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의 봄 18 : 현충일의 의미 5 (6.25 전쟁, 한국전쟁 4)
북악 둘레길에서 바라본 성북동 전경
개전초~낙동강 전투 이전 주요 전투 1
개천 초부터 낙동강 방어 전투까지 치루어진 주요 전투를 전투목록에 의해 살펴보기로 한다. 전쟁사가 모두 그러하듯이 기록하는 자에 따라 부분적으로 승리는 과장되고 실패는 삭제된 부분이 많다. 그래서 초전에 국군이 일방적으로 조기에 무너진 이유와 원인을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본 기록은 주로 위키 백과사전에서 인용하였고 기타 자료도 참고로 하였다. 따라서 미군 및 연합군, 그리고 북한군의 전투 일지와 비교하여 정확하게 기술된 내용이 아니므로 부분적으로 허위.과장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으므로 그런 점으로 고려하여 살펴보시기 바란다.
옹진반도 전투
옹진반도 전투는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독립 제 17연대(연대장 대령 백인엽)가 전차 1개 중대로 증강된 북한군 제 6사단 14연대와 38경비 제 3여단과 맞서 치른 방어전투이다.
독립 제 17연대는 45km에 달하는 광정면에 2개 대대를 배치하고 1개 대대를 예비로 한 전형적인 방어형태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조선인민군은 6월 25일 04:00부터 30분 동안 전에 없던 치열한 공격준비사격을 아군 방어지대에 집중한 후, 기마대를 앞세운 조선인민군은 태탄군~옹진군 접근로를 따라 공격하고, 전차를 선두로 한 주공은 취야~양원~강령 축선을 따라 공격하였다.
조선인민군의 기습으로 악전고투하던 아군은 좌전방의 제 1대대장이 전사한 지 얼마 후에 옹진지구의 주저항선이 돌파되었다. 이에 아군은 지체하지 않고 예비대를 투입 역습에 성공하였으나 우전방부대 또한 철수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렇듯 승세를 이용한 북한군은 아군이 재편성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고 양원과 강령을 점령하였다. 이렇게 하여 아군의 작전지역은 동서로 양분되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옹진반도를 지탱할 수 없게 된 독립 제 17연대는 연대본부와 직할대원부대 포함) 및 제 3대대는 지연전을 펼치면서 부포항으로 철수하여 6월 26일 오전에 해군함정편으로 해상철수를 개시, 인천으로 이동하였다.
옹진반도에서 완강한 저항을 계속하던 제2대대는 역습에 성공하였지만 전황이 급변함에 따라 제1대대와 직할대 및 지원부대의 낙오병력을 수습하면서 사곶항으로 철수하여 민간 선박을 이용, 군산으로 이동하였다.
옹진반도 전투
작전지역의 특징
북위 38도 분계선 서쪽 끝에 위치한 옹진반도는 멸악산맥의 여맥으로 이어진 반도이다. 이 지역은 동·서·남쪽의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38선과 해주만으로 육로가 차단되어 있었다.
지역 중앙부에 국사봉이 우뚝 솟아 그 지맥이 사방으로 뻗어 지역 내를 감제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두락산과 까치산(일명 작오산) 주변에서는 1949년에 북한군의 38도선 침범으로 비롯된 치열한 전투가 세 차례나 반복되기도 했었다.
지역 내의 취야와 태탄에는 북한군의 보급시설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특히 취야는 강령~양원 도로의 분기점인 동시에 해주~옹진철도가 통과하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옹진반도의 남동쪽 끝에 있는 부포항은 아군의 유일한 후방지원의 관문이었다. 그러나 부포항은 간만의 차가 심하여 대형 선박은 하루에 두 번밖에 접안할 수 없었다.
조선인민군 상황
조선인민군은 1947년 7월 이후부터 옹진반도 서쪽 끝에서 배천까지를 38경비 제 3여단(여단장 소장 최현)이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 여단은 4개 대대를 38도선에 배치하고 1개 대대를 여단사령부가 위치한 죽천에 집결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 여단은 6월 21일에 3개 대대를 옥동 부근으로 이동시켰다. 다음날 밤에는 제 203전차연대로부터 1개 전차중대를 배속 받은 북한군 제 6사단 14연대가 취야로 이동하여 공격준비를 갖추었다.
이보다 앞서 6월 18일에는 38선에 전개한 각 사단과 38경비여단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북한군 총참모장 정찰명령 제1호가 하달되었다.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정찰명령 제 1호 |
수신 : 38경비 제 3여단 참모장 |
제목 :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의 정찰명령 제 1호(1950. 6. 18) |
1.증강된 적 제 17연대는 옹진반도 일대에서 방어진지를 점령하고 있다. 또한 연안방면에는 제 12연대 예하 1개 대대가 방어하고 있으며, 방어지역 전단은 38도선상의 고지군을 연결한 선으로 형성되어 있다. 요새화된 방어진지의 위치와 주저항선의 위치는 이미 알려진 바와 같다. 2. 공격준비기간과 포병의 공격준비사격이 실시되는 동안 관측활동을 강화하여 다음 사항들을 탐지하라. 3. 일일 정보요약 보고는 매일 17:00까지 전보, 무전 또는 전화로 최고사령부 정찰국 에 보고하라. 또한 각종 보고서, 노획문서 및 포로 심문 보고서 등은 매일 08:00와 20:00에 우편으로 송달되어야 한다. 인민군 총참모장 |
독립 제17연대의 방어태세
육군본부는 1949년에 발생했던 옹진반도의 분쟁 상황과 지역적 특징을 감안하여 장차 예상되는 국부적 분쟁과 전면적 전쟁에 대처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방어지침을 시달하였다.
옹진반도의 작전형태별 방어지침 |
-제 1호 작전 : 38도선상에서 국지적인 소규모 분쟁이 발생되었을 경우에는 적에게 최대한의 손실을 내게 하면서 분계선을 고수한다. -제 2호 작전 : 적이 국부적으로 38도선 이남으로 침범할 경우에는 적에게 최대한의 타격을 가하면서 증원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주저항선을 지탱한다. |
이에 따라 제 17연대는 1950년 2월 ~ 4월간에 지역 내 주민의 적극적인 협조 하에 연인원 6만여 명을 동원하여 주진지의 유개화 공사를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지형적인 특성 때문에 종심 깊은 방어진지의 편성은 불가능하였다. 즉 38도선 남쪽의 감제고지군을 따라 구축된 방어선이 주저항선인 동시에 최후 저항선이었다.
또한 제 7야전포병대대와 공병대, 병참보급소, 야전병원, 헌병대 등이 배속되어 있었으며, 냉정리에는 경비행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독립 제 17연대의 배치상황 |
연대본부 : 탄지말(옹진 북쪽 2km 지점) 좌전방, 제 1대대 : 두락산~호동 간 13.5km |
이처럼 제 17연대의 방어배치는 북한군의 전면적인 남침이 없을 것이라는 전제 아래 국부적 분쟁에 대비, 태탄~옹진 접근로 방어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대국적 견지에서 볼 때 전술적으로 중요한 취야~강령, 양원~부포 축선의 방어태세는 약화되어 북한군의 일격으로 방어지역이 양단될 취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6월 24일 제 17연대는 육군본부로부터 휴가, 외출을 실시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이를 이행하지 않고 오히려 경계태세를 강화시켰다. 이는 곧 2~3일 전부터 심상치 않았던 적정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또한 연대장은 제 3대대에 105mm 곡사포 1개 중대와 57mm 대전차포 1개 소대를 24일부로 배속하고 예하 각급 부대와 옹진경찰서에 출동태세를 갖추고 대기하도록 지시하였다.
옹진지구 전투
6월 24일 방어태세 강화에 여념이 없던 아군 장병들은 이날따라 한밤중까지 계속된 조선인민군의 대남방송에 귀를 막으면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한국 전쟁이 시작된 1950년 6월 25일 옹진반도 일원에는 이른 아침부터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는데, 04:00쯤 돌연 붉은 신호탄이 새벽하늘에 포물선을 그리면서 피어올랐다.
이를 신호로 조선인민군은 38선 북쪽에서 각종 포의 포문을 열고 아군 방어지역을 강타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분명히 조선인민군의 공격준비사격이었고 30분 후에는 사격이 연신되면서 약 1개 대대 규모로 추산되는 북한군이 제1대대의 주저항선으로 밀어닥쳤다.
