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의 봄 19 : 현충일의 의미 6 (6.25 전쟁, 한국전쟁 5)
북악 둘레길에서 바라본 성북동 전경
개전초~낙동강 전투 이전 주요 전투 2
개천 초부터 낙동강 방어 전투까지 치루어진 주요 전투를 전투목록에 의해 살펴보기로 한다. 전쟁사가 모두 그러하듯이 기록하는 자에 따라 부분적으로 승리는 과장되고 실패는 삭제된 부분이 많다. 그래서 초전에 국군이 일방적으로 조기에 무너진 이유와 원인을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본 기록은 주로 위키 백과사전에서 인용하였고 기타 자료도 참고로 하였다. 따라서 미군 및 연합군, 그리고 북한군의 전투 일지와 비교하여 정확하게 기술된 내용이 아니므로 부분적으로 허위.과장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으므로 그런 점으로 고려하여 살펴보시기 바란다.
의정부 전투
의정부 전투는 1950년 6월 25일 ~ 6월 26일, 한국 전쟁 발발 당시에 서울 북쪽 17km의 의정부 정면에서 유재흥 준장이 지휘하는 제7사단과 이형근 준장이 지휘하는 제2사단이 김웅이 이끄는 북한군 제1군단 예하의 2개 사단과 1개 기갑여단으로 구성된 공격집단의 침공을 막아 이를 격멸하고자 한 방어전이다.
벽두에 제7사단이 포천과 동두천 부근에서 서전을 치른데 이어, 대전에서 증원한 제2사단이 의정부 부근에서 투입하게 되어 이 지역은 수도 서울의 관문과도 같아 피아간에 주력이 투입되었다.
그런데 북한군은 처음부터 여기에 공격의 중점을 두고 병력과 화력을 집중투입한데 반하여 국군 측에서는 적정과 공격기도에 대해서 아무런 정보도 없이 무작정 이들과 맞섬으로써 전투 초기의 상황이 급박하게 변해갔다.
특히 이 지역은, 경원 본도인 3번 도로를 비롯하여 동측의 43번과 서측의 316번이 모두 양호한 노면에 열을 지은 듯 남북으로 뻗힌 데다, 광천 산맥과 천보 산맥이 종벽을 이루어,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횡적연계와 종심배치에 불리한데 비하여 공격하는 입장은 기계화 부대의 운영과 공격 돌입이 용이하였다.
전투 과정
육군총참모장 채병덕은 제7사단사령부를 2회 시찰한 후 재경부대를 의정부지역에 우선적으로 투입하는 동시에 후방 3개 사단을 서울로 신속히 이동시키도록 조치하였다.
이에 따라 6월 25일 ~ 6월 26일 사이에 의정부 지구에 투입된 증원부대는 1개 경찰대대를 포함해 총 15개 대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부대들은 건제를 고려하지 않고 축차적으로 투입되었다.
더욱이 탄약을 위시한 각종 보급지원이 뒤따르지 못했으며, 유·무선통신망이 제대로 구성되지 않아 횡적 연락과 협조는 고사하고 상하급 제대간에도 통신이 소통되지 않아 효율적인 전투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6월 26일 01:00에 제 7사단사령부를 시찰한 육군총참모장 채병덕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의정부를 고수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반격명령을 하달하였다. 이때 이형근이 이끄는 제 2사단장은 반격작전을 전개할 시기가 아니라는 것과 다음날 제 2사단 주력이 도착한 후에 전투력을 집중 운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방어에 유리한 한강선에서 방어 작전을 실시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그에 대한 총참모장의 반응은 매우 강경하였다. 그는 무조건 반격으로 전환하라고 엄명하고 북한군 전차는 육탄공격으로 파괴하라고 강조하였고 이에 따라 6월 26일 아침부터 제7사단은 동두천을 목표로 반격을 감행하게 되었으며, 제2사단은 축석령을 경유하여 포천을 목표로 무모한 반격작전을 전개하였다.
제7사단은 포천에 투입된 제9연대와 제3연대가 분산되었으므로 가용병력은 제1연대 예하 2개 대대와 제3연대 2대대 및 전날 6월 25일 사단에 배속된 제18연대 예하 2개 대대를 합쳐 모두 5개 대대였지만, 실제 병력은 증강된 1개 연대규모에 지나지 않았다. 제7사단은 제1연대로 하여금 동두천을 공격하게 하는 한편, 배속된 제18연대는 신산리를 공격토록 하였다.
이 무렵 제7사단과 대치한 북한군 제4사단은 동두천에서 공격을 위한 재편성을 완료하고 공격개시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즉 북한군 또한 국군의 반격과 거의 같은 시간에 의정부를 탈취하기 위한 공격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북한군은 국군이 3번 도로를 강력히 방어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동두천~덕정~의정부로 이어진 3번 도로를 피하여 그 서쪽의 봉암리~덕정 간 도로에 주공을 투입하여 기습효과를 노리고 있었다.
한편 제 7사단은 수색정찰이나 관측을 통한 적정수집활동을 거의 하지 않아 적정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6월 26일 08:00시에 반격을 개시하였다.
주공인 우일선의 제1연대는 적의 저항이 전혀 없는 가운데 동두천~소요산까지 진출하였으나, 조공인 제18연대는 봉암리 부근에서 강력한 북한군과 조우하여 분산되고 말았다. 그 얼마 후에 북한군이 덕정을 좌우측에서 협공하였으므로 제7사단은 부득이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제7사단이 반격을 전개한 자체가 무모한 작전행동이었다.
제1연대는 반격 중에 적의 강력한 공격에 봉착하여 퇴로가 차단됨으로써 소대, 또는 중대단위로 흩어져 우이동·창동·태릉 방면으로 분산 철수하였다. 또한 이날 저녁까지 마차산에서 연대로부터 명령이 하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제 1대대는 어두어진 후에 마차산에서 철수하였으나 끝내 대대 지휘체제가 와해되고 병력은 사방으로 흩어져 창동, 태릉 등지로 분산되었다.
한편 제1연대보다 2시간이 늦은 6월 26일 10시에 반격을 개시한 임충식이 이끄는 제18연대는 이날 12시경에 은현초등학교 부근에서 방어로 전환하게 되었는데, 이는 적의 계속적인 압력으로 의정부가 위협받게 되자 사단에서 취한 조치였다.
제18연대는 은현초등학교 서쪽 감제고지에 급편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중 적의 기갑부대가 덕정으로 접근하였으나 연대는 북한군을 그냥 통과시켰다. 이는 엄청난 전투력의 전차를 직시한 연대장이 무모한 대결을 회피하고 후속하는 적 보병과의 일전에 대비하여 아군의 배치상태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취한 조치였다.
그러나 북한군 보병부대는 나타나지 않고 사단본부로부터 이날 밤중까지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한 제18연대장은 의정부가 적에게 점령되었다고 판단하고 철수를 개시하여 삼송리를 경유 28일에 행주나루터에서 한강을 도하한 후 소사·오류동 지역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다.
한편, 제2사단은 26일 03:00시에 반격을 개시하였으나 이때 사단의 병력은 제5연대 예하의 2개 대대밖에 없었다. 전날 청주를 떠난 제 16연대는 이날 04:00시에야 창동에 도착하였다.
2개 대대병력으로는 포천 탈환이 어려우므로 축석령을 방어하고 있을 제3연대를 초월 공격하겠다는 것이 사단장의 작전구상이었으나 이는 너무 성급한 반격이었다. 이 무렵 제 3연대는 이미 분산되었는데 제 2·7사단장은 그러한 사실을 모른 채 작전구상을 함으로써 제 2사단의 반격작전은 처음부터 승산이 없는 작전이 되고 말았다.
최창언이 이끄는 제5연대는 제 2대대를 선발대로 먼저 축석령으로 진출시켰으나 제3연대는 그곳에 없었다. 이윽고 자욱한 안개 속에서 전차의 굉음이 들리더니 북한군 기갑부대가 차갑준이 이끄는 제2대대 진전에 나타났다. 이에 국군 제2대대 장병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용감히 싸웠으나 교전한 지 10분도 못 되어 탄약이 떨어지고 투지마저 꺾여 분산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제2대대장은 병력의 일부를 수습하여 태릉으로 철수하고 나머지 병력은 분산되어 한강 남쪽의 낙오자 수집소에 집결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후속부대인 이정도가 이끄는 제1대대는 고갯마루에 도착하기도 전에 적과 싸워보지도 못한 채 퇴계원방면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이렇게 제2사단은 북한군을 저지하는 데에도 급급한 지경이 되자 문용채가 이끄는 제16연대를 상금오동 부근의 감제고지에 배치하여 북한군의 진출을 저지하려 하였다. 그로부터 약 1시간 후에 전차 20여 대를 앞세운 북한군이 공격을 재개하자 국군은 전차를 파괴할 수단이 없어 전전긍긍하였다.
다만 김진동 대위가 지휘하는 제16연대 1대대 특공대가 2.36인치 로켓포의 기습적인 집중포격으로 선두 전차 1대를 배수로에 빠지게 함으로써 잠시 동안 북한군의 진출을 지연시켰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 아래에서 제16연대의 2개 대대는 적 보병부대와 한차례의 교전을 치른 후에 태릉과 호원동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6월 26일 12시쯤 제16연대 방어진지를 돌파한 북한군은 의정부를 향해 계속 남하하고 덕정을 점령한 북한군 제4사단은 의정부를 서쪽에서 협공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다급한 상황 아래에서 금오리에 포진한 육군포병학교 제2교도대대장 김풍익 소장은 105mm 곡사포 1문으로 북한군 전차의 무한궤도를 파괴하였지만 제2탄을 장전하는 순간 후속 전차의 포격으로 대대장과 제2중대장 장세풍 대위 및 6번포 분대원 모두가 전사하였다.
