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의 봄 26 : 현충일의 의미 13 (6.25 전쟁, 한국전쟁 12)
북악 둘레길에서 바라본 성북동 전경
중공군의 개입과 1.4 후퇴, 서울 피탈 및 재수복, 휴전까지 공방전
중공군의 개입과 1.4 후퇴
제2차 동두천 전투
제2차 동두천 전투는 한국 전쟁에서 중공군에 의해 패배한 대한민국 국군이 동두천에서 벌인 전투였다. 동두천 방어 전투라고도 불린다.
1950년 11월, 중공군이 인해 전술로 의주를 비롯한 압록강 유역의 대한민국 국군을 기습공격하자, 국군은 평양, 흥남, 함흥, 원산 등 주요 도시를 공산군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중공군은 이에 힘입어 38도선을 넘어 공격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국군과 미군은 경기도 북부를 방어하기 위해 연천, 동두천, 파주를 이은 방어선을 구축했다.
제 2차 동두천 전투 | |||
날짜 | 1950년 12월 11일 ~ 1951년 1월 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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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동두천 | ||
결과 | 국군과 영국, 미국 연합군의 패배, 서울이 함락되는데 원인이 됨, 경기도 북부의 방어선 붕괴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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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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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과의 전투
1950년 12월 10일, 중공군은 38도선을 돌파하고 연천과 포천을 장악하였다. 이에 국군은 동두천을 거점으로 하여 소요산, 파주, 양주를 잇는 선을 최방어선으로 삼고, 남하하는 북한군과 중공군을 방어할 준비를 갖추었다. 12월 11일, 동두천에서 국군과 미군, 영국군은 중공군과 맞닥뜨렸으나 파주가 이미 붕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동두천 철수
1950년 12월 후반부터 국군, 미군, 영국군은 고전하게 된다. 그 까닭은 국군이 동두천을 비롯한 경기도 북부를 방어하고 있는 틈을 타 경기도 동부의 가평 일대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공군의 인해 전술과 주변 방어선의 붕괴, 그리고 군사의 열세로 연합군은 동두천에서 철수 준비를 한다.
결과
1951년 1월 3일까지 동두천에서의 전투가 패배로 끝났기 때문에 한강 이북 지역은 공산군의 공격으로부터 결코 안전할 수 없었다. 결국 1951년 1월 4일, 국군과 UN군은 서울을 다시 적에게 내주고 만다. 고양을 비롯한 주요 수도권 방어선도 무너지고 말았다. 하지만 서울에서 UN군과 국군이 무사히 철수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공산군의 진군 속도를 크게 늦추어 주어 신속한 대응전을 감행할 수 있게 했다.
서울 재수복
1월 12일 일본군의 참전설이 나오자 이승만은 이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였다. 2월 이승만은 38선은 공산군의 남침으로 이미 없어진 것이므로 북진 정지는 부당하다고 선언하였으며 2월 15일 한반도 통일을 전쟁 목표로 분명히 밝히고 미국에도 통보하였다. 인민군은 10여 만의 전사자를 내면서 퇴각하였고, 3월 2일에 한국군이 한강을 넘어서 14일에는 서울을 되찾았다. 3월 24일 이승만은 한만국경까지 진격하기 전에 정전은 안 된다고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다시 북진했으나 대대적인 공격이 없는 참호를 중심으로 한 진지전이 계속되었다. 결국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전쟁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모락산 전투
모락산 전투 (한국전쟁의 일부) | |||
날짜 | 1951년 1월 30일 ~ 2월 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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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경기도 의왕시 오전동 | ||
결과 | 1사단 15연대 승리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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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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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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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규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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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락산 전투(慕洛山 戰鬪)는 경기도 의왕시 오전동에 있는 모락산에서 1951년 1월 30일부터 2월 3일까지 한국군 1사단 15연대와 단대호 미상의 중공군 1개 연대간 벌어진 전투이다.
수원에서 북쪽으로 달려 지지대고개를 넘어서면 좌전방에 수리산이, 우전방에 백운산과 모락산이 우뚝 솟아있다. 안양지역을 안전하게 통과하고 측후방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확보되어야할 중요한 지역이다. 중공군은 이 산악지역을 이용하여 유엔군의 진출을 저지하려 하였다. 유엔군은 터키여단을 좌측에 미25사단 35연대를 중앙에, 한국군 1사단 15연대를 우측에 배치하여 1월 31일 공격을 개시하였다. 한국군 1사단 15연대는 1월 29일 연대지휘소를 수원 북쪽의 정자리로 옮기고, 1월 31일 제1대대를 우측에, 제2대대를 좌측에 배치하고 3대대를 예비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중공군은 오전동지역의 무명 237고지에 1개 대대, 백운동지역 무명 213고지에 1개 대대, 모락산 정상부근에 1개 대대를 배치하여 아군의 진출을 저지하였다.
전투 경과
1951.1.30 ~ 1.31
제1대대장(유재성 중령)은 왕곡리- 백운사 일대로 진출한 다음 1:00시경 제2중대를 우측에, 제3중대를 좌측에 배치하여 박격포와 기관총의 지원을 받으며 공격을 실시하여 13:50에 무명 213고지, 217고지, 220고지를 점령하였다. 한편 제2대대장(대대장 최병순)은 통산-곡정일대에서 공격을 시작하였다. 우측 공격제대인 6중대는 무명 237고지의 적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좌측 공격제대인 제5중대는 내곡을 지나 237고지의 서쪽 기슭을 공격하였다. 이때 적은 모락산에 있는 1개 대대의 화력지원을 받으면서 집요하게 저항하였다. 그러나 대대는 15:00경에 적 진지에 제압사격을 가하고 200m 능선까지 진격한 다음 일제히 적진을 돌격하여 20분간의 육박전을 전개하여 고지를 점령하였다.
1951.2.3 ~ 2. 4
2월 3일 제15연대는 다시 공격을 시작하였다. 연대장 김안일 대령(예비역 준장)은 2월 2일 08:00에 작전지시 제2호를 내려 제2대대로 하여금 2월 3일 06:30을 기해 모락산(383고지) 일대를 공격하고, 제1대대는 무명 200고지 일대에 포진하고 있는 적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에 제2대대는 14:00에 중화기중대가 군포장 동쪽에서 적진에 대하여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하면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제5중대는 모락산 서봉인 무명 133고지를 확보하고 383고지로 전진하여 적의 퇴로를 막으려하자, 갈산동 남쪽에서 2개 소대 규모의 적이 이를 방해하면서 저항하였다. 이에 중대는 15:00에 보전합동부대의 엄호 하에 논을 가로질러 적을 격파하고 모락산의 적의 배후를 위협한다. 제6중대는 이미 11:00에 383고지 남쪽을 공격하였는데 적은 383고지 동북쪽의 봉우리에 연한 능선일대에서 계속 저항하였다. 한편 제7중대는 갈산동 서쪽의 무명고지를 점령하여 383고지의 배후를 차단하였다. 제5중대와 7중대가 동쪽으로 우회하면서 퇴로를 차단하고, 정면에서 6중대의 압력을 가하자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제2대대는 일제히 돌격을 하여 백병전을 벌여서 적을 모두 괴멸시켰다. 한편 무명 200고지를 공격한 제1대대는 적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돈좌되었으나 제2대대지역에서 적이 모락산을 포기하고 후퇴하면서 쉽게 물러나게 된다. 이로써 4일 간의 모락산 전투가 끝났다.
전투 결과
4일간의 혈전에서 한국군 1사단 15연대는 중공군 663명을 사살하였으며 90명의 포로를 획득했다. 한편 한국군도 전사 70명, 부상 200여명의 피해를 입었다.
의의
이 전투의 승리로 유엔군은 1번국도와 47번국도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안양을 지나, 인천, 영등포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게 된다. 또한 한강 이남선에서 주저항선을 형성하여 수도 서울을 사수하려는 중공군의 의도를 무산시켰다.
지평리 전투
지평리 전투는 1951년 2월 13일부터 2월 16일까지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일대에서 원형 방어진지를 구축한 미국 2 보병사단 23연대전투단(Regiment Combat Team,RCT)과 23RCT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가 중국 인민해방군 39군과 3일간 벌인 격전이었다. 3일 동안 완전히 포위된 미군 23RCT와 프랑스 대대는 포위 3일째인 2월 16일에 미국 1 기병사단 5 기병연대 3대대를 주축으로 편성된 크롬베즈 특별임무부대에 의해 구출되었고, 중국군은 큰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
1950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인민지원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면서 1.4 후퇴와 장진호 전투로 대표되는 참담한 후퇴를 겪어야 했던 유엔군은 평택-원주-삼척 선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1951년 2월부터 반격에 들어갔다. 썬더볼트 작전, 라운드업 작전, 킬러 작전, 리퍼 작전, 러기드 작전 그리고 돈틀리스 작전 등으로 진행된 반격 작전은 이전과 달리 산악 지형을 이용한 중국군의 우회 및 포위 섬멸 전술을 염두에 두고 종방향으로 진격이 아닌 횡방향의 연결을 중요시하여 한 번에 최대한 멀리 가는 것이 아니라 인접 부대의 진격 속도에 맞추어 모든 전선에서 천천히 진격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런 유엔군의 반격 작전에 공산측은 2월 11일에 2월 공세로 화답했다. 수원 - 이천 - 원주 - 강릉까지 진격해 있던 중국군은 유엔군이 울프하운드 작전과 썬더볼트 작전으로 한강을 회복하고, 다시 라운드업 작전을 개시하자 횡성군과 홍천군 사이 삼마치 고개 및 지평리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중국군은 지평리에 주둔하고 있던 유엔군을 몰아낸 다음 남한강을 도하하여 서울 남쪽으로 진출하고자 했다.
