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936: 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 41
서울 성벽 전경
7. 조선 사대부들의 두 얼굴
국가는 위기인데 호화별장을 세우는 사대부의 낙원, 조선
'어부사시사' 문학의 이면
<어부사시사> 등 우리 고등학교 교과서에 단골로 나오는 윤선도의 시조문학은 우리 고전문학의 보고이며 그가 꾸며놓은 보길도에는 해마다 수많은 관광객이 찿아와 그의 자취를 되새긴다.
사건과 사람은 확실히 양면성을 가진다. 윤선도의 빛나는 문학성 뒤에는 또 다른 시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면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병자호란 발발 당시 나이가 50세였는데 이미 3년 전 성산현감에서 파직되어 해남에 내려가 있었다. 해남에는 만석꾼인 그의 숙부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그 댁의 양자로 입양된 처지였다. 이때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 왔으니 전국의 사대부들은 근왕병으로 궐기하라는 격문을 읽고 강화로 가는 배를 띄운 다. 전국의 사대부들에게 왕의 격문이 돌았으니 가만 앉아 있다가는 역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노비들과 함께 식량을 싣고 뱃길에 올랐지만 도중에 이미 강화도가 청군 수중에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 뱃길을 돌리고 만다. 그리고 이제 강화도도 적에게 함락되었고 임금은 남한산성에 갇혔으니 오래지 않아 온 나라가 참화로 뒤덮일 것이라는 공포감에 제주도로 피난하기로 생각을 굳혔다.
배에 양곡과 노비들을 잔뜩 싣고 있는 터라 그대로 재주도로 직항하려 했지만 풍랑 때문에 난파되어 보길도라는 작은 섬에 도착했다. 작은 섬이지만 피란지로는 적합했다. 그는 결국 그곳에 눌러 앉게 되었다.
보길도는 작은 섬이지만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데다가 농지도 거의 없고 높은 산이 세 개나 되는 곳이다. 섬에는 노비 몇 사람과 주민 십여 호가 살고 있었다. 그는 피란민인 한 여인을 테우고 오다가 그 여인과 가까워 졌는데 그것이 또 구설수에 올랐다.
그는 보길도에 노비들과 섬 주민들을 동원하여 건축공사를 벌여 자신의 별장을 세웠다. 주민들은 전 의금부도사이며 이조정랑 등의 요직을 거친 고귀한 양반이 시키는 데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전 주민을 동원하여 커다란 정자와 정원을 꾸미고 산에서 나무를 베오다가 호화로운 집도 지었다. 정자와 각종 건물 25채를 지었으니 그 작은 섬에서 노역이 얼마나 심했을지 헤아리기가 어렵지 않다. 그 전경은 가히 작은 왕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병자호란 당시는 극심한 흉년이었다. 양서 지방인 황해도와 평안도 서쪽 지방은 흉작이 가장 심하였고 가축의 전염병이 창궐하여 다음 해 농사는 전혀 가망이 없는 지경이었다.
"산성을 수축하고 군사들을 먹이기 위해 세금이 높아져 민력이 이미 고갈되어 원성이 하늘에 사무치고 있습니다. 소는 모두 죽고 흉년이라 곡가가 전년에 비해 배나 비싸고 노약자가 울부짖는 소리는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다 합니다." (최명길 상소문)
그 한 해 전부터 함견도 전체에 기근이 들어 굶주린 백성들이 줄지어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고 전염병이 번져 이미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그런 형국이었다.
윤선도는 연못 가운데 작은 섬을 만들고 거기서 무희가 춤을 추게 하면서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지었다. 실제 현장 안내판에 적혀 있는 해설이다.
그때 한 번 뿐이 아니고 수시로 내려와 건축을 독려하며 지금은 다소 없어졌지만 서울 명망가에 못지않은 엄청난 개인 별장을 만들었다. 만약에 나라에 큰 변란이 일어나도 피신할 수 있는 도피처였던 것이다.
그 후 이런 것들이 모두 고발되었다. 왕의 소집령에 응하지도 않고 도망친 죄, 모르는 여인을 데리고 나라의 위기와는 아랑곳없이 섬으로 도주하여 환락을 즐겼다는 등의 죄목으로 그는 영덕으로 유배형을 받았다. 그는 여러 차례 유배를 떠났는데 그런 것들이 모두 보기 싫어 아예 낙도에 숨어 살기를 원했는지 모른다.
보길도는 결국 그런 내력을 지닌 섬이다. 국가나 백성들은 외면한 채 혼자만의 낙원을 이룬 섬이다. 그러나 윤선도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호화 사치스런 조선 사대부가의 기록은 수없이 많다. 청백리가 있어 가끔의 위로는 되지만 그 반대되는 사대부들이 너무도 많았다. 왕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간은 벼슬이 높아지고 부를 소유하게 되면 자연히 환락을 즐기게 되고 목숨을 아까워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듯하다. 오늘날에도 우리 사회 일부 지도층 인사들이나 대기업 회장 , 2, 3세들이 일으키는 사회적 물의는 모두 이런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판단된다. 5%의 가진자들이 삶을 즐기고 향유하다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면 대부분의 95%에 속한 힘없고 가난한 서민들은 그들을 손가락질을 하면서 욕을 하게 된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나쁜 놈들이라고......
그러나 마찬가지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어느날 로또나 당첨되어 졸지에 그러한 위치에 올라가데 되면 목소리가 커지고 목에 힘이 들어가게 되며 좋은 집, 좋은 차, 젊은 여자, 넓은 정원, 고급 레스토랑을 들락거리며 희희낙낙 인생을 즐기게 되는 것은 것처럼 인간이면 대부분 이와 마찬가지가 된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욕할 것이 못된다는 이야기다.
예수가 말한 것처럼 길을 가다가 어느 곳에서 죄지은 사람앞에 사람들이 모여서 욕을 하며 손가락질 하면서 비난하자 "여기 죄없는 자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보라"고 하듯이...... 그래서 조선 사대부들의 양면성이나 대부분 인간의 양면성은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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