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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남의 봄 23 : 현충일의 의미 10 (6.25 전쟁, 한국전쟁 9)

 

 

 

강남의 봄 23 : 현충일의 의미 10 (6.25 전쟁, 한국전쟁 9) 

 

 

                                                                     북악 둘레길에서 바라본 성북동 전경

 

 

 

초기 전투 ~ 낙동강 전투까지 주요 전투 3

 

 

낙동강 방어 전투

 

적의 계속적인 공격으로 전선은 점점 남으로 밀려나고 있었고 연합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였다. 북쪽 낙동강 전선은 한국군 제1,6,8,9,3사단이 다부동-팔공산-영천-포항을 연결한 전선에서 고군분투를 하고 있었으며, 다부동 전투, 영천 회전, 포항 형산강 전투에서 적의 공격 예봉을 꺽으면서 전선을 버티고 있었고, 대전지역에서 미 24사단이 무너지자 미군은 낙동강 중부-남부전선에 미25사단, 미 기병7사단, 해병 여단, 영국.터키.호주의 참전국 부대 등이 마산-창녕-진주-합천- 추풍령-구미-왜관 전선에 투입되었다.

 

                                                   

                                                                         낙동강 전투 전황도

 

적의 계속적인 공격으로 낙동강 전선의 공방은 뺏고 빼았기는 전투가 계속 전개되고 있었다. 연합군은 미 제8군사령관 '워커'장군의 강력한 지휘아래 내선작전의 잇점을 최대한 살리면서 방어선을 지탱하고 있었다. 왜관일대 적 밀집지역에 대한 공중 융단폭격이 실시되었고 미공군의 지상전 지원은 방어선 지탱에 큰 힘이 되었다. 제공권은 미공군이 적을 제압하고 있었다. 

 

UN군이 참전했지만 전투력의 열세는 여전했다. 북한군은 파상공세로 밀고 내려왔고, 국군과 UN군은 최대한 적의 전진을 지연시키며 전투력을 회복하는 지연전을 벌이며 1950년 8월 1일에는 낙동강까지 후퇴했다.

 

부산까지 점령하여 적화통일을 완수하고자 하는 북한군과 이를 막으려는 국군과 UN군은 낙동강 을 사이에 두고 맞서게 된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고지의 주인이 바뀔 정도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형산강 전투, 영천 전투, 다부동 전투를 통해 국군과 UN군은 마산-대구-포항선을 사수하는데 성공했고, 북한군의 전쟁목표를 꺾어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지 못했다면 한국 정부는 제주도나 일본에서 망명정부를 수립해야 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었다. 낙동강에서의 승리는 방어 전투에서 공격 전투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낙동강 방어 전투에 대하여......

 

북한군 포로 신문 다부동전투에서 백선엽 사단장이 이끄는 국군 1사단은 미 제27연대와의 연합작전을 성공적으로 펼쳐 국군의 전투력을 불신하던 미군의 인식을 바꿔 이후 한미 연합작전에 기여하는 전기를 마련했다. 다부동전투에서 생포한 북한군을 직접 신문하고 있는 백 사단장(오른쪽). 동아일보 자료 사진



“뚫리면 끝장” 北전차 몸날려 막으며 50여일간 ‘피의 사수’

파죽지세로 남하한 북한군
낙동강 방어선 돌파 위해 최정예 3개사단 투입 총공세

백선엽 사단장 수적 열세 딛고 육박전-각개전투로 고지 지켜
공격 또 공격… 양측 8000명 전사


대구 북방 약 20km에 위치한 경북 칠곡군 다부동고개는 예부터 전략적 요충지였다. 국군과 미군은 최정예 병력을 동원한 북한군에 사생결단으로 맞서 승리함으로써 낙동강전선 최후 교두보를 지켰다. 사진은 경북 칠곡군 다부동에 있는 전적비. 옆에는 기념관도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우세한 북한군에 밀려 국군은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내주고 한강 남쪽으로 물러났다. 섣불리 한강교를 폭파한 탓으로 서부전선 국군 부대들은 중화기와 차량들을 버린 채 뿔뿔이 한강을 건너야 했다. 초기 전투에서는 큰 손실을 입지 않고 물러난 1사단이 중화기를 다 버리고 나룻배로 한강을 건넌 것은 뼈아픈 손실이었다. 서울이 북한군에 함락되자 육군본부는 한강에서 적군을 막으려 했다. 시흥지구 전투사령부가 새로 만들어지고 김홍일 소장이 사령관이 되었다. 김 사령관은 수도, 1, 2, 3, 5, 7사단 잔여 병력을 모아 한강 남안을 지키는 방어선을 만들었다. 이제 국군의 희망은 미군의 지원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걸렸다. 방법은 북한군의 남하를 되도록 늦추는 것이었다. 다행히 한강선 방어전이 성공해 일주일을 벌 수 있었다.》

마침내 미군이 투입되었다. 처음 투입된 부대는 24사단 21연대 선발대였다. 찰스 스미스 중령이 지휘하는 406명의 보병과 1개 105mm 포대로 이루어진 ‘스미스 태스크포스’사단이었다. 스미스사단은 7월 5일 오산 북쪽 죽미령(竹美嶺)에 방어선을 쳤다. 그러나 이내 패퇴했다. 북한군 전력이 예상보다 강했던 것이다.

북한군의 핵심병력은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경험을 쌓은 조선족 병사들이었다. 이들은 야간전투와 포위작전에 능했다. 부대 주력이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하는 사이에 다른 부대가 우회해 포위하는 중국군의 전술에 미군이 당한 것이다. 게다가 미군을 더욱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북한군 전차를 막을 무기를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북한군 T-34 전차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쓰인 2.36인치 로켓포탄을 맞고도 끄떡없었다. 결국 스미스부대는 전사자 150명, 실종자 31명이라는 참담한 손실을 입고 물러나야 했다. 대전(大田)전투(7월 18, 20일)에서는 사단 주력이 무너져 사단장 딘 소장이 포로로 잡힐 정도였다.

한미연합군을 지휘한 8군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은 7월 말 경상도 일대까지 한국군과 미군이 물러서자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는 판단하에 ‘낙동강방어선’을 설치했다. ‘부산 해두보(Pusan Perimeter)’라 불린 이 방어선은 낙동강을 지형 자산으로 삼아 동북부 산악지대와 서남부 남강 및 남해를 이용해 이뤄졌다. 이 최후의 방어선은 멋진 구상이었다. 낙동강을 전선으로 삼았으므로 방어가 쉽고 전선이 비교적 짧고 단순했다. 좋은 교통망을 이용해 내선(內線)의 이점을 십분 활용할 수 있어 전선이 뚫려도 이내 회복할 수 있었다.

낙동강방어선은 왜관을 기점으로 동북쪽은 국군이, 서남쪽은 미군이 맡았다. 국군은 왜관부터 1, 6, 8, 수도, 3사단이 배치되었고 미군은 왜관부터 1기병, 24, 25사단이 자리 잡았다. 낙동강방어선은 초기 방어선인 ‘X선’과 최후의 방어선인 ‘Y선’으로 이루어졌다.

마지막 방어선에서 벌어진 싸움이었던 만큼 전투는 지속적이고 치열했다. 가장 치열했던 곳이 서북쪽 북한군 지역에서 대구로 가는 길목인 왜관 동북쪽 다부동이었다.

북한군은 대구 점령을 일차 목표로 삼았다. 교통중심지인 데다 국군과 미군의 사령부가 있었으므로 정치적 중요성도 무척 컸다. 북한 입장에서는 또 이곳을 지키는 군대가 미군이 아니라 국군이었다는 점도 이점이었다. 뒤에 중공군도 마찬가지였다.

북한군 2군단은 김천에서 대구에 이르는 축선을 주공(主攻)으로 삼고 3, 13, 15사단을 다부동에 투입했다. 3개 사단 가운데 이영호 소장이 지휘한 3사단은 북한군의 최정예 부대로 서울에 맨 먼저 입성했고 이어 미군 24사단이 친 방어선들을 뚫고 내려왔다.

이곳을 지킨 국군은 백선엽 준장이 이끄는 1사단이었는데 넓은 정면을 방어하면서 잘 싸웠다. 미국 육군부가 낸 6·25전쟁 공식 전사(戰史)인 ‘남으로 낙동강, 북으로 압록강’을 쓴 로이 애플먼은 책에서 “백 소장의 강력한 지도력 아래 1사단은 대구에 이르는 산악 접근로에서 용감하고 피 흘리는 방어전을 수행했다”고 평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압력은 갈수록 거세어져 1사단은 8월 12일 Y선으로 물러났다. 백 준장은 13연대를 왼쪽에 배치해 낙동강을 굽어보는 328고지를 점령하게 하는 한편 12연대를 중앙의 수암산(519m)과 유학산(839m)에 배치하고 우익인 11연대를 전차 접근로인 천평동 계곡(다부동의 북쪽 계곡) 좌우에 있는 산줄기에 배치하기로 했다. 그러나 12연대가 유학산과 수암산에 이르고 보니 북한군이 밤사이 샛길로 들어와 미리 점령하고 있었다. 사단의 중앙부 고지에 적군이 자리 잡은 것이었다. 1사단은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공격해야 하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낙동강방어선의 이점을 살리려면 유학산과 수암산을 확보해야만 했다. 전선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싸움도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싸움마다 접근전이었고 소총을 쏘기도 어려워 수류탄전으로 치러졌다. 육박전도 드물지 않았다. 당연히 병력 손실이 많았다. 이 어려운 상황을 1사단은 잘 버텨냈다.

한편 북한 최고사령부가 대구 점령 시한으로 정한 8월 15일이 가까워지자 전투는 더욱 치열해졌다. 1사단이 맡은 전선 전부에서 근접전이 벌어졌다. 이즈음 북한군 105전차사단은 새로 보급 받은 전차 21대를 모두 대구 공격 사단에 배정했다. 화력이 약한 데다 전차를 갖지 못한 1사단으로선 중대한 고비였다. 백 준장은 상부에 거듭 증원을 요청했다.

미 8군사령부도 1사단의 절박함을 듣고 증원군을 보냈다.

낙동강방어선을 지키는 미군과 국군을 지휘하는 워커 중장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예비병력 부족이었다. 위급한 상황에 대체 투입할 병력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고심 끝에 고안해 낸 대책은 ‘소방대(fire brigade)’를 운용하는 것이었다. 특정 부대를 위험한 전선에 투입해 ‘불을 끄는’ 임무를 맡긴 것이다. 이것은 미군의 뛰어난 기동력을 감안한 매우 현실적인 전술이었다.

임무는 미군 25사단 27연대가 맡았다. 이 부대는 존 마이켈리스 중령이 이끄는 부대로 이미 미군 24사단 지역으로 진출한 북한군을 격퇴해 소방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한 터였다.