이때 최전방에 배치된 아군 2개 중대는 백병전을 치르면서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워낙 우세한 조선인민군에게 압도당한 데다가 기선을 장악한 북한군이 후속부대를 계속 투입하였으므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인민군의 공격준비사격으로 모든 유선망이 절단되고 무선마저 두절된 상태에서 철수병력으로부터 상황을 확인한 제 1대대장은 즉시 예비대를 투입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대대장 김희태 소령은 포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 무렵 우전방의 제 3대대 또한 주저항선에서 철수를 개시하여 치마산 ~ 석계리 선에서 방어진지를 급편중에 있어 강령과 양원이 위협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대장은 하나밖에 없는 연대 예비대로 하여금 좌전방대대의 주저항선을 회복하도록 조치하였다.
연대장의 역습명령을 받은 제 2대대장(소령 송호림)은 말제 일대에 2개 중대를 전개하여 상황추이를 살피던 중 전술행군대형으로 유유히 남하하는 북한군 1개 대대 규모를 기습사격으로 격멸하고 공격을 개시하여 제1대대의 주저항선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이때 연대로부터 철수명령이 하달되었다.
옹진반도의 조선인민군 상황에 대해 알 길이 없던 제 2대대장은 철수를 완강하게 거부하고 방어태세로 전환하였으나 연대본부와 지원부대들이 강령으로 철수한 상황을 확인한 직후 제 1대대를 통합 지휘하여 냉정리 부근의 불당산으로 철수하였다. 이때에는 이미 양원과 강령이 북한군의 수중으로 떨어진 후여서 대대장은 부포로의 이동을 포기하고 사곶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한편 우일선의 제 3대대 지역에서는 조선인민군의 주공인 제 14연대가 05:30까지 포사격만 계속할 뿐 공격제대는 기동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군 포병은 북한군의 공격준비사격이 개시된 지 1시간이 지난 후에야 응사하기 시작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는 미 고문관이 105mm 포의 사격을 통제함으로써 일어난 것이었다.
이윽고 조선인민군은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주저항선을 돌파하였다. 대대장(소령 오익경)은 철석같이 믿고 있던 57mm 대전차포가 북한군 전차를 파괴시키지 못하자 당혹감에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연대의 증원이 불가능함을 직시하고 치마산~석계리로 철수, 제 9·10중대로 지연진지를 급편하게 되었다.
치마산 기슭에 배치된 제 10중대는 병사들이 전차 출현에 당황하여 조급하게 선제사격을 가한 탓으로 조선인민군의 집중 포화를 받게 되어 강령으로 분산 철수하고 말았다.
반면 석계리의 제 9중대는 저수지 옆에 있는 애로에 종심 깊은 저지진지를 편성하였다. 얼마 후 북한군의 전차장들이 상반신을 노출시키고, 후속하는 보병부대들은 전술행군대형을 유지한 채 아군의 살상지대로 들어섰다. 제 9중대 장병들은 북한군을 최대한으로 끌어들여 기습사격으로 격멸시켰다.
그러나 초전의 패전을 설욕한 아군 장병들의 벅찬 환호도 잠시일 뿐 전열을 가다듬은 북한군의 반격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되고,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되자 제 9중대는 강령으로 분산 철수하였다.
연대본부와 직할대는 주저항선이 돌파될 무렵에 이미 강령을 경유 부포항으로 철수하고 있었다. 북한군이 강령을 점령한 후 남진을 계속하고 있을 때 강령강 제방에 배치된 대전차포중대는 근거리 사격을 퍼부어 북한군 전차 3대와 장갑차 2대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한편 강령에서 낙오병을 수습한 제 3대대는 죽교리~중기동 선에 저지진지를 편성하였으며, 공병대는 북한군 전차가 우회하기 어려운 조촌교를 폭파시켰다. 그런데 이처럼 아군이 지연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 북한군은 추격하지 않았다. 후에 확인된 바에 의하면 이때 북한군 제 14연대는 강령을 점령한 후 38경비 제 3여단에 작전지역을 인계하고 25일 오후에 해주를 경유, 영정포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날(25일) 23:30에 해군 LST-801함이 부포항에 접안하였다. 독립 제 17연대는 제 3대대와 지원부대를 축차적으로 철수, 승선시켰으나 탑재 불가능한 모든 장비와 물자는 소각하거나 바다 속에 밀어 넣었다. 이때 105mm 곡사포 1문만은 남겨놓았다.
연대장은 북한군이 부포항 부근까지 접근하였을 때 병력 승선이 완료된 것을 확인하고 LST-801함을 출항시키고 자신은 제 7야전포병대대장과 더불어 북한군에게 포격을 계속하다가 조각배를 타고 부포항을 떠났다.
그 후 연대장과 포병대대장은 연평도에서 해군함정을 만나 6월 28일 아침에는 인천에 상륙하여 수원으로 이동하였으며, 육군본부 명령에 따라 군예비가 된 독립 17연대는 대전 선화국민학교로 이동하여 재편성에 착수하였다.
한편 제 2대대는 낙오병력을 수습하여 400여 명의 병력으로 불당산에서 재편성하였으나, 옹진에 이미 북한군의 선견대가 진출한 상황을 확인한 후 사곶항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대대장이 연근산 부근에 이르렀을 때 연대 정훈관인 한서한 중위로부터 “제1대대를 통합 지휘하여 사곶항으로 철수하라”는 연대장의 철수명령을 받았다.
연근산에서 다시 300여 명의 낙오병력을 수습한 제 2대대는 25일 저녁에 철수를 개시하여 2시간 후에 사곶항에 도착하였다. 이때에는 낙오병이 계속 몰려들어 1,300여 명이 되었고 경찰과 일반주민을 합쳐 해상철수 대상인원이 2,000여 명이나 되었으나 선박을 구할 수가 없었다.
북한군의 추격이 예상되는 그야말로 진퇴유곡의 긴박한 상황 하에서 동분서주하던 제 2대대장은 사곶항 맞은편에 있는 용호도의 지서주임 김두의 경사의 주선으로 대성호(20톤급 기관선, 정원 90명)를 지원받아 다음날 아침까지 군인과 경찰을 실어 나르고 민간인 수송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바로 이때 사곶항 부근에 북한군의 박격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하는 수 없이 수송작전을 중단하게 되었다.
용호도에서 다시 20톤급 동력선을 비롯한 대형 화물선 6척을 획득한 제 2대대는 연평도를 경유 29일에는 군산항에 상륙하여 대전에서 본대와 합류하게 되었다.
옹진지구 전투의 결과
제 17연대는 1개 대대규모의 병력을 6월 28일 대전 선화초등학교에 집결해 정부(충청남도 도청소재)의 경호임무를 수행하는 한편, 29일 ~ 30일에는 신병 5,000명을 모집하여 흩어진 부대의 재건을 도모하기에 이르렀으나, 이 무렵에 제 1,2대대의 병력이 집결완료됨으로써 6월 30일 연대의 총 병력은 2,180명으로 81%선을 유지하고, 장비는 전사자의 장비까지 수집하였기 때문에 큰 부족함이 없었다.
그 후 전세는 계속 악화되어 7월 3일에는 한강 저지선이 무너지자, 연대는 신임 참모총장 정일권 장군의 명을 받아 1개 대대는 송호림 소령 지휘하에 정부를 계속 경호케 하고, 나머지 부대로 7월 4일 서정리로 진출하여 저지책을 강구하도록 하였다.
김포반도 전투
김포 반도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 |||
날짜 | 1950년 6월 25일 ~ 6월 2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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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경기도 김포 | ||
결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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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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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반도 전투는 한국 전쟁 발발 초기인 1950년 6월 25일에 백선엽 대령이 이끄는 제1사단이 임진강과 합류되는 한강 북쪽의 개성에서 한강을 건너 김포 반도로 철수하게 됨에 따라 북한군이 이를 따라 이 반도에 상륙함으로써 한강 남안에 예기치 않았던 충돌을 보게 되는 과정에서 국군은 김포지구전투사령부를 급편하여 이들 북한군과 6월 28일까지 벌인 지연전이다.
6월 29일부터는 김포 비행장과 오류동 부근에서 촌보를 다투는 공방 혈전을 전개한 끝에 7월 3일에 한강 방어선의 와해로 말미암아 오류동선에서 수원으로 철수하게 된다.
