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의 봄 21 : 현충일의 의미 8 (6.25 전쟁, 한국전쟁 7)
북악 둘레길에서 바라본 성북동 전경
초기 전투 ~ 낙동강 전투까지 주요 전투 4
오산 전투(스미스부대 전투)
오산 전투(Battle of Osan)는 1950년 7월 5일 한국 전쟁 당시 미군과 북한군과의 최초의 교전으로 북한군이 서울을 함락시키고 제2차 공세를 개시함에 따라 한국 전선에 적극 개입시키기로 한 미 행정부의 조치와 더불어 그 지상군 선발대가 최초로 출동하여 싸운 전투이다.
파병
6월 30일 해리 S. 트루먼이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 목표를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함에 따라, 7월 1일 미국 육군 제24사단 21연대 제1대대가 부산에 상륙했다.
이 부대는 대대장인 찰스 스미스(Charles B. Smith)중령의 이름을 따서 스미스 부대(Task Force Smith)로 알려졌다. 그는 과달카날 전투에서도 대대를 지휘하던 경험이 많은 장교였고 제21연대는 규슈 구마모토 우드 기지에서 주둔하고 있었다.
스미스 중령이 딘 소장으로 받은 작전 명령은 부산에 도착하면 대전으로 향하고 가능한 부산에서 먼 북쪽에서 적을 지연하고, 북쪽에서 주 도로를 차단하고, 존 H. 처치 장군을 만나라는 것이었다. 대대장의 이름을 딴 스미스 부대는 1950년 6월 30일 오후 3시 부산 수영비행장으로 공수되었다.
2개 중대 406명. 장병 1명이 M1 카빈 실탄 120발과 C-레이션 이틀분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부산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다음날 아침 8시에 대전에 도착하였다.
스미스 중령은 전방지휘소에서 처치 장군에게 신고하고 오산 북방 죽미령까지 지형정찰을 실시하고 대전으로 복귀하였으며 그날 밤 기차로 부대는 이동하여 평택과 안에 1개 중대씩 배치하고 대대지휘소는 평택에 설치하였다.
두 번째로 한국으로 이동한 제34연대는 7월 2일 부산에 도착하고, 7월 5일 평택 및 안성에 각각 1개 대대씩 배치하였다.
한국전쟁 최초의 미군의 교전
7월 3일 북한군은 한강을 넘어 남하하기 시작했고 스미스 부대는 7월 5일 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조선인민군과 첫 교전을 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한편 7월 4일로 대전에서 주한 미군 사령관으로서 작전을 지휘하게 된 24사단장 윌리엄 F. 딘 소장은 당시 전방지휘소(ADCOM)장 존 H. 처치 장군을 부사령관에 임명하여 본격적인 작전 지휘 태세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대전에 도착한 24사단 포병 사령관 조지 B. 바스(George B. Barth) 준장을 평택에 보내서 스미스 중령에게 처치 장군에게서 명령을 받은 대로 오산 북방에서 방어를 실시할 것을 다시 지시했다.
7월 5일 03:00시경 명에 따라 방어 진지에 도착한 스미스 부대는 부대 배치를 마쳤는데 도로와 철로 사이의 공간에 도로를 포함한 좌측 능선에 B 중대를, 철로 좌측편에 있는 진지 내 우측 고지에는 C 중대를 배치하고, 75mm 무반동총 1정씩을 각 중대지역에 배치시켰다. 그리고 4.2인치 박격포를 B 중대 후방 400야드 지점에 예비로 배치하였다.
52포병대대장 밀러 O. 페리 중령은 보병진지 후방 약 2000야드 떨어진 지점에 5문의 포를 배치하고, 1문의 포는 6발의 대전차 포탄을 줘서 보병과 포병진지 중간 언덕에 배치하였다. 그래서 비오는 7월 5일 아침 오산 북방 죽미령 지역에는 540명의 미군(보병장교 17명, 병 389명과 포병장교 9명과 병 125명)이 북한군의 진격을 기다리면서 전투식량으로 아침을 먹고 있었다.
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아침이었지만, 스미스 중령은 수원까지 볼 수 있었는데 07:00시가 조금 지나서 수원 가까이에서 북한군의 움직임이 보였다. 그로부터 30분이 지나자 똑똑히 식별할 수 있는 전차 대열이 기다리는 미군 병사들을 향해 오고 있었고 08:00시경 8대의 전차가 한 묶음이 되어 굴러오고 있었다.
전방관측 장교는 후방의 포병 진지에 사격임무를 요청했다. 08:18시 2문의 포가 두 발의 고폭탄을 뿜어냈다. 그러나 사거리 조정을 마친 포가 계속 포탄을 뿜어냈지만, 북한군 전차는 멈추지 않고 굴러오고 있었다. 75mm 무반동총을 감추고 있던 스미스 중령은 적 전차가 700 야드 내에 들어오자 사격 명령을 하달하고, 2.36인치 바주카포도 쏘아댔다. 전방에 추진된 포도 대전차포탄을 쏘아 댔으며 결국 무엇에 맞았는지 북한군 전차 2대가 멈췄다.
한 대가 불이 나서 타자, 3명의 승무원이 튀어나왔고 세 번째 튀어나온 북한군 병은 총을 가지고 미군 기관총 부사수를 쏘아 맞췄다. 최초의 미군 전사자가 한국 전선에서 나왔다. 그리고 이들 3명의 북한군 병은 미군의 총에 맞아 죽었으나 세 번째 북한군 전차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남쪽으로 향하고 뒤를 이어 총 33대의 전차가 보병 진지를 지나쳐 갔다.
스미스 부대는 대전차 포탄이 떨어지고, 나머지 화기는 북한군 전차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 한국 전선에서 미군과 북한군의 최초 접전은 이와 같이 진행되어 09:00경에 일단 끝났다.
보병 진지를 지나가는 북한군 전차를 보낸 미군 병들은 “아마 저 친구들이 우리들을 못 알아보았기 때문에 지나갔지, 미군이 왔다는 사실을 알면 되돌아 갈 것이다.”라는 생각과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후방의 포병에게 적 탱크가 보병 진지를 지나갔다고 알려 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포병은 대전차 포탄이 아닌 고폭탄으로 탱크에 직접 사격을 실시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그러다가 한 105mm 포가 적 전차의 궤도를 명중했다. 그러자 북한군 전차는 멈추었으나 밀러 O. 페리 제52포병대대장이 그 안에서 튀어나온 북한군 병 2명의 총격을 받아 부상을 입어 결국 사망하게 되었다.
33대의 적 전차는 스미스 부대의 포병 진지까지 통과하면서 4대가 파괴되거나 움직일 수 없게 되고 3대가 부서지는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오산을 향해 남진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전차가 지나간 죽미령의 미군 진지에는 다시금 불안한 정적이 찾아왔다.
이로부터 한 시간이 지나갔을까 하는 즈음에, 스미스 중령은 수원 가까이에서 긴 행렬의 트럭과 보병이 접근해 오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비가 끈질기게 쏟아지는 가운데 내려오는 적 보병의 행렬은 약 6마일(10km) 정도였다. 3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접근하는 이 보병 행렬은 한 시간 후면 미군의 방어 진지에 도달할 것으로 판단되었는데 이는 북한군 4사단의 주력이었다.
북한군의 호송트럭이 1000야드 전방에 접근했을 때 스미스 중령은 “그들을 엄벌에 처하라(Throw the book at them).'라는 명령을 내렸다. 박격포, Cal 50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적 트럭에 불이 붙고, 어떤 적 병은 공중에 튀어 오르기도 했다. 곧 3대의 적 전차가 접근하여 전차포와 기관총을 쏘기 시작했다. 북한군 병들은 트럭에서 내려 산개하기 시작했다. 이때 시계는 11:45를 가리키고 있었다. 양측 보병의 접전이 시작되었다.
이로부터 3시간 동안 싸운 스미스 부대는 포병과의 연락도 이미 되지 않았고, 소총탄도 다 떨어져가서 더 이상 싸울 수가 없었다. 스미스 중령은 우측에 있는 C중대를 먼저 철수시켰다. 그러나 나중에 철수한 B중대의 2소대는 철수명령도 전달이 되지 않을 정도로 다급하게 철수를 서둘렀다. 부상이 경미한 병들은 본대와 합류해서 철수 했지만 중상자들은 어쩔 도리가 없이 전쟁터에 남겨지게 되었고 그 후 상당수가 사망하여 영원히 보지 못하게 되었다.
포병 대대장과 합류한 스미스 중령은 잔류병을 끌고 안성을 통해서 7월 6일 천안에 도착했고 다행히 북한군은 미군이 버린 무기와 탄약, 그리고 전투식량에 만족했던지 스미스 부대를 추격하지 않았다. 철수 명령을 제대로 받지 못한 B중대원은 며칠 후에 오산에 도착하기도 하고, 어떤 병은 동해안, 어떤 병은 서해안에서 조각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하기도 했다.
540명의 스미스 부대원 중에서 150명이 전사하고, 포병대대 소속 장교 5명과 병 26명은 실종되어 최초로 투입된 미군 부대의 피해는 결코 적지 않았다. 미군이 가진 대부분의 장비는 북한군의 손에 들어갔으나 북한군 4사단도 42명의 전사자와 85명의 부상자, 전차 4대를 손실했다.
최초 접전 치고는 쌍방간에 피해가 많았다. 스미스 부대는 이와 같이 많은 사상, 실종자를 내면서 적의 진격을 약 7시간 지체시켰던 것이다. 7시간을 벌기 위한 인명 피해와 빼앗긴 지역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이제 진격해 오는 북한군은 미군이 한국 전선에 투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엔의 결의안과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결의가 현실적으로 전쟁터에서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결과 및 영향
스미스 부대의 무참한 패배로 미국 지상군의 전선 투입이라는 위세만으로 북한군의 남침이 중단되기를 바랐던 더글러스 맥아더나 윌리엄 F. 딘의 한가닥 기대는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나중에 더글러스 맥아더의 뒤를 이어 유엔군을 지휘하게 되는 매슈 리지웨이는 그의 회고록에서 맥아더는 침공군의 세력을 잘못 판단했으며 인민군 10개 정예사단 앞에 1개 대대를 투입한 것은 맥아더의 지나친 오만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스미스 부대의 참패에 대하여 성공이라고 자평했다.
맥아더가 스미스 부대의 참패를 성공이라 판단한 이유는 미 지상군 참전에 예기치 않던 인민군이 미군 참전을 직접 목격하고 소련 전법에 따라 일단 전선을 재정비하면서 미군은 10일을 벌었다는 것이기 때문미다.
이후 미 지상군은 7월 20일까지 15일간 평택-천안, 전의-조치원, 금강(공주-대평리), 대전에서 북한군 제3,4보병사단과 제105전차사단을 상대로 전투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윌리엄 F. 딘 소장이 포로로 붙잡히는 불상사도 발생했다.