삼마치 고개에 진출했던 한국군 및 미국군은 중국군의 공격을 버텨내지 못하고 후퇴했고, 2월 초 미국 9 군단의 우측방을 엄호하기 위해 지평리에 진주한 미국 23 연대 전투단의 방어 진지는 견부진지(肩部陣地)로 남게 되었다. 지평리에 남게 된 23연대 전투단(23RCT)은 라운드업 작전을 위해 편성된 전투단으로, 중국군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 역할을 하게 되었다. 중국군은 그 미끼를 물었던 것이다.
지평리의 23연대 전투단은 미국 2 보병사단 23연대와 23연대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를 주축으로 미국 37포병대대, 미국 82방공포대대 B포대, 미국 503포병대대 B포대가 연대전투단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중국은 이 지평리에 39군 예하 3개 사단을 투입했다. 좌우 인접 부대가 모두 철수하는 바람에 고립 상태가 된 23연대전투단의 철수를 미국 10군단이 8군 사령부에 요청했으나, 매슈 리지웨이 8군 사령관은 진지 사수를 명령했다. 23연대전투단은 1.6km 길이의 원형 방어진지를 구축했으며, 북쪽에 1대대, 동쪽 3대대, 남쪽 2대대, 서쪽 프랑스 대대를 배치하여 전투에 대비했다.
전투 경과
지평리
2월 13일 저녁, 중국군 2개 사단이 전방 2개 대대에 8차례에 걸친 파상 공격을 해왔으나, 미군은 이를 모두 격퇴했다. 이 날 전투 중에 폴 프리먼 23연대장은 부상을 입었으나 후송을 거부하고 계속 전투를 지휘했다.
다음 날 미국은 공중보급으로 지평리의 미국군 및 프랑스군에게 필요한 물자를 보급했으며 중국군은 유엔군의 공군력 때문에 낮에는 숨어서 대기했다. 이날은 리지웨이 사령관이 직접 헬기편으로 연대를 방문하여 연대원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2월 14일 저녁 7시, 중국군은 4개 사단 규모의 병력으로 다시 일제 공격을 시작했고, 중국군 1개 연대 병력이 방어선을 돌파했고, 진지 내에서 백병전이 벌어졌으나, 미군 및 프랑스군은 끝내 진지를 사수했고 중국군은 새벽녘에 다시 철수했다. 이 무렵 후방에서는 미국 1 기병사단 5 기병연대(연대장 마셜 G. 크롬베즈 대령, Marcel G. Crombez)를 주축으로 한 구조대(크롬베즈 특임대)가 편성되고 있었다.
크롬베즈 구조대
2월 14일, 크롬베즈 대령의 5기병연대는 기본 보병 3개 대대에 의무중대, 전투공병중대, 자주포를 장비한 2개 야전포병대대, 2개 중전차 소대와 추가로 전차중대를 배속받았다. 전차대는 6전차대대 D중대와 70 전차대대 A중대로 편성되었는데, 6전차대대 D중대는 본래 1기병사단 소속이 아니었으나 가장 가까운 곳에 배치되어 있던 전차중대여서 5기병연대에 배속되었다. 6대대는 M-46 패튼을 장비했으며, 70전차대대는 M4A2를 장비하고 있었다. 어둠이 깔릴 즈음 5기병연대는 진격을 개시했으나 부서진 다리때문에 진격이 멈추었고, 배속된 전투공병중대가 급히 교량 복구에 투입되었다. 나머지 병력은 적의 공격에 대비해 방어진형을 갖추었다.
2월 15일 아침, 크롬베즈 대령은 1대대를 우측 산지로, 2대대는 좌측 산지를 장악하도록 지시하여 두 대대는 중국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두 대대의 임무는 도로 양측면의 산악지대를 장악하여 도로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중국군의 반격은 매우 거셌고, 2개 포병대대가 작전을 지원했다. 미국의 정찰기는 교전 중인 두 대대의 북쪽에 중국군 대부대가 있다고 보고했다.
전투는 오전 내내 계속되었고, 크롬베즈 대령은 기갑병력만이 적의 점령지역을 관통하여 지평리에 도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 무렵 프리먼 대령은 부상이 악화되어 결국 후송되어 연대는 2대대장 에드워드 중령이 지휘하고 있었다. 크롬베즈 대령은 연대에 배속된 전차 23대를 진격대열에서 분리하고 L중대 165명과 공병 일부를 전차에 탑승시켜 지평리로 곧장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작전에 앞서 크롬베즈 대령은 헬리콥터로 진격로를 직접 점검했다. 원래 계획은 앰불런스 및 보급품을 실은 트럭들이 함께 진격하는 것이었으나 크롬베즈 대령은 도로 사정상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결국 보병을 태운 전차부대만 우선 진격하기로 했다. 구급차 및 보급품 트럭은 도로 사정이 괜찮아지면 그때 진격하기로 했다. 공격제대는 M-46을 갖춘 6전차대대 D중대가 선두에서 진격하고, M4A2를 장비한 70전차대대 A중대가 뒤따랐다.
2월 15일 15시, 공격대는 공격준비를 서둘렀다. 전투공병 4명이 2번째 전차에 올라탔으며, 160명의 L중대원이 15대의 전차에 분산 탑승했다. 15시 45분, 부대는 공격에 나섰다. 전차 간 간격은 13m(15야드)를 유지했다.
결과
지평리 동쪽에서 국군 5 사단 및 8사단을 붕괴시킨 중국군의 4차 공세는 결국 지평리에서 23연대 및 프랑스 대대의 치열한 저항과 후방의 화력 지원, 그리고 중국군 자체의 문제로 인해 결국 중국군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물러서게 되었다. 중국군의 주요 패배 원인은 다음과 같다[6]
- 화력의 열세
- 5개 사단에서 동원된 6개 연대를 통합한 지휘 체계 부재
- 또한 각 연대는 연대 자체 계획에 따라 중대급 병력을 축차 투입하면서 병력 우세를 적절히 활용하지 못함
의의
울프하운드 작전의 경우처럼, 1950년 말의 연이은 패배로 떨어졌던 유엔군의 사기가 다시 고무되었으며, 1950년 10월 중공군의 참전 이후 이듬해인 1951년 1월 4일, 국군이 서울을 다시 적에게 내주고 평택에서 삼척까지 후퇴하여 대한민국이 큰 위기에 빠졌을 때, 중공군의 판단 착오로 반전의 기회가 생기면서 전선은 북으로 다시 밀어낼 수 있었다. 중공군은 한 번의 공세를 더 가하면 사기가 떨어진 아군을 금강선까지 밀어낼 수 있었지만 참전 후 3차례의 공세를 연이어 실시해서 너무 지쳤기 때문에 서울을 점령한 후 크게 주저앉은 상태였다.
아군의 소규모 정찰대가 그동안 국군이 낯선 전술을 구사해서 속수무책으로 당해온 중공군이 보급에 차질이 생겨서 공세를 일주일 이상 계속할 수 없다는 것과 병력에서는 열세지만 화력으로 중공군을 충분히 격파시킬 수 있다는 것을 파악해 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국군은 작전을 짜서 순조롭게 실시하여 3월에 서울을 다시 탈환하고 전선을 38도선까지 밀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전선의 주도권은 중공군이 잡고 있던 상태였다.
중공군이 곧바로 1951년 2월에 4차 공세를 개시하였다. 그렇지만 중공군의 주공(主攻: 주력을 기울여서 적의 주력부대를 침)이 돌파를 시도하려한 지평리는 미군 2사단과 프랑스군의 고립방어로 완전히 차단당해 실패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지평리 전투이다. 결국 지평리 전투로 중공군의 4차 공세는 좌절되고 말었다. 하지만 중공군은 서울 다시 점령하기 위해 바로 5차 공세를 준비하였다. 중공군의 주공이 파주로, 조공(助攻:세력을 도와 공격함, 또는 그런 공격)이 춘천으로 돌파하고자 하였다. 이때 파주에는 영국군 29여단이, 춘천에는 영연방 27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가평 전투
가평지구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 |||
날짜 | 1951년 4월 23일 ~ 4월 2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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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경기도 가평 | ||
결과 | 유엔군의 승리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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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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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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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규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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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지구전투(加平地區戰鬪, 영어: Battle of Gapyeong, 중국어: 加平战斗)는 1951년 4월 23일에 감행된 중공군의 제1차 춘계공세시에 사창리지역의 국군 제6사단 방어지역의 전선이 돌파되어 이 지역으로 침공한 중공군 제20군이 가평 방면으로 돌파구를 확대하고 있을 때 영연방 제27여단이 가평천 일대에 저지진지를 편성하여 이들의 침공을 저지한 방어전투이다.
