과 함께 반격하여 21:00에 328고지를 탈환하였다. 그러나 제3대대와 통신이 두절되었기 때문에 제15연대는 연대수색소대를 파견하여 서로 접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제2대대의 지휘소에 도착한 수색소대는 대대장의 요청에 따라 328고지의 좌측능선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밤중에 북한군의 기습으로 수색소대는 육박전을 전개하였으며 한국군은 1개분대 사상을 내었고, 북한군의 유기시체는 20구를 넘었다.

 

 

8월 15일

154고지 일대에서 병력을 재수습한 북한군은 미명에 재차 328고지로 공격을 시도하였다. 한국군은 완강한 저항으로 진지를 고수하였으나 22:00에 시작된 2개대대 규모의 전면적인 야습으로 328고지를 점령당하고 464고지로 물러났다.

 

 

8월 16일

328고지를 점령한 북한군은 진지를 보강중이었으며, 미명을 기해 보충연대의 병력이 한국군 제3대대와 좌측의 인접부대인 美 제5기병연대의 전투지경선(328고지와 303고지 사이의 개활지)으로 침투하여 한국군의 주 보급로를 차단하고자 하였다. 한국군 제3대대는 美 제5기병연대의 전차와 포병의 화력지원하에 반격하여 북한군을 격퇴하고 328고지의 제3대대 원진지를 08:30에 다시 탈환하였고, 한국군 제1대대도 09:30에 328고지를 점령하였다. 이날 美 극동공군의 B-29기 98대가 낙동강서부의 북한군 집결지로 예상되는 5.6×12km 평방지역에 전략폭격을 가하였다.

 

 

8월 17일

16일의 융단폭격으로 인해 17일은 모든 활동이 중지되었다.

 

 

8월 18일

한국군 제1, 3대대는 낙동강부근까지 진격하여 일부 잠복중이던 북한군을 섬멸하였다.

 

 

8월 19일

美 공군 전폭기의 활동과 미군 전차 포격으로 교착상태에 놓여있었다. 한국군 제1, 3대대는 강 기슭의 진지에서 북한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8월 20일

북한군은 3일간의 재정비 끝에 美 공군의 출격이 없는 것을 기화로 369고지쪽에서 2개 대대 규모의 병력으로 한국군 제1대대의 154고지 진지를 점령하고 계속 진출하였다. 한국군 제1대대는 328고지로 물러나 청계동 선에 배치된 제3대대와 협동하여 반격을 개시하였으나 북한군의 집중포격으로 희생자가 속출하여 328고지의 배사면(背斜面)으로 진지를 변환하였다. 수차례 328고지의 공방전이 지속되었으나 07:30에 美 공군의 출격이 시작되면서 19:00에 이르러 한국군의 328고지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8월 21일

한국군 제15연대는 부대정비를 위해 미명에 美 제5기병연대에게 진지를 인계하고 328고지 후방에서 재편성하여 이른 아침 재차 진지를 인수하였다. 북한군은 09:00경부터 포화력을 집중시켰고, 약 2개 대대 규모의 병력으로 328고지 공격을 시작하였으나, 20:00에 이르러 일부 병력을 남겨놓고 퇴각하였다.

 

 

8월 22일

한국군 제1,3대대는 북한군의 지속적인 기습전을 사전에 격파하고자 01:00에 포남동과 청계동선까지 은밀하게 진출하였는데 북한군이 강 건너편에서 집중사격을 하여 일시적으로 혼란되었으나 05:00에 인접한 美 기병연대의 포병화력을 지원받아 북한군의 포진지를 제압함으로써 강 기슭에 진출하였다. 아침에 美 공군 전폭기가 북한군의 포진지를 공격하였으며, 북한군은 18:00에 369고지로 모두 퇴각하였다.

 

 

8월 23일~29일

북한군 제15사단이 8월 20일 영천쪽으로 전진함으로 기간중에는 가벼운 정찰전만 되풀이 되었다.

 

 

8월 30일

한국군 제15연대는 2개 대대 병력으로 북한군 제3사단과 328고지에서 도합9차에 걸친 공방전을 전개하여 많은 손실을 보았으나 진지를 고수하였고 13:00에 진지를 美 제1기병사단에 인계하고 대구로 이동하였다.

 

 

 

결과

북한군 제3사단은 8월13일 부터 30일까지 328고지를 점령하고자 하였으나, 美 공군의 공중폭격과 한국군의 저항으로 막대한 손실만을 입게되었다. 더구나 북한군 제15사단이 영천쪽으로 전진함으로써 전선이 넓어지고 보급의 지연과 탄약의 부족으로 인해 지속적인 공격이 불가능하였다. 북한군 제3사단을 지원하던 전차도 美 공군과 한국군이 장비한 3.5인치 로켓포에 파괴되어 전차 지원 없는 전투를 하게 되었다. 반면 한국군 제1사단 15연대는 328고지를 사수하고 8월 30일부터 기동을 시작하여 17:00에 대구, 하양을 거쳐 21:00에 신덕동까지 이동을 완료하였다.

 

 

 

이화령-문경 방어전투

 

화령-문경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날짜 1950년 7월 13일 ~ 7월 17일
장소 경북 이화령, 문경 일대
결과 전략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교전국
대한민국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
대한민국 김백일 제2군단장 준장
대한민국 김종오 제6사단장 대령
대한민국 함병선 제2연대장 대령
대한민국 박노규 제1대대장 중령
대한민국 이종기 제2대대장 대위
대한민국 이운산 제3대대장 소령
대한민국 임부택 제7연대장 중령
대한민국 김용배 제1대대장 중령
대한민국 김종수 제2대대장 중령
대한민국 이남호 제3대대장 중령
대한민국 민병관 제19연대장 중령
대한민국 최병묵 제1대대장 소령
대한민국 김용기 제2대대장 소령
대한민국 김한덕 제3대대장 소령
대한민국 김성 제16포병대대장 소령
대한민국 박정변 사단공병대대장 소령
대한민국 서정학 사단교육대장 소령
대한민국 박정일 제8사단장 대령
대한민국 백선엽 제1사단장 대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무정제2군단장 소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광 제1사단장 소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석 제1연대장 대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양춘 제2연대장 대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학봉 포병연대장 대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용진 제13사단장 소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승준
제21연대장 대좌



이화령-문경 전투한국 전쟁 초중기 7월 13일부터 시작된 조령이화령의 싸움이 마침내 7월 17일에 영강선(문경 남쪽의 낙동강 지류) 방어로 매듭지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취급케 되는데 이 작전지역은 충주에서 문경에서 점촌을 거쳐서 상주에 이르는 중부의 요역으로 만일 이곳이 돌파된다면 낙동강 주변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는 요충지역인 까닭에 혈투를 벌이게 된다.

