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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남의 봄 17 : 현충일의 의미 4 (6.25 전쟁, 한국전쟁 3)

 

 

 

강남의 봄 17 : 현충일의 의미 4 (6.25 전쟁, 한국전쟁 3) 

 

 

                                                                        북악 둘레길에서 바라 본 성북동 전경

 

 

 

 

자신들의 역사를 제대로 모르거나 과거를 잊은 자, 미래도 없다.

 

63년전 오늘이 6.25 전쟁(한국전쟁)이 발발한 날이다. 6. 25 전쟁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획기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인간은 과거를 잊기 마련이지만 이 날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날이다. 그것은 김일성에 의해 한반도가 적화통일 일보 직전에 미국과 유엔의 지원으로 대한민국이 생명을 연명하였고 그 대한민국에서 지금 우리들이 밥을 먹으며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선은 임진왜란 당시 망했어야 할 나라였지만 몇 명의 명장과 충신들, 산화한 수많은 의병들, 그리고 명나라의 지원으로 용케도 살아남아 500년 역사를 이었지만 결국은 지도층의 무능과 사회적 역동성 상실로 나라가 일제에 망하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도 전쟁터에서 산화한 수많은 젊은 청년들의 피의 댓가로, 그리고 미국과 유엔의 지원으로 용케도 살아 남았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유교의 사상적 함정에 빠져 개혁의 몸부림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그후 결국 318년 만에 나라가 망하고 말았지만, 대한민국은 63년이 지난 지금 세계 무역강국, 문화강국으로 우뚝 섰다. 그러나 북한은 김씨 세습 왕조와 일당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안감힘을 쏟고 있지만 앞으로 얼마나 오래 갈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북한 정권의 실정과 모든 국력을 군사력 증강에 쏟는 무리수를 두는 한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할 것같다. 왜냐하면 역사를 보면 군사력을 강력하게 유지한다고 오랜 역사를 유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는 동로마 역사까지 합하면 거의 약 2000년 가까운 역사를 유지했다. 그 이유는 개방성과 포용성, 그리고 관용이었다. 그래서 점령지 백성들이 차별없이 로마 시민이 되었고 누구나 로마시민이면 최고 직위인 집정관에 오를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시 지중해 최강자 카르타고와 지중해 패권을 두고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다툰 1,2,3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했다. 로마는 카르타고 한니발 장군이 이탈리아 반도에 침공해온 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 군에게 칸내전투에서 로마군 7만 명이 전멸했다. 당시 원로원 80여 명이 병사로 참전하여 전원 전사했다. 그러나 로마는 16년 동안 버티면서 결국 한니발군을 이탈이아 반도에서 몰아냈고 전쟁에서 승리하여 지중해 최강자가 되었던 것이다.

 

중국의 역사를 보면  진나라 시황제, 전한 무제, 후한 광무제, 당나라 태종, 명나라 주원장, 청나라 3대 황제 시대 잠깐 융성하였을 뿐 그리 오랜 역사를 가진 왕조는 없다. 조선은 500년 역사지만 지배층만 호의호식하였지만 백성들은 고난과 고통의 세월이었다. 그래서 그 나라의 역사가 꼭 길다고 좋은 것만도 아니다. 훌륭한 역사란 그 나라 백성들이 모두 더불어 다같이 얼마나 인간답게 살았는지가 중요할 것이다.  

 

만약 김일성이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를 적화하였다면 그는 우리 역사에서 신라 태종 무열왕, 고려 왕건에 버금가는 최고의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을 지 모른다.왜냐하면 그는 외세를 몰아내고 한반도를 통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북에서는 김일성이 북조선의 창업주요 위대한 통일사업을 진행하였지만 실패한 최고의 영웅으로 신격화되어 있다. 그러나 휴전이 된지 어언 60년, 아직도 한반도는 전쟁이 진행중이다.

 

문제는 어느 체제가 국민들을 인간답게 살게 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것이다. 이 세상에 어떤 정권도 완벽한 정권은 없다. 최고 지도자는 바른지 몰라도 주변에 빌붙어 있는 권력자들이 항상 탐욕을 부리기 때문이다.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역사 드라마 '궁중 잔혹사'에 나오는 인조의 후궁 조씨와 김자점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될 것이다.  

 

오늘 가슴아픈 6.25를 맞아 63년 전 발발한 6.25 전쟁(한국전쟁)을 본격적으로 기술하려 한다. 지난 처참한 과거를 이성과 혜안의 밝은 눈으로 제대로 잘 살피고 반성하며, 오늘의 현실을 평가하고, 그리고 우리들이 나아갈 미래를 설계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자신의 역사를 제대로 모르는 자, 미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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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발발 전 상황

 

북한에 진주한 소련 군정당국은 남북간의 왕래와 일체의 통신연락을 단절시킴으로써 38도선을 남북을 가르는 정치적 경계선으로 만들었으며, 공산화통일이 보장되지 않는 어떠한 통일정부수립도 거부함으로써 한반도의 반영구적인 정치적 분단을 강요하였다. 한반도에서의 지배권 강화를 목표로 하는 소련의 기도와 적대정부의 출현만은 절대로 반대하는 미국의 입장이 타협될 수 없었다. 따라서 한국의 통일독립 문제의 해결은 극히 어려웠으며 이 문제를 위해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도 결렬되고 말았다.

 

1947년 중반에 이르러 미국은 마침내 단일정부의 수립과 신탁통치의 실시를 전제로 하여 한반도를 통일하려 했던 종래의 대한 정책을 포기하고, 분단의 고정화라는 기정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한반도의 세력균형을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유엔은 1947년 제2차 총회에서 통일된 한국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1948년 5월 31일 이전에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하기로 결의하고, 선거감시를 위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유엔이 결의한 전국적 범위에서의 총선거는 1948년 1월 소련 군정당국이 이의 수락을 거부하고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지역 출입을 막음으로써 좌절되었다.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유엔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실시'를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38도선 이남지역에서 유엔 감시하의 자유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국회가 구성되었으며, 1948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의 건국이 세계만방에 선포되었다. 소련군의 비호 아래 북한지역을 장악한 김일성 등 공산주의자들은 1948년 9월 9일 이른바 '흑백선거'에 의하여 북한지역에 독자적 공산정권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 제국의 승인을 얻어냈다. 그러나 1948년 12월 12일 제3차 유엔총회는 대한민국정부만이 '한반도에 존재하는 유일한 합법정부'(유엔 총회결의 195 Ⅲ호)임을 결의함으로써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서 대한민국의 법통을 확인하였다.