마침내 8월 17일 미군 27연대가 다부동에 이르렀다. 1개 전차중대와 2개 포대가 배속된 강한 화력을 가진 부대였다. 이튿날 국군과 미군은 일제 공격에 나섰다. 미군은 전차를 앞세우고 계곡을 따라 수월하게 전진했으나 산줄기를 따라 공격에 나선 국군은 많이 나아가지 못했다.

그날 밤 북한군은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우고 공격해왔다. 미군은 3.5인치 로켓포, 전차포, 그리고 야포로 적군 전차들과 자주포들을 파괴하고 보병 100여 명을 사살했다. 북한군은 이내 물러났다. 북한군의 이런 야간공격은 모두 일곱 차례 있었는데 모두 패퇴했다. 실패한 공격방식을 계속 되풀이한 것은 ‘독전대(督戰隊)’를 동원해서 병사들을 몰아세우는 전체주의 군대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8월 19일엔 미군 2사단 23연대와 국군 8사단 10연대까지 1사단을 돕기 위해 27연대 후방에 배치되었다. 국군과 미군의 3개 연대가 동원됐을 만큼 다부동전투는 중요했다.

북한군의 마지막 야간공격은 8월 24일에 있었다. 전차 2대를 앞세운 보병 2개 중대가 공격했지만 미군에게 쉽게 격파되었다. 27연대가 8월 18일에서 25일까지 파괴한 북한군 중무기는 T-34 전차 13대, 자주포 5문, 차량 23대였다. 8월 25일 소방임무를 훌륭히 수행한 미 27연대는 국군 1사단에 다부동지역을 인계하고 떠났다.

치열한 전투였던 만큼 피아(彼我) 간에 많은 전사자가 났다. 국군은 2300명이, 북한군은 5690명이 전사했다. 1사단이 미군에 다부동지역을 인계하고 이동하게 되었을 때 미군 병사들이 “저 위에 있는 시체들을 모두 파묻기 전엔 지역을 인수하지 않겠다”고 했을 정도였다고 백 장군은 그의 영어 회고록 ‘부산에서 판문점까지’에서 술회했다.

낙동강전선에서 죽은 북한군의 상당수는 ‘의용군’이라는 이름을 붙여 강제로 징집한 젊은이들이었다. 당시 종군 문인으로 싸움터를 찾았던 조지훈은 뒷날 ‘다부원에서’라는 시에서 끔찍한 정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생령(生靈)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바람에 오히려

간 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다부동전투가 끝난 뒤에도 낙동강방어선은 안정되지 않았다. 8월 공세가 실패하자 북한군은 남은 병력과 자원을 다 모아 마지막 공세를 기도했다. 9월 2일 북한군 2군단은 1, 2, 13사단과 17전차여단으로 이루어진 ‘제3공격집단’을 국군 1사단과 미군 1기병사단의 정면에 투입하고 8사단과 15사단으로 이루어진 ‘제4공격집단’을 국군 6사단과 8사단 정면에 투입해 공격해 왔다. 이 공세로 대구가 거의 포위될 지경에 이르렀고 9월 5일 국방부와 육군본부 및 미 8군사령부는 대구에서 부산으로 이동했다.

이 같은 위기에 워커 장군은 국군 담당지역을 축소했다. 북한군이 화력이 약한 국군을 집중 공격하는 것을 고려한 조치였다. 이 대응은 성공해서 북한군의 공세는 실패했고 9월 중순에는 마침내 전세가 역전되어 반격의 바탕이 마련되었다.

낙동강방어전에서 아군이 승리하도록 도운 요인은 여럿이다.

 

먼저 더 물러날 곳이 없다는 현실은 아군 병사들로 하여금 비장한 각오로 싸움에 나서도록 했다. 워커 장군의 ‘현지 사수(Stand or Die)’라는 명령에 담긴 결의는 적군의 발악적 공세를 막아낸 힘의 원천이었다.


둘째, 아군은 내선의 이점을 최대한 이용해 병력 부족을 빠른 기동력으로 메울 수 있었다. 셋째, 여유 병력이 없는 상황에서 미군 27연대와 같은 특정 부대에 ‘소방대’의 임무를 맡긴 것은 아주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넷째, 미국의 인적 물적자원이 본격적으로 동원되면서 아군의 전력이 빠르게 강화돼 8월 말에는 적군을 압도했다. 반면 적군은 병력과 물자 보충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다섯째, 패퇴하는 아군의 뒤를 따르는 피란민 행렬이 더할 나위 없이 선연하게 보여준 것처럼 당시 민심은 대한민국을 따랐다. 비록 당장 눈에 잘 띄지 않았지만 이런 민심은 장기적으로는 전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복거일 시사평론가·소설가

 

 

낙동강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낙동강 전투 당시의 보병대
낙동강 전투 당시의 보병대
날짜 1950년 8월 ~ 9월
장소 낙동강 전역
결과 인천 상륙 작전으로 조선 인민군의 후퇴
전쟁의 주도권이 UN군으로 넘어감
교전국
국제 연합 국제 연합
  • 미국 미국
  • 대한민국 대한민국
  • 영국 영국
  • 네덜란드 네덜란드
  • 뉴질랜드 뉴질랜드
  • 프랑스 프랑스
  • 캐나다 캐나다
  •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도
낙동강 전투 당시의 지도
낙동강 전투 당시의 지도

 

낙동강 전투는 1950년 8월에서 9월 사이에 낙동강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1950년 8월 3일 다부동 전투에서의 승리를 통해 한미 연합군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했다. 당시 국토의 90%를 유린한 인민군에게 낙동강 방어선은 함락해야 할 돌파선이었고, 주요 도시를 잃은 국군과 미군에게는 인민군을 막아야 할 최후의 저지선이었다. 1950년 8월 달부터 국군과 인민군은 다양한 전투를 거치며 승리와 패배를 반복하였다. 당시 김일성은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해야 한다는 계획 하에, 포항, 왜관, 영천, 진주, 대구 등 주요 방어선의 요충지를 공격함으로써 낙동강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낙동강 방어선은 남해안 마산에서 낙동강 낙동리까지 약 160킬로미터로 낙동강을 연하여 구릉지 및 평야지대로, 또 낙동리에서 동해안까지는 산악지대를 연한 선으로 지리적으로 서측 낙동강, 북측 산악지대 능선으로 비교적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다.

 

부산으로 중심으로 방어지역의 주요지점을 연결하는 종.횡적 도로와 철로가 발달되어 내작전 수행에 우리한 잇점이 있었다. 낙동강 전선은 연합군의 최후의 방어선으로 방어개념은 공세적 방어개념으로 기동과 역습이었다. 증원, 보급, 수송, 병참선을 확보하여 우세한 포병, 항공 전력을 이용하여 적을 타격하고 적극적인 역습으로 전세를 전환시켜 반격의 발판을 만든다는 개념이엇다. 그래서 적의 압력이 약한 지역에서 병력을 절약하여 기동예비대를 편성, 돌파된 지역에 신속히 투입하여 국부적인 전투력의 우세를 달성하여 역습을 감행, 상실된 지역을 회복한다는 개념이었다.

 

그래서 적의 전진을 일단 저지시켜 공격의 발판을 삼아 총반격을 실시한다는 구상이었다.

 

 

한미군의 방어 편성

연합군은 낙동강 전선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결정하고 결전을 결심한 상태엿다. 그래서 유엔군 사령부는 부대 특성을 고려하여 책임지역을 분할하였는데, 미군 및 유엔군은 마산에서 낙동리에 이르는 서측방 160킬로미터선에 남북으로 낙동강 일대에 배치하고, 한국군은 낙동리에서 동해안까지 80킬로미터에 연하여 동측방으로 산악지대에 횡적으로 배치하였다.

 

8월 1일까지 지정된 책임지역으로 부대를 이동시켜 8월 3일까지 재배치 완료하였다.국군은 왜관 동쪽부터 동해안으로 제1, 6, 8, 수도, 3사단으로 총 5개 사단을 배치하였다. 미군 및 연합군은 왜관 남쪽으로 마산까지 미제1기병사단. 24, 25사단을 배치하고 육본과 8군사령부는 대구에 위치하였다.

 

반면 북한군은 8월 1일 대략 진주-김천-점촌-안동-영덕 선까지 진출하여 7월 20일 북한군 전선사령부가 위치한 수안보에 나타난 김일성은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도록 독려하였다. 북한군 1군단 사령부는 김천, 2군단 사령부는 안동에 위치하였다.

 

8월초 북한군의 작전개념은,

1) 경부 도로를 따라 주공을 지향하여 대구를 조기에 점령한다

2) 조공으로 포항-경주 방향으로 공격한다.

3) 창녕 서쪽 낙동강 돌출부를 공격하여 유엔군 병참선을 차단한다.

4) 남해안을 따라 마산-부산 방향으로 공격한다.

 

그러나 북한군은 이미 전투력이 50~60%가 감소한 상태로 제공권이 상실되어 부대이동이 자유롭지 못했고 병참선이 신장되어 보급이 원할하지 못했다. 그러나 공격기세나 전장의 주도권은 장악하고 있었다.  

 

 

 

경과

 

1차 방어선의 붕괴

당시 경상북도의 주요 전투지는 포항과 다부동이었다. 포항이 붕괴되면 7번 국도의 주도권이 공산군에게 넘어가서 부산이 점령당할 수 있었고, 다부동이 함락될 시 대구와 영천이 적의 수중에 넘어가게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8월 포항 전투에서 국군이 대패함으로써 포항이 수중에 넘어갔고 영천이 다부동과 함께 점령됨으로써 1차 방어선이 붕괴되었다. 국군과 UN군은 2차 방어선을 짤 계획을 세워야 만 했다.

 

 

2차 방어선 구상

2차 방어선은 대구가 함락되고 연합군이 물러나 대략 마산-창녕-밀양-언양-울산을 연하는 선에서 유엔군과 국군이 부산 철수작전을 전개할 때까지 최후의 저항선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고 내줄 땅도 없었다. 만약 낙동강 방어에 성공하지도 못하고 철수도 성공하지 못한다면 최종적으로 연합군의 항복 아니면 휴전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비참한 결정으로 1차 방어선에서 적을 견제하지 못한다면 패배는 불을 보듯 뻔 한 일이었다.  

 

 

 

다부동 전투

 

다부동 전투의 주요 지휘관이었던 육군소장 백선엽에 의해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이 전투로 낙동강의 임시 방어선을 구축하고 UN군 등의 증원 파병때까지 여유 시간을 획득했다.

 

8월초 북한군은 가용병력의 50%가 넘는 5개 사단을 대구 북방에 집중적으로 투입하여 대구 점령을 시도했다. 아군은 국군 제1, 6사단, 미군 제1기병사단이 방어에 임했다. 국군 제1사단은 낙동리 근방에서 도하를 시도하던 북한군을 격퇴하고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6사단은 적의 압박으로 용기동에서 위천으로 철수하고 있었으며 미제1기병사단은 왜관 일데ㅐ에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8월 11일 육군본부에서는 낙동강 방어선을 왜관 북쪽 303고지-다부동-군위-포항선을 잇는 선으로 축소 조정하였다. 8월 16일에는 미군 폭격기 96대가 왜관북방에 융단폭격을 감행하여 북한군에세 막대한 심리적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적의 전투력은 그대로 유지된채 낙동강 방어선을 압박하고 있었다.