평택-안성 전투
평택-안성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 |||
평택-안성 전투 지도 | |||
날짜 | 1950년 7월 5일 ~ 7월 12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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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경기도 평택, 안성 | ||
결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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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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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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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규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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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안성 전투는 한국 전쟁 중기 미국 스미스 부대가 오산 전투의 서전에서 패한 뒤로, 윌리엄 F. 딘(William F. Dean) 소장이 이끄는 미 제 24사단의 주력이 축차 투입되어 경부 국도상에서 지연전을 벌이면서 7월 5일에 평택 부근에서 제34연대의 일부가 북한군과의 교전으로 총격제일성을 신호로 한 이래로 국도를 선혈로 물들이는 치열한 각축전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제21연대와 더불어 천안-전의-조치원을 연하는 선을 중심으로 일진일퇴케 된 결과, 7월 12일에 마침내 금강 남안쪽으로 물러서게 되는 것이 그 경과의 대요이다.
6월 30일 미 극동군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Mac Arthur) 원수가 주일 미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Walker) 중장에게 『제24사단을 한국으로 이동시키라.』라는 명령을 하달함에 따라 1950년 7월 1일 오전 3시 15분 서달된 동 제8군사령부의 작전명령 제2호에 의거해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동사단의 선견대로서 7월 1일 낮에 이타주케(Itazuke) 공군기지에서 부산의 수영 비행장으로 공수되었거니와, 이 부대가 오산 부근에서 적을 맞이할 태세를 갖추고 있을 무렵인 7월 4일 저녁에 사단의 주력 일부인 제2진이 대전으로 진출하였다.
작전 계획
사단장 윌리엄 F. 딘(Dean) 소장은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를 오산 부근으로 투입할 당시 까지만 하여도, 그 역시 북한군의 전력을 대수롭지 않을 것으로 오판한 결과, 오산 북쪽에서 동 부대가 북한군을 능히 저지하여 시간을 얻게 된다면 그 동안 후속할 제34연대를 안성-평택선에 전개하여 이 연대로써 적의 남진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으리라고 판단한 듯 하였다.
그리하여 7월 4일 오후, 제34연대 1대대가 연대의 선발대로 먼저 대전에 도착하자, 사단장은 우선 이 대대로써 평택 부근에 축차 진지를 급편케 함으로써 스미스 부대의 철수에 따른 엄호와 수용임무를 아울러 맡도록 응급조치한 다음, 7월 5일 새벽에 제 3대대와 연대본부가 당도하게 되자 동 연대장 제이 B. 러브리스(Lovless)대령에게 이르기를,
긴급명령 |
『①한강을 도하한 적은 기갑부대와 함께 수원 부근에서 남하중이며,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오산 부근에서 그들을 조치할 것이다. <bt>
②귀연대의 제1대대는 평택 부근에서 진지를 점령중일 것이다. 제34연대장 대령 제이 B. 러브리스 |
라고 세부사정까지 지시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이 사단장이 안성-평택선에 방어선을 펴기로 한 것은, 당시 평택-성환-천안의 경부국도의 방어에 주안을 둔 사단의 당면한 임무로 보아,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일 것으로 풀이된다.
첫째, 평택은 금강 이북지역에서 국도의 방어에 가장 유리한 지형이라고 판단한 듯하니, 그 서쪽은 아산만에 연하는 안성천이 자연적으로 평택의 서측방을 방어하는 형세이고, 동쪽의 안성과의 사이에는 남북의 종단도로가 빈약하므로 적의 공격축이 오산-평택의 국도상으로 지향되리라 내다 본 것이다. 따라서 북한군의 입장에서는 정면공격 외에 이에 대하여 달리 우회 포위가 어려울 것이니 만큼 아방으로서는 그야말로 일부당관의 요충이라고 말할 만 한 곳이라는 것이다.
둘째, 안성은 경기와 충청내륙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 안성-천안의 안성의 안성선 철도의 시발점이자, 동북으로 장호원, 동남으로 진천, 서남으로 성환과 천안, 서쪽으로 평택, 북쪽으로 용인과 오산으로 연결되는 방사선도로의 축심지역이다. 그러므로 북한군이 안성을 수중에 넣게 되면 그 일대의 평야를 장악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성환이나 천안으로 직충하여 국도의 동측방을 협위할 수 있다, 아울러 금천-청주로 빠지는 길목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2개 대대의 연대 담당정면으로서는 매우 광대하여 병력을 분산 사용하는 폐가 심하지만 견제와 억유로서 축차저항 한다면 사단주력의 진출까지 필요한 시간을 능히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사단장은 안성-평택선을 잃게 되면, 그 금강이북 지역에서는 적과의 결전을 시도하기 위한 본방어선을 편성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연대장 러브리스 대령은 낮 중으로 연대본부를 성환 읍내에 개설하는 가운데 데이비드 H. 스미스 중령 (David H. Smith)이 이끄는 제3대대를 안성으로 추진시켜, 장호원과 용인 쪽의 도로를 방어토록 하였는데, 연대에 예비 병력이 없음을 감고하여 동 대대의 L 중대를 뽑아 성환에 예비로 배치하는 한편, 연대의 중박격포 중대 4.2인치 중박격포를 전선의 양 대대에 분할 배속하였다.
그리하여 제 3 대대는 I, K의 2개 중대로써 안성의 동북쪽과 서북쪽의 도로를 지키게 되었고, 제 1대대는 지휘소를 평택 북쪽 외곽의 민가에 개설하고, C중대를 예비로 확보하는 가운데 A, B 양개 중대로써 경부국도의 방어에 임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무렵부터 일기가 불순하여, 비가 내리는가 하면 안개가 낮게 깔리기도 함으로써 당시 연대의 무전기로서는 성환과 평택 및 안성 사이의 통신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유선마저도 피난민에 의하여 노끈 대용품으로서인지 절단이 되는 사례가 잦았던 탓으로 이 역시 거의 불통상태여서, 연대장의 지휘조치가 적기에 이루어질 수 없었으므로 전선대대는 실제로 대대장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행동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전투 과정
7월 5일
이날은 미지상군의 교전 제1일이자 제34연대의 참전 초일이기도 하다. 연대는 같은 날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죽미고개를 피로 덮는 혈전을 벌인 것과는 달리, 큰 접전 없이 안성-평택선을 유지하였다.
제1대대의 상황: 05:00에 제1대대는 신임대대장 헤럴드 B. 에이리스(Ayres) 중령 지휘하에 평택으로 진출하였다. 대대는 읍의 북쪽 국도변의 한 민가에 지휘소를 개설하고, 그 부근에 C중대를 예비로 공치하는 가운데 주력 A, B 양 중대를 그 4km 북쪽으로 추진시켜 도로의 동쪽 칠괴리 부근에 사단 포병사령관 대리인 조지 B. 바스(George B. Barth) 준장이 오산으로부터 평택에 도착하였다.
바스 준장은 목격한 바의 스미스 부대 교전상황을 대대장 에이리스 중령에게 전하면서 아울러 이르기를 『곧 적의 전차가 들이닥칠 것이니, 전방을 정찰하여 경보토록 할 것이며, 로켓포조를 추진 배치하여 전차에 대비토록 하라.』라고 하였다.
이에 대대장인 예비인 C중대에서 1개 소대를 뽑아 2.36인치 로켓포를 장비케 하여 찰스 E. 페이에(Charles E. Payne)중위 지휘 하에 차량으로 국도를 따라 북상케 함으로써 북한군 전차의 남하를 막도록 하는 한편, 좌일선인 A중대로 하여금 본도상에 대전차 차단진지를 급편케 하였다.
스미스 부대는 죽미고개에서의 서전에 패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14:30부터 죽미고개에서 철수를 시작하였으나, 그때 이미 북한군의 전차가 오산을 지나 남하한 뒤였으므로 국도를 따라 평택으로 철수치 못하고, 오산에서 안성의 목표로 지향하여 저녁 무렵 그곳에서 집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곳의 제 3대대와 합세하였지만, 당시 그곳과 성환사이에 통신이 여의치 못하여 동 부대의 철수상황을 연대에 급보치 못한 것인데, 이로 말미암아 평택의 제1대대와 성환의 연대, 그리고 대전의 사단지휘부 등이 모두 오리무중에 안타깝게 방황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7월 6일
제34연대(연대장 대령 러브리스)는 안성-평택선에서 천안으로 물러서게 되었다
바스 준장은 사단장이 스미스 부대에 대한 동향 보고를 입수치 못한 채로 불길한 예감만을 안고 대전으로 떠난 직후인 01:01를 전후하여 평택의 제1대대 지휘소에 오산 부근에 본대와 낙오되어 방황하던 스미스 부대원 4명이 귀환하여, 비로소 동 부대의 퇴패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그 무렵에 안성에서 제52포병 대대장 페리 중령이 급착함으로써 그 전황의 윤곽이 들어나게 되었다.
이에 바스 준장과 대대장 에이리스 중령은 『현 진지를 고수한다.』는 방침을 굳히고, 대대의 결전 태세를 가다듬었는데, 이때 동 준장은 사단장 대리로서 동 대대장에게 『최선을 다하여 현 진지를 고수하되, 특히 후방경계를 강화하고 퇴로를 확보하여, 스미스 부대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라.』고 강조하였다.
대대장의 결심: 그로부터 수분 뒤 대대장이 대대지휘소에 당도한바 연대 S-3인 듄(Dunn)소령이 연대장의 명령을 휴대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대대장이 그에게서 수령한 연대장의 명령에 이르기를 『위험하지 않을 정도로 진지를 지키다가 천안으로 철수 하라.』는 것이었는데, 동 S-3대대에 급파된 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이날 이른 새벽에 안성으로부터 스미스 부대가 도착함으로써 그 부대의 퇴패 소식을 듣게 되었으나 그 뒤로 평택의 제 1대대로부터는 아무런 보고를 입수치 못하였으므로, 연대장의 명령전달과 더불어 동 대대의 상황을 직접 확인코자 한 것이었다.
대대장이 지휘소에 도착하는 즉시로 유선으로 B중대의 전황을 알아본바 동 중대 역시 A중대와 다름이 없었다. 이에 『천안으로 철수하라.』는 연대장의 명령에 있어서 그 철수시기를 「대대장의 판단에 따라 결정하라.」는 것으로 해석한 대대장은 동 S-3와 함께 상황을 검토한 끝에 대대를 천안으로 철수시키기로 단안을 내리고, B중대에도 철수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어서 대대는 09:00에 지휘소를 철수하여 성환으로 이전하는 한편, 지원중인 한국공군의 교량폭파조로 하여금 일선 중대가 평택에 집결하는 즉시로 평택 북쪽의 통복천 교량을 폭파토록 하였다.
지정진지의 확보: 한편 이날 아침 바스 준장이 성환을 떠나 천안에 도착한 바, 때마침 제21연대 제1대대의 잔여병력인 A중대와 D중대 및 본부중대의 일부가 열차편으로 천안역에 도착 중이었는데, 이들은 7월 1일에 이타주케(Itazuke)기지에서 먼저 떠난 본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를 찾아 후속 중이었던 것이다.