한강 북안의 개성에서 38도 분계선의 경계를 맡고 있던 전성호 대령이 이끄는 제1사단 12연대는 6월 25일 북한군의 급작스런 침공으로 말미암아 그 날을 미처 넘기지 못한 채 개성 정면의 제2대대와 예성강 서쪽 정안의 제3대대가 남쪽으로 밀려 한강 북안에 몰리게 됨으로써 그곳에서 배를 얻어 남으로만 선수를 지향하게 되었다.
김포 반도 대안에 북한군이 나타나게 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 반도 일원의 국군 부대의 현황을 살펴보면 대체로 이러하다.
즉, 김포 비행장을 중심으로 육군 정보학교인 계인주 대령이 이끄는 남산학교와 엄홍섭 중령이 이끄는 공병학교, 그리고 공군의 항공기지사령부와 공군사관학교 및, 보급창과 공군 병원 등의 부대가 그 주위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보급기지인 부평에는 윤태인 중령이 이끄는 육군의 제1공병단과 김창배 소령이 이끄는 1기병대대 그리고 심언봉 대령이 이끄는 병기학교와 원태섭 대령이 이끄는 경리학교 및 이달고 소령이 이끄는 제1육군병원 등이 위치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자체경계 능력조차 없는 교육기관이거나 지원 부대이므로 이들 부대로써 조직적인 지역방어란 기대할 수도 없는 실정이었는데, 그나마 이 부대들이 김포 비행장과 부평에 편성되어서 비행장으로부터 서북쪽 30㎞, 위도 상으로 의정부 - 봉일천선에 연하는 김포 반도 북단지역에는 단 한사람의 경계 병력도 배치되어 있지 않은, 그야말로 공백 상태에 있었다.
작전 계획
당시 서부 전선의 제1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육군본부가 38도 분계선 방어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두고 있지 않았던 만큼, 개성 정면에 대하여서는 '적의 전면 공방시는 해 지역을 철수하여 문산 부근에 집결한 다음, 임진강 남안에서 적을 격위한다.'는 자체방어 개념을 가지고 임진강선의 강화에 주력하고 있었다.
따라서 동 사단의 장병들은 김포 반도가 분명히 사단의 후방지역이기는 하였으나 거기에 대한 방어책임은 누구에게 귀착되는지도 확실히 가려지지 않은 채, 전연 별개의 피안으로만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당초의 이 같은 사단의 계획과는 달리 6월 25일 낮에 미처 문산으로 갈 시간을 얻지 못한 전성호 대령이 이끄는 제12연대 2대대는 김포 반도로 철수하게 되고, 3대대는 강화만을 헤매게 되고 말았는데, 이 결과 동 연대의 병력 대부분을 수용하지 못한 문산 방어선에서는 그 방어에 커다란 차질을 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김포반도에 상륙한 병력 역시 사전에 명확한 행동지침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매우 당혹한 상태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육군 본부는 비로소 이 김포 반도가 적의 공격로로서 개방되어있음을 깨닫고 그 대응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여기에의 위협을 대수롭지 않게 판단한 듯, 당면한 적의 공격역량이나 아군의 방어능력을 비교하거나 방어계획을 구체적으로 검토할 겨를도 없이 김포 비행장 부근에 위치한 남산 학교를 기간으로 김포지구전투사령부를 급편하여, 김포 일원의 각급부대를 통합, 김포반도로 상륙하는 적을 저지하도록 하는 편법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6월 26일 아침에 남산학교장 계인주 대령이 김포지구전투사령관으로써 김포방어의 책임을 맡게 되었는 바, 그는 즉시 학교의 명 참모를 동 사령부의 참모로 기능을 전환토록 하고, 지휘소를 김포읍의 김포경찰서로 추진하여 김포의 모든 육군부대를 통합지휘하게 되었는데, 이날 저녁까지 동 사령부의 장악하에 들게 된 부대는 다음과 같다.
김포반도 사령부 장악 부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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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의 1차 서울 포위 계획
전투 과정
6월 25일
이날 정오에 북한군의 YAK기가 김포 비행장을 폭격하여 연료고가 화염에 쌓이기도 하였는데, 이때 비행장 부근에 위치한 공군 사관학교와 항공기지 사령부 및 보급창과 헌병대등은 사관학교장 최용덕 준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김포 경비사령부를 독자로 편성하여 육군부대와의 적정수집에 대한 정보교환 및 협력을 목적으로 18:00에 사령부와 2개 중대를 김포읍으로 추진한 다음, 병력을 읍 북쪽의 김포 - 통진도로 길목인 44고지 일대에 배치하였으나, 적정을 탐지하지 못한 채 긴장된 밤을 새우게 되었다.
한편 육군부대인 남산학교는 교장 계인주 대령이 보병학교에 교육 파견 중이었으므로 부교장 최복주 중령의 지휘아래 기간요원 40여명으로써 개화산(130고지: 비행장 북쪽 2㎞)을 점령하여 지역경계에 임하였다.
공병학교는 그 일부가 남산학교 기간요원과 행동을 같이 하는 가운데 주력은 15:00를 전후하여 남산 장충단공원으로 이동하여 전선지원 태세에 들어갔다.
▲ 김포지구 전투사령부의 배치 및 북한군 제14연대의 도하상황
6월 26일
서부전선이 임진강 남안선에서 방어태세를 갗추고 다음 날 아침을 맞게 되자, 북한군의 임진강 도하 문제가 국군 전선 유지의 관건으로 부각되었다. 따라서 김포반도에서의 북한군의 상륙 역시 주지의 사실로 된 만큼 육본의 작전 담당자들도 이제 이 김포 반도로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용산의 육본수뇌부는 임진강폭이 500 ~ 1000m인데 비하여 한강 하구의 강폭이 2000 ~ 3000m에 달하였으므로 적의 도하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큰 기대를 가진 듯, 미온적인 조치만을 취하였으니, 보병학교에서 제3차 고급반학생으로 피교육중이던 계인주 대령을 이날 아침 남산학교장으로 복귀시킴과 동시에 김포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그로 하여금 김포에 있는 모든 병력을 통합 지휘하여 적의 도하를 막도록 한 것이다.
전날 시암리 부근에서 일야를 보낸 제 12연대 2대대(대대장 소령 한순화)는 이날 김포 전투사의 장악 하에 들어가 통진 부근에서 북한군의 도하를 막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게 되었다.
한순화 소령은 제 3대대와의 혼성병력 600명을 4개중대로 재편하여, 대대본부를 통진으로 이전하는 동시에 가금리(조강리 동쪽 2km)에서 강녕포에 이르는 강안에 3개 중대를 배치하고, 1개 중대를 통진 북쪽고지(표고 170m 정도)에 예비로 확보하였는데, 대체로 14:00에 진지편성을 끝내고 경계태세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과 맞물려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의 전력강화를 모색한 육군본부는 기갑연대의 잔여 병력을 다시 김포반도에 투입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장갑대대장 박무열 소령의 통합 지휘아래 연대의 잔여병력의 대부분은 김포반도로 중파되었다. 즉 장갑 제2중대와 기병대 7중대는 장갑대대장이 이끌고 13:00에 김포로 향하였고, 도보대대장 강문헌 대위는 본부중대의 화기소대를 제 9중대에 배속 조치하여 이 중대와 함께 16:00에 김포반도로 출동하였다.
한편 지난 2월 1일부터 유승열 대령이 이끄는 제3사단에 배속되어 밀양에서는 공비 선무공작을 벌이다가 영등포(문래동)로 복귀한 방원철 소령이 이끄는 육군보국대대는 귀순장병 174명으로써 3개 중대를 편성하여 2개 중대를 제6, 7 양 사단의 정찰대로 파견하고 1개 중대만 본부에 두고 있던 중 전날 북한군의 남침급보를 접하고, 출동 준비로 대기하였으나 종일토록 그들에게 별다른 임무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에 대대장 방원철 소령은 이날 아침에 육본에 자진 출두하여 남침저지를 자원한 결과 김포반도의 약점을 메꾸는 일역을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대 전체가 100명도 채 안 되는 대원이었지만 그야말로 보국의 일념으로, 장비인 99식 소총에 실탄 20발과 수류탄 1발씩을 나누어 가지고, 민간 차량 편으로 13:00를 전후하여 영등포의 본부를 떠나 15:00에 통진 남쪽의 180고지에 독자로 병력을 배치한 다음, 멀리 서북쪽으로 갑관 나루터를 굽어보면서 적을 막아보려 하였다.
