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916 : 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 21
4. 언제 한번 죽기 살기로 싸워본 적이 있는가?
허깨비 군사력으로 싸운 임진왜란
조총이라는 것이 쏜다고 다 맞는 것입니까?
정보 부재라는 말이 그토록 잘 들어맞는 전쟁이란 없을 것이다. 왜란 발발 전 대처방안이라는 것이 겨우 통신사를 1회 파견하여 일본 막부와 30분 정도 공식 대면만 하고 왔으니 그런 대면에서 어떻게 전쟁위기 따위를 파악할 수 있으랴. 일본 막부의 관상만 보고 돌아왔서 보고를 올렸으니 어떤 원시국가도 그런 식으로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부산에는 일본어를 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었다. 왜관도 있어서 일본인 수백 명이 집단적으로 와서 살았으며 그들은 모두 정보원이나 다름 없었다. 우리 조정이나 관헌들의 동태도 수시로 파악하여 본국에 전하고 있었다.
우리 측에서는 일본 파견 관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일본이라는 국가를 대마도라 다름없는 야만 소국으로 멸시하면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한 두 명만 정보원이 있었더리면 일본이 내분을 끝내고 한 사람에 의해 천하통일이 되었으며 서양에서 들여온 조총이라는 신무기가 대대적으로 자체생산된다는 것쯤은 넉넉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조총은 만들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성능 시험을 위해 발사를 해봐야 하니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함선 주조도 바닷가에서 해야 하고 20만 군사를 집결시켜 훈련도 해야 한다. 이런 것들이 절대로 비밀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더구나 전쟁이 나기 2년반 전에 대마도 도주 평의지는 새로 만든 조총 여러 자루를 몰래 우리나라에 선물로 바쳤다. 조정은 그것을 분해해보고 응용할 것을 연구한 대신 군기시에서 엄중히 보관하라고만 명령했다.
6.25 때도 북한군이 몇 달 전부터 전방에서 병력을 이동 배치시키고 민간인을 소개시켰으며 탱크가 들어오고 화포 증강, 밤낮으로 트럭이 군용품을 실어 날랐지만 우리 군 지휘부는 정보부서에서 보고되는 정보를 무시하고 무사태평이었다. 전형적인 임진왜란의 재판이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조선은 중앙에 국가 위기 대처반인 비변사 회의가 있었고 국방을 담당하던 병조가 있었지만 어느 누구 하나 전쟁을 걱정해본 사람이 없었다. 모두 입으로 형식적인 걱정만 하다가 말았다. 이이의 10만 양병설도 지금은 낭설로 밝혀졌다.
더구나 임진왜란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공격을 당한 것이 아니라 이미 1년 전부터 일본 사신이 와서 명을 칠 터이니 길을 열어 달라고 통보를 해왔다. 아마 일본은 조선이 명나라에 무수한 핍박을 받고 있으므로 함께 명을 치자면 조선이 응락할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런 제안은 전쟁 6개월 전에도 또 전해졌지만 여전히 우리 조정은 야만족의 허풍으로만 받아들였다.
겨우 몇 달전에야 좀 위험하다는 생각에 남쪽의 성곽을 보수하고 무기를 점검하는 등 방비를 시작했으나 이것도 요식행위였다. 전쟁에 대비하려 들었다면 경상도 전라도 수군을 부산 앞바다에 집결시켜 연합 방어 훈련도 실시하고 해안 감시체제 구축 및 원거리 초계 활동을 전개하거나 정보원을 대마도에 침투시켜 적의 동향을 면밀히 정찰하는 등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부산 앞바다에 적선이 새카맣게 몰려들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고 경상좌.우도 수군 박홍 등 수사들도 전혀 적정은 물론 훈련도 등 전투 준비를 소홀히 하고 있었고 적선이 부산 앞바다에 몰려들자 배를 모두 침몰시키고 양곡과 무기를 불태우고 장수와 군졸들은 도망치기에 바빴다. 부산포 첨사 정발, 동래성 부사 송상현도 비록 순절하였지만 적이 바다에서 육지로 상륙할 때 일시에 몰아치는 전반적인 헙동작전 개념은 전무하였고 지역책임제로 적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소극적인 작전개념으로 대비를 소홀히 하였던 것은 마찬가지다. 부산포와 동래성이 수천 명의 군사로 수만 명의 왜군을 상대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며 병력을 집결시켜 결전을 시도하자는 전략도 없었다. 적이 오는 길목은 부산포-동래-대구-상주-문경-충주-한양으로 뻔한데 가장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지도 못하고 지역방어개념에 따라주변에서 모인 장수와 군사들도 핑계를 대고 대부분 성을 빠져 나가 도망쳤다. 대구감영에서는 군사들이 모였다가 중앙에서 장수가 내려오지 않아 며칠을 기다리다가 슬그머니 대부분 흩어지고 말았다.