 

8월초 양측의 전투력은 유엔군 및 국군은 총 13만 8천, 야포 430문, 전차 300대 규모였으며 북한군은 약 7만여 병력과 야포 300문, 전차 40여대로 줄어 있었다.

 

8월 18일 가산에 침투한 북한군의 박격포탄이 대구 광장에 떨어지자 대구시내는 호나란에 빠졌는데, 정부는 부산으로 이전하고 피난민들이 집을 나서는 등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한편 미제1기병사단 전면의 적과 국군 제6사단 정면의 적이 다소 소강 상태를 유지하는 가운데 북한군은 다부동 정면에 집중적으로 전투력을 투입하고 잇었다. 그러나 국군 제1사단의 필사적인 선방과 미 8군 예비대인 미제27연대의 신속한 투입으로 방어선의 붕괴를 막는 등 적과 뺐고 빼앗기는 혈전을 거듭한 끝에 다부동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자 북한군은 더 이상 다부동에 대한 공격이 무의미함을 판단하고 대구 우측방을 돌파하기 위해 북한군 제15사단을 동쪽 영천 방면으로 전환, 투입하였다.

 

다부동 전투는 낙동강 방어 전투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이며 병참선이 신장되고 그동안 전투력이 현저히 저하되었던 북한군의 공계 한계점이기도 했다. 특히 국군 1사단의 뺐고 빼앗기는 공방전과 미군과 협조된 강력한 화력이 됫받침이 되어 적을 섬멸할 수 잇었던 전투였다.

 

한국군 1사단, 미군 27연대 등  15,000여 명과 북한군 1, 13사단 등 30,000여 명이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한 결과 한.미군 10,000여 명, 북한군 24,000여 명 전사상을 당하고, 북한군 전차 34대 중 13대가 손실을 입는 치열한 전투였다.   

 

 

 

 

다부동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1950년 9월, 518 고지를 내려다보는 미국 제1 기병 사단.
1950년 9월, 518 고지를 내려다보는 미국 제1 기병 사단.
날짜 1950년 8월 3일 ~ 8월 29일
장소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결과 대한민국의 승리
교전국
대한민국 대한민국
미국 미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
대한민국 백선엽 제1사단장 준장
대한민국 김동빈 제11연대장 대령
대한민국 김재명 제1대대장 소령
대한민국 이두황 제2대대장 소령
대한민국 차갑준 소령
대한민국 정영홍 제3대대장 소령
대한민국 고근홍 제10연대장 중령
대한민국 박치옥 제1대대장 소령
대한민국 안광영 제15연대장 소령
대한민국 이재일 제2대대장 중령
미국 존 H. 마이켈리스 미 제27연대장 대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용진 제13사단장 소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병철 제19연대장 대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성준 제21연대장 대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태병열 제23연대장 대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봉욱 포항연대장 중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홍림 제1사단장 소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석 제2연대장 대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양춘 제3연대장 대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창권 제14연대장 대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학봉 포항연대장 대좌
병력
군사 15,000여명 군사 3개 사단 30,000여명

T-34 전차 34대
피해 규모
10,000명 사상 24,000명 사상
전차 13대 손실


다부동 전투1950년 한국 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손꼽히는 전투로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군의 대공세를 저지시키고 대구로 진출하려던 적들의 기세를 꺾었다. 동양의 베르됭 전투라고도 불릴 정도로 치열한 전투로 유명하다.

 

 

 

 

낙동강방어선의 모습.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 발발 후 북한은 무기와 훈련이 부실한 국군을 연이어 물리치고 승리하여 3일 만인 6월 28일 서울을, 7월 5일에는 오산 전투에서 미군까지 격파하고 7월 24일 대전을, 7월 말 목포진주, 8월 초 김천포항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과 미군의 강렬한 저항으로 교착상태에 빠졌고 치열한 전투가 몇 차례씩 벌어졌다. 8월 3일 유엔군은 마산-왜관-영덕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을 쳤다.

 

 

전투 과정

 

북한의 공세와 다부동 전선으로의 이동

북한은 1950년 8월 임시 수도 부산대구로 통하는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대구 공격에 투입된 5개 사단 중 제1사단, 제13사단, 제15사단과 제105전차사단을 대구 축선에 집중시켜 공격했다.

 

이에 국군은 왜관에서 낙정리까지 국군 제1사단, 낙성리에서 의성까지 제6사단, 현풍에서 왜관까지 미 제1기병사단 등 3개 사단을 배치했다. 제1사단은 8월 1일 미군 제25사단으로부터 책임 구역을 이어받아 9일 동안 낙동강 연안에서 전투를 벌여 6867명을 사살하고 각종 포 23문과 탱크 10대를 파괴했다.

 

8월 11일 육군은 왜관 북방 303고지-다부동-군위-보현산으로 이동하여 적군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아 국군 제1사단은 강변 전투를 종결하고 8월 12일 야간에 새로운 다부동 전선으로 이동했다.

 

 

제1사단의 고지 전투

제1사단이 맡은 다부동지구 지역은 왼쪽으로는 328고지, 수암산유학산 일대의 횡격실 능선과 오른쪽으로는 가산, 팔공산에서 뻗는 고지군으로 둘러싸여 대구로 통하는 관문에 해당되는 전술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제1사단은 8월 13일에 집결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점령하기 위해 제15연대가 328고지 일대와 제12연대가 수암산유학산 일대로, 제11연대가 신주막 일대의 계획된 진지로 진출했다.

 

이에 북한군도 8월 13일 제3사단 일부 병력을 투입해 328고지를 공격하고 제15사단도 국군 제1사단보다 앞서 유학산에 진출하였고 제13사단은 도로를 따라 신주막의 제11연대 정면으로 접근하면서 일부병력을 우회시켜 미처 제11연대가 병력을 배치하지 못한 674고지를 선점하였다.

 

이로써 국군 제1사단은 방어선의 중앙돌파와 다부동이 점령당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북한군은 8월 15일부터 공격을 재개하여 국군 제1사단은 제15연대가 빼앗은 328고지를 빼앗기고 뺏는 쟁탈전을 벌였고 제12연대가 유학산을 탈환하기 위해 공격을 반복했고 제11연대도 탱크 7대를 앞세운 연대 규모의 공격으로 복곡 일대로 물러났다.

 

왜관 폭격

대구 방면에서 공격이 한창일 때 8월 16일 11시 58분~12시 24분에 UN군 사령관의 명령으로 출격한 B-29 폭격기 98대가 왜관 서북쪽 낙동강변일대 5.6×12㎞ 지역에 960t의 폭탄을 투하하였다.

 

그러나 융단폭격에도 불구하고 8월 16일에는 가산으로 침투하려는 적이 741고지에서 다부동 바로 서측 466고지를 공격해옴으로써 국군 제1사단은 돌파되느냐 고수하느냐의 기로에서 놓여 있었다.

 

이에 제8군은 사단 병력만으로는 방어선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8월 17일 군예비인 미 제25사단 제27연대를 다부동으로 투입하였다. 8월 18일 새벽에는 가산에서 침투한 일부의 적이 사격한 박격포탄이 대구역에 낙하하자 대구의 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 충격으로 이날 정부가 부산으로 이동하고 피난령이 하달되어 대구는 일대 혼란에 휩싸였으나, 조병옥 내무부 장관이 경찰과 함께 직접 가두에 나서 피난령을 취소하고 민심을 수습함으로써 가까스로 질서가 회복되었다.

 

 

제1사단의 위기

이와같은 위기를 타개하고 계획된 방어선을 회복하기 위하여 국군 제1사단은 8월 18일에 지원된 미 제27연대와 협동으로 적진돌파작전을 전개하였다.

 

미 제27연대는 다부동-돌머리 축선에서 전차중대를 도로상에, 보병 2개 대대를 그 좌우 낮은 능선에 전개하여 보전협동으로 공격을 주도하고, 그 좌우 고지에서는 제1사단이 미군부대와 협조된 공격을 실시하였다.

 

국군 제1사단 정면의 적도 전차를 새로이 보충받아 보·전협동으로 전면적인 야간공격을 개시함으로써 피아간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 되풀이 되었다. 제27연대는 천평 전방에서 3.5 로켓포로 적전차 2대를 파괴하였으나 적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적은 도로상의 지뢰로 인해 큰 진전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제15연대는 328고지에서 적과 수차례의 수류탄 공방전을 전개하면서 쟁탈전을 거듭하였고, 제12연대는 쌍방간에 많은 손실을 낸 채 8월 19일 수암산을 재차 피탈당하고 유학산 일대에서 밀고 밀리는 공반전을 반복하였으나 대체로 적의 돌파확대를 저지하고 있었다.

 

이날 제8군명령에 따라 미제2사단 제23연대를 후방인 두전동에 배치하여 방어종심을 증가하였다. 육군본부에서도 제8사단 제10연대를 제1사단에 배속시켜 가산일대에 배치하였다. 이와같이 다부동의 전황은 국군 1개 연대와 미군 2개 연대가 지원될 만큼 위급하였다.

 

 

북한의 공격력 약화와 국군의 역습

그러나 8월 20일 밤 북한 인민군측에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적은 더이상 다부동전선을 돌파할 수 없다고 판단했음인지 유학산 일대에 전개한 제15사단을 의성방면으로 이동시킨 후 국군 제8사단 정면 영천방면으로 공격하도록 임무를 부여하였으며, 이로써 적은 제3사단 일부가 수암산 일대에, 제13사단이 유학산 우측면을 담당하게 되어 공격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국군으로서는 당시 적 제1사단의 위협이 가중되어 다부동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을 때였으므로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8월 21일부터 국군 제1사단의 전황은 점차 호전되어 갔다. 이날 야간 특기할 것은 다부동 계곡에서 한국전쟁 최초로 전차전이 전개되었다.

 

적은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워 조공을 제11연대로, 주공을 미제27연대 정면으로 지향하여 대규모 야간역습을 감행하였다. 미 제27연대는 가용포를 총집중하여 적전차와 보병을 분리하고 아군 전차를 추진하여 적에 대응하였다. 다부동 계곡에서 쌍방간에는 전차포에 의해 발사된 철갑탄이 5시간 동안이나 교차되면서 불꽃을 튀기었다.

 

당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제27연대 장병들은, 불덩이의 철갑탄이 어둠을 뚫고 좁은 계곡의 도로를 따라 메아리치며 상대방 전차를 파괴하기 위해 곧장 날아가는 모양이 마치 볼링 공이 맞은 편에 세워진 목표로 핀을 향하여 재빠르게 미끄러져 가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볼링장(Bowling Alley)전투라고 하였다.