또한 민기식 대령이 이끄는 시흥의 보병학교는 전날 김병화 소령이 이끄는 교도대가 학생연대장 유해준 중령의 지휘아래 문산으로 제1사단을 보낸 것에 이어, 이날은 다시 육본 명령에 따라 학생연대의 후보생으로서 후보생 대대를 편성하여 김포에 출동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날 밤 안으로 통진을 중심으로 하는 반도의 서북단에는 3개 대대의 병력이 들어서게 된 셈이나, 이들은 모두가 저마다 독립된 행동에 의하여 축차로 투입된 것이므로 사전에 부대 간의 협조가 이루 어지지 않아, 일관된 진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각 대대장의 독단에 따른 부대 배치여서 병사들은 저마다 자신들만이 그곳에서 대적하게 되는 것으로만 아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적정에 대한 인접간의 횡적인 정보의 교환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통신수단이 강구되지 못하여 그 정보가 김포의 지휘부에도 즉각 보고가 되지 않는 상태였으니 이러한 형편으로서는 적의 침공에 대하여 조직적인 저항을 기대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 너무도 자명한 노릇이었다.
제12연대와 기갑연대의 혼성병력의 진지편성이 대충 끝난 16:00를 전후하여 한강 하류에 대한 북한군의 도하정찰이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피난민을 가장하여 작은 어선 등으로 산발적인 도하를 꾀하다가 해가 질 무렵부터는 발동선이 예인하는 도하선정을 이용하여 소대규모씩 대안의 석류포로부터 조강리로 상륙을 기도하였다.
이에 조강리로 증원된 곽응철 소위가 이끄는 장갑소대가 장갑차의 37㎜포로써 도하중인 적선을 격침하니 북한군은 서문의 조강리로의 상륙을 포기한 듯 더 이상의 도하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6월 27일
전날 밤 북한군의 일부가 갑관 남쪽에서 염하를 건너 180고지의 보국대대 진지를 습격한 까닭으로 동 대대가 날이 밝기도 전에 궤산되고 말았는데, 북쪽의 한강에서도 적이 야음을 타서 강녕포 동남쪽의 강안일각에 상륙함으로써 강녕포 부근의 제12연대 제2대대의 제 1중대와 103고지의 동 제 3중대 사이에 참호를 파고 진지를 굳혀, 그곳에 또한 강안을 확보한 가운데 날이 새자, 북안의 영등포에 12㎜ 야포를 방열하여 조강리에 강녕포 일대를 강타하는 도하지원 사격을 시작하였다.
먼동이 트면서 영등포 부근에 수집한 갖가지 선박들에 병력과 중장비를 분승한 적이 그 들 포병의 엄호하에 강녕포로 도하를 강행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전날 밤에 강녕포 동남쪽의 강안을 확보한 북한군이 강녕포-통진 도로를 차단코자 하였는데 강안에서 북한군의 도하를 막던 제12연대 제1중대와 장갑소대는 이같은 뒤로부터의 공격의 위협에다 북한군 포화의 위력을 감당할 길이 없어 통진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하여 북한군의 주력이 강녕포에 상륙하게 됨으로써 103고지와 가금리의 동 제3, 제4 중대의 철수하게 되었고 이에 08:00, 통진의 제2대대장 한순화 소령은 강녕포에서 철수한 장갑소대와 전날 밤 180고지에서 흩어진 보국대대의 일부를 흡수한 다음 예비인 제 2중대를 지휘하여 상륙한 북한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강녕포로 진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노폭이 좁아 선두의 장갑차의 회전이 곤란함으로써 진퇴가 자유롭지 못하고, 북한군의 포화가 치성하여 장갑차 지원화력의 활용을 크게 기대 할 수 없게 된 까닭으로 화력의 열세를 면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고막리(통진 북쪽 1.5㎞) 부근에 이르러 문주산의 쪽으로 밀려드는 적과 부닥친 결과, 그 적세를 막을 길이 없어, 다시 통진으로 물러서는 바 되고 말았다.
통진에 집결한 제 12연대와 기갑연대의 혼성병력은 장갑차의 엄호하에 통진에서 김포와 인천으로 갈라지는 도로의 삼거리인, 장림(통진 동남쪽 6㎞) 부근으로 철수하게 되었는데, 새벽에 180고지를 점령한 북한군의 일부가 통진-장림 도로의 남쪽으로 우회하여 겉고개(통진 동남쪽 3.5㎞)를 차단하여 퇴로를 막고 있었다.
이에 장갑차를 선두에 내세워 이로 하여금 동 고개를 돌파케 함으로써 이들 혼성병력은 11:00에 장림에 이르러 그곳에 새로운 진지를 점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갑연대의 기병과 보병은 김포읍으로 철수하는 가운데 후보생 대대와 제 12연대 제 2대대가 장갑중대의 지원 아래 장림선을 맡게 되었는데, 후보생대대는 장림 삼거리 북쪽 구릉지대에 진지를 점령하여 징림-김포읍의 도로를 제압하고, 제 12연대 제 2대대는 일부가 한강변에 분산되었으므로 제 2중대로써 그 남쪽의 천마산(60고지) 일대에 진지를 급편하여 장림-양곡(장림 남쪽 4㎞)간의 도로를 차단하였다.
그런데 이때 후보생 대대원들이 가지고 있던 99식 소총은 그 조작과 사격방법이 M1소총과는 달랐으며 더욱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고 방치해두었던 것이므로 손질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탓으로 격발에 장애가 잦아 실은 맨주먹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후보생대대와 제 12연대 2대대가 장림에서 이들 적의 침투를 막고자 안간힘을 다하였으나 역부족으로 13:00를 전후하여 그 선에서 무너지게 되어, 후보생 대대는 김포읍쪽으로, 제12연대 제2대대는 양곡쪽으로 각각 철수하고 말았는데, 이로써 북한군은 이날 낮 중으로 김포 평야에까지 그 모습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한편 육본은 김포의 병력 증강을 위하여, 6월 27일 10:00부 육본작명 제 97호에 따라, 서울로 옮겨온 대구 제3사단의 22연대 병력 중 제3대대를 김포지구에 출동하게 하였다.
대구에서 열차로 함께 수송한 자대차량으로 저녁에 김포읍에서 집결한 대대는 곧 김포지구 전투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운유산 동쪽(장림-김포도로 동측 한강변)의 73고지(운유산 동쪽 3.5㎞)일대에 진지를 점령하여, 그 좌측의 후 보생 대대 및 저녁에 다시 증원된 제 8연대 3대대와 더불어 김포읍에 대한 최후의 저지선을 맡아 지키게 되었다.
이날 부평의 잔류병력도 김포전선에 중원 되었는데, 윤태일 중령이 이끄는 제1공병단 산하의 일부는 부평-김포읍 사이의 계양산(395고지: 부평 북쪽 7㎞) 동녹의 방축리 부근으로 추진되고, 심언봉 대령이 이끄는 병기학교에서는 기간장교로써 장교특전대를 편성하여 한강변의 전호(김포 비행장 북쪽 4km)부근에 배치하게 되었다.
▲ 운유산-73고지 방어선의 전투 상황
6월 28일
06:00, 어선으로 평도 동쪽의 한강을 역류하여 접근한 북한군의 일단이 선상에 82mm 박격포를 장치하고 사격을 가하면서 63고지의 동북쪽 강안에 상륙함으로써 이날의 첫 교전의 신호가 올랐다.
이에 강안을 노려보면서 우중의 진흙탕 속에서 밤을 지새운 김촌성 중위가 이끄는 기병 제7중대는 전 화력을 집중하여 이에 응수하였으나, 역부족인데다가 북한군의 박격포가 집중됨에 따라 기병대에서 훈련 중이었던 말들이 그 포성에 놀라 요동함으로써 하는 수 없이 북한군과 이탈하여 63고지를 철수하게 되었다.
이에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08:00에, 전날밤 김포읍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제 12연대 2대대의 잔여병력을 운유산으로 다시 추진하여 전력의 강화를 도모하였으나, 밤새도록 비가 오는 가운데서 지새우고 아침식사 마저 거르게 된 상태에서 예상치 못한 강적을 맞게되었으니, 장병들은 오직 투지 하나만으로 버티어낼 뿐이었다.