상황
서울 재탈환 및 중공군 4차 공세 실패
1950년 10월 중공군의 참전 이후 이듬해인 1951년 1월 4일, 국군이 서울을 다시 적에게 내주고 평택에서 삼척까지 후퇴하여 대한민국이 큰 위기에 빠졌을 때, 중공군의 판단 착오로 반전의 기회가 생기면서 전선은 북으로 다시 밀어낼 수 있었다. 중공군은 한 번의 공세를 더 가하면 사기가 떨어진 아군을 금강선까지 밀어낼 수 있었지만 참전 후 3차례의 공세를 연이어 실시해서 너무 지쳤기 때문에 서울을 점령한 후 크게 주저앉은 상태였다. 아군의 소규모 정찰대가 그동안 국군이 낯선 전술을 구사해서 속수무책으로 당해온 중공군이 보급에 차질이 생겨서 공세를 일주일 이상 계속할 수 없다는 것과 병력에서는 열세지만 화력으로 중공군을 충분히 격파시킬 수 있다는 것을 파악해 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국군은 작전을 짜서 순조롭게 실시하여 3월에 서울을 다시 탈환하고 전선을 38도선까지 밀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전선의 주도권 열세는 중공군이 잡고 있던 상태였다.
중공군이 곧바로 1951년 2월에 4차 공세를 개시하였다. 그렇지만 중공군의 주공(主攻: 주력을 기울여서 적의 주력부대를 침)이 돌파를 시도하려한 지평리는 미군 2사단과 프랑스군의 고립방어로 완전히 차단당해 실패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지평리 전투이다. 결국 지평리 전투로 중공군의 4차 공세는 좌절되고 말었다. 하지만 중공군은 서울 다시 점령하기 위해 바로 5차 공세를 준비하였다. 중공군의 주공이 파주로, 조공(助攻:세력을 도와 공격함, 또는 그런 공격)이 춘천으로 돌파하고자 하였다. 이때 파주에는 영국군 29여단이, 춘천에는 영연방 27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5차 공세에 약 27만명과 북한군 약 3만5천명으로 한강 북쪽에 배치된 유엔군 주력부대를 격멸시켜 노동절(May Day)에 맞추어 서울에 재입성하겠다는 목표로 세웠다.
중공군 5차 공세 시작
1951년 4월 22일, 어둠이 깔리자 공산군은 국군 및 연합군의 전 전선에 강력한 포격을 실시한 후 5차 공세가 시작되었다. 포격이 멈추자 중공군 대군이 서부전선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각각 9개 사단로 구성된 중공군 19병단(兵團:국군의 야전군과 비슷함)은 개성-문산 축선에서 국군 1사단과 영국군 29여단을, 3병단은 연천-동두천 축선에서 미군 3사단과 터키여단을 향하여 공세를 시작하면서 서울을 포위하려 하였다.
국군 6사단의 후퇴 및 위기
4월 22일, 중공군의 5차 공세가 시작되었을 때, 중공군 9병단 조공이 공격하기로 한 곳은 중부전선 춘천지역의 사창리였다. 이곳을 담당한 부대는 미군 9군단에 배속된 국군 6사단이었는데 중공군은 국군의 뒤를 파고들어 후방을 차단하였다. 중공군은 사창리를 돌파하여 중부전선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다. 중공군의 공격으로 후퇴하게 된 국군 6사단은 큰 피해를 받고, 4월 25일에 가평일대에 집결하게 되었다. 국군 6사단은 부대원 반 정도만 남고 대부분의 중장비는 파손된 상태였다. 국군 6사단의 후퇴는 좌우에 배치되어 있던 아군 부대들의 후퇴로 이어져 전선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서부전선을 공격한 중공군의 주력이 글로스터 고지 전투에서 국군 1사단, 미군 3사단, 영국 29여단을 비롯한 아군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더 이상 남하를 하지 못하는 동안, 조공이었던 중공군 9병단이 전선 중앙에 커다란 구멍을 내어 버렸던 것이다. 만일 중공군이 이 구멍을 통해서 경춘가도를 따라 계속 남하했다면 서울은 다시 공산군 손아귀에 다시 들어가면서 중공군의 5차 공세가 성공되어 공산군의 승리로 될 위기였다.
이를 막기 위해 동원 된 부대가 바로 영연방 27여단이다.
영연방 27여단의 참전
뉴질랜드, 캐나다, 호주 군이 영국군을 중심으로 편제된 영연방 27여단은 무려 5배가 넘는 중공군을 막아내야 했다. 후퇴하는 국군 6사단을 구원하기 위해 가평으로 향한 영연방 27여단은 국군을 추격하여 내려오던 중공군 20군과 1951년 4월 23일 가평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영연방 제27여단은 뉴질랜드 포병대대의 지원하에 호주군 대대와 캐나다군 대대, 영국군 미들섹스 대대 등 3개 대대 병력으로 3일동안의 방어전을 전개하여 자신들보다 무려 5배가 넘는 중공군을 막아냈다.
본진인 영국군과 호주 왕실 3대대는 가평의 죽둔리에서 부대원의 40퍼센트 이상이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도 경춘가도를 지켜냈다. 캐나다 프린세스 패트리샤 2대대는 가평 남단 667고지를 사수하여 후퇴하는 제6사단을 엄호하고 경춘간의 주보급로를 확보하는데 공헌하였다. 뉴질랜드 16포병연대는 막강한 포병화력 지원으로 중공군을 완전히 차단, 격멸시켰다.
이 전투로 중공군 제20군은 제1차 춘계공세시에 북한강을 넘어서지 못하게 되었으며 국군과 유엔군은 노네임선에서 새로운 방어진지를 구축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얻게되었다.
결과
자신들보다 5배나 많은 중공군을 필사적으로 막아낸 영연방 27여단의 가평전투의 승리와 임진강에서 중공군으로 의해 패했지만 3일동안 중공군을 막아낸 영연방 29여단의 글로스터 고지 전투로 중공군은 5차 공세는 완전히 좌절되었다. 가평은 한국전쟁 역사의 길에 남는 거대한 전투의 장으로 변했고 영연방 27여단의 가평전투는 세계 전쟁사에 길이 빛날 엄청난 대승을 거두었다.
영연방 참전 국가들의 가평
캐나다에서는 가평전투를 승리하고 귀국하였을 때, CFB(Canadian Forces Base)라고 불리던 부대이름을 '가평(Kapyong)'으로 바꾸었다. 이 부대는 매니토바 주(Manitoba)의 위니펙(Winnipeg)에 위치하고 있다.
호주에서는 가평이란 단어를 희생과 영광이란 말로 기억되고 있다. 4월에 '가평의 날(Kapyoung Day)'로 지정하여 현역 군인들의 큰 기념일로 자리잡고 '가평대대'라는 부대가 있을 만큼 유명하다. 가평전투 60주년인 2011년, 가평에서는 기념행사가 열려 당시 영연방 참전용사들과 이례적으로 당시 호주 줄리아 길라드 현직 총리가 참석하였다.
용문산 전투
용문산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 |||
날짜 | 1951년 5월 17일 ~ 5월 2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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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경기도 가평군 용문산 | ||
결과 | 대한민국 국군의 대승
춘천, 홍천, 청평면 등 주요 동부 전선 도시 탈환의 계기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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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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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규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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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산 전투(龍門山 戰鬪)는 한국전쟁 중 1951년 5월 17일 ~ 5월 21일까지 경기도 가평군 용문산에서 중공군과 대한민국 국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전투 경과
1951년 5월 17일 1차 춘계 대공세에 실패한 중공군은 동부전선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동부전선 용문산에는 국군 6사단이 지키고있었다. 북한강은 춘천-화천-양구로, 남한강은 여주-충주로 이어지는 뱃길이 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이곳은 홍천-인제 방면과 횡성-원주 방면의 도로가 교차하는 육상교통로의 요지이기도 했으므로 중공군이 점령할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 5월 18일에는 중국군의 공세가 개시되었다. 당시 장도영 휘하 6사단 중 2연대 1, 2, 3대대가 방어진을 구축하였는데 1, 3대대가 사력을 다해 막아봤지만 중공군에 막강한 물량공세에 후퇴, 전초부대를 담당하였던 2대대와 합류하였다. 그 후 2연대(1, 2, 3대대 합류)는 전투에 임하며 후퇴하는게 맞지만 2연대는 후퇴는 하지않고 그대로 진지를 지키며 항전하였다.
