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의 봄 20 : 현충일의 의미 7 (6.25 전쟁, 한국전쟁 6)
북악 둘레길에서 바라본 성북동 전경
초기 전투 ~ 낙동강 전투까지 주요 전투 3
춘천, 홍천 전투
춘천 전투는 한국 전쟁 초기 1950년 6월 25일~ 6월 30일까지 춘천 일대에서 국군과 북한 인민군이 벌인 전투이다.
당시 김종오 대령이 이끄는 제6사단은 지휘소를 원주에 두고 우익은 789고지를 경계로 하여 이정일 대령이 이끄는 제8사단과 그리고 우익은 주목리를 사이에 두고 유재흥 준장이 이끄는 제7사단과 각각 연계하고 있었다.
이때 사단의 우일선인 함병선 대령이 이끄는 제2연대는 지휘소를 공천에 두고 그 예하의 제3대대는 연대의 오른쪽 제 1선으로 789고지-우준리 간을, 그리고 제1대대는 왼쪽 제 1선으로 873고지-오산동 간을 각각 방수하고 있었으며 제2대대는 연대 예비로서 당포리에 배치하였다.
임부택 중령이 이끄는 제7연대는 춘천에 지휘소를 두고 제2대대는 제2연대1대대와 연계하여 양통리까지, 그리고 제3대대는 이에 이어 주목리까지 각각 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이 중 제11 및 12 양 중대는 연대의 예비인 제1대대와 함께 춘천에 있었다.
제7연대는 그 전해인 1949년 2월 20일에 사단으로 예속되어 청주로부터 원주로 약진하여 2개월간의 교육을 마친 후 5월 3일에는 현 진지 춘천으로 진입하여 서종철 중령이 이끄는 제8연대로부터 인수받고 3개월 뒤인 8월 6일에는 신남으로 침습한 1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을 포착해 섬멸하는 경험을 쌓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13개월간에 걸친 방어로 해당 지역의 지형을 숙지하게 되고 또한 군관민의 통제가 어느 곳보다도 공고하였다.
또한 제7연대는 대대전투훈련을 마쳤으며 우수한 장교의 피교육차출을 기피하는 당시의 풍조를 깨고 대부분의 장교들을 해당학교에 파견하여 보수과정교육을 마치도록 하였다.
진지공사에 있어서는 춘천정면은 제7연대가 진입하자마자 전선으로부터 시내가 불과 12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음을 감안하고 공사를 서둘렀는데 육군본부에서는 예산상 공사를 지연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자 자체 인력만으로 해결하기고 결정하고 사단으로부터 공병 1개중대를 지원받아 춘천 시민과 학생들의 도움으로 9개소(장재동 : 1개소, 인남리로부터 춘천간 : 6개소, 서상리 : 1개소, 지암리 : 1개소)에 유개 콘크리트와 그리고 중대마다 2 ~ 3개소의 통나무로 만든 유개호를 마련하고 호간에는 연락호로 연결하였으며 진전에는 지붕형 철조강을 쌍선으로 치고 그 중간에는 대인지뢰를 묻었다.
작전계획
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날이 갈수록 빗발쳐 들어오는 북한군의 징후를 심상치 않게 주시하고 있었는데, 6월 19일에 제7연대장 임부택 중령으로부터 『북괴 제 2사단 소속의 전차병 한 명이 귀순하였는데 그의 진술에 의하면 북한군은 6월 23일부터 38도 분계선 접경에서 야외연습을 하기 위하여 일주간의 야간행군으로 전차 40대와 함께 화천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에는 많은 병력과 포가 집결하고 있음을 보았다』는 보고를 하였다.
사단장은 1개 포로의 진술만으로는 정보의 정확도가 마약함을 인지하고 연대장에게 다시 확인하여 보고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연대장은 윤수용 소위를 장으로 한 수색대 30명을 화천 및 양구 쪽으로 잠입시켰는데 그들의 귀대보고에 따르면 『화천에 차량 400대 및 양구에 300대가 각각 춘천으로 남하할 태세를 갖추고 줄지어 있음을 목격하였고 그 양쪽에는 대병력이 숙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직접 적정을 살피기로 하고 23일 08:00에 S-2 김동명 대위 및 S-3 이남호 소령을 대동하고 제 3대대 제 9중대 관측소로 올라갔다.
여기에서 그는 모진교 북쪽에서 대병력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음을 목격하고 돌아왔는데, 때마침 초도순시차 온 사단장 김종오 대령에게 적정을 보고한 뒤에 조만간 어떠한 사태가 벌어질 것 같다고 덧붙였다.
전투 과정
6월 25일
04:00부터 북한군은 인남리 및 지암리에 격렬한 포격을 퍼부었고 1시간에 걸친 공격준비사격이 끝나고 사정을 연신하는 듯 하더니 운집한 대군이 가랑비와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안개 속을 뚫고 추전리-청평-고탄리-인남리-지암리의 각 도로를 따라 노도와 같이 침공하기 시작하였다.
6월 26일
전날 저녁 19:00에 실시한 대대의 반격으로 북한군은 많은 손실을 본 듯하여 옥산포 일대에 집결하고 있는 것으로 추단되었다.
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제19연대 2대대가 우두산으로 오자 이에 힘을 얻고 옥산포를 수중에 넣은 북한군을 괴멸하기로 결심하고 제 1대대장 김용배 소령에게 08:00를 기하여 이를 공세하도록 명령하는 한편 너무 돌진하여 측방이 노출하지 않도록 약진한계선을 삼거리로 통제하였다.
6월 28일
북한군은 08:00에 보전포협동으로 세 방면으로 침공하였는데 그들의 전개 양상으로 보아 연대를 원창고개 부근에서 포위차단하려는 기도인 것으로 판단되었다.
즉 그들은 주공을 5번도로(춘천-홍천간)로 지향하고 전차 및 포병을 여기에 집중하여 연대의 정면으로 공격하고, 다른 두 개의 무리들은 동서로 분진하여 그 하나는 897고지를 침탈한 다음 계속 남하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북한강을 따라 남하하다가 연대 좌측중복을 찌를 듯이 금병산으로 파고들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303고지로 철수하고 있던 근무대대장 김근호 대위는 서쪽 3km의 도로(46번 도로)에 긴 차량행렬을 이루면서 가평으로 향하는 적군을 목격하였는데 뒤에 확인된 바에 의하면 이는 적 제 2사단이 서울 동부를 목표로 서남진하는 것이었다.
김종수가 이끄는 제2대대는 그들의 주공의 침공을 맞아 이금열 중위가 이끄는 제2포대의 직접 지원 밑에 광파를 사진오퇴하는 치열한 사격전을 3시간 동안이나 벌였으나 역부족하여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난전을 하고 있었다.
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야전지대에서 저항하게 된 불리한 지형조건과 첨예한 화력, 그리고 주보급로를 차단하려는 북한군의 계획을 간파하자 사단장이 강조한 원창고개 선에서의 방어를 결심하고 각 대는 제2, 1근무대대 순으로 선정한 진지를 점령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런데 북한군의 압력은 예상외로 가속화하여 보급로의 차단이 목전에 다가옴을 느낀 연대장은 사단장 김종오 대령의 승인 밑에 원창선에서 좀 더 물러나서 있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제2대대의 엄호하에 연대주력과 제2포대를 사현으로 집결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연대장은 엄호대대였던 제2대대장 김종수 소령에게 『현 위치(원창고개)를 별명이 있을 때까지 고수하여 북한군을 저지격파하면서 그들의 침공을 최대한 정착시키라』고 명령하였다.
원창고개는 표고가 600m이며 요형 횡격실을 이루고 북쪽 산기슭은 급경사인데 수목이 없어 적토지대나 다를 바 없었다. 춘천으로부터 이 고개의 정상까지는 많은 굴곡을 이루고 있어 방자에게는 관측과 사계가 양호한 요역이었다.
대대장은 이 고개를 언제까지 고수하여야 할 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적으로부터 완전히 포위될 위험과 극한 상황을 고려하여 피로에 지친 병사들을 격려하면서 전면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6월 29일
제2대대장 김종수 소령은 주력철수의 엄호를 마치자 적과의 일전을 다짐하면서 전력을 굳히고 때가 도래하기를 고대하였다. 이때 대대의 병사들은 소양강 공방전에서 전투다운 전투도 해보지 못하고 철수만 거듭하여 불평을 터트리고 있었다.
북한군의 포격이 점점 열도를 가하기 시작하더니 06:00에 사정이 연신되면서 2개 연대규모가 시야를 메우고 올라왔고 이들을 목격한 대대장은 『진전 200m로 접근할 때까지 사격하지 말라』고 명령하여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북한군은 북한기를 앞세우고 수파의 물결을 이루며 밀려들어 드디어 최후저지 사격권 내에 들었고 대대장의 사격개시 호령이 떨어지자마자 일제히 전 포구는 불을 토하고 소화기는 교차사격으로 집중 강타하니 전장은 순간에 도륙장으로 화하여 북한군들의 비명은 하늘을 찔렀다.
악랄한 독전 밑에 사파가 쓰러지면 오파가 다시 비집고 나오는 연속적인 파상공격으로 돌파를 기도하였으나 끝내 시체만 누증시켰을 뿐으로 침공이 둔좌된 채 피아는 사격전으로 대치하게 되었다.
이윽고 11:00에 1개 대대 규모가 재침하기 시작하여 대대는 다시 전투태세를 갖추고 근접하기를 기다렸다. 바로 이때, 대대장은 제5중대장 김상흥 대위로부터 『적이 백기를 들고 올라옵니다』라는 보고를 접하고 앞으로 나가 보았더니 큰 백기를 흔들면서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는 북한군이 투항하려는 것으로 속단하고 사격을 중지시켰는데 병사들은 처음 보는 그들의 투항에 호 밖으로 튀어나와 빨리 올라오라고 환성을 지르며 맞이할 채비를 하였다.
그들은 서서히 웃음을 띠며 20m 앞까지 다가오더니 갑작스럽게 백기를 내던지자마자 어깨에 숨겼던 다발총을 꺼내 난사를 가함으로써 일순간에 백병전이 벌어졌고 피아가 얽힌 혼전으로 양측 모두 사격은 제쳐놓고 총검과 주먹의 대결장이 되었으며 대대장도 적병과 맞붙어 뒹굴다가 연락병이 날쌔게 이를 사살하고 위기일발에서 구출되었다.
난전격투 끝에 적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는데 비록 병력면에서는 호각을 이루었다고 하지만 그들은 병력이 분산된 데다 전의가 상실된 가운데 독전으로 몰아친 까닭으로 허수아비나 다를 바 없음에 반하여, 대대는 대부분의 호를 즉각 방패로 삼아 노출된 그들을 사살할 수 있었고 더욱이 대대장이 위기를 면한 즉시 진두에서 대대를 수습한 데 더욱 용전할 수 있었다.
대대장 김종수 소령은 『이때만 하여도 전투에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백기만 들면 투항하는 것이라고 간단히 생각하고 그들의 어깨에 걸머진 총에는 관심조차 갖지 않아 완전히 그들의 속임수에 넘어갔던 것이다. 이 사실을 육군본부에 보고하여 이러한 적의 기만에 속지 말도록 전군에 하달한 바 있다』고 술회하였다.
원창고개 전투 이후 제2대대는 질서 있는 철수를 하여 13:00에 사현에서 연대 주력에 합하였고 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연대 전 병력이 집결하여 철수준비가 완료하자 각 지휘관을 소집하고 다음과 같은 요지의 명령을 하달하였다.
1. 연대는 화양강(홍천읍을 남쪽으로 끼고 흐르는 강) 남안으로 철수하여 방어진지를 점령하고 제 2연대의 철수를 엄호하는 한편 뒤를 쫓는 적을 진전에서 격쇄하려 한다.
2. 제1대대는 371고지(원주가도의 우측)에 신 방어진지를 점령하라.
3. 근무대대는 418고지(동가도의 좌측)에 신 방어진지를 점령하라.
4. 제2대대는 삼마치에 신 방어진지를 점령하라.
5. 연대 관측소는 371고지에 위치한다.』— 제7연대장 중령 임부택
이리하여 13:30에 연대는 차량과 도보행군으로 사현을 출발하여 24:00에 각각 조지진지를 점령하고 급편방어에 임하였다.
결과 및 영향
사단은 5일간에 걸친 춘천 및 홍천 동북지구의 서전과 이에 이은 4일간의 지연전에서 북한군 제2군단에게 섬멸적인 타격을 줌으로써 그들이 전도하였던 속전속결의 망상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고 말았다.
더욱이 사단이 보유하고 있는 대전차화기가 무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육박전으로 그들의 전차를 파괴하였다는 것은 대서특필할 만한 사실이었다.