그리하여 11:00, 사령부의 철수명령에 따라 김포도로 서쪽지역 운유산 일대의 진지를 지탱중이던 후보생대대와 제12연대 2대대 및 기갑연대 도보중대는 김포읍에서 장릉산(146고지 김포읍 남쪽 1km)과 주양산의 동선을 따라 부평에 집결하고, 장갑차와 제8연대 3대대 및 제22연대 3대대의 일부는 사령부와 함께 김포 비행장을 지향하여 김포가도를 따라 동남쪽으로 빠졌는데, 장갑차는 비행장-영등포가도를 경계하면서 이동하였고, 보병 일부는 굴포천을 건너 개화산에 진지를 다시 마련하였다.
이 날 저녁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소사읍사무소에 지휘소를 개설하고, 주민의 협력을 얻어 수용병력에 대한 결식을 서두르는 한편, 각대별로 밤을 세워 대오를 수습하였다. 그리고는 후보생대대와 기갑연대 도보대대 및 김억순 경감이 이끄는 부평경찰대로써 계양산 동쪽 능선에 배치하여 김포 - 부평 도로를 차단하도록 하고, 제22연대와 제12연대 병력으로써 비행장 남쪽 구릉지대의 107고지(비행장 남쪽 4㎞)일대에 배치하여 비행장쪽에서 소사로의 적 남진에 쐐기를 박도록 응급조치하였는데, 이 때 제8연대의 3대대는 비행장에서 영정포쪽으로 전진함으로써 새로운 활동무대를 얻게 되었다.
이날 밤 김포지구전투사령부가 계인주 사령관이 실종되는 가운데 소사로 집결하자, 시흥전투사령부는 현지의 제3사단 참모장인 우병옥 중령을 새로이 사령관으로 임명한 다음, 그에게 이르기를 '화급히 병력을 수습하여 김포비행장을 탈환하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시흥사령부의 비행장 탈환명령은 비행장의 적이 반드시 거쳐야 할 침공로상의 요지라는 점도 있거니와 행주에서 도하철수중인 제1사단의 철수로를 확보하기 위한 조치인 것으로 풀이되었다.
결과 및 영향
7월 3일 아침에 한강을 도하한 북한군의 전차와 오류동에서 들어온 그들이 합류하여 영정포를 석권하게 됨으로써 김포동에서의 퇴각이 강요되었거니와 이날 밤 자정 무렵에는 6대의 전차를 앞세운 1개 대대규모의 적이 경인가도를 따라 인천을 점령하게 됨으로써 경인가도의 이북지역은 이제 모두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한강과 오류동의 방벽이 동시에 무너지자 북한군은 이날 중으로 선견대를 시흥으로 진출시켜 국군과의 접촉을 유지하는 가운데 주력은 영등포와 오류동 부근에서 전열을 다시금 가다듬는 듯 하였는데 그들이 경부국도를 따라 전차의 돌파전을 시도할 것이라는 점은 너무나도 명확한 사실이었다.
한편 오류동 전선에서 이탈케 된 김포사의 병력은, 일부는 소사에서 소래를 거쳐 서해안을 따라 곧장 수원으로 빠지기도 하고, 일부는 오류동에서 양지산(오류동 남쪽 6㎞)기슭을 타고 안양을 지향하였다.
그런데 김포사의 철수명령은 일선참호속의 각계 병사에게까지 모두 전하여지지 못하였던 까닭으로 어떤 병사는 아직 그대로 진지일각을 지키고 있었고 또 어떤 병사는 명령을 듣고도 더는 물러설 수 없다하여 호속에 남아있기도 한 바 이 날 저녁 적의 전차가 경인가도를 횡횡하게 되자, 그제서야 그 전차의 틈 사이를 뚫고 남하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인천으로 가서 마지막 철도편을 이용하여 수원으로 가기도 하였는데, 제12연대 2대대장인 한순화 소령 같은 사람은 인천에서 배를 얻어 보름 동안이나 서해안을 표류한 끝에 군산에 오르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이 날 저녁 김포사의 주력이 안양부근에 집결되면서 동사령부는 개편을 하게 되고, 제15, 18 양 연대가 연대별로 시흥사령관 김홍일 소장의 장악하에 들어가 덕안(안양 서북쪽 4㎞)부근의 안양 저지선의 서쪽지역을 맡아, 또 다시 일전일퇴의 지연전을 벌이게 되었다.
개성, 문산 전투
개성, 문산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 |||
날짜 | 1950년 6월 25일 ~ 6월 26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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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경기도 개성, 문산 | ||
결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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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북한군의 남침 전략 |
개성, 문산 전투(開城 汶山 戰鬪)는 한국 전쟁 초기 청단(靑丹), 연백(延白), 개성, 고랑포(高浪浦) 일대에서 한국군 제 1사단이 제203전차연대로 증강된 북한군 제1 및 제6사단과 맞서 싸운 방어전투이다.
청단-개성 일대에 배치된 제 12연대는 초전에 분산되어 영정포에서 한강 하구를 도하하여 김포 반도(金浦半島)와 문산리로 철수하였으며 38도 분계선의 대원리(大院里)-원당동(元堂洞)간을 방어하던 제13연대 3대대 또한 임진강 남쪽으로 분산 철수하였다.
한편 사단 예비로서 수색에 주둔하고 있던 제 11연대는 6월 25일 오후 문산으로 이동하는 즉시 주저항선을 점령하였고, 제 1연대는 그 우측방의 파평산(坡平山) 방어진지에 투입되었다.
당시 방어계획의 전면적 수정에 따른 방어진지의 재편성으로 인하여 제1사단의 교육훈련 진도는 다른 사단에 비해 뒤떨어져 있었다. 즉 제 11, 12연대는 겨우 대대전술훈련을 시작한 상태였고 제 13연대는 2개 대대가 대대전술훈련의 마지막 단계로 접어들었으며, 제1대대는 야외훈련을 위해 자하리(紫下里) 부근에서 야영 중에 있었다.
더욱이 북한측이 제기했다가 무산시킨 요인교환과 북한군의 공격 징후마저 포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장병들의 경각심은 해이해져 있었다. 이런 사유로 사단에서는 6월 24일에 보직병력의 약 1/3을 휴가 보내고 나머지 병력의 1/3범위 내에서 외출과 외박을 실시하였다.
다시 말하면, 총병력의 57%가 부대를 떠난 상태이었으며, 제12연대 경우 80여km에 이르는 방어 정면에 배치된 병력은 8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장비면에 있어서도 보유차량의 대부분이 육군본부 계획에 따라 기지창으로 후송되었으며, 제11연대의 경우에는 60mm 및 81mm 박격포를 비롯한 대부분의 공용화기를 부평의 병기대대로 후송한 실정이었다. 더구나 사단장 백선엽이 6월 14일부터 보병학교 고급지휘관 과정에 입교중이어서 최경록 제11연대장이 대리 근무를 하고 있었다.
전투 과정
청단-백천 철수
대대장 소령 이무중(李茂重)이 이끄는 제12연대 3대대는 읍천(邑川)에서 예성강 동쪽 전포리(錢浦里)까지의 54km 정면에 3개 중대를 일선으로 배치하고 산간소로 5개소에 경찰초소를 설치하여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나 초소간의 간격이 너무 넓어 횡적 연락과 상호지원이 불가능하였다.
이 지역으로 공격을 개시한 북한군은 공격준비사격을 하지 않고 은밀히 접근하여 기습적인 사격을 가하는 동시에 대남방송을 통해 투항을 권고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 하에서 제3대대는 국지적으로 적을 지연시키다가 청룡 반도(靑龍半島)와 용매도(用媒島), 백석포, 김포 반도, 강화도를 경유하여 문산리로 철수하였으며, 일부 병력은 분산되었다.
개성 철수
대대장 소령 한순화(韓順華)가 이끄는 제12연대 2대대는 예성강 청학동(靑鶴洞) 소반고개간 20km에 달하는 방어 정면에 3개 중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북한군 제6사단 15연대는 전차 5~6대의 선도하에 1번 도로를 따라 개성으로 진격하였다. 이때 송악산 남쪽 무명고지에 배치된 제6중대는 북한군의 공격준비사격이 집중되기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 중대장 백원담(白源淡) 중위가 전사하고 병력은 소대 또는 분대단위로 분산되었다.
여현 일대를 경비하던 제 5중대도 개성이 함락된 상황을 확인하자 곧 소대 단위로 철수하였으며, 비둘기고지에서 교전하던 제 7중대도 방어진지를 지탱하지 못하고 대대 전술지휘소가 위치한 자남산(子男山)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한편 제 12연대장 전성호(全盛鎬) 대령은 이날 09:00쯤 상황을 종합 분석한 끝에 1번 도로가 차단되기 전에 임진강 철교를 통해 철수하기로 결심하였다. 때마침 개성 북쪽 일대에서 철수중인 병력을 수습하면서 제1대대가 배치된 고남리(古南里)로 내려오던 제 2대대장과 만난 연대장은 연대본부 및 제 1대대가 철수할 수 있도록 적에게 일격을 가하라고 명령하였다.