이에 당연히 후퇴할줄 알았던 국군이 제자리를 지키며 항전하자 중공군은 당황해 했다. 이 때 중공군은 착각을 했는 데,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2연대가 주력부대로 알았던 것이다. 중공군은 그대로 착각하여 중국 제 63군은 187, 188 2개 사단에다 군 예비인 189사단까지 투입해 2연대를 총공격하기까지 이른다. 즉, 중공군 3개 사단이 2연대 1개연대에게 총 공격을 감행한것이다. 하지만 2연대는 후퇴하지 않으면서 계속 몰려오는 중국군을 막아내고 있었다. 고립된 2연대는 겨우겨우 미군의 항공폭격과 함께 힘겹게 방어하고있었다.
변수
변수가 한가지 있었다. 바로 중공군이 2연대를 주력군으로 착각하여 총공격을 감행하고 있었을 때 6사단의 7, 19연대가 후방을 기습한것이다. 즉,포위하여 2연대를 섬멸할 계획이였던 중공군은 역으로 포위되어 섬멸당할 위기에 처했다. 분명 주력군을 몰아넣고 승리하리라 장담했던 중국군에게 이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아닐수가없었다.
이 전투의 변수는 중국군 자신들이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7, 19연대는 중공군이 2연대를 총공격을 하고 있었을 때 기습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그리고 UN군과 국군의 포병들의 집중포화가 시작되었다. 이에 중공군은 많은 전사자를 냈고, 잔존한 중국군은 포위섬멸을 피하기 위해 퇴각하기 시작했다.
추격
5월 21일 새벽 중공군은 서둘러 퇴각을 하였다. 하지만 주도권이 국군에게 있었으로 이를 놓칠 리가 없었다. 6사단은(2,7,19연대)곧 바로 추격을 시작하였다. 가평과 춘천을 거쳐 화천 발전소까지 60여 km를 진격하며 중공군을 격퇴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국군은 큰 손실을 입었다. 그리고 중국군은 화천호에 이르렀는데, 이로 인해 퇴로가 막혔다. 6사단은 그대로 중공군의 후미를 들이쳤고, 그 결과 대부분 화천호에 수장되거나 6사단에의해 격멸당했다.
전투 후
6사단의 피해는 전사 107명, 부상 494명, 실종 33명이었고 중국군은 3개사단 10만명의 병력이 궤멸 하였으며(간혹 용문산대첩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UN군 및 국군은 대대적인 반격작전을 실행한다. 중국인민지원군의 2차 춘계 대공세로 인해 벌어진 이 전투는 대한민국 6보병사단이 중국인민지원군을 궤멸시키는 대한민국의 대승으로 마무리되었다.
현리전투
현리 전투(縣里戰鬪)는 1951년 5월 16일 ~ 5월 22일 동안 강원도 인제군 현리에서 중공군과 북한군, 한국군 사이에서 벌어진 한국전쟁 중의 전투다. 중공군이 춘계 공세를 벌였을 때 벌어진 전투로 인제군에 있던 한국군 제3군단이 방어에 실패하고 하진부리까지 밀렸다.
중공군 12군단, 27군단과 북한군 5군단은 3군단을 공격하면서, 동시에 소규모 침투부대를 이용하여 후방의 주보급로인 오마치 고개를 점령했다. 3군단이 포위당하자 당시 군단장이던 유재흥은 부군단장을 대리로 지정한 후 군단을 버리고 항공기편으로 도주했다. "작전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갔다"라고 항변하였지만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의 저서 《밴 플리트 장군과 한국군》 136쪽에는 "이 때 유재흥은 작전회의에조차 참석하지 않았다."고 명시했다. 이 도주 행각으로 3군단은 지휘통제가 불가능한 와해 상황이 되었으며, 사단장들을 비롯한 모든 지휘관들이 지휘를 포기하고 계급장을 제거한 후 살기위해 무질서한 도피를 시작했다. 결국 현리에서 한국군 3군단 예하 3사단, 9사단 병력 1만9천여명이 희생됐고, 병력의 40% 가량만 복귀했다. 무기는 거의 다 뺏겼다. 한국전쟁 사상 최악의 패전을 기록했다.
증언
정병석 인제문화원장은 15세때 3군단 3사단 18연대에 학도병으로 배치됐다. 그는 "적군이 점령한 능선과 계곡을 피해 가파른 산 중턱을 탈출로 삼아 밤낮없이 걸었으며, 곳곳에는 탈진과 굶주림으로 사망한 전우의 시신이 흩어져 있었으나 미처 수습할 겨를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영향
이 사건은 미군 지휘관들이 한국군 장교의 작전지휘능력을 철저하게 불신하게된 계기였다. 당시 밴 플리트 미8군사령관은 한국군의 제1군단을 제외한 모든 군단 사령부를 해체하고 일체의 작전지휘권을 미군 장성들에게만 부여하였다. 1군단 또한 육군본부를 지휘선상에서 제외하고 미군 사령부에서 직접적인 지휘를 받도록 하여서, 이 시점부터 모든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상실되었다. 3군단은 1951년 5월26일 해체되었다.
평가
임진왜란 당시 칠전량 해전과 병자호란 당시 쌍령전투와 함께 한국 역사상 3대 패전으로 꼽힌다.
현리전투 진실과 소문에 대하여......
현리 전투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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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의 공세 계획 |
하지만 중공군의 작전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3군단의 왼쪽을 맡은 중공군 9병단은 한국군 5사단과 7사단의 방어선을 가볍게 돌파하였으나 미 2사단이 한국군의 패주로 측면이 노출된 상태에서도 벙커고지에서 돌파가 확대되는 걸 저지하는데 성공하면서 애초 의도만큼 돌파구를 여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고, 이 덕에 5사단과 7사단은 물러서는 데 성공, 중공군이 애초 계획한 원대한 포위 작전은 엉켜버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애초 계획한 만큼의 구멍은 내지 못했어도 중공군의 선두 부대는 산을 타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오마치 고개
현리에 모여든 한국군
오마치 고개가 점령당한 걸 안 9사단은 5월 17일 오전 급거 후퇴를 위해 현리로 모여들었으나, 9사단은 오마치 고개를 돌파할 작전을 실시하기는커녕 거기에 모여서 시간만 보내기 시작했다( 5월 17일 오전까지 아무리 많아도 오마치 고개에 있는 중공군 병력은 중대 규모로 추정).
오마치 고개를 탈환하기 위해 준비중이던 18연대와 30연대였는데, 여기서부터 뭐라 말로 표현 못할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대강 관련자들의 증언을 추려보면,
18연대 쪽 인물들의 말 - 공격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30연대 병력들이 도망치기 시작하더니 현리에 있던 병력이 전부 도망치기 시작했다. 자신들도 그 상태론 공격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후퇴했다. |
30연대 쪽 인물들의 말 - 우리는 애초에 오마치 고개를 공격하란 명령을 받은 일 없다. 사단 후퇴를 엄호하란 명령을 받아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연대 본부와 연락이 안 되어서 찾아가 보니 연대 본부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서 후퇴했다. |
30연대장의 말 - 사단장으로부터 오마치 공격 명령을 받아 휘하 대대에 작전 명령을 내렸는데, 무선 불통이 일어나고 대대에 연락을 하려고 해도 연락이 안 되었다. 사단 본부를 찾으니 사단 본부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후퇴했다 |
9사단장 최석의 말 - 9사단에 돌파임무를 준 것에 대하여는 잘 기억이 안난다. 그러나 돌파하라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겠는가. |
3군단장 유재흥은 정말로 도망갔는가?
어찌되었든 군단장의 무능
군단의 패주
낙오병인지 패잔병인지 하여간 3군단 병력은 차량과 중장비를 버리고 현리의 남쪽 방태산을 오르며 남쪽으로 도망쳐 갔고, 방태산은 험악한 산으로 수만 명의 인파에 뒤덮일 지경이었다. 작전도 없고 지휘도 없는 발걸음이었으며, 그러니 보급도 없고 밥도 없었다. 인민군이나 중공군의 소수 추격병력이 뒤를 쫒으면 그보다 더 많은 패주 행렬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도망쳤고, 밥도 못 먹은 채 산속을 걷다 체력이 다해 주저앉는 병사가 나오면 추격하던 인민군이나 중공군이 이들을 주워가는 일들이 벌어졌다. 화전민 집을 찾아내 자신이 가진 귀중품을 넘기고 끼니거리를 얻은 자들은 그나마 형편이 좋은 편이었다.