이번 전투에서 사단이 승전고를 울릴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은 각 연대가 38도 분계선상에서의 충돌을 통한 전투와 후방지역에서의 공비격멸작전을 전개함으로써 얼마간의 전투경험을 가졌기 때문에 병사들의 자질이 우수하였던 것이며, 특히 병력 및 장비가 열세함에도 불구하고 하천선방어와 산악지대의 지형을 최대로 이용하여 방어의 주도권을 장악한데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은 고지대로 우회공격을 하지 않고 탄탄도로를 따라 정면 돌파를 시도 하였으니 그 한 예가 춘천지구전투에서 보리밭으로 밀집함으로써 포병의 좋은 목표물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북한군 정면에서 침공을 되풀이하다가 제 2사단이 와해되고 제 7사단을 전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 한 가지는 사실보도 아닌 제17연대의 해주 점령 및 제7사단의 의정부 탈환과 북진중이라는 보도는 사단 장병들에게 사기를 고취시키는 청량제가 되기도 하였으니 진지를 고수하고 이어서 38도 분계선으로 반격하여 북상하고자 소양교까지 폭파하지 않고 전기를 만회하려 한 점이다.
비록 전세는 역전되었지만 소양강 북안일대에는 북한군의 시체가 산적하여 전차 기동이 여의치 않아 강 속에 쓸어 넣었는가 하면 끝내 무한궤도로 깔아 뭉게고 넘어와 도강하였으니 격전을 상상할 수가 있고 북한군의 손실이 막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작전기간 중 사단은 육군본부와의 통신이 유지되지 못함으로써 전반적인 전황을 파악할 수 없어 작전지도에 차질을 초래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하 부대에서도 통신장비의 부족으로 심지어 홍천에서는 체신부의 전신선을 부대별로 할당하여 유선통화를 하여 궁핍을 모면하는 등 가장 곤란한 것이 통신문제였다.
한편 북한군 제2군단을 서울 점령에 집착한 나머지 제7사단을 홍천 동북쪽에서 역전시켜 홍천으로의 침공이 지연되고 군단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과오를 범한 데다 사단의 기습적인 공세에 몰려 그들 전차의 충격력은 사라지고 뒤를 쫓는 데에 불과하였으며, 또한 측방타격이나 우회추격에 실패함으로써 사단전투능력의 회복이 예상외로 빨랐던 것이다.
어떻든 사단은 질서 있는 지연전으로 기간 중에 충주를 점령하여 아군을 동서로 양단하려던 그들의 기도를 무산시키는 데 주효하였던 것이다.
이후 북한군은 이와 같은 작전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물어 군단장 김광협 소장이 해임당하고 그 후임으로 김무정 중장을 임명하였으며 이보다 앞서 7월 초에 제2사단장 이청송 소장은 최현 소장으로, 제7사단장 전우 소장은 최충국 소장으로 각각 교체되었고, 7월 3일에는 제7사단을 제12사단으로 개칭하여 패전의 오욕을 씻으려 안간힘을 기울였다.
또한 북한군들이 제6사단 특히 제7연대의 선전 앞에 무릎을 꿇고 춘천바위라고까지 별명을 붙이게 된 것도 이를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었고 이 때문에 북한군이 3일간 한강을 건너지 못했다는 주장이 있다.
평가
북한을 방문한 폴란드 무관 파우엘 모나트 대좌는 북한군 제2군단 참모장 최린 소장의 진술을 토대로 소련군 총참모부가 작전을 수립할 때 한국군의 능력을 너무 경시하고 북한군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현재 대한민국에선 춘천전투를 춘천대첩으로 재명명하여 2000년 6월 26일 춘천에 춘천대첩기념평화공원을 설립하였다.
강릉전투
강릉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 |||
날짜 | 1950년 6월 25일 ~ 6월 2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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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강원도 강릉 | ||
결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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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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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전투는 한국 전쟁 발발 초기 이정일 대령이 이끄는 국군 제8사단이 육전대 및 비정규전부대로 증강된 북한군 제5사단의 수륙 양면에 걸친 협공을 당한 긴박한 상황 하에서 3일 동안이나 강릉을 지탱한 방어 전투이다.
북한군이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 줄기를 이른바 인민 유격대의 남파 통로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1948년 11월부터였으며 1950년 6월 중순에는 기관총으로 무장시킨 유격대 60명을 오대산, 계방산으로 침투시켜 국군의 반응을 살피는 동시에 전투 병력의 분산을 유도하고 후방지역 교란을 꾀하였다.
그러나 이들 유격대는 아군의 조직적인 토벌작전으로 작전 개시 5일 만인 6월 20일에 55명이 사살되었고 이로 인하여 북한군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아군의 전투 병력을 분산시키는 목표는 달성하였던 것이다.
무장 유격대가 오대산 일대로 침투한 것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양양을 중심으로 한 38도 분계선 일대에 붉은 계급장을 단 수많은 병력이 나타나 공격대기 지점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중공군 제164사단 출신 한인 1만 명을 기간으로 1949년 8월에 나남(羅南)에서 창설된 마상철(馬上喆) 소장이 이끄는 북한군 제5사단 병력이었다.
그밖에도 간성(杆成)에는 오진우(吳振宇) 총좌가 이끄는 유격부대인 제766부대와 육전대인 제549 부대가 아군의 후방지역에 상륙할 준비에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더욱이 양양 일대에서는 5월 초부터 감자나 호박을 말린 군용 식량과 마초(馬草)를 현물세 형식으로 거둬들여 상당한 양을 비축해 두기도 하였다.
이처럼 북한군이 마지막 남침 준비단계에 돌입한 6월 19일에는 38도 분계선 우단의 기사문리(基士門里) 해변을 따라 적 제5사단의 군사 1명이 귀순해 왔다. 18세 정도의 홍안 소년인 그 군사는 “지금 양양 일대에서 많은 인민군이 집결하여 공격 준비를 하고 있다”라고 진술하였다.
같은 날 서림리에서도 북한군의 군사 1명이 투항하여 똑같은 내용의 첩보를 제공함으로써 국군 장병들을 긴장시켰으나, 상급부대에서는 아무런 대책도 강구하지 않았다
전투 과정
북한군의 수륙 양면작전
38도 분계선상의 교전상황
영동 일대에서는 6월 24일 낮부터 단비가 내리다가 밤에는 부슬비로 변해 온누리를 촉촉이 적셔주고 있었다. 강릉에서는 6월 25일 04:00부터 북한군 제15사단의 공격 준비 사격이 시작되었다. 그보다 앞서 강릉군 강동면 정동진리 등 명동 해안으로 상륙한 적 육전대의 선발대가 해두보(sea head)를 확보하고 후속부대가 속속 상륙하고 있었다.
북한군 제5사단은 주공을 7번 도로 축선에 투입하여 주문진으로 진격을 개시하였으며, 조공은 양야~서림리, 남양리(南洋里)~원일전리(元日田里)의 계곡 접근로를 따라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소대 및 분대 단위로 경계 진지를 구축하여 38도 분계선을 경계하던 국군 전방부대 5개 중대는 전에 겪어보지 못한 엄청난 적의 포병화력에 압도당하여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으며,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에서 분계선 남쪽에 준비된 저지진지로 철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방대대의 예비 중대가 저지진지에서 전투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북한군의 포화가 국군 진지에 집중되었고 압도적인 적의 공격에 밀린 국군은 철수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7번 도로 축선 일대에 배치되었던 조원영(趙原英) 소령이 이끄는 제10연대 2대대는 화상천(和尙川)의 저지진지 마저 포기하고 주문진(注文津)으로 물러서게 되었고, 좌전방 서림리 일대의 박치옥(朴致玉) 소령이 이끄는 제1대대는 구룡령(九龍嶺) 일대에서 축차적인 지연전을 전개하면서 광원리(廣院里) 부근으로 철수하였다.
북한군의 상륙작전
6월 25일 해가 뜨기 약 1시간 전인 이른 새벽 강릉 남쪽 정돈진리의 해변마을인 등명동에 갑자기 수많은 북한군이 나타나 마을주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마을 옆 해안에 접안한 수송선에서 하역한 탄약과 보급품을 뒷산으로 운반시켰다.
그런데 뒷산 중턱에는 북한군이 이미 개인호를 파놓고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때가 6월 25일 04:00를 전후한 시간이었고 따라서 북한군의 선발대가 상륙한 시간은 그보다 1시간 전이었을 것으로 짐작 되었다.
그렇게 하여 해두보를 확보한 적의 육전대는 발동선과 범선으로 주력부대를 상륙시켰고 등명동 남쪽 10킬로미터 지점인 옥계면(玉溪面) 도직리(道直里)에 일단의 선박이 접안을 시도하였으나 수심관계로 실패하고 겨우 3명만 상륙시킨 후 등명동으로 북상하여 본대 선단과 합류하였다.
또한 이날 07:00경에는 북한군의 제766부대가 삼척 남쪽의 임원진리에 상륙하여 태백산맥으로 침투하였다. 등명동 해안에 상륙을 완료한 적의 1개 연대 규모는 산성우리(山城隅里)에 있던 대한 흑연무연탄 주식회사 강릉광업소를 급습하여 숙직중이던 경리과장이자 대한청년단 강릉군단 총무부장이던 심경섭(沈景燮) 이하 4명의 직원을 납치하고 밤재에 1개 대대를 배치한 후 주력은 강릉을 향하여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밤재에 배치되어 7번 도로를 차단하고 있던 북한군의 1개 대대는 옥계를 향해 남하하던 중, 때 마침 그 부근까지 진출한 국군 제21연대 1중대와 경찰 및 옥계면 대한청년단으로부터 기습을 받고 격퇴되었다.
이때 북한군의 대대장은 패전의 분풀이로 정동진리 해안초소에 포박한 경찰관 1명을 사살하려다가 실패하자, 심경섭 경리과장을 반동분자라 하여 현장에서 학살한 후 국군 제21연대가 삼척에서 강릉으로 이동할 것으로 판단한 듯 차단진지 구축에 착수하였다.
사단장의 지휘조치
강릉에 사령부를 둔 국군 제8사단이 비상을 발령한 시간은 05:30였다. 그 얼마 후부터 38도 분계선의 전황이 보다 소상하게 보고되었으며 곧이어 강릉 경찰서장의 북한군의 상륙상황과 그들의 주력이 강릉을 목표로 북상중이라는 상황 보고가 있었다.
제8사단은 지체없이 작전회의를 소집하여 제 21연대의 강릉 이동과 연곡천(連谷川)~사천(沙川)선에서 적을 저지 격멸하여 강릉을 사수할 것이며, 사단 공병대로 예비대를 편성하는 동시에 육군 본부에 1개 연대의 증원을 긴급요청토록 조치하였다.
전면전에 대비한 제8사단의 작전개념은 38도 분계선을 경계 진지로 하고 화상천 일대의 횡격실능선을 전진진지로, 연곡천~광원리를 주저항선으로 하며 사천과 운두령(雲頭嶺)을 예비 진지로 하여 축차적으로 지연전을 펼치다가 주저항선에서 적을 저지 격멸하고 공세로 전환한다는 것이었다.
그 후 육군 본부로부터 “적의 전면 남침이 개시되었으니 사단장의 재량권에 따라 최선을 다할 것이며 1개 연대의 증원은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은 직후 모든 통신이 두절되었다.
사단장은 이때서야 비로소 북한군의 전면 남침이 개시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필시 이 전쟁이 장기화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다음과 같은 대책을 강구하여 즉시 실천에 옮기도록 엄명하였다.
제8사단의 지휘조치 |
1. 모든 군수품은 대관령 너머 진부리(珍富里)로 소산시킨다. 2. 6월 25일 10시를 기하여 작전지역 내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제8사단장 대령 이정일 |
이에 따라 제8사단은 장병가족에게 6개월분의 봉급과 식량을 지급하고 계엄업무를 담당할 민사부장을 임명하는 동시에 강릉 일대의 주민을 피난시킬 계획까지 준비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강릉 학도호국단 산하 1400여 명의 학생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탄약 및 보급품의 운반과 환자 구호와 연락업무를 수행하였는데 이것이 학도병 참전의 효시가 되었다. 그리하여 6월 25일 오후에는 장기전에 대비한 군수품의 차량 적재작업이 완료되어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는 태세가 갖추어졌다.
한편 고근홍(高根弘) 중령이 이끄는 제10연대는 북한군이 등명동에 상륙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57mm 대전차포중대와 제4중대를 안목(安木)~안인진(安仁津) 일대로 급파하였다.
그 무렵에는 적의 상륙선단의 일부가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고 있었으며, 그 일부는 안인진 해변에 접안을 시도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안인진에 도착한 대전차포중대가 적의 선단에 맹렬한 포격을 집중하여 격퇴시켰다.