 

사단은 춘천 및 홍천 전투에서 서전을 치른 뒤에 급변하는 전황의 추이에 따라 7월 초에 충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서부전선의 군 주력이 철수함에 따른 수용진지를 확보함과 아울러 차령산맥 북쪽의 중원을 지키고자 하던 바, 육군본부에서 다시 소백산맥금강 하반으로 연한 새로운 방어선을 설정하여 통제 있는 작전을 세움으로써 이에 따라 이곳 문경으로 한걸음 물러서서 본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작전계획

이 작전을 북한군 측에서는 이른바 그들의 『제1단계 제3차 작전』이라고 하여 표방하기를 『급속한 공격과 맹렬한 추격으로 한국군 및 UN군을 대전-소백산맥 선에서 격멸하는 동시에 단시일 내에 전주-논산-대전-문경-울산선까지 진출한다.』라고 그 시행방침을 내세우고 그 시한을 7월 20일까지로 미리 정하여 채찍을 휘두른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은 곧 국군에게 재편성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고,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여 일거에 도모코자 한 작전이거니와, 당시에 육군본부에서도 이 같은 그들의 진의를 이미 간파한 나머지 대전으로 지휘본부를 이동함과 아울러 그 대응책을 논의한 끝에 작전명령 제42호로써 다음과 같이 하달하였다.

 

작전명령 제42호
『① 군은 제1군단 서측의 각 사단을 통합하여 중부지역으로 침공하는 적을 저지 격멸하려 한다.

② 제2군단장은 제8, 제6 양 사단을 통합하여 죽령-문경 간을 고수하면서 적을 진전(陣前)에서 격멸하라.
㉮ 제6사단은 11일부로 제2군단장의 지휘를 받으라.
㉯ 제8사단은 제25연대의 1개 대대를 통합한 채로 제2군단장의 지휘를 받으라.
㉰ 제25연대의 제1대대를 제8사단에 배속한다. 이하생략』

육군 본부

 

제2군단장 김일 준장이 총참모장 정일권 소장으로부터 이 명령을 받고 청주의 제1군단에 들려 전황을 청취한 다음, 관계참모를 대동하고 증평-괴산-연풍-문경을 거쳐 함창에 당도한 것은 11일 01:00이었다.

 

 

 

전투 과정

 

7월 13일

이날은 흐린 날씨에 동남풍을 동반한 가랑비가 때때로 내렸다. 따라서 해발고도 1000m 내외를 헤아리는 이 곳 주흘산(1106고지)-조령산(1107고지)-증봉(914고지: 속칭 시루봉)로 잇닿는 소백산맥 준령에는 계절답지 않게 한기가 맴도는 가운데 제2, 제19 양 연대의 병사들이 이른 아침부터 진지를 구축하고 통신망을 구성하는 등 방어진지를 강화하였다.

 

이는 사단장이 문경부근의 조령이화령에 방어진을 편성키로 결심하고 신농국민학교(수안보 남쪽 7km)에 임시 설치된 지휘소를 7월 11일 02:00에 문경국민학교로 이설하는 즉시 수안보 일대에 배치된 사단의 주력을 철수케 함으로써, 전날 7월 12일 밤에 야간 철수한 이 양연대가 일출과 더불어 병력을 조정배치하고 진지를 보강한 것이다.

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제19연대는 우일선인 조령을 맡고 제2연대는 좌일선인 이화령 지역을 담당하여 각각 책임지역내의 요선을 막아 거점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 무렵 제7연대는 제1사단과 함께 음성 동락리 전투에서 쾌승을 거둔 뒤로 괴산에서 배속이 해제되어 뒤늦게 당도함으로써 사단의 예비부대가 되어 문경에서 기동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며, 제16포병대대는 각 포대단위로 분할하여 일선 양연대의 직후방에 진지를 선정하는가 하면 공병대대도 또한 문경-연풍간의 도로요소를 폭파하는 등, 지원부대들의 활동목표도 오직 이 방어 일전에만 집약되었다.

 

이것은 지역의 중요성도 있으려니와, 사단이 춘천에서 물러선 뒤로 연대 단위로 분진하며 각각 다른 임무를 수행하다가 여기에서 비로소 서로 손잡게 된데다 좌우인접사단과 연대하면서 전선을 형성케 됨으로써 일전을 할 태세를 갖추게 되었는데, 이때에 당면의 북한군 제1사단도 또한 수안보에서 침공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은 피차간의 수색과 정찰만으로 맞섰다.

 

 

7월 14일

사단이 문경 방어에 들어간 지 이틀째 되는 이날, 당면의 북한군 제1사단은 이윽고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들은 사단의 좌일선인 제2연대 정면에 공격의 중점을 두고, 비교적 부대기동이 용이한 3번 도로를 따라 이화령을 돌파하고자 함으로써 타지역에서는 거의 교전이 없고 여기에서만이 격돌을 보게 되었다.

 

이곳 이화령은 전날 하오까지 가랑비가 오락가락 하더니 이날 새벽에는 비가 그치고, 7월 중순의 고산지대의 기상 그대로 짙은 안개가 산속을 메워 지척을 분별키 어려웠다.

 

이러한 가운데 날아든 적의 122mm 유탄포와 82mm 박격포 등의 포화가 집중하니, 연대장 함병선 대령은 드디어 적의 공격이 시작된 것으로 판단하고 각 대대로 하여금 더욱 경계를 철저히 하도록 독려하던 바, 영봉에 어둠이 걷히면서 돌연 이화령 북쪽 계곡이 수류탄의 폭음과 총성으로 가득하였다.

 

이 시각이 대체로 04:30을 전후한 무렵으로 연대는 3개 대대가 모두 전날 점령한 진지에서 대전태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연풍까지 침습한 북한군 제 1사단이 연대규모의 병력으로 농무(濃霧)를 틈타 진지 앞으로 바싹 다가선 다음 제2, 제3 양 대대의 진내로 뛰어 들어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일순간에 백병대결의 혈전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전진진지를 맡고 있는 이종기 대위가 이끄는 제2대대의 경우를 보면, 국지 경계병으로 매복시킨 나일균 일병으로부터 『3번도로 부근에서 수냉식 기관총을 끄는 소리가 난다.』는 보고를 받고 이를 확인토록 지시하였던바, 이보다 800m 더 올라온 측후방에서 홀연히 수 미상의 북한군이 올라와 수류탄 투척에 이은 총격으로 공격하였으며, 또한 여기에서 교전이 시작된 지 30분이 채 못되어 이화령 동쪽 능선을 점령하고 있는 제1대대의 3중대장 최희대 대위가 진전에 북한군의 선봉이 침습하였음을 확인하였다고 하니, 이때에 이들은 이미 주력으로 제2대대 진지의 서측을 통과하여 이화령으로 도착하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연대의 좌측 제일선을 담당한 이운산 소령이 이끄는 제3대대는 20여분 동안의 격돌 끝에 일부의 병력이 분산되어 혼선을 빚는가 하면 연대 관측소에서도 포격의 피해가 심각하였다.

 

이렇듯 제일선에서 고전을 치르고 있을 무렵 연대장이 이화령의 관측소에서 전방을 살펴보니, 운무에 쌓인 진지는 확인할 길이 없고 작열하는 총포성 만이 계곡을 메웠는데 특히 초기에 격돌한바 있는 제2, 제3 양 대대와는 교신마저 끊겨 그 정황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상태로 3시간을 지나 어느덧 08:00을 넘어서자 점차로 농무가 걷히면서 북쪽 능선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현진지를 고수하고 있었을 것으로 믿었던 제2, 제3 양대대의 병사들이 이화령쪽으로 철퇴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를 본 연대장은 고개 마루로 뛰어 올라 지휘봉을 빗겨들고 떨리는 노성으로 『일보도 물러설 수 없다. 즉각 돌아서서 반격하라.』고 하는 동시에 이화령 동측에 배치한 제1대대장 박노규 중령을 전화로 불러 『곧 역습을 단행하여 633고지를 탈환하라.』고 엄명을 내리는 즉시 자신이 직접 진두에서 이를 지휘하였다.