그 직후부터 적 전차대는 아군의 저항이 거의 없는 가운데 6월 26일 13시경에 의정부 읍내로 진입하였다. 의정부 읍내에서는 철수하는 군인과 뒤늦게 피난길에 오른 주민 및 부상병들의 인파로 대혼잡을 이루고 있었으나 국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제7사단과 제2사단 전술지휘소는 창동으로 철수하여 새로운 전술지휘소를 개설하게 되었다.
전쟁 발발 초기 적의 공격축선
백석천, 내촌 일대의 지연전
6월 26일 오전에 창동으로 열차이동한 김병휘가 이끄는 제25연대는 육군본부 명령에 따라 의정부 남쪽 교외의 백석천에 제 2·3의 2개 대대를 배치하였다.
북한군 제3사단은 의정부를 점령하자 곧 다음 작전을 위한 재편성과 재보급을 위해 약 4시간동안 지체하고 있었다. 적은 이날 17:00시에 공격을 재개하였다.
전차 20대를 앞세우고 접근하는 북한군의 위세에 불안감을 느낀 어느 병사가 오발하는 순간, 국군 병사들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발생하여 방어 진지가 북한군에게 노출되었고 얼마 되지 않는 휴대탄약은 교전한 지 2~3분 만에 바닥이 나고 말았다.
이런 상황 하에서 북한군 전차대는 백석교를 속속 통과하고 있었는데 바로 이때 다리 밑에 잠복한 2.36인치 로켓 분대장이 5번전차를 파괴시켰으나 후속전차가 발사한 포탄에 맞아 전사하였고 뜻밖에 전차 1대를 잃은 북한군은 충격을 받았는지 더 이상 진격하지 않고 의정부로 되돌아갔다.
앞서 가던 전차 4대는 호원동 부근에 방어진지를 편성한 제 16연대 2대대(대대장 소령 김헌)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친데다가 후속전차가 없음을 확인한 듯 약 2km를 후퇴하여 노상에서 사격태세를 갖추고 후속부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이들 전차와 격전을 치른 제16연대 2대대는 많은 피해를 입고 분산되었고 이날 밤 백석교 우측에 배치된 제25연대 11중대장 문일수 중위는 전차 특공대를 편성, 지휘하여 노상에 정지 중이던 북한군의 전차 4대를 습격하여 그 중 2대를 파괴하는 큰 전공을 세웠다.
다음날 6월 27일 새벽 북한군이 공격을 재개하자 제25연대는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탄약 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태릉, 능곡, 수원 등지로 분산 철수하였다.
한편 육군사관학교장 이준식 준장은 6월 25일 13:00시 육군본부 명령에 따라 생도대대와 배속된 전투경찰대대를 391번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내촌 부근의 감제고지에 배치하였다.
다음날 국군은 남하하는 북한군과 격전을 치른 후 태릉으로 철수하여 제9연대와 더불어 불암산~태릉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미아리~태릉 방어선의 우측 일각을 담당하게 되었다.
결과 및 영향
포천과 의정부 전선이 무너진 뒤로 그 파급영향은 거의 전 전선에 미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좌 인접인 백선엽이 이끄는 제1사단은 아직 임진강 방어진을 고수하고 있는데, 동측방이 무너져 그 위협으로 말미암아 철수를 강요당하는 상황에 놓이고, 태릉 정면에서도 생도대대가 적선 후방에 위치케 되는가 하면 춘천의 제6사단과 강릉의 제8사단까지도 수도 서울의 위기에 따른 전술적 및 심리적인 충격으로 작전에 혼미를 거듭하게 되었다.
이에 반하여 북한군은 서울 공격을 제1목표로 삼아 의정부 지역의 전과 확대를 획책하는 한편 일부의 병력을 6월 27일에 벌써 김포반도로 상륙시켜 서측방에서 위협을 가하였다.
동두천 전투
동두천 전투는 1950년 6월 26일 한국 전쟁 발발 당시에 서울 북쪽 17km의 동두천 정면에서 유재흥 준장이 지휘하는 제7사단과 이형근 준장이 지휘하는 제2사단이 김웅이 이끄는 북한군 제1군단 예하의 2개 사단과 1개 기갑여단으로 구성된 공격집단의 침공을 맞아 이를 격멸하고자 한 방어전이다.
동두천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 |||
날짜 | 1950년 6월 26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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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경기도 동두천 | ||
결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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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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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두에 제7사단이 포천과 동두천 부근에서 서전을 치른데 이어, 대전에서 증원한 제2사단이 의정부 부근에서 격돌하게 되어 이 지역은 수도 서울의 관문과도 같아 피아간에 주력이 되었다.
그런데 북한군은 처음부터 여기에 공격의 중점을 두고 병력과 화력을 집중투입한데 반하여 국군 측에서는 아무런 대비 없이 이와 맞섬으로써 전투 초기의 상황이 급박하게 변해갔다.
특히 이 지역은, 경원 본도인 3번 도로를 비롯하여 동측의 43번과 서측의 316번이 모두 양호한 노면에 열을 지은 듯 남북으로 뻗힌 데다, 광천 산맥과 천보 산맥이 종벽을 이루어,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횡적연계와 종심배치에 불리한데 비하여 공격하는 입장은 기계화 부대의 운영과 공격 돌입이 용이하였다.
전투 과정
이권무(李權武)가 이끄는 북한군 제4사단은 초성리(哨城里), 양원리(兩遠里), 적암(積岩) 일대에 맹렬한 공격준비사격을 집중한 후 전곡-동두천 간 3번 도로에 보, 전 협동부대로 편성된 부공을 투입하고 그 서쪽의 적암-봉암리(鳳岩里) 접근로에 조공을 투입하여 병진공격을 개시하였다.
북한군은 38도 분계선 일대의 국군 진지가 거의 무개호이며 배치된 병력도 1개 초소 당 분대나 소대규모인 것을 지상관측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 내의 가용한 모든 화력을 총동원하여 30여 분간이나 3번 도로와 그 주변을 맹타하였는데 포격으로 인한 도로파괴가 그들 공격부대의 기동에 제한이 된다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포격이었다.
이는 당시 북한군의 정보수집능력이 매우 낮은 수준이었음을 입증해 주는 전투행동이었으며, 표적의 성질과 기동로의 상태 및 적정을 감안하지 않고 계획된 공격준비사격을 기계적으로 실시한 사실은 소련 군사고문단에 의해 공격명령이 작성되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었다.
이때 의정부에 전투력의 대부분을 주둔시키고 있던 제7사단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고 외출과 외박자의 비상소집, 출동준비, 수송장비의 징발, 철도수송을 위한 협조 등 혼란의 와중에서 아군은 점차 침착하게 긴박한 사태를 수습해 나갔다.
이러한 가운데 함준호(咸俊鎬)가 이끄는 제1연대는 비상출동대기부대인 제 3중대를 비상발령과 동시에 초성리 남쪽 176고지로 진출시켰다. 이곳에서 제3중대는 전차 2대를 앞세우고 전술행군종대로 남하중인 1개 대대규모의 적을 기습하여 격퇴시키고 소요산에 위치하고 있던 이끄는 제2대대장 소령 이의명(李義明)의 지휘 하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소요산에서는 밀고 밀리는 치열한 육박전이 펼쳐졌으며 제2대대는 11시가 넘도록 소요산진지를 사수하고 있었다. 이처럼 소요산에서 아군이 넓은 방어지대를 지탱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대대장 이하 전장병들이 불타는 투지와 북한군의 강력한 포화에도 유선통신망이 절단되지 않아 지휘체계가 유지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제2대대가 소요산에서 고군분투하는 동안 제 1연대는 제1대대를 마차산에 투입하고 뒤를 이어 김황목(金煌穆)이 이끄는 제3대대를 봉암리에 배치하였다. 그러나 제1대대가 마차산의 방어진지를 점령하였을 무렵에는 북한군이 이미 이 고지를 우회하여 간파리(干坡里)방향으로 남하 중에 있었다.
따라서 제1대대는 마차산 정상에서 소요산의 교전상황을 구경하는 처지가 되었으나 대대를 지휘하던 김봉룡(金鳳龍) 대위는 상황변화에 따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다만 연대에서 어떠한 명령이 하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제3대대 지역에도 적이 출현하지 않았으므로 제 1연대는 그와 같은 긴박한 상황 하에서 2개 대대를 유휴병력으로 대기시킨 채 시간만 허송한 결과가 되었다.
한편 제1연대를 직접 지원하던 제 5야전포병대대 제 2중대는 주저항선 남쪽 보산리(保山里) 부근에 준비된 진지를 점령한 지 얼마 후에 밀집대형으로 남하하는 북한군의 1개 대대를 집중포격하여 대부분을 격멸하는 수훈을 세웠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난 후 패주했던 북한군은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을 재개하였다.
이때 제1연대 57mm 전차포중대장은 창말고개(동두천 북쪽 2km 지점)에서 선두 전차 2대의 측면을 사격하여 모두 파괴하였고 이에 당황한 북한군은 다시 초성리 쪽으로 철수해 버렸다.