연대예비인 제 1대대가 손실 없이 보존되어 있어 즉각적으로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반격이 가능한 데도 불구하고, 기습을 당해 만신창이가 된 철수부대에 왜 이와 같은 임무를 부여했는 지의 의문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연대장은 곧 연대본부와 직할대 및 제1대대를 지휘하여 고남리를 떠났으나, 이동 중 차량사고로 후송되고 그 후임으로 김점곤(金點坤) 중령이 부임하게 되었다.
한순화 소령은 특공대를 편성하여 개성시내 남대문으로 접근하다가 행군대형을 갖추고 대기 중인 적을 기습한 후 영정포를 경유, 김포 반도의 강녕포(康寧浦)로 도하하여 통진(通進)에서 재편성 중 26일 오전에 급편된 김포지구 전투사령부에 배속되었다.
문산 전투
연대장 대령 최경록(崔慶祿)이 이끄는 제11연대는 6월 25일 08:30에 출동하여 11:00~15:00 사이에 열차를 이용, 문산으로 이동하였으나 이때 행군한 병력은 980명에 지나지 않았다.
적전리(赤田里)에 전술지휘소를 설치한 제 11연대는 임진강철교 부근 마정리(馬井里)의 1번 도로 좌우측에 제1대대를, 임진강 나루터 남쪽에 제 2대대를 배치하고 제3대대를 예비로 적전리에 집결 보유하였다. 이렇듯 연대가 방어배치하는 동안에 휴가, 외출 장병이 줄을 이어 귀대하였으므로 연대병력은 1,500명으로 증가되었다.
제11연대장은 개성지구의 제 12연대 일부 병력이 임진강철교를 통해 철수한 상황을 확인한 후 사단장에게 철교 폭파를 건의하여 사단공병이 폭약을 장전하고 점화하였지만 불발로 그쳐 실패하고 말았다. 이로써 북한군은 평양-개성-서울로 연결된 가장 양호한 경의도로를 주병참선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점까지도 북한군 전차는 임진강 돌출부에 나타나지 않았다. 적은 애당초 남침계획을 수립하면서 아군이 반드시 임진강철교를 폭파할 것이라고 판단한 듯 전차를 1번 도로상에는 투입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군이 주저항선을 거의 점령했을 때인 17:00경 철교 북쪽에서 전술행군대형으로 1번 도로를 따라 남하하는 대규모의 북한군과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으며 적은 임진강철교 부근에서 격퇴되었다.
그 뒤에도 적 15연대는 수차에 걸쳐 임진강철교를 확보하기 위한 공격을 반복하였으나 매번 실패하자 공격을 중단하고 아군이 철교를 폭파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데 주력하는 것이었다.
파평산 전투
제1사단의 우전방인 연대장 대령 김익렬(金益烈)이 이끄는 제13연대는 제 1, 2의 2개 대대를 파평산에 투입하여 가여울-적성-문산 도로를 따라 진출하게 될 것에 대비하여 방어태세를 갖추어나갔다. 그러던 중 1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이 고랑포, 자하리로 공격하다가 국군의 살상지대에서 격멸되었다.
날이 바뀐 6월 26일, 전날 밤부터 내리던 비가 그치자 파평산 북쪽 320번 도로상에 북한군의 전차부대가 출현하였으며, 그 중 선두 5대가 파평산 북단으로 육박하였다. 이에 맞선 국군은 2.36인치 로켓포를 사격하였지만 전차의 특성도 모르는데다가 사격술마저 미숙하여 한 대의 전차도 파괴하지 못하였다.
제1대대장 김진위(金振暐) 소령은 18명을 선발하여 대전차특공조 2개 조를 편성하였다. 특공대원들은 81mm 박격포탄과 수류탄을 전선줄로 묶어 만든 급조폭탄을 안고 적 전차의 무한궤도 밑으로 앞을 다투어 뛰어들었다. 아군의 필사적인 육탄공격에 겁을 먹은 듯 적 전차 5대는 진출을 포기하고 도로변의 초가 옆에 정지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광탄에 의해 초가집에 불이 나고 그 화염이 전차에 옮겨 붙었고 이 광경을 지켜본 후속 전차대는 적성으로 되돌아갔다. 얼마 후에 북한군 1개 연대규모가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국군은 치열한 근접전을 펼치면서 끝까지 방어진지를 고수하였으며, 그 후 전장은 소강상태로 접어든 가운데 밤이 깊어갔다.
임진강 방어선의 붕
국군 제1사단은 후방에서 증원된 부대로 전투력이 대폭 증강된 것에 힘을 얻어 6월 26일에는 주저항선의 취약점을 보완하고 상황 진전을 보아가면서 반격으로 전환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우 인접부대인 제 7사단이 덕정(德亭)-축석령(祝石嶺)선으로 철수한 탓으로 제1사단의 우측방이 완전 노출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가여울-적성으로 진출한 북한군 제1사단은 아군의 저항이 전혀 없는 상황 아래에서 아군 제 1사단의 주저항선을 우측방에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아군의 임진강철교 폭파기도가 실패한 것을 확인한 적 제6사단은 문산 돌출부에 전차를 투입하고 6월 26일 이른 새벽에는 임진강철교를 통해 전차 5대를 앞세운 보·전·포 협동부대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와 맞선 제11연대는 임진강철교로부터 남쪽으로 종심 깊게 편성한 방어지대에서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전차와 대결할 수 있는 적절한 수단과 방법이 없어 문산 남쪽 구릉지대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상황은 시간이 경과할 수록 북한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갔으나 문산 북쪽까지 진출한 적은 일단 진격을 멈추고 후속부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를 역습의 호기라고 간파한 제 11연대장은 배속된 보병학교 교도대대를 포함한 3개 대대를 동시에 투입하여 역습을 단행함으로써 지역 내의 적을 임진강철교 북쪽으로 격퇴하고 주저항선을 회복하였다.
바로 이 무렵 우측방의 제13연대는 파평산 방어진지의 노출된 우측방으로 육박한 적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해 주저항선이 무너지고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제1사단의 주공이 320번 도로를 따라 서진하면서 문산리를 위협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추이를 지켜보던 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최후 저지선으로 철수하여 마지막 결전을 펼치면서 반격의 기회를 조성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따라 제 1사단은 야간철수를 계획하였으나 북한군의 압박이 가중되어 위급한 국면이 전방 곳곳에서 전개되었고 더 이상 지체할 수 없게 된 국군은 철수명령을 하달하였고, 사단 전술지휘소를 봉일천국민학교로 이동 설치하였다.
결과 및 영향
북한군의 군단들은 6월 25일에 개성으로부터 그 남단에 있는 영정리(포)로 철수한 제12연대 2대대를 뒤따라 온 것으로 보이는 북한군 제6사단 예하의 부대로 추단되었는데, 이들은 한순화 소령이 이끄는 대대가 강화를 거쳐 김포반도 서단에 있는 통진으로 철수한 다음 다시 6월 27일에 김포-오류동 지역으로 나오게 되자 그 뒤를 이어 김포지역을 침공한 것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6월 28일 전에 행주와 개화동 일대의 개활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개화산과 이산포 서북쪽 7km의 김포 반도 대안 변에 있는 봉성산(129고지)등을 점령하여 한강 하류 지역을 통제하는 한편, 신전동에 있는 138고지를 장악하여 김포 가도 주변지대를 선점하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행주나루로 도하한 부대 중에서, 여러 부대가 혼성이 되어 질서를 찾지 못한 부대나 지휘자가 없는 부대는 이러한 북한군의 불시 사격에 직면하자 강변에 있는 갈대밭에 뛰어들어 끝내 각개행동으로 분산되기도 하였다.
고랑포 전투
고랑포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 |||
날짜 | 1950년 6월 25일 ~ 6월 26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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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고랑포, 청단 | ||
결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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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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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랑포 전투는 한국 전쟁 초기 고랑포-청단 간의 38도 분계선 지역에서 경비 임무를 수행하던 사단장 대령 백선엽이 이끄는 제1사단이 1950년 6월 25일 미명에 소장 최광이 이끄는 북한군 제1사단과 사단장 소장 방호산이 이끄는 제6사단으로부터 개성과 고랑포 지역에서 동시에 기습공격을 받아 치른 전투이다.