 

 

 

국군의 대규모 탈환 공세

더구나 다음날 8월 21일 오전에 북한 제13사단의 정봉욱 중좌가 제11연대지역으로 작전지도를 갖고 귀순함으로써 적의 전투의지는 극도로 저하되었고, 그의 진술에 따라 유엔 전폭기 편대가 대거 출격하여 122㎜곡사포 7문과 76㎜곡사포 13문이 은폐되어 있는 적의 포진지와 집결지를 강타함으로써 적 제13사단의 화력지원을 무력화사켰다.

 

제12연대는 그동안 8차례의 공격끝에 이날밤 최초로 야간기습을 시도하여 마침내 유학산 탈환에 성공하였다. 제1사단은 마침내 주저항선을 안정시켜 작전의 주도권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미 제27연대는 증원임무에서 해제되어 마산의 모체부대로 복귀하였다.

 

적은 전투력이 현저히 약화되어 거의 접촉을 단절하였으며, 북한 인민군 제13사단은 유학산에서만 1,500명이 전사상되고 총 3,000명의 손실을 입고 있었다. 8월 26일부터 제1사단은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방어진지를 미군에게 인계할 준비의 갖추면서 수색정찰을 강화하였다.

 

8월 28일에는 수암산을 피탈 10일 만에 탈환하였다. 결국 제1사단은 8월 12일에 점령하게 되어 있던 방어선을 16일 후에서야 점령한 결과가 되었다. 제1사단은 방어선상의 가장 중요한 지형인 유학산을 적에게 선점당하여 그간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다부동 전선을 방어하였던 것이다.

 

 

북한군을 몰아내다

이처럼 제1사단은 적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328고지-수암산-유학산-741고지의 방어선을 확보하고 다부동-대구 접근로를 방어하여 대구 고수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1사단은 유학산과 다부동 일대에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북한군 3개 사단과 25일 동안의 교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의 8월 공세를 저지한 후, 미 제1기병사단에게 진지를 인계하고 신녕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결과

 

8월까지 조선인민군대구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과 미군의 강렬한 저항으로 교착상태에 빠졌고 치열한 교전이 계속되었다. 이때 대한민국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은 다부동에서 인민군의 침공을 격퇴하고 8월 3일 유엔군은 마산-왜관-영덕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을 쳤다.

 

 

 

포항전투

 

포항 전투
Korea-Pohang-Goryongpo Beach-01.jpg
날짜 1950년 8월 10일 ~ 8월 11일
장소 대한민국 경상북도 포항
결과 대한민국의 패배
교전국
대한민국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
대한민국 제3사단 후방사령부 김재규 소령

대한민국 제3사단 학도의용중대장 김용섭
대한민국 제25연대장 유해준 중령
대한민국 제9중대장 문일수 중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5사단장 마상철 소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12사단장 최인두 소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766부대장 오진우 총좌



포항 전투1950년 8월 10일 부터 8월 11일 까지 포항으로 남하하는 조선인민군 육군 제12사단과 제5사단, 제766부대와 이를 방어하는 대한민국 제25연대 및 제3사단 학도병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1950년 8월 9일 북한군 제5사단강구를 점령함으로써 한국군 제3사단은 장사동 일대로 후퇴하였으나 8월 10일 기계를 석권한 북한군 제12사단의 1개연대 병력이 냉천동 일대에 출현하면서 퇴로가 차단당하였다. 이 때 포항에는 한국군 제3사단 후방사령부와 보급 및 근무지원부대, 해군 포항경비부와 공군 포항지부대 1개 중대, 그리고 경찰과 청년방위대 등 3,000 여명의 병력이 있었으나 조직적으로 전투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지휘체계가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포항에 있던 대한민국 3보병사단은 학도병 71명과 무장하여 전투를 준비 중이었고, 포항 북부 냉천동에 집결한 북한군은 포항을 향해 남하하였다.

 

 

 

소티재 고개 전투

 

8월 9일

한국군 제25연대 제3대대는 열차편으로 대구를 떠나 09:00에 포항역에 도착하였다. 10:00에 한국군 제25연대장 유해준 중령이 제3사단 사령부를 방문한 후 기계로 가던 중, 포항역에 집결중인 제3대대 병력을 보고 대대장 이방우 소령에게 포항 방어임무를 부과하였다. 그리고 기계지구의 상황이 위급하다는 이유로 제9중대를 제외하고 제11, 12중대를 안강으로 이동시키도록 지시하였으며, 제10중대를 연대 예비로써 효자역에 대기하도록 통제하였다. 한국군 제25연대 3대대장은 대대 전술지휘소 요원과 제9중대를 지휘하여 소티재로 진출하였다. 이 때, 제25연대 3대대는 통신장비의 미비로 제3사단 사령부와 통신이 되지 않는 상태였다. 제9중대장 문일수 중위는 소티재에서 7번 국도감제가 용이한 105고지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대대 관측소도 중대 방어진지내에 설치하였다. 당일 밤, 정찰대로 보이는 수 미상의 북한군과 가벼운 접전이 일어났으나 별다른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8월 10일

00:00가 지날 무렵, 증강된 1개 중대 규모의 북한군이 105고지 북쪽 기슭에 출현하여 소티재 고개 도로상으로 접근하다가 한국군 제9중대의 기습사격을 받고 흩어졌으나 다시 대오를 갖추어 공격을 시작하여 2시간 가량의 교전이 전개되었다. 교전 이후 제9중대 병력의 반 이상이 손실되어 제3소대를 일선 산병호에 배치하고 방어선을 재조정하였으나, 북한군 주력의 공격으로 약 3시간에 걸쳐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105고지를 공격하던 북한군의 주력은 한 차례의 진내 육박전 이후, 고지에서 물러나 포항으로 남하하였고, 제9중대는 전투 결과 제1소대장을 포함하여 소대 전원과 대다수의 중대원이 전사 또는 실종되었다. 전투력을 상실한 한국군 제25연대 3대대는 포항시내를 우회하여 어둠을 틈타 연일·운제산계곡을 경유하여 8월 11일오후에 경주에 도착하였다.

 

 

포항여중전투

 

8월 10일

07:00에 포항역에 도착한 71명의수도사단학도의용대출신 학도병들은 임시 숙소로 지정된 포항국민학교로 이동했다. 이 곳에서 한국군 제3사단 작전처 보좌관인 김치련 대위와 만났으며, 이후 제3사단 후방사령부가 위치한 포항여자중학교로 숙소를 이동하였다. 22:00에 학도병들은 M1소총과 개인당 실탄 250발을 지급받았고, 투표를 통해 중대를 편성한 이후 24:00에 이르러 취침에 들어갔다.

 

8월 11일

03:00에 포항시내에서 총성이 울렸다. 한국군 제3사단 후방사령부 지휘책임자인 사단인사참모 김재규 소령은 사령부 잔여병력을 이끌고 시내 쪽으로 들어갔고 학도병에게 사령부 방어를, 작전처 보좌관인 김치련 대위에게 행정요원 60여명으로 편성된 2개 소대를 지휘하게 하여 학교 뒷산에 배치하는 한편, 일부 병력으로 사단 보급품과 기밀문서를 후송하게 하였다. 학도병들은 학교 울타리를 따라 제1소대는 학교 정문 우측으로 부터 강당 측면까지, 제2소대는 정문 좌측으로 부터 본관 측면까지 경계하였다. 04:00에 이르러 소티재 방향에서 녹색 신호탄이 발사되었고 학교 정문 100m 전방에 소속 불명의 병력이 나타났다. 당시 3사단 학도의용군 중대장 김용섭은 적군과 아군이 구분되지 않는 상황에서 암구호 질문을 고민였으나 이내 시야로 들어온 병력이 북한군임을 판단하여 20m 거리에서 일제 사격으로 북한군 첨병대를 제압하였다. 06:00에 북한군은 공격을 재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학교 뒷산에 배치된 한국군 제3사단 행정요원 2개소대는 북한군의 공격으로 30여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다. 북한군 제5사단 제12연대는 09:00에 이르러 대량의 포격과 함께 공격을 재개하였고 15:00경에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분산되었다.

 

 

결과

포항시는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갔지만, 포항 시내에 있던 한국군 제3사단 후방사령부를 포함한 경찰병력이 구룡포로 퇴각하여 반격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포항여중 전투 결과 학도병은 48명이 전사하고 23명이 부상을 입거나 행방불명 또는 포로가되었다. 북한군의 피해상황은 알려지지 않았다.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

2010년 EBS를 통해 방영된바 있는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 는 당시 이 전쟁에 참전 했던 이우근 학생이 직접 쓴 것이며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해준다. 16살 소년의 눈을 통해서 본 전쟁의 비극적인 참상과 적을 향한 두려움,마지막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 용기 등이 가슴 절절하게 녹아 있다. 이 학도병은 끝내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후일 시신을 수습하던 생존자에 의해 확인되어 고향으로 가서 묻혔다.

 

 

학도병 목록

 

전사자

  • 김춘식(감포중학교)
  • 윤정한(양주 출신, 성남중학교)
  • 이상헌(대구 출신, 대구중학교)
  • 이상현(부안 출신, 중앙대학교)
  • 윤재정(김해 출신, 신흥중학교)
  • 이우근(양평 출신, 서울동성중학교)
  • 길안영(서울 한양중학교)
  • 정문호(사천중학교)
  • 김영환(대구 출신, 대구상업고등학교)
  • 김언구(평택 출신, 국민대학교)
  • 금병선(태백 출신, 태백공업중학교)
  • 윤 각(보은 출신, 청주중학교)
  • 서성룡(경북장천오상중학교)
  • 강기남(경북 출신)

외 35명(신원 불명)

 

생환자

  • 김용섭(서울대학교 사범대학 2학년, 학도중대장)
  • 김만규(당시 15세, 대구 성광중학교, 연락병)
  • 김일호(서울 중앙대학교 2학년, 2소대장)
  • 김 탄(서울교통학교)
  • 김호경(서울교통학교)
  • 유명욱(서울 배재중학교 5학년, 1소대장)
  • 윤병국(당시 18세)
  • 조성태(서울 중앙대학교)
  • 장진명
  • 주영남(부평중학교)
  • 황기태(대구 영신중학교)
  • 안영걸(서울 농업대학교 수의과)
  • 이병균(서울 배재중학교)
  • 조남수(태백중학교)
  • 황재호(태백중학교)
  • 정수득
  • 주정만(서울 중앙대학교)
  • 손주형(당시 17세)
  • 김환규(당시 대구 성광중학교 3학년)

 

 

 

형산강 방어전투

 

형산강 방어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Korea-Gyeongju-Hyeongsan River-1.jpg
날짜 1950년 9월 5일 ~ 9월 13일
장소 경상북도 포항시 형산강일대
결과 대한민국 국군의 승리
교전국
대한민국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
대한민국 이종찬 제3사단장 대령

대한민국 김응조 제22연대장 중령
대한민국 이소동 제1대대장 중령
대한민국 정영록 제2대대장 중령
대한민국 정순민 제3대대장 중령
대한민국 김우영 제23연대장 대령
대한민국 최상준 제2대대장 대위
대한민국 김종병 제3대대장 대위
대한민국 이치업 제26연대장 대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마상철 제5사단장 소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박병수 제10연대장 대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봉문 제11연대장 대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12연대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오진우 제 766부대장

병력
12600명 8500명
피해 규모
알수없음 알수없음


형산강 방어 전투한국전쟁기간중 9월 5일 부터 9월 13일 까지 형산강을 도하하여 포항으로 진출하려는 북한군 제5사단을 대한민국 제3사단이 저지한 전투이다.