또한 제4중대는 등명동~강릉간의 방어에 유리한 대포동(大浦洞)에 방어진지를 급편하여 때마침 북상 중이던 북한군의 1개 중대 규모의 군사들을 격멸함으로써 위급한 국면을 타개하였다.
군선강 방어선의 형성과 제21연대의 증원
안인진, 대포동의 교전상황을 보고받은 제8사단장은 남쪽에서 협공하는 북한군에 대비하는 것이 선결문제라는 결론을 짓고 강릉 남쪽 12km 지점의 군선강에 방어진지를 급편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그 시점에 있어서는 38도 분계선이 붕괴되어 전방부대들이 철수를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 10연대의 예비인 제 3대대의 전방증원이 시급한 형편이어서, 어느 부대를 군선강에 투입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더구나 무장공비토벌을 위 해 계방산, 오대산, 대관령 일대에 투입한 부대와 삼척에 있던 제21연대가 강릉까지 이동할 수 있을지 조차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이때 사단장이 가용한 부대는 사단 공병대대밖에 없었고 이처럼 어려운 고비에서 사단장은 제10연대장에게 제21연대가 증원될 때까지 군선강 방어임무를 수행하도록 명령하고 제18야전포병대대 3중대를 동 연대에 배속하는 한편, 공병대대를 연곡천 주저항선에 배치하고 사단 전술 지휘소를 사천국민학교에 설치하였다. 이에 따라 제10연대장은 하병래(河炳來) 소령이 이끄는 제3대대를 군선강에 투입하여 방어진지를 급편하였다.
삼척의 김용배 중령이 이끄는 제21연대장은 강릉으로 이동하기에 앞서 지역 내의 민간차량을 징발하여 기동력을 확보하고 북평에 주둔하고 있던 제1대대로 하여금 옥계 일대의 적정을 수집하게 한 결과, 적이 밤재에 차단진지를 구축한 상황을 확인하게 되었다.
연대장은 강릉 일대의 상황이 위급함을 감안하여 최단거리이며 차량 및 도보이동이 용인한 7번 도로를 따라 이동할 것인지 아니면 부평~백봉령(白峰嶺)~삽당령(揷塘嶺)~구산리(邱山里)로 우회할 것인지를 심사숙고한 끝에 우회이동 한다는 단안을 내렸다.
이리하여 제 21연대는 2개 행군제대를 편성하고, 연대의 주력은 6월 25일 19:00에 삼척을 떠나 6월 26일 10:30경 강릉에 도착하자 곧 군선강방어진지를 인수하였다. 그리고 이창률(李昌律) 소령이 이끄는 제3대대는 장성과 임계리에 배치한 2개 중대를 삼척으로 집결시킨 후에 행군하게 되었다.
주저항선의 공방전
김묵(金默) 소령이 이끄는 사단 공병대대는 예하 3개 중대로 전투편성을 마치고 제10연대에 배속되어 연곡천 주저항선 진지를 점령함으로써 공병이 보병전투를 수행하는 첫 번째 기록을 세웠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제18야전포병대대 1중대는 주저항선 후방의 석교리(石橋里)에, 2중대는 사천 초등학교에 포진하였다.
주저항선을 사전에 확보한 국군은 전방대대인 제10연대 2대대의 철수를 효과적으로 엄호할 수 있었으며, 6월 26일 오전에는 제21연대가 증원됨에 따라 연곡천의 방어배치를 재조정하고 반격의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연곡천 방어선의 부대배치 상황 (6월 26일) |
좌전방부대: 공병대대(3개 중대) 중앙전방부대: 제10연대 제3대대 |
제10연대가 주저항선에서 방어진지를 재편성하고 있을 때 사천면 대한청년단은 사명감이 투철한 대원 40명을 선발하여 적정수집을 자원하고 나섰으며, 면 부인회와 청년단은 야전 취사장을 설치하여 군경에게 주먹밥을 공급함으로써 군작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주문진 탈환 기도와 북한군의 선제공격
제8사단의 주방어지대는 연곡천~송림리(松林里)간 4km의 방어 정면과 그 남쪽으로 사천까지 3킬로미터 정도의 방어종심을 가진 지역에 형성되어 있었다.
연곡천은 강폭이 200 ~ 250m 정도이지만 수심이 깊어 교동(校洞)과 송림리의 여울 외에는 도섭이 불가능하였다. 또한 7번 도로와 연곡천이 만나는 지점에는 목교가 가설되어 있었으나 자주포를 포함한 중장비는 통과할 수 없었다. 국군은 이 목교를 파괴하지 않고 그 부근에 살상지대를 설정하여 적을 유인하여 격멸하려고 하였다.
북한군은 6월 26일 이른 새벽 공병 대대 제3중대 정면에서 강습 도하를 시도한 것을 계기로 산발적인 교전이 있었으나 대대적인 공격은 없었다.
제10연대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제2대대로 하여금 주저항선 전방의 감제고지인 천마봉(天馬峰)을 공격 탈취하게 하여 주문진을 공격하기 위한 발판을 확보하고 곧이어 사단에서는 주문진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런데 그 무렵에는 북한군 또한 공격준비를 완료하고 공격개시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국군은 그와 같은 적정을 전혀 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날 6월 27일 새벽 04:00, 즉 국군의 공격 개시 시간보다 1시간 전에 북한군의 공격 준비 사격이 개시되어 천마봉과 주저항선을 강타하였는데 이때 북한군의 화력의 강도는 국군 장병들의 상상을 초월한 맹렬한 포격이었다.
그러한 와중에서 천마봉의 제2대대는 북한군이 공격을 개시한 후 얼마 후에 저항을 포기하고 연대에 보고도 하지 않은 채 임의로 철수하고 말았고 이로 인해 천마봉에 국군이 배치되어 있다고 믿고 있던 주저항선의 부대들은 어둠 속에서 측방으로 접근하는 북한군을 제2대대 병력으로 오인하였으며, 마침내 방어진지의 일각이 무너지고 연쇄적으로 방어진지가 붕괴되어 혼전이 벌어졌다.
이 급박한 때에 제21연대의 후발대인 제3대대가 군가를 부르면서 강릉에 도착하자 타개책 모색에 골몰하던 국군은 즉시 제3대대를 사천선에 투입하여 분산 철수하는 병력을 수습하고 북한군을 사천선에서 저지함으로써 최고조에 달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우연의 일치라는 말이 있듯이 제21연대 제3대대의 적시적인 증원과 전선투입은 절망의 늪에 빠진 제8사단에 다시 생기를 불어 넣는 활력소가 되었다.
결과 및 영향
북한군의 기습 남침과 강릉 전투로 제8사단은 강릉에서 철수하여 원주를 목표로 철수하였으나, 원주를 빼앗기는 것이 시간문제라는 판단에 제천을 목표로 하여 평창으로 철수로를 변경하였다.
평창을 거쳐 제천에 집결한 8사단은 잘못된 정보로 인해 열차편으로 대구로 이동, 다시 전선으로 복귀하는 혼란을 겪으면서 북한군의 남침 속도를 가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한강방어전투
한강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 |||
날짜 | 1950년 6월 28일 ~ 7월 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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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서울, 시흥, 노량진, 영등포 등 한강 부근 | ||
결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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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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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전투는 한국 전쟁 발발 초기인 1950년 6월 28일에 한강 이북의 서울이 북한군에게 함락당하자 한강 이남으로 철수한 국군이 강을 사이에 두고 강북의 북한군과 대치해 벌인 공방전이다.
그러나 7월 3일에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7월 4일에 국군이 수원까지 내어놓게 된다.
전투 과정
초기 전투에서의 충격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혼성'이라는 이름을 앞에 달고 소총사단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병력만으로 한강선을 지켜야 하는 국군은, 그래도 사수 결의만은 대단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영등포 지역에 배치된 혼성 수도 사단은 혼성 2개 대대와 5사단의 일부 병력을 배속 받아 마포, 서강 지역의 북한군 4사단과 대치하고 있었고, 혼성 7사단은 4개 대대의 혼성 대대를 배속 받아 노량진 지역에서 북한군 전차와 주력 부대의 남진을 저지할 목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급조된 혼성 부대는 원 부대의 집결지를 알면 즉시 원대로 복귀하는 것이 통례였기 때문에 혼성부대의 지휘관들은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원의 신상이나 규모를 알지 못한 채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따라서 질서 있고 조직적인 작전 수행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서 한강선의 방어가 실시될 수밖에 없었다.
혼성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은 지휘소를 대방동의 국군수도병원(전 공군회관 자리)에 사단 지휘소를, 사단 수용소를 성남중학교에 설치하고 전열정비에 들어갔다.
사단장은 노량진 ~ 영등포 도로의 강변에는 1연대와 공병 혼성대대를 배치하여 경부가도와 철로, 그리고 지역 내 한강도하를 저지하도록 하고, 9연대와 혼성 대대를 동작동 ~ 흑석동 능선, 20연대와 혼성대대를 흑석동과 본동 사이의 능선에 배치하고, 15연대 1대대, 25연대 2대대, 15연대 3대대를 수도고지 서북쪽에 배치하여 노량진 ~ 영등포를 잇는 도로와 철도를 감제하도록 했다.
노량진 지역의 방어를 맡은 7사단장은 특히 채 폭파되지 않은 경부 복선 철교가 마음에 걸렸는데 인도교와 경인선 하행선의 폭파가 먼저 이루어졌기 때문에 옆의 상행선은 침목의 일부만 손상을 입은 가벼운 폭파가 되었고(이것은 후에 B-29가 폭파시켰음.), 서쪽의 경부 복선은 거의 폭파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이것은 철교들이 인접해 있었던 이유로 점화시간이 다를 경우, 먼저 폭파된 폭약의 폭풍과 진동으로 나머지 폭파장치(도폭선과 뇌관 등)가 분해되거나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어 폭파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렇게 폭파가 덜 된 철교로 열차와 국군의 인원이 도강을 할 수 있었으나 이 지역의 방어를 맡은 사단장은 이 점이 마음에 걸렸다.
자신이 아침에 건넌 철교가 마음에 걸려 7사단장은 북한군이 이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공병대에게 이의 절단을 명했다. 그리고 존 처치 준장의 요청으로 6월 29일에는 B-26 폭격기가 폭격했지만 커다란 효과가 없었다.
명령을 받은 공병도 이의 절단을 시도했으나 복선 철교의 남단에 있는 교대 연결부분이 약간 이탈하는 정도로밖에 폭파가 성공하지 못했다. 북한군의 방해도 있었지만 폭약 등 폭파수단이 없던 공병은 철교를 완전히 절단하지 못한 채 불씨를 남겨놓게 되었다.
한편 혼성 수도사단장으로 임명된 사단장 이종찬 대령은 사단 지휘소를 우신초등학교에 설치하고, 비교적 건제가 유지된 박태운 소령이 이끄는 8연대 3대대를 사단의 근간으로 삼아 영등포 지역 방어에 임했다. 3연대와 18연대는 의정부 정면에 증원된 후 행방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18연대의 1개 대대와 57㎜ 대전차포소대가 합류하였다.
그러나 사단의 전력은 1개 연대의 수준도 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이와 같이 시흥지구의 전투사령부가 지휘 하여 한강선을 지켜야 하는 주력인 혼성 수도 사단과 혼성 7사단의 전력은 1개 사단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지 하루가 지난 6월 29일에 노량진 전선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교착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북한군은 6월 29일에 동작동과 흑석동 사이 남쪽 한강변에 진지를 구축하기도 하고, 흑석동과 본동 고개 너머의 도당재지역에 소대규모를 도하시켜 호를 파기도 했다.
이에 9연대와 20연대 병사들이 이들을 공격하여 수장시키고 소련제 맥심(Maxim) 기관총과 체코슬로바키아제 소총을 노획하기도 했으나, 동작동과 흑석동 사이의 한강변에는 적의 도하병력이 늘어서 진지를 구축하기도 했다. 그리고 6월 29일 밤이 깊었다.
그러나 6월 29일에 혼성 수도 사단이 맡고 있던 영등포 지역에서는 북쪽의 북한군이 쏘아대는 120㎜ 박격포탄이 떨어지는 가운데 더글라스 맥아더 극동 미군 사령관이 나타나 '위험하니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미 고문단장 라이트 대령의 권유를 물리치고 '한강을 봐야겠다 (No, I want to see Han River).'고 하고 강북에서 타오르는 연기와 포연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호를 지키고 있던 병사에게 '지원병을 보내 줄 테니 안심하고 싸우라.'는 말을 남겼다.