핵심이 되어야 할 병조판서는 몇 달이 멀다하고 교체되어 전쟁 전 4년간 7명이 들락거렸다.
봉수대도 막통이엇다. 봉수대가 원활하게 작동되었더라면 반나절 만에 조정에서 알 수 잇엇을 것인데 그러지 못했다. 나무가 무성하므로 시계 확보를 위해 항상 가지를 잘라줘야 하는데 그런 인력이 없었다.
성종 때의 기록을 보면 봉수대에는 통상 다섯 명이 근무하는데 낮에는 지키지도 못하여 말 한 필 없이 정상까지 짐을 옮기는 등 고단한 처지여서 지원자도 없고 도망자도 많았다고 나와 있다.
이런 봉수대마저도 주로 북쪽에 설치되어 있었다. 연산군 당시 각 봉수대 군사들에게 덧옷을 지급했는데 평안도에 350벌, 영안도에 500벌, 남도에는 겨우 62벌이었다. 남쪽에는 그만큼 봉수대가 적었다는 것이니 결국 남쪽을 얼마나 등한시 했는가를 알 수 있다.
전쟁이 나자 신립 장군은 왜군이 조총으로 무장했으니 작전을 달리 세우라고 주변에서 귀띔을 해주었지만, "조총이란 것이 쏜다고 다 맞는 것입니까?" 라며 비웃었다. 신립은 조선식 조총만을 생각한 것인데, 조선식 조총은 가만히 들고 서서 화약 심지에 불을 붙이고 터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신립은 일국의 사령관이었으나 성격이 급하여 부하들 목을 치는 것이 다반사였고 기술발전에 그만큼 무지했다는 것이다. 신립은 왜군이 대기마 장애물을 설치하고 줄줄이 도열하여 복선으로 연속사격하는 조총부대에 탄금대 진흙탕 벌판에서 정면 돌격을 감행하다가 7,000 조선 기마대 군사들과 허무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무지한 장수 밑에서 애꿋은 목숨만 잃은 조선군들이 불쌍할 뿐이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국방부 장관과 총참모장은 '그깟 북한군들, 내려 오면 궤멸시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것'이라고 큰 소리쳤지만 한국군은 초전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어찌 그리 닮을 수 있을까.
임진왜란 때는 의병이 봉기하여 전국에서 연신 승전보를 올렸다. 그러면 관군은 존재하지 않았는가? 아니다. 있었으나 장부상 뿐, 숫자도 적었고 싸우면 싸우는 대로 연전연패했다. 각 지역 수령들은 모두 도망가 버려 심지어 의주까지 도망갔던 선조도 경호군이 다 도망가고 제대로 없어서 함경도에서 간신히 경호대원 400명을 뽑았다.
그뿐 관군의 활약상은 거의 없다. 관군이 그 모양이 되자 죽기로 싸우려고 일어선 사람들은 죄다 의병들이었다. 의병들과 충무공이 아니었다면 조선은 그때 일본과 합병되었을 것이다.