 

1950년 9월 4일 한국군 수도사단장 이종찬 대령은 포항 외곽에 편성한 방어진지를 지탱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방어에 유리한 형산강변을 연하여 새 방어선을 형성할 계획을 세우고 군단장의 승인을 받았다. 9월 5일 02:30에 북한군 제5사단은 96고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고 05:30에 방어진지의 일각이 무너져 진내전이 벌어졌다. 이에 한국군 제3사단은 두호동에 배치된 제23연대의 일부병력을 96고지 남쪽의 죽림산 ·연화봉으로 급파하여 제22연대의 주 저항선을 돌파한 북한군을 저지하게 하였다. 북한군 SU-76 자주포 5대가 포항시 외곽으로 진출하여 미군 전차에 포격을 가하였으나, 美 공군 전폭기에 의해 모두 파괴되었다. 한국군 제3사단은 14:30부터 철수를 개시하였으며, 그 날 저녁 형산강에 진출을 완료하고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전투과정

형산강 방어선의 붕괴

 

9월 6일

한국군 제3사단은 형산강을 연한 방어진지 구축을 완료하였다. 그러나, 형산 우측의 중단동에서 연일까지 3km 구간의 지형이 대안보다 낮아 북한군의 감제에 노출되었다. 따라서, 한국군은 주간에는 방어진지 밖으로 나갈 수 없었으며, 보급도 어두워진 다음에 추진되었다. 같은 날 군단본부로부터 제8사단 제10연대의 원대복귀를 위한 준비명령이 하달되었다. 한국군 제3사단장 이종찬 대령은 북한군의 감제하에 노출되는 지대임을 감안하여 이날 밤에 제22연대와 진지를 교대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러나, 제10연대장 고근홍 중령은 교대부대인 제22연대가 방어지역에 도착하기도 전에 임의로 철수하여 형산·영일 간 5km의 방어정면이 공백지대가 되었다. 북한군 제5사단의 주력은 형산 맞은편의 제산 일대에 집결하여 형산운제산경주 축선으로 진출할 기회를 찾던 중, 공백지대를 포착하여 대기 중인 증강된 1개 대대를 먼저 남하시키고, 후속 병력을 부조 나루터 부근으로 집결시켰다. 또한 효자동 부근의 북한군은 중단동 일대로 진출하여 한국군 제10연대가 구축한 방어진지를 점령하였다. 진지를 교대하기 위해 이동한 제22연대의 선발대는 제10연대 방어지역으로 진입한 얼마 뒤에 북한군의 사격을 받았다. 한국군 제22연대장 김응조 중령은 연대 주력의 행군을 정지시키고 수색대를 파견한 결과 형산·중단동일대에 이미 북한군이 진출한 상황을 확인하였다. 한국군 제3사단장은 북한군 후속병력의 형산강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제23연대로 하여금 노출 된 좌측방의 경계를 강화시키고 제22연대는 옥녀봉으로 진출하여 형산을 거쳐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도록 조치하고 이 상황을 군단에 보고하였다.

 

 

9월 7일

북한군 제5사단의 증강된 1개 대대는 운제산으로 남하하였으며, 부조 나루터 부근에서 형산강을 건넌 북한군의 일부 병력은 옥녀봉과 197고지로 진출하여 한국군 제23연대의 방어진지 배후에 위치하고자 하였다. 197고지 북동쪽 2.5km 지점의 장동으로 진출한 한국군 제22연대는 197고지를 목표로 공격하였으나, 북한군의 숫적 우세와 지형의 불리함으로 오히려 2km를 후퇴하여 남성동 부근의 80고지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한국군 제3사단장은 형산강 방어선을 지탱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9월 8일 저녁에 송정동·장동·우복동 간 남북으로 흐르는 개천을 연하여 새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운제산 전투

 

9월 7일

한국군 제1군단장은 美 처치 특수임무부대장과 함께 제3사단 방어지역으로 침투한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처치 특수임무부대가 운제산 탈환을, 한국군이 북한군의 퇴로 차단과 소탕작전을 담당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를 위해 한국군 제1군단은 아화에 배치된 제26연대에 원대복귀 준비명령을 하달하고, 우선 제2대대를 방어지역으로 차량행군시켰다. 한국군 제1군단장은 운제산의 북한군이 남서쪽으로 2km 떨어진 503고지로 진출한 상황을 확인하고 동산동에 집결 대기중인 수도사단 제18연대를 군단 예비로 전환하고 503고지의 북한군을 저지하도록 명령하였다. 한국군 제18연대는 503고지 남서쪽의 438고지로부터 392고지 간에 병력을 배치하고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할 태세를 갖추었다. 美 처치 특수임무부대장은 운제산 탈환 임무를 美 제24사단 부사단장 데이비슨 준장에게 부여하고, 이를 위한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게 하였다.

 

 

9월 8일

한국군 제1군단은 美 데이비슨 특수임무부대의 공격개시일이 연기된 것을 확인하고 제3사단이 197고지와 옥녀봉을 탈환하여 운제산에 진출한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한편, 392고지와 438고지에 전개한 제18연대에 197고지 공격을 위한 준비명령을 하달하였다.

 

 

9월 9일

새벽에 한국군 제18연대장 임충식 대령은 연대 수색대를 운제산에 침투시켜 북한군이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임충식 대령은 북한군의 보급과 병력 증원에 차질이 생겨 경주로 진출할 수 없게 되었다는 징후라고 판단하여 제1대대장 장춘권소령에게 197고지 탈환 임무를 부여하였다. 이날 저녁, 한국군 제18연대 1대대장 장춘권 소령은 화산동 동쪽 1.5km지점의 263고지로 진출하였다. 한국군 제23연대는 131고지로 투입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였다. 한국군 제26연대는 건천을 떠나 경주·김포·양포동을 경유하여 세계동으로 이동하였으며, 한국군 제3사단은 원대복귀한 제26연대에 제8연대 제3대대를 배속하였다.

 

 

9월 10일

06:00에 한국군 제18연대 1대대는 197고지를 공격하여 6시간 후인 12:00에 목표를 점령하였고, 그 무렵 공수동의 제22연대도 옥녀봉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美 데이비슨 특수임무부대는 경주를 떠나, 19:00에 오천 비행장 남쪽의 용덕동에 도착하였다. 한국군 제26연대는 제23연대가 투입된 131고지로 진출하였다.

 

 

9월 11일

아침에 美 제19연대 제1대대를 선두로 공격을 개시하였고, 이 상황을 확인한 한국군 제18연대는 제2대대를 새터마을로 이동시켜 제22연대와 함께 옥녀봉을 협공하게 하였다. 16:00에 한국군 제22연대는 옥녀봉을, 제18연대 제2대대는 서쪽의 253고지를 각각 점령하였으며, 운제산의 북한군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9월 12일

美 제19연대 제1대대는 공군 전폭기가 목표를 강타한 직후 운제산을 점령하고 한국군 제26연대에 고지를 인계하였다. 이 날 오후, 한국군 제18연대는 형산을 탈환하고 형산강변의 방어진지를 회복하였다. 얼마 뒤, 운제산에서 철수한 북한군이 형산 서편의 개활지를 횡단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좌측방 낙산에 배치된 제1연대와 연합하여 북한군을 타격하였다.

 

 

주저항선의 회복

 

9월 13일

북한군 제5사단은 9월 공세 이후 전투력이 약화되어 9월 12일~9월 13일에 이르러서 수세로 전환하였으며, 연일에서 증강된 1개 대대가 저항을 계속하였다. 한국군 제23연대는 청림동으로 이동한 제26연대와 임무를 교대하고 제2, 3대대로 연일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9월 14일

한국군 제23연대장 김종순 대령은 주간 공격이 어려움을 판단하고 증강된 1개 소대로 특공대를 01:00에 연일로 침투시켜 목표 배후에서 급습하였다. 북한군이 급습으로 인해 혼란에 빠지자 제23연대의 2개 대대는 돌격을 감행하여 05:00에 연일을 탈환하였다.

 

 

결과

 

한국군 제3사단은 1950년 9월 6일 방어선이 돌파된 이후 8일 만에 형산강변의 방어진지를 회복하고 반격을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방어진지를 재편성 하였다.


 

 

 

 

영천 전투

 

영천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날짜 1950년 9월 5일 ~ 9월 12일
장소 경상북도 영천
결과 대한민국의 승리
교전국
대한민국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
대한민국 유재흥
대한민국 이성가
대한민국 고근홍
대한민국 유의준
대한민국 김용배
대한민국 신상철
대한민국 정진
대한민국 최장언
대한민국 박승일
대한민국 김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무정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박성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광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철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치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연섭



 

영천 전투는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경북 영천에서 국군과 북조선군이 벌인 낙동강 전선 마지막 대전투로 처음에는 영천이 함락되어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으나 반격을 하여 영천을 탈환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전세를 역전시켰다.

 

영천은 대구 동쪽 34㎞ 지점에 위치한 요충지로서, 만일 영천이 돌파되면 국군 제1군단과 제2군단이 분리되고 포항∼대구간 횡적 병참선이 차단되며 영천으로부터 대구 또는 경주로의 돌파구가 형성되어 한·미연합군의 낙동강 방어선이 큰 위협을 받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공산군은 제15사단을 주축으로 한 5개 연대병력을 투입하여 1950년 9월 5일부터 13일까지 9일간에 걸쳐서 경상북도 영천지역의 한국군 제2군단을 집중공격하였다. 이 교전에서 한국군 제2군단은 제8사단을 주축으로 한 7개 연대병력으로 이와 맞섰으나 초전에 영천지역을 빼앗기고 금호강 남쪽으로 밀리게 되었다.

 

위기에 처한 한국군은 9월 6일부터 8일까지 전열을 정비한 뒤, 미군전차의 지원하에 10일부터 13일까지 4일 동안 일대반격전을 전개하여 영천지역으로 침투한 북한공산군 제15사단의 주력을 격멸하고 영천을 탈환하였다.

 

영천탈환을 계기로 한국군은 낙동강전선의 동반부를 방어하는 데 성공한 반면, 북한공산군은 좌우인접사단과 측방으로부터 위협을 받게 되어, 신령방면에서 대구지역으로 공격한 북한공산군 제8사단의 공격이 좌절되었을 뿐 아니라, 전반적인 작전에 차질을 빚어 9월공세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 때부터 6·25의 전세가 역전되어 한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작전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발판을 굳히게 된 것이다.