또 일부 병력은 야간에 방향을 잃고 헤메다가 내린천이 북으로 흐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남쪽으로 간다는 길이 인제 원통쪽으로 가는 길을 가다가 중공군을 만나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하진부리에서의 수습과 또 패주
이 때 상황은 현리 때처럼 군단 지휘부가 병력과 동떨어져 있던 상황도 아니었던지라 현리 때보다 이 때가 유재흥이 제대로 움직였어야 할 때이기도 하다. 장비는 없고 사기는 떨어질 때로 떨어진 상태라지만 부대 수습을 위해 뭐라도 해야 할 상황이었으니. 하지만 이시기에 유재흥은 수습을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주지 못 했다. 수습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고 할 수도 있긴 하겠다만.
유재흥 : "잘 모르겠습니다."
밴 플리트 : "당신의 예하 사단은 어디 있소?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
유재흥 : "그런 것 같습니다."
밴 플리트 : "유 장군, 당신의 군단을 해체하겠소. 다른 보직이나 알아보시오!"
현리 전투의 결과
미군의 책임론
현리 전투의 결과 군단병력 전체가 포위섬멸당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군단병력이 전선을 버리고 도주함으로서 동부전선 전체가 붕괴될 뻔한 위험을 초래하였고, 이로 인해 미군이 한국군 작전 통제를 대부분 장악하였고 3군단을 해체해 버린 건 명백한 사실이다. 즉 미군은 단순히 사단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군단의 지휘부에 '더이상 지휘를 맡길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고 판단했다는 뜻이다.
현리 전투의 뒷얘기
패전의 치욕을 잊지 말라는 의미에서 아직도 3군단 시설 몇개가 현리에 세워져 있으며, 국군 어느 부대든 정신교육 시간에 수시로 교육하는 소재가 되고 말았다.
- 임진왜란 당시 용인 전투나 병자호란 당시 쌍령 전투와 비교되는 일이 많은데, 이는 현리 전투까지 쳐서 세 전투 다 변변한 전투도 없이 대병력이 순식간에 패잔병으로 전락했다는 공통점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동급 취급하기 힘든 것이, 당시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화력이 막강한 미군을 피해서 국군을 상대로 병력을 집중시켜 공격하는 전술을 썼고, 현리 전투에서는 1개 군단급 제대의 전투정면에 1개 병단(우리나라의 야전군 규모)를 투입하였기 때문에 용인 전투나 쌍령 전투와 같이 단순히 비교하여 취급하기는 곤란한 어려운 면이 있다.
- 현리 전투 당시 3사단장인 김종오는 한국전쟁 초기 춘천-홍천 전투에서 인민군의 공세를 막아내며 한국전쟁 전체의 판도를 바꾸는 수준의 공적을 이룬 인물이었지만, 현리 전투에선 계급장 뗀 낙오군인 중 하나가 되고 만다. 그러나 나중에 백마고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서 명예를 회복한다.
- 한국전쟁 전반에 걸쳐 그랬지만, 특히 현리 전투에서 한국군 지휘부의 무능은 절정에 달한다. 특히 9사단장 최석 준장에 대한 평은 그야말로 최악이라서, 심지어 광인이라는 폭언까지 등장한다. 유재흥조차 애둘러서 최석의 무능력함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 3사단 18연대는 백골부대란 별명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는데, 이들은 오마치 고개를 돌파하란 명령을 받았지만 제대로 시도도 못 하고 흩어져 패주행렬에 가담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패주행렬을 쫒거나 차단하는 적 병력들이 있으면 그 자리에 있던 백골부대원들이 힘을 합쳐 적 병력을 격퇴하는 위엄을 보여줬다고 한다.
- 당시 중공군에는 여성 장교도 있었는데, 어떤 한국군 장교는 만주 군관학교를 다닌 경험으로 중국어를 잘 했기 때문에 중공군의 호감을 샀으며, 이윽고 어떤 여성 장교에게는 자기랑 결혼하고 중국으로 귀순하자는 제의까지 받았다. 전쟁에서 아름다운 로맨스 따위는 사치. 결국 한국군 장교는 그들을 모두 죽이고 부리나케 도주하였다.
- 특히 전투가 격심했던 지역은 인제군 상남면 상남 3리 옆 오미재 고개 근방. 지금도 험악한 길이지만 당시에는 더욱 험악했기 때문에 현리에서 홍천, 원주 방면으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인 오미재를 둘러싸고 격전이 벌어졌다. 정상에는 현리지구전적비와 군 초소 겸 훈련장이 세워져 있는데, 건장한 사람도 이 곳에서 근무를 하면 꼭 한번은 귀신을 본다는 흉흉한 소문이 감돌았다. 지금은 폐쇄. 사실 근방 부대에는 근무 중 무언가를 봤다는 흉흉한 소문들이 많이 있다. 이 지역에서 대대적인 유해 발굴 작업도 있었다.
- 유재흥 장군 사망 당시 한겨레는 조창호 중위는 탈북 후 유재흥 장군을 면담하고자 했지만 끝내 거절당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2002년 당시 유재흥 장군이 조창호 중위 등 다른 군원로들과 당시 국방부 장관을 항의방문하는 등의 기사로 보아 이는 허위보도로 판단된다.
피의 능선 전투
피의 능선 전투 (한국전쟁의 일부) | |||
날짜 | 1951년 8월 18일 ~ 9월 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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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강원도 | ||
결과 | UN군의 승리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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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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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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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규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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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능선 전투는 1951년 8월 18일부터 9월 5일까지 강원도에서 일어난 전투이다. '피의 능선'이란 이름이 붙은 이유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해 능선이 피로 넘쳐 흘러 종군기자들이 이 능선을 '피의 능선(Bloody Ridge)'라는 이름으로 보도하면서 생겨났다.
1951년 7월 개성에서 휴전 회담이 열렸으나 결국 합의에 실패하였다. 8월 중순이 되자 장마가 그쳤고, 미국은 장마 때문에 잠시 중단했었던 공격을 재개하기로 한다.
전투 경과
1951년 8월 18일, 한국군이 먼저 선제공격을 시작했다. 황엽이 이끄는 제 36연대가 미군의 공격지원 하에 공격을 시작했지만 적의 완강한 저항 때문에 점령이 쉽지 않았다. 더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군이 매설해 둔 지뢰 때문에 진격은 어려웠다. 황엽 연대장은 지뢰의 파괴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판단, 지뢰 지대에 포격을 요청하였다. 20시경에 포격이 시작되었고 포격이 끝난 22시에 돌격을 시도했으나 남은 지뢰들이 폭발하였고, 공격이 제대로 되지 않자 철수하였다.
계속된 공격에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자, 연대장은 결국 능선에서 가장 왼쪽인 983고지의 정면공격을 피하고 우회하여 공격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연대장은 능선에서 가장 오른쪽의 고지인 773고지와 능선 가운데의 940고지의 공격을 명령했다. 기습당한 적은 허점이 노출되어 후퇴하였고, 한국군은 8월 22일 983고지를 점령하였다.
연대장은 983고지의 방어를 미군이 맡아주기를 건의하였으나 미국은 거부하였다. 적은 22일 밤에 역습을 시도하였고, 26일에는 대규모의 역습을 시도하였다. 결국 포위된 제 36연대는 후퇴하였다.
9월 초가 되도록 능선에서의 공격은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능선 왼쪽에서 공격하는 한국군과 오른쪽에서 공격하는 미군의 공격이 성공하자, 적이 점령중인 983고지는 포위 위기에 있었다. 결국 9월 3일 적은 983고지에서 후퇴하였으며, 미군은 9월 5일 14시경 983고지를 점령하였다.
후퇴한 북한군은 후방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후, 단장의 능선 전투를 개시하였다.
현재 강원도 양구군에 피의 능선 전투 전적비가 있다.
가칠봉 전투
가칠봉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 |||
날짜 | 1951년 9월 4일 ~ 10월 1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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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강원도 양구군 | ||
결과 | 한국군 승리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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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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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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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규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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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칠봉 전투(加七峰戰鬪, 1951년 9월 4일 ~ 10월 14일)는 1951년 6월 23일 휴전회담이 제기된 이후 처음으로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확보할 목적으로 미국 19 군단장이 양구 북방의 가칠봉 일대에 5사단을 투입하여 고지를 점령하게 한 작전이다. 북괴군은 27사단과 12사단을 투입하여 반격에 나섰으나, 40여일의 격전 후에 결국 한국군의 승리로 끝났다.
휴전 회담이 시작된 후 유엔군은 미국 1 해병사단과 대한민국 1해병연대를 주축으로 강원도 양구군 일대의 펀치볼 전투를 8월 30일에 시작했다. 가칠봉 전투는 펀치볼 전투와 단장의 능선 전투와 거의 동시에 시작된 전투로 이 일대를 유엔군과 한국군이 장악하기 위한 전투였다.