만약 선조가 도망가지 않고 서울에서 내가 죽으리라 하며 앞장을 섰다면 당시 상황을 보더리도 10만 왜군으로서는 절대로 서울을 쉽게 함락시키지 못햇을 것이다. 서울 성곽은 튼튼했고 12만 인구가 살고 있었다. 행주산성 싸움처럼 결사적으로 항전을 했더라면 성을 빼앗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런 싸울 각오하고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던 왕과 권신들은 백성들보다도 더 먼저 도망하기 급급했다. 비가 내리는 날 저녁 황급히 북으로 도망가는 어가를 향해 백성들은 욕을 하며 돌을 던지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
"설사 불행한 처지에 이른다 해도 임금과 신하들이 우리나라 땅 안에서 다 함께 죽어야 한다." -이 충무공-
참고로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성 전투, 동래성 전투, 상주 전투, 탄금대 전투를 간략히 살펴본다.
부산진성 전투
“적선이 바다를 덮고 몰려왔다. 부산첨사 정발은 마침 절영도에서 사냥을 하다가, 조공하러 오는 왜인들로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는데 미처 진(鎭)으로 돌아오기도 전에 적은 이미 성으로 기어올랐다. 정발은 어지러이 싸우는 중에 전사했다. 이튿날 동래부(東萊府)가 함락되고 부사 송상현이 죽었으며, 그의 첩도 죽었다. 적은 드디어 길을 나눠 진격하여 김해, 밀양 등 부(府)를 함락했는데 경상병사 이각은 병력을 거느리고 먼저 달아났다. 태평한 세월이 200년 동안 이어져 백성들은 전쟁을 몰랐고 군현들은 풍문만 듣고도 놀라 무너졌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사실을 최초로 기록하고 있는 1592년(선조 25) 4월의 <선조실록> 내용이다. 임진왜란 초전의 양상을 간명하게 보여준다. 당시 일본 쪽 기록을 보면 부산까지 침략군을 수송했던 병선은 700여척에 이르는 대선단이었다. 그럼에도 부산첨사 정발은 처음에는 침략군을 조공 선단으로 오인했다. 일본의 침략이 있을 것임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방어 태세를 제대로 갖추기는 어려웠고, 부산진을 비롯하여 서울로 이르는 길목의 주요 고을들이 줄줄이 무너졌다. 전쟁은 이렇게 일본군의 승승장구로 시작되었다.
2만명 대 1000명…부산진성의 함락
1592년 4월 13일 '고니시'가 지휘하는 일본군 1번대 18,700명은 병선 700여척에 분승하여 쓰시마를 출발하여 그날 오후 부산포 절영 앞바다 에 도착했다.
당시 포구 주변에 조선군 배는 한척도 보이지 않았다. 첨병으로 하여금 포구 일대를 수색토록 하고 일부 병력은 부산진성 주변으로 정찰을 올려 보냈다. 조선군의 매복을 염려하여 고니시 장군은 어둠이 짙어지자 숨을 죽인체 부산포구를 유심하 살폈다. 불빛도 없고 인적도 없다. 아니? 조선군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밤새 장수들과 작전회의를 거듭한 고시니는 뜬 눈으로 날을 새고 새벽 6시를 기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안전한 곳으로 판단된 우암동 방면으로 상륙부대를 상륙시키기 시작했다.
상륙 후 전열을 갖춘 부대는 부산진성을 향하여 첨병을 앞세우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산하는 고요하였다. 병사들은 지나가는 길 도로변 민가에 불을 지르고 수색을 하였으나 민간인들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 아니 민간인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조선 수군은? 고니시 장군은 전진하면서도 너무나 조용한 부산진 일대의 모습에 의아해 하면서도 조선군의 매복 작전을 두려워 하며 주변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선발대는 거의 2만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반면 부산진의 조선군 병력은, 기록에 따라 600명에서 1000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어느 쪽이든 중과부적의 상황이었다. 정발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용맹하게 분전했지만 성을 지켜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동래성 전투
동래는 당시 동래도호부로써 부산지역을 관할하는 행정의 중심지였다. 임진왜란 1년전쯤에 동래부사로 '송상현'이 임명되었는데, 조정의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는 인물로 '정발'과는 달리 문인출신이었다. 동래부사는 경상도 남쪽 반을 관할하는 행정과 군사를 관할하는 자리였다. 물론 일본의 침략에 대비한다는 차원에서 동래부사로 임명되어 방어력 개선에 노력했다.