 

하국전쟁이 발발하기전에도 38선 일대에서는 여러 번의 소규모 전투가 발생하였다.  1949년부터 1950년 6월24일까지 전투 횟수는 총 874회나 되엇다. 남한군이 북한군을 가장하여 38선 이북 지역으로 수 킬로미터나 침투하여 고지를 점령하도 하고 북한군 기지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포까지 동원하여 공격하기도 하였고 비행기까지 동원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북한군도 적극적으로 남한 지역내로 침투하여 군부대를 공격하거나 주요 요인을 살해하기도 했다.

 

충돌은 황해도 옹진 반도에서 개성, 의정부, 춘천, 강원도 양양까지 국부적 충돌이 아닌 작은 전쟁이 계속 벌어지고 있었다. 이 지역은 북한군이 한국전쟁이 발발시 주 공격로이기도 하다.  

 

공산당 또는 사회주의 계열 항일무장독립투사를 사칭한 김일성 세력이 장악한 북한 지역에서는 공산당 일당 통치가 시행되면서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강압하였고 친일매국노들을 처단함은 물론 사상무장과 군사력 증강에 전력하면서 남한을 무단점령한 외세인 주한미군을 몰아내고  외세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 한반도 전체를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로 만들고자 목표를 세우고 소련의 지원하에 착실히 무장을 진행시킨데 반하여 남한에서는 미군정 치하에서 이승만이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친일매국노들을 재등용하고 또 그 반대세력들이 갈라져 좌.우 이념대립으로 서로간 살륙전을 전개하며 혼란스러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또 남한은 미군의 소극적인 지원으로 제대로 된 군대를 갖추지조차 못하고 있었다.

 

남한의 이승만 정권은 권력을 장악할 당시 친일 매국노들을 대거 재등용하면서 국민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갖가지 부정부패로 민생은 극도로 피폐하였다. 당시 국민들은 미국의 원조물자에 의해 밀가루, 옥수수 가루, 우유 가루 등으로 연명하였고 당시의 상황은 장개석의 국민당과 70년대 패망한 월남 티우 정권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일제 패망 후 미군이 한반도에 일본군 무장해제 이후 한반도에 주둔할 하등의 이유가 사실은 없었다. 맥아더의 포고령에는 강제 점령군의 지위로 주둔하면서 미군정을 실시하고 남한 지역 안정화에 주력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군이 군사고문단만 남겨 놓고 철수하자 남한 지역은 무력 공백 상태가 되고 말았다.

 

김일성은 그러한 과정에서 '한반도 통일전쟁'이라고 부르면서 전쟁 준비에 광분하였고 외세를 몰아낸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북한 지역 주민 및 북한군을 독려하였던 것이다. 결국은 김일성의 통일전쟁은 승리하지 못햇을 뿐이라며 김일성에 동조하는 세력들은 안타까워 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만약 월맹의 호지명 처럼 성공하였다면 지금쯤 그는 적화통일된 한반도에서 역사적인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6.25 전쟁)

 

한국 전쟁(韓國戰爭, 6·25 전쟁, 조선 전쟁, 영어: Korean War, 중국어: 朝鮮戰爭, 朝戰, 일본어: 朝鮮戦争)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경에 일어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의 전쟁이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경, 한반도를 지나는 북위 38도선 이북 지역을 점유하고 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선인민군이 38도선 이남 지역을 점유하던 대한민국을 침공함으로써 발발하였다.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휴전 협정으로 인하여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양측은 전쟁을 중단하였다. 현재까지 서류상으로 휴전 상태지만, 휴전 이후에도 쌍방 간에 크고 작은 분쟁이 발생하고 있다.

 

개요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경, 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소비에트 연방 스탈린의 지지를 받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김일성소비에트 연방에서 지원한 전차를 앞세워 38도선을 넘어 대한민국을 기습 남침하였다. 오전 9시경에는 개성방어선을 격파하고 당일 오전에 동두천포천을 함락시켰다. 26일 오후에 의정부를, 27일 정오에는 이미 서울 도봉구의 창동방어선을 넘었다. 창동방어선이 뚫린 대한민국 국군은 미아리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조선인민군의 전차에 의해 붕괴되었다. 28일 오전 2시 30분에는 한강에 있던 한강대교가 폭파되었고, 이후 서울에는 공산군이 진주하게 되었다.

 

7월 14일에는 대한민국 국군의 지휘권이 미군에게 넘어갔다. 조선인민군의 공세에 밀린 대한민국 정부대전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이전하였다. 1950년 9월 15일에는 더글러스 맥아더인천 상륙 작전으로 같은 해 9월 28일낙동강 방어선을 넘어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했으며, 10월 19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인 평양까지 다다랐으나,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인민지원군이 개입하여 전세가 요동치게 되었으며, 그 와중에 거창 양민 학살 사건, 국민 방위군 사건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3년 동안 계속된 전쟁으로 수많은 군인 및 민간인이 사상하였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측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그 결과로 남·북 간의 적대적 감정이 커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한국 전쟁(6·25전쟁)
(냉전의 일부)
한국 전쟁 중의 사진들
한국 전쟁 중의 사진들
날짜 1950년 6월 25일 ~ 현재
(1953년 7월 27일부터 휴전 협정 발효)
장소 한반도 전역
결과 현재 휴전 협정 체결 후 정전상태 유지중
  • 휴전선의 생성
  •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
  • 본격적인 냉전체제 돌입
  •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중앙집권 강화
교전국
Flag of the United Nations.svg 국제 연합:
  • 대한민국 대한민국
  • 미국 미국
  •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
  • 영국 영국
  • 캐나다 캐나다
  • 뉴질랜드 뉴질랜드
  • 터키 터키
  • 네덜란드 네덜란드
  • 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
  • 콜롬비아 콜롬비아
  • 벨기에 벨기에
  • 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 제국
  • 프랑스 프랑스
  • 그리스 왕국 그리스 왕국
  • 필리핀 필리핀
  • 남아프리카 공화국 남아프리카 연방
  • 타이 타이

의료 지원국

  • 인도 인도
  • 이탈리아 이탈리아
  • 덴마크 덴마크
  • 스웨덴 스웨덴
  • 노르웨이 노르웨이
  • 이스라엘 이스라엘

기타 지원국

  • 중화민국 중화민국
  • 일본 일본
  • 엘살바도르 엘살바도르
  • 쿠바 쿠바
공산군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 소비에트 연방 소비에트 연방

의료 지원국

  •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슬로바키아
  • 폴란드 폴란드 인민 공화국
  • 헝가리 헝가리 인민 공화국
  • 불가리아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 Flag of Romania (1965-1989).svg 루마니아 인민 공화국

기타 지원국

  • 몽골 몽골 인민 공화국
지휘관
대한민국 이승만
국제 연합 미국 더글러스 맥아더
국제 연합 미국 매슈 리지웨이
국제 연합 미국 마크 웨인 클라크