이러한 승리의 쾌보가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거쳐 방송되는 과정에서 국군의 반격이 개시되었다고 비약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제1연대는 탄약이 떨어져 재보급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으나 보급사정이 풀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한편 북한군 제4사단은 이날 15:00를 전후하여 제107전차연대를 선봉에 내세우고 동두천을 맹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맞선 제2대대는 10시간 동안이나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였으나 마침내 동두천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북한군은 아군의 주저항선을 돌파한 여세를 몰아 일몰과 더불어 동두천 시내로 진입하였고 국군은 어둠 속에서 시가전을 펼쳤으나 역부족하여 덕정으로 철수하여 집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마차산의 제1대대는 유, 무선 통신의 두절로 철수명령이 전달되지 않았다.
결과 및 영향
포천과 의정부 전선이 무너진 뒤로 그 파급영향은 거의 전 전선에 미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좌 인접인 백선엽이 이끄는 제1사단은 아직 임진강 방어진을 고수하고 있는데, 동측방이 무너져 그 위협으로 말미암아 철수를 강요당하는 상황에 놓이고, 태릉 정면에서도 생도대대가 적선 후방에 위치케 되는가 하면 춘천의 제6사단과 강릉의 제8사단까지도 수도 서울의 위기에 따른 전술적 및 심리적인 충격으로 작전에 혼미를 거듭하게 되었다.
이에 반하여 북한군은 서울 공격을 제1목표로 삼아 의정부 지역의 전과 확대를 획책하는 한편 일부의 병력을 6월 27일에 벌써 김포반도로 상륙시켜 서측방에서 위협을 가하였다.
포천전투
의정부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 |||
날짜 | 1950년 6월 25일 ~ 26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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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경기도 의정부 | ||
결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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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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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전투는 1950년 6월 25일 ~ 6월 26일, 한국 전쟁 발발 당시에 서울 북쪽 17km의 포천 정면에서 유재흥 준장이 지휘하는 제7사단과 이형근 준장이 지휘하는 제2사단이 김웅이 이끄는 북한군 제1군단 예하의 2개 사단과 1개 기갑여단으로 구성된 공격집단의 침공을 막아 이를 격멸하고자 한 방어전이다.의정부 지역을 담당한 제7사단은 유재흥 준장의 지휘 하에 제1, 9 양 연대가 사직리-쇄역리-적성 간의 47km에 달하는 광정면을 방어하고 있었다.
사단은 서울에서 제7여단으로 창설된 뒤로, 1949년 2월에 수도여단으로 개칭되었다가 1950년 5월에 사단으로 바뀌고, 다시 6월에 제 7사단으로 개칭됨과 더불어 이 지역을 담당케 되었는데, 이때에는 예하에 제1, 3, 9, 3개 연대와 포병 및 공병 등을 합하여 총병력이 9,698명이었다.
그런데 전쟁 발발 3주전인 6월 1일로 육군본부에서 일선 명령 제 43호를 하달하여 일부부대의 예배속 관계를 조정함에 따라, 이상근이 이끄는 제3연대가 수도경비사 산하로 예속이 변경됨으로써, 동 연대의 3,050명이 사단을 떠나고, 이날 현재 제 1, 9 양 연대와 포병 및 공병 등, 6,788명의 공력이 이 지역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뒤로 6월 13일 육본 작전명령 제79호에 의거하여 6월 15일로 김병휘가 이끄는 제2사단 25연대가 사단에 편입되도록 예정되어 있었으나, 동 연대는 온양에 위치한 까닭에 의정부로 이동키 위하여 준비하던 바, 주둔지로 선정된 호완리 일대가 민유지인 관계로 그 징발문제와 막사 및 식수문제 등 일련의 사정으로 말미암아 7월 15일로 이동일자를 연기한 차에 전투에 임하게 되었고 따라서 동 연대는 전투 후에 다시 제2사단에 복귀되었다.
이리하여 사단은 예비대가 없이 양 연대를 일선에 내세워, 윤춘근 중령이 지휘하는 제9연대는 포천 정면인 우 일선을, 함준호 대령이 지휘하는 제1연대는 동두천 정면인 좌 일선을 각각 담당케 한 가운데, 38도 분계선 방어와 부대교육을 병행 실시하였다.
그런데 일선 경비보다도 교육훈련에 더욱 치중하여, 각 연대로 하여금 1개 대대를 경계진지에 배치하고 2개 대대를 의정부 부근으로 뽑아 소정의 교육을 실시케 하되, 3개월마다 순환교대 방식으로 전술을 숙달하게 하였던 것이다.
작전 계획
북한은 전쟁 발발 2주 전인 6월 10일에 평양의 민족보위성에서 비밀리에 군사지휘관회의를 개최하여 기동훈련을 빙자한 전투 병력의 일선전개를 꾀하였는데, 이때에 벌써 이들은 주력의 침공경로를 철원-연천-동두천-의정부 축선으로 결정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그 회의 직후에 단행된 병력의 이동상황으로 볼 때, 이른바 그들의 정예라고 하는 제3, 4 양 사단과 유일한 기갑부대인 제105기갑여단을 철원-운천-연천 부근에 집결시켜 경원선 주변에서 공격태세를 갖추게 한 점과 전쟁 중에 입수한 노획문서 가운데 연천-의정부를 거쳐 조기에 서울을 점령한다고 밝혀진 점, 그리고 개전 이후의 부대기동등을 종합하여 판단할 때, 그들의 침공기도는 처음부터 주력으로써 의정부로 지향한다는 계책을 세운 것으로 추단된다.
즉, 김웅이 이끄는 제1군단 예하의 2개 사단과 1개 기갑여단으로 의정부 정면을 집중 공격하는 동시에, 동측의 김광협이 이끄는 제2군단과 서측의 제1, 6 양 사단과의 협조아래 수도 서울을 침탈 도모코자 하였던 것으로 분석된다.
따라서 당 사단의 책임지역이 그 주목표로 부상하게 되었거니와, 이들은 다시 구체적인 시행방안을 마련하기 위하여 동월 18일부로 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의 명의로 된 정찰명령 제 1호를 하달하였는데, 그 개요를 보면, 소대군위 이하의 병력 배치선 까지 정찰토록 하는 세밀한 계획을 세워 특히 유개진지와 병력배치상황 그리고 장애물 지대 및 예상 집결지 등을 확인토록 하였으며, 여기에 이어 공격목표의 선정과 부대의 기동계획을 마련토록 명시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정찰을 마친 그들은 6월 22일 14:00부로 전투명령 제 1호를 하달하여 23일 12:00까지 모든 공격준비를 완료토록 촉구하였다. 여기에서 놀라운 사실은 사단의 경계진지와 주진지를 빠짐없이 공격목표로 선정한 점과 포병을 비롯한 공병과 반전차포 및 항공등의 지원 아래 서울까지 일거공략 하려는 계획을 미리 밝히고 있는 점이다.
육군본부에서 교육각서 제 2호에 따른 교육을 실시케 함으로써, 이에 치중하여 38도 분계선 남연의 전진진지에 1/3 병력만을 배치하고 주력은 28km 후방의 의정부 부근으로 집결시켜 대대급 이하의 기초훈련을 하고 있는 실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각 연대의 지휘소도 주력과 함께 모두 의정부 부근에 위치하고, 일선대대는 각각 20km 내외의 광정면을 경비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전투 과정
사단의 동반부인 포천 지역은 윤춘근 중령이 지휘하는 제9연대가 맡아 사직리(기산리 동북쪽 5km)-추동리(포천 서북쪽 11km)간의 26km에 달하는 책임지역을 방어하게 되었는데, 본래 이 지역은 금화에서 운천과 포천을 거쳐서 의정부에 이르는 43번 도로를 중앙에 끼고 동측의 광주산맥과 서측의 천보산맥이 종으로 뻗어 장방구형을 이룬 지대로써 정상적으로는 2개 사단의 방어정면에 해당될 것이다.
이러한 전투정면을 3,400명의 병력을 보유한 제9연대가 전담하여 북한군 제109전차연대와 협동으로 침공한 제3사단과 대결케 되었는데, 당시에 연대는 사단의 방침에 따라 1개 대대로써 일선경비를 담당하게 하고 2개 대대를 38도 분계선에서 26km 뒤에 떨어진 금오리의 연대 지휘소 부근으로 뽑아 소부대 전술교육을 실시하는 상태인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따라서 일선경비를 맡은 대대는 전 정면배치가 곤란하여 통행의 요로만을 한정하여 거점방어태세를 취하였으니, 이날 제 1선에는 전순기 소령이 지휘하는 제2대대가 2일 전인 6월 23일부로 이철원이 이끄는 제3대대의 진지를 인수하여, 대대본부를 전과 다름없이 포천에 두고 송영환이 이끄는 제7중대)를 오른쪽 제 1선으로 하여 43번 도로와 38도선이 접하는 양문리 일대에, 이인호가 이끄는 제6중대는 왼쪽 제 1선으로 그 서쪽의 소로인 325번도가 영평천에 이르는 가양리와 추동리 부근에 각각 배치하는 한편 제 5중대는 예비로 4km 후방의 신평리(만세교 서쪽) 부근에 공치하였다.
이렇게 볼 때, 대대의 실 병력이 배치된 지역은 6km의 점령지대에 불과하며 그 나머지 19km에 해당하는 산록과 야지는 거의 무방비상태로 있었으며 특히 동측의 기산리 북쪽은 391번도 연변에서 1개 분대의 수색대가 봉쇄할 뿐이었다.