4월14일 부산진을 돌파한 일본군은 이튿날 동래로 밀려들었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부산진 함락 소식을 듣고 성 안팎의 방어 태세를 정비하고, 인근의 양산·울산 지역의 병력까지 불러들여 결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동래성으로 들어왔던 경상좌병사 이각은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성 바깥에서 협공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북쪽으로 달아나버렸다. 이윽고 일본군은 성을 포위한 뒤, 남문 밖에 목패를 세웠다. 목패에는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 달라(戰則戰不戰則假我道)”는 글귀를 써 놓았다. 송상현은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死易假道難)”고 응수했다고 한다.
부산진성이 함락되던 그 시각에 송상현은 예하 첨사들과 같이 술판을 벌이고 있던중에 연락을 받고 급거 동래성으로 귀대하게 되는데 애첩이야기며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풍류를 좋아했던 낭만적인 선비였던것 같다.
어찌하였던 정황을 파악하고 박홍의 보고를 받고는 부산진이 함락된 것으로 판단하고 적이 곧 동래성으로 공격할 것으로 판단했다. 전쟁 발발 소식에 울산 병영에 있던 경상좌병사 이각이 군사를 이끌고 입성했다. 이어 양산군수 조영규, 울산군수 이언성 등도 군사를 이끌고 동래성으로 들어와 수비군에 합류했다.
적정에 대한 구체적인 아무런 정보도 없었다. 정찰병이나 적정을 살피는 부대도 내보내지 않았다. 오로지 적이 오기를 기다리는 작전이었다. 성 외곽에 장애물 설치며, 매복진지, 감시관측 가능한 지형확보, 성곽보수, 장비/물자확보,화 기/탄약 확보 등에 대한 준비는 얼마나 되었는지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지형을 이용한 단단한 성에 강한 군사와 충분한 물자가 비축되어 있다면 최소한 며칠은 버틸수는 있을 것이다.
일본군은 부산진성을 점령하고 고시니는 바로 정찰대를 동래성으로 보내 정황을 탐지케 하였으며 4.15일 새벽에 본대를 이끌고 동래성으로 향하였다.
일본군이 동래성으로 접근하자 경상좌병사 이각은 일본군의 접근을 보고받고 양산군수 조영규에게 군사 수백을 이끌고 중간지점에서 일본군을 막도록 지시하자 조영규는 동래성 남쪽 4키로 지점에서 대기하디가 북진하는 일본군 규모를 보고는 황급히 동래성으로 철수하여 보고를 하였다.
이 보고를 들은 경상좌병사 이각은 일본군의 규모에 놀라 송상현에게 성을 지키라고 하고 자신은 밖에서 지원하겠다며 성을 떠나려 하자 송상현이 이각의 소매를 잡으며 함께 싸우자고 하였으나 이각은 "나는 내 진영이 따로 있으니 이곳은 나의 관할 구역이긴 하나 이 성을 지키는 것은 그대의 책임이다"라고 하며 끝내 거절하고 성을 떠나 도망하였다.
고니시는 4월 15일 오전 10시쯤 동래성에 도착하여 3개 부대로 1개부대는 황령산 기슭에, 1개부대는 동래성 서쪽 대로에, 1개부대는 남쪽에서 동래성을 포위하고 성문밖에 패목을 세웠는데,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 고 하였으나, 송상현은 " 싸우다 죽는 것은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고 응수하였다. 이에 고니시는 송상현이 항복할 의사가 없음을 알고 공격개시 신호를 울렸다.
일본군의 공격이 개시되자 조선군은 통나무 등으로 방패삼아 적에게 대항하였으며 적은 적장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조선군 궁수들을 유인하였다. 일본군은 가장 취약한 인생문쪽으로 집중공격하였으며 그곳은 성곽이 낮고 수비가 허술하여 결국 일본군에게 성곽이 돌파되고 말았다.