6월 29일 정오가 지나자 여의도의 북단에는 적의 산발적인 도하가 시작되었다. 국군이 그나마 갖고 내려온 81㎜ 박격포는 국군을 괴롭히는 북한군 포진지를 공격할 만큼 사정거리가 길지 못했다. 그리하여 국군은 포 4문을 끌고, 여의도 서북쪽 구릉지대에까지 진출해 진지를 구축하고 강북을 향해 회심의 1발을 날리고, 10발을 더 사격했을 무렵 북한군의 집중포화가 퍼부어져 포를 끌고 진출했던 전원이 전사하고 말았다.
이 동안에 북한군은 도하 거점을 확보하고 김포가도 쪽으로 공격함으로써 밤새 피아간에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아군 장병들은 김포에 이르는 가도의 제방에 엎드려 허리띠를 풀어 옆 전우와 연결하여 서로 돌격하면서 적의 진출을 막아내고 있었다.
여의도에서의 6월 30일 아침은 북한군과 국군이 공방의 혈전을 치르는 가운데 밝아왔다. 북한군은 서종철 중령이 이끄는 8연대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여의도의 비행장만을 장악하고 있었다. 연대장은 북한군의 진지가 공고해지기 전에 이를 격퇴하기 위해서 김광해 대위가 이끄는 3대대 11중대를 투입하였다.
격전 끝에 11중대 병력이 적을 구축하고 비행장을 점령한 다음, 경계 진지를 급히 구조하였다. 이때 강북의 마포와 신촌에 방열된 북한군의 포화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이러한 포화 속에서 철수조차 할 수 없던 11중대 병력은 본진지로 철수하지 못하고 비행장 내의 격납고 속으로 대피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포격으로 이 격납고가 화염에 휩싸이고 이들은 중대장이 산화하는 등 많은 피해를 입고 말았다.
주인을 잃은 여의도에는 북한군과 국군의 포화만이 난무하고 있었고 사단지휘소를 동양 맥주공장으로 이전해야 할 정도로 적의 포화가 집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군은 대규모 도하는 실시하지 못했다.
영등포 지역에서의 북한군의 도하공격이 본격적으로 실시되기 시작한 때는 7월 1일 오전 4시 경이었다. 북한군 4사단 병력은 마포와 하중리 나루터에서 뗏목과 나룻배에 병력과 장비를 나누어 싣고 여의도를 향하여 이 섬 옆에 있는 밤섬에 전진거점을 확보하고 김포가도 제방으로 들이닥쳤다.
그러나 이 제방을 지키고 있던 국군들은 전차 없이 전진해 오는 적의 약점과 방어에 유리한 지형적 이점을 이용하여, 수적인 우세만을 믿고 개활지를 횡단하여 공격하는 북한군과 맞서 제1파의 적 공격을 격퇴하였다. 그리하여 국군 8연대는 이날 북한군이 한 명도 제방 위에 올라서 보지 못했다.
7월 2일 역시 북한군은 8연대의 진지를 향해 집요하게 돌파를 시도하였다. 이번에는 전날 밤에 비행장을 점령한 병력까지 합세하여 방어선 돌파를 시도했다.
이에 연대는 이철원 소령이 이끄는 제1대대의 김인걸 대위가 이끄는 1중대를 선발하여 비행장을 공격하도록 했다. 종일 혈전을 벌인 결과, 아군은 북한군을 밤섬 쪽으로 후퇴 시켰으나, 아군의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고 이 과정에서 이철원 대대장과 중대장, 그리고 박격포 사격을 지휘하던 10중대장 나병서 대위가 북한군의 포격으로 전사했다.
8연대 좌측에 배치되어 방어에 임하고 있던 18연대 1대대 역시 난지도에서 양화진으로 도하하려는 적과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대대의 4중대장 대리를 하고 있던 최규현 중위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상황을 말해 주고 있다.
“ | 이날 종일 앉아서 북한군의 포탄을 맞았다. 어떤 병사는 호 속에 포탄이 떨어져서 형체도 없어지고 말았다. 병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한 가지, 적의 포탄에 맞지 않게 해줍시사 하고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이날 …… 등 병사 10명이 전사하고 중대 선임하사 ……가 실종되었으며, ……의 두 병사가 부상을 입었다. 모두가 적의 포탄에 의한 것이다……. | ” |
실로 여의도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막고 있던 국군은 견디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북한군의 진출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노량진 지역에서도 6월 30일부터 적은 포병의 지원 아래 본격적인 도하를 시작하였다. 북한군 3사단은 전날 확보한 동작동~흑석동 사이의 한강변고지를 발판으로 동작동 뒤쪽 고지 정상으로 능선을 따라 진출하려 했다.
이에 국군은 미군 제 19폭격전대 B-29 15대를 동원하여 노량진 지역의 한강 북쪽을 폭격하여 지역 내 적의 도하증원을 차단하면서, 이미 도강한 적을 몰아 최초의 위치에 고착시키는 데까지는 성공을 거두었다.
노량진 지역에서 한강 인도교 남단을 감제할 수 있는 위치에서 방어를 하고 있던 15연대와 25연대는 한강을 건너와 도당재 지역에 도하 거점을 확보하려던 북한군을 공격하여 수장시키고, 소총 100정, 기관총 4 ~ 5정, 권총 20정, 그리고 수류탄 300발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국군 역시 30명의 손실을 감수해야만 했으나 이러한 전과는 국군으로 하여금 전차를 동반하지 않은 적과는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였다.
북한군 도하 공격이 한층 가열된 7월 1일에도 아군은 노량진 지역에서의 방어진지는 고수하고 있었다. 동작동 뒤쪽의 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윤춘근 중령이 이끄는 9연대는 7월 1일 날이 밝자 고지에서 능선을 따라 한강 남안에 위치한 북한군을 공격하여 도하 거점을 제거하려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수도고지에 있던 25연대도 고지에 숨어든 북한군들을 퇴치하기는 했으나 2대대장 배운용 소령이 전사하는 등 적지 않은 손실을 입었다. 노량진 역 부근에 배치된 공병대대도 대대장 엄재완 소령이 흉부 관통상을 입어 안양으로 후송되고, 사육신 묘 근처에 재배치 된 20연대 1대대 역시 북한군의 포탄에 정보, 작전 장교가 전사 또는 부상하였다. 이러한 공격과 더불어 북한군은 경부복선 철교의 복구에 들어갔다.
특히 북한군은 전날 폭파가 안 된 중간 단선철교로 전차를 도하시키려다가 미 공군이 이를 폭격, 차단하자 남쪽 연결 부분이 이탈된 경부복선 철교에 새로운 교판을 까는 작업을 실시하면서 이 지역의 국군에게 맹렬한 포격과 공격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국군은 국군수도병원(전 공군회관 위치)에 있던 혼성 7사단 지휘소마저 그로부터 남쪽으로 600m 떨어진 서울공업고등학교로 옮겨야만 했다.
한강 철교를 폭격하는 미공군, 우측 인도교는 이미 폭파되어 있다.
7월 2일 역시 전날과 다름없는 공방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노량진 지역에 배치된 아군은 그래도 방어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20연대와 1연대의 혼성대대가 노량진 역 근방의 강변진지를 지키는 가운데 9연대와 25연대 병력이 지키고 있던 흑석동 뒷산 본동과 수도고지를 잇는 방어선에서는 북한군과 국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이 곳에 배치된 대대는 병력이 줄어서 중대로 다시 재편성하면서 고지를 지키고 있었다. 동작동의 한 고지를 점령한 한 소대장은 고지를 점령하자마자 50발의 북한군 포탄 세례를 받아 순식간에 2개 분대를 잃어버렸다.
1개 분대 12명만으로 고지를 지킬 수밖에 없던 소대장은 실탄도 각자 50여 발씩 정도만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하자 1개 소대규모의 적이 공격해 왔다. 이에 소대장은 남은 병사들 손에 수류탄 2개씩을 쥐어주면서 적이 앞으로 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소대장의 '하나, 둘, 셋' 신호와 함께 일제히 이를 던지도록 당부했다. 한 병사가 연달아 던진 두발의 수류탄은 폭음과 함께 북한군을 놀라게 했다.
북한군은 부상자 몇 명을 끌고 후퇴했다. 그러자 소대장은 '제 1소대 우로! 제 2소대 좌로! 적을 포위하라!'고 소리치면서 자신이 마치 중대병력을 가진 중대장인 것처럼 위장했다. 이 위장공세 덕택이었던지 해가 졌는데도 북한군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이들 대대는 동작동고지에서 수도고지에 이르는 방어선을 그래도 지켜내고 있었다.
노량진과 영등포지역의 작전과는 커다란 연관을 맺지 않으면서 개전 초부터 계속 연결되는 김포지역과 경인가도 지역에서의 작전도 결코 순탄할 수가 없었다.
6월 25일에 1사단 12연개 2대대 병력의 일부가 김포반도 동북단으로 철수하자, 육군 본부는 기갑연대의 1개 소대를 김포반도의 한강 도하지점으로 급파하는 기민성을 보였다.
그리고 6월 26일에는 남산 정보학교장 계인주 대령을 김포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부교장 최복수 중령을 참모장으로 임명해 김포 반도 전투를 지휘하도록 했다.
그리고 밀양에서 공비토벌 · 선무 작전을 하다가 영등포로 복귀한 방원철 소령이 이끄는 보국대대를 투입하였다. 시흥의 보병학교에서 교육을 받던 각종 후보생으로 대대를 편성하여 김포에 투입하기도 했다.
6월 27일부터 북한군 6사단의 병력이 도하를 실시하여 진격하자 국군은 반격작전을 펼쳤으나 6월 28일에는 김포읍이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사령관이 실종(후에는 전지 이탈로 드러남)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다른 지역에서의 상황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결과 및 영향
7월 4일에 수원마저 포기하게 됨으로써 마지막 보루가 무너지게 되면서 결국 국군은 낙동강을 목표로 물러서게 되었다.
그러므로 국군의 입장에서 보면, 이 전투는 적보다도 차라리 시간과 싸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니, 이는 당시 군이 북한군을 격멸하고 실지를 회복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다만 증원군의 도착을 기다리는 시간을 얻기 위하여 싸웠다고 보는 까닭에서이다. 따라서 이 한강 선에서의 일주일이야말로 기사회생의 계기를 잡게 한 실마리가 된다고 할 것이다.
또한 북한군으로서는 이 한강선의 돌파에 의외의 시일이 지연됨으로 말미암아 당초 그들이 기도한 '수원 북방에서 아군 병력을 타격'하고자 했던 의도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또 그렇다고 미군이 참전하기 전에 방어선을 조기돌파」한다는 것도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이 같은 작전계획의 차질은 나중에 그들 스스로가 적화통일을 달성치 못한 가장 큰 원인의 하나로 분석하였을 정도인 것이다.
울진 - 평해 전투
울진-평해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 |||
날짜 | 1950년 6월 29일 ~ 7월 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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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강원도 울진, 평해 일대 | ||
결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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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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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평해 전투는 한국 전쟁 초기 1950년 6월 29일 ~ 7월 1일까지 울진 및 평해 일대에서 제8사단이 강릉에서 대관령 이서의 내륙으로 이동한 뒤에 울진에 이르기까지의 공백 지역을 남진한 북한군 제5사단에 대하여, 사단의 일부로써 초기 공격을 가한 일전인 동시에 평해선에서 전력을 일단 가다듬고 지연전으로 이행하는 첫 번째 작전이다.
1950년 6월 25일 육군본부의 긴급 명령으로 제22연대를 수도 외곽 전선에 급거 출동시킨 제3사단은 잔류 기간 1개 연대와 배속 받은 2개 특수대대로써 동해안 해변을 담당하게 되었으니. 지구의 전 전력에 대하여 열세를 면치 못하는 사단의 전력은 마치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것과 다름없는 절박한 상황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사단은 북한군의 남침을 예지하지 못한 가운데 6월 25일부터 태백산 이남지구의 공비 격멸에 착수할 출동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즉, 6월 중순, 태백산 - 보현산 - 지리산에 걸친 영·호남의 일부지역에는 남아있는 공비와 리승엽 대장이 이끄는 남파 유격대 30개 조가 합류하여, 540명으로 추산되는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육군본부는 이 공비를 소탕하기 위하여, 6월 24일에 출동부대의 작전회의를 진주에서 개회하였다.
작전국장인 강문봉 대령의 주관으로 소집된 이 회의에는 제3사단장 유승열 대령, 동 작전참모 장송주 소령, 제5사단 참모장 박명권 대령, 독립 제1대대장 김종순 중령, 영등포학원 부대장 홍성준 소령, 경찰부대 대표 등이 참석하였는데, 제3사단은 태백산 - 보현산지구를 담당하여, 지리산지구를 담당한 타 부대와 함께, 6월 25일 05:00부터 일제히 출동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전면남침으로 이 작전을 중지하고 정규전에 대응케 된 사단은 이날 11:00에 하달된 육군본부의 『1개 연대를 6월 26일 05.00까지 서울에 차출하여 수도경비 사령부에 배속케 하라.』하는 긴급명령(육본작명 제 93호)으로 제22연대의 2개 대대를 사단 참모장인 우병옥 중령의 지휘 하에 선발시켰으며, 6월 26일에는 잔여 1개 대대를 연대장인 강태민 중령의 지휘 하에 뒤따라 출동시키는 긴급조치를 취하였다.