그리고 박창암 중위가 이끄는 보국대대 제 2중대가 전날부터 38도 분계선 북쪽의 유정리 부근에서 활동하고 있으나 대대와는 유기적인 협조를 취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상과 같은 상황아래 이날을 맞이하게 되었거니와, 다행히도 연대의 전 장병이 영내대기 상태에 있었으니, 이는 연대장 윤춘근 중령이 전날 사단으로부터 『재량에 따라 주말외출을 실시토록 하라』는 통보를 받고, 오랫동안의 긴장 속에서 대기한 바 있는 병사들에게 외출과 외박을 허용할까 생각하다가 당면의 적정이 수상한 까닭으로 영내에서 휴무하도록 조치하였던 것이다.
그는 뒤에 당시를 회고하며 술회하기를,『오랜만의 외출이라 처음에는 제 2대대만 제외하고 모두 허용하려고 하였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적정이 심상치 않았다. 일주일 전부터 철원에 기갑부대가 나타났다는 첩보가 있는가 하면 북한의 정규군이 38경비대와 교대하였다는 소문이 떠돌고, 6월 23일 밤에는 제2대대장으로부터 운천에서 차량대열이 유정리로 이동한다는 보고에 이어 바로 영평천 부근에 전차가 나타났다고 속보되는 등, 모든 면에서 평상시와 달랐다. 그래서 제 1, 3 양 대대의 병사들의 외출준비를 마쳤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일단 중지시키고 이상이 없으면 6월 25일 주간에 시행토록 하자고 하였더니 대대장들도 내 뜻에 따라 모두 영내에 남았으며 나도 감기로 미열이 있었지만 청량리 숙소에 전화연락만을 하고 영내에서 대기하였다』고 하니, 일선 지휘관의 심회를 헤아리고 남음이 있다.
이 같은 조치로 연대의 주력은 금오리에서 대기하고 제2대대는 더욱 경계를 엄히 하던 바, 이날 새벽에 북한군 제3사단은 대좌 김창봉이 이끄는 제7연대를 선봉으로 삼아 제 109전차연대와 협동으로 일시에 엄습하니, 돌연 포천 정면의 38도 분계선 연변이 불길에 휩싸였다.
제9연대 2대대의 전황
전순기 소령이 이끄는 제2대대는 3개월마다 상호 교대하는 방식으로 일선 경계임무를 수행케 하는 연대의 방침에 따라 6월 23일부로 제 3대대의 진지를 인수하여 기설진지를 점령하였는데, 이때에 대대장은 제6, 7 양 중대를 제일선에 배치하기에 앞서 『근간에 적의 동향이 심상치 아니하니 경계를 철저히 하고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진지를 더욱 보강하라』고 강조함과 아울러 중화기중대의 기관총 소대를 분할하여 각각 1개소대(기관총 1개반과 81mm 박격포 2문)씩 배속시켰다.
그런데 이날 03:40을 전후하여 공격준비사격을 시작한 북한군은 미리 대대의 병력 배치상황을 탐색한 듯 경계진지만을 골라 포격을 집중하였으니, 오른쪽 제 1선인 송영석이 이끄는 제7중대지역에서는 양문리 일대와 그 서쪽의 287고지 북쪽에 포화가 집중하고, 왼쪽 제 1선인 이인호가 이끄는 제6중대 지역에는 하양리-주원리-추하리 일원을 초연으로 뒤덮어 마치 산 전체를 무너뜨릴 듯하였다.
제7중대 정면에는 양중교(일명, 삼팔교)를 넘어선 3대의 전차가 양문교 부군까지 침습하여 포구를 동남쪽을 지향하고 동 중대 제 1소대의 진지를 강타하는가 하면 바로 그 서쪽의 희악사 부근에서 수 미상의 적이 측후방으로 침공하여 단숨에 이 소대진지를 삼키고자 하였다.
이때에 동 소대는 소대장이 공석이므로 선임하사가 지휘하여 양문리 남쪽 500m에 있는 무명능선 서단에 배치한 기관총 소대와 함께 이 요선을 지키고 있었는데, 의외의 강습을 받게 되자 가능한 모든 화력을 활용하여 이를 저지하고자 하였으나 교전 30분 동안에 이미 과반수의 병력을 잃고 어둠속에 분산되고 말았다.
한편 왼쪽 제1선인 제6중대는 성일영 소위가 지휘하는 제 3소대가 추동리에서 한차례 고전을 벌인데 이어, 장자동으로 집결한 중대의 주력이 그 서남쪽 삼차로를 막아 287고지에 연한 방어진지를 급편 하였는데, 여기에서도 또한 325번 도로를 따라 침공한 전차대의 강습으로 말미암아 대동소이한 양상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적의 전차대가 그 남쪽 2km의 장승거리를 넘어서자 분산병력을 수습하여 무이산(포천 북쪽 7km)쪽으로 전진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대대본부와 통신이 두절되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로 삼성당리 계곡을 따라 포천 쪽으로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이상과 같이 제7, 6 양 중대가 고전을 치르고 있을 무렵에 12km 후방인 포천에 위치한 대대본부에서는 대대장 전순기 소령이 일선의 위급한 전황을 연대장에게 보고함과 아울러 증원 병력과 특히 대전차 화기의 지원을 요청한 다음 제 8중대장 박기순 중위를 대동하고 만세교 초소로 올라갔다.
그리하여 06:00에 여기에 도착한 대대장은 곧 예비인 제 5중대로써 북만세 좌우측방의 160고지와 208고지에 연한 저지 진지를 급편하게 하여 연대의 주력이 진출할 때까지 지연전을 펴기로 하였는데, 이때에 북한군은 양문교를 넘어 만세교 쪽으로 지향하고 있었으니, 43번 도로를 따라 주력으로써 침공하리라고 판단한 대대장의 예견은 적중하였으나, 소총만을 들고 능선을 지키는 병사로서는 이 기계화 부대를 감당키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만세교 부근의 지연전
연대장 윤춘근 중령이 첫 보고를 받은 것은 4시 30분이었는데 그는 대대장의 유선보고를 받는 순간 근래에 야기된 일련의 사건이 연상되어 이것이 곧 북한군의 대규모 공격일 것으로 판단하고 이 사실을 사단에 보고하는 한편 연대비상에 돌입하였다.
그리하여 금오리에 대기 중인 제 1, 3 양 대대로 하여금 『천계산(424고지)-가랑산(350고지)간의 주진지를 점령하여 기정방침에 따라 적을 조지, 격멸토록 하라』고 명령하는 동시에 제2대대장 전순기 소령에게 현 위치에서 최대한의 지연전을 펴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 양 대대가 출동태세를 갖추는 동안에, 허현 대위가 지휘하는 57mm 대전차포 중대로 하여금 만세교로 직행하여 전차대의 예봉을 격쇄토록 조치함과 아울러 2.36인치 로켓포 12문을 모아 역시 만세교 부근의 요선을 지키도록 후속, 급파하였다.
4시간 동안을 홀로 고군분투한 제 2대대는 일선 분산병력의 수습에 힘쓰며 북만세선의 진지를 지키고 있었는데 08:00를 전후하여 다시 침습하기 시작한 북한군이 43번 도로를 따라 밀고 내려왔다.
그런데 이들은 진지공격 보다도 급속진출을 위주로 삼아 열의 전차를 앞세우고 밀려들자, 208고지 북쪽 기슭의 이학봉이 이끄는 제5중대 2소대 진지에서 기관총 측사화력으로 집중타를 가하니, 선두전차가 만세교 북쪽 300m 거리에서 일단 멈추어 서면서 포구를 돌려 동진지를 반격하였다.
이로부터 중대는 가용한 모든 화력으로 북한군의 전차에 공격을 계속하였으나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실탄만 소진케 되었는데, 바로 이때에 연대에서 급파한 대전차포 중대(-)가 만세교에 다다랐다.
이리하여 진전 50m 까지 적을 유도한 동 중대(-)는 선두차를 명중시키고 함성을 지르며 기뻐하였으나 그것은 일순뿐으로 파괴된 줄 알았던 전차는 오히려 진지에 포격을 연발하며 계속 진전으로 육박하는 것이었다.
이에 좌측포가 다시 수 발을 더 명중시켰으나 아랑곳없이 목전에 당도하니, 겁난 병사들이 조준경만을 빼어들고 신평리(포천 북쪽 5km)쪽으로 급히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반면에 적은 위세를 돋우어 저지선을 돌파한 다음 다시 탄장선으로 침공하니, 이때가 09:40으로 만세교 부근의 지연전은 2시간을 채 지나지 못하였으며 제 2대대 5중대의 장병들은 구릉에서 이를 방관하는 형상이 되고 말았다.
북한군 기계화 부대의 선공
북한군 제3사단은 이날 새벽에 38도 분계선을 돌파하여 10km 남쪽의 만세교 부근까지 돌입한 연후에 일단 멈추어 전열을 정비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10:30을 기하여 재공격에 나섰다.
이번에는 김창봉 대좌가 이끄는 제7연대로써 43번 도로를 따라 정면공격을 꾀하는 한편, 김만익 대좌가 이끄는 제9연대를 서측의 325번 도로로 우회시켜 일격에 포천을 확보하고자 기도한 것으로 여겨졌다. 특히 이들은 본도상에 공격의 중점을 두고 안백성 대좌가 이끄는 포병부대화력을 여기에 집중하는 동시에 기계화 부대를 선봉으로 삼아 연대 주저항선의 중앙지대를 돌관하여 장차 크게 공위코자 한 것으로 추단되었다.