 

 

  

 

 

 

전투경과 

 

영천전투는 6·25전쟁 초기 아군에게 불리한 전세를 극적으로 역전시켜 전쟁의 마지막 보루인 낙동강방어선에서 위기를 구한 구국의 일전이었다. 이 전투는 1950년 9월 2일부터 13일까지 국군 8사단이 북한군 2군단의 공격을 방어한 6·25전쟁의 일대 전환점이 된 전투였다. 한국군 8사단은 이 전투에서 북한군 15사단을 섬멸하고 승기를 잡았다.

1950년 8월 말 북한군 2군단 15사단은 영천 동북 입암리에서 2개 연대를 증원받고 최종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의 목표는 영천을 점령한 다음 대구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국군 8사단은 보현산과 입암 남쪽 고지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해 이미 8월 말께부터 전초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때 8사단 10연대는 3사단에 배속돼 포항일대에서 작전 중이었다.

영천은 신령ㆍ구산동ㆍ입암으로부터의 도로 교차점이며 대구와 경주 방향으로의 도로망이 발달되어 있고 중앙선ㆍ대구선ㆍ동해남부선 등 철도의 분기점으로 대구와 34㎞, 경주와 28㎞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이 돌파될 경우 대구와 경주 방면이 위협을 받게 되며 국군 1ㆍ2군단이 분리되는 동시에 동서 간의 보급로가 차단된다. 따라서 이곳은 낙동강 전선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북한군의 9월 공세와 영천의 위기

북한군 전선사령부는 1950년 9월 2일 전 전선에 걸쳐 공격을 명령했다. 북한군 15사단도 이날 야간 영천을 목표로 일제히 공격했다. 국군 8사단은 적의 야간공격을 받고 분전했으나 3일 새벽 우일선 16연대의 방어진지가 무너지면서 영천북방 기룡산 일대로 철수했다.

국군 8사단은 4일 오후까지 기룡산 능선을 따라 방어선을 편성했다. 사단은 왼쪽부터 21연대, 16연대와 3연대 1대대, 7사단 5연대를 배치했다. 육군본부는 신령에서 작전 중인 7사단 8연대를 영천의 8사단으로 배속 전환시키고, 7사단 공병대대도 추가로 투입해 영천지구의 전력을 강화했다.

적 15사단은 9월 5일 1시 각종 포의 지원 하에 전차 5대를 선두로 3개 방면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국군 8사단은 중앙의 16연대와 3연대 1대대가 적 주공의 공격을 받아 수 시간 만에 종심 깊이 돌파돼 위기를 맞았다. 좌우측 21ㆍ5연대도 적의 공격을 저지하다가 부득이 영천 북방으로 물러났다.

육군본부는 5일 지휘 일원화를 고려해 국군 8사단을 2군단으로 배속 변경했으며, 이날 즉시 유재흥 군단장은 영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군단 작전회의를 소집했다. 여기에는 6사단장 김종오 대령, 1사단장 백선엽 준장, 군단 참모장 이한림 대령과 작전참모 이주일 대령 등이 참석해 대책을 논의했다.

회의 결과 군단장은 적이 영천 돌파에 주력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국군 1사단과 6사단에서 각 1개 연대를 8사단에 배속해 영천을 고수하기로 했다. 당시 다부동과 신녕도 위기였기 때문에 이는 대단히 어려운 결단이었다. 그리고 군단장은 당장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전차부대의 지원이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직접 미 1기병사단과 8군사령부를 방문해 지원을 요청했다. 적측에서도 이날 영천 점령의 지연 책임을 물어 15사단장 박성철을 경질하고 부군단장 조광열을 임명해 영천 돌파를 재촉했다. 이날 밤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중앙의 16연대가 영천 외곽까지 밀리고 있었다. 이때 사단장 이성가 준장은 8연대로 역습을 전개해 가까스로 적의 돌파구 확대를 저지하게 됐다.
 

적의 돌파구 봉쇄와 반격 준비

9월 5일 야간부터 북한군 15사단은 영천을 공격하기 시작해 다음날 미명 수대의 전차를 선두로 읍내로 진입했다. 기습을 당한 16ㆍ8연대는 더 이상 적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하고 영천 남쪽으로 철수했으며, 영천을 점령한 적은 곧바로 경주 방면으로 진격을 계속했다. 8사단장은 즉시 군단에 증원 부대를 요청하고 오수동에서 철수부대를 재편성했다. 이날 오후 좌전방 21연대를 공격하던 적 15사단 45연대도 남하해 영천의 돌파구 확대를 기도했다.

이날 오전 사단 공병대대는 군단장의 요청으로 도착한 미군 전차 1개 소대(5대)의 지원 하에 영천읍내로 돌입했다. 공격부대는 영천역을 경비하고 있던 소수의 적을 격퇴하고 영천을 탈환했으며, 이때 40여 대의 차량과 10여 문의 대전차포를 노획했다. 공병대대는 전차의 지원 하에 완산동으로 진출했으나, 저녁 무렵 조교동 일대의 적으로부터 역습을 받을 위험이 있어 다시 물러났다.

9월 6일 오후 국군 2군단의 증원부대인 1사단 11연대와 6사단 19연대가 영천에 도착했다. 이로써 8사단은 비로소 영천 동북방에서 돌파 저지선을 형성하고 예비부대를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이때 적은 영천 북동에서 큰 돌파구를 형성하고 국군 전선을 절단하려는 기세로 임포동으로 전진 중이었다. 적 103연대와 73연대는 돌파구의 견부를 확대하기 위해 21연대를 공격 중이었다.

9월 7일 새벽 국군 21연대가 적 103연대의 공격을 수차례 격퇴했으며, 19연대도 아침 무렵 적의 보급지원부대를 기습해 큰 전과를 올리고 다음날 오후 2시 45분 영천을 장악한 적을 격멸하고 영천을 다시 탈환했다.

육군본부와 2군단의 기민한 지휘조치에 따라 9월 8일에는 적의 돌파구를 봉쇄하기 위한 연결된 방어선이 형성됐다. 방어선은 영천을 중심으로 적의 진출로를 따라 북쪽의 선천 21연대로부터 남쪽의 아화 5연대까지 낚싯바늘 모양으로 편성됐으며, 결과적으로 이러한 부대 배치는 적의 돌파구 저지는 물론 돌파구 첨단의 후방을 차단하고 반격으로써 적을 포위 섬멸하기에 적절한 것이었다.

총반격작전과 적 부대의 포위 섬멸

국군 2군단은 10일부터 총 반격전을 개시했다. 군단은 영천 북쪽에서 21ㆍ19연대 양개 연대로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영천 남쪽에서는 5연대를 선봉으로 총 5개 연대가 반격했다. 5연대는 포병과 공군기의 지원 하에 임포동 부근의 적을 기습해 차량 50대, 야포 10여 문을 파괴하는 전과를 달성했으며, 10ㆍ8ㆍ11연대도 미군 전차의 지원 하에 일제히 유상동, 유하동 방면으로 진출했다. 16연대는 재편성 후 작산동으로 진출해 무질서하게 퇴각하는 적을 추격했다.

8연대는 우측 11연대가 1사단으로 복귀하자 그 지역까지를 담당하고 5연대와 협조해 북진했다. 5연대는 임포동 부근의 적 56연대 본부를 공격해 전차 2대, 박격포 6문을 노획하면서 적을 격멸했으며 이로써 5일간이나 차단됐던 영천~경주 사이의 도로가 완전히 개통됐다. 이무렵 적은 퇴로가 차단된 상황에서 총반격을 받아 거의 전멸된 상태에서 분산 철수하고 있었다.

영천 남쪽에서 적을 추격하던 10연대는 11일 군단장의 명령에 따라 21ㆍ19연대 사이 신흥동을 경유해 곧바로 평천동으로 진출했으며, 21ㆍ19연대도 월곡동ㆍ운천동으로 각각 진출해 적의 퇴로를 차단했다. 각 공격부대는 12일 마침내 9월 공세 이전 8사단 주저항선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고, 반면 적 15사단은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영천전투의 결과

영천전투는 낙동강방어선에서 돌파되느냐 사수하느냐를 가름할 만큼 전쟁의 전환점이 된 중요한 전투였다. 특히 9월 5~6일 대구와 경주가 위협받을 무렵에 영천이 돌파되어 그 위기가 더욱 가중됐다. 북한군 2군단은 5개 연대를 투입해 영천을 점령하고 경주로 진출하려 했으나, 국군은 이곳에 신편된 7사단 3개 연대는 물론 1, 6사단의 각 1개 연대도 투입해 3개 사단으로 방어조치를 취하는 등 육군과 군단의 시의 적절한 지휘조치로써 위기를 극복하고 낙동강방어선을 지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국군은 영천 부근에서 적 사살 3799명, 포로 309명, 전차 5대 파괴, 장갑차 2대, 차량 85대, 소화기 2327정 등을 노획하는 대전과를 달성했으며, 후에 적의 지휘부가 평가한 바에 의하면 영천의 상실로 전체 작전의 패색이 짙게 됐다고 분석했다.

<양영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영천전투의 승리 요인

국군 8사단의 영천 섬멸전은 전략 전술적인 측면에서 몇 가지 분석이 가능하다. 먼저 지휘관의 적시적절하고도 과감한 지휘 결심을 들 수 있다. 국군 1군단이 담당하고 있던 지역 중 안강 정면이 돌파되고 그 다음 영천 지역이 또다시 돌파당하게 되자, 정일권 총참모장은 안강 정면을 1군단장이, 영천 정면은 2군단장이 담당하도록 군단 전투지경과 작전지휘 관계를 신속히 조정했다. 또 유재흥 2군단장은 작전회의를 열어 전투력 운용에 대해 과감히 결심함으로써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둘째는 전투력의 집중 운용이다. 전쟁의 궁극적인 목적인 적 부대와 적의 전의를 파쇄하기 위해서는 우세한 전투력을 결정적인 시간과 장소에 집중해야 하는데, 이는 절약을 전제로 이뤄지는 것이다. 바로 영천 지역을 결정적인 장소로 판단하고, 1ㆍ6사단에서 전투력을 절약하고 동해안에 전용됐던 부대를 원대 복귀시켜 집중적으로 운용함으로써 적 부대의 격멸이 가능했다.

셋째는 적시 적절한 증원부대 투입을 들 수 있다. 국군 8사단 우일선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9월 3일에 7사단 5연대를 투입했다. 9월 4일에는 2군단에 배속했던 7사단 8연대를 다시 영천 지역으로, 9월 5일에는 7사단 공병대대 병력 200명을 추가로 영천에 투입하고 1ㆍ6사단에서 각각 1개 연대를 차출해 투입했다.