또한 개성 이서 지역의 연대장 대령 전성호가 이끄는 국군 제1연대가 서해로 해상 철수를 감행하는 한편 고랑포, 문산 지역의 연대장 대령 김익열이 이끄는 국군 제13연대가 수색으로부터 급거투입된 연대장 대령 최경록이 이끄는 제11연대와 후방 각지에서 급파된 부원부대들과 더불어 임진강 방어선과 봉일천에서 침습한 북한군을 맞아 싸운 초전이 된다.
특히 이 전투는 사단이 열세한 전력으로 북한군의 2개 사단을 6월 25일부터 6월 28일까지 4일간을 한강 북쪽에서 저지시킴으로써 북한군으로 하여금 재편성을 강요하여 미군이 참전할 때까지 남하속도를 지연시킨 데 그 의의가 컸다.
국군 제1사단이 38도 분계선에 대한 최초의 경비대를 파견한 것은 1948년 1월 초순이며 이 무렵 소수의 미군만이 배치되었던 문산 북쪽 임진강 나루에는 경비의 소홀함을 틈타서 북한군의 침범이 잦았던 때문에 당시의 초대 여단장 송호성 준장이 경계강화책으로 보병 1개중대를 출동시켜 미군과 합동 근무케 한 것이 시초이다.
이로부터 한 달 후인 2월 5일에는 이응준 대령이 제2대 여단장으로 부임하고 이해 가을로 접어들면서 주한미군이 철수하기 시작하자 사단은 11월에 들어 수원에 위치한 제11연대를 문산으로 추진시켜 38도 분계선 경비임무를 미 제7사단 32연대로부터 인수케 함으로써 고랑포 이서의 서부 38도 분계선의 경비를 처음으로 맡게 되었다.
이 무렵의 38도 분계선 경비란 주요간선도로의 요지에 경비초소만을 설치하였을 뿐 전술적으로 유리한 38도 분계선상의 요충지는 그대로 비어둔 관계로 무방비상태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 당시의 경비상태가 어떠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데, 이에 비하여 북한군은 이러한 요충지를 사전에 점거하여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1950년 4월 22일로 백선엽 대령이 제5대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곧 사단의 전 지역을 돌아본 뒤 고랑포-청단에 이르는 100km의 정면을 방어하기 위한 현행 작전계획이 사단의 방어한계를 초과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곧 새로운 방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북한군의 주공 방향을 고랑포부근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사단의 주 전력을 임진강선으로 전환한다면 방어정면이 20여km로 축소 될 뿐만 아니라 여기서 병력과 화력의 열세를 임진강의 자연장애물로써 보완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리하여 사단은 임진강 선의 새로운 방어준비에 들어갔는데 당시의 사단병력은 10,100명 내외이며 장비는 105mm곡사포(M3) 15문, 57mm대전차포 18문, 81mm박격포 36문, 60mm박격포 54문, 이 밖에 편제상의 2.36인치 로켓포와 각종 기관총 43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중에 제11연대가 장비한 공용화기의 30%가 육군본부지시에 의하여 5월 하순부터 6월 초순 간에 후방기지창으로 후송 정비케 되어 연대는 주로 개인화기만을 보유하게 되었다.
작전 계획
제1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1950년 5월초에 사단 책임지역내의 38도 분계선 경비와 북한군의 침공에 대비하는 사단의 작전계획을 하달하였다.
이에 따라 제13연대는 대대장 소령 유재성이 이끄는 예하 제3대대로써 고랑포-대원리(28km)간의 38도 분계선 경비를 계속 수행케 하는 한편 화석동의 연대본부지역에 위치한 제1대대를 연대 우일선으로 삼아 마지리(파평산 : 적성 남쪽)-금파리간에 배치하고, 제 2대대를 연대 좌일선으로써 금파리 서단-율곡리(208고지)간에 배치하여 각각 주진지를 편성케 하였다.
이와 동시에 북한군의 기계화 부대의 접근로로 예상되는 방어전면 동서를 횡단한 320번 도로와 주진지 전방에 돌출된 자하리부터의 적의 접근을 방해하는 한편 임진강 북쪽 부대의 철수를 엄호케 하고 제3대대가 임진강 이남으로 철수한 다음 연대예비로서 금곡리(파평산 측후방)부근에 배치토록 하였다.
그리고 수색의 제 11연대는 사단의 좌일선으로 예하 제2대대를 연대 우일선으로 삼아 화석동-율곡리 간에 배치하여 임진강 나루터 이서의 적의 예상도하지점을 방수케 하고 제 1대대를 연대의 좌일선으로 하여 임진강교 남안의 마정리일대에 배치하여 임진강 북쪽부대의 철수엄호와 동 교량을 통하는 적의 접근을 맡도록 하였다.
전투 과정
이날 미명에 고랑포와 개성 지역은 지난밤부터 내린 비가 가랑비로 변하여 땅을 적시고 있었는데, 아침의 정적을 깨고 포성이 진동하기 시작하더니 38도 분계선 경비 진지와 그 주변 부락이 적의 포연 속에 잠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포격은 그 이전에도 여러 차례 겪은지라 단순한 위협사격으로만 보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더욱 치열화 하더니 이어서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이 38도 분계선을 순식간에 돌파하였다.
이렇게 불의의 기습공격을 받은 전 경비부대는 적의 전차와 병력의 우세에 눌려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못한 채로 분산하게 되었으므로 사단은 문산의 제13연대로 하여금 우선 주진지를 점령케 하고 이어서 수색의 제11연대를 축차로 진지에 투입하여 임진강선에서의 결전을 준비하였다.
고랑포에서 대원리간의 38도 분계선 경비임무를 맡은 제13연대 3대대는 대대 지휘소를 아곡동(장단 북쪽)에 두고 그의 예하중대를 대대의 중앙전면에 있는 두매동(박골)에서 남으로 신장단에 이르는 소로를 경계선으로 하여 배치하였다.
즉, 그 이동에 제10중대를 우일선으로 하고, 그 이서에 제11중대를 좌일선으로 하였으며, 대대 예비로써 제9중대를 대대본부 부근에 배치하였다.
그런데 이 날 새벽 오른쪽 제 1선인 제10중대장 박형수 중위가 사내동(고랑포 서남쪽 3km)에 있는 중대본부에서 포성에 눈을 뜬 것은 04:30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중대 배치는 제 1소대를 중대 우측 38도 분계선상의 112고지(고랑포 북동쪽 2km)를 점령하게 하여 주로 전방의 사미천 계곡과 남북을 통하는 주변도로를 경비하였는데, 이 112고지는 한 때 남북교역이 성행한 당시 일일 수 십대의 차량이 내왕하던 곳이다.
한편 112고지의 장재만 중위로부터 2차보고에 접한 중대장 박형수 중위는 이를 대대에 보고 한 다음 112고지에 대한 증원이 시급하다고 보고, 중대본부요원과 화기소대 병력으로 출동준비를 서둘게 하였는데 이 때, 대대장 윤재성 소령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기를 『중대장은 최선을 다하여 고랑포 지역을 사수하라.』라고 하였다.
이에 중대장 박형수 중위는 중대의 출동을 대대장에게 보고한 다음 중대를 직접 지휘하여 112고지를 향하여 급히 달려갔다. 그러나 출동부대가 고랑포시내에 접어들자 적의 선두부대가 고랑포 북쪽 외곽의 구릉을 침습하여 중대에 사격을 집중하였다. 졸지에 사격을 받은 중대는 급히 차량을 반전시켜 남쪽 임진강변으로 이동한 다음 59고지 앞 능선에 부대를 배치함과 동시에 즉각 60mm박격포로 이들의 두상에 화력을 집중하였다.
그리고 전날 내렸던 비의 탓인지 아직도 고랑포 지역엔 옷을 적실 정도의 가랑비와 엷은 안개가 시야를 가렸으므로 중대의 수령 무기 개총으로는 조준사격을 할 수 있을 때까지 112고지로 통하는 도로에 고정사격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점차 총격이 쇠퇴해지고 어느덧 강변의 안개가 부분적으로 걷히자 고랑포쪽에서 임진강을 도하하는 한 집단이 시야로 들어오게 되었다.