이로써 제23연대의 1개 연대만을 사단 기간으로 보유하게 된 사단장 유승열 대령은 독립 제 1대대 및 영등포학원의 배속을 육군본부에 요청하는 동시에 제23연대장 김종원 중령으로 하여금, 마산 등 각지에 분산 배치중인 병력을 부산으로 집결시켜 출동명령에 대비토록 하였다.
작전계획
동해안의 요충지인 강릉을 초기에 빼앗긴 것은 사단의 방어 정면에 대한 북한군 제5사단의 압력을 가중케 하였으며, 해안본도에 대한 저지선의 전진 극편을 가속케 하였다.
강릉 정면의 38도 분계선을 담당하였던 제8사단은 북한군에 의하여 중요 전선이 돌파당할 경우에는 인구리(주문진 북쪽 10㎞) - 만월산(623고지) - 어성전리(인구리 서쪽 11㎞) 선에서 그 주력을 파악하고, 주문진(강릉 북쪽 17㎞) - 여곡천(주문진 남쪽 7㎞)간에서 그 잔여 세력을 포착 섬멸함으로써 관동 요역인 강릉을 고수할 뿐만 아니라 공세 이전의 호기를 잡으려던 것이었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사단의 주력을 대관령 이서의 내륙방면으로 전진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므로, 강릉 이남의 해안은 방벽 없는 공백지역으로 개방하는 셈이 되고 말았다.
이에 제3사단장은 상황 전반을 종합 분석한 결과, 울진 부근에서 북한군을 최초로 포착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제 23연대로써 제1차 저지선을 급편케 하기로 결심하였는데, 이 결심은 다음 두 가지의 주된 이유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첫째, 강릉 이남의 해안에 있어서 우선 삼척 방어가 고려되었으나, 죽변(울진 북쪽 7㎞) 이북의 임원진리 및 정동진리에 이미 해상 잠입한 북한군 공격병력으로 인하여, 저지선의 개편이 저해될 것이며, 둘째, 북한군 제5사단 주력의 도보행군과 우리의 차량기동력을 감안함에 울진 부근에서 조우하게 될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사단 작전 명령으로 6월 28일에 부산을 출발한 제 23연대는 열차편으로 대구를 경유하여, 6월 29일 10:00에 포항에 집결하였는데, 연대장 김종원 중령은 다시 박재열 소령이 이끄는 제1대대를 차량편으로 선발 출발하게 하고 백기천 소령이 이끄는 제2대대 및 허형순 소령이 이끄는 제3대대를 역시 차량으로 동일 15:00에 뒤따르게 하였다.
또한 사단장은 김종순 중령이 이끄는 독립 제1대대 및 홍성준 소령이 이끄는 영등포학원을 동일 17:00까지 포항에 집결시켜, 제 23연대 출동 후의 전황변동에 대비토록 하였는데, 이 2개 대대의 포항집결은 사단 미 고문관 롤린스 S. 엠메리치(Rollines S. Emmerich) 중령의 주장이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즉, 사단장은 6월 28일부로 양 대대를 배속받자, 사단 주력의 출동 뒤에 대구와 부산 일원의 후방 경비를 고려치 않을 수 없으므로 두 지역에 각각 배치하려고 하였으나, 제23연대를 엄호함이 더욱 시급하다는 엠메리치 중령의 의견을 받아들여, 양 대대로 하여금 긴급출동을 대기토록 한 것이다.
전투 과정
제23연대장 김종원 중령은 3개 대대를 출동시킴에 있어, 북한군의 정세를 정확히 파악할 길이 없으므로 막연한 느낌이었으나, 북한군 제5사단의 주력이 울진을 공격하기 전에 이를 선점확보하기로 결심하고, 연대 작전명령으로써 각 대대의 임무를 부여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연대 작전명령 |
①연대는 울진에서 적을 포착 섬멸하려 한다. ②제1대대는 6월 29일 17:00까지 울진을 점거하라. 제23연대장 중령 김종원 |
이로써 연대는 사단에서 차출한 징발트럭으로 영덕 - 영해 - 평해를 거쳐, 울진을 향하여 북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런데 연대는 이 출동에 앞서, 육군본부 작전명령으로 6월 25일에 서울로 긴급출동한 제22연대에 1개 대전차포 중대와 2개 중화기 중대를 차출하였으므로 화력의 약화를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으니, 연대의 긴급출동은 다급한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연대 주력에 앞서 출발하게 된 제 2대대장 박재열 소령은 당초부터 확신있는 작전계획을 세우지 못하였다. 울진을 목표로 하면서도 어디서 어떤 규모의 적과 부딪치게 될 것인지 전혀 예측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대 이동의 전진로에 대한 정세탐색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지용태 중위가 이끄는 제1중대를 1㎞ 전방에 앞세웠는데, 수산리(울진 남쪽 2㎞) 어귀에서 최초의 북한군의 정세를 보고 받았다.
즉, 제1중대장 지용태 중위가 피난민과 일부 주민들이 제보하는 6월 29일 현재의 울진상황을 종합하여 시가지에는 이미 북한군의 일부가 잠입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대대장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대장은 수산리에 대대본부를 설치하고, 연대장에게 적 정세를 보고한 다음 각 중대를 수산리 서북쪽 140고지에 배치하여, 해안을 경계하면서 연대 주력의 진출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이 고지는 남대천(북쪽)과 왕피천 사이에 끼어있으며 그 동선을 따라 해안 길이 남하하며, 북선을 휘감고 동류하는 남대천의 지류 너머로 울진교를 비롯한 시가지를 한 눈에 볼 수 있으므로, 저지선 개편 때 착공되었다.
제1대대장의 북한군 정세 보고는 연대장 김종원 중령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는데 울진에 침입한 적이 북한군 제 5사단의 주력이 아니라, 해안선으로 상륙한 일부라 할지라도, 성급한 직접대응은 병력의 손실을 초래하는 착오라고 판단하여서, 제1대대로 하여금 수산리의 현위치에서 대기토록 하고, 제2대대를 읍내리 부근에 배치하는 한편, 제3대대를 노음리에 집결시켜 왕피천 이남의 해안에 3㎞의 종심으로 급편토록 조치하였다. 이리하여 연대는 긴급출동과 동시에 울진을 확보하려던 당초의 계획을 크게 변동시켜, 다음 날인 6월 30일에도 북한군의 정세파악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날 07:00에 북한군 정세의 일부를 파악하여, 울진을 점거한 병력이 250명 안팍이 되는 것으로 추산할 수가 있었다. 즉, 수산리의 140고지에 배치된 권오봉 중위가 이끄는 제1대대의 2중대가 경계중인 해안을 따라, 접근하는 진격대원 12명을 포착, 10분간의 총격으로 2명을 사살하고 1명을 포위하여 심문한 결과, 다음과 같은 북한군 정세를 추정하게 된 것이다.
울진을 점거중인 북한군은 지난 6월 25일에 온양리로 투입한 여단 진격대의 일부로서 본래가 태백산 중으로 잠입한 뒤에, 북한군 제5사단의 주력이 도달할 때까지 이곳을 확보하려는 것이며, 국군의 반격에 대비하는 조치로서, 울진교를 비롯한 남대천 연안에 병력을 배치하고 있다는 진술이다.
연대장 김종원 중령은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읍면리 부근의 제 2대대로 하여금, 울진 서북쪽으로 수색대를 파견케 하고, 수산리 부근의 제1대대로 하여금, 울진 남정면의 울진교를 중심으로 하는 남대천 연안의 수비상황을 탐색케 하였다.
이 수색으로 포로진술이 사실임을 확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북한군 제5사단 주력이 전선에 출현하기까지에는 아직도 시간의 여유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이튿날 날이 밝기 전에 공격하기로 결심하고, 다음과 같은 연대 작명을 하달하였다.
연대 작명 |
①연대는 명 7월 1일 04:00부터 울진을 탈환하려 한다. ②제1대대는 울진교를 확보하는 즉시로 시가지에 돌입하여 그 중심부를 탈환 확보하라. 제23연대장 중령 김종원 |
이 연대 작전 명령과 같이 연대장은 울진 서쪽의 읍남리에 집결한 제2대대로 하여금, 측면공격을 가하게 하는 가운데, 제1대대로 하여금 울진의 남정면으로부터 주공을 지향케 하였으며, 제3대대를 연대예비로 배치하여 전황의 변화에 따라, 제1 및 2 양 대대를 지원토록 하였다.
특히, 제 2대대의 고성리(울진 시가지의 북선)진출은 북한군 제5사단 주력부대 진출에 대비함과 아울러, 울진 시가지의 적을 뒤에서 포위하는 이중의 목적을 지니는 것이었다.
그런데 연대장 김중원 중령은 이 연대 작전 명령을 하달함에 있어서 적어도 두 가지의 중대한 사실에 관하여, 신중한 고려를 하지 못한 점이 있다.
하나는 며칠 동안의 강우로 인하여 남대천 도강이 극히 어려워졌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북한군의 정규부대인 제 5사단 주력을 종전의 공비 정도로 생각하여 입산유격병력 정도로 파악하였다는 점이다.
결과 및 영향
제2대대의 한 초전상황에 비추어, 연대장 김종원 중령은 중요 지구의 방어개념을 시급히 수정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즉, 북한군 제5사단의 우세한 전력에 일방적으로 압도당하고 있는 상황하에서는 남대천 및 왕피천의 두 하류가 오히려 전선수습에 제약할 뿐만 아니라, 퇴로를 우회차단 당하여 병력손실을 가중케하는 역장애가 되는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러므로 울진 상실 뒤에 남대천을 방패삼아 일전을 행하려던 처음계획을 바꾸어, 제 1대대에 제 2대대의 철수를 엄호케 하되, 이날 12:00를 시한으로 전 병력을 왕피천 이남으로 수습하라는 작전 지시를 내림으로써, 왕피천 이남을 사실상 한 번의 전투도 없이 비어주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연대의 전선수습은 이날 중에 일단락 지어진 것은 아니었고 울진을 재 점령한 북한 제5사단의 10연대 기간이 승리의 여세를 몰아 포 지원하에 왕피천 남안으로의 진출를 꾀하였으므로 연대는 또 다시 제 3대대의 주진지마저 비워주는 바 되어, 제1 및 2 양 대대를 기성리(울진 남쪽 22㎞)에, 제3대대를 평해(기성리 남쪽 9㎞)에 각각 집결시켰으니, 그 일시는 7월 2일의 05:00였다.
이처럼 철수를 단행한 까닭은 첫째, 북한군 제5사단의 화력 및 SU-76 자주포로 인한 부대 사기의 저하를 감안한 것이며, 둘째로는 제 2대대가 입은 병력손실로 인하여 재편이 시급하였으며, 셋째로는 사단의 부원부대인 독립 제 1대대 및 영등포학원과의 합세가 이 곳에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연대장 김종원 중령은 왕피천 선을 철수함에 앞서, 사단에 지원 병력을 요청하였는데, 사단장 유승열 대령은 이에 대하여, 양 부대를 연대에 배속시킴과 동시에 평해로 급히 파견하여, 수용진지를 개편하라고 명령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연대는 제 2대대에 영등포학원을 편입시킴과 동시에 독립 제1대대로서 기성리 북쪽 3㎞의 무명고지에 내세워, 평해에서 제1 및 3대대의 병력을 재편하였다.
시흥, 안양, 수원 전투
한강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 |||
날짜 | 1950년 7월 3일 ~ 7월 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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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경기도 안양, 수원 | ||
결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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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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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안양-수원 전투는 한국 전쟁 발발 초기 1950년 6월 28일에 한강 이북의 서울이 북한군에게 함락되자 한강 이남으로 철수한 국군이 한강을 대치선으로 두고 강북의 북한군과 대치하여 공방의 혈전을 벌인 혈전으로 7월 3일에 이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7월 4일에 국군이 수원까지 내어놓게 된다.