그런데 연대(-)는 병력의 부족으로 43번 도로 양 측방의 천계산과 가랑산에 진지를 선정함으로써 서 측방이 공백상태로 남은 데다 대포병 장비나 대전차 화기가 없으니, 이 싸움은 처음부터 그 귀추 여부를 헤아릴 수 있었다.
제9연대 주저항선의 붕괴
일진광풍이 지난 뒤로 연대(-)의 장병들은 후속 도보부대만은 기필코 격멸키로 다짐하고 현 진지를 고수하던 바, 기계화 부대가 지난 1시간 뒤에 이윽고 북한군의 보병이 침공하였다.
이들은 연대 주력의 배치선을 탐지한 듯 먼저 포격을 가하였는데, 120mm 박격포를 비롯한 122mm 유탄포와 76mm 야포 등 곡사화력으로써 특히 제1대대의 진지인 천계산 서쪽에 집중포격을 가한 다음 43번 도로를 따라 2열종대로 열을 지어 거침없이 밀려들었다.
이러는 사이에 북한군의 선두가 신북대교를 넘어서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제 3대대와는 통신마저 두절되어 정황을 파악할 수가 없었으며, 제 1대대도 이날 세 차례에 걸친 대결 끝에 42명이 전사하고 80명이 부상하게 된 데다 휴대한 탄약을 모두 소모하고 보니 전의가 떨어져, 보다 적극적인 방어책을 취하지 못한 채로 현 진지를 지키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에 반하여 북한군은 진지 공격보다도 남하진출에 주안한 듯 전차의 엄호 하에 주력으로써 신 북대교를 통과하니, 이때가 14:00로서 3시간 동안에 걸친 분투도 보람 없이 끝내 연대의 주저항선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제3대대와는 통신이 두절되어 끝내 연락을 취하지 못한 채로 연대본부는 제1대대와 함께 철수하기에 이르렀고 명령을 받지 못한 제3대대는 남은 병력으로 가랑산의 진지를 계속 지키고 있다가 이날 밤에 단독으로 철수하여, 왕방산 기슭을 따라 회암령을 넘은 다음 동두천 가도의 덕정 부근으로 빠지게 되었는데, 전진 중에 대부분이 낙오되어 다음날 아침에 옥정리로 집결한 병력이 1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 뒤로 이 병력은 제1연대와 합세하여 의정부로 후퇴하다가 천보산 북쪽에서 다시 분산되어 그 일부만이 우이동으로 집결하게 되는 바, 그 과정은 제1연대의 반격상황에서 약술하게 될 것이다.
이상과 같이 연대는 포천 정면에서 북한군 제3사단과 대결 끝에 중과부적으로 분산되어 전투력을 거의 상실하고 제1대대만이 태릉으로 집결하게 되었던 것이다.
제3연대의 전투참가
포천 정면에서 제9연대가 고전을 치르고 있을 무렵인 이날 정오에 사단에서는 제 5포병대대(-)만을 증파하고 후속 예비 병력이 없어 기울어지는 전황을 지켜보던 바, 육군본부에서 수도경비사 사령관 대령 이종찬 예하의 이상근이 이끄는 제3연대를 급파하였다.
이 당시에는 이미 제 9연대의 주저항선이 무너져 북한군의 보병부대가 탄장을 통과한지 1시간이 지나고 기계화 부대가 이보다 3시간 전에 포천에 돌입하였던 것이니, 이제 공격의 화살이 곧 목전에 다다른 급황 이었다.
그러나 사단장으로부터 탄장으로 직행하라는 명령을 받은 연대장 이상근 중령은 적정을 확인키 위하여 수색소대장 김철순 중위로 하여금 소대병력을 지휘하여 포천까지 위력정찰토록 지시하고 자신은 주위의 지형을 살피던 바, 15:30에 이르러 수색소대장으로부터 어용동(포천 남쪽 1km) 부근에 적의 전차가 나타났다는 보고가 입수되자 곧 주력을 반전시켜 3km 후방인 송우리에서 급편방어 태세를 취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송우교를 중심으로 좌우 측방에 각각 2개 중대씩 배치하는 한편 이봉근 중위가 지휘하는 혼성 제11중대로 하여금 43번 도로를 포함한 중앙지대를 담당케 하여 진지작업에 착수하였는데, 이때에 마침 제1대대장 임백진 소령이 현지에 당도하자, 그에게 동측의 2개 중대를 지휘케 하고 제3대대장 김붕상 소령은 제11중대를 포함한 서측의 3개 중대를 맡아, 양 대대로써 방어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연대장 이상근 중령은 장송우 북쪽의 134고지에 연대 관측소를 설정하여 제3대대장과 함께 그 고지로 올라가 본대를 장악하고, 57mm 대전차포 2문을 그 동측의 노변에 배치하였으며, 연대 통신대장 김성규 중위와 제1대대의 통신소대장 김덕수 소위는 통신망을 구성하는 등 대결 태세를 취하였다.
양 대대는 혼성병력을 재조정 하면서 계속 진지를 구축하던 바, 17:00을 전후하여 북한군의 포격이 격렬하게 불을 뿜고 또한 이와 때를 같이하여 심한 소나기가 쏟아졌다.
이때에 양 대대는 개인호의 경우, 2/3 정도 굴착하였을 무렵이었는데, 이같이 포격이 격증하자 진전을 살펴보니, 2,000m 직전방의 도로상에 1단의 기계화 부대가 나타났다.
이들은 마치 나무단을 쌓아올린 우마차 대열과 같이 짙은 위장을 하고 남진을 계속하는데 어느 덧 그 선두가 선단리를 지나 1,500m 전방으로 다가섰다.
이에 양 대대의 진지에서 일제히 사격을 시작하였는데, 특히 연대의 중화기가 집결된 제 12중대는 중대장 대리인 김현경 중위가 직접 진두지휘하여, 『거리 1,300』을 불러 81mm박격포 1개 반의 포화를 유도하는가 하면, 동 소대장 최소위는 다른 1개 반을 맡아 포수 진삼섭 일등 중사에게 고폭탄을 쏘라고 외치고 다시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동 중대의 기관총 사수 이재철 하사는 장송우 부근에서 기총을 휘두르는 등 중화기 화력을 퍼부었으며, 이와 더불어 각 소총 중대도 60mm 박격포와 각종소총으로 동시 집중 사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이 기계화 부대는 아랑곳없이 계속 차전으로 밀려들더니, 선두에선 2대의 전차가 장승거리 부근에 멈추어서면서 제3대대의 관측소에 포격을 가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8대의 전차가 이에 가세하여 포격과 기총으로 양 대대의 진지를 위압하는데, 특히 중화기 진지에는 포격이 심하여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이때에 57mm 대전차포가 불을 뿜어 장승거리 부근에 버티고 선전차에 일격을 가하고, 또한 이봉근이 이끄는 제11중대의 화기소대장 이정선 소위가 이끄는 2.36인치 로켓포의 직격탄으로 철갑을 명중시켰으나 이 역시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북한군의 역사화력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로부터 북한군의 전차대가 송우리의 방어진을 돌파하게 되자, 후속 보병만이라도 격멸코자 하였으나, 잇따른 후속종대는 보병뿐만 아니라 전차와 자주포를 비롯한 각종차량이 장사진을 이루어 밀려드니, 더 이상 항거의 수단를 잃고 말았다.
조재준이 이끄는 제3중대의 제 3소대장 김학석 소위는 여기에서 159여 대의 각종차량을 헤아렸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는 701호를 표식한 전차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전황이 급전하여 당면한 대책이 화급한데 아무도 다음 행동을 지시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러는 사이에 어느덧 18:30에 이르러 적의 보전협동부대가 침공하자 양 대대의 진지가 무너져 동서 양 측방으로 분산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그 뒤로 연대(-)는 각대대장의 단독결정에 따라 철수케 되었는데, 대체로 제 1대대는 43번 도로 동측에서, 제 3대대는 그 서측에서 각각 퇴로를 모색케 되었으나 병력이 크게 분산되어 이 과정에서 대부분이 본대와 이탈하여 의정부를 목표로 전진케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제1대대장 임백진 소령이 이날 밤 20:00까지 축석령에서 수용한 혼합병력이 150명밖에 되지 않아, 21:00에 다시 이곳을 떠나 금오리 남쪽의 155고지로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이상과 같이, 제3연대의 송우리 전선이 무너짐으로써 이제 포천 지역은 북한군의 독무대로 화하고 말았으며, 이에 따라 의정부 동북쪽의 방비가 급박한 상황에 이르렀다.
결과 및 영향
포천과 의정부 전선이 무너진 뒤로 그 파급영향은 거의 전 전선에 미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좌 인접인 백선엽이 이끄는 제1사단은 아직 임진강 방어진을 고수하고 있는데, 동측방이 무너져 그 위협으로 말미암아 철수를 강요당하는 상황에 놓이고, 태릉 정면에서도 생도대대가 적선 후방에 위치케 되는가 하면 춘천의 제6사단과 강릉의 제8사단까지도 수도 서울의 위기에 따른 전술적 및 심리적인 충격으로 작전에 혼미를 거듭하게 되었다.