싸움이 시작된 지 반나절 만에 성은 함락되었다. 적군이 성안으로 밀려오는 와중에도 송상현이 조복(朝服·관원이 조정에 나아가 하례할 때에 입던 예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 움직이지 않자, 일찍이 동래에 드나들며 송상현에게 후대를 받았던 일본군 부장 평성관(平成寬)은 그를 구출하려 했다. 하지만 송상현은 그의 피신 권유를 거부하고 순절했다. 죽기 직전 그가 부친에게 보내려고 남겼다는 시를 보면 마음이 아리다. “달무리처럼 포위당한 외로운 성/ 대진의 구원병은 오지 않는데/ 군신의 의리는 무겁고/ 부자의 은혜는 가벼워라”
일본군이 성내로 물밑듯이 밀려오자 송상현은 조복으로 갈아입고 북향을 향해 네번 절하고 부채에 시한수를 남기고 일본군이 주변에 들어닥치는 그 순간까지 꿋꿋하게 좌정하고 있었다. 송상현을 잘 알고 있는 일본군 장수 대마도 출신 노리마스가 피신을 권유하자 송상현은 단호히 거절하며 자신의 목을 치도록 호통치자 일본군이 그의 목을 내리쳤다. 부인이 달려와서 항변하자 부인도 목을 치니 같이 순절하였다. 그의 첩은 일본군 포로로 일본에 끌려갔다가 강화회담시 조선으로 돌아오는 비운을 겪는다.
양산군수 조영규, 송부사 김희수, 대송백 등은 현장에서 전사하고 울산군수 이언성은 자신이 데리고온 군사 500여명과 같이 항복을 하게 되는데, 적장 고니시는 이덕형에게 보내는 편지를 이언성에게 전달토록하여 포로에서 풀어주나 그는 항복이 탈로날 것이 두려워 편지를 전달하지 않고 도망갔다가 강화회담시 사실이 밝혀지는 등 추한꼴을 보였다. 동래성 전투로 조선군 전사 3,000명, 포로 500명이였으나 일본군은 전사 100명,부상 400명에 불과했다. 경상감사 김수는 진주에서 동래로 이동중 동래성 함락소식을 듣고 경상도 전 지역에 격문을 띄워 백성들을 피신토록 하였다.
고니시 휘하의 일본군 선발대는 동래성 함락 뒤에도 승승장구했다. 그들은 곧 기장, 양산, 밀양, 대구 방향으로 진격하여 4월25일에는 상주까지 도달했다. 4월18일 각각 부산과 김해 등지에 상륙했던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등이 이끌던 일본군 후속 부대도 거침없이 북상 대열에 합류했다.
상주 전투
일본군이 부산진성과 동래성, 밀양성을 격파하며 북상을 시작하자 경상 순찰사 김수는 제승방략 체계에 따라 각 읍 군사를 모집, 정해진 위치에서 기다리라고 각 고을에 통지하였고 이에 따라 문경 이하 수령들은 모두 군사를 거느리고 대구로 집결했다.
한편, 조선 조정은 북진해 오는 일본군을 저지하기 위해 영남지방으로부터 조선의 내륙으로 접근하는 길목인 삼로(三路)를 방어하기 위해 순변사 이일을 중로(中路)에, 성응길을 좌방어사로 임명해 동로(東路)에, 조경을 우방어사로 임명해 서로(西路)를 각각 방어하게 함과 동시에 조령, 추풍령 요충지에는 조방장 유극량, 변기를 방어 책임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모두 현재 소유한 병력이 없어 단지 스스로 군관(軍官)을 뽑아 대동하도록 하였다. 순변사 이일 역시 한양에서 300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생각이었지만 제대로 된 병력을 구할 수 없었다.
이일은 종사관(從事官)으로 홍문관 교리 박지, 윤섬(尹暹)을 선발하고 군관 몇 명과 사수 약 60여 명만 데리고 먼저 출발을 하였고, 군사는 별장 유옥이 모집하여 뒤따르기로 했다. (박지는 경상감사 김수의 사위였기 때문에 이일이 김수의 적극적인 협조를 위해 선발했다고 한다.)