이를 본 동 준장은 제34연대가 동읍으로 철수할 것이라는 예상 아래, 이로써 천안 남쪽에 새로운 방어진지를 마련토록 하였다.
결과 및 영향
제21연대 제3대대가 전의 전투에서 크게 패한 다음날인 7월 12일 오후에 조치원 북쪽에 홀로 남았던 동 연대 제1대대 역시 2000명으로 추산되는 북한군으로부터 동·북·서의 삼면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에 동 연대장 리처드 W. 스테픈스(Stephens) 대령은 그 대대로써 진지의 고수만을 고집할 경우, 전날 제3대대의 전철을 밟게 될것이 명약관화한 사실이라 하여 대대를 철수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동대대로 하여금 조치원으로 집결하여 차량편으로 금강 남쪽의 대평리로 철수토록 조치한 다음, 12:00에 이와 같은 상황을 재 대전의 사단장에게 보고 하였다.
연대장으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은 대대장 스미스 중령은 북한군과의 교전으로 말미암은 손실을 줄이기 위하여 1개 중대씩 한꺼번에 진지에서 뽑도록 함으로써 그들의 추격을 끊도록 하였다. 이에 대대는 철수중 접전 없이 조치원 부근에 집결하여, 연대 CP부근에 북한군의 포탄이 작열하는 가운데 그곳을 떠나 차량으로 경부본도를 따라 금강을 건너게 되었다.
그런데 전날에 제 19연대를 대전으로 집결토록 명령한 사단장 딘 소장은 이 연대로써, 제21연대가 조치원에서 철수하는 동안에, 금강 남안의 대평리 부근에 진지를 점령키로 하였으나. 이들의 대전 집결이 늦어져 이날 제21연대가 강을 건너 넘어설 때까지도 대평리에 당도치 못하였다.
이에 하는 수 없이, 강을 건넌 제21연대가 대평리에서 재수습된 325명의 병력으로써(제1대대원 261명, 제3대대원 64명) 강 남안의 제방에 연하여 새로운 방어진지를 점령케 되었다.
한편 7월 11일에 공주로 빠진 로버트 L. 워싱톤(Robert L. Wadlington) 대리 중령 제34연대는 먼저 금강을 건넌 제3대대로써 공주 부근에 진지를 점령케 한 뒤 7월 12일 일몰 무렵에 강의 남쪽에 남겨 놓았던 제1대대를 철수시키고 21:00에 강에 가로 놓인 금강교를 폭파하여 경간의 일부를 파괴함으로써 이 연대 역시 제21연대와 같은 날에 모두 금강 남쪽으로 물러서게 되었다.
그런데 7월 11일에 유구에 침입한 북한군을 크게 무찌른 바 있는 박익균 중위가 이끄는 기병중대는 7월 12일 아침 예산을 떠나 유구를 거쳐 오후에 다시 공주로 복귀하게 되었는데 22:00에 금강 북안에 이르자 이미 교량이 파괴된 다음이므로 마필의 도강이 어렵게 되었다.
이에 중대는 강의 서안을 따라 밤새 말을 달려 이튿날인 7월 13일 새벽에 부여의 대안에 이르러, 그곳에서 배를 구하여 강을 건너, 7월 14일 아침에 공주의 제34연대와 다시 합세케 되었다.
이상과 같이 사단은 7월 12일 오후에 금강 남쪽으로 철수하여 새로운 방어태세를 갖추게 되었거니와, 제21연대의 2개 대대로써 북한군 제3, 제4 2개 사단을 조치원 북쪽에서 3일 동안 지연시킨셈이 되었다.
그러나 7월 12일 조치원을 상실케 됨으로써 사단장 딘(Dean) 소장이 우려한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으니, 동쪽의 청주에서 최현 소장이 이끄는 북한군 제2사단을 막고 있던 김양원 준장이 이끄는 수도 사단도 이날 청주에서 물러났다.
이리하여 북한군은 이날 밤중으로 제3사단과 제105전차사단을 대평리 정면에, 제4사단을 공주 정면에 각각 전개한 다음 금강의 도하를 노리게 되었으며, 사단은 2개 연대로써 이들 북한군 2개사단을 맞아 다시 공방을 겨루게 된다.
대전 전투
대전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 |||
대전에서 철수하는 국군과 경찰 | |||
날짜 | 1950년 7월 14일 ~ 7월 2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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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대한민국 대전광역시 | ||
결과 | 전술상 인민군 승리, 전략상 미군 승리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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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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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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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규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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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전투(大田戰鬪)는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7월 14일 ~ 7월 21일까지 대전에서 벌어진 전투로 미군은 20일까지 대전을 지키는데에는 성공을 했지만,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과 전투다운 전투를 하지 못하였고 배후를 봉쇄한 인민군에 의하여 계획대로 퇴각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철수했다.
북한군 전차를 격파할 목적으로 채피 경전차와 미국에서 공수된 신형 3.5인치 로켓포를 처음 이용하여 전투를 치를 수 었고, 미군은 3.5인치 로켓포로 인민군의 탱크를 처음으로 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군 제24사단 사단장 윌리암 에프 딘 소장이 포로가 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후 7월 3일에야 북한군은 한강을 넘어 도하하기 시작하였다. 윌리엄 딘 소장은 이날 대전 비행장에 내려 중부전선의 방어를 시작하였다.
7월 5일 오산에서 첫 전투를 치른 미8군 제24사단은 평택-천안, 전의-조치원, 금강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하면서 7월 16일 밤부터 7월 17일까지 금강방어선에서 철수하여 대전으로 집결하였다.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7월 18일 포항으로 상륙 예정인 제1기병사단을 영동에 전개하기 위해 7월 20일까지 대전을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7월 12일 조치원에서 마저 북한군에게 돌파당하자 딘 소장은 대전으로 들어오는 주요 도로와 다리를 폭파하고 탱크 장애물을 매설하였다.
딘 소장의 밑에 있던 3개 연대인 제19연대, 제21연대, 제34연대는 전투력이 거의 소진되었지만, 대평리-공주 전투 후 이틀간 재정비를 한 제34연대에게 대전방어 임무를 부여할 수밖에 없었다.
전투 준비
1950년 7월 14일 인민군 4사단은 107전차연대와 함께 공주에서 금강을 건너와 일부는 7월 15일 논산을 점령하였고, 5연대는 공주에서 유성방면으로 진출하여 18일 유성을 점령하였다.
16연대는 논산을 거쳐 가수원으로, 5연대는 금강을 넘어온 3사단과 함께 유성으로, 18연대는 논산에서 금산으로 우회하여 대전의 배후를 공격하여 왔다. 3사단은 203전차연대와 함께 16일 금강을 건너 대평리를 점령하였다. 불어난 금강의 물 때문에 7월 18일까지 탱크 도하가 계속되었다.
미군은 딘 소장의 24사단 34연대로 하여금 갑천 방어선을 구축하고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하였다. 그러나 34연대는 금강전투에서 많은 병력을 상실하여 1개 대대 반 정도의 전력만 가지고 있었다.
1대대는 갑천이 내려다보이는 현 선화감리교회 뒷산(138고지)와 월평정수장 서쪽 정상(193고지)에 배치되어 만년교 쪽을 경계하였고, 3대대는 남선봉 공원의 고지에서 배후를 지켰다. 청주로 이어지는 길은 읍내동 육교에서, 논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정림동에서 각각 한 개 소대가 방어를 하였다.
딘 소장은 19일 밤 대전에서 철수할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18일 대전비행장을 방문한 워커 사령관이 20일까지 대전을 지켜줄 것을 희망하여, 19일 오전 영동에 있던 19연대 2대대와 금산에 있던 사단 수색중대를 대전으로 이동하도록 했다.
19일 전투
인민군의 본격적인 공격은 19일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북한의 야크 전투기 6대가 7시 20분 영동의 21연대 상공을 지나 옥천 북서쪽 3.2km 지점에 있는 철교에 폭탄을 투하해 파괴했다. 그 중 4대가 34연대의 지휘소가 있는 대전비행장에 폭격을 가했는데, 미군 26방공포병대대에서 대공사격을 실시하여 유성 부근에서 야크 전투기 2대를 격추시켰다. 미 공군기가 투입되자 야크기들은 퇴각하였고, 미 공군기는 유성과 가수원 부근에 폭격을 가하였다.
19일 오전에는 대대적인 포격전이 전개되었다. 인민군 4사단 5연대는 미군 34연대 1대대의 주진지(선화감리교회 뒷산)와 대전비행장 연대지휘소에 포격을 퍼부었다. 또한, 공격을 받은 유성의 34연대 B중대는 후퇴하여 월평동 산 동쪽 갈마동에 있던 대대본부로 이동하였다. 포격이 계속되자 34연대는 19일 오후에 대전비행장에 있던 포병진지와 지휘소를 도청과 충무체육관 인근으로 옮겼다.
19일 오전 가수원 쪽에서도 인민군이 출현하였다. 금산에서 이동해온 미군 수색중대가 계백로를 순찰하던 중, 10시 30분경 진잠 인근에서 인민군으로부터 사격을 받자, 34연대 L중대가 도솔산(189고지)를 점령하였다. 정오부터 가수원 다리를 통해 갑천을 넘으려는 인민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딘 사단장이 M-24 탱크 2대를 직접 지휘하며 독려했으나 밀리는 상황이 되었다. 정오에 대전역에 도착한 19연대 2대대는 1시경 정림동에서 가수원 다리가 내려다보이는 남북 고지를 점령하고 도솔산 진지를 회복하였다. 19연대는 지휘소를 유천동(현재 버드내아파트)에 두고, 예비 중대를 산성네거리 인근에 배치하였다. 19연대 2대대는 밤새 가수원 구봉산 기슭에 포를 설치한 인민군 4사단 16연대와 화력전을 반복하였다.
인민군 4사단 18연대는 보문산 남쪽의 소로를 따라 금산과 옥천으로 가는 길을 차단하려고 이동을 시작했다. 자정 무렵 미군 사단수색 중대는 상소동 부근 금산길에서 인민군의 사격을 받아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20일 전투
새벽 2시경 옥천길에서 미군의 지프차가 인민군 매복병과 조우했으나 통행에는 별다른 지장을 받지 않았다. 새벽 3시경 수색중대 3소대는 상소동 부근으로 출동하여 진지를 점령하고 밤을 새우게 되었다. 그러나 옥천길과 금산길을 차단하고자 했던 북한군의 이러한 징후는 딘 소장에게 보고되지 않았다.
새벽 3시 유성의 인민군은 탱크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전면 공격을 개시하였다. 인민군은 현재 갑천도시철도역 근처를 우회하여 선화감리교회 쪽 고지에 있던 대대관측소를 공격하는 한편, 월평공원의 산기슭으로 숨어 들어 138고지를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34연대 1대대는 진지를 버리고 후퇴하기 시작하였고, 새벽 4시경에는 갈마동 한밭고등학교 인근에 있던 대대지휘소가 공격을 받았다. 선화감리교회 앞길에 3.5인치 로켓포가 배치되어 있었으나 후방이 공격을 받자 진지를 이탈해 대대지휘소로 철수했다.