가칠봉 개요
가칠봉 전방 500m에는 1,122고지(일명 김일성 고지)가 있었다. 쌍방이 차후 작전을 위해서 필히 확보해야 할 주요 고지였다. 가칠봉은 아군 전선에 너무 근접하여 포병 및 항공 화력이 불가능해서 오로지 보병 근접 전투에 의존해야 했던 전투였다. 이 때문에 미군의 화력과 항공지원에 많이 의존하던 당시 한국군 및 유엔군의 입장에서는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인명 피해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지형적으로도 가칠봉은 해안분지의 북서쪽 분지를 둘러싸고, 외곽에는 높은 산들이 솟아 있는데, 공격자인 한국군은 낮은 지점에서 고지로 올라가며 전투를 치러야했지만, 방어자인 인민군은 지형을 이용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적의 항공지원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올라오는 공격군을 격퇴하는 전투로 상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향후 작전을 위해서 가칠봉 고지를 장악해야 했던 한국군은 공격을 시작했고, 고지의 주인이 6번이나 바뀌는 혈전을 치뤄여 했다. 악조건 속에서도 국군 5보병사단은 끝까지 가칠봉 일대를 고수함으로써 펀치볼 지역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전투 경과
5사단장 민기식 준장은 27 보병연대(연대장 유의준 대령)를 전투에 투입했다. 인민군은 2군단 27사단 예하 7연대, 14연대, 32연대와 12사단 23연대를 투입했다. 27연대는 8월 30일에 적정 정찰과 부대 배치를 완료하고, 9월 4일 공격을 개시했다. 포병 화력 지원은 사단 예하의 26포병대대가 담당했다. 한국군은 초반에 고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나, 인민군도 즉시 야음을 이용한 역습을 가해 고지를 탈환했다. 이렇게 6번 고지의 주인은 바뀌었고, 그 과정에서 양측은 백병전을 서슴지 않았고, 많은 손실을 입었다.
이러한 격렬한 전투 끝에 결국 가칠봉 및 주위에 연결된 고지를 완전점령할 수 있었다. 이로써 한국군은 양구군 해안 분지 일대를 완전히 차지하여 소위 펀치볼이라 불리는 북서쪽의 주요 고지를 확보했다. 반면, 인민군은 이 전투의 패배로 가칠봉에서 쌍두령 방면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단장의 능선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 |||
날짜 | 1951년 9월 13일 ~1951년 10월 1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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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동면 사태리 | ||
결과 | UN군 승리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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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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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규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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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의 능선 전투 (斷腸의 稜線 戰鬪, 1951년 9월 13일 ~ 10월 13일)는 미국 2 보병 사단과 프랑스 대대 및 네덜란드 대대가 중동부 전선의 주저항선을 강화할 목적으로 894고지, 931고지, 851고지에 배치된 조선인민군 6사단 12사단을 공격하여 점령한 공격 전투다. "단장의 능선"이란 이름은 전투가 끝난 후에 붙여졌다. 미국에서는 Battle of Heartbreak Ridge라고 부른다.
결과
이 전투로 북한군 2개 사단은 큰 피해를 입고 고지들을 내주고 지혜산 방면으로 후퇴하였고, 미국 2사단 또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3개 고지를 모두 점령함으로써 가칠봉과 백석산 사이에 한국군 쪽으로 공산측의 돌출부를 제거하여 전선을 정리/조정하였다.
철의 삼각지 전투
삼각고지 전투 | |||
날짜 | 1952년 10월 21일~10월 2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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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 ||
결과 | 연합군의 전략적 승리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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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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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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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규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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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고지 부근 전투는 "철의삼각지대전투{鐵─三角地帶戰鬪}"라고도 불린다. 철의 삼각지대는 철원·김화를 저변으로, 평강을 정점으로 한 삼각지대의 군사적인 호칭으로, 신고산∼평강으로 이어진 추가령지구대를 통과하는 경원선과 5번국도가 여러 곳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교통의 중심지였다.
당시에는 공산군측이 나진, 성진, 원산항에 양륙된 군수물자와 각지에서 동원한 병력을 이 지대에 집결시킨 뒤 전선에 최대 병력으로 투입한 중간 책원지였다. 이러한 이유로 이 지대를 '철의 삼각(Iron Triangle)'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이 일대에서 수많은 크고 작은 전투가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쌍방의 전체적인 작전과 전세에 많은 영향을 끼친 전투로는 파일드라이버(Pile Driver)작전, 백마고지 전투, 저격능선 전투 등이 있다.
철의 삼각지는 미8군사령관 밴프리트 대장이 "적이 전선의 생명선을 사수하려는 철의 삼각지(Irion Triangle)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북위 38도 북쪽 중부에 위치한 철원, 김화, 평강을 정점으로 하는 삼각지대로 공산군의 최대 중간 책원지(나진, 성원, 원산항에 양륙된 군수 물자와 각지에서 동원한 병력을 이 지대에 집결시킨 뒤 전선에 투입)로, 군사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다. 이 삼각지대는 '철의 삼각'이라 불리우며, 크고 작은 수 많은 군사 작전들이 펼쳐졌는데, 많은 전투 중, 백마고지 전투,저격능선 전투 등이 철의 삼각지대 전투 중 하나이다.
철의삼각지대전투
저격능선전투는 1952년 10월 14일부터 11월 24일까지 벌어진 전투로, 공산군이 대대적인 전초 거점을 전개한 것에 대응하여 김화 부근을 방어하던 국군 제 3사단이 저격 능선을 목표로 감행한 공격 작전이다. 이름없던 이 능선이 저격능선이라 불리게 된 이유는1951년 미 25사단이 고지를 점령할 때 중공군의 저격병에 많은 피해를 입어 스나이퍼 리지 (Sniper Ridge)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저격능선은 강원도 철원군 오성산 남쪽에 있는 590고지로서, 능선의 규모가 작아 능선 위에서는 소대단위의 기동이 가능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혈전에서 혈전으로 이어진 소모전이 불가피한 곳이었다.
국군 제2사단은 오성산 남단의 저격 능선 일대에 배치된 중공군 제15군의 방어진지를 공격하여 초전에 목표를 점령하고, 이후 42일 동안이나 인해전술에 의한 끈질긴 역습을 반복하는 중공군을 물리치면서 저격 능선 진지를 사수하였다. 이 전투로 인해 국군 제2사단은 1개 연대 규모의 병력이 손실되었고, 중공군은 2개 연대 규모의 병력이 살상되었다.
이 전투로 인하여 국군은 2개 연대 규모의 중공군을 격퇴하는 전과를 올렸고, 평강-철원-김화를 잇는 철의 삼각지대를 온전히 확보하였다.
저격능선전투 전적 기념비
지형의 특성으로 6.25 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는 '철의 삼각지대 전투'. 많은 사람들이 백마고지 전투는 기억하지만, 저격능선전투는 기억하지 못한다. 가장 큰 이유는 전투 전적지가 대한민국이 아닌 북한에 위치하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되며, 비록 전적지에 찾아 갈 수는 없지만 저격능선을 지키기 위해 우리 국군의 희생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저격능선전투 또한 기억해야 될 것이다.
백마고지 전투
백마고지 전투 (한국전쟁의 일부) | |||
날짜 | 1952년 10월 6일 ~ 10월 1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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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강원도 철원 서북방 395 고지(백마 고지) | ||
결과 | 국군과 미군의 대승리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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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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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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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규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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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 전투(白馬高地戰鬪)는 한국 전쟁 당시인 1952년 10월 6일 ~ 10월 15일까지 한국군과 미군이 중공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이다.
당시 강원도 철원 서북방에 위치한 395 고지는 광활한 철원평야 일대와 서울로 통하는 국군의 주요보급로를 장악할 수 있는 군사지정학상 요지가 되어 중공군과 국군의 치열한 전투가 재개되었다.
당시 제9보병사단은 춘천 및 홍천 전투에서 북한군 전차 부대를 물리쳤던 김종오 소장의 지휘 하에 1952년 9월 중순부터 철의 삼각 지대를 이루는 강원도 철원에 투입되어 395 고지를 기점으로 우측 중강리까지 11km에 이르는 철원 평야를 방어하고 있었다.
이때 제9보병사단 정면으로 포진한 중공군 제38군 예하 113, 114 보병사단의 예비 부대로 제112보병사단이 후방에 대기 중이었다.
이를 간파한 김종오 소장은 1952년 9월 22일 좌측 전방의 395 고지에 임익순 대령의 제30보병연대, 우측 전방에는 김봉철 대령의 제29보병연대를 전개시키고 이주일 대령의 제28보병연대를 예비 부대로 하여 유사시 양 연대를 지원하도록 하였다. 또한 유사시를 대비해 전부일 대령의 제51보병연대를 대대 단위로 분산시켜 평야 일대에 위치한 취약한 주저항선 방어를 강화하였다.
전투 과정
10월 6일 저녁 중국인민지원군 대장 장융후이는 제38군단의 6개 연대의 지원부대병력 등 총병력 4만 4056명과 각종포 55문의 지원을 받으며, 일제히 봉래호의 제방을 폭파시켜 역곡천을 범람시킴으로써 국군을 기습 공격했다.