 

이 명령을 받은 제 1대대장이 2중대장 김인문 중위와 3중대장 최희대 대위로 하여금 3번 도로의 동쪽 능선을 따라 역습케 하니, 진지를 박차고 나선 양 중대가 함성을 높여 서쪽 능선으로 돌진하면서 계곡에 폭로된 적군을 무찔러 나갔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안개가 서서히 걷히자 고개를 오르던 병사들도 반전하여 역공대열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제3대대장 이운산 소령도 또한 북한군들이 동요하자 혼전 중에 분산된 병력을 수습코자 심혈을 기울이던 바, 시계가 트이자 제9중대장 남백봉 대위와 제11중대장 채수용 대위를 불러 역공케 하니, 이제 제1, 제3 양 대대가 운분의 일전을 전개케 되었거니와 이와 보조를 같이하여 제16포병대대도 또한 2개 포대로써 북한군의 증원을 차단키 위하여 연풍 일대에 철화를 퍼부으니 전황은 바야흐로 크게 역전되어 갔다.

 

 

7월 15일

전날 밤에 비상태세로 들어간 사단은 철야로 진지를 지키고 있는데 이날 아침에도 또한 농무가 짙게 깔렸으며, 산 허리에 매복한 병사들이 겉옷이 젖을 정도로 습도가 높았다

.

이것은 마치 전날의 무중격투를 연상케 하는 음산함이 흘러 각 연대마다 더욱 경계를 엄히 하고 있던 바, 과연 06:00을 전후하여 광파가 밀려드는데, 이번에는 산악기동으로 진지 앞까지 근접한 적이 집중적으로 조령관을 돌파코자 발악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을 담당한 제 19연대가 이를 막아 격돌을 벌이게 되었는데, 특히 이 지역은 삼림이 울창한 주흘산(1106고지)과 조령산(1017고지)이 좌우측방에 높이 솟은데다 안개가 짙게 덮이고 보니 처음부터 일대 혼전이 야기되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전날 혈투를 벌인 바 있는 이화령에서는 소규모의 교전이 있을 뿐이었으며 또한 서측방의 구왕봉 부근으로 남하한 북한군 제13사단도 측후방을 위협하는 정도에 그침으로써 사실상 이날의 전투는 제19연대와 제16포병대대의 협동작전으로 시종되었다.

 

 

7월 16일

전날 조령을 점령한 북한군 제 1사단은 이윽고 이날 06:00을 기하여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그 침공양상을 보면 조령을 점령한 부대로써 문경 정면에 계속적인 압력을 가하는 동시에 2개 연대 규모의 병력을 들어 동서 양 측방으로 우회, 침습코자 하였다.

 

즉, 그들의 예비부대로 알려진 제14연대는 이창권의 지휘 하에 사단 동측의 갈평리 계곡으로 근접하는가 하면 증원부대로 밝혀진 그들 제13사단 예하의 21연대는 이승준이 이끌고 서남쪽의 백화산으로 침습하였으며 또한 이와 아울러 조령과 이화령에서도 정면병타를 가하여 단숨에 문경을 삼키려는 듯하였다.

 

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당시에 북한군 제2군단장 김무정은 UN군이 가담하기 전에 소백산맥을 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동시에 제1사단장에게 제13사단 예하의 1개 연대를 뽑아 증원시키면서 조속히 문경을 탈취토록 엄명하였다고 하니, 이들이 중부지역의 조기진출을 얼마나 서둘렀는지 짐작하고 있다.

 

 

 

결과 및 영향

 

사단에서 본전투를 일단 매듭짓고 영강 하반으로 물러선 7월 17일 현재에 인접부대의 전황을 살펴보면 우인접인 제 8사단은 죽령에서 북한군 제8사단과 대결 끝에 이곳을 내놓고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풍기-영주 간에 요역을 확보코자 주야로 전개하고 있었으며 좌인접인 제1사단은 미원에서 북한군 제15사단의 침공을 막아 7월 13일 이후 이날에 이르기까지 방어태세를 취하고 있다.

 

따라서 이날 현재의 병력배치 상황을 표면상으로 구별할 때에는 풍기-적성리-마성(문경 남쪽 8km)은성으로 이어지는 소백산맥 남록의 진지를 아직도 견지한 것으로 여겨졌으나 사실은 오히려 서반부에서 큰 변화가 일고 있었던 것이다.

 

그 까닭은, 전투가 점차로 치열함에 따라 각 사단마다 담당 지역내의 요선을 방비하는데 치중하게 됨으로써 문경-미원간의 45km에 달하는 고산지대에 틈이 생기게 되자 이점을 노린 북한군 제2군단장 김무정이 이지역으로 2개 사단을 투입하여 그중 제13사단은 문경 서남쪽의 은성을 향하게 하고 제15사단은 당흥리(미원 동북쪽 10km)-화북-화서-상주 축선으로 돌입케 하니 이 양 사단이 어느덧 소백산맥을 넘어 현 배치선 남쪽으로 밀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포항상륙작전

 

포항 상륙 작전
(한국 전쟁의 일부)
날짜 1950년 7월 10일 ~ 7월 19일
장소 경북포항
결과 유엔군의 승리
교전국
미국 미국
영국 영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인민군 해군
지휘관
미국 포레스트 P. 셔먼 미 해군 참모총장 대장
미국 아더 W. 래드포드 미 태평양함대 사령관 대장
미국 C. 터너 조이 미 극동해군 사령관 중장
미국 아더 D. 스트러블 미 제7함대 사령관 중장
영국 패트릭 브린드 영 극동해군 사령관 대장
영국 W. G. 앤드류스 영 극동함대 사령관 소장
불명
병력
함대 66척 불명


포항 상륙 작전한국 전쟁 초중기 최초의 유엔군 상륙 작전으로 비교적 소규모의 상륙작전이었지만, 그 계획, 준비, 실시단계에 있어서 완전한 상륙작전의 표본이었으며 단시일 내에 완수한 기록적인 것이었다.

 

C. 터너 조이(C. Turner Joy)제독이 『제1기갑사단의 포항상륙작전이 없었더라면 부산 주변을 적의 수중에 넘겨주는 위험을 초래하였을 것이다』라고 술회할 정도로 부산지역의 방어 그리고 후의 인천 상륙 작전 등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작전이다.

 

 

                                    

 

 

전투 과정

6월 25일 주일미해군 제90기동부대(Task Force 90)사령관인 J. H. 돌(J. H. Doyle)소장은 예하의 상륙전대함정에 미 제24사단 35연대 병력을 요코스카(Yokosuka)항에서 탑승시켜, 사가미(Sagami) 만지가사키(Jigasaki)해안에서 상륙훈련을 실시토록 하였다.

