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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937: 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 42

 

 

 

한국의 역사 937: 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 42 

  

                                                                       서울 성벽 전 

 

 

 

 

 7. 조선 사대부들의 두 얼굴

 

 

국가는 위기인데 호화별장을 세우는 사대부의 낙원, 조선

 

 

명품 구매의 원조, 조선의 사치 풍조

1395년 태조 4년. 대사헌 박경이 왕에게 무엄한 상소를 올렸다.

"삼가 생각하건데, 전하께서는 하늘과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왕업의 터전을 여시고 대위에 오르셨지만 신들의 소견으로 볼 때에 언어와 거동에 틀린 점이 많아서 감히 말씀을 올립니다.

 

궁중에서는 풍악소리가 밤을 지세울 때가 있으며 어가가 어떤 때는 가볍게 대궐 밖으로 거동하시니, 후세에 본을 보이는 도리가 아니며, 아첨하는 사람들이 좌우에 있으니 아랫사람을 거느리는 도리가 아니며, 어가 앞에 여자 악사들을 따르게 하는 것도 엄숙한 행차에 흠이 되는 것입니다." (태조실록 4년 4월 25일)

 

아마 조선 초기부터 궁 안에서 이미 사치 향락과 쓸데없는 행사가 만연하였던 듯하다. 그러나 그런 풍조가 사라지기는 커녕 세종 대에 이르러 더 번잡하였다. 사치 풍조가 두르러진 사례가 혼례식이다.

"신부가 시부모에 첯 인사를 드리는 날은, 오로지 가세를 보이기 위해 수레와 말과 종과 수종꾼이 헤아릴 수 없이 문을 메우고, 술과 안주를 장만하여 이고 들고 가는 하인의 수가 30인에 이르고, 신랑 집 역시 거기에 맞추기 위해 소비하는 것이 심히 많으니, 가난한 사람은 빚을 내기도 하므로 그 폐가 적지 않습니다. 이후로는 찬품은 고기 두 가지, 딱 두 가지, 삼미탕수 세 가지로 모두 일곱 가지 쟁반을 넘지 않도록 하고, 유머는 1명, 사비 2명, 노자는 10명을 넘지 못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세종실록 9년 4월 4일)

 

1427년 세종 9년의 상소 내용이지만 그것은 결코 지켜지지 않았다.

 

1546년 명종 1년 조강 시간에 강의을 하는 특진관 이해의 말이다.

"의복과 음식의 사치가 지금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으니, 민생의 곤궁함도 여기에서 연유하는 것입니다. 즉위하신 초기이니 마땅히 통렬하게 개혁하셔야 합니다. 즉시 폐습을 고치게 하소서." (명종실록 1년 6월 6일)

 

모든 왕들이 사치를 금하라 당부하고 있지만 실천된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왕들은 틈만 나면 이를 개탄하고 있다.

 

1522년 중종 17년. 예조가 복식제도에 대해서 보고하고 있다.

"근래에 사치 풍조가 더욱 심하여 상하를 막론하고 복식에 있어서 중국 물푼 쓰기를 경쟁하므로 이 때문에 물가가 뛰어오릅니다. 그래서 모리배들은 몰래 재물을 가지고 중국으로 가서 밀수해 옵니다. 혼인하는 집에서 다투어 사치를 숭상하므로 가난한 집은 이 때문에 혼인할 시기를 잃게 되니 이는 실로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부터 금령을 다시 엄격히 규찰해야 하겠습니다." (중종실록 17년 8월 21일)

 

관헌들도 품계마다 사용할 수 있는 옷감을 이때 하달했다. 하급관원들이 호화로운 중국 비단옷을 입지 말라는 식이다. 모자, 신발, 옷 앞에 매는 장식, 은장도 등까지 꼼꼼하게 지시하고 있으며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엄명을 내려 만약 호화로운 옷감으로 옷을 입는 자는 물건을 관에서 몰수하게 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선조대에도 마찬가지였다.

 

1601년 선조 34년 3월. 선조의 지시사항이다.

"우리나라는 가난하고 쇠잔한데도 의복을 사치스럽게 입는다. 복장은 비록 단정해야 하지만 입어야 할 복식의 법도가 있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상민은 사대부의 복장을 못하며 당하관은 당상관의 복장을 못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습속이 사치스러워 서로 다투어 멋을 부리니 필경 모두 비단옷을 입고 나서야 말 것이다."

 

한참 시절을 뛰어 넘어 1651년 효종 2년에도 내용이 비슷하다. 동지경연 조석윤이 말한다.

"요즘 사치풍조가 매우 성행하고 있는데, 모든 물건이 분수에 넘치고 물가가 앙등하는 것도 모두 여기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몸소 검소함을 행하여 모범을 보여야 폐단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인데, 듣자하오니 도감 군사의 두건에 털가죽을 넣어 화려하게 꾸미도록 하셨다 하니, 과연 그런 하교를 하셨습니까?"

 

효종이 답하기를,

"복식을 남루하게 하지 말도록 했을 뿐이지 어찌 사치를 숭상시키겠는가?"

 

당장 고치라 명했다. (효종실록 2년 7월 12일)

 

한말인 고종 때까지도 이런 일은 다반사여서 1874년 고종 11년에는 비단과 패물 사용을 금지하기까지 했다.

"이제부터 고위 대신의 장복 외에는 비단과 진주 따위를 일체 엄금하라. 이와 같이 칙교를 내리니 조신이나 평민을 막론하고 위반하는 자가 있을 경우 결단코 법으로 처리할 것이다." (고종실록 11년 6월 5일)

 

이런 엄명이 모두 사대부들에게 내린 것이지만 무슨 효과가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백성들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기는 성군 세종대왕도 예외가 아니다.

 

1431년 세종 13년 포천 영평현에 별궁을 지어놓고 자주 내왕을 했는데 진눈깨비가 내리는 한겨울에 사냥을 한다고 출동했다. 대신들 중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그날 몰이꾼과 따르던 사람 26명이 얼어 죽고 말 69필과 소 1두가 죽었다. 세종은 치적만 소개되어 있지 이런 흉사는 거론도 되지 않는다.

 

사대부들은 백칸이 넘는 호화주택도 한 두 곳이 아니고 풍치 좋은 곳에 들어서 있는 정자나 별장이라는 것도 결국 그들의 호화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청렴하게 살아간 청백리도 무수히 많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대부들이 그렇지 못하였다.

 

한말 안동 김씨의 모 권세가는 북촌에 무려 8천 평이나 되는 대지에 대저택을 짖고 수백 명의 노비들을 부리면서 살았다. 그와 비슷한 규모의 저택들이 주변에 즐비했다. 그러나 왕은 아무말도 못했고 그걸 비판하는 조정 대신은 한 사람도 없었다. 해방이 되어 뭇 사람들의 욕설이 쏟아지자 그 땅은 집장사에게 팔리고 다시 수백 개의 필지로 분활되어 작은 집들이 지어졌다. 지금 북촌 집들은 대부분 모두 그런 집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