서울지역에서 병력을 모을 수 없었던 원인에 대해선 조금 더 자료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기본적으로는 제승방략에 따르면 이일이 지휘해야 하는 병력은 대구에 모여 있는 경상도 지역 병력이긴 하지만 이전까지의 제승방략에 따른 왜란의 예를 봤을 때 경군(京軍)이 함께 파견되었던 적도 있었던 것으로 볼 때 서울 지역에 왜 군사자원이 없었는지는 좀 의문이다.
당시가 국가 비상상태로 이일 외에 삼도순변사로 임명된 신립도 있고 소규모 왜란과 달리 서울지역 방어도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라서 그런 병력을 제외했기 때문에 남은 병력 자원 중에 모집할 병력이 없었던 것인지도 생각해 볼 일이긴 하다.
어쨌든 이일이 2~3일 동안 서울에서 병력을 모으려고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대구에 모여 있던 군사들이 붕괴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들은 최고 지휘관인 순변사 이일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연일 큰 비가 내리고 군량마저 바닥이 나고 일본군이 내습해 온다는 유언비어마저 돌기 시작하자 탈영을 하는 병사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들을 통제 지휘해야하는 수령(守令)들마저 도망하여 결국 이일이 문경에 도달했을 때는 군사들은 모두 흩어져 버린 상황이었다.
이때 대구에 모여 있던 병력 규모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당시 경상도 병력자원을 감안했을 때 최소 1만 정도는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이일이 이 병력을 제때 수습했다면 개전 초반 상황이 조금 바뀌었을 수도 있었지도 모른다.
이일은 문경을 거쳐 24일 상주에 도착했다. 당시 상주 목사 김해는 산 속으로 달아나 버렸고, 판관 권길이 혼자서 상주 일원을 지키고 있었다. 대구에 있던 병력이 없어져 휘하 병력이 없던 이일은 상주에서 병력을 얻어야 했기에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면서 산으로 피난을 갔던 백성들을 다시 성으로 돌아오게 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그 중 군사를 모집하여 8~9백여 명을 징발했다. 이일은 이들 농민병과 휘하에 데려온 군사 60여 명을 합하여 군을 편성했다.
(여러 기록에는 이때 이일이 서울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군사를 모아서 최대 4~6천명을 모았다는 기록도 있지만 경상도순변사인 이일이 다른 지역에서 병력을 모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병력 규모가 너무 큰 편이라 신빙성은 그리 높지 않다고 생각된다.)
저녁에 개령에 사는 한 사람이 이일을 찾아와 일본군이 근방까지 왔다고 알려 왔으나, 이일은 이 정보를 믿지 않았고 오히려 개령 사람을 『민심을 어지럽힌다』는 죄목으로 참(斬) 할려고 했다. 이에 개령 사람은 『오늘 밤이 지난 뒤에도 일본군이 오지 않는다면 그때 죄를 인정하겠다』고 반박하였으나 듣지 않고 참형에 처했다(다음날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때 일본군 1번대는 낙동강을 도하하여 선산에 진출하여 이날 저녁 상주 남쪽 20여리 지점인 장천리에 진을 치고 상주 일대 조선군의 동향을 살피고 있었다.
당시 이일은 북방에서 실전 경험도 여러 차례 겪었고 [제승방략]을 저술하는 등 전략, 전술에도 능하여 신립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무장이었다. 그런 이일이 기본 중 기본이라는 척후 활동을 왜 무시했는지 의문이다. 일본군의 진격 속도가 생각 보다 빠른 탓도 있겠지만 공식적인 일본군의 진격 정보가 제대로 보고되지 않을만큼 경상도 지역이 혼란에 빠져 있었는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25일 이일은 아침부터 군사들을 상주성 북쪽 북천(北川) 강변으로 데리고 나가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당시 병력이 농민병이긴 하지만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어차피 조선의 군사제도는 양인개병제로 16~60세 모든 양인 남성은 군복무를 해야 했기 때문에 일부 직업 군인을 제외하면 농민이 곧 군사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방군수포로 대표되는 대립문제가 일반화 된 상태였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농민이 평상시 제대로 된 군사훈련을 받아 봤을지가 의문이다.