현재

  • 대한민국 박근혜
  • 대한민국 김관진
  • 대한민국 정승조
  • 국제 연합미국 제임스 D. 서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박헌영
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
중화인민공화국 펑더화이
소비에트 연방 이오시프 스탈린

현재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장성택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영춘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리영호
병력
UN군 사령부:[2]
  • 대한민국 대한민국 국군 590,911 명
  • 미국 미국군 480,000 명
  •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 국방군 8407 명
  • 캐나다 캐나다군 2만 5687 명
  • 뉴질랜드 뉴질랜드 국방군 3794 명
  • 영국 영국군 5만 6000 명
  • 필리핀 필리핀군 7420 명
  • 터키 터키군 1만 4936 명
  • 네덜란드 네덜란드군 3522 명
  • 벨기에 벨기에군 3171 명
  • 타이 타이 왕국군 1,294 명
  • 그리스 그리스군 1,263 명
  • Flag of Ethiopia (1897-1936; 1941-1974).svg 에티오피아 국방군 1,271 명
  • 프랑스 프랑스군 1,119 명
  • 콜롬비아 콜롬비아 왕국군 1,068 명
  • Flag of South Africa 1928-1994.svg 남아프리카 연방군 826 명
  • 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군 44 명

총계:120,0733 명

공산군: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인민군 260,000 명
  • 중화인민공화국 인민지원군 750,000 명
  • 소비에트 연방 소련군 26,000 명

총계: 1,036,000 명

피해 규모
대한민국
군인
14만 9005명 전사
71만 783명 부상
13만 2256명 실종
민간인
37만 3599명 사망
22만 9625명 부상
30만 3212명 행방불명
총계
52만 2604명 사망
94만 408명 부상
43만 5468명 실종
총계 189만 8480명 사상

미국
3만 6940명 전사
9만 2134명 부상
3737명 실종
4439명 포로
총계 13만 7250명
오스트레일리아
339명 전사
1216명 부상
3명 실종
26명 포로
총계 1584명
캐나다
312명 전사
1212명 부상
1명 실종
32명 포로
총계 1557명
영국
1078명 전사
2674명 부상
179명 실종
997명 포로
총계 4908명
뉴질랜드
23명 전사
79명 부상
1명 실종
총계 103명
필리핀
112명 전사
229명 부상
16명 실종
41명 포로
총계 398명
터키
741명 전사
2068명 부상
163명 실종
244명 포로
총계 3216명
네덜란드
120명 전사
645명 부상
3명 포로
총계 768명

총계: 474,000명 이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군인
29만 4000명 전사
22만 6000명 부상
12만 명 실종 및 포로
민간인
40만 6000명 사망
159만 4000명 부상
68만 명 행방불명
총계
70만 명 사망
182만 명 부상
80만 명 실종
총계 332만 명 사상

중화인민공화국
13만 5600명 전사
20만 8400명 부상
2만 5600명 실종 및 포로
총계 36만 9600명 사상
소비에트 연방
315명 전사
500명 부상
총계 815명

총계: 1,190,000명 ~ 1,577,000명 이상.


 

 

 

 

경과

 

경위

 

1950년 6월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3만 5천여 명의 지상군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이때 대한민국의 병력은 정규군 19만 5천여 명, 해양경찰대 9천여 명, 경찰 68만 5천여 명 등이었다. 조선인민군은 소련제 T-34/85형 탱크 242대, 야크 전투기와 IL폭격기 200여 대, 각종 중야포와 중박격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반면 대한민국 국군은 한국 전쟁 직전까지 공군은 대공포화가 없는 지역의 정찰만을 위해 쓸 수 있는 L-4 연락기 및 L-5 연락기 외에, 전쟁 발발 직전 국민 성금으로 캐나다로부터 구입한 T-6 텍산 10대를 추가한 것이 전부였다. 육군은 탱크와 기갑 차량(장갑차)은 전무했으며, 유일한 독립 기갑연대의 장비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정찰용으로 쓰인 37mm 대전차포를 탑재한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1개 대대가 전부였다. 대전차 화력으로는 보병용의 2.36인치 바주카포와 포병 병과의 57mm 대전차포가 있었지만, 그것은 성능이 향상된 후기형 T-34를 상대하기에는 힘든 무기였다.(미국은 2차 대전 때 57mm 포로도 충분히 T-34를 사냥했었기 때문에 한국군이 57mm포를 보유하고도 제대로 활용을 못했다고 생각했었다. 후에 스미스 대대가 치른 오산 전투에서야 자신들이 오판했음을 깨닫게 된다).

 

또한 현대전의 핵심 지원 전력인 포병은 105mm 화포와 4.2인치 박격포만으로 무장하고 있었을뿐더러 그나마도 사단 당 1개 대대만 배치되어 있었고, 포탄도 부족했다. 실제로 개성 - 문산 - 파주 축선을 방어하던 국군 1 보병사단은 전투 하루 만에 포탄이 바닥나 버렸던 것이다. 전체적으로 대한민국 국군은 단지 15일간 전투 행위 수행이 가능한 보급품만 가지고 있었다.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49년 9월 30일 외신 기자 회견에서 이승만은 "우리는 북한의 실지(失地)를 회복할 수 있으며 한의 우리 동포들은 우리들이 소탕할 것을 희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당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라디오 방송에서 "아침은 개성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며 호전적인 발언을 하였는데, 이 발언은 미국이승만이 북침을 노린다고 오인하게 하여 탱크와 전함, 전투기 등 공격에 필요한 무기를 한국군에게 제공하지 않은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1950년 6월 24일 육군본부 정보국(국장 장도영, 북한반장 김종필, 문관 박정희)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규모 병력이 38선에 집결했다는 보고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군 수뇌부는 바로 그 날 비상경계를 해제하였다. 그 날은 주말이라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이 외출했다. 그 날 저녁 육군본부 장교 클럽 낙성 파티에는 전방부대 사단장들까지 초청되었었다.

 

그외 전쟁 발발 2주 전 대부분의 지휘관을 교체하고(숙군 작업의 일환임], 1주 전 대부분의 전방 부대의 위치를 변경하고(여순 사건의 여파로 인한 것임], 전방 부대의 중화기와 차량 중 60%가량을 후방으로 보내는 등(일제 점검 목적임) 개별적으로는 이해가 가나 종합적으로는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집중적으로 하여, 이형근은 저서 《군번 1번의 외길인생》에서 6.25 초기의 10대 불가사의를 제기하며 군지휘부(이승만, 채병덕 참모총장, 김백일 참모장, 신성모 국방부장관, 김경근 국방부차관) 안에 통적 분자가 있다고 주장하게 되는 원인이 되며, 일각에서는 이승만 남침 유도설의 근거가 되었다.(이형근은 군번 1번 문제로 일본 육사 선배인 채병덕과 개인적으로 사이가 매우 안좋은 상태이며, 이것은 국군 창설 첫날이자 최초의 파벌 싸움의 시초가 되었다)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의료부대인 조선인민군 949군부대는 6월 24일 오전 1시 38선 부근에 야전병원을 설치하고 의료요원들을 각 해당 부분에 배치하였다. 6월 25일 오전 12시까지 치료준비사업을 완료한 병원은 전투준비상태로 대기하였다. 25일 오후 2시부터 부대는 벌써 전상(戰傷) 환자 취급을 시작하였다.