 

그런데 이보다 먼저 미 제8군에 대한 상륙훈련은 5월부터 실시되고 있었으며, 상륙작전의 능력이 크게 배양되어 가고 있었다. 따라서 이 상륙훈련이 전쟁기간중에 실시하였던 포항, 인천, 원산 등의 상륙작전에서 매우 효과적인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7월 5일 일본의 기지로부터 공수된 미 제24사단 병력은 단 700명 뿐이었고 지상전황은 아군에게 불리하기만 하였다. 더글라스 맥아더(MacArthur) 원수는 당시의 불리한 상황을 지적하되 『당면한 긴급문제는 한반도 전 지역에서 남진중인 적지상군의 진로를 하단하는 것이다. T-34 전차의 지원을 받은 북한군 지상군은 도합 9개 사단으로 추정한다. 현재 우리가 어떠한 조치를 가하여도 승리에 도취한 북한군들의 기세를 꺾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맥아더 원수는 7월 6일에 돌 소장과 그의 참모 7명을 동경으로 소집하여 제1기갑사단으로 하여금 상륙돌격작전을 계획토록 지시하였다.

 

또한 인천이나 군산에 대한 사단의 상륙작전도 아울러 계획토록 하였다. 이 상륙작전회의는 7월 9일까지 계속되었는데 돌 제독의 작전계획담당관인 노엘(Noel) 소령은 인천을 상륙목표지점으로 꼽고 있었다.

 

그러나 대전지구의 전황이 급격히 악화되었으므로 부산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하여서는 동해안에서의 상륙작전이 필요하였으며, 돌 제독은 포항을 가능한 목표지역으로 제시하였다. 이 제의는 7월 10일에 맥아더 원수의 승낙을 얻었다.

 

포항에는 사용가능한 비행장과 상륙이 용이한 1,000야드 이상의 해안이 있었으며, 대구를 거쳐 대전으로 이어진 철로도 사용가능함으로 상륙군을 신속히 전선으로 투입할 수 있었다.

 

또한 동항은 해군함정의 동해안 함포사격에 힘입어 아직 전선으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7월 10일, 포항이 상륙지로 결정되자 이날 LST로 포항에 도착한 제5공군 항공기술자들은 활주로를 확장 보수하기 시작하였다. 7월 11일에는 상륙작전에 필요한 해안정보를 수집하려고 해군장교 3명과 제 1기갑사단의 정보장교 2명이 포항으로 공중 정찰하였다.

 

이들은 해안의 수심상태, 하역시설 및 포항의 전반적인 기능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여 7월 13일 일본 도쿄로 돌아갔다. 도쿄 만을 출발한 선발 수송선단의 도착을 앞두고 7월 14일부터 7척의 소해정(YMS)이 포항 영일만의 소해작업을 시작하였으며, LST와 LSU로 구성된 기동전개 90.3(인양전대)는 상륙작전에 필요한 장비를 탑재하고 한국해역으로 향하였다.

 

7월 15일에는 안전한 행정상륙을 실시할 수 있는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하여 마지막 정찰비행을 하였다. 이 정찰비행으로 포항상륙은 무저항 행정상륙이 가능하리라고 확신되었다.

 

한편, 중부전선에서 열세에 놓여있던 한·미지상군은 대전근교 진지를 구축하였으나, 122mm 야포와 T-34전차의 지원을 받는 북한군 4개 사단이 금강을 도하하여 미 제24사단을 공격하였으며 사방으로부터 대전을 사면 포위할 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같은 전황은 기동력을 갖춘 지상군의 상륙을 더욱 촉구하였다. 그런데 제 1기갑사단을 짧은 시일 내에 한국전선으로 투입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의 난점이 없지 않았다. 첫째, 상륙돌격함정(AKA)의 부족이었는데, 이를 보충하기 위하여 군수물자 수송기관(MSTS: Military Sea Transport Service)소속의 AKA 함을 요코스카 항으로 급거 회항시켜 상륙작전에 필요한 제반장비를 보수하였다. 이외에도 부족한 LST 6척과 AKA운송함 4척을 추가로 확보하였다.

 

그리고 상륙군은 21척의 LST에 분승하고 무기 및 장비도 AKA와 LST에 적재하였다. 제반 준비를 마친 포항상륙부대는 15일에 도쿄의 요코스카항을 출항하였다.

 

도쿄만을 출발한 포항상륙부대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해군의 전함 야마토(Yamato)가 마지막으로 통과한 풍후 해협을 지나 한국해역으로 들어섰다.

 

이때, 필리핀 북쪽 해상에서 북상중인 태풍 그레이스(Grace)호는 아직 한국해역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함대가 포항을 향하여 항진하는 동안 운송함에 타전되는 전선 상황은 포항 북쪽인 영덕에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고 있으며 국군 제3사단은 미 제1기갑사단이 상륙할 때까지 동지역을 방어할 수 있을 것인지의 여부를 크게 의심케 하였다.

 

한편, 7월 14일 ~ 7월 17일 사이에 포항근해와 항내의 소해작업을 실시한 YMS는 기뢰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음을 타전하였다.

 

7월 18일 05.00 상륙함대는 드디어 포항해역에 도착하였다, 전선은 아직도 포항 북쪽에 머물고는 있었으나 북한군 제5사단은 12사단과 합세하여 공격을 강화하였다. 이날 05.58 마침내 돌 제독은 상륙개시를 명령하였다.

 

이 명령과 함께 기병사단의 중장비가 먼저 양륙되었으며, 07.15부터 상륙병력이 상륙단정(LCM)으로 해안에 집결하였다. 09.30부터는 군수물자의 하역을 시작하였으며, 2,000대의 차량류를 양륙하였다.

 

이처럼 제반장비와 상륙병력은 신속히 양륙되었다. 한편, 7월 18일 ~ 7월 19일의 상륙기간중에도 동해의 경비 함정들은 포항근해를 호위하였으며, 제77기동함대의 함재기들은 원산, 흥남, 평강 등을 공습하였다.

 

제 1기갑사단이 포항에 상륙하자, 미 제 8군사령관 월턴 워커(W. H. Walker)중장은 대기중인 운송열차및 차량에 그들을 탑승시켰다. 7월 19일, 허버트 R. 게이(H. Gay)소장은 상륙군의 작전 지휘권을 인수하였으며, 이날 18:00에는 일부병력을 해안 방어작전에 투입하였다.

 

상륙군은 사기가 왕성한 가운데, 전선으로 계속 투입되었는데, 포항상륙 4일 만인 22일에는 영동지구에서 24사단과 방어임무를 교대하였다. 이날 영일만에는 시속 50Knots의 태풍 그레이스(Grace)가 도착했는데 이로 인하여 21일 도착하기로 한 MSTS소속의 운송선단들은 7월 23일에야 포항에 도착하였다.