하여튼 이일은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군사 훈련이 급선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문헌에 따르면 상주시 낙양, 무양, 남성, 서성 일대의 원형으로 성을 쌓았다고 한다. (현재 상주시는 북천 근방에 전적비를 세우고 당시 전투에서 전사한 이들을 기리고 있다.)
문제는 이일이 북천에서 오합지졸 농민병을 훈련시킬 동안 이때도 주변에 척후병이나 보초병을 배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본군의 접근 속도를 예측 못했기 때문에 아직은 여유가 있었다고 판단했던 것일까? 오히려 일본군은 몇 차례나 척후병을 보내 조선군의 상황을 일거수일투족까지도 정찰하고 있었다. 훈련을 받고 있던 군사 중에 정찰을 하고 있는 일본 척후병들을 발견하였지만, 죽은 개령 사람이 생각나 감히 보고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조선군이 훈련을 하고 있던 중 일본군은 상주성내로 진출하여 상주성 안 몇 군데에 불을 질렀다. 성 안에서 연기가 일자 이일은 군관 박정호(朴挺豪) 등을 보내 알아 보도록 하였는데 군관이 다리 밑을 지나가던 순간 숨어 있던 일본군이 조총으로 저격한 뒤 목을 베어 가지고 사라졌다. 잠시 후 일본군 본진이 조선군을 양 옆에서부터 포위하면서 전투가 시작됐다. 일본군은 조총을 사격하며 접근하였고 조선군은 활로 응사하였다.
이일이 『나가서 싸우라』고 독전하였으나 뛰어나가는 자는 몇 사람 되지 않고 도망치는 자가 더 많았다. 일본군은 계속해서 압박하였고 조선군은 진이 붕괴되며 점차 밀렸다. 한양에서 데려온 사수 60여 명이 분전했으나 역부적이었다. 상황이 최악으로 몰리자 이일은 산길을 타고 전장을 탈출했다.
이후 전투는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고 조선군의 피해에 대해선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등과 같은 기록을 봤을 때 대부분 전사한 것 같다.
종사관(從事官)인 홍문관 교리 박지ㆍ윤섬(尹暹), 병조 좌랑 이경류(李慶流), 판관 권길(權吉)도 모두 전사했다. 순변사 이일은 그 길로 문경에 이르러 패전을 조정에 알리고 조령에 있던 조방장 변기와 충주 신립 진영으로 갔다. (병조좌랑 이경류는 조방장 변기의 종사관이었는데 변기와 떨어져 이일을 지원하러 온 것인지 변기 군 전체가 상주에서 이일군과 합류한 것인지는 확인이 안 된다. 또 난중잡록에는 박지는 이때 전사하지 않고 피신했다가 자결했다고 한다.)
이일의 패전으로 상주성은 임진년 4월 24일 일본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충주 탄금대 전투
4월 26일 일본군 선봉이 상주를 출발하여 함창을 거쳐 문경에 도착하였다. 이어 27일에는 문경을 출발하여 조령을 넘었고, 28일 아침에는 안보역을 지나 정오경에는 충추 남쪽 단월역에 다달아 척후로 하여금 조선군의 상황을 정찰케 하였다.
신립도 27일 정찰병들로부터 일본군이 새재를 넘었다는 정보를 들었으나, 직접 말을 타고 새재를 정찰한 결과 일본군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자, 정찰병을 허위보고죄로 참형에 처하였다.
그날 밤 충주성 안에서 신립은 작전을 계획하였는데 조선군이 훈련이 들된 오합지졸인지라 고민하다가 한신(韓信)의 고사에 따라 탄금대 부근에서 배수진을 치기로 결정하였다. 신립은 바다를 건너와 북상하는 적의 피로한 틈을 타서 이들을 평지로 끌어내어 갑자기 몰아치는 전법을 쓰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립의 전술은 결과적으로 적을 제대로 잘 몰랐던 신립의 엄청난 실책이 되고 만다.