 

 

 

 

 

전쟁 발발 및 경과

 

 

 

왜관(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서 미군이 버려진 T-34/85를 살펴보고 있다. T-34/85는 공산국가의 맹주격인 소련에서 대량으로 제작하여 여러 공산국가에 뿌린 관계로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뿐만 아니라 공산계의 주력전차였다

 

 

 

 

개전 초기 조선인민군 보병의 기본 화기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인민군은 38도선 전 전선에 걸쳐 총242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해 왔다. 단 한 대의 전차도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당한 대한민국 국군은 인민군에게 밀려 후퇴하였다. 이전부터 38선 부근에서의 소규모 충돌이 많았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들은 많이 놀라지 않았으나, 잠시 뒤 군용차가 거리를 질주하고 "3군 장병들은 빨리 원대로 복귀하라"는 마이크 소리가 요란해지면서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지만 무슨 일인지 알 길은 없었다. 오전 7시가 넘어서야 방송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군이 침공해 왔다는 소식만 간단히 전하고 "장병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빨리 원대복귀하라"는 공지방송만 반복하고 있었다.

 

1950년 6월 26일 밤 10시 반경 이승만도쿄에 있는 미국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승만은 라디오 연설로 서울시민은 정부를 믿고 동요하지 말라는 방송을 통해, 서울 시민들이 서울 안에 그대로 머무르도록 독려한 반면 그 자신은 방송 진행중에 각료들과 함께 특별열차로 대전으로 피신하였다. 6월 27일 새벽 2시에 이승만서울 시민들을 버리고 대전행 특별 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내려갔다. 6월 27일 새벽 4시에 열린 비상 국무회의에서 정부의 수원 천도가 정식으로 의결되었다. 이승만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로 옮겨갔다. 6월 27일 아침 6시에 서울중앙방송은 수원 천도 소식을 전했으나, 이를 취소하라는 압력으로 취소 방송이 있었다. 서울 시민들이 전혀 모르고 있던 상황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군이 미아리 고개까지 쳐들어 오자 그 때서야 서울 시민들은 대피하기 시작했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북으로 도망갔던 경우와 너무나 흡사하다. 서울 시민들은 정부의 발표 내용을 그대로 믿고만 있었고 갑작스,런 피난길에 한강대교 일대에서 피난민들이 구름처러 몰려들었고 한강이 조기에 폭파되자 그때 다리위에 있던 수많은 피난민들이 폭사, 익사, 압사한 시민이 부지기수였다. 서울 시민 중 젊은이들은 인민군에 차출되어 편성되었고 낙동강 전선으로 대거 투입되어 꽃다운 나이에 같은 동족끼리 처참한 총뿌리를 겨누면서 싸우다가 죽어갔다.

 

 

 

북의 남침전략

 

당시 북한군의 전략은 개성-문산축선, 동두천-의정부 축선, 철원-포천 축선, 화천-춘천 축선, 동해안 축선 등 5개의 주공격로로 선정하고 개성-문산축선은 한국군을 고착.견제하면서 동두천-의정부 축선, 철원-포천 축선의 주력으로 하여금 한수이북에서 한국군을 1차적으로 이중포위.격멸하고, 화천-춘천 축선의 주력으로 하여금 화천-춘천-지평리-수원.오산 방향으로 진출하여 한강이남에서 2차 포위망을 구성하여 한국군의 주력을 조기에 섬멸하고, 3단계로 태백산맥을 통하여 침투한 침투부대와 해상침투부대 등과 협공하여 남한 전지역을 가장 빠른 시간내에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당시 남한에는 남로당 잔당들과 좌경화 인사들이 군대와 정계에 널리 분포되어 있었으며 여순반란, 제주 4.3폭동, 대구.서울 등지에서 좌익 폭동이 빈발하였으며 북한군이 남한에 진주하면 남한 전역에서 동조세력이 총궐기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한국군의 초기대응

 

한국군 총참모장 채병덕 장군은 일제치하 병참장교로 근무했던 사람으로 전략.전술은 물론 기동전을 전개하는 북한군의 공격에 축차적인 병력을 투입하는 등 우를 범하면서 개성-문산 축선, 동두천-의정부 축선, 철원-포천 축선은 적 전차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전선이 밀리면서 계속 후퇴하였고, 축차적으로 투입된 한국군은 소총과 수류탄으로 적 탱크와 맞서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한국군의 방어계획도 구체적으로 수립된 상태도  아니였으며 후방에서 올라오는 부대를 순차적으로 전선에 투입시키에 바빴고, 적 상황에 대한 제대로 된 아무런 정보도 없었다. 적의 의도도 몰랐고 병력규모나 포위전술도 몰랐다.

 

한국군에게는 전차는 한대도 없었으며 제대로 된 대전차 무기도 없었다. 오로지 소총과 수류탄, 화염병이 전부였다. 전선에 투입된 수많은 젊은 병사들이 처음보는 괴물같은 적 전차 앞에서 낙엽처럼 쓰러졌고 적 전차는 파죽지세로 미아리 고개를 넘어오고 있었으며 서울 함락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당시 한국군 선무대는 서울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서울 시민들에게 집에서 나오지 말도록 방송하면서 아군이 적을 물리치고 북진을 하고 있다는 등 거짖말로 시민들을 안심시키려 하고 있었다. 

 

화천-춘천 축선은 아군 6사단의 춘천남쪽 고개에서 선방하고 있었다. 그러자 적은 수원 이남에 목표를 둔 2중포위 시도가 지연되자 해당 군단장을 교체하는 등 춘천 지역 전선을 독려하였지만 춘천 지역의 아군 6사단은 효과적인 방어전투로 적의 기도를 분쇄하면서 전선조정을 위해서 남쪽으로 서서히 후퇴하였다. 한편 동해안 축선은 태백준령으로 침투한 침투부대와 해상침투부대가 7번 국도를 다중으로 차단하자 전선은 남으로 계속 밀리고 있었다.