이에 반하여 북한군은 서울 공격을 제1목표로 삼아 의정부 지역의 전과 확대를 획책하는 한편 일부의 병력을 6월 27일에 벌써 김포반도로 상륙시켜 서측방에서 위협을 가하였다.
창동 전투
창동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 |||
날짜 | 1950년 6월 26일 ~ 6월 2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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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당시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 | ||
결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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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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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동 전투는 한국 전쟁 발발 초기에 북한군의 기습적인 전면 남침으로 38도 분계선에 연한 전 전선이 무너지자, 육군 본부가 38도선으로부터 45㎞에 불과한 수도 서울에 대한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에 이응준(李應俊) 소장이 이끄는 국군 제5사단과 유재흥(劉載興) 소장이 이끄는 제7사단이 미아리, 창동 지역에서 치른 전투이다.
북한군의 남침을 잠시 저지했으나 결국 북한군의 전차 앞에 후퇴하게 되었다.
전투 과정
서울 점령에 혈안이 된 북한군은 6월 25일에 의정부 - 문산선을 함락시키자 이날 오전 4시부터 남침을 재개하여 퇴계원 - 창동 - 봉일천등 3개 방향으로 그 주공을 지향하였다.
즉, 의정부 회랑을 통하여 서울로 진출한 것으로 보이는 북한군 제4사단은 이날 불효를 기하여 침습을 재개하였으나, 그들 선두 부대가 국군 제25연대에 의하여 격퇴되어 일시 공격을 중지하고 재편성하였던 것으로 보였는데 그로부터 수 시간이 지난 오전 10시에는 창동선 일대에 포탄을 집중시키면서 오전 11시에는 그 선두 전차로써 진전으로 육박하였다.
이무렵 창동선의 제1선 전투부대 뒤에는 독전대, 그리고 제3선에는 헌병을 배치하여 병력철수의 통제와 낙오병의 수용임무를 부여하여 진용을 가다듬고 있었으나, 이곳 장병이 갈망하는 탄약과 급식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은 물론, 미 공군기의 폭음도 들리지 않았다. 이러한 실망 속에 북한군 포탄의 집중은 치열하고, 각 부대와의 연락 유지마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때 김계원 중령이 지휘하는 6문의 105㎜ 곡사포는 일제히 포문을 열어 북한군의 대열을 분산시키고 진출을 둔화시키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였으나, 1시간 뒤에는 포탄이 소진되고 수적으로 우세한 적에게 역불급하여 오전 11시에는 포차와 더불어 미아리 고개로 철수하였다.
전황을 주시하고 있던 사령관은 지세적으로 불리한 창동선의 유지가 어려울 것으로 내다보고, 각 부대를 철수시켜 미아리 고개에서 극력 저지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각 부대를 담당한 연락장교로 하여금 '미아리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전달케 한 다음 오전 11시에 사령부를 149고지(창동 남쪽 2㎞) 남단으로 이동하였는데, 상황의 급변으로 명령을 받은 연락장교들은 이를 관계부대에 전달하지 못한 채 직접 사령관의 뒤를 따르게 되고, 독전대와 낙오자통제선에 배치되었던 헌병들도 흩어지고 말았다.
사령관은 사태의 급변에 따라 정오에는 지휘소를 미아리 고개로 옮기고, 수행한 장교들로서는 철수병력을 수용케하는 한편, 동 고개의 좌우측에 저지진지를 편성할 계획으로 지형정찰 중 103고지에서 이응준 소장을 만나게 되었다.
여기에서 양 지휘관은 3번 도로의 우측은 유재흥 준장이, 그 좌측은 이응준 소장이 각각 분담 지휘하기로 합의를 봄으로써 각 부대의 정면으로 철수한 병력을 수용하여 이곳을 방수하게 되었다.
제5연대의 상황 : 이날 아침 물러간 것으로 보았던 전차는 40여대로 증강되어 다시 창동선에 나타나 도로의 좌우측에 맹사를 가하면서 제16연대와의 간격을 뚫고 3도로를 따라 투입하기 시작하였다. 연대장 최창언 중령은 점차 육박하는 전차를 목도하고만 있을 수 없어서 이를 향하여 권총사격을 가하면서 '사격개시!'를 외쳤다.
순식간에 700여 개의 총구에서 철환를 날렸으나 전차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적은 아군에게 전차에 대적할 화기가 없음을 잘 알았던 탓인지 도로 좌우측에서 소화기 사격을 가하는 아 저지부대에 개의치 않은 듯 맹사를 가할 뿐 부대 전면을 통과하였다. 그리고 이보다 30여 분 뒤에는 10여 대의 사이드카와 기마대가 선도하는 보병의 대열이 진전으로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연대장은 또 한차례 권총을 발사하면서 사격명령을 내렸으나, 이때에는 이미 사격할 실탄이 없었던 터이라 연대의 방어진용은 적의 근접에 따라 무너지기 시작하고 이러한 상황은 연쇄적으로 파급되기에 이르렀다.
이때가 오후 1시였는데 대대장 차갑준 소령은 이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권총을 이마에 대고 자결하려고 하였으나, 연대장이 이를 제지하였으며, 흩어진 병력을 불암산 계곡에서 수습하여 태릉의 육군사관학교를 목표로 철수하였다.
제16연대의 상황 : 북한군의 전차 40대는 제3대대의 꼬리를 물고 오전 11시에 진전에 이르렀을 때, 김계원 중령이 지휘하는 105㎜ 곡사포의 포격으로 말미암아 그 대열에 균열이 생겼는데, 이때까지 모두 전차로만 보였던 대열 속에는 전차로 위장한 차량과 그에 탑승한 것으로 보이는 병원들이 아군의 포사격에 의하여 공중으로 비산하는 수라장을 이루었다.
북한군은 다시 물러서려는 기미를 보였으나 아군의 포격이 점차로 약해지는 것을 간파하였음인지 파괴된 차량들을 몰아제치고 창동으로 전진하기 시작하면서 포격을 가하였던 까닭에 연대는 분산하여 남쪽으로 철수하였고, 그 일부 병력은 유의준 중령의 지휘하에 3번 도로를 횡단하여 태릉지역으로 철수하였다.
제3연대의 상황 : 154고지에 진지를 편성한 제9중대장 이원규 대위는 오전 11시에 동 고지의 서단에서 민간인 복장을 한 수상한 자들을 적발하고 그들의 소지품을 조사하려 하자, 북한군은 사격을 가하며 도주하려 하기 때문에 곧 응사하여 그중 5명을 살상하고 신원을 확인한 바 북한군의 정찰대원임이 밝혀졌다.
그로부터 1시간이 지나 우인접의 제 16연대 지역의 쌍문현에서 총성이 메아리 치더니 잠시 뒤부터는 총성이 남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에서 밝혀둘 각 부대의 공통적인 문제점의 하나는, 장교에서 병에 이르기까지 원대의 편성요원이 아닌 집단이었이 때문에 얼굴도 생소한데다 서로가 이름도 모르는 실정이었기 때문에, 어느 병사가 전장을 이탈한다 하여도 확인할 길이 없었고 이를 제지하기도 어려운 지휘체제이었다. 이러한 관계로 제 16연대가 철수하는 것을 본 병사들은 하나, 둘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상하와 좌우관계가 생소한 급편부대의 약점을 그대로 노정하고 말았던 것이다.
제25연대의 상황 : 연대에서도 오전 11시에 북한군의 정찰대로 보이는 한 무리를 발견하고, 연대장은 이들에게 집중사격을 가하게 하였으나 이때 각개 병사들은 탄약이 이미 소진되거나 남은 것이 수발에 지나지 않은 까닭으로 효과적인 사격을 하지 못하였는데, 북한군이 곧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에 이렇다 할 성과나 손실없이 끝났다.
그런데 인접한 제 3연대의 철수를 보게 된 연대는 그대로 분산하여 일부는 미아리로, 나머지는 구파발쪽으로 철수하고 말았으니 탄약의 보급이 뒤따르지 않는 전황의 급전직하의 진상을 능히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제1연대의 상황 : 연대장 함준호 대령은 한태원 중령이 이끄는 제1대대를 71고지에 전개시켜 각개 병사의 산병호에 이르기까지 점검확인하면서 김황목 소령이 이끄는 제3대대(대대장 소령 김황목)가 내도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무렵 오봉산에 배치되었던 제3대대장 김황목 소령은 포성과 총성이 후방지역에서 들려왔고 연대본부와는 연락이 되지 않았던 까닭에 도봉산 줄기를 따라 남하중이었던 때인지라, 김무정 대위는 이를 찾지 못하고 오전 11시에 연대본부로 돌아왔다.
이때 창동지역에는 북한군의 포탄이 우주하기 시작하였고 제3대대의 철수가 시급하였던 까닭에 연대장은 그의 부대지휘를 부연대장 이희권 중령에게 위임한 다음 작전주임 송성삼 대위 , 통신장교 김무정 대위 그리고 호위헌병 1명을 대동하고 그의 지휘차로 우이동쪽으로 향하여 달렸다.
이들이 수유리 부근에 이르렀을 때 불의의 총성과 함께 철환이 차에 집중하기 시작하여 연대장은 운전병에게 차를 세우도록 명령하였으나 그 순간 운전병이 부상하여 차는 민가를 들이받고 급정거하였다.