인민군의 탱크가 계룡로를 따라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이를 본 1대대장은 새벽 5시경 계룡로가 아니라 내동을 거쳐 계백로를 이용하여 시내로 들어가도록 지휘하였다. 새벽 4시경 연대장은 월평동 진지가 붕괴되었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통신이 두절되어 통신선을 복구하라고 지시했다. 통신선을 복구하려다가 되돌아온 통신대는 대전비행장 부근의 도로에 적병력이 거리낌 없이 이동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직접 지프차를 타고 나선 34연대장은 서대전네거리를 지나 유성방향으로 가다가 시내로 돌진 중인 인민군 전차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탱크의 기관총 공격을 피해 지프차에서 뛰어내린 그는 서대전네거리에 있던 3.5인치 로켓포조에게 탱크를 격파하도록 명령했다. 먼저 공격을 가한 로켓포탄이 명중해 적 탱크는 화염에 휩싸였다. 한국전쟁에서 3.5인치 로켓포가 최초로 북한군 탱크를 격파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어 새벽 6시경에도 수침교를 건너오던 적 전차 2대가 격파되었다. 그러나 필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6시 30분경 인민군 전차 3대가 대전시내에 진입했다. 탱크에는 보병이 탑승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저격병으로 변하여 하루 종일 시내를 교란하였다. 시내에 들어온 적 탱크는 닥치는 대로 총포탄을 퍼붓기 시작했다.
지금의 중구청(구 시청) 자리에 있던 본부중대가 적 탱크로부터 공격을 받아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즉시 3.5인치 로케트포 공격이 개시되었다. 첫 번째 탱크의 측면을 명중시키고, 두 번째 탱크의 철갑을 부수었고, 세 번째 탱크는 포탑을 명중시켰다.
첫 번째 전차는 멈칫하다가 그대로 역 광장으로 진행해 장비와 보급품에 사격을 가하다가 무한궤도가 끊어져 정지하였다. 두 번째 전차는 그 자리에서 불타버리고, 세 번째 전차는 포탑을 덜렁거리며 도주했다.
정림동의 미군 19연대 2대대는 밤새 화력전을 벌였다. 새벽이 되자 인민군은 갑천을 건너 왔다. 미군은 계백로 북쪽 천변의 주진지에서 도솔산 정상(189고지)로 물러났으나, 6시경에는 이마저 지켜낼 수 없게 되었다.
유천동 버드내아파트 인근의 대대지휘소에 있던 대대장은 서대전네거리에 인민군 탱크가 출현했다는 보고를 받자, 예비중대의 한 소대에게 서대전네거리로 가서 그곳에 있는 수색중대와 후방을 방어하라고 명령했다.
대대장은 이때 월평동에서 버드내아파트 인근으로 후퇴한 34연대 1대대로부터 전투상황을 듣고 후방이 차단되었다고 판단했다. 곧 도솔산에서 퇴각한 병력이 대대지휘소로 들어왔다.
대대장은 서대전네거리로 보낸 소대로부터 보고가 없이 11시경이 되자, 시내의 연대본부로 연락병을 보냈다. 그러나 곧 연락병과도 통신이 두절되었다.
대대장은 정림동 계백로 남쪽에 있던 잔여 병력에게 보문산 중턱으로 후퇴할 것을 지시하였다. 정오가 되자 대대장은 지휘소를 보문산 중턱으로 이동한 후 연대본부에 인편으로 상황을 보고하는 한편, 산성네거리의 예비중대에게도 인편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13시 19연대는 계백로에서 모두 철수하였고, 이들은 모두 보문산 정상으로 집결했다.
20일 아침 남선봉공원에 있던 예비대대인 34연대 3대대는 연대본부로부터 월평공원의 중간지역, 즉 월평동 고지와 정림동 고지 사이에 있는 약 1km 가량의 공백을 메우라고 지시를 받아, 한개 보병중대와 화기중대를 보냈는데 용문동 롯데백화점인근 계백로 상에서 인민군 탱크 6대와 1개 보병대대 마주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갑천변의 병력 증원을 포기하고 남선봉 공원의 진지로 철수하였다.
05시경 월평동 진지를 버리고 후퇴한 34연대 1대대는 11시 경 보문산 정상에 집결하였다. 34연대 1대대는 보문산 정상에서 금산길을 따라 북상 중인 대규모 부대를 목격하고 150여명의 병력으로 하여금 대별동에서 차단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인원수를 알 수 없는 유격대와 만나 격전을 벌이게 되어 구완동쪽으로 진로를 바꾸었으나 거기서도 계속적으로 총격을 받아 무수동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12시경, 연대장은 포병관측기로부터 금산에서 큰 부대가 이동해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이를 아군의 이동으로 오해를 하였다. 13시경 충남도청 앞을 지나는 적 탱크를 발견한 딘 사단장은 로켓포조와 소총수을 데리고 몸소 1시간 가량을 지프차를 타고 추격전을 펼쳐 시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전차를 파괴하였다.
14시경 연대지휘소로 돌아온 딘 사단장은 34연대장과 식사를 하며 시내에서 탱크를 잡은 이야기를 하였고, 상황을 검토하였다. 그들은 34연대 1대대와 19연대 2연대가 본래의 위치에서 방어를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대와 연대간의 통신이 모두 두절되었던 탓에 발생한 오해였다. 갑천변에 배치되었던 병력은 모두 보문산으로 퇴각한 상태였으며, 인민군은 옥천길과 금산길을 차단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시내에 저격병들이 돌아다니고 있었으므로 연대장은 야간이 아닌 주간에 철수를 하도록 지시하였다. 연대장은 철수명령서를 3부 작성하여 각 대대에 보냈으나, 두 대대는 이미 진지를 이탈하였으므로 전달받지 못하였고, 남선봉공원에 있던 34연대 3대대만이 15시경에 철수명령을 전달받았다.
상소동에 있던 수색중대 3소대도 이 명령에 따라 시내로 복귀하였다. 사단장은 도청의 전술항공통제소를 방문하여 적의 전차와 포병에 집중공격을 하라고 지시하였는데, 이때 금산에서 20여대의 차량행렬이 대전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사단장은 이를 아군으로 오인해 폭격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15시 30분경 34연대 예하부대 및 지원부대가 연대지휘소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이때 영동에서 온 M-24 탱크 5대도 지휘소에 도착했다. 사단장은 34연대 I중대와 13포병대대 B포대, 그리고 53포병대대 B포대를 선발대로 편성하여 방금 도착한 탱크들과 함께 영동을 향해 출발시켰다. 연대장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선발대를 따라갔다.
16시 사단장은 영동의 사단지휘소에 전화를 걸어 기관차를 대전역으로 보내 탄약과 보급품이 실려 있는 화물차 10대를 영동으로 회송하도록 지시하였다. 사단장은 선발대가 시내 동쪽에서 공격을 받아 2~3 대의 차량이 부서졌다고 보고를 하자, 영동 사단지휘소에 시내 동쪽이 차단되었으니 전차를 보내라고 요청했다.
이때 연대장은 철수로인 옥천길 상황을 파악하던 중 사단수색중대 경전차 4대를 만나 인동사거리를 경계할 것을 지시하였다. 판암동으로 움직이는 전차들을 뒤쫓던 연대장은 가오동에서 큰 규모의 적이 북상중인 것을 발견했다. 당시 21연대는 세천터널을 확보하지 못한 채 증약터널만을 방어하고 있었다.
연대장은 세천터널을 확보하기 위해 옥천으로 가 경전차 1개 소대와 이미 옥천에 도착한 34연대 I중대와 함께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인민군이 세천터널과 판암동 길을 점령하고 있어서 2시간여 접전을 벌이다 결국 증약터널의 마달령 진지로 철수 했다.
철수
한편 서대전네거리를 지키고 있던 19연대의 일부 병력은 계백로로 대대 규모의 인민군이 이동해오자 11포병대대가 있는 인근 테미고개의 수도산으로 이동해 호를 구축했다.
16시 남선봉공원의 34연대 3대대가 철수를 하여 1개 중대로 용두동 비탈에서 계룡로를 경계하였고, 대대장은 서대전네거리의 엄호진지에서 본대의 철수를 엄호하였다. 인민군은 테미고개로 공격해 수도산의 진지를 점령한 후 시내로 박격포를 쏘아댔다. 19연대는 총력을 다하여 역습을 펼쳐 포 일부를 구출하였다.
16시경 이원역에서 대전역의 화물차를 견인하기 위한 기관차가 출발했다. 16시 30분경 세천터널을 빠져나오자 인민군의 집중사격이 쏟아졌다. 기관차는 급수조가 파열된 채 간신히 대전역에 도착하였으나 화물차를 견인할 수 없어 16시 45분 다시 옥천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판암IC와 세천터널 사이에서 인민군의 집중사격을 받아 기관사 2명과 호송병 1명을 빼고 모두 전사했다. 이로써 17시부터 판암동 옥천길은 인민군에 의하여 견고하게 차단되었다.
34연대 3대대의 엄호 중대가 용두동과 서대전네거리를 지키는 동안 본대는 17시 55분 철수를 시작했다. 시내에는 이미 저격병들이 들어와 있어 철수하는 차량에 기관총을 쏘아댔다.
철수 본대는 2개의 제대로 나뉘었는데, 앞 제대가 원동네거리에서 길을 잘못 들어 대전여고 운동장으로 들어갔다. 대전역을 장악하고 있던 인민군들은 차량행렬에 총을 쏘아댔고, 길이 좁아 차를 돌릴 수 없던 미군은 차량을 버리고 도보로 대전대학교 쪽의 대동 산기슭으로 탈출을 시작하였다.
뒤 제대는 인동네거리에서 옥천길로 접어들었으나 판암동의 차단선에서 선두차량이 박격포탄을 맞아 전복되었다. M-2 반궤도 차량이 이를 밀어냈으나 운전병이 전사하고 말았다.
이에 뒤따르던 모든 차량의 발이 묶였다. 중대원들은 논둑을 엄폐물 삼아 적과 치열한 사격전을 벌였다. 30여발의 연막탄을 쏘아 적의 시야를 가린 후 다른 반궤도 차량이 길을 내면서 세천터널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그 곳 차단선에서 다시 적의 집중사격을 받아 부대의 일부만이 옥천으로 빠져나갔으며, 일부는 차량을 소각하고 북쪽의 능선을 이용해 각자 탈출했다. 대부분의 차량은 길에 버려졌으며 병력은 분산되어 제각기 산을 타고 영동으로 이동했다.
미 24사단장 딘 소장은 부관과 함께 지프를 타고 저격병들의 사격을 피하며 시내를 빠져나와 옥천 쪽으로 가려고 했으나 인동네거리를 지나쳐 금산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딘 소장 일행은 남쪽으로 돌아 후퇴를 하려고 시도했으나 산내와 낭월동에서 적의 사격을 받고 산내초등학교 인근에서 차량을 버리고 산으로 탈출했다.