이로 인해 제3대대가 증원 병력을 투입하는 데 차질을 빚어 중공군을 395 고지로 맹렬히 돌격해 제30보병연대 1대대장 김영선 소령의 휘하 부대로 3차례나 전투를 치뤄 중공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0월 7일 중공군은 다시 제4차 공세를 감행해 2개 대대로 1대의 전초 기지를 포위해 지속적으로 보병 돌격과 지원 포격을 감행해 395 고지를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에 이주일 대령의 제28보병연대가 투입되어 2시간의 걸친 전투 끝에 395 고지를 탈환했다.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10월 8일 중공군 제38군 예비 연대를 투입해 제5차 공세를 가해 오전 8시 다시 395 고지 정상을 점령했으나 최창용 중령의 제28보병연대 제3대대가 반격하여 23시에 고지를 다시 탈환했다.
불과 3일 동안 5차례에 걸친 공방전으로 중공군 제38군 113, 114보병사단의 피해가 심각했으나 제28보병연대는 물론 제30보병연대도 재편성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할 피해를 입어 김종오 소장은 제29보병연대의 투입을 검토한다.
10월 9일 다시 중공군이 제6차 공세를 펼쳐 제30보병연대는 전력이 바닥나 3시간 만에 고지 정상과 우측 능성을 내주고 후퇴하지만 김봉철 대령의 제29보병연대가 투입되어 역습을 감행해 고지를 다시 탈환했다.
그러자 중공군 제38군 사령부는 제112보병사단의 연대까지 동원해 10월 10일 대규모 인해 전술을 펼치고 제9보병사단의 잔병들도 참호로 뛰어들어 백병전을 펼쳤다.
이날 3차례의 함락과 탈환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중공군이 최종적으로 고지를 장악했으나 10월 11일 오전 이대철 소령의 제29보병연대 1대대가 김경진 소령의 2대대 병력을 증원받아 고지를 탈환시키는데 성공했으나 김경진 소령은 전투 과정에서 박격포탄을 맞아 전사했다.
이후에도 전투는 4일 동안 계속되어 10월 15일 새벽 제28보병연대는 기습을 감행해 395 고지를 완전히 장악하고 제29보병연대도 고지 북방의 전초 기지를 탈환해 중공군을 완전히 몰아내 이로써 전투는 종결되었다.
결과 및 영향
이 10일 동안 12차례의 공방전으로 백마 고지는 황폐화되었고 중공군은 1만 명, 국군은 35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제38군은 사실상 전투력을 상실해 재정비에 착수했고 제9보병사단도 혹심한 손실을 입어 재편성이 필요했다. 또한 이 전투에서 국군은 21만 9954발, 중공군은 5만 5000발, 총 27만 4954발의 포탄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도 강승우 중위, 안영권 하사, 오규봉 하사, 김경진 소령, 이성덕 소위, 김광수 대위 등 많은 국군 장병이 전사했다.
전투 기간 동안 미 공군이 주간 669회, 야간 76회의 출격 기록을 세우며 중공군을 폭격했으며 중공군 제38군은 3개 보병사단 9개 연대 중 7개 연대에 걸쳐 1만 명을 사상했는데 특히 이번 전투에서 잃은 군대가 정예병이라 차후 신병이 보충되더라도 숙련을 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려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 승리의 요인은 우수한 정보활동과 보병과 포병의 적절한 협동, 전투부대의 적절한 임무교대 등으로 통한 충분한 휴식이 있었고 이후 제9보병사단은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하였다.
저격능선 전투
저격능선 전투 | |||
날짜 | 1952년 10월 14일~11월 2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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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 ||
결과 | 국군 제2사단의 승리 중공군의 공격으로부터 방어 성공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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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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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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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규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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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격능선 전투(狙擊稜綫戰鬪, 영어: Battle of Sniper ridge)는 1952년에 중부전선의 김화(현재의 철원군 김화읍 주변)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국군 제2사단이 중공군 제15군에 맞서, 6주간에 주저항선 전방의 전초진지를 빼앗기 위한 공방전을 벌인 지역이다.
이 지역은 김화 북방 7Km지점에 위치한 철의 삼각지대 중심부에 자리잡은 오성산에서 우단의 김화지역으로 뻗어내린 여러 능선 가운데 남대천 부근에 솟아올라 그 해발고도는 590m정도이고 능선의 크기는 1㎢정도의 장방형 무명능선이었다. 저격능선이라는 명칭은 1951년 10월, 노매드(Nomad)선을 목표로 진격작전을 전개한 미군 제25사단이 김화지역으로 진출하여 중공군 제26군]과 대치하게 되었을 때 이 능선에 배치된 중공군이 538고지로 진출한 미군을 저격하여 상당한 피해를 입히게 되었다. 그러자 미군 병사들은 이 무명능선을 가리켜 ‘저격능선(Sniper Ridge)’ 또는 ‘저격병 능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952년 10월, 중공군이 전초진지에 대해 대대적으로 공격을 시작하자, 미군 제8군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전초진지 전반에 걸쳐 아군이 주도권을 장악하는 소규모 공격작전을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하여 ‘쇼다운 작전(Operation Show Down)’이라고 대대규모의 병력으로 제한된 목표를 탈취하도록 하는 작전을 개시했다. 이 작전으로 미군 제7사단은 삼각고지를, 국군 제2사단은 제17, 31, 32연대와 추가로 증원된 제30, 37연대와 16개 포병대대로 저격능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전투가 시작하기 전, 중공군 제15군은 오성산을 중심으로 예하 3개 사단을 배치해두었는데, 그 중 제45사단은 저격능선에 전초진지를 설치하여 경계부대를 배치했다. 배치된 부대 규모는 중대에 불과했지만, 사단 및 군단급 병력 지원이 가능한 상태였다.
전투 경과
국군의 선제공격
저격능선 전투는 국군 제2사단의 공격으로 시작했다. 10월 14일 05시, 국군 제2사단은 9개 포병대대 공격을 시작으로, 제32연대 제3대대가 돌격으로 제1차 공격이 시작했다. 하지만 제1차 공격은 실패했다.
그리하여 제3대대는 1개 중대를 지원받으며 13시 40분에 다시 공격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미군 전폭기 6개 편대와 국군 제2사단의 9개의 포병대대의 집중포격을 지원받아 공격을 했다. 그 결과, 중공군 진지를 완전히 파괴하고 제32연대 제3대대는 치열한 백병전을 끝으로 저격능선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점령한 후, 대대는 Y고지와 돌바위 고지에 각각 1개 중대를, A고지에는 3개 중대를 배치하여 중공군 역습에 대비하였다.
중공군의 역습
중공군 제133연대는 이날 야간에 강력한 포병화력과 파상적 돌격공격으로 Y고지와 A고지를 집중적으로 공격을 했다. 중공군과의 치열한 백병전 끝에, 제3대대 전술지휘소는 함락되었다. 그리하여 국군은 돌바위 고지를 남겨두고 물러났다.
이때 제32연대는 예비연대 제17연대 제2대대를 투입하여 돌바위 고지를 엄호와 전폭기 폭격지원으로 10월 15일 14시 30분, A고지를 재탈환했다. 이에 대해, 중공군은 이날 밤과 10월 16일 새벽에 제133연대의 2개 대대로 고지를 공격을 하였으나 실패했다. 또한 중공군 제134연대의 역습도 실패했다. 그 이후로 중공군은 제135연대를 투입을 했지만, 제135연대는 새로운 방법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우선 Y고지를 점령하고 진지를 구축하고 A고지와 돌바위 고지를 공격했다. 결국, 국군 제2사단 제32연대는 중공군 제135연대와의 치열한 백병전과 제1대대의 역습에도 불구하고 A고지를 빼앗기고 말았다.
반복적인 역습
10월 20일 08시, 국군 제2사단장은 제32연대와 제17연대를 임무교대하여, 제17연대가 A고지를 탈환하도록 했다. 제17연대 제1대대는 세 차례 공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국군은 그 이후에도 76회의 항공지원을 받아 11시에 다시 공격을 개시하여 A고지를 탈환했다.
그 이후, 국군은 중공군의 역습으로 A고지를 피탈당하고, 국군 제3대대 역습과 중공군의 역습과 국군이 다시 A고지 확보로 이어졌다.
미군과의 임무교대
이처럼 저격능선에선 치열한 공방전이 일어나는 가운데 군단계획에 의해, 국군 제2사단은 미군 제7사단의 작전지역인 삼각고지를 인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국군 제2사단은 A고지 집중적인 방어 작전에 들어갔다. 제31연대를 삼각고지로 배치해서 방어하도록 하고, 저격능선은 제17연대에서 제32연대로 교대하여 제17연대는 예비 임무로 전환되었다.