적의 선두가 경주 방향으로 지향해 아화 방면으로 진출하자 안강 정면의 26연대 3대대를 차출 투입하고, 건천 방면으로 남하하던 5연대와 동해안에 전용됐던 10연대를 첨단에 증원해 적의 예봉을 꺾음으로써 적의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넷째, 견부를 확보하고 돌파구 첨단을 저지한 것도 승리의 발판이 됐다. 8사단의 중앙지역이 돌파되고, 우측방이 노출되자 21연대는 선천동과 대환동 방어선에서 진지를 고수하면서 북한군 103ㆍ73연대의 주력을 격파함으로써, 적의 증원을 차단하고 돌파구 확장을 방지할 수 있었다. 경주 방면으로 진출하는 적의 첨단을 26연대 3대대와 5연대·10연대를 투입해 저지했고, 적의 채약산 방면으로의 진출은 8연대를 투입해 저지했던 것이다. 적으로부터 돌파당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견부의 확보로, 영천 전투 때도 그 덕택에 전투를 승리로 장식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적의 측방 강타와 병참선 차단문을 들 수 있다. 국군 2군단은 19연대에 의한 적 후속부대의 기습 공격과 적 후방부대의 완전 섬멸로 영천 남쪽으로 진출한 북한군 15사단 주력의 증원을 차단 고립시켰고, 그런 가운데 아군의 총반격으로 적을 섬멸시킬 수 있었다.

 

 영천전투의 의의

영천전투의 의의는 영천이 적에게 일시에 점령되는 등 위기에 처하게 됐을 때 중요하게 결정된 문제들을 사안별로 분석해 보면 그 비중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먼저 전투 중 일시적으로 영천이 상실되자 육군본부와 미 8군사령부가 부산으로 이동한 것은 영천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둘째, 아군은 데이비드선으로의 철수가 검토됐다. 미 8군은 8월 초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할 당시, 울산 북쪽에서 경상남북도 경계선을 거쳐 함안을 연결하는 정면이 90㎞에 달하는 선상에 예비진지를 구축해 우발사태에 대비했다. 이 방어진지 축성 공사는 미 8군 공병참모 데이비드슨(Davidson) 준장 지휘 하에 주민들의 협조를 받아 완공한 것이었다.

셋째, 미 합참은 인천상륙작전 재검토 의사를 거듭 타진했다. 기계-안강에 이어 영천까지 실함되자 미 합참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맥아더 장군에게 인천상륙작전을 취소하고 낙동강 방어선을 보완하도록 하는 것을 재검토할 것을 권유하는 의사를 타진했다.

넷째, 영천이 돌파될 위기에 처하자, 미국은 한국을 한때 포기하겠다고 검토하고 있었다. 당시 미 합참에서는 대한민국 정부와 군대를 포함해 62만 명을 미국령 사모아도에 재배치, 신한국을 창설하겠다는 계획(New Korea Plan)을 승인했다. 이 계획은 한국민들의 반발을 고려해 사전에 거론하지 않았다. 9월 7일 영천 방어가 가망이 없어졌을 때,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이 정일권 총참모장에게, 이 철수계획을 알려 줬다.

이에 정일권 참모총장이 다시 영천을 탈환한다면 이 계획을 백지화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워커 장군은 “물론이다. 영천만 되찾는다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포항·안강·기계·다부동·왜관·창녕·마산 등 모두가 이곳 영천만 무사하면 다 무사해진다”고 암시할 만큼 영천의 중요성이 부각됐음을 알 수 있다.


유재흥 장군이 말하는 영천전투-美 전차소대 긴급지원 아군 사기진작 큰 효과

유재흥 전 국방부장관은 영천전투 당시
국군 2군단장으로 아군이 승리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지휘관 중 한 명이다.
유 장군이 구 전사편찬위원회에 증언한
내용을 소개한다.


1950년 9월 5일 전선을 직접 시찰하고 하양에 있는 군단 사령부에 돌아올 때 작전참모로부터 급보를 받았다. 아군 8사단의 방어진지가 돌파당했으며 전황이 매우 불리하다는 것이다. 만일 영천의 전선이 무너질 경우 적은 대구로 또는 경주 방면으로 진격할 가능성이 높았다.

만약 적이 대구로 향하면 2군단뿐만 아니라 미 제1기병사단의 후방까지 차단당할 위험이 있었다. 또한 적이 경주로 향하면 12사단과 합세해 부산으로 직접 진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경우든 전선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고 판단했다.

대비책을 논의하고자 1사단장, 6사단장, 참모들을 모아 놓고 급히 군단작전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영천은 오늘 밤이 고비인데 전세는 불리하며 육군본부도 부산으로 이동했다. 만일 영천선이 무너지면 우리는 부산교두보선으로 후퇴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나는 현 방어선을 한 자 한 치라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마지막 방어선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러므로 1사단과 6사단에서 각각 1개 연대씩을 뽑아 중점적으로 병력을 집중 사용할 방침이니 나의 최종 결의에 동의해 주기 바란다.” 이러한 군단장의 결심에 대해 두 사단장은 “담당 정면에도 병력이 모자라서 적을 막아내기가 힘든 이때에 1개 연대를 차출한다는 것은 전 전선의 위기를 자초하는 도박”이라며 병력 차출에 회의적인 입장을 밝혔다.

나는 “적의 주공이 영천 정면이라는 것은 이미 명백한 사실”이라며 “만일 적이 영천을 점령한 후 대구 혹은 경주 어느 쪽으로 향하든 간에 우리의 급선무는 영천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양개 사단에서 1개 연대씩 병력을 차출하는 것은 도박이 아니다”며 “적은 이번 공세에서 이미 약화됐기 때문에 우리가 병력을 전용해 중점적으로 집중 사용한다면 기필코 적을 격파할 수 있다”고 나의 결심을 피력해 회의 참가자들의 의견을 모을 수 있었다.

2개 연대 차출 결정을 내린 후 다음 문제는 전차였다. 전차 1개 소대(5대)만이라도 있다면 적에게 큰 위협이 되고, 아군의 사기를 올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았다. 미 1기병사단장 게이 소장을 만나 전차 지원을 요청했으나 미군 사정도 급했기 때문인지 ‘힘든 일’이라고 대답했다. 게이 소장은 “귀 군단은 후퇴할 것인가요”라고 질문해 왔다. 나는 “더 이상의 후퇴는 원하지 않는다”며 “전차를 지원하지 않는다면 나 자신이 직접 선두에서 싸우겠다”고 말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자 게이 소장은 “신중히 생각해 보자”며 약간은 함축성 있게 대답을 했다.

미 8군사령부로 찾아가 워커 중장에게 “2군단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전차가 꼭 필요하다”고 다시 상황을 설명하자 “게이 소장과 협조해 보라”고만 할 뿐 확답은 없었다. 전선 상황이 급박해 일단 국군 8사단으로 돌아와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데 미군 측에서 “내일 아침부터 미군 전차 1개 소대가 지원할 것”이라고 통보해 왔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확보한 2개 연대와 전차 소대는 아군의 영천전투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하동 전투

 

하동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날짜 1950년 7월 25일 ~ 7월 31일
장소 경남 하동, 진주
결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교전국
대한민국 대한민국
미국 미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
대한민국 채병덕† 영남 편성관구사령부 사령관 소장
대한민국 민기식 민부대장 대령
대한민국 박현주 제3연대장 중령
대한민국 유해준 제9연대장 중령
대한민국 김용주 제30연대장 중령
대한민국 이영규 이부대장 중령
대한민국 김성은 해병대장 중령
미국 존 H. 처치 미 제24사단장 소장
미국 네드 D. 무어 제19연대장 중령
미국 로버트 리 제1대대장 중령
미국 토마스 M. 맥그레일 제2대대장 중령
미국 웨슬리 E. 윌슨 미 제29연대 제1대대장 중령
미국 해럴드 W. 모트 제3대대장 중령
미국 허버트 R. 게이 미 제1기갑사단장 소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권무 제4사단장 소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방호산 제6사단장 소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후진 제13연대장 대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한일래 제14연대장 대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현기 제15연대장 대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박해진 포병연대장 중좌



하동 전투한국 전쟁 초기 진주 전투와 함께 채병덕이 이끄는 영남지구 편성관구 사령부가 미 제 24사단의 일부병력과 협동하여, 호남의 남안선을 거쳐 하동의 우회침공하는 북한군 제 6사단을 요격하여, 진주를 잃기까지의 7일간의 지연전을 일컫는다.

 

당시 육군본부는 1950년 7월 25일 작명 제 79호로써 전임 참모총장이던 채병덕 소장으로 하여금 남원-하동 방어선에서 이응준 부대와 민기식 부대를 통합지휘토록 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통신수단이 두절된 상황 하에서 이응준 부대는 순천으로 여수로 철수 중이며, 민기식 부대는 운봉으로부터 함양으로 지연전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하동에서는 연대장 중령 이영규가 이끄는 신편 제5사단 15연대의 일부 병력 100명만이 분산된 상태에서 삼삼오오로 집결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미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Walker) 준장은 7월 23일에 호남 방면으로 우회한 적이 시속 3.2km로 전진하여 그 선두가 진주에 도달하였을 것이라는 정보보고에 접하고 전날 김천 부근에 집결하여 정비 중에 있던 사단장 소장 존 H. 처치가 이끄는 미 제24사단을 급히 진주로 전진시키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따라, 사단의 제 19연대는 7월 24일 밤에 진주로 이동하고, 이어서 7월 25일 저녁에는 제29연대가 연대장 대령 네드 D. 무어가 이끄는 제19연대에 배속되었다.

 

이를 양 연대의 전력을 일별하면, 제 19연대의 실전 전투 병력은 600명이고, 장비는 T/E 35%이며, 연대장 무어 대령은 7월 25일에 부임하였으므로 아직 연대의 실정도 익숙치 못하였다. 또한, 제29연대는 7월 14일오키나와에서 출동명령을 받았는데, 연대장 및 연대본부는 새로운 연대 편성을 위하여 기간요원으로 잔류하고, 제1 및 제3양 대대만이 7월 25일에 진주에 도착하였으며, 병력 및 장비는 100%에 가까웠다.

 

 

작전 계획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7월 24일에 영남 편성관구 사령관으로 보직된 채병덕 소장의 신고를 받고, 『하동은 호남과 영남을 연결하는 요역이며, 진주 및 사천으로 이르는 통로이니 필히 방수하여야 한다.』라고 재삼 역설하였다.

 

채병덕 소장은 한때 패전의 책무를 통감하고, 실의에 빠져 있었으나, 이처럼 막중한 작전임무가 부여되자 생기를 되찾은 듯이 기뻐하고 다음날 아침에 정래혁 중령을 대동하고 하동으로 달려갔다. 여기서 현지를 정찰한 그는 동 지구의 중요성을 재인식 하였으나 이에 비추어 자연방비 태세가 되어있지 않음을 비로소 알고 개탄해 마지않았다.

 

이때, 그의 고충을 알아챈 정래혁 중령은 『제가 이곳에 남아 정보를 수집하면서 밀려 내려오는 부대를 수습하여 방어하겠습니다.』라고 보고하자, 채병덕 소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쾌히 승인하고 그를 남긴 채 진주로 돌아갔다.