구도동 강바위산 인근에서 일행과 떨어져 고립된 딘 소장은 한달 여 동안 필사적으로 본대와의 합류를 위해 애썼으나 전북 진안에서 포로가 되었다. 딘 소장은 3년 후 휴전이 되어서야 귀환했다.
부대의 수습
대전여고 운동장에 멈추어 섰던 철수 본대의 앞 제대는 산을 타고 흩어져 옥천을 지나 22일 아침에 영동에 도착했다. 세천터널까지 왔다가 적의 차단선에 막혀 분산된 뒤 제대는 산을 넘어 옥천과 영동으로 탈출했는데, 23일까지도 복귀가 계속되었다.
19연대 2대대는 보문산에서 금산으로 남하했다가 산길을 타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21일 영동에 도착하였다. 유격대와 총격전을 벌인 34연대 1대대는 무수동에서 산성동에 배치되었던 19연대의 한 중대와 만났다. 400여명의 병력 규모를 형성한 이들은 금산을 거쳐 전주로 내려가다가 한국군 트럭을 만났으며 전주에서 23일 열차편으로 남원에 도착했다. 이들은 국군 서해안지구전투사령부와 합류하여 25일 여수에서 해군의 배를 타고 부산을 거쳐 대구로 돌아왔다.
용두동 인근에서 끝까지 철수를 엄호했던 34연대의 L중대는 금산길로 들어섰다. L중대는 유기된 장비들과 50여 명의 부상병을 포함하여 150명을 이끌고 견인차 1대와 2.5톤 트럭 2대, 짚 4대에 분승하여 어두워질 무렵 딘소장이 마주쳤던 산내초등학교 앞 적 차단선을 돌파했다. 이후 전투 없이 금산과 안의를 거쳐 진주에 도착한 L중대는 진주에서 열차를 타고 부산을 경유해 대구로 돌아왔다.
대전전투에는 미군 3,933명이 참가하였는데, 1,150명의 손실을 입었다. 미군 48명이 전사하였고, 228명이 부상당하였으며, 874명이 실종되었다. 34연대 1대대는 712명 중 203명을 잃었고, 3대대는 666명 중 256명을, 19연대 2대대는 713명 중 211명을 잃었다.
용두동 비탈에서 철수엄호를 맡았던 34연대 L중대는 153명 중 107명을 잃었다. 서대전네거리를 방어했던 공병 C중대는 161명 중 85명을 잃었다. 차량의 65%가 소실됐으며, 포병대대 A포대는 155밀리 야포를 모두 잃었다. 대전에서 무사히 탈출한 부대는 선발대에 속해 옥천길 차단선이 형성되기 전에 빠져나간 34연대 I중대, 13포병대대 B포대, 63포병대대 B포대 뿐이었다.
인민군은 보병의 경우 큰 타격을 받지 않았으나, 개전초기 105전차사단이 보유한 T-34 탱크 150대 중 15대를 대전전투에서 잃었다. 8대는 서대전네거리와 계룡육교 인근 그리고 시내에서 3.5인치 로켓포로 파괴되었고, 2대는 포격으로 파괴되었다. 5대는 갑천을 건너거나 계룡로를 따라 시내로 들어오다가 폭격을 받아 파괴되었다.
34연대가 대전에서 철수하자 대구로 가는 길을 방어하던 21연대도 대구로 철수하였다. 이로써, 대전은 7월 20일부터 9월 29일까지 67일간 북한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제24사단은 대전 전투에서 많은 인명과 장비를 잃었지만 워커 장군이 필요로 했던 2일의 지연시간을 확보해주었다. 이후 제24사단은 제1기병사단으로 교체되었다.
대전시 보문산에는 딘 소장이 3.5인치 로켓포로 적 전차를 겨누는 그날의 모습을 담은 ‘대전지구 전적비’가 건립되어 대전전투를 기념하고 있다.
단양 전투
단양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 |||
날짜 | 1950년 7월 8일 ~ 7월 12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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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충북 단양 일대 | ||
결과 | 전략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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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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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전투는 한국 전쟁 중기 잘못 전달된 이동 명령에 의해 대구로 이동했던 8사단이 다시 북진하여 단양에서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군과 대치해 1개 대대가 도하하여 북한군의 사단 지휘소를 급습함으로 인해 북한군에게 타격을 주고 국군의 사기를 올리는 전과를 얻었으나, 곧 도하하는 북한군과 일진일퇴의 격전을 벌이며 버팀으로 해서 북한군의 계획에 타격을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제8사단은 6월 27일에 강릉을 물러나서 대관령에 집결하였다가 다음날에 반격을 감행하여 시가지를 눈 아래 굽어보는 외곽선을 포위하였으나 이때 마침 원주의 제6사단을 방문한 육군본부의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이 구두로 전달한 명령에 따라서 제6사단의 작전임무를 인수코자 6월 29일 06:00에는 진당리를 출발하여 7월 2일 11:00에 제천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사단은 즉각 대구로 이동하라”는 육본작명이 하달되어 각연대를 또다시 집결케하는 즉시로 이동준비에 착수토록 하였으며, 김묵 대위가 이끄는 사단공병대대는 신림리-제천문의 철교와 교량을 폭파하였다.
7월 5일 02:00에 선발대가 출발하면서 특별열차를 이동하는대로 주력이 후속중에 있었는데 선발대가 대구에, 중문제대가 영천에 그리고 공병파괴반을 제외한 후 방제대가 안동에 각각 도착한 것은 15:00였다.
이때에 대전으로 선행한 사단장은 총참모장 정일권 소장으로부터 “그러한 작명을 하달한 사실이 없으니 즉각 북상하여 제천선을 계속 확보하라'는 작전지시를 받았으므로 즉각 L-4 연락기로 대구에 당도하게 되었으며 사단주력은 기관차를 돌려 달고 그대로 북상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사단공병대대의 S-3 서정우 중위가 지휘하는 폭파반은 제천 동남쪽 1km 지점의 소하천상의 철교를 비롯하여 단양에 이르는 사이의 대소철교를 폭파하면서 남행 중에 있었다.
20:00에 안동에 집결한 사단은 이곳에서 숙영하고 다음날인 7월 6일 10:00에 출발하여 18:00에는 단양에 도착하였다. 이때에는 이미 공병폭파반이 단양철교를 폭파한 뒤 이고, 영월-주천리에서 남하한 오백룡 소장이 이끄는 북한군 제8사단의 전위가 이미 하차하여 지휘소를 단양중학교에 개설하고 즉각 전투준비에 착수하였다.
작전계획
사단이 단양에 진출하였을 무렵 접수한 육본작명 제23호에 이르기를 「사단은 1개연대로써 원주를 공격하고 기타부대는 현 전선을 고수하여 적의 남하를 저지하라」는 것이었으나 전날 안동에저 접수한 작전 제20호에는 「사단은 제천부근에서 고립을 각오하고 남하하는 적을 저지섬멸하라」는 것이었음을 상기할 때 육본에서는 필시 사단이 제천까지 능히 북상한 것으로 알고 하달한 것으로 판단되어 사단장 김정일 대령은 참모회의를 긴급히 소집하였다.
여기에서 논의한 결과 북한군의 선견대가 이미 도담리 대안의 덕천리-여천리-덕문곡리 부근에 도달한 현상황하에서 전사단이 적전도하하여 제천으로 진격한 다음 원주로 진격하는 것은 전후협격과 후방차단의 우려가 분명이 있으나 그릇된 작명인 북한군의 무전교란으로 제천에서 물러서서 군작전에 차질을 갖어 온 책임을 면할 길 없으니 우선 1개 연대만이 남한강을 도하하여 천주봉을 거쳐 도로를 따라서 제천으로 공격하되,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칠 때 에는 지체없이 단양으로 후퇴하여 남한강 방어로써 적을 저지격멸하여야 할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대구 이동의 책임을 지고 물러선 정진 소령의 후임으로 새로히 사단 작전참모로 부임한 권태순 중령이 작전계획을 성안하고 있었는데 피아가 대치한 상황하에서 남한강을 건너 남하한 피난민을 심문하던 첩보대로부터 긴급보고가 있었다.
즉 매포리 서북쪽의 구만리에 있는 매포 초등학교에 북한군의 사단 전방 지휘소가 추진되고 그 부근에 소수의 경계 벽력만이 있을 뿐이고 주력은 제천에서 남침준비를 서두르고 있다는 것이다.
사단장은 정보참모 육근수 소령으로 하여금 즉각 확인토록 하였던 바 제보자는 제천의 유지와 경찰관으로서 믿을만한 첩보라는 것이다.
이에 사단장은 작전계획을 진정하여 제 10연대의 1개 대대만으로 사단지휘소를 기습하여 북한군의 예기를 제압키로 결심하고 요지를 다음과 같은 작전을 하달하였다.
작전 |
① 사단은 남한강변에서 적의 도하를 저지격멸하고 일부병력으로 적의 사단지휘소를 급습하려 한다. ② 제21연대는 고수리-슬음산-문천리-324고지와 청풍지구를 확보하여 적의 도하를 저지하라. 제8사단장 대령 김정일 |
이에 따라 사단 공병대장 김묵 대위는 이용구 중위가 이끄는 제2중대로 하여금 S-3 서정우 중위의 감독 하에 제10연대의 도하를 위한 교량작업에 착수토록 하였다.
전투 과정
7월 8일
사단이 신림리에서 접적중에 돌연히 철수함으로써 그 작전기도를 헤아리지 못한 북한군은 제천을 탈취하고도 계속 침공하지 못하고 남한강 북안으로 이미 진출한 일부의 선견대 마저 도전을 꾀하지 못한 채 피아문에서는 소강상태가 계속 되었는데 제10연대가 북한군의 사단 전방 지휘소를 급습했다.
7월 9일
도담리 일대를 석권한 북한군은 이곳을 교두보로 하여 주력의 도하를 엄호하는 한편 695고지를 공격하고 2개 중대 규모는 겨주기 금곡리로 침공하였으며, 상율리에서 도하한 심곡리 돌출부의 적은 외양방일대를 격탈하였다.
제21연대는 차전차퇴로 695고지에서 물러나 664고지-슬음산(671고지)-현천리-324고지로 정면을 하고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사단장은 북한군이 제21연대의 우일선 정면으로 집중 공격하는 징후로 미루어 보아 일부의 병력으로 봉우등-어의곡리-소백산맥의 영마루를 거쳐 풍기로 우회하여 사단의 퇴로를 차단하거나 지령에서 포위해 획책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는데 이때 삼척 경찰서장 김두용 총경이 지휘하는 삼척 경찰대외 정선 경찰대의 1개대대 병력이 진출하기에 이르자 이를 국망봉(1421고지)-소백산(1439고지)일대로 급진시켜 방어종심을 유지케 하였다.