제32연대의 투입 이후 무리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국군이 주간작전에서 막강한 화력으로 중공군을 제압하면, 중공군은 야간역습으로 대응했다. 제32연대 제2대대는 병력을 종심으로 깊게 배치하여 중공군의 역습을 막아냈다. 중공군은 제45사단에서 제29사단으로 교대해서 공격을 실시하였지만, 국군 제2사단은 11월 25일까지 중공군을 격퇴하고 진지를 사수하는데 성공했다. 그 이후 국군 제2사단은 국군 제9사단에게 임무를 인계하고 군단예비로 전환하여 부대정비에 들어갔다.
결과
국군 제2사단은 6주간의 장기전으로 저격능선을 방어하는데 성공을 했다.
베티고지 전투
베티고지 전투 (한국전쟁의 일부) | |||
날짜 | 1953년 7월 15일 ~ 7월 16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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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경기도 연천 서쪽 15km | ||
결과 | 한국군 승리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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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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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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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규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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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형 : 표고 120∼150m정도의 세 봉우리로 이루어진 고지
휴전을 앞두던 시점 소위로 현지임관한 김만술 소위와 소대원들의 결사항전
중국군은 휴전 성립을 목전에 두고 주요지형을 확보하기 위하여 결사적인 국지공격을 감행해 오고 있었다. 국군은 대대는 연대의 우 일선으로서 제5, 6, 7중대를 FEBA에 배치하고 제7중대 2소대(김만술소위)를 전초진지인 '베티고지'에 배치하여 방어를 실시했다.
작전경과
1953년 7월 15일 휴전 직전, 국군 제1사단 11연대 제6중대 2소대장 김만술 소위는 13일∼14일간의 적 공격으로 전투력이 상실된 제7중대 1소대와 교대하여 '베티고지' 방어임무를 인수했다.
그 날 19:00경, 약 1개소대 규모의 적이 각종 포의 지원 하에 공격을 개시, 아군 포화를 뚫고 교통호까지 접근하여 백병전을 전개했다.
이때 교통호로 뛰어든 적을 소대장이 선두에서 총검으로 격살하자, 공포감에 질렸던 병사들이 일시에 용기를 얻어 용전분투한 결과 적은 다수의 시체를 유기한 채 패주했다.
22:00, 적은 다시 동 고지 중앙봉을 중심으로 좌, 우측으로 1개 중대 및 2개 중대 병력으로 각각 공격을 재개했다. 소대장은 지원포격과 사격으로 이를 저지하였으나, 일부 적이 교통호로 침입하여 수류탄을 투척하여 그중 1발이 동굴 내에서 폭발하여 소대의 무전기를 파괴했다. 소대장은 재빨리 총검과 수류탄으로 적 4명을 폭사시키고 소대원들도 계속 수류탄을 투척하여 적을 후퇴시켰다.
통신이 두절된 소대장은 24:00경, 연락병을 중대본부로 보내, 전황보고와 통신망 복구를 요청하였고 대대장은 즉시 대대통신병 4명을 파견해 줌으로써 16일 02:30경, 통신이 개통되어 중대와 연락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04:00경, 적은 베티고지와 그 좌측지점에서 각각 1개 소대규모를 투입시켜 공격하였으나, 아군은 지근거리까지 유인하여 수류탄과 백병전으로 몰살시켰다. 이때 동굴에 접근하는 적 1명을 소대장이 총검으로 격살했다.
05:40, 적은 중앙봉 반사면에 1개 중대 규모이상의 병력을 투입시켜 공격을 계속하자, 소대장은 수류탄전과 백병전(이때도 소대장이 3명의 적병을 사살)을 전개하였으나 수적으로 불리함을 직감하고 전소대원을 동굴 속으로 대피시키고 후방의 포사격과 더불어 진내사격을 실시한 결과 적은 북방으로 철수했다.
06:00, 적은 안개 낀 틈을 이용, 중앙봉과 좌측봉으로부터 다시 공격을 계속하여 약 2시간에 걸친 혈투 끝에 적은 퇴각하고 말았다.(이때 치열한 백병전을 전개) 이와 같이 하여 제2소대는 07:30까지 18시간 반 동안 무려 19회에 걸쳐 도합 3개 대대 병력의 적과 싸워 동 고지를 끝까지 사수했다.
결과
중국군 피해는 전사 314명, 부상(추정)450명, 포로 3명 등 발생했고, 아군 피해는 전사 24명이었다. 김만술 소대장을 비롯하여 12명은 생환했다. 적의 매복사격으로 인한 부상을 무릅쓰고 본부로 뛰어가 전황보고와 통신시설복구를 감행한 이강로 하사에겐 충무무공훈장, 각분대의 분대장인 김순구 중사와 김흥규 중사는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았고 김만술 소위는 이 전공으로 후일 한국과 미국의 최고무공훈장 금성태극훈장 및 십자훈장을 수여 받았다.
에필로그
안타깝게도 24명의 국군용사들이 산화한 '베티고지'는 휴전이 되면서 남방한계선 너머 비무장지대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김만술 소위를 비롯한 소대원들의 결사항전(변변한 지원도 없이 수류탄,철모,야전삽,총검으로 또는 맨주먹으로 처절한 백병전을 감행)으로 중국군 3개 대대병력에게 큰 손실을 가해 그들의 투혼이 오늘날에도 신화로 전해지고있다.
7.13 중국군의 금성 전투와 맞물린 시기에 벌어진 한국전쟁의 대미를 장식하는 격전이었다.
금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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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 전투 (한국전쟁의 일부) | |||
날짜 | 1953년 7월 13일 ~ 7월 20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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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강원도 김화군 근동면 , 화천군 간동면 | ||
이유 | 반공포로석방문제 | ||
결과 | 중국군 승리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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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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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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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규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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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 전투는 한국 전쟁 말기인 1953년 7월 휴전이 임박해지고 있을 때, 금성 지역 북방에 위치한 중국군과 국군이 치른 전투이다. 7·13 공세라고도 한다.
당시 중국군은 한국 전쟁에서 그들이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을 세계에 과시하려는 정치적 목적과 중부전선에 돌출되어 있는 한국군 전선으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할 목적으로 중국군 4개 군 산하 12개 사단의 병력을 동원하여 국군 5개 사단이 방어하고 있던 금성 지역의 돌출부에 대한 최후공세를 감행했다.
전투 과정
국군 5개 사단은 7월 13일에 대대적인 중국군의 공격을 받고 금성 돌출부의 양견부가 돌파되었으며, 뒤이어 후방의 지휘소(수도사단)가 중국군의 기습을 받는 등 혼란이 야기됨으로써 국군은 금성천 남쪽의 백암산과 주파령, 적근산 부근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중국군의 이같은 공세 가운데 국군 6사단과 3사단은 예비부대로 전환되고 5사단은 백암산 남쪽 고지군의 방어선을 구축, 강화시켜 아군의 후방인 화천저수지까지 노리며 진격해오는 중국군을 필사적으로 저지 시켰다. 중국군은 선제 공격에 성공했으나 5사단을 주축으로 한 국군 제2군단의 끈질긴 저지, 그간의 병력 손실, 그리고 장마로 인한 보급의 한계로 더 진격하지 못하고 재정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중국군이 재정비하는 사이 7월 16일부터 국군 제2군단(당시 5사단, 8사단, 11사단으로 구성)은 김종묵 소대장의 활약을 앞세운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미 제8군의 공격목표인 아이슬랜드선(간진현-금성천-462고지)으로 진출 탈환하였으나, 금성 돌출부인 금성천 북안의 원진지는 회복하지 못한 채 이 선에 머물게 되었다.
전투 결과
국군은 1,701 명의 전사자와 7,548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외에 4,136명이 사로잡히거나 실종되었다(대부분 포로가 되어 현재까지 북한에 억류). 한편 중국군은 27,216명이 전사하고 38,700명이 부상했으며, 186명이 포로가 되었고 1,428점의 무기를 노획당했다.
국군은 공세 초반 임익순 대령이 포로가 되고(휴전 후 포로교환당시 송환됨), 지원을 나온 기갑연대장 육근수 대령이 전사하는 등의 손실을 입었고 아이슬랜드 선 전방의 전 전방의 전초선만을 확보한 상태에서 휴전을 맞게 되었다.
중국군은 약 40km 정면에서 평균 4km를 남하하여 금성천 북안의 주요고지를 점령하게 되었으며, 초반의 기습으로 승기를 잡은 전투였으나 16일을 기해 전열을 복구한 국군에게 역습당한 점, 백암산과 적근산부근에서 2군단에게 저지당한 점, 점령지의 절반이었던 간진현-금성천-462고지를 다시 빼앗긴 점, 그리고 국군에 비해 2~3배가 우세한 병력임에도 불구하고 중국군 6만6천여명의 피해(국군에 비해 3~4배)가 발생한 점으로 보면 소기의 목표를 달성한 승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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