이러한 일들이 순간적으로 발생한 일이었기 때문에 정신을 가다듬을 겨를도 없이 차가 급정거하는 충동으로 송성삼 대위는 언덕진 개울로 떨어지고, 김무정 대위와 운전병은 민가로 뛰어들어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부지하였으나, 호위헌병과 함준호 연대장은 북한군 정찰대의 총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전사하였다.
결과 및 영향
국군은 광파와 같이 밀어 닥치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하여 창동 - 미아리 등지에 저지선을 펴고 여기에서 남침을 극력 저지하려 하였으나, 북한군의 전차 앞에는 속수무책이 되어 개전 4일 만인 6월 28일에 수도 서울을 그들에게 넘기고 한강 선에서 다시 대진케 되었다.
초기 전투 북괴군의 공격요도
내촌, 태릉 전투
내촌-태릉 전투는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초기 육군사관학교장 이준식 준장이 이끄는 육군사관학교 및 생도대대와 배속된 전투경찰대대 등을 이끌고 6월 25일 13:00, 육군본부 명령에 따라 391번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내촌 부근의 감제고지에 배치하고 전투를 치러 제9연대와 더불어 불암산~태릉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미아리~릉 방어선의 우측 일각을 담당하며 치른 전투다.
내촌-태릉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 |||
날짜 | 1950년 6월 26일 ~ 6월 2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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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경기도 내촌, 태릉 | ||
결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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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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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과정
내촌면 내리의 전황
생도대대의 출동
내촌면 내리 부근은 포천과 기산리에서 퇴계원에 이르는 391번 도로상의 분기지점으로 만일에 이곳이 북한군 수중에 넘어가 북한군이 서울 동북쪽을 휩쓴다면 의정부의 보유가 아무런 뜻이 없는 까닭에 방어가 시급한 곳이었다.
채병덕 소장이 6월 25일 의정부 전황을 둘러보고 수도의 경비문제가 아주 위급한다고 판단하여 재경 각 군사학교의 기간병력을 집결시켜 수도경비를 충당할 예정으로 보병학교의 유해준 중령으로 하여금 보병학교 교도대와 육군사관학교 교도대및 생도대대를 통합하여 수도방어특별연대로 편성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아주 급박한 상황변화때문에 보병학교와 사관학교 교도대는 1사단에 배속하여 문산에 급파하였고, 생도대대는 7사단의 동측방을 방어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명령을 받은 이준식 교장은 사관생도를 소총수로 출동시키는 것에 대한 찹찹한 심정도 있었으나, 조암 중령을 대대장으로 임명하여 생도대대를 편성하였다.
편성을 마친 대대는 16:00를 기하여 출동하였고, 391번 도로와 326번 도로가 맞닿는 'Y'자형 교차로 남쪽고지(372고지)에 진지를 급편케 하였고, 이 지역은 서파와 송우리로 통하는 요지로서 제 7사단 작전지역의 동측 후방에 해당되는 곳이다.
내리 부근의 전황
06:00에 경찰대대가 현지에 도착하자 조암 중령이 이를 통합지휘하여 372고지 동북쪽의 330고지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양 대대는 함께 진지를 보강하면서 일부병력으로 정세를 탐색하였는데, 특히 제 1중대장 송인률 대위는 소대병력을 자신이 직접 지휘하여 내리 서쪽의 325번 도로상에 대 전차용 호를 파고, 대인 지뢰를 매설하는 등 방어작업을 실시하였으나 15:00이 지나도록 이 지역에는 아무런 적 움직임이 없었다.
이윽고 16:00를 기하여 진목리의 경찰분소에서 대규모의 북한군이 국사봉(547고지) 남쪽으로 움직인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들은 북한군 제3사단 9연대 소속으로 대좌 김만익이 지휘하여 사단의 동 측방에 침공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때에 생도대대는 동북쪽의 전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330고지를 점령한 적이 그 여세를 몰아 대대 정면으로 공격해왔다. 이리하여 그 주력이 82mm 박격포와 45mm 반전차포 및 기관총 등의 엄호하에 내리 서남쪽의 개활지를 횡단하려 하자 대대의 전 화력이 동시집중사격을 가하였는데 특히 진지 앞 300m 거리를 두고 최후 저지사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쉽사리 물러서지 않고 내리 서쪽의 312고지 부근에서 분산병력을 취합하면서 포격을 증강하여 122mm 유탄포를 비롯한 120mm 박격포와 82mm 박격포 등으로 대대를 공격해왔다. 그런데 이때 틈을 타서 북한군은 새로운 부대를 투입하여 대대의 좌우 양 측방으로 공격해왔다.
이리하여 동측의 제 3중대와 서측의 1중대가 무너지게 되었고, 가까운 거리에서 수류탄 투하가 오고가며 약 30분 동안 격전이 거듭되는 사이 백병전이 전개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때 연락장교 김홍규 대위가 학교장 명령을 가져왔는데 이는 즉시 철수하여 학교본부로 집결하라는 명령이었다. 이 철수이유는 같은 시간 의정부 방어선이 무너진 것 때문이었다.
태릉 저지선 형성
사관학교장 이준식 준장은 전선부대들이 철수하는 것으로 보아 전황이 불리함을 직각하고, 내리(포천 남쪽 13km)로 추진한 선도대대대를 6월 26일 19:00를 기하여 철수시켜, 이보다 먼저 만세교리(포천 북쪽 8km)에서 철수한 제9연대 제1대대와 같이 불암산 남동쪽 산기슭의 강릉(태릉 북쪽 1km) 일대에 전개시켜 사관학교 방어를 위한 진지를 편성하여 퇴계원 쪽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에 대비케 하였다.
이에 앞서 이 준장은 6월 25일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김응용 소령이 이끄는 교도대대를 문산 방면으로 전진시키고, 생도대대를 내리의 372고지에 전개시켰던 것이다.
당시 대대장 조암 중령은 내리에서 철수한 생도대대를 재편하고 외출로부터 늦게 복귀한 생도로써 전력을 보강한 다음 6월 27일 08.00에 전술훈련장으로 이용한 A고지(일명 92고지)-F고지 간에 부대를 전개시키고 전투태세를 갖추게 하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생도대대는 6월 26일 내리로 출전하였는데, 이곳에서 남하하는 북한군 보병을 격퇴시키고 6월 26일 19:00, 교장의 철수명령에 따라 같은날 23:00, 학교본부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척후임무를 띠고 있던 생도와 떨어진 곳에 배치되었던 일부 생도는 명령의 전달이 늦어 6월 27일 아침에 복귀하기도 하였는데, 주로 소대장, 분대장, 반장 등 직책을 수행하던 제1기생은 철수명령이 하달되자, 분대원이며 그들의 후배인 제2기생을 먼저 철수케하고 이들의 철수를 엄호하여 선배로서의 긍지를 발휘한 까닭에 제2기생은 2명의 손실만을 내었으나, 제1기생은 27명의 손실을 보았다.
이때의 편성을 보면, 대대장은 조암 중령, 부대장은 손관도 소령, 제1중대장은 송인률 대위, 제2중대장은 박응규 소령, 제3중대장은 이원엽 대위, 중화기 중대장은 박정서 대위였고, 참모로서는 정보, 작전주임이 이승우 대위, 군수주임 최영규 소령, 인사주임 최재명 대위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생도들은 일부 소대장직을 제외하고는 전원 병의 신분으로 출전하였던 것이다.
당시 제9연대 1대대는 6월 26일 16:00에 육군사관학교로 철수하였는데, 만세교리 전투에서 40명을 상실하고 600명이 이곳에서 집결하였다. 대대장 유환박 소령은 전 제7사단장이며, 육사 교장인 이준식 준장에게 이곳으로 철수하게 된 경위를 보고하고 학교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마친 다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일 23:00 교장명령에 따라 학교에서 제공하는 차량으로 부대를 강릉으로 이동시켜 210고지를 점령하고 날이 밝은 다음 진지를 편성하였다. 연대장 윤춘근 중령은 이날 09:00 교장 이준식 준장의 안내로 대대를 찾게 되었다.
연대장은 동일 02:00에 측근의 소수병력을 지휘하여 육군사관학교로 철수한 것인데, 의정부 지구 전투사령관의 『지휘관은 사령부로 집결하라.』는 연락장교의 전달에 따라 08:00에 개최된 의정부지구 전투사령부 작전회의에 참가하였다.
당시의 연대장 윤춘근 중령은 그때를 회고하기를 『개전 이래 처음으로 유재흥 준장, 함준호 대령 그리고 제2사단의 연대장들과 자리를 같이 하게 되어, 북한군이 전면 남침하였음을 알았다.
이 회의는 창동 지역의 방어명령의 하달이었으나, 나의 제9연대(-2)는 육사교장 이준식 준장의 작전지휘하에서 태릉 지역 방어에 임하라는 것이었기 때문에 곧 태릉으로 돌아갔는데, 그로부터 얼마 뒤에 함준호 대령의 전사통보를 받았다.』라고 하였다.
태릉 저지선의 붕괴
이준식 준장은 생도대대와 제 9연대로서 이 지역의 방어에 임하던 바 6월 27일 석양에 적 기마대 수명이 퇴계원 삼거리를 배회하고 돌아갔을 뿐 진전에서의 접촉은 없었다. 창동 전선에서 최창언 중령이 이끄는 제5연대와 유의준 중령이 이끄는 제16연대 1대대의 300여명이 이날 19:00에 사관학교 부근으로 철수하였으나, 이들은 동일 23:00 학교지역을 떠나고 말았다.