그런데 북한군의 계속된 포격과 집요한 공세로 제21연대가 혼전을 거듭하기에 이르자 사단장은 20:00에 요지를 다음과 같은 작명 제14호를 하달하였다.
작명 제14호 | 『① 당면의 적 제8사단은 봉우등-고수리-기촌리-양방일대를 점령하고 사단 동측방을 계속 압박하고 있다. ② 사단은 제10, 제21 양 연대의 작전임무를 교대하여 차적을 격퇴하고 저지선을 계속 확보하려 한다. 제8사단장 대령 김정일 |
7월 10일
개전 이후 오랜만에 쾌정한 날씨를 맞는 가운데 사단장 이정일 대령은 일선으로 전열을 갖추기에 이르자 기촌리 이서의 북한군에 대하여 05:00부터 반격을 감행토록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반격전에 나선 제10연대는 664고지를 탈취하고 기촌리에서의 북한군의 침략지역을 강습하여 목표탈취를 목전에 두었으나 북한군의 최후발악적인 포격으로 분루를 삼키며 물러서야만 하였다.
그런데 이날 석양 무렵부터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여 664고지-슬음산(671고지)을 압박하는 가운데 단양을 침탈 서측방이 노출되기에 이르자 사단장은 이날 사단 예비로 전환되어 재편중인 제 21연대 주력을 북하리-북하리선으로 급진시켜 서측배를 엄호하면서 제5번 도로에 연한 적의 침공을 조지케 하였다.
뒤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당시 새로히 북한군 제2군단장이된 김무정은 북한군 제1군단이 경부가도와 진천정면에서 침공의 진전이 보인데 반하여 자기군단은 충주 정면을 제외한 음성-단양 정면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격노한 나머지 총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는 것이다.
7월 11일
날씨는 계속 쾌청한 가운데 좌인접인 제6사단은 북한군 제1사단의 계속적인 압박으로 수안보에서 이화령으로 물러서기 시작하고, 제1사단은 북한군 제 15사단의 포위공격으로 음성에서 괴산으로 철수하였으며 김양원 준장이 이끄는 수도단장은 문안산에서 청주 북쪽의 미호천선으로 전진하였다.
한편 미 제24사단 정면에서는 북한군 제3, 4 양사단이 조치원-금강선으로 진출하였으니 전국이 바야흐로 긴박의 도를 더하였다.
이에 군은 금강선을 담당한 미 제24단과의 협동으로 소백산맥의 회랑에서 북한군을 저지하고 공세이동의 전기를 포착코자 이 산맥의 양견부인 죽령-오령-이화령을 담당한 제8, 6 양사단의 통합 지휘를 위하여 이날 함창에 제2군단의 전신인 육본 전방 지휘소를 개설하고 작전참모부장 김백일 대령이 그 지휘에 나섰다.
한편 사단 정면에서는 전날 밤에 단양을 탈취한 북한군의 전열을 정비하는 듯 포격을 전 전선에 퍼부어 진지선을 교란하였으나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다가 21:00에 2개연대 규모로 총 공격으로 나섬으로써 제10연대의 방어선이 동요하기에 이르자 자정무렵에는 마조리와 장현리선으로 전선을 정리하였다.
이보다 앞서 19:00부터 30분간에 걸쳐 미 공군 F-51 2개편대의 근접지원으로 단양시내에는 불기둥이 치솟고 적포도 한동안 침묵하였으나 장병들이 간절히 바라던 “북한군의 공격기도를 무산”을 시키리 만큼 결정적인 위력을 발휘하지는 못하였다.
7월 12일
이 무렵의 미 지상군 사령관 윌리엄 F. 딘(William F. Dean) 소장의 작전개념은 미 제24사단이 금강선을 한국군이 소백산맥을 계속 확보하고, 7월 10일부터 부산에 상륙하기 시작한 윌리엄 B. 킨(William B. Keen) 소장이 이끄는 미 제25사단을 김천-함창-경주선으로 급진시켜 한국군을 증원하여 북한군의 “김천돌파 기도를 분쇄하며, 빠른 시일내에 상륙하게 될 호버 R. 게이(Hober R. Gay) 소장이 이끄는 미 제1기병사단은 경부 가도정면으로 진출시켜 미 제24사단을 증원하면서 공세이동에 필요한 전투력을 축적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군은 이러한 미군의 작전방침에 호응하여 국본일반 명령 제14호로 제2군단을 창설하고 육본작전 참모부장 김백일 대령을 그 군단장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육본 작명 제42호를 하달하여 제6, 8 양사단을 동군단에 배속하고 춘양에서 잠투하는 북한군을 요격중인 임익순 소령이 이끄는 제2사단 제25연대 제1대대를 제 8사단에 배속하여 2개연대뿐인 사단의 전투력의 보강을 꾀하였다.
그러나 사단은 북한군의 계속된 공격과 우회로 주적연대인 제10연대의 마조리-장현리선의 방어선이 무너지고 936고지로 급진한 제 21연대의 공격도 무위로 끝나 죽령으로 물러섰으나 연화봉 쪽으로 우회하는 북한군의 압박으로 두솔산을 거쳐 21:00에는 풍기로 물러서기 시작하였다.
이날 09:00부터 30분간에 걸친 미 공군의 근접지원이 있어 북한군을 강타하였으나 이때에는 이미 마조리-장현리선의 방어선이 무너져 죽령으로 철퇴 중에 있었는데 좀 더 일찍 근접지원이 있었더라면 국군이 전세를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결과 및 영향
7월 6일 단양으로 진출한 사단은 북한군의 사단 전방 지휘소를 기습하여 간담을 서늘케 하고 기세를 올렸으나 8일 야반부터 강행된 북한군의 도하로 일진일퇴의 격전을 벌려야 하였다.
그러나 병력과 화력의 열세로 7월 10일에 단양을 상실한데 이어 7월 11일에는 진지선이 무 너져 다음날에는 죽령지맥으로 물러섰다가 풍기 지역으로 철수하여야만 하였으나 이 무렵의 다른 정면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반격까지 벌이고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축차로 물러서는 지연전을 벌려 7일동안 지탱함으로써 전 전선에서 유독히 돌출된 전선을 계속 확보하게 되어 북한군 제2군단장 김무정을 초조하게 한 나머지 충주 공략에 투입된 북한군 제12사단을 이곳에 전용케 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편 사단 주력이 풍기로 철수하기에 이르자 사단장 이정일 대령은 G-3 권태순 중령과 제 10연대 부연대장 조원영의 건의를 받아들여 북한군에 대한 양동을 시도키로 하고 모든 차량이 죽령 동남단에서 영주까지 헤드라이트를 켠 채로 밤새도록 운행케 하여 사단이 영주로 계속 철수하는 것으로 오인케 하고 제10, 21연대는 풍기 시내 초등학교에서 전투복을 비롯한 보급품 일식을 지급한 다음 충분한 급식으로 피로를 씻게 하였다.
그리고 제21연대는 풍기 동남쪽을, 제10연대는 서남쪽 고지군을 각각 점령케 하여 풍기를 중심으로 V자형 진지를 편성케 하고 기도비익을 위하여 무전의 침묵을 명하였다.
이 무렵 당면의 북한군 제8사단은 그 주력이 마조리-장현리선으로 침공하고 그 선두가 연화봉-1363고지-936고지까지 남진하고 있었으나 포병대대의 탈전으로 그 기세가 좌절된 듯 계속 침공의 징후를 보이지 못하고 있었는데 경찰 정보망을 통하여 입수 한 첩보에 따르면 순흥(풍기 북쪽 6km) 북쪽 7km에 있는 단곡리 200명으로 추정되는 무리가 나타났으며 또 영월에서 남하하는 것으로 보이는 400명의 북한군은 내성 북쪽 10km 오려리까지 침습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마침 시달된 육본 작전 제42호에 따라 춘양에 위치한 임익순 소령이 이끄는 제25연대 제1대대가 사단에 배속케 됨으로써 사단 동측방에 대한 위협을 이 대대로 하여금 제거키로 하고 사단 주력은 풍기에서 일전을 결하기로 작전방침을 굳혔다.
이화령-문경 전투
외화령-문경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 |||
날짜 | 1950년 7월 13일 ~ 7월 1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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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경북 이화령, 문경 일대 | ||
결과 | 전략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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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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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령-문경 전투는 한국 전쟁 초중기 7월 13일부터 시작된 조령과 이화령의 싸움이 마침내 7월 17일에 영강선(문경 남쪽의 낙동강 지류) 방어로 매듭지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취급케 되는데 이 작전지역은 충주 - 문경- 점촌을 거쳐서 상주에 이르는 중부의 요역으로 만일 이곳이 돌파된다면 낙동강 주변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는 요충지역인 까닭에 혈투를 벌이게 된다.
사단은 춘천 및 홍천 전투에서 서전을 치른 뒤에 급변하는 전황의 추이에 따라 7월 초에 충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서부전선의 군 주력이 철수함에 따른 수용진지를 확보함과 아울러 차령산맥 북쪽의 중원을 지키고자 하던 바, 육군본부에서 다시 소백산맥과 금강 하반으로 연한 새로운 방어선을 설정하여 통제 있는 작전을 세움으로써 이에 따라 이곳 문경으로 한걸음 물러서서 본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작전계획
이 작전을 북한군 측에서는 이른바 그들의 『제1단계 제3차 작전』이라고 하여 표방하기를 『급속한 공격과 맹렬한 추격으로 한국군 및 UN군을 대전-소백산맥 선에서 격멸하는 동시에 단시일 내에 전주-논산-대전-문경-울산선까지 진출한다.』라고 그 시행방침을 내세우고 그 시한을 7월 20일까지로 미리 정하여 채찍을 휘두른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은 곧 국군에게 재편성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고,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여 일거에 도모코자 한 작전이거니와, 당시에 육군본부에서도 이 같은 그들의 진의를 이미 간파한 나머지 대전으로 지휘본부를 이동함과 아울러 그 대응책을 논의한 끝에 작전명령 제42호로써 다음과 같이 하달하였다.
작전명령 제42호 |
『① 군은 제1군단 서측의 각 사단을 통합하여 중부지역으로 침공하는 적을 저지 격멸하려 한다. ② 제2군단장은 제8, 제6 양 사단을 통합하여 죽령-문경 간을 고수하면서 적을 진전(陣前)에서 격멸하라. 육군 본부 |
제2군단장 김백일 준장이 총참모장 정일권 소장으로부터 이 명령을 받고 청주의 제1군단에 들려 전황을 청취한 다음, 관계참모를 대동하고 증평-괴산-연풍-문경을 거쳐 함창에 당도한 것은 11일 01:00이었다.
전투 과정
7월 13일
이날은 흐린 날씨에 동남풍을 동반한 가랑비가 때때로 내렸다. 따라서 해발고도 1000m 내외를 헤아리는 이 곳 주흘산(1106고지)-조령산(1107고지)-증봉(914고지: 속칭 시루봉)로 잇닿는 소백산맥 준령에는 계절답지 않게 한기가 맴도는 가운데 제2, 제19 양 연대의 병사들이 이른 아침부터 진지를 구축하고 통신망을 구성하는 등 방어진지를 강화하였다.