 

 

 

조선인민군의 서울 점령

 

미아리 고개를 넘은 적 전차 수대가 서울시내로 진입하자, 정부의 선무 방송에 마음 놓고 있던 시민들은 북진한다던 국군은 커녕 인민군 전차가 서울에 갑자기 나타나자 수도 서울은 공황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갑자기 수많은 서울 시민들은 황급하게 남쪽으로 피난을 가기 위해 한강대교 일대로 몰려 들었다. 당시 한강대교 폭파 임무를 맡은 아군 공병장교는 시민들이 계속 한강대교를 건너오는 상황이고 시민들에 섞여 침투한 적 침투부대에 의해 폭약과 도화선이 해체되거나 절단되는 문제를 우려하여 상부의 폭파지시를 받으려고 수차례 시도하였으나 상부 지휘관들과 무선교신은 물론 연락이 되지 않자 책임장교는 아군의 주력부대가 미쳐 빠져나오기도 전에 한강대교는 다리위 시민들과 같이 천지를 진동하는 엄청난 폭음을 내며 폭파되었다. 전후 한강대교 조기폭파 문제로 공병감이 총살형에 처해지는 비운의 주인공이 된다. 수많은 시민과 아군 주력부대는 지리멸렬 상태로 모든 무기와 장비를 버리고 맨몸으로 한강을 헤엄쳐 건너고 있었다.

 

6월 28일 새벽 인민군의 탱크가 서울 중심부에서 목격되었다. 그러나 조선인민군은 전세가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6월 30일이 될 때까지 한강을 건너지 않았다. 이는 여러 견해가 나뉘고 있는데, 첫째 춘천전투의 패전으로 인한 포위계획 실패, 둘째 도하장비 부족, 셋째 남로당 책임자인 박헌영이 전쟁 발발시 20만 명의 남로당원의 일제 봉기로 대한민국 자체가 조기 붕괴시키겠다고 호언 장담하며 이를 기다리자고 주장 하였다는 3가지 설이 있는데 여러 가지 견해 중 많은 학자들이 춘천전투에서의 국군의 방어가 인민군을 저지한 것이 서울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라는 이유로 보고있다. 국군 2사단의정부에서 조선인민군에 패퇴하고 남은 병력이 지금의 동작대교에서 광나루까지 방어진을 구축하고 조선인민군의 도하를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처형된 미군

 

 

 

 

보도연맹 사건

 

 

6월 27일 저녁에 서울 근교까지 밀어닥친 조선인민군들과 육박전을 감행했으나, 워낙 전세가 불리하게 전개되었고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동서해안을 위협하면서 전라도까지 위협하자, 이승만은 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로 옮겨갔다.

 

6월 27일 보도연맹원에 대한 처형이 집행됐다. 이 처형은 이승만이 명령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전쟁 초기, 대한민국 국군 보병의 기본 화기

 

 

 

대한민국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군이 한강을 넘어서 진격할 것을 우려해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강에 단 하나뿐인 다리였던 한강철교를 폭파하였다. 이 폭파로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고 최소한 500명이 폭사하였다. 한강 철교의 폭파로 국민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정부의 이 같은 실책은 비판을 받고 있다. 당시의 전황으로 볼 때 6~8시간의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기 폭파로 인명 살상은 물론 병력과 물자 수송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는 비판이 대두되자, 이승만 정권은 나중에(8월 28일) 당시 폭파 책임을 맡았던 공병감인 대령 최창식을 '적전비행죄'로 체포해 9월 21일 사형을 집행했다. 최창식은 12년 만에 재심을 거쳐 1962년 무죄 판정을 받아 사후 복권되었다. 한강 철교의 폭파는 신성모국방장관이 지시했지만, 총리 이범석이 건의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한강 철교의 폭파로 국민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고 조선인민군은 가교를 설치여 한강을 도하하기 시작하였다.

 

서울시민 144만6천여 명 가운데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하기 전에 서울을 빠져나간 사람은 40만명이었다. 그 가운데 80%가 월남동포였고 나머지 20%인 8만명이 정부고관, 우익정객, 군인과 경찰의 가족, 자유주의자들로 추정된다. 나머지 시미들은 그대로 서울에 남아 있게 되어 인민군의 치하에서 전선으로 차출되거나 납북, 처형, 전선 지원 인력 등에 동원되었다.

 

한편,  이승만일본 야마구치 현에 망명정부를 설치하는 방안도 세우고 있었다. 정권 관리들은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야마구치현에 망명정부 수립의사를 일본에 전달했으며, 일본 정부는 야마구치현 지사 다나카에게 6만여명을 수용할 시설 및 식량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 했다. 당시 다나카 지사는 현의 소학교를 망명정부 시설로 확보하는 방안과 일본 정부에 대해 특별 식량배급요청 여부를 검토하기도 했다. 1950년 6월27일 이승만은 대통령과 내각으로 구성된 망명정부를 일본에 수립하는 방안을 주한 미국 대사에게 문의해왔고 이는 그대로 미 국무성에 보고되었다.

 

 

 

 

유엔군의 참전

 

 

 

1950년 부터 1953년간의 한국전쟁의 경과

 

 

한편 대한민국 정부전쟁이 일어나자 주미 한국대사 장면과 서기관 한표욱에게 긴급 훈령을 내려 미국 국무부에 사태의 긴급성을 알렸고, 6월 26일 주미한국대사 장면백악관으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을 방문, 미군의 한국 파병을 요청하였다. 미국유엔 안보리를 열어 한국 문제를 건의했다. 이에 따라 UN 안전보장이사회6월 26일 오전 4시에 소집되었고,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선인민군의 즉각적인 전투 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청하는 결의안을 9대 0으로 가결하였다.(유고슬라비아는 기권)

 

 

 

 

장면, 주미한국대사
그는 미국과 UN에 대한민국을 도와줄 것을 호소하여 미군의 개입을 성사시킨다.

같은 날 주미한국대사 장면은 미국 상, 하원의원들을 찾아다니며 한국에 파병해줄 것을 호소하였고, 결국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콜롬비아, 터키 등 16개국의 회원국이 유엔군을 조직하여 한국전에 참전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대전까지 들어온 인민군이 진로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호남, 경북 왜관(낙동강), 영천, 포항 등지로 육박하자, 대전에서 대구로 내려와 있던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한국군을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편입, 대폭 증강하여 낙동강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고 반격하였다.

"유엔 승인을 받은 대한민국은 현재 북한 괴뢰군의 불법 공격을 받고, 이에 대항하여 고전 분투하고 있다. 북괴군의 대규모 침공은 우리 대한 민국 정부를 전복시키고, 북한 괴뢰 정권 치하에 몰락시키려는 야망에서 임이 분명하다. 이런 불법 공격은 인도와 민심을 거스르는 죄악일 뿐 아니라, 국제 평화와 안전에 대한 명백한 위협이니 만큼 귀 안보 이사회에서 침략자들로 하여금 일체 공격을 즉각 중지케 하고, 38선 이북으로 철퇴하도록 강력히 조처해 줄 것을 호소한다."