 

 

 

 

함창전투

 

함창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날짜 1950년 7월 26일 ~ 7월 29일
장소 경북 상주시 함창군 일대
결과 전략상 대한민국의 승리
교전국
대한민국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
대한민국 유재흥 제2군단장 준장
대한민국 백선엽 제1사단장 준장
대한민국 김종오 제6사단장 준장
대한민국 박기병 제12연대장 대령
대한민국 김동빈 제11연대장 중령
대한민국 김재명 제1대대장 소령
대한민국 이두황 제2대대장 소령
대한민국 정영홍 제3대대장 소령
대한민국 신현홍† 제1대대장 소령
대한민국 한순화 제1대대장 소령 (7월 28일부터)
대한민국 조성래 제2대대장 소령
대한민국 이무종 제3대대장 소령
대한민국 최영희 제13연대장 대령
대한민국 김진위 제1대대장 소령
대한민국 안광영 제2대대장 소령
대한민국 최병순 제3대대장 소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광 제1사단장 소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석 제1연대장 대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양춘 제2연대장 대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창권 제3연대장 중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학봉 포병연대장 대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용진 제13사단장 소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병천 제19연대장 대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승준 제21연대장 대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태병열 제23연대장 대좌
병력
7133명 불명


함창 전투한국 전쟁 초중기 백선엽 준장이 이끄는 제1사단이 유재흥 준장이 이끄는 제2군단의 일부로서 7월 26일 ~ 7월 31일까지 경북 상주시 함창군에서 최광 소장이 이끄는 북한군 제1사단 및 최용진 소장이 이끄는 제13사단을 물리쳐, 김종오 대령이 이끄는 제6사단의 지연전을 용이하게 하는 한편, 월턴 워커 중장이 이끄는 미 제8군의 낙동강선 방어진지 형성을 유리하게 한 전투이다.

 

 

                                     

 

 

제1사단은 전투에 임하기에 앞서 육본작명 7월 20일 제57호에 의거 광원에서 안동으로 전진 중 화령장에서 김희준 중령이 이끄는 제17연대로부터 진지를 인수하고, 박성철 소장이 이끄는 북한군 제15사단과 대전케 되었는데, 다시 7월 24일 육본작명 제67호를 받고 7월 25일 동 작전지역을 미 제25사단 예하의 허튼 V. 화이트(Horton V. White) 대령이 이끄는 제24연대에 인계함과 동시에 상주를 경유해 함창으로 급거하여 제6사단을 동원하였다.

 

제1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7월 25일 06:00에 백령장 방어 임무를 미 제25사단 예하의 허트 V. 화이트(Horton V. White) 대령이 이끄는 제24연대에게 인계하고 함창으로 이동 중 상주에서 국방장관 신성모와 총참모장 정일권 소장으로부터 준장으로 승진발령장을 받음과 동시에 준장 계급장이 수여되었다.

 

그리하여 제1사단은 12:00 함창군에 도착하였는데, 국일명 육본 제20호에 의하여 통합키로 된 김동빈 중령이 이끄는 제5연대와 박기병 대령이 이끄는 제20연대를 동 지역에서 만나고, 당일로 제5연대를 제11연대에, 제20연대를 제12연대에 각각 통합 재편케 하여 유재흥 준장이 이끄는 제2군단의 우익으로서 김종오 대령이 이끄는 제6사단의 전면을 위협하는 북한군의 전면을 위협하는 적의 후방차단 임무를 수행케 되었다.

 

제1사단은 이를 위하여 제11연대를 금룡리(함창 동북쪽 4km)로 제12연대를 막곡리(금룡리 북쪽 4km)로 각각 이동시켜 공격 준비를 서둘게 하였는데, 이때 최영희 대령이 이끄는 제13연대는 제5연대가 제 11연대와 통합하기에 앞서 배치되었던 검안리(함창 서쪽 5km)에 전개 시켜 군단의 서측방 방어 임무를 수행케 하였던 것이다.

 

7월 27일 06:00 동 사단은 제11연대를 우일선, 제12연대를 좌일선으로 하여 영강 동측방대에서 문경 탈환을 목적으로 공격하여 제11연대는 부운령(692고지-금룡리 북쪽 12km)을 거쳐 11:00에 외어리(부운령 서쪽 4km)에 이르고, 제12연대는 오정산(870고지-막곡리 북서쪽 5km)을 거쳐 10:00에 오천리(810 고지 북서서쪽 1km) 에 이르렀으나, 이때부터 북한군의 집중 포화를 받게 되어 각 연대의 진출이 막히고 말았다.

 

이 무렵 제6사단은 이희권 중령이 이끄는 제1연대와 105mm M-2 곡사포로 장비된 박영식 소령이 이끄는 제3포병대대의 부원으로 북한군을 오봉(함창 북서쪽 8km)과 작악산(함창 서북쪽 9km) 산에서 조지하고 있었으며 미 제25사단 예하의 155mm 및 105mm(M-2) 포병 대대들도 점촌-함창 간에 포진하여 제 6사단 정면을 지원하고, UN공군도 간단없는 폭격을 가하여 북한군의 기동에 제동을 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까닭에 북한군은 정면 돌파을 시도하는 외에 일부 병력으로써 국군의 후방교란을 기도하게 되었던 것으로 판단되었는데, 그 조짐으로써 이날 일모 경에 왕릉리(문경 남서쪽 13km)-농암리(왕릉 남서쪽 7km)에서 피난민들이 제13연대 진전으로 쇄도하는 것을 보아서도 능히 헤아릴 수 있었다.

 

이러한 북한군의 움직임을 간파한 제1군단장 유재호 준장은 군단 서측방에 대한 방어태세가 허술함을 확인하고 이 정면의 보강을 결심하기에 이르렀으며, 비교적 북한군과의 접촉이 경미한 군단 우 익의 제 1사단을 좌익으로 전환키로 하고, 23:00에 동 사단에 명령하여 이를 시행케 하였다.

 

이때에 제1사단의 병력은 제5, 제20연대의 통합으로 7133명에 달하였으며, 공석중인 지휘관도 충당되어 지휘체제의 확립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보급지원 체제도 점차 정상화 되어 M-1 소총을 비롯한 각종 장비의 보충보급도 이루어져서 어느 때보다 사기가 왕성하였다.

 

 

작전계획

제1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군단장 유재흥 준장으로부터 『귀 사단은 문경 공격을 중단하고 함창으로 철수하여 군단 서측방 방호 임무를 수행하라.』는 명을 수령받았다.

 

그러나 이때 좌1선의 제12연대가 신현리(810고지 서쪽 2.5km)-295고지(신현리 남쪽 1.5km) 일대에서 북한군 후속 부대를 견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장에 철수시키기는 곤란할 것으로 보고 제6사단장 김종오 대령과 협의 하에 동 연대를 해 지역에 계속 잔치시켜 동 사단의 작전 통제하에 들게 하는 대신, 동 사단 제19연대의 1개 대대를 배속 받기로 하여 군단장의 승인을 받게 되었다.

 

 

 

전투 과정

 

 

7월 28일

제1사단이 군단의 좌익으로서 군단의 서측방을 방어케 된 것은 이날 06:00부터이나, 제13연대가 함창에 도착하는 즉시로 이 지역을 제5연대로부터 인수하여 예하 대대를 전개 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생소한 곳이 아니었으며 이 방면이 적정 또한 동 연대로부터 보고 받고 있었다.

 

사단 정보 참모 최혁기 소령이 지금까지 알려진 적정을 사단장에게 보고한 내용에, 『적은 아 후방지대의 교란을 목적으로 지난 밤 부터 장갑차를 동반한 연대규모의 병력을 977번 도로를 따라 침투시켰으며, 이들이 주막동(함창 서쪽 15km)에 이르러서 1대를 992번 도로를 따라 함창 서쪽 8km 쪽으로 직행케 하고, 다음 1대로서는 무명도로를 따라 동막리(함창 남서쪽 7km)쪽으로 침습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최혁기 소령은 북한군이 이와 같은 우회기동을 하게 된 까닭을 『아군의 저항이 완강하였던 까닭에 정면 돌관이 어려울 것으로 보았을 것이고, 또한 이 무렵 함창 서측에 전개 되었던 미 제25사단 예하의 부대들이 타처로 전진하고 이 지역의 아군배치가 희박한 것을 알아차린 때문일 것이다.』라고 풀이하면서, 그들이 곧 진전에 도달할 거리에 있음을 강조하고 제11연대의 진지 점령을 촉구하였다.