이는 사단장이 문경부근의 조령과 이화령에 방어진을 편성키로 결심하고 신농국민학교(수안보 남쪽 7km)에 임시 설치된 지휘소를 7월 11일 02:00에 문경국민학교로 이설하는 즉시 수안보 일대에 배치된 사단의 주력을 철수케 함으로써, 전날 7월 12일 밤에 야간 철수한 이 양연대가 일출과 더불어 병력을 조정배치하고 진지를 보강한 것이다.
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제19연대는 우일선인 조령을 맡고 제2연대는 좌일선인 이화령 지역을 담당하여 각각 책임지역내의 요선을 막아 거점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 무렵 제7연대는 제1사단과 함께 음성 동락리 전투에서 쾌승을 거둔 뒤로 괴산에서 배속이 해제되어 뒤늦게 당도함으로써 사단의 예비부대가 되어 문경에서 기동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며, 제16포병대대는 각 포대단위로 분할하여 일선 양연대의 직후방에 진지를 선정하는가 하면 공병대대도 또한 문경-연풍간의 도로요소를 폭파하는 등, 지원부대들의 활동목표도 오직 이 방어 일전에만 집약되었다.
이것은 지역의 중요성도 있으려니와, 사단이 춘천에서 물러선 뒤로 연대 단위로 분진하며 각각 다른 임무를 수행하다가 여기에서 비로소 서로 손잡게 된데다 좌우인접사단과 연대하면서 전선을 형성케 됨으로써 일전을 할 태세를 갖추게 되었는데, 이때에 당면의 북한군 제1사단도 또한 수안보에서 침공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은 피차간의 수색과 정찰만으로 맞섰다.
7월 14일
사단이 문경 방어에 들어간 지 이틀째 되는 이날, 당면의 북한군 제1사단은 이윽고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들은 사단의 좌일선인 제2연대 정면에 공격의 중점을 두고, 비교적 부대기동이 용이한 3번 도로를 따라 이화령을 돌파하고자 함으로써 타지역에서는 거의 교전이 없고 여기에서만이 격돌을 보게 되었다.
이곳 이화령은 전날 하오까지 가랑비가 오락가락 하더니 이날 새벽에는 비가 그치고, 7월 중순의 고산지대의 기상 그대로 짙은 안개가 산속을 메워 지척을 분별키 어려웠다.
이러한 가운데 날아든 적의 122mm 유탄포와 82mm 박격포 등의 포화가 집중하니, 연대장 함병선 대령은 드디어 적의 공격이 시작된 것으로 판단하고 각 대대로 하여금 더욱 경계를 철저히 하도록 독려하던 바, 영봉에 어둠이 걷히면서 돌연 이화령 북쪽 계곡이 수류탄의 폭음과 총성으로 가득하였다.
이 시각이 대체로 04:30을 전후한 무렵으로 연대는 3개 대대가 모두 전날 점령한 진지에서 대전태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연풍까지 침습한 북한군 제 1사단이 연대규모의 병력으로 농무(濃霧)를 틈타 진지 앞으로 바싹 다가선 다음 제2, 제3 양 대대의 진내로 뛰어 들어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일순간에 백병대결의 혈전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전진진지를 맡고 있는 이종기 대위가 이끄는 제2대대의 경우를 보면, 국지 경계병으로 매복시킨 나일균 일병으로부터 『3번도로 부근에서 수냉식 기관총을 끄는 소리가 난다.』는 보고를 받고 이를 확인토록 지시하였던바, 이보다 800m 더 올라온 측후방에서 홀연히 수 미상의 북한군이 올라와 수류탄 투척에 이은 총격으로 공격하였으며, 또한 여기에서 교전이 시작된 지 30분이 채 못되어 이화령 동쪽 능선을 점령하고 있는 제1대대의 3중대장 최희대 대위가 진전에 북한군의 선봉이 침습하였음을 확인하였다고 하니, 이때에 이들은 이미 주력으로 제2대대 진지의 서측을 통과하여 이화령으로 도착하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연대의 좌측 제일선을 담당한 이운산 소령이 이끄는 제3대대는 20여분 동안의 격돌 끝에 일부의 병력이 분산되어 혼선을 빚는가 하면 연대 관측소에서도 포격의 피해가 심각하였다.
이렇듯 제일선에서 고전을 치르고 있을 무렵 연대장이 이화령의 관측소에서 전방을 살펴보니, 운무에 쌓인 진지는 확인할 길이 없고 작열하는 총포성 만이 계곡을 메웠는데 특히 초기에 격돌한바 있는 제2, 제3 양 대대와는 교신마저 끊겨 그 정황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상태로 3시간을 지나 어느덧 08:00을 넘어서자 점차로 농무가 걷히면서 북쪽 능선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현진지를 고수하고 있었을 것으로 믿었던 제2, 제3 양대대의 병사들이 이화령쪽으로 철퇴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를 본 연대장은 고개 마루로 뛰어 올라 지휘봉을 빗겨들고 떨리는 노성으로 『일보도 물러설 수 없다. 즉각 돌아서서 반격하라.』고 하는 동시에 이화령 동측에 배치한 제1대대장 박노규 중령을 전화로 불러 『곧 역습을 단행하여 633고지를 탈환하라.』고 엄명을 내리는 즉시 자신이 직접 진두에서 이를 지휘하였다.
이 명령을 받은 제 1대대장이 2중대장 김인문 중위와 3중대장 최희대 대위로 하여금 3번 도로의 동쪽 능선을 따라 역습케 하니, 진지를 박차고 나선 양 중대가 함성을 높여 서쪽 능선으로 돌진하면서 계곡에 폭로된 적군을 무찔러 나갔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안개가 서서히 걷히자 고개를 오르던 병사들도 반전하여 역공대열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제3대대장 이운산 소령도 또한 북한군들이 동요하자 혼전 중에 분산된 병력을 수습코자 심혈을 기울이던 바, 시계가 트이자 제9중대장 남백봉 대위와 제11중대장 채수용 대위를 불러 역공케 하니, 이제 제1, 제3 양 대대가 운분의 일전을 전개케 되었거니와 이와 보조를 같이하여 제16포병대대도 또한 2개 포대로써 북한군의 증원을 차단키 위하여 연풍 일대에 철화를 퍼부으니 전황은 바야흐로 크게 역전되어 갔다.
7월 15일
전날 밤에 비상태세로 들어간 사단은 철야로 진지를 지키고 있는데 이날 아침에도 또한 농무가 짙게 깔렸으며, 산 허리에 매복한 병사들이 겉옷이 젖을 정도로 습도가 높았다.
이것은 마치 전날의 무중격투를 연상케 하는 음산함이 흘러 각 연대마다 더욱 경계를 엄히 하고 있던 바, 과연 06:00을 전후하여 광파가 밀려드는데, 이번에는 산악기동으로 진지 앞까지 근접한 적이 집중적으로 조령관을 돌파코자 발악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을 담당한 제 19연대가 이를 막아 격돌을 벌이게 되었는데, 특히 이 지역은 삼림이 울창한 주흘산(1106고지)과 조령산(1017고지)이 좌우측방에 높이 솟은데다 안개가 짙게 덮이고 보니 처음부터 일대 혼전이 야기되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전날 혈투를 벌인 바 있는 이화령에서는 소규모의 교전이 있을 뿐이었으며 또한 서측방의 구왕봉 부근으로 남하한 북한군 제13사단도 측후방을 위협하는 정도에 그침으로써 사실상 이날의 전투는 제19연대와 제16포병대대의 협동작전으로 시종되었다.
7월 16일
전날 조령을 점령한 북한군 제 1사단은 이윽고 이날 06:00을 기하여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그 침공양상을 보면 조령을 점령한 부대로써 문경 정면에 계속적인 압력을 가하는 동시에 2개 연대 규모의 병력을 들어 동서 양 측방으로 우회, 침습코자 하였다.
즉, 그들의 예비부대로 알려진 제14연대는 이창권의 지휘 하에 사단 동측의 갈평리 계곡으로 근접하는가 하면 증원부대로 밝혀진 그들 제13사단 예하의 21연대는 이승준이 이끌고 서남쪽의 백화산으로 침습하였으며 또한 이와 아울러 조령과 이화령에서도 정면병타를 가하여 단숨에 문경을 삼키려는 듯하였다.
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당시에 북한군 제2군단장 김무정은 UN군이 가담하기 전에 소백산맥을 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동시에 제1사단장에게 제13사단 예하의 1개 연대를 뽑아 증원시키면서 조속히 문경을 탈취토록 엄명하였다고 하니, 이들이 중부지역의 조기진출을 얼마나 서둘렀는지 짐작하고 있다.
결과 및 영향
사단에서 본전투를 일단 매듭짓고 영강 하반으로 물러선 7월 17일 현재에 인접부대의 전황을 살펴보면 우인접인 제 8사단은 죽령에서 북한군 제8사단과 대결 끝에 이곳을 내놓고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풍기-영주 간에 요역을 확보코자 주야로 전개하고 있었으며 좌인접인 제1사단은 미원에서 북한군 제15사단의 침공을 막아 7월 13일 이후 이날에 이르기까지 방어태세를 취하고 있다.
따라서 이날 현재의 병력배치 상황을 표면상으로 구별할 때에는 풍기-적성리-마성(문경 남쪽 8km)은성-미원으로 이어지는 소백산맥 남록의 진지를 아직도 견지한 것으로 여겨졌으나 사실은 오히려 서반부에서 큰 변화가 일고 있었던 것이다.
그 까닭은, 전투가 점차로 치열함에 따라 각 사단마다 담당 지역내의 요선을 방비하는데 치중하게 됨으로써 문경-미원간의 45km에 달하는 고산지대에 틈이 생기게 되자 이점을 노린 북한군 제2군단장 김무정이 이지역으로 2개 사단을 투입하여 그중 제13사단은 문경 서남쪽의 은성을 향하게 하고 제15사단은 당흥리(미원 동북쪽 10km)-화북-화서-상주 축선으로 돌입케 하니 이 양 사단이 어느덧 소백산맥을 넘어 현 배치선 남쪽으로 밀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상주 전투
상주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 |||
미국 24연대의 화포 지원. | |||
날짜 | 1950년 7월 22일 ~ 7월 3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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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경북 상주 | ||
결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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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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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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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규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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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전투는 한국 전쟁 초중기 미 제25사단이 상주를 중심으로 중부지역의 국군을 지원하고, 미 제1기갑사단은 경부국도상의 미 제24사단을 지원키로 결정됨에 따라, 이들 양 사단이 낙동강선을 기저로 한 상주와 영동-김천의 축선에서 제8군의 계획에 따라 지연전을 함께 벌인 전투이다.
전투 과정
미 24사단에 이어 전선에 투입된 미군 사단은 25사단이었다. 예하에 24·27·35연대를 가지고 있던 미 25사단은 7월 12일 부산에 상륙하였다.