미국과 UN은 대한민국 영토에서 조선인민군을 철수하라는 결의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에 통고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아 6월 27일 UN 안보리 이사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해 한국 땅에서의 즉각 철수를 권고하였다. "회원국들에게 군사 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7대 1(기권2)로 결의했으며, 이 날 해리 S. 트루먼더글러스 맥아더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해, 공군의 지원을 즉각 개시하라"고 명령했다.

 

 

맥아더 장군 전선시찰

 

당시 직접 전선을 관찰하기 위해 급히 날아와서 노량진 한강 제방에서 북쪽을 바라보던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적의 주력을 1차적으로 저지하기 위해서는 미군 투입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한국군 전투력은 주력이 이미 섬멸된 상태로 적의 공격을 저지하기에 역부족이라고 판단하고,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를 급거 편성토록 지시하고 적의 주력을 서서히 저지하면서 미군을 투입하고 최후에는 낙동강 방어선을 구상했다. 적을 남한지역 깊숙히 끌여들인 후에 원산이나 진남포, 인천지역에 주특기인 상륙작전을 구상했다. 만약 맥아더의 의도대로 적의 주력이 낙동강 전선에 집중한다면 상륙작전의 승패가 관건이 되었다. 일본 사령부로 돌아간 맥아더는 극비로 참모들에게 3개 지역에 대한 상륙작전 가능성과 목표달성 가능성을 검토토록 지시했다.

 

 

 

UN군의 참전 결의

 

맥아더는 6월 29일 하네다에서 비행기를 타고 수원으로 와서 한강방어선지역을 시찰하고 난 뒤 워싱턴에 지상군 투입을 요청하였다. 결국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콜롬비아, 터키 등 16개국의 회원국이 유엔군을 조직하여 한국전에 참전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스군의 전설로 불리는 명장 몽클라르 장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자신의 계급을 스스로 중장에서 중령으로 강등시키고 대대장의 직함으로 프랑스 군을 이끌고 미군에 예속되어 참전하였으며 터키군의 영웅 타흐신 야즈즈 장군 역시 2개 여단 병력을 이끌고 참전했다. 콜롬비아의 게릴라 용병부대가, 에티오피아의 경우 황제의 특명에 의해 아프리카 원주민 병력과 정규군과 황제 친위대가, 뉴질랜드의 마오리족 등등 참전국은 다양한 에피소드를 갖고 대한민국을 도와주기 위해 참전했다. 이들 중 총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이들은 본국에서 창과 화살을 준비해오기도 했으며 미군에서 총을 지급해주기도 했다.

 

7월 1일 영국프랑스는 "유엔군사령부의 설치와 유엔 회원국들의 무력 원조를 미국 정부의 단일 지휘 아래 둔다"는 공동결의안을 유엔 안보리에 제출했다. 이 결의안은 7월 7일 7대1(기권3)로 가결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을 비롯하여 오스트레일리아·벨기에·캐나다·콜롬비아·프랑스·그리스·에티오피아·룩셈부르크·네덜란드·뉴질랜드·필리핀·타이·터키·영국·남아프리카 연방 등 16개국 군대로 유엔군이 편성되었다.

 

 

 

 

 

한국 전쟁 중, 정일권(왼쪽에서 세번째], 백선엽(오른쪽에서 세번째 맨뒷줄], 아이젠하워 장군(맨 왼쪽)

 

 

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는 하일레 셀라시에 1세 황제의 주도 하에 황제의 친위대를 포함하여 6,037명이 대한민국에 파견되어 123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당했다. 황제는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뉴스가 전해지자 1950년 8월부터 파병 준비에 들어갔다. 이번에야말로 국제 사회가 하나로 똘똘 뭉쳐 침략군을 물리치는 집단 안보 보장 체제를 굳건히 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셀라시에 황제에게 출국 신고를 마친 칵뉴 부대는 마침내 다음 날 오전 9시 아디스아바바 역에서 홍해의 지부티 항구를 향해 출발했다. 수많은 시민과 정부 고관들이 나와 부대원들을 환송했다.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은 1951년 4월 13일 아디스아바바 궁정에서 출국 신고식을 한 뒤 한국으로 떠났다. 지부티 항구에는 미군 수송선 제너럴 매크리아 호가 대기하고 있었다. 4월 16일 밤 칵뉴 부대원이 모두 승선하자 미군의 수송선은 닻을 올렸다.

 

 

 

미군의 참전

 

 

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투입

 

배와 철로를 이용하여 오산 북쪽지역 '죽미령' 언덕에 급거 투입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B,C중대를 근간으로 증강된 대대규모로 북한군과 처음 조우하는 최초의 미군부대가 되었다. 오산북방 1번국도가 지나는 언덕에 B중대는 90,117고지에, C중대는 92고지 일대, 한국군 17연대 선발대 중 일부 부대는 우측 88고지에 포진하고 적 전차와 선두부대를 격파하기 위해 105밀리 5번포를 고개 정상 부근에 추진배치하여 대전차고폭탄 6발을 준비했으며 7,62밀리 무반동총, 기관총을 배치하는 등 급편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피난민들이 국도를 따라 줄줄이 남하를 하고 있었으며 멀리서 포성이 들리고 적 전차의 굉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종전 후 일본에 잔류한 미군은 종전의 승리감에 도취되어 고참들은 대부분 전역을 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신참들로만 구성되어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은 상태에서 전투경험도 없는 병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스미스 중령'은 처음 전선에 투입된 병사들을 일일이 돌아 다니면서 격려하고 주사격 방향과 화집점 등을 알려주면서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추진포를 제외한 나머지 5문의 105밀리 포병부대는 죽미령 고개 후방 수청리에 포진하였으며 탄약은 1200발 이었다. 