 

제13연대장 최영희 대령은 함창에 도착한 7월 26일 15:00에 제5연대장 김동빈 중령으로부터 진지를 인수하여 992번 국도를 중심으로 김진위 소령이 이끄는 제1대대를 366고지(함창 서쪽 6km)에, 안광영 소령이 이끄는 제2대대를 212고지(366고지 남쪽 2km)에 각각 전개하고 최병순 소령이 이끄는 제3대대를 구릉리(함창 서쪽 3km)에 공치시켜 예비로 하였는데, 7월 27일 석양에 왕릉리(함창 북서쪽 12km)와 가은리(왕릉리 남쪽 1km) 부근의 주민이 진전으로 몰려와서 말하기를 『북한군이 우리 마을에 집결하고 있는데, 그들은 이날 밤으로 이 도로를 따라 남침할 것으로 보인다.』고 북한군의 동정을 제보한데 이어서, 진전에서 정찰활동을 하고 있던 연대 정찰대로부터 『22:00에 장갑차를 동반한 1개 연대 규모의 북한군이 주막동(함창 서쪽 12km)에서 두 대로 나누어 한 대는 992번 도로를 따라 오천리 쪽으로, 다른 한 대는 주막동에서 무명도로를 따라 동진하고 있다.』고 보고 하였는데, 이 무명도로는 주막동-동막리(함창 남서쪽 7km)를 거쳐 3번 도로에 접속되어 함창이나 상주로 갈 수 있는 도로이다.

 

제13연대장 최영희 대령이 제 5연대장 김동빈 중령으로부터 진지를 인수할 때 지형을 살펴 본 바, 992번 도로 북쪽 336고지이고 그 남쪽은 212고지이나, 212고지 서측에 폭 500m 길이 2km의 경돌 저수지(일명, 아천 저수지)가 북-남으로 가로지르고, 동 저수지의 남쪽 수문에 잇달아 있는 이안천은 수폭 50~80m, 수심 150cm로서 동막리에서 4km를 북류하여 동 저수지의 수문이 있는 부위에서 동류하여 낙동강으로 주입하고 있어서 아천리-동막리문의 6km는 천연의 요새와도 같았기 때문에 992번 도로의 사수에만 중점을 둔 배치를 하였다.

 

그런데 정찰대로부터 『적이 주막동에서 2대로 분진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즉시로 제3대대를 국사봉으로 급거케 하여 중촌리(국사봉 서쪽 2km)-동막리문의 도하지점을 봉쇄케 하고 동시에 제1, 2대대에 대하여도 북한군의 침습 상황을 통보하여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7월 29일

3번 국도와 조봉(새봉)에 주력을 집중시키던 북한군이 국군의 집중적인 포화로 인하여 정면 돌파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였음인지, 전날 제13사단 21연대가 군단 서측방에서 침습을 시도한데 이어서 같은 날 석양 때부터는 제1사단 예하의 황석 대좌가 이끄는 제1연대과 김양춘 대좌가 이끄는 제2연대가 북한군의 서측 전선인 제1사단 정면에서 발견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북한군의 작전계획상에 변화가 일고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였다.

 

이에 대비하여 제1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지난 밤 제6사단에서 복귀한 제12연대를 제13연대와 11연대의 공동 지역인 992번 도로와 이안천문에 전개 시켜 이 정면의 방어태세를 강화케 하였다.

 

제13연대는 전날 992번 도로를 따라 침습을 기도한 북한군 제 13사단 예하의 이승준 대좌가 이끄는 제21연대를 물리치고, 제1대대를 428고지(366고지 북쪽 2km)로, 제2대대를 366고지(일명 덥재산)로 각각 추진시켜 진지를 편성케 하는 한편, 제11연대에 배속시킨 바 있는 제3대대를 181고지(366고지 동쪽 2km)로 이동시켜 적습에 대비케 하였는데, 이때까지 3번 도로상에 주축을 두고 제6사단 정면으로 침습한 최광 소장이 이끄는 북한군 제1사단 예하의 제 1연대와 제 2연대가 760고지(428고지 서쪽 3km)와 장암리(366고지 서쪽 5km)쪽으로 우회하여 궤주한 제 21연대의 패잔병과 합세하고 지난 밤 한차례 야습을 자행 한데 이어 이날 여명을 기하여 또 한 차례 연대 전면을 엄습하였다.

 

제12연대는 전날 제6사단의 작전통제에서 해제 되어 같은 날 23:00 소암리로 철수하여 부대 정비를 하게 되었는데, 이날 04:00 사단장 백선엽 준장의 긴급 명령에 따라 경돌 저수지 동측지대를 점령케 되었다.

 

이에 따라 연대장 박기병 대령은 7월 27일 원동 부근의 영강 도하 작전시 손실이 컸던 제1대대를 집결지에 잔치시켜 부연대장 김묵곤 중령의 관장 하에 재편케 하고, 조성래 소령이 이끄는 제2대대와 이무중 소령이 이끄는 제3대대를 경돌 저수지 동측으로 전진시켜, 제2대대는 212고지의 북쪽에, 제3대대를 그 남쪽에 각각 전개케 하였는데, 이때 제13연대는 북한군 제1사단 예하의 제2연대와 총격과 포격을 교환하고 있었다.

 

동 연대 작전지역의 정면에는 경돌 저수지가 가로 놓여 있고, 992번 도로의 북 쪽은 제13연대가 그리고 이안천 남쪽은 제 11연대가 각각 전개하고 있어서 북한군이 침습하기 곤란한 곳이기는 하나, 992번 도로 및 212고지의 남단부와 접속된 경돌 저수지의 수문부분을 보강하기 위 한 조처로서 동 연대가 이 지역으로 급거케 된 것이다.

 

그런데 제 13연대가 북한군의 여명 침공을 잘 막았기 때문에 적영을 볼 수 없게 되었으나, 연대장 박기병 대령은 그들의 일부는 992번 도로의 남쪽 숲속에 은신하여 흩어진 병원을 수습하면서 재기를 도모하고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제2, 3 대대장에게 『1개 중대씩 진전으로 추진시켜 경계 진지를 설치케 하고 아울러 적정을 탐색보고 하라.』고 명령하였다.

 

 

결과 및 영향

제1사단은 함창군에서 제2군단의 우익으로서 군단 후방지역으로 침습하려는 북한군 제13 및 1사단을 차례로 물리치고 전세를 호전케 하였으나, 이무렵 전반적인 전세는 국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은 낙동강선의 최후의 보루로써 결전할 것을 결의하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공세이동을 위한 시간을 얻기 위하여, 그의 작전통제하에 있는 한미양군을 8월 1일을 기하여 현 저지선에서 철수시켜 낙동강선상에 새로운 방어진지를 점령케 하였던 것이다.