7월 13일부터 한국에서 유엔군의 작전을 지휘하게 된 8군사령부는 25사단에게 1개 대대로써 포항비행장을 경비하고 나머지 병력으로는 중부전선에서 적의 전진을 막고 있던 한국군을 지원하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이 명령에 근거하여 윌리엄 B. 킨(William B. Kean) 소장이 이끄는 제25사단은 27연대를 안동으로 추진시키고(후에 보은~황간 축선에 투입), 35연대의 1대 대대를 뽑아 포항비행장 경비임무를 맡기고(후에 27연대 증원임무수행), 24연대는 전투단을 편성하여 국군 6·8사단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리고 사단장은 지휘소를 영천에 이어 상주에 두고 독자적인 방어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당시 제25사단을 지휘하고 있던 킨 소장은 53세의 노장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1918년 11월 1일 1년 4개월 만에 미국 육사(West Point)를 떠나 임관한 “생도장교”중의 하나였다. 이들은 다시 1919년 6월에 육사를 다시 졸업하여 2년 동안만 생도생활을 한 장교들이 되었다.
졸업서열이 낮은 킨 소장은 미국 육군지휘참모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행운을 가졌다. 그의 경력상 전망은 그렇게 밝지 못했다. 그러나 1939년 육군성 인사참모부에서 오마르 브래들리(Omar Bradley) 장군과 근무할 기회를 가졌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브래들리 장군이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의 참모장으로 킨 준장을 계속 보직하여 킨 장군은 1군사령부의 참모장이 되었다.
브래들리 장군이 12집단군 사령관이 된 후에도 1군 참모장으로 남게 되어 1군이 태평양지역 작전에 참전하게 됨에 따라 킨 장군은 태평양지역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48년 9월 당시 참모총장까지 오른 브래들리 장군은 킨 준장을 25사단장에 임명하여 별을 하나 더 달아주었는데 그리하여 25사단은 역전노장인 사단장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단의 전력은 그렇게 강한 편이 되지 못했다. 7월 10일 부산에 도착한 미하 엘리스 대령이 27연대는 비교적 건전한 지휘관들과 능력 있는 병사들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연대장은 2차 대전 후 동양인들이 싸우는 전술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했으며, 능력있는 연대장으로서 7월 8일 먼저 한국전선에 킨 사단장과 같이 와서 현지 정찰을 할 정도로 사단의 중추적 지휘관이었다.
킨 소장은 특히 병사들을 모아놓고, 옛날 패튼 장군과 같이 “귀관들은 이곳에 죽으러 온 것이 아니고 죽이러 왔다는 사실을 명심하라(Remember, you're here to kill and not to be killed.)'고 기염을 토할 정도의 열정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흑인병사와 백인장교들로 구성된 24연대는 전투력 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했다.
흑인병사들은 한국의 혹서와 습기, 비위생적인 환경, 험준한 산악지형을 일단 싫어했고, 이들을 지휘하는 지휘관들 역시 부연대장 폴 F. 로버츠(Paul F. Roberts) 중령을 제외하고는 한국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것 자체를 싫어하고 있었다. 35연대장 헨리 G. 피셔(Henry G. Fisher) 대령은 전문 직업군인으로서 다른 지휘관과 전혀 손색이 없었지만 그가 지휘하는 병사들 역시 평화시 점령군 임무에 익숙한 상태에 있었다. 그리하여 25사단의 전력은 전체적으로 강한 편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수행해야 할 역할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중부전선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있는 국군 후방의 제2선에서 대기중이던 25사단은 7월 18일 1기병사단이 포항에 상륙하자, 8군이 1기병사단을 경부본도의 24사단을 대신하도록 조치함에 따라, 상주 정면의 한국군의 지원임무에 전념하게 되었다.
사실월턴 워커 8군사령관은 25사단이 먼저 한국전선에 도착되었으나, 이 사단의 전투력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보다 늦게 포항에 상륙한 1기병사단으로 하여금 경부본도를 맡겼던 것이다. 그리하여 25사단 예하 각 연대는 7월 22일경부터 전선에 본격적으로 투입되었다.
1개 대대를 포항비행장 경비로 남겨둔 35연대는 2대대를 함창으로 추진하여 국군 6사단을 지원하도록 했다. 2대대는 주력을 영강 남안에 배치하고, 1개 중대(F중대)를 뽑아 강 북안으로 추진시켜 6사단 진지에 투입하였다. 그러나 이 중대는 북한군의 포위망에 걸려 전사 6명, 부상 10명, 실종 21명의 막대한 손실만 보고 강 남안으로 철수하였다. 이에 대대는 상주 북쪽 8km 지점을 점령하여 상주~함창간의 주보급로 확보임무를 맡게 되었다.
7기병연대의 병력에게 포항비행장 경비임무를 넘기고 연대로 복귀한 1대대는 황간지역에서 싸우고 있던 27연대를 증원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7월 29일 연대는 상주 북쪽 3km 지점으로 철수하였다가, 7월 30일에는 상주 남쪽고지로, 그리고 7월 31일에는 27연대를 증원하던 1대대와 합류하여 김천 북방 15km 지점인 옥산동에 새로운 진지를 점령하여 상주에서 김천에 이르는 도로와 선산을 잇는 분기점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북한군의 남진을 막을 기약은 없는 형편이었다.
한편 24연대 2대대는 상주 서쪽으로 괴산에 이르는 도로를 지키는 임무를 맡아서 화령장(상주 서쪽 20km 부근)에서 박성철 소장이 이끄는 북한군 15사단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힌 바 있는 국군 17연대의 진지를 인수하려 했다. 그러나 대대의 선두에 섰던 E중대가 불시에 적의 사격을 받아 흩어지자 본대 역시 분산되었다.
이에 놀란 24연대장 허튼 V. 화이트 대령이 이 직접 현장(평온리 : 상주 서쪽24km 지점)에 나가 병력을 수습하였다. 7월 25일 24연대는 1·2·3대대를 투입하여 화령장에서 상주에 이르는 도로를 따라 진격해 오는 북한군을 맞아 지연전을 벌였으나, 선두 2대대가 패한 후로 전 장병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3대대 L중대는 장교 4명, 부사관과 병 105명이 진지를 점령했으나, 이틀 후까지 진지를 지킨 병력은 장교 1명과 부사관과 병 17명뿐이고, 장교 3명과 부사관과 병 88명은 진지를 무단이탈한 상태였다. 따라서 상주 서쪽 800m지점에 설치한 낙오자 수용소에는 하루 평균 75명의 진지 이탈병을 수습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연대는 대체로 낮에는 고지를 지키다가 밤이면 후방진지로 철수하여 포격으로 적의 전진을 견제하는 식의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연대의 전투손실을 그렇게 대단한 편은 아니었다. 7월 22일 ~ 7월 30일까지의 기간 중 24연대는 전사 27명, 부상 293명, 실종 3명의 손실을 입은 반면 국군의 포탄과 폭탄세례를 받은 북한군 15사단은 약 5,000명의 손실을 보았을 것으로 추정됐다. 연대는 7월 31일 상주를 거쳐 철수했다.
7월 25일 영동이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25사단이나 국군의 방어능력 역시 한계가 드러나자, 7월 26일 8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낙동강선에서의 방어작전을 구상하고 철수계획을 세우는 한편, 8군사령부도 대구에서 부산으로 옮기려 했다. 도쿄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이러한 건의를 받자, 7월 27일 10:00시 대구의 군사령부를 방문했다.
90분간의 회담에는 맥아더 장군, 워커 장군, 그리고 유엔군 사령부 겸 극동군 사령부의 참모장 에드워드 M. 알몬드(Edward M. Almond) 장군 등 셋만이 참석했다. 맥아더 장군은 워커 장군의 건의에 대해서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를 책망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한국에서의 덩커크는 없다고 강조하고, 미 24사단과 한국군수도사단을 칭찬했다. 그러고는 다시 바삐 왔다갔다하는 주위사람들과는 극히 대조적으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느린 걸음으로 8군사령부를 떠났다. 역시 그는 한국전선에서 또 하나의 극적인 순간을 연출해 냈다.
그로부터 이틀 후 7월 29일, 25사단 사령부가 자리 잡고 있는 상주에는 워커 장군이 나타나 이렇게 소리쳤다.
“ | 이틀 전에 맥아더 장군이 여기에 왔었다. 그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우리의 요구를 알고 있으며, 적이 어디를 죽어라 하고 치고 있는가를 알고 있다. 맥아더 장군은 증원군을 보내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강구하고 있다. 해병부대와 2개의 연대가 우리를 증원하기 위해서 수일 내에 도착될 것으로 기대된다. 추가적인 부대도 가능한 빨리 보내어질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벌기 위해 싸우고 있다. 더 이상 철수이건, 후퇴이건, 전선의 조정이건, 또 귀관들이 택한 어떠한 용어도 없다. 우리 뒤에 우리가 물러설 어떠한 선도 없다. 모든 부대는 역습을 반드시 실시하여 적의 허를 찔러 적을 혼란에 빠지게 해야 한다. 덩커크(Dunkirk)나 바탄(Bataan)은 있을 수 없다. 부산으로의 철수는 역사상 가장 참혹한 살육을 의미한다. 우리는 끝까지 싸워야 한다. 적들에게 포로가 되는 것은 죽느니만 못하다. 우리는 하나의 팀으로 싸워야 한다. 우리 중에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우리는 싸우다 같이 죽어야 한다. 진지를 포기하는 사람은 수천의 동료를 죽게 했다는 것에 대한 인간적인 책임을 져야 할는지 모른다. 나는 이 점을 사단의 전장병에게 알리기를 바란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우리가 이 선을 지켜야 할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우리는 이길 것이다. | ” |
워커 장군은 이와 같은 조의 훈령을 다른 사단에도 하달하면서, 한국 전쟁에서의 최초의 방어선이자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 방어선으로의 철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국군은 북한군이 호남을 돌아 진주~마산으로 진격하여 부산으로 향하고 있는 시점에서 전선의 축소조정이 없이는 방어선을 방어선답게 유지할 수 없었다.
"고수냐 아니면 죽음이냐"로 나타난 워커 장군의 고수의지는 여러 가지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나,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엄연한 사실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결과 및 영향
8월 1일 오후에 제8군으로부터 삼랑진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은 받은 제25사단은 이날 밤중부터 가용한 수송수단을 모두 동원하여 삼랑진으로 전진케 되었으나, 그 이동 도중에 다시 목적지가 마산으로 변경되었다.
그리하여 사단은 삼랑진을 거쳐 곧바로 마산으로 집결케 되었는데 사단사령부의 선발대는 8월 2일 21:15에, 그리고 사단 주력은 3일 낮중에 마산에 도착하였다. 이로써 사단은 지난 7월 20일에 제 27연대가 안동에서 광간으로 기동한 것에 이어 두 번째로 36시간만에 240km를 주파하는 기동성을 보임으로써 낙동강 서남부 지구의 공백상태를 미봉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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