이 전투 지역은 공세적인 입장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북한군 보병 4개 사단과 전차 1개 여단에 맞서 국군의 혼성 5개 사단(동해안의 제8사단과 중부전선의 제6사단을 제외한 전군)이 사활을 걸고 방어에 임하여 한국 전쟁의 대국적인 흐름에서 승패의 향배를 결정짓는 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전투 중 하나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6월 28일 아침 북한군의 서울 함락으로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에서 한강을 건넌 국군의 도하과정을 살펴보면, 대체로 의정부 정면에 투입된 병력이 광나루와 뚝섬 그리고 한남동과 서빙고의 각 도선장과 마포 및 하중리(서강) 나루터에서, 그리고 문산 정면에 투입된 병력이 행주와 이산포 나루터에서 각각 부선이나 작은 목선 등을 이용하여 강을 건넜는데, 광나루를 거친 병력은 곧장 수원으로 집결하고 뚝섬과 한남동 그리고 서빙고를 경유한 일부는 시흥과 수원으로 나뉘었으며 마포와 하중리 및 행주로 건넌 병력은 대부분 시흥으로 집결하였다.
이들 철수병력의 집결이 대강 끝난 것은 6월 28일 밤과 6월 29일 아침 사이었는데, 이 동안인 6월 28일 낮에세 수원농업시험장에 새로운 지휘소를 개설한 육군본부는 시흥에 김홍일 소장이 지휘하는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그곳에서 병력이 수습되는 대로 부대의 건제와 병과의 여하를 따지지 않고 혼성부대를 편성하여 우선 노량진 부근에 투입함으로써 한강방어선을 방어케 하였다.
그리하여 임선하 대령이 이끄는 혼성 제2사단과 유재흥 준장이 이끄는 혼성 제7사단 그리고 이종찬 대령이 이끄는 혼성 수도사단이 각각 연대규모에도 못 미치는 병력으로써 말죽거리-양화교에 이르는 한강 남쪽 강변을 나누어 맡아 미봉(彌縫)케 되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거듭된 철수로 말미암아 피곤이 극에 달한 상태였고, 수습된 인원도 각 연대의 실병력이 대대규모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나마 중장비는 대부분 강북에 유기한 까닭으로 공용화기도 연대 당 박격포 2~3문과 기관총 5~6정이 고작이었다.
더욱이 통신망이 확보되지 않아 횡적인 협조체제는 말할 나위도 없었거니와 종적인 지휘계통이 원활치 못하여 각급지휘관은 발을 구르며 전령의 발걸음만을 재촉하는 실정이었는데, 거기에다 모두가 혼성 편성된 부대인지라 지휘관이 그 부하를 알아보지 못하니 부하 또한 그 지휘관을 따르려 하지 않고, 저마다 본부를 찾아 흩어지기가 일쑤였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차츰 전열을 가다듬어간 국군은 이제 공포의 대상이 되는 북한군의 전차가 쉽사리 그들을 따라 건너지 못하리라는 안도감 속에서, 미군의 부원에 한 가닥 기대를 걸고, 한강이란 자연스런 방어막을 최대한 활용하여 한강 선에서 지구견수(持久堅守)를 다짐하게 된 것이다.
작전 계획
6월 28일 오전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이 수원농업시험장에 육군본부를 개설하고, 전날 19:00에 역시 그 곳에 미 극동군사령부의 전방지휘소(ADCOM)를 설치한 바 있는 동 지휘소장 존 H. 처치(John. H. Church) 준장과 회동하여 서울의 상실에 따른 대응방책을 협의한 결과 그 자리에서 미군의 참전 가능성에 대한 시사와 더불어 우선 시흥-수원 선에서 낙오자를 수습하여 시급히 한강 선에 투입함으로써 한강 선을 고수하여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이에 총참모장은 12:00에 김홍일 소장으로 하여금 시흥에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철수병력으로써 혼성부대를 편성케 하여 이를 지휘해 한강 선을 방어하도록 임무를 부여하는 한편 제5사단장 이응준 소장에게는 수원에 위치하여 이곳에서 낙오병을 수습한 다음 지역방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총참모장의 조치에 따라, 김강일 소장이 14:00에 시흥의 보병학교로 달려간바, 이때 시흥 서북쪽의 김포에서는 계인주 대령이 이끄는 김포지구전투사령부가 6월 26일에 김포 반도의 북단에 상륙한 북한군 제6사단 14연대와 김포 반도 전투와 오류동 전투를 벌이면서 김포비행장 부근으로 일전일퇴하는 중이어서 그야말로 비수가 앞뒤로 겨누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학교에 집결한 육본의 참모진과 지휘관들은 각기 방어책임에 대한 부서도 정하여지지 못한 가운데에서 저마다 병력수습에만 동분서주하는 형편이었다.
전투 과정
7월 3일
이날 아침 드디어 노량진-영등포전선이 북한군의 전차에 의하여 와해되었다고 육군본부에 보고되자, 이제 수원의 포기가 결정적인 사태로 굳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이미, 7월 1일에 부산에 도착한 바 있는 미지상군의 선견대인 찰스 스미스(Smith) 특수임무부대가 대전을 지나 올라오고 있는 중에 있었으므로, 총참모장 정일권 소장은 미군이 전투참가 준비를 갖출 수 있는 시간을 얻는 것이 마지막 방책이라고 판단하고 현 전선에서 최대한 지연키로 결심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이 경수가도를 따라 전차를 선두로 한 적의 위협이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고, 또한 적 2사단의 일부가 수원 동쪽 방향으로 진행 중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제 수원은 동쪽과 동북쪽 그리고 서북쪽의 세 방향으로부터 집중공격을 받게 되었다.
한편 시흥지구사령관 김홍일 소장은 아침에 노량진의 유재흥 준장이 이끄는 제7사단과 영등포의 이종찬 대령이 이끄는 수도사단에 다음과 같은 긴급명령을 하달하였다.
긴급명령 |
①수도사단은 시흥에서 시급히 철수병력을 수습하여, 시흥 남쪽 2km의 국도 동서의 고지대에 진지를 점령하고, 국도로 지향되는 적의 침공을 견제하라. ②제7사단은 안양으로 집결하라. 혼성수도사단장 대령 이종찬 |
김강일 소장은 이에 따라 영등포-시흥도로가 북한군에 개방될 것을 감고하고, 오류동의 김포지구전투사령부에도 당면한 적으로부터 이탈하여 안양으로 철수토록 조치한 다음 11:00에 사령부를 철수하여 14:00에 안양으로 이전하였다.
수도사단은 이러한 간난 속에서도 15:00를 전후하여 시흥 남쪽에 제 1저지선을 확보하게 되었는데, 이때 제7사단은 그 일부가 시흥으로 철수치 못하고 관악산-과천으로 철수하여 곧장 수원으로 집결케 되는 가운데 안양과 군포장에서 수습된 일부로써 수도사단이 시흥 부근에서 진지를 마련하는 동안 안양천 남쪽 고지대에 제2선 진지를 급편케 되었다.
한편, 전날 군포장으로 지휘소를 옮긴 바 있는 이한림 대령이 이끄는 제2사단장은 이제 시흥전투사의 철수엄호를 맡게 되었다.
이에 사단은 지휘소를 재차 군포장 남쪽 2km로 옮기고, 전날 제 5연대장 최창언 중령의 부상에 따라 전 연대장 대리 박기성 중령으로 하여금 동 연대를 다시 지휘케 하는 가운데 안양 남쪽의 426고지(안양 남쪽 2km, 국도 서쪽)를 중심으로 진지를 점령케 하여 동 국도를 방어하도록 하였다.
한편, 총참모장의 명령에 따라 시흥전투사의 철수로를 보장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제 1사단장(사단장 대령 백선업)은 오후에 수원에서 육사생도대를 배속 받아 풍덕천으로 이동하였다.
그리하여 사단은 풍덕천 서남쪽의 188고지(풍덕천 남쪽 2km)-237고지(188고지 서북쪽 2.5km)사이에 진지를 점령케 되었는데 이는 수원에서 5km 남짓한 거리였으니 수원에서 18km가 넘는 시흥-안양 사이에서 촌각을 다투는 지연전을 벌일 시흥전투사령부의 주력에 대한 철수로의 확보가 이제 이 사단의 양견에 매달리게 된 것이었다.
7월 4일
06:00에, 전날 영등포를 석권한 이권무 소장이 이끄는 북한군 제4사단이 제105전차여단 소속의 T-34 전차 12대를 앞세우고, 경수가도를 따라 남쪽으로 침공을 시작하였다.
이윽고 북한군의 선두 전차가 YAK기 3대의 엄호 하에 시흥을 지나 삼막리(284고지 남쪽 1.6km)부근의 이현진 대리 중령이 이끄는 제8연대 진전에 모습을 들어내었는데 이때 북한군의 보병부대는 도로 서쪽의 안양천을 따라 진출하여 중박격포와 전차포의 화력지원 아래 임충식 중령이 이끄는 제18연대의 진지를 공격하였다.
이에 연대가 사력을 다하여 북한군을 거지하였으나, 제8연대의 대전차공격을 무릅쓰고 전차가 양 연대의 지극인 도로를 돌관 함으로써 10:00를 전후하여 양 연대는 각개 분산되어, 수원을 지향하여 발길을 돌리게 되고 말았으며 그 충격으로 안양의 전투사령부와 재편성중인 일부 병력도 철수길에 오르게 되었다.
또한 북한군이 안양에서 군포 쪽으로 진출한 것은 14:00였는데 여기서 426고지의 제5연대와 그 도로변의 김병화 소령이 지휘하는 보병학교의 일부 병력(수원에서 재편되어 투입 된)이 북한군의 전차를 향하여 모든 화력으로써 집중사격을 가하였으나, 전차는 유유히 본도를 돌파함으로써 군포장의 제3선도 와해되고 말았다.
이에 김홍일 소장이 직접 공병을 지휘하여 지지대고개(군포장 동남쪽 5km)마루에 나무를 잘라 기갑연대 장갑대대의 반궤도차와 함께 가로 질러놓아 대전차 장애물을 설치하는 등 백방의 노력을 다하여 전차의 남하를 저지코자 하였으나 끝내 그 진로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한편, 이와 같이 군포장 전선이 무너짐에 따라 퇴로차단의 위협에 직면하게 된 348고지 서북록의 최수창 중령이 이끄는 제3연대는 하는 수 없이 동 진지에서 물러나, 동남쪽으로 348고지를 넘어 판교쪽으로 철수케 되었는데, 선두에서 연대를 지휘하면서 퇴로를 개척하던 연대장 최수창 중령이 사기막골(판교 서쪽 4,5km) 부근에 이르러, 앞을 가로막은 적의 저격을 받아 전사하게 되고, 병력 또한 분산케 되었다.
한편, 이와 같이 적의 전차가 군포장의 제2사단 저지진지를 돌파하고 각일각으로 수원을 향하여 저돌케 되자 총참모장 정일권 소장은 육군본부를 평택으로 철수키로 결정하였다.
이에 곧 평택집결을 하령한 다음, 제대를 편성하여 일부를 후위로 남겨 적의 침략을 조지케 하는 가운데 본대를 차량으로 오산-평택간의 국도를 따라 철수케 하였다.
그리하여 후위부대는 수원의 북문(장안문)을 중심으로 진지를 점령케 되었는데, 이때 공병감인 최창식 대령이 전차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공병으로 하여금 북문을 파괴하여 도로를 조절토록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박후준 중위 등이 북문의 파괴를 위한 폭파작업에 착수케 되었는데, 마침 안양에서 철수하여 동문을 지나던 수도사단장 이종찬 대령이 그 광경을 목도하자 아연실색하여 『현시점에서 이 북문을 파괴한다고 하여 전술적으로 아군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귀중한 민족의 사적만을 인멸케 하는 결과가 될 것이니, 후일 민족의 지탄을 어찌 받을 것이냐?』라고 말함으로써 공병감으로 하여금 그 폭파명령을 거두도록 종용하였다. 이에 수긍한 공병감은 동 명령을 취소하고, 그 대신 이 무렵에 일본에서 공수로 보급된 바 있는 대전차지뢰 20발을 동문의 주위에 매설토록 하는 한편 병력을 성벽 서상에 배치하였다.
이리하여 북문을 저지진지로서 남겨놓고, 김홍일 소장 등 시흥 사령부의 장병은 육군본부의 철수에 이어 오후 늦게 수원시내를 빠져나가 북향길을 재촉케 되었는데, 이윽고 북한군의 전차가 동문 가까이에 나타나 전차포를 휘두르게 되니, 성서에 남아있던 병력이 큰 저항을 하지 못한 채 그 저지선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결과 및 영향
국군은 7월 4일에 수원마저 포기하게 됨으로써 마지막 보루가 무너지게 되어 결국 지연전으로써 낙동강을 목표로 물러서게 되었다.
그러므로 국군의 입장에서 보면, 이 전투는 북한군보다도 차라리 시간과 싸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니, 이는 당시 군이 적을 격멸하고 실지를 회복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다만 시간을 얻기 위하여 싸웠다고 보는 까닭에서이다. 따라서 이 한강 선에서의 일주일이야말로 기사회생의 계기를 잡게 한 실마리가 된다고 할 것이다.