 

그는 그 길로 미 제19연대장 무어 대령을 방문하여, 『호남지구로부터 동침중인 적을 하동에서 막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강조하고 자신도 하동으로 갈 것이라고 표명하였다. 이리하여 양자 간에는 하동을 고수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는데, 채병덕 소장은 공격제대의 고문으로 수행하기로 하였다.

 

이 무렵 7월 25일 오후 23시 육군본부로부터 작명 제 72호가 하달되었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긴급명령
『①하동방면으로 남하한 적은 1개 대대 규모이며 약간의 장갑차를 동반하고 있음.

②영남편성관구 사령관은 지체 없이 하동으로 약진하여 동침하는 적을 격퇴하라.
③행정사항: 장갑차 공격 시에는 휘발유병(휘발유 충전)을 사용할 것.
④전투지휘소의 위치를 보고하라.』

육군 본부

 

그러나 채병덕 소장에게는 수하병력이 전혀 없었으며, 때 마침 그의 곁에 있던 신편 제3연대장 박현주 중령과 부관 이상국 소령 및 김영혁 대위를 수행시켰을 뿐이다.

 

 

 

전투 과정

 

 

7월 26일

전투 4일 전부터 계속 내린 비로 대부분의 하천은 범람하여, 차량기동은 물론 항공지원까지도 제한 받았다. 단신으로 하동에 남았던 정래혁 중령은 피아의 상황을 전혀 아는 바 없었는데 그의 판단으로서는 화개장이 7월 25일 12:00에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갔기 때문에 17:00쯤에는 이곳 하동으로 들이닥칠 것이라고 보았으며, 그 이전에 원군이 도착하기를 일각여삼추의 느낌으로 고대하였다.

 

그런데 22:00가 되자 병사들은 제각기『적이 나타났다.』라고 소리치기 시작했고 이에, 정래혁 중령은 진전의 접근로를 망견한 듯, 틀림없이 1개 대대규모의 북한군이 종대행군으로 접근하고 있으며 그 선두는 이미 두곡리(하동 북쪽 700m)에 도달하고 있었다.

 

적을 단 1분간만이라도 지체시키기로 결심한 그는 지근거리까지 적을 유인하여 사격을 명령하였고 이리하여 10여분간 사격전을 벌였는데 그 사이 병사들은 임의로 이탈하므로 마침내는 12~3명의 남게 되어 이들 잔재 병력만을 이끌고 23:00에 하동을 빠져 진주로 향하였다.

 

한편, 이와 거의 같은 시각에 미 제19연대장 무어 대령은 하동을 뺏긴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배속된 제 29연대 3대대장 모트 중령에게 하동으로 진출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때, 동석하였던 채병덕 소장은 하동을 왕복하면서 관찰한 도로망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양 도로는 모두 협소한 도로일 뿐만 아니라 주 도로는 정곡리 서쪽 1km의 덕천강이 범람하여 곤양으로 우회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일렀다. 그리고 이날 00:30에 대대는 차량기동으로 진주를 출발하였는데, 도로를 가로지른 수많은 도량에 차량이 빠지는가 하면, 전방에 대한 수색을 마치고서야 대대가 진출하였던 까닭에 이를 수차 반복한 끝에 완전동으로 도착하였을 때에는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여기에서 하동으로부터 철수중인 정래혁 중령의 일행을 만나, 비로소 전날 밤에 하동이 적의 수중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채병덕 소장은 미 제29연대 제 3대대와 함께 하동으로 함께 진격하기로 했으나, 만일에 적이 남해안의 가도로 침공할 때에는 동 대대의 연락로가 차단 된 것은 물론이려니와 하동으로의 진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바로 이때, 민부대의 예하의 제30연대가 진주에서 부대를 재편성 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즉각 연대장을 초치하여 출격을 명령하였다. 이리하여, 동 연대는 미 제 29연대 제 3대대와 함께 진주를 출발하여 곤양에 이르러, 이로부터 미군과 함께 남해안의 가도를 따라 곤양 서쪽 7km 떨어진 진교를 거쳐 이날 밤 안으로 섬진강의 강구인 속칭 섬방까지 직진하여 야영하였다.

 

 

7월 27일

08:45에 대대장 중령 헤럴드 W. 모트가 이끄는 미 제33대대는 횡천리의 야영지에서 하동을 향하여 약진하였다. 행군서열은 L 중대(전위), 대대본부, K 중대, M 중대, I 중대(후위)의 순 이었으며, 전위인 L중대에게는 M중대에서 1개 소대를 증원하여 선도의 임무를 맡겼다.

 

대대가 한 시간 남짓 접적행군을 하여 L 중대가 쇠고개(우치)에 이르렀을 때, 최선두에 나섰던 중대장 사라(Sharra) 대위는 북한군 10명이 앞쪽 능선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중화기 소대장에게 사격을 명령하였다.

 

채병덕 소장과 동행중인 대대장 모트 중령은 중대장 사라 대위의 전황 보고를 받고 단숨에 쇠고개(우치)로 달려가 지형과 적의 동태를 살핀 다음, L 중대장에게 『고갯마루의 양쪽을 계속 견지하여 09.45에 있을 항공지원과 함께 하동으로 공격하라.』라고 명령하였다.

 

대대장 모트 중령에 이어 대대참모들이 쇠고개(우치)에 올랐고, 뒤이어 채병덕 소장의 일행인 박현주 중령, 김상국 대위, 김영혁 중위도 뒤따라 올라갔다. 이리하여, 쇠고개(우치)마루에 지휘관과 참모들이 한 곳에 모이게 되었으므로 북한군에게 좋은 목표가 되어버렸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대대장 모트 중령은 하동쪽에서 S자형의 길을 따라 쇠고개(우치)로 1개 대대규모의 적이 2열종대로 접근 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방금 K 중대를 산개시키고 이곳에 당도한 부대대장 레이블(Raible) 소령에게 『저 적을 주시하라.』라고 지시하였다.

 

이때, 채병덕 소장도 북한군을 쌍안경으로 목격하였으나 피아를 분간할 수 없었으니, 이는 그들이 약탈한 아군 복장으로 혼착하였기 때문이었다. 기습을 받은 적은 발광적으로 응사하기 시작하여 그들의 초탄은 미처 피신하지 못한 채병덕소장의 두부를 관통하여 그 자리에서 전사하고 옆에 있던 대대장 모트 중령, 부대대장 레이블 소령, 대대 S-2도 중상을 입었다.

 

한편 K중대는 181고지를 탈취하기 위l하여 49고지로부터 산개하여 약진 또 약진하여 동고지의 중복에 이르렀을 때에는 쇠고개(우치)에서 격전을 치른 L중대의 모리시(Morrissey) 소대가 적의 우측방으로 충격을 가하여 목표의 탈취는 용의한 듯 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은 시간이 흐를수록 병력과 화력이 점차 증강하여 중대의 진출은 7분 능선에서 못 박힌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대대 S-3 Flynn 대위는 대대장이 행방불명이 되고 부 대장마저 진주로 후송되자 이 위기를 자신이 직접 타개하기로 다짐하고 계동으로 달려가 중화기 중대로 하여금 K 중대의 공격을 사격지원토록 조취 한 뒤에 I 중대를 찾아 L 및 K 중대의 간극으로 투입하였다.

 

이리하여 양 중대는 중화기중대의 화력지원 밑에 공격을 재개하였으나 북한군은 진지를 굳힌 뒤였던 까닭에 얼마 안가 그들의 화망에 걸려 고립한 상태에서 우률좌률한다가 마침내는 양 중대장이 행방불명되면서 많은 사상자를 남긴 채 대오가 흩어져 계동 쪽으로 밀려났다.

 

미 제29연대 제 3대대는 적의 압축으로 쇠고개(우치)로부터 무질서하게 이탈하게 되자 1개 대대규모의 적은 곧 추격하여 계동으로 밀려들기 시작하였다. 이에 앞서 L 중대장 사라 대위는 계동에 이르러 중대를 수습하였는데 그는 동 중대만이 그곳에 남아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차량으로 동지를 출발하여 진주로 향하였다.

 

한편 대대 S-3 플린(Flynn) 대위는 L 중대의 모리시 소대를 이끌고 계동에 이르자 그곳에는 중대장을 잃은 I 및 K 중대의 병력 60명이 모여 있어 이들과 함께 잠시 휴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북한군으로부터 기습을 받고 분산되어 그는 사병 10명을 이끌고 7월 28일 아침에 진주에 도착하였다.

또한 I 중대의 어플리게이트(Applegate) 상사는 99명 병사를 이끌고 횡천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노량진(하동 남쪽 18km)에서 어선을 타고 여수에 갔다가 한국 해군의 초계정에 구출되어 부산으로 수송되기도 하였다.

 

이날 아침에 제 19연대 G 중대장은 연대장 무어 대령으로부터 진주-하동간의 준동할지도 모를 공비들을 소탕하며 후방지역 경계에 임하라는 명령을 받고 중대원 78명을 차량에 분승시켜 하동으로 향하던 중 옥정리(완전 서쪽 4km)에 이르러 삼삼오오 흩어져 내려오는 L중대의 잔재병력 50여명과 만났다.

제19연대장 무어 대령은 이날 오전까지도 하동진격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줄 알고 있었고, 오후에 후송된 제 29연대 제3대대 부 대대장 레이블 소령이 첫 보고를 하였을때도 상황을 낙관하고 있었다.

 

그런데 뒤에 속속 도착하는 탈출한 장병의 말을 듣고 비로소 전황의 전모를 알게 된 그는 대경실색하고 사단장 처치 소장에게 하동전투의 전말을 보고하고 그의 승인밑에 일단 동전투는 매듭짓기로 하였다.

 

 

 

결과 및 영향

 

진주 전투에서의 공방전을 마치고 7월 31일 전후하여 삼삼오오 군북에 집결하던 한국군의 각 부대의 실태는 연결된 이합집산과 전투 및 현지에서 편법으로 조달보급 할 수밖에 없었던 부족한 식량, 그리고 병력의 20%에도 미달한 소총뿐인 장비 등으로 말미암아 이미 전력으로 평가하기에는 너무도 처참하였다.

 

그러나 잠시도 유여할 수 없었던 육군본부에서는 조속히 이들 분산된 각 부대를 단일 지휘관 밑에 통합하여 활기를 되찾고 한미 연합작전으로 동침하는 적에 대비하기로 결정하고 이응준 소장을 초치하여 이 임무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진용을 가다듬을 사이도 없이 민 부대는 미 제24사단 제19연대와 군북선에, 그리고 해병대는 미 제25사단 제27연대와 진동리선에서 각각 협동하여 진지를 점령하고 오부대, 이부대, 김부대는 후방지역 경계에 임하였다.

 

한편 미 제24사단장 처치 소장은 7월 31일 밤에 중리(마산 서북쪽 5km)에서 동사단 예하의 제19연대장 무어 대령과 동 사단에 새로이 배속된 미 제25사단 제27연대장 존 H. 마이켈리스(Michaelis) 대령을 초치하여 개방된 마산 가도로 침공하는 적을 현선에서 요격 격파 하라고 엄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