 


【오산=뉴시스】   오산시는 5일 10시제56주년 UN군 초전 기념일을 맞아  내삼미동소재 죽미령고개에서 유엔군 초전기념 및 추도식을 거행했다.    자유와 평화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북한군과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미 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원
【오산=뉴시스】 오산시는 5일 10시제56주년 UN군 초전 기념일을 맞아 내삼미동소재 죽미령고개에서 유엔군 초전기념 및 추도식을 거행했다. 자유와 평화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북한군과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미 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원

 

 

 

북한군과 '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최초 교전

 

북한군 제4사단 107전차연대의 선두전차 8대가 1.8키로 전방에 나타났다. 105밀리 포가 대전차고폭탄을 장전하고 대기했다. 전차가 굉음을 울리면서 1번 국도 전방에 모습을 나타냈다. 한대...두대...세대... 적 전차가 가까이 올 때까지 사격을 중지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전차뒤에는 후속 전차들이 줄을 지어 달려오고 있었다. 맨 앞 적 전차가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대전차포 사수에게 사격신호를 보냈다. "꽝!"  대전차포 발사... "꽈꽝!"  포탄이 폭발하면서 전 전차는 시커먼 연기에 휩싸였다. 잠시후 연기가 사라지자  전차의 모습이 보였다. 꿈틀하는 적 전차... 적 전차는 다시 아무일 없다는 듯이 미군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시 T-34전차는 2차대전 말기 소련군이 개발한 전차로 최신예 전차였다. 미군의 대 전차포탄은 적 전차의 장갑판을 뚫지 못했다. 이 모습을 본 미군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전차를 잡을 수 있는 대전차포가 적 전차를 잡을 수 없다는 사실에 진지의 미군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미군의 위치를 확인한 적 전차에서 기관총과 전차포가 불을 뿜었다. 진지 사방에 포탄이 작열하고 총알이 날아 들었다. 미군 대전차포가 제2탄을 발사했다. "꽝!" 전차에서 화염이 '번쩍' 일었다. "꽈-꽝!"  화염이 일고 잠시후 전차가 멈추었다. '스미스 중령'은 적 전차 괘도가 끊어진 사실을 확인하고 계속 사격을 명령했다.  적 전차에서 전차포가 발사되고 북한군의 총탄도 날아 들었다. 괘도가 끊어진 전차는 도로옆으로 비켜나고 후방 전차들이 계속 밀려 들었다. 총 36대의 적 전차중 4대가 파손되고 뒤따르던 전차들이 미군 진지를 지나 계속 남으로 내려갔다.  포병진지는 적 전차에 대하여 직접 조준사격을 실시했다. 부상병이 속출하자 스미스 중령은 적에게 퇴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하여 전부대원에게 오산으로 철수를 명령했다. 미군은 오산 '죽미령'고개 전투에서 처음 북한군과 의 전투에서 12시간 지연시키는 역활만 하였으며 150여명이나 전사상 당하는 참패를 당하였다. 

 


유엔군 첫 전장, 오산 초전지 (오산=연합뉴스) 1950년 7월 5일 경기도 오산 죽미령에서 벌어진 유엔군의 한국전 첫 전투시 미 제52 야전포병대대 사격 장면 

 

 

미 제24사단 전선 투입

 

6월 30일 해리 S. 트루먼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 목표를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함에 따라, 7월 1일 미국 육군 제24사단 21연대가 부산에 상륙했다. 이 부대는 대대장찰스 스미스(Charles B. Smith)중령의 이름을 따서 스미스 부대(Task Force Smith)로 알려졌다. 스미스 부대7월 5일 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조선인민군과 첫 교전을 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오산 전투 스미스 부대의 무참한 패배로 미국 지상군의 전선 투입이라는 위세만으로 조선인민군의 남침이 중단되기를 바랐던 더글러스 맥아더나 윌리엄 딘의 한가닥 기대는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나중에 더글러스 맥아더의 뒤를 이어 유엔군을 지휘하게 되는 매슈 리지웨이는 그의 회고록에서 맥아더는 침공군의 세력을 잘못 판단했으며 인민군 10개 정예사단 앞에 1개 대대를 투입한 것은 맥아더의 지나친 오만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스미스 부대의 참패를 성공이라고 자평했다. 미 지상군 참전에 예기치 않던 인민군이 미군 참전을 직접 목격하고 소련 전법에 따라 일단 전선을 재정비하면서 미군은 10일을 벌었다는 것이다.

 

전쟁발발 15일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인 7월 10일, 장면은 "38선은 의미를 상실했으며 전한국의 해방과 통일은 필수적"이라고 주장하였다. 7월 13일, 이승만은 미국 CBS와의 인터뷰에서 "조선인민군의 행동은 38선을 제거시켜 주었고, 38선에 의한 분단이 지속되는 한 한반도에서 평화와 질서는 결코 유지될 수 없다.", "침략자를 격퇴하는 데 있어 한국군은 결코 38선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고 주장하였다. 이승만의 이 언명은 미국을 크게 놀라게 하여 딘 애치슨으로 하여금 주한 미국대사 존 무초에게 그러한 언명을 모든 것을 다해 어떻게든 막으라는 전문을 화급히 치도록 했다. 미국은 38선에서 정지할 것이며 조선인민군을 그렇게 하였듯이 대한민국 국군을 그곳에서 막을 것이라는 미군의 성명도 발표되었다. 그러나 무초에 따르면 그는 노 정객 이승만의 입을 막을 수 없었다. 그에 따르면 한국민들은 전전부터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국부의 몰락 이후 깊은 절망에 빠져들어 우리는 어떻게 공산주의자들을 저지할 것인가 걱정하고 있었다. 장면과 이승만의 언명 속에서 대한민국의 리더십이 6월 25일의 침략을,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을 시점부터 이미 통일의 호기로 여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스미스 부대의 패전 이후, 미군윌리엄 F. 딘 소장이 이끄는 육군 24사단을 대전에 투입했다. 딘 소장은 대전에서 적의 선봉을 꺾고, 한강까지 북상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겠다고 장담했으나, 미 육군 24사단도 T-34에 대적할 화기가 없었다. 대전을 공격하는 조선인민군은 군인들의 숫자도 많았고, 사기가 높아 T-34를 앞세워 미 육군 24사단을 공격했다. 계속된 인민군의 침투공격에 상당한 손실을 내던 대전의 미 육군 24사단은 마침내 7월 20일 패주하고 말았다. 사방에서는 압도적인 숫자의 조선인민군이 밀려왔고, 지휘계통이 무너진 가운데 미 육군 24사단은 무질서하게 후퇴했다. 제24사단장인 윌리엄 딘 소장은 함께 후퇴하던 부상병에게 먹일 을 구하던 중 낭떠러지에서 실족하여 길을 잃었다가 인민군에 의해 포로로 붙잡혔다. 한편, 대한민국대전을 빼앗기고 난 다음에 대구를 거쳐 부산을 임시수도로 정했다.

 

이어서 미 24사단이 열차로 대전에 도착했다. 사단장 '딘' 장군은 공주-대전-추풍령 을 잇는 금강을 1차 방어선으로 구상하고 2개 연대를 전방에 배치하고 예비로 금산지역에 1개연대를 배치했다. 당시 북한군은 미군배치 사실을 알고 피난민을 가장한 침투부대를 미군 방어선 후방으로 침투시켜 통신선을 절단하고 후방지휘부를 습격하거나 병참부대를 공격하는 방법을 구사했다. 야음을 틈타거나 피난민속에 섞여 들어온 북한 침투부대로 인하여 미군은 지휘통신이 두절되는 초유의 사태를 당면하게 되자 각 부대는 적에게 포위될 것을 우려하여 각개약진으로 후방으로 허락없이 철수하자 '딘' 장군도 당황하기 시작했다. 적의 포탄과 총알이 사방에서 날아드는 등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각 연대는 연락이 두절되고 예하부대를 찿기에 바빠서 이리 저리 방황하다가 부상병들을 찝차에 13명이나 싣고 남으로 이동 중 침투한 적의 매복공격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지형도 잘 모르는체 부관과 수 주일 산중을 헤메다가 어느 민가에 숨어 들었다. 마을이 적에게 점령되자 그동안 '딘 장군'을 돌보아 주던 집주인의 신고로 '딘 장군'은 미군 장성으로는 처음 적의 포로가 되는 신세가 되었다.