멀리서 바라본 이들의 복장은 희고 또 검기도 하여 처음에는 피아의 식별이 어려워 국군 제1소대의 철수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마저 가졌으나 이들의 선두가 임진강 남쪽 800m에 있는 53고지 정상에 오르자마자 곧 적기를 흔들면서 만세를 외치는 것이었다.
이 때 비로소 적으로 확인한 중대는 고랑포로 지향하였던 박격포와 기관총의 사격방향을 즉각 동측방의 53고지에 돌려 일시에 전화력을 집중하자 그들은 크게 당황한 듯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잠시 뒤에 응전태세를 갖춘 이들의 자동화기가 불을 뿜은데 이어 박격포를 쏘아대는 것이었다.
한편 대대의 좌 제1선인 제 11중대는 1소대를 중대 우단에 있는 대덕산(236고지)에 배치하고 제 2소대를 중앙에 있는 154고지와 동고지를 중심으로 한 좌우측(2~3km)간의 무명봉우리에 각각 1개 분대씩 분할 배치하고 1개 소대는 중대본부와 함께 대덕산 남쪽 2km에 배치하였다.
그런데 이날 04:30 대덕리 일대에 떨어진 적 포탄의 진통으로 취침호에서 쉬고 있던 소대장 이하 비번근무의 소대원들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밖에는 적 포탄이 산발적으로 낙탄이 되고 있었는데 이때 소대선임하사관 박구서 중사가 소대장에게 다가오면서 말하기를 『소대장님! 적의 포탄이 계속 떨어지는 것을 보니 전방에 배치된 경계분초가 위험합니다...제가 한번 다녀오겠습니다.』하면서 출발하려하자 이에 소대장 조철권 중위는 『지금은 위험하니 포격이 그친 다음 다녀오라.』라고 만류하였는데 이런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잠시 포격이 멈춘 듯하자 이틈을 본 박구서 중사가 성급하게 진지 밖으로 뛰쳐나가다가 때마침 진전 지척지간에서 작렬하는 적 포탄 1발로 전신 파편상을 입고 쓰러졌다. 이에 조철권 중위는 즉각 부근의 병사와 함께 그를 진내에 옮겨 응급 처치하였으나 출혈과다로 곧 숨졌다.
한편 이날 새벽 대대본부를 포함한 제 9중대와 제 12중대 등 아곡동의 대대숙영지에서는 전방에서 들리는 포성과 더불어 전투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대대장 천막에는 전방중대로부터 잇따라 적의 남침보고가 유선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에 대대장 유재성 소령은 전방 중대가 필시 적의 공격으로 여의치 않은 사태에 직면한 것이라고 내다보고 이에 대한 의견을 잠시 대대참모들과 교환하였는데 이 결과 대대의 사용병력으로써 춘양동(대대 숙영지 전방 2km)에 있는 91고지와 그 서측 무명봉우리(181고지 동쪽)을 점령, 이 양 고지에 병거함으로써 장단까지 통하는 도로를 통제할 수가 있어 여기서 우리 중대의 철수엄호와 이를 추격하는 적에게 일격을 가하기로 의견을 같이 하였다.
이리하여 제9, 12 양 중대로 하여금 즉각 행동을 개시토록 하여 숙영지를 출발하려는 순간 요란한 굉음과 함께 수 발의 북한군 포탄이 숙영지 주위에 떨어지면서 적 전차 7대가 북쪽 1km거리에서 남하하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얼마 뒤에 장단으로부터 대대숙영지 옆을 지나 고랑포 쪽으로 올라가는 장단경찰서 소속의 3/4톤 트럭 1대가 500m 전방의 모퉁이 길에서 북한군 전차의 직사포에 맞아 대파되었다.
그런데 뒷날 알려진 바로는 이는 장단경찰서의 경비주임 김기태 경위가 무장경찰관 21명을 이끌고 고랑포 지역으로 출동 중이었던 것인데 이때의 생존자는 아군에게 구출된 6명의 부상자를 제외하고는 그 진상을 알 수가 없다.
북한군 전차와 국군 장갑차를 분간치 못하던 당시의 광경을 목격한 제12중대 기관총 반장이었던 김일하 병장의 증언에 의하면 『능선에 배치된 병사들끼리 저것이 아군이냐? 적군이냐?하면서 떠들고 있었는데 한 병사가 '지금 올라가는 저 경찰차량을 사격하면 적군이고, 그대로 통과시키면 아군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모퉁이 길에서 포격을 당함으로써 아군장갑차가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고 술회하였다.
한편 아군 경찰차량을 파괴한 적의 전차가 잠시 노상에 서게 되자 후속 전차가 그 뒤를 이어 종대를 이루었는데, 이에 제9중대장 이종근 중위는 『전차 공격의 시기가 바로 이때다』라고 판단하고 능선의 배치된 2.36인치 로켓포를 향하여 즉각 『사격개시!』를 외치자 이에 81mm 박격포까지 이 사격에 가담하여 순식간에 포화가 전차를 휩싸고 말았으나, 잠시 후 초연을 헤치듯 전차가 앞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이때에 전차의 차변에서 산개한 1개 중대의 적이 사격과 함께 공격을 가하였고 이리하여 대대 숙영지 전방의 개활지를 사이에 두고 교전 상태에 들어갔으나 좌측방의 도로를 따라 7대의 전차가 계속 남하함으로써 대대장 유재성 소령은 제 9중대 1소대장 장두철 중위를 대장으로 하는 8명의 특공대를 선발하여 이를 공격하게 하였으나 공격 행동 중에 모두 산화하고 말았다.
여기서 대대장은 다시 특공대 공격을 요망하자 수많은 지원자가 손을 들고 나왔는데 이 가운데 동 화기중대의 김일하 병장 등 7명으로써 수류탄과 개인 화기만으로 공격하게 하였다. 특공대가 주위의 무성한 초목을 이용하여 10m 거리까지 육박하여 전차의 옆구리에 수류탄을 투척하기도 하였으나 역시 실패하고 원위치로 돌아왔다.
이렇게 2차에 걸친 전차 공격이 무위에 그치자 이에 대대장은 현 위치에서의 지탱은 어렵다고 보고, 2개 중대로 이루어진 대대를 남쪽 2km인 85고지로 철수시켰다.
대대 병력은 이날 17:00 동판리(임진 나루터 대안)에서 제 10중대와 합세한 다음 일월봉(191고지)에서 병력을 재배치하였다가 해가 진 후에 나룻배를 이용하여 강을 건너 금곡리 부근에 집결하였는데 이때가 22:30이었다.
결과 및 영향
6월 28일 저녁부터 6월 29일 아침 사이에 각 부대가 행주와 이산포 부근에서 혼란 속에서도 그런대로 한강을 도하할 수 있었으나 날이 밝자 적으로부터 위험을 느꼈던 탓인지 차안을 떠난 배들이 대안에서 묶인 채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강을 건너지 못한 병력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도하의 때를 놓친 이들은 각개행동으로 옮겨 요행히 은신처를 찾은 자도 있을 것이나 대다수가 적의 흉수에 의하여 처참한 최후를 마친 것으로 추단되었다.
그러나 6월 28일 밤에는 이미 일군의 북한군이 김포 비행장을 장악한 듯 그들의 소규모가 대안상의 감제지형인 개화산(130고지)과 그 아래를 남북으로 흐르는 수로와 장방을 점거하여 아군부대가 접근함을 보고 일제 사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이들 북한군 군단들은 6월 25일에 개성으로부터 그 남단에 있는 영정리(포)로 철수한 제12연대 2대대를 뒤따라 온 것으로 보이는 북한군 제6사단 예하의 부대로 추단되었는데, 이들은 한순화 소령이 이끄는 대대가 강화도를 거쳐 김포 반도 서단에 있는 통진으로 철수한 다음 다시 6월 27일에 김포-오류동 지역으로 나오게 되자 그 뒤를 이어 김포 지역을 침공한 것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6월 28일 전에 행주와 개화동 일대의 개활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개화산과 이산포 서북쪽 7km의 김포 반도 대안 변에 있는 봉성산(129고지)등을 점령하여 한강 하류 지역을 통제하는 한편 신전동에 있는 138고지를 장악하여 김포가도 주변지대에 선거하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행주나루로 도하한 부대 중에서 여러 부대가 혼성이 되어 질서를 찾지 못한 부대나 지휘자가 없는 오합지중은 이러한 적의 불시사격에 직면하자 강변에 있는 갈대밭에 뛰어들어 끝내 각개행동으로 분산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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