또한 북한군으로서는 이 한강선의 돌파에 의외의 시일이 지연됨으로 말미암아 당초 그들의 기도한 「수원북방에서 아군 병력을 타격」코자 한 뜻대로 되지 않았으며, 또 그렇다고 「미군이 참전하기 전에 방어선을 조기돌파」한다는 것도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서 이 같은 작전계획의 차질은 나중에 그들 스스로가 적화통일을 달성치 못한 가장 큰 원인의 하나로 분석하였을 정도인 것이다.
신사동-과천 전투
신사동-과천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 |||
날짜 | 1950년 6월 28일 ~ 7월 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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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서울 신사동, 경기도 과천
(당시 경기 광주군 언주면, 시흥군 과천면 일대) | ||
결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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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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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동-과천 전투(新寺洞-果川 戰鬪)는 한국 전쟁 발발 초기 1950년 6월 28일에 한강 이북의 서울이 북한군에게 함락되자 한강 이남으로 철수한 국군이 한강을 대치선으로 두고 강북의 북한군과 대치하여 공방의 혈전을 벌인 혈전으로 7월 3일에 이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7월 4일에 국군이 수원까지 내어놓게 된다.
이 전투 지역은 공세적인 입장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북한군 보병 4개 사단과 전차 1개 여단에 맞서 국군의 혼성 5개 사단(동해안의 제8사단과 중부전선의 제6사단을 제외한 전군)이 사활을 걸고 방어에 임하여 한국 전쟁의 대국적인 흐름에서 승패의 향배를 결정짓는 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전투 중 하나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6월 28일 아침 북한군의 서울 함락으로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에서 한강을 건넌 국군의 도하과정을 살펴보면, 대체로 의정부 정면에 투입된 병력이 광나루와 뚝섬 그리고 한남동과 서빙고의 각 도선장과 마포 및 하중리(서강) 나루터에서, 그리고 문산 정면에 투입된 병력이 행주와 이산포 나루터에서 각각 부선이나 작은 목선 등을 이용하여 강을 건넜는데, 광나루를 거친 병력은 곧장 수원으로 집결하고 뚝섬과 한남동 그리고 서빙고를 경유한 일부는 시흥과 수원으로 나뉘었으며 마포와 하중리 및 행주로 건넌 병력은 대부분 시흥으로 집결하였다.
이들 철수병력의 집결이 대강 끝난 것은 6월 28일 밤과 6월 29일 아침 사이었는데, 이 동안인 6월 28일 낮에세 수원농업시험장에 새로운 지휘소를 개설한 육군본부는 시흥에 김홍일 소장이 지휘하는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그곳에서 병력이 수습되는 대로 부대의 건제와 병과의 여하를 따지지 않고 혼성부대를 편성하여 우선 노량진 부근에 투입함으로써 한강방어선을 방어케 하였다.
그리하여 임선하 대령이 이끄는 혼성 제2사단과 유재흥 준장이 이끄는 혼성 제7사단 그리고 이종찬 대령이 이끄는 혼성 수도사단이 각각 연대규모에도 못 미치는 병력으로써 말죽거리-양화교에 이르는 한강 남쪽 강변을 나누어 맡아 미봉(彌縫)케 되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거듭된 철수로 말미암아 피곤이 극에 달한 상태였고, 수습된 인원도 각 연대의 실병력이 대대규모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나마 중장비는 대부분 강북에 유기한 까닭으로 공용화기도 연대 당 박격포 2~3문과 기관총 5~6정이 고작이었다.
더욱이 통신망이 확보되지 않아 횡적인 협조체제는 말할 나위도 없었거니와 종적인 지휘계통이 원활치 못하여 각급지휘관은 발을 구르며 전령의 발걸음만을 재촉하는 실정이었는데, 거기에다 모두가 혼성 편성된 부대인지라 지휘관이 그 부하를 알아보지 못하니 부하 또한 그 지휘관을 따르려 하지 않고, 저마다 본부를 찾아 흩어지기가 일쑤였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차츰 전열을 가다듬어간 국군은 이제 공포의 대상이 되는 북한군의 전차가 쉽사리 그들을 따라 건너지 못하리라는 안도감 속에서, 미군의 부원에 한 가닥 기대를 걸고, 한강이란 자연스런 방어막을 최대한 활용하여 한강 선에서 지구견수(持久堅守)를 다짐하게 된 것이다.
전투 과정
6월 28일
전날 6월 27일 기갑연대장 유흥수 대령의 철수조치에 따라, 동 연대의 장철부 소령이 이끄는 제2기병수색대대가 동일 14:00를 전후하여 한남동에서 한강을 건넜음은 전절에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대대가 전용 나룻배로 도하하는 도중에 북한군 YAK기의 공습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미 공군의 F-80 전투기가 뒤이어 나타나 북한군과 공중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 결과 YAK기가 말죽거리 부근의 논바닥에 격추되었으며, 이를 동 대대의 제5중대 3소대장인 김형식 소위 등이 북한군 기의 추락지점으로 몰아갔는데 조종사는 즉사하고, 통신사만이 중상을 입고 기적적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는데 그를 신문하니 그 자는 한강의 교량을 차단하는 임무를 띠고 함경남도의 연포비행장에서 출격한 것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그를 응급치료차 현지 경찰에 인계하고 기관총과 권총 각 1정 및 낙하산 1착을 노획하여 대방동으로 집결한 다음, 밤을 새는 중에 한강대교의 폭파소리를 듣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날 오후에 시흥사령관 김홍일 소장으로부터 『말죽거리 부근에 수용진지를 점령하여 철수병력을 수습하라.』라는 명령을 받아, 시흥-안양-과천을 거쳐 말죽거리 부근으로 전진하여 한남동 나루터를 마주보는 신사리 일대에 진지를 급편 함으로써 병력을 수용케 되었다.
이와 같이 김홍일 소장이 동 대대를 이곳으로 뽑아 돌린 것은 동 대대가 과천-말죽거리 일대에 승마훈련장을 두고 있던 터이므로 어느 부대보다도 동 지역에 대한 지형에 익숙할 것으로 판단한 까닭으로 보여진다.
한편, 시흥사령관으로부터 혼성 제2사단으로 임명된 보병학교 부교장 임선하 대령은 오후에 사단지휘소를 과천에 개설하고, 즉시 담당정면에서 병력을 수습하여 사단의 재편성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당초 사단의 건제부대인 제5, 16, 25연대의 3개 연대 중에서 최창언 대령이 이끄는 제5연대는 오후에 광나루에서 강을 건너고, 문용채 대령이 이끄는 제16연대는 새벽 한강대교가 폭파되기 직전에 동교를 지났으며, 또 김병휘 중령이 이끄는 제25연대는 이날 현재로 연대장의 생사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 병력이 분산되어 강을 건넜는데, 이들은 모두 수원으로 집결 중에 있었다.
따라서 사단은 우선 강안에서 수습된 혼성병력으로써 이 전선의 미봉(彌縫)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때, 대교가 폭파되기 전인 새벽에 동 교량을 건넌 바 있는 제3연대장 이상근 중령이 동 연대의 병사가 서빙고에 있었으므로 철수장병들이 필시 그곳의 도하장을 이용할 가능성이 많다고 내다 본 결과 과천에서 연대를 수습케 되었는데, 예상한대로 연대의 일부가 부연대장 최수창 중령과 제3대대장 김붕상 소령 등과 함께 서빙고에서 강을 건너 그곳에 집결하였으며 다른 일부는 또 수원으로 집결중임이 밝혀졌다.
이에 사단장은 동 연대가 본시 수도경비사령부의 소속이다 이를 사단의 기간으로 삼기로 하고, 동 연대로 하여금 과천 북쪽의 우면산(290고지, 과천 동북쪽 4km)-관악산사이의 요충지인 남태령을 지키도록 하였다.
따라서 동 연대장은 그곳에 집결된 일부로써 남태령 일대에 배치하여 동작동-과천간의 도로를 방어하도록 하는 한편, 저녁에 수원에 집결한 임백진 소령이 이끄는 제1대대를 과천으로 불러 올렸는데, 동 대대는 6월 26일 밤에 금오리(의정부 동북쪽 2km)부근에서 연대가 철수할 때에 연대주력과 이탈하여, 멀리 동쪽으로 빠져 양수리에서 한강을 건너는 우여곡절 끝에 이틀만인 이날 17:00에 수원에 집결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동 연대는 과천 부근에서 1개 대대규모가 수습되어 기병대대가 제1선의 신사리에서 매곡리(동작동 동쪽 2km)에 이르는 강 남안을 누비면서 적의 도하접종을 막는 동안 남태령 일대에서 밤을 새워 총검을 새로이 갈았다.
6월 29일
이날 대체로 방어편성을 끝냄으로써 한강 북안의 북한군과 대치태세를 이루게 되었다. 전날 밤 별다른 도발이 없는 가운데 날이 밝자, 제2사단장 임선하 대령은 곧 북한군의 도하공격이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병력증강을 모색한 결과 14:00에 시흥사령부에서 급편한 유해준 중령이 이끄는 보병학교 연대의 증원을 받게 되었다.
이 연대는 6월 25일에 문산으로 출동한 교도연대와 6월 26일에 김포로 급파된 후보생대대 중 전날과 이날 아침에 동교에 철수, 집결한 일부를 재수습하여 동교 교관인 임원석, 백운용, 권정식, 황석규 대위 등을 중대장으로, 하갑청 중령을 대대장으로 하는 1개 대대로 재편한 것으로서 연대라고 호칭되었으나 실병력은 대대규모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한편 이 무렵, 전날 수원에 집결한 제16연대는 유의준 중령과 윤태호 소령을 대대장으로 하는 2개 대대로 재편하였는데, 이날 사단장의 요청에 따라 육군본부는 이 연대를 사단의 지휘 하에 들도록 조치하였다. 그리하여 동 연대는 수원의 집결지에서 과천으로 달리게 되어, 이 역시 14:00 전후에 사단지휘소에 당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사단의 골격이 대강 갖추어지자, 사단장은 전반적인 진지재편을 단행하여 남태령 부근의 제 3연대를 말죽거리 정면으로 돌려 우일선으로 삼고, 제16연대를 우면산-남태령으로 추진하여 좌일선으로 삼았으며 보교연대를 과천에 예비로 배치하였다.
그리하여 제 3연대는 부연대장 최수창 중령이 연대를 지휘하는 가운데 말죽거리 정면으로 이동하여 역삼리(말죽거리 북쪽 2.5km) 부근이 87고지 일대의 고지대에 진지를 점령함으로써 그 북쪽의 신사리 부근에 위치한 기병대대와 함께 한남동 나루터로부터 말죽거리-판교를 거쳐 도산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막게 되었다.
그리고 제16연대는 우면산-남태령에 주진지를 펴고, 그 북쪽 매곡리부근의 86고지-101고지 일대에 경계진지를 마련하여 동작동에서 과천과 군포를 거쳐 경부국도와 연결되는 도로를 사수하게 되었다.
이렇듯 사단이 방어진용을 새로이 가다듬는 동안, 신사리 부근에 수색거점을 두고 있던 장철부 소령이 이끄는 기병대대는 6월 26일에 김포로 출동한 김촌성 중위가 이끄는 임시 제7중대의 2개 소대가 전날 밤에 안양을 거쳐 과천에 집결함으로써 이날 오후에 본대와 합세케 되어 다소의 전력증강을 보게 되었다.
이에 대대는 종일토록 강안을 부단히 기마로 적정을 수집하였는데 해가 질 무렵에 박익균 중위가 이끄는 제3중대의 제 3소대가 청담리(신사리 동쪽 2km)부근에서, 뚝섬쪽으로부터 거룻배로 도하한 1개 소대규모를 포착한 바 북한군과 접안하여 하선하는 틈을 노려 소대장 조돈철 소위를 선두로 기마돌격을 감행함으로써 모조리 강물 속에 쓸어 넣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한강 남안에 대한 북한군의 도하기도가 점차 노골화되는 가운데, 강 건너 한남동에 있는 대대의 병사가 적수에 들어가 그들의 조도기지로 이용되고 있음이 밝혀졌는데, 이에 분노를 참지 못한 대대 장병들은 야음을 타서 60mm 박격포 6문을 사거리가 미칠 수 있는 강변사장으로 추진하여 22:00에 북한군이 점거한 대대본부 진지를 목표로 포탄 60여 발을 집중한 바, 한동안 화광이 하늘을 대낮같이 밝히더니 이윽고 흑연이 어둠을 더욱 짙게 뒤덮는 것이었다.