 

▲미 24사단 병사들이 대전시내에서 인민군 저격병의 공격에 응사하며 시가전을 벌이고 있다.1950년 7월 20일.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적의 T34 전차를 저지할 화력이 없음. 3.5인치 로켓포 속히 공수 바람!”

1950년 7월초 대전 충남도청 3층에 지휘소를 차린 미 24사단장 딘 소장은 맥아더 장군에게 긴급 통신을 날렸다.전쟁이 시작되자 최초로 한국 전선에 들어온 24사단 예하 스미스부대와 34연대가 오산 평택 천안 등에서 잇따라 패배한 터였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대전-대구-부산에 이르는 경부 축(軸)에 최정예인 1군단의 3, 4사단과 2사단, 105, 107, 203 전차여단을 투입했다. 이들은 전차를 앞세워 천안시내 미군 방어선을 유린하고 34연대장 마틴 대령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딘 소장은 연기군 전의와 조치원에 저지선을 편 뒤 4일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인민군은 미군의 포병 및 공중폭격으로 큰 타격을 입었지만 주공을 3사단에서 4사단으로 교체하는 강수를 둬 기어코 조치원 일대를 장악했다. 미군은 다시 금강 남쪽에 방어전을 펼쳤지만 적의 강력한 공세에 밀려 7월 16일 밤부터 철수를 시작했다. 사정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18일 대전을 방문, 딘 소장에게 ‘20일까지 대전 사수’를 명령했다. 미국의 주력 전투부대가 한반도에 들어와 전선에 배치되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대전을 긴급 방문한 워커 사령관(왼쪽)은 딘 소장(오른쪽)에게 '20일까지 대전을 사수하라'고 명령했다.

딘 소장은 대전 방어의 중책을 34연대에 맡겼다. 19·21연대는 잇따른 패배로 전투력이 거의 소진된 상태였다. 부임 이틀째인 34연대장 뷰챔프 대령은 대전비행장(현재 둔산동)에 캠프를 두고 월평산성(상수도사업본부 부근)과 남선공원에 1개 대대씩 배치했다. 서남쪽 논산에서 들어오는 가수원과 동북쪽 신탄진을 지나 남하하는 오정동에도 소규모 병력을 보냈다. 갑천을 거점으로 대전 도심 진입을 막자는 것이었다.

7월 19일 새벽부터 적은 T34 전차를 앞세워 밀고 들어왔다. 인민군 4사단 5연대는 대대적인 포격을 퍼부은 뒤 107전차여단과 함께 갑천을 건너 월평산성의 미군 저항선을 돌파하고 비행장으로 진입했다. 연대장이 직접 3.5인치 로켓포를 쏘아 적 전차를 파괴하는 등 어렵게 진지를 사수했다. 병력이 적은 서남쪽도 상황이 급박했다. 논산에서 진입한 인민군 4사단 16연대는 1개 소대가 주둔 중인 가수원을 돌파하고 갑천을 건너 정림동 고개로 진입을 시도했다. 미군은 1개 대대를 급히 보내 도솔산 고지를 점령한 뒤 정림동 고개에서 적을 격퇴했다.

가장 심각한 것은 퇴로가 막혔다는 점이었다. 인민군 4사단 18연대는 경무장한 병력으로 보문산을 우회하여 대전에서 남쪽으로 빠지는 금산과 옥천의 도로를 장악했다. 말 그대로 미군은 사방이 포위된 형국이었다.

20일 미 24사단은 대전시내 일원에서 처절한 사투를 벌였다. 이날 새벽 인민군은 전차를 앞세워 유성-대전 도로로 들어섰다. 비행장의 연대본부를 유린한 뒤 수침교를 건너 시가지로 향하자 미군은 3.5인치로 대응했다. 적의 전차 2대 파괴됐지만 일부는 시내로 진입, 시내를 휘젓고 다녔다. 서남쪽을 방어하던 미군도 밤새 전투를 펼쳤지만 이날 오전 정림동 고개를 내줬다.


▲미 24사단이 대전전투에서 패배하고 철수한 1950년 7월 20일 대전역. 역 광장에는 군인과 경찰, 미군과 일반 시민이 뒤섞여 있고 뒷편에 시커먼 화염이 보인다.

오후 들어 인민군은 시내 곳곳에 출현했다. 13시경 충남도청 앞에서 적 전차를 목격한 딘 소장은 직접 지프차를 타고 추격, 3.5인치로 명중시켰다. 이날 미군은 모두 10대의 전차를 파괴했다. 그러나 인민군은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으로 대전시내 전역을 속속 수중에 넣었다. 곳곳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고 화염이 치솟았다. 미군은 모든 화력을 퍼붓고 항공지원까지 동원했지만 통신과 연락망이 두절돼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미군은 후퇴 과정에서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남동쪽으로 빠져나가려 했지만 판암동과 세천터널을 장악한 적의 공격으로 실패했다. 금산쪽 도로를 경유한 철수도 인민군 매복에 걸려 길을 잃고 뿔뿔이 흩어졌다. 19-20일 치러진 대전전투에서 미군은 3933명 중 전사 48명, 실종 874명, 부상 228명 등 1150명의 손실을 입고 전투장비도 65%나 잃었다. 딘 소장도 포로가 돼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대전전투는 아군에 희망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미군의 본격적인 참전은 국군의 사기를 높였고, 일패도지하던 아군이 전력을 재편성하고 제1군단을 창설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미 제1기병사단과 25사단이 투입돼 낙동강에 저지선을 펴도록 시간을 벌어줬다. 미군의 강력한 저항은 인민군에게도 큰 충격을 줘 작전의 과감성을 현저하게 떨어지게 했다.

그 동안 대전까지 들어온 인민군이 진로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호남, 경북 왜관(낙동강), 영천, 포항 등지로 육박하자, 대전에서 대구로 내려와 있던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한국군을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편입, 대폭 증강하여 낙동강선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고 반격하였다. 6월 28일 서울조선인민군에게 함락당하였으나 장면은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을 통해 유엔 결의 사항 등을 본국에 방송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