이때에 정면에 투입된 것으로 알려진 북한군은 북한군 제3사단으로서 서울 침공을 목표로 의정부가도의 제4사단과 선두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이나 이들의 진출속도는 더뎠다. 그 까닭은 이들 정면에는 기계화부대가 기동할 양호한 도로망이 없었던 것이 그 첫째 이유이고, 내리 전투에서 아군 생도대대로부터 받은 피해가 컸던 것이 둘째 이유로 들 수 있는데, 병력이나 장비면에서 월등하게 우세한 이들도 전차없는 보병만의 전투에 있어서는 결코 아군보다도 우세하였다고는 보기 어려운 단면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들은 내리 전투이래 아무런 저항도 받음이 없이 6월 28일에는 서울 동북교의 중랑 천변까지 진출하였던 것이며, 이날 05:00부터 태릉 이역에 포격을 가하면서 08:00에는 1개 소대 병력으로 정찰을 시도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이무렵 교장 이준식 준장은 경원선을 따라 대부대가 행군하고 있음을 관망하게 되고, 이를 쌍안경으로 확인한즉 이들은 북상하는 국군이 아니라 남하하고 있는 북한군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준장은 부교장 이한림과 제9연대장 윤춘근 중령등 3자회의를 갖고 앞으로의 대책을 협의 하였는데, 여기에서 결의된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3자 회의 |
『①나는 휘하부대의 손실을 경감하고 재건을 도모하기 위하여 우선 한강 남안을 목표로 현 전선을 이탈하려 한다. ②철수의 순서는 생도대대, 제9연대로 하되, 제9연대는 현위치에서 생도대대의 철수를 엄호하라. 이준식 육군사관학교장 준장 |
이 당시 육군본대와는 6월 27일 12:00부터 통신이 두절되고, 학교본부는 총참모장의 명령에 따라 다른 재경부대와 같이 시흥보병학교로 철수한 뒤였으므로 전투부대만이 남아 있었으며 병력운송용 차량은 전혀 없었다.
이때 생도대대는 A고지-F고지에 배치된 생도대대가 철수명령을 수령한 것은 28일 10:00였으나 최전방인 F고지에 비치된 제2중대에는 12:00에 전달되었으며 각개 생도들에게까지는 14:00가 지나서였다.
그런 까닭으로 먼저 전달을 받은 중대와 늦게 받은 중대사이에는 철수개시에 많은 격차를 보였으며, 생도대대가 철수할 무렵부터는 북한군의 포격이 치성한 탓으로 부대행동을 취할 겨를도 없었으려니와 철수경로나 집결지도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 교정으로 항하여 각개 약진하였다.
이때 학교본부의 강당과 기타 건물들은 이미 파괴되고, 연병장 일대에도 적탄이 무수히 집중하고 있었으므로 시간을 지체할 상황이 되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일차적으로 집결한 150명은 부대대장 손관도 소령 지휘하에 광장동으로 철수하여 먼저 철수한 교장과 본부요원을 만나게 되었다.
손관도 소령이 병력을 지회하여 망우리 고개로 올라갈 때에 이의 뒤를 따랐던 대대장 조암 중령과 이승우 대위, 최영규 소령, 최재명 대위 등 3명의 참모요원이 동승한 지프차가 앞질러 고개로 올라갔고, 손 소령이 지휘한 주력은 용마봉의 능선을 따라 광장동으로 철수하였는데, 대대장이 탄 지프차는 고개의 중턱에서 숲속에 숨어있던 북한군 정찰병의 사격을 받게 되었다.
이에 당황한 대대장 조암 중령은 반사적으로 차에서 뛰어내리고, 차에 탔던 참모요원은 차를 급히 몰아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나, 조암 중령의 그 뒤 행방은 묘연하였다.
이리하여 먼저 철수한 생도들은 광장동에서 이날 17:00까지 한강을 도강할 수 있었으나, 늦게 철수한 생도들은 교문에서 적을 만나 사격을 받았고, 봉화산(학교 서남쪽 1km)에서는 기관총 사격으로 위협하였던 까닭에 다시 분산되어 서울로 또는 광장동으로 철수하여 본대에 합세하기도 하였다.
대대는 여기에서 100명의 손실을 보았는데, 제1기생 한정석 생도 등 11명의 사망을 확인하였을 뿐, 제2기생은 입교한지 불과 3주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누가, 언제, 어디서 전사 또는 실종하였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또한 철수명령을 받지 못한 생도들도 상당수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중 생도 및 병 20명은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불암산으로 잠입하여 석천암, 불암사 등을 근거지로 한 유격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불암사 주지 윤용문과 불암동의 주민 박태흥, 임용문 등은 이들에게 은신처와 식사, 정보 등을 제공하여 적극 지원하고, 이 부대를 「호랑이 부대」라고 호칭하였다는 것이다,
이 「호랑이 부대」는 주지와 주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아, 그들의 퇴계원 보급소-창동수송대-육군사관학교에 설치한 간이훈련소등을 습격하여 적의 후방기능을 마비시키고 주민을 보호하면서 국군의 북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퇴각길에 있었던 북한군은 9월 25일 육군사관학교 기물과 생도들이 사용하였던 매트리스 등을 주민 100명 동원하여 우마차에 싣고 북으로 옮겨갔다는 사실을 주민의 제보로 알게 되었다.
이때 남은 대원은 9명이였는데, 기물을 빼앗기는 한이 있어도 주민만은 북으로 보낼 수 없다는 결의로써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내각리 산속에 매복하여 접근하는 그들에게 일제사격을 가하여 주민들을 도주시키는데 성공하였으나, 이 「불암산 호랑이」는 햇빛을 보지 못하고 초야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곳 주민들 사이에는 신화와 같이 구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유일하게 생환한 김원기 생도에 의해서 밝혀진 유격대원의 명단이 밝혀진 바 있다.
당시 제9연대 1대대는제9연대장 윤춘근 중령이 지휘하는 제1대대는 생도대대가 철수한 것을 확인하고 14:00부터 철수하였다. 이때에 대대장 유 소령은 제1중대를 엄호부대로 하여 현 위치에서 대대의 철수를 엄호케 하였는데, 사관학교 지역에 적 포격이 치성한 까닭으로 철수로를 E고지-391번도로-망우리-용마봉-광장동으로 예정하였다.
E고지에서는 윤병준 중위가 이끄는 제2중대로 하여금 제 1중대의 철수를 엄호하는 동시에 최춘삼 중위가 이끄는 제3중대로서는 구릉산(망우리 북쪽 1.5km)을 확보케 하여 질서있는 철수를 하게 하였다.
철수하는 도중 분, 소대규모의 적과 수차례 조우하였으나 그때마다 그들이 퇴각하였기 때문에 교전상황은 없었다. 그러나 E고지를 횡단할 때에 북한군 포탄으로 장원순, 금강석 양 중위를 포함하여 5명의 전사자와 20명의 사상자를 내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대대는 17:00에 광장동으로 철수완료하고, 생도대대의 도강을 엄호한 다음, 3척의 나룻배로 이날 22:00까지 한강을 동강 완료하였다.
이때 제5연대의 연대장 최창언 중령은 6월 27일 19:00에 그가 지휘한 200명과 제16연대 1대대장 유의준 중령이 이끄는 100명 등 도합 300명을 사관하교 부근의 고아원에 수용시키고 사관학교에서 제공한 주먹밥으로 식사를 하게 하였으나 이들 대부분은 식사가 끝난 직후 또는 주먹밥을 손에 든 채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이무렵 폭우가 쏟아지고 서울 상공에는 예광탄이 수없이 오르고 있음을 볼 수 있었는데, 최창언 중령은『이날 창동선에서의 적의 위세로 보아 지금쯤은 서울에 침습하였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차갑준 소령과 유의준 중령, 작전장교 현계용 중위 등과 앞으로의 대책을 협의하였으나, 묘안을 찾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교장 이준식 준장의 지시를 받기 위하여 동 준장을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고, 그와 상의한 결과 포위망 속에 있을지 모를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데 의견의 합치를 보았다.
그러나 다음 집결지에 있어서는 최 중령과 차 소령의『한강 남쪽으로 철수하여 전세를 관망한 다음 대처하도록 하자.』고 한데 반하여 유 중령은『서울로 가서 본대와 합세하여 싸우는 것이 옳다.』는 엇갈린 주장을 하여 결국 유 중령은 서울로 떠났고, 최 중령은 자고 있는 병사들을 깨워서 이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새끼줄로 각장의 허리를 연결한 다음 23:00 광장동의 향하여 출발하였다.
이리하여 제5연대(-)는 6월 28일 05:00 광장동에 도착하였으나 광진교는 이미 폭파된 뒤였다. 최 중령은 유 중령의 판단이 옳았음을 깨닫고 강변을 따라 지금의 경마장 부근까지 갔을 때 서울로 간다던 유 중령이 뛰어 오면서『서울은 완전 점령당하였다.』고 하였던 까닭에 다시 광장동으로 돌아갔다.
이때가 08:00였는데 거기에는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3척의 배를 놓고 서로 먼저 타려고 아우성을 이루고 있는 현상이었다. 최 중령은 피난민들에게『군인이 먼저 건너야 반격을 할 수 있지 않느냐?』고 타일러, 이 배로써 병력을 다 이동시키고, 피난민까지도 군인 통제하에서 도강시킨 다음 이날 석양에 이준식 준장이 지휘하는 생도대대에 배를 인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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