6월 30일
아침부터 말죽거리 정면으로 북한군이 도하공격이 본격화되었고 08:00부터 한남동-이촌동 부근의 이영호 소장이 이끄는 북한군 제3사단이 그 예하의 김병종 중좌가 이끄는 제8연대를 내세워 도하공격을 시작하였다.
이 북한군은 일부로써 동작동-흑석동의 능선으로 도하하여 그 정면의 아 윤춘근 중령이 이끄는 제9연대의 주의력을 견제케 하는 한편, 다른 일부로써 서빙고에서 그 대안으로 건너 매곡리 부근의 제16연대 경계진지에 압력을 가하면서 주력으로써 한남동에서 신사리를 직충한 다음 말죽거리 도로의 돌파를 시도하는 듯하였다.
그들은 남산 기슭에 방열된 포병으로써 신사리 부근의 기병대대의 진지를 강타하여 화력집중의 위력을 보임으로써 동 대대를 억류하는 가운데 10:00에 20~30명 단위로 분승한 나룻배로써 도하한 다음 공격력을 그 정면의 동 대대진지로 지향하였다.
이때에 그들은 또 본 도하에 앞서, 이날 이른 새벽에 이미 선견대로써 강을 미리 건너게 한 듯, 반포리(신사리 서남쪽 1.5km) 부근의 야산에 엄호거점을 확보한 그들 일부가 이 공격에 호응하여 동 대대의 서측배를 위협하였다.
이리하여 동 대대가 제1선에서 적과 먼저 격돌케 되었는데, 당시의 제6중대장인 박익균 중위는 뒷날, 이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 | 전투가 벌어지자, 적이 언제 숨어들었는지 기관총으로 우리의 좌측방을 위협하는 가운데, 배들이 강을 건너 남안으로 올라붙었는데, 적의 치열한 포들에 말이 먼저 놀라 (이때까지 병사의 승마 훈련만 끝났을 뿐, 말 자체는 전투소음에 대한 음향훈련이 되어있지 않아, 포성과 포탄의 파편에 동요되었던 것으로)고삐를 풀고 달아나고 말았다. 말을 붙잡으랴, 적을 막아내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도무지 싸움이 되지 않았다. 전투가 그 모양으로 얼켜들자 김포지구에 출동하였다가 돌아 온 최영화 소위는 분기가 치솟아 홀로 적중으로 돌격을 감행하여 장렬히 전사하는 길을 택하기도 하였다. 그때에 달아난 말들이 귀소본능에 따라 한강을 헤엄쳐서 한남동으로 가는 데에는 정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말이 적진으로 향하였으나 차마 총으로 쏘아 죽이지는 못하였다. 나중에 들으니 내 말이 당시 한남동의 연대본부 근처에 있던 내 집으로 찾아가, 미처 피난하지 못한 집사람들을 매우 놀라게 하였다는 것이다. | ” |
이렇게 하여 혈전 끝에 기병대대가 적의 예기에 밀려나게 되었는데, 이 일전에서 마필의 손실이 적지 않았으므로 정오에 군포장으로 집결하여 인마를 재수습하게 되었다.
한편 역삼리 부근의 최수창 중령이 이끄는 제3연대는 이렇듯 기병대대의 진지가 유린되자 공격을 감행하여 적의 기세를 꺾어 놓기로 하였다. 이에 임백진 소령이 이끄는 제 1대대를 선두로 진지에서 약출하여 신사리 쪽으로 검광을 휘둘러 나아간 결과, 그곳에 먼저 닿아 본대의 추급을 재촉하던 1개 중대규모의 적 선견대를 단숨에 격멸하고, 뒤따르던 그들 병력 일부를 강변의 사장으로 구축하는 한편 부선으로 강을 건너 추진 중이던 76mm포 5문과 장갑차 등 지원부대의 장비들을 파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도 화력의 열세를 만회하지 못한 까닭으로, 이와 같은 역전분투의 보람도 없이 적에게 다시 밀리는바 되었다. 이에 사단장 임선하 대령은 16:00에 수원으로부터 증원된 최창언 중령이 이끄는 제5연대로 하여금 말죽거리 동쪽의 95고지 부근에, 그 서쪽의 우면산진지와 연하는 새로운 진지를 만들고 제3연대를 과천으로 뽑아 돌렸다.
그런데 이 제 5연대는 6월 28일 낮에 광나루에서 강을 건너 종일토록 천호리 부근에서 후속하는 철수병력을 수용하다가 전날 6월 29일 낮에 수원에 집결한 부대로서 육본의 조치에 따라 영등포전선에 증원될 예정이었으나 수원에서 대기상태로 밤을 지났던 것이다.
이리하여 사단은 이제 제5, 16 양 연대로써 95고지-우면산-남태령선에서 진용을 다시 가다듬게 되었는데, 이 무렵 매곡리 부근의 제 16연대 경계 병력도 한걸음 물러나 우면산의 본진에 수용케 되었다.
7월 1일
이날 육군본부에서는 그간 군을 지휘하는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이 그 직에서 물러나고, 도미 중에 귀국하여 전날 수원에 도착한 전 참모부장 정일권 소장이 새로이 총참모장에 취임하여, 이 한강선의 방어작전을 지도하게 되었으나 전황은 좀처럼 호전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전날 제3연대가 종일 혈전 끝에 제5연대와 교대하고, 과천쪽으로 물러나게 되었으며 제16연대 역시 우면산을 중심으로 새로운 방어선 급편에 들어간 바, 이날 새벽에 사단 공병대대의 S-3인 양수철 중위가 이끄는 제16연대 수색중대 75명이 말죽거리로 추진되어 제5, 16 양 연대의 제한점인 말죽거리 도로를 경계하게 되었다.
그런데 동 수색대가 효암 속에서, 북한군의 보급추진임무를 맡은 듯한 차량 5대가 말죽거리-시흥리 도로를 따라 남하하는 것을 포착하여, 이를 급습한 결과 군관 4명을 포로로 잡는 한편 동 차량들을 노획 하였는데, 그 차량은 한남동에서 나룻배로 건넌 것으로써, 아군이 강의 북쪽에 유기한 것이었으며, 거기에 실려 있는 것도 국군의 건빵 등 비상식량이었다.
이들 차량은 이미 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한, 그들 선견대의 보급추진을 위하여 뒤따르던 중이라고 하였는데, 이로 미루어 보면 전날 밤중으로 북한군의 일부가 이미 제5연대의 방어배치를 뚫고 잠입하여 말죽거리를 지나 판교 쪽으로 빠진 것으로 추단되었다.
따라서 이들의 일부가 방어선을 뚫고 후방으로 들어간 상태에서, 강안진지를 계속 지키게 된 사단으로서는 후고의 염려가 없지도 않았으나, 북한군 주력의 도하를 막기 위하여 낮 동안은 95고지-우면산 진지를 계속 지탱하였다.
한편, 이날 새로이 군의 지휘를 맡아 당면한 한강선 방어에 대한 방안을 짜게 된 총참모장 정일권 소장은 수원 동북쪽 접근로에의 북한군의 침습 상황을 예의 검토한 결과, 이 위협의 제거는 말죽거리 정면의 북한군 도하 저지 여부에 달려있다고 판단하고, 사관학교 부교장인 이한림 대령을 제2사단장으로 기용하는 한편, 동 사단장 임선하 대령은 한미양군 사이의 유기적인 연락도모를 위하여 한미연락장교전장에 전보 조치하였다.
이에 이한림 대령은 오후에 부관인 전승철 소위만을 대동하고 지프차로 금곡리에서 과천으로 떠났는데, 도중에 미 공군기의 기총사격을 받아 부관 전승철 소위가 전사하는 역경을 만나기도 하였다.
그는 18:00에 사단지휘소에 도착해 임선하 대령으로부터 지휘권을 인수하는 즉시로, 필시 적이 야간도하를 시도할 것으로 내다보고, 일선진지를 순회하면서 전선고수를 독려하였다.
7월 2일
이날 노량진-영등포 부근의 한강선을 견수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말죽거리 정면에서는 전황이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전날 저녁에 신임 이한림 사단장이 예측한 바와 같이 밤이 깊어지자 야음을 틈탄 적의 일부가 다시 신사리 부근에서 도하하여 말죽거리 부근의 제5연대진지를 돌파코자 하였다.
이리하여 95고지를 중심으로 진지를 마련한 동 연대가 이들 북한군과 격돌케 되었는데, 그 공세가 자못 거세어 동 연대진지를 에워싸고 달려든 까닭으로 연대장 최창언 중령 이하 제2대대장 차갑준 소령 등이 수류탄의 폭염으로 야공을 밝히면서 북한군과 근접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날 새벽에 들어서자 북한군의 발악이 도를 더하게 되어, 연대장이 다리에 부상을 입고 쓰러지게 됨으로써, 끝내 진지를 지탱치 못하여 그곳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이에 연대는 과천으로 한걸음 물러서서 병력을 수습케 되었으며 연대장은 수원-대전으로 후송되었는데, 따라서 말죽거리-시흥리 간의 도로는 적에 개방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사단장 이한림 대령은 전날 밤 말죽거리 정면에서 제 5연대가 적의 공격을 받게 되자, 그간 예비로 있던 유해준 중령이 이끄는 보교연대를 옥안봉(373고지 말죽거리 남쪽 5km) 북록의 194고지(말죽거리 남쪽 3.5km)로 추진하여, 북한군의 침로로 예상되는 말죽거리-시흥리 도로를 사수토록 조치하였다.
이에 동 연대가 말죽거리 상공에 치솟는 교전의 불꽃을 바라보면서 과천-말죽거리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달려가, 이날 새벽에 목표인 193고지의 동쪽에 이르러, 마침 시흥리 쪽으로 동남향 중인 일단의 차량종대를 포착하게 되었다.
그 종대는 앞뒤로 장갑차의 엄호를 받는 트럭 30여대로 편성된 보급품 수송대였는데, 이로써 보아 전날 밤에 제5연대의 진지를 돌파한 북한군 보병의 일부가 시흥리 쪽으로 지나쳤음을 알 수 있었다.
연대는 60mm 박격포로써 선두와 후미의 장갑차를 겨냥하여 단발에 격파함으로써 종대의 전후를 화력 차단한 다음, 일제히 내달아 공격하니, 북한군은 차량을 모두 내버린 채 길 건너의 평촌 마을로 잠입하는 것이었다.
이에 마을을 포위하고 수색전을 벌인 결과 20여명을 사살함으로써 일망타진하는 전과를 올리게 되었고 연대는 곧 차량을 모두 파괴하고, 193고지로 반전하여 진지를 급편 하였다. 낮 동안 피아를 분별치 못하는 미 공군기의 위협을 받아, 그곳에서 종일 적을 기다리기만 하였으나, 해가 뜬 뒤로는 더 이상 적의 움직임을 볼 수 없었다.
이와 같이 하여, 북한군의 일부가 금곡리 쪽으로 증원되었음이 분명하여지자, 사단장은 보교연대로 하여금 193고지 부근에서 시흥리로 향하는 도로의 길목을 계속 지키게 하는 가운데, 제16연대로써 우면산진지를 고수토록 하여 우선 과천 정면으로의 적침을 막아내게 하면서, 6월 29일에 말죽거리 부근에서 철수한 제3연대를 과천 동남쪽의 348고지 서북쪽에 배치하였다.
이는 말죽거리-금곡리 축선상의 북한군에 대하여서는 그 당면의 이준식 준장이 이끄는 제3사단에 일임하는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사단은 과천-군포 도로를 확보하여 상금 한강선에서 역전중인 시흥사령부의 주력에 대한 측방엄호에 전력키로 방침을 바꾼 것으로 풀이된다.
그리하여 사단은 오후에 과천의 지휘소를 군포로 옮기고, 그곳에서 제5연대의 부대수습에 임하였다.
결과 및 영향
7월 4일에 수원마저 포기하게 됨으로써 마지막 보루가 무너지게 되면서 결국 국군은 낙동강을 목표로 물러서게 되었다.
그러므로 국군의 입장에서 보면, 이 전투는 적보다도 차라리 시간과 싸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니, 이는 당시 군이 북한군을 격멸하고 실지를 회복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다만 증원군의 도착을 기다리는 시간을 얻기 위하여 싸웠다고 보는 까닭에서이다. 따라서 이 한강 선에서의 일주일이야말로 기사회생의 계기를 잡게 한 실마리가 된다고 할 것이다.
또한 북한군으로서는 이 한강선의 돌파에 의외의 시일이 지연됨으로 말미암아 당초 그들이 기도한 '수원북방에서 아군 병력을 타격'하고자 했던 의도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또 그렇다고 미군이 참전하기 전에 방어선을 조기돌파」한다는 것도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이 같은 작전계획의 차질은 나중에 그들 스스로가 적화통일을 달성치 못한 가장 큰 원인의 하나로 분석하였을 정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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