 

위와 같은 조치에 따라 제1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7월 31일 우인접한 제6사단의 철수를 엄호하는 일방 같은 날 적과의 접촉이 경미한 제12연대로 하여금 사단의 도하지점과 도하 장비를 확보하도록 낙동리(상주 동쪽 13km)로 선발시키고, 주력은 8월 1일 야음을 이용 함창을 철수케 하였는데, 상주 부근에서 미 제25사단 예하 부대로부터 한 차례의 신문이 있었을 뿐 8월 3일 낙동강을 도하완료 할 때까지 적으로부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다.

 

그리하여 동 사단은 제2군단의 좌익으로서 낙정리(상주 남동쪽 15km)-왜관문 북-남으로 제12, 11, 13연대순으로 전개 시키고, 동 사단의 우측은 제6사단이, 좌측은 미 제1기갑 사단이 각각 인접하게 되어 개전이후 처음으로 협조 된 방어진지를 편성케 되었다.

 

 

 

 

상주전투

 

 

상주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미국 24연대의 화포 지원.
미국 24연대의 화포 지원.
날짜 1950년 7월 22일 ~ 7월 31일
장소 경북 상주
결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교전국
미국 미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
미국 윌리엄 B. 킨 미 제25사단장 소장
미국 허튼 V. 화이트 제24연대장 대령
미국 제1대대장 불명
미국 조지 R. 콜 제2대대장 중령
미국 존 T. 콜리 제3대대장 중령
미국 존 M. 마이클리스 제27연대장 중령
미국 길버트 J. 체크 제1대대장 중령
미국 고든 E. 머치 제2대대장 소령
미국 헨리 G. 피셔 제35연대장 대령
미국 버나드 G. 티터 제1대대장 중령
미국 존 L. 윌킨스 제2대대장 중령
미국 허버트 R. 게이 제1기갑사단장 소장
미국 마르셀 B. 크롬베즈 제5기갑연대장 대령
미국 제1대대장 불명
미국 존 클리포드 제2대대장 중령
미국 세실 W. 니스트 제7기갑연대장 대령
미국 피터 D. 클레이노스 제1대대장 중령
미국 오마 T. 히치너 제2대대장 중령
미국 레이먼드 D. 팔머 제8기갑연대장 대령
미국 로버트 W. 케인 제1대대장 중령
미국 유진 J. 필드 제2대대장 중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광 제1사단장 소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용진 제13사단장 소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박성철 제15사단장 소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현 제2사단장 소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영호 제3사단장 소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유경수 제105전차사단장 소장
병력
제8포병대대
제64포병대대
제159포병대대
제90포병대대 A포대
제79전차대대 A중대
제72전투공병대대
제61포병대대
제77포병대대
제82포병대대
제99포병대대
제92공포대대 A포대
제71전차대대 A중대
제8전투공병대대
피해 규모
27명 전사
293명 부상
3명 실종
약 5000명 사상


상주 전투한국 전쟁 초중기 미 제25사단이 상주를 중심으로 중부지역의 국군을 지원하고, 미 제1기갑사단은 경부국도상의 미 제24사단을 지원키로 결정됨에 따라, 이들 양 사단이 낙동강선을 기저로 한 상주와 영동-김천의 축선에서 제8군의 계획에 따라 지연전을 함께 벌인 전투이다.

 

 

                                    

 

 

전투 과정

미 24사단에 이어 전선에 투입된 미군 사단은 25사단이었다. 예하에 24·27·35연대를 가지고 있던 미 25사단은 7월 12일 부산에 상륙하였다.

 

7월 13일부터 한국에서 유엔군의 작전을 지휘하게 된 8군사령부는 25사단에게 1개 대대로써 포항비행장을 경비하고 나머지 병력으로는 중부전선에서 적의 전진을 막고 있던 한국군을 지원하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이 명령에 근거하여 윌리엄 B. 킨(William B. Kean) 소장이 이끄는 제25사단은 27연대를 안동으로 추진시키고(후에 보은~황간 축선에 투입), 35연대의 1대 대대를 뽑아 포항비행장 경비임무를 맡기고(후에 27연대 증원임무수행), 24연대는 전투단을 편성하여 국군 6·8사단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리고 사단장은 지휘소를 영천에 이어 상주에 두고 독자적인 방어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당시 제25사단을 지휘하고 있던 킨 소장은 53세의 노장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1918년 11월 1일 1년 4개월 만에 미국 육사(West Point)를 떠나 임관한 “생도장교”중의 하나였다. 이들은 다시 1919년 6월에 육사를 다시 졸업하여 2년 동안만 생도생활을 한 장교들이 되었다.

 

졸업서열이 낮은 킨 소장은 미국 육군지휘참모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행운을 가졌다. 그의 경력상 전망은 그렇게 밝지 못했다. 그러나 1939년 육군성 인사참모부에서 오마르 브래들리(Omar Bradley) 장군과 근무할 기회를 가졌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브래들리 장군이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의 참모장으로 킨 준장을 계속 보직하여 킨 장군은 1군사령부의 참모장이 되었다.

 

브래들리 장군이 12집단군 사령관이 된 후에도 1군 참모장으로 남게 되어 1군이 태평양지역 작전에 참전하게 됨에 따라 킨 장군은 태평양지역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48년 9월 당시 참모총장까지 오른 브래들리 장군은 킨 준장을 25사단장에 임명하여 별을 하나 더 달아주었는데 그리하여 25사단은 역전노장인 사단장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단의 전력은 그렇게 강한 편이 되지 못했다. 7월 10일 부산에 도착한 미하 엘리스 대령의 27연대는 비교적 건전한 지휘관들과 능력 있는 병사들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연대장은 2차 대전 후 동양인들이 싸우는 전술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했으며, 능력있는 연대장으로서 7월 8일 먼저 한국전선에 킨 사단장과 같이 와서 현지 정찰을 할 정도로 사단의 중추적 지휘관이었다.

 

킨 소장은 특히 병사들을 모아놓고, 옛날 패튼 장군과 같이 “귀관들은 이곳에 죽으러 온 것이 아니고 죽이러 왔다는 사실을 명심하라(Remember, you're here to kill and not to be killed.)'고 기염을 토할 정도의 열정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흑인병사와 백인장교들로 구성된 24연대는 전투력 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했다.

 

흑인병사들은 한국의 혹서와 습기, 비위생적인 환경, 험준한 산악지형을 일단 싫어했고, 이들을 지휘하는 지휘관들 역시 부연대장 폴 F. 로버츠(Paul F. Roberts) 중령을 제외하고는 한국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것 자체를 싫어하고 있었다. 35연대장 헨리 G. 피셔(Henry G. Fisher) 대령은 전문 직업군인으로서 다른 지휘관과 전혀 손색이 없었지만 그가 지휘하는 병사들 역시 평화시 점령군 임무에 익숙한 상태에 있었다. 그리하여 25사단의 전력은 전체적으로 강한 편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수행해야 할 역할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중부전선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있는 국군 후방의 제2선에서 대기중이던 25사단은 7월 18일 1기병사단이 포항에 상륙하자, 8군이 1기병사단을 경부본도의 24사단을 대신하도록 조치함에 따라, 상주 정면의 한국군의 지원임무에 전념하게 되었다.

 

사실 월턴 워커 8군사령관은 25사단이 먼저 한국전선에 도착되었으나, 이 사단의 전투력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보다 늦게 포항에 상륙한 1기병사단으로 하여금 경부본도를 맡겼던 것이다. 그리하여 25사단 예하 각 연대는 7월 22일경부터 전선에 본격적으로 투입되었다.

 

1개 대대를 포항비행장 경비로 남겨둔 35연대는 2대대를 함창으로 추진하여 국군 6사단을 지원하도록 했다. 2대대는 주력을 영강 남안에 배치하고, 1개 중대(F중대)를 뽑아 강 북안으로 추진시켜 6사단 진지에 투입하였다. 그러나 이 중대는 북한군의 포위망에 걸려 전사 6명, 부상 10명, 실종 21명의 막대한 손실만 보고 강 남안으로 철수하였다. 이에 대대는 상주 북쪽 8km 지점을 점령하여 상주~함창간의 주보급로 확보임무를 맡게 되었다.

 

7기병연대의 병력에게 포항비행장 경비임무를 넘기고 연대로 복귀한 1대대는 황간지역에서 싸우고 있던 27연대를 증원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7월 29일 연대는 상주 북쪽 3km 지점으로 철수하였다가, 7월 30일에는 상주 남쪽고지로, 그리고 7월 31일에는 27연대를 증원하던 1대대와 합류하여 김천 북방 15km 지점인 옥산동에 새로운 진지를 점령하여 상주에서 김천에 이르는 도로와 선산을 잇는 분기점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북한군의 남진을 막을 기약은 없는 형편이었다.

 

한편 24연대 2대대는 상주 서쪽으로 괴산에 이르는 도로를 지키는 임무를 맡아서 화령장(상주 서쪽 20km 부근)에서 박성철 소장이 이끄는 북한군 15사단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힌 바 있는 국군 17연대의 진지를 인수하려 했다. 그러나 대대의 선두에 섰던 E중대가 불시에 적의 사격을 받아 흩어지자 본대 역시 분산되었다.

 

이에 놀란 24연대장 허튼 V. 화이트 대령이 이 직접 현장(평온리 : 상주 서쪽24km 지점)에 나가 병력을 수습하였다. 7월 25일 24연대는 1·2·3대대를 투입하여 화령장에서 상주에 이르는 도로를 따라 진격해 오는 북한군을 맞아 지연전을 벌였으나, 선두 2대대가 패한 후로 전 장병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3대대 L중대는 장교 4명, 부사관 105명이 진지를 점령했으나, 이틀 후까지 진지를 지킨 병력은 장교 1명과 부사관 17명뿐이고, 장교 3명과 부사관 88명은 진지를 무단이탈한 상태였다. 따라서 상주 서쪽 800m지점에 설치한 낙오자 수용소에는 하루 평균 75명의 진지 이탈병을 수습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연대는 대체로 낮에는 고지를 지키다가 밤이면 후방진지로 철수하여 포격으로 적의 전진을 견제하는 식의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연대의 전투손실을 그렇게 대단한 편은 아니었다. 7월 22일 ~ 7월 30일까지의 기간 중 24연대는 전사 27명, 부상 293명, 실종 3명의 손실을 입은 반면 국군의 포탄과 폭탄세례를 받은 북한군 15사단은 약 5,000명의 손실을 보았을 것으로 추정됐다. 연대는 7월 31일 상주를 거쳐 철수했다.

 

7월 25일 영동이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25사단이나 국군의 방어능력 역시 한계가 드러나자, 7월 26일 8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낙동강선에서의 방어작전을 구상하고 철수계획을 세우는 한편, 8군사령부도 대구에서 부산으로 옮기려 했다. 도쿄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이러한 건의를 받자, 7월 27일 10:00시 대구의 군사령부를 방문했다.

90분간의 회담에는 맥아더 장군, 워커 장군, 그리고 유엔군 사령부 겸 극동군 사령부의 참모장 에드워드 M. 알몬드(Edward M. Almond) 장군 등 셋만이 참석했다. 맥아더 장군은 워커 장군의 건의에 대해서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를 책망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한국에서의 덩커크는 없다고 강조하고, 미 24사단과 한국군수도사단을 칭찬했다. 그러고는 다시 바삐 왔다갔다하는 주위 사람들과는 극히 대조적으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느린 걸음으로 8군사령부를 떠났다. 역시 그는 한국전선에서 또 하나의 극적인 순간을 연출해 냈다.

 

그로부터 이틀 후 7월 29일, 25사단 사령부가 자리 잡고 있는 상주에는 워커 장군이 나타나 이렇게 소리쳤다.

이틀 전에 맥아더 장군이 여기에 왔었다. 그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우리의 요구를 알고 있으며, 적이 어디를 죽어라 하고 치고 있는가를 알고 있다. 맥아더 장군은 증원군을 보내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강구하고 있다. 해병부대와 2개의 연대가 우리를 증원하기 위해서 수일 내에 도착될 것으로 기대된다. 추가적인 부대도 가능한 빨리 보내어질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벌기 위해 싸우고 있다. 더 이상 철수이건, 후퇴이건, 전선의 조정이건, 또 귀관들이 택한 어떠한 용어도 없다. 우리 뒤에 우리가 물러설 어떠한 선도 없다. 모든 부대는 역습을 반드시 실시하여 적의 허를 찔러 적을 혼란에 빠지게 해야 한다. 덩커크(Dunkirk)나 바탄(Bataan)은 있을 수 없다. 부산으로의 철수는 역사상 가장 참혹한 살육을 의미한다. 우리는 끝까지 싸워야 한다. 적들에게 포로가 되는 것은 죽느니만 못하다. 우리는 하나의 팀으로 싸워야 한다. 우리 중에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우리는 싸우다 같이 죽어야 한다. 진지를 포기하는 사람은 수천의 동료를 죽게 했다는 것에 대한 인간적인 책임을 져야 할는지 모른다. 나는 이 점을 사단의 전장병에게 알리기를 바란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우리가 이 선을 지켜야 할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우리는 이길 것이다.


워커 장군은 이와 같은 조의 훈령을 다른 사단에도 하달하면서, 한국 전쟁에서의 최초의 방어선이자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 방어선으로의 철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국군은 북한군이 호남을 돌아 진주~마산으로 진격하여 부산으로 향하고 있는 시점에서 전선의 축소조정이 없이는 방어선을 방어선답게 유지할 수 없었다.

 

"고수냐 아니면 죽음이냐"로 나타난 워커 장군의 고수의지는 여러 가지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나,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엄연한 사실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결과 및 영향

 

8월 1일 오후에 제8군으로부터 삼랑진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은 받은 제25사단은 이날 밤중부터 가용한 수송수단을 모두 동원하여 삼랑진으로 전진케 되었으나, 그 이동 도중에 다시 목적지가 마산으로 변경되었다.

 

그리하여 사단은 삼랑진을 거쳐 곧바로 마산으로 집결케 되었는데 사단사령부의 선발대는 8월 2일 21:15에, 그리고 사단 주력은 3일 낮중에 마산에 도착하였다. 이로써 사단은 지난 7월 20일에 제 27연대가 안동에서 광간으로 기동한 것에 이어 두 번째로 36시간만에 240km를 주파하는 기동성을 보임으로써 낙동강 서남부 지구의 공백상태를 미봉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