28일 아침 일찍히 신립은 기병 4천, 보병 4천 도합 군사 8,000 여 명을 거느리고 충주성을 떠나 탄금대로 출발하여, 남한강과 달천이 합치는 중간지대의 저습지에 진을 치고 적이 남쪽 산간에서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탄금대 동남쪽 들판은 습지였다. 더욱이 며칠 전에 비가 와서 발이 푹푹 빠졌다. 이때 군관 이운룡이 배수진을 보고 "사지(死地)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고 울면서 만류하였지만, 신립은 크게 화를 내며 그에게 곤장 30대를 때렸다. 조선군의 진용은 총지휘관인 도순변사 신립 장군, 순변사 이일, 조방장 변기, 종사관 김여물, 충주목사 이종장 등이 대오를 정비하고 있었다. 신립은 패전하여 도망온 순변사 이일과 조방장 변기에게 선봉에서 공을 세우도록 지시했다.
한편 적은 정오부터 공격준비를 시작하였다. 좌익대장 마쓰우라의 3,000병력, 우익대장 종의지의 5,000병력, 중앙에는 대장 고니시(小西行長)의 직할부대 7,000 병력이 합하여 1만 5천명이 공격에 직접 참가하였고, 아리마, 오오무라, 고지마등이 거느리는 3천 7백명은 예비대로 충주성에 위치하고 있었다.
적은 좌익부터 달천 우안의 본도를 따라 전진하고 나머지 부대는 충주 본 가도를 따라 탄금대에 접근하여 삼면에서 포위 공격하려 하였다. 신립이 명령하여 진을 치던 지역의 서쪽과 북쪽은 달천과 남한강이 막고 있으며, 동쪽과 남쪽에는 지금은 달천강의 제방을 하고 관개가 되어서 옥토가 되어 있으나 당시는 늪으로 되어 있고 갈대가 우거진 갯벌이어서 군사활동이 적당치 않았으며 더욱이 기마병이 말을 타고 달리며 싸우기는 불편한 지역이었다.
신립 장군은 종사관 김여물에게 장계를 초하게 하였는데, 김여물은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전투가 준비된 복장으로 붓을 잡고 장계를 썼다고 하니 당시 상황이 급박함을 짐작하게 한다. 적이 포위망을 점점 좁혀오자 전세가 더욱 급하게 된 신립은 1차로 기병을 돌격시켰다. 일천기의 군사가 일제히 칼과 창을 들고 함성을 지르며 적진에 뛰어들어 적을 공격하였다. 적은 보병이라 조선군이 조금 우세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전세를 파악한 신립은 다시 2차로 1천명을 혼전하는 싸움터에 진격시켰으나, 피아의 사상자만 내고 일진일퇴하였다. 신립은 3차로 2천명의 기병을 모두 돌진시키니 말의 돌진소리, 조총소리, 인마의 고함소리가 탄금대 벌판을 뒤덮었다. 하지만 말을 타고 달려가던 조선군의 기마병은 일본 조총부대의 말 그대로 '밥'이었다.
일본군의 대기마전술은 전국시대를 겪으면서 발전하여 왔는데, 대기마대용 목책을 세워 기병의 접근을 막은 후에 조총 사수들을 일렬로 사선(射線)에 늘어세운 후 멀리서 달려오는 적들에게 대열별로 연달아 일제사격을 퍼붓어 화망을 구성하여 한꺼번에 적을 물리치는 부대 단위 전투였다.
신립이 웃으며 하는 말이 「그대를 이 위기에서 살려 볼까하오」하니, 김여물은 빙긋이 웃으면서 「이 사람이 어찌하여 죽음을 피하는 사람이 되오리까」하고 같이 말을 달려 총돌격의 선두에 서서 깊이 적중으로 들어가니 적진이 크게 흔들렸으나 이미 전세를 돌리기에는 늦었다. 신립과 병사들은 밀리고 밀려 상당수가 남한강 물에 빠져 익사하였다. 나머지 군사들은 충주목사 이종장과 조방장 변기의 지휘 아래 굳게 뭉쳐서 배수진을 끝까지 지키며 필사의 힘을 다하여 적과 싸웠으나 결국 패하고 말았다.
이로써 조선군의 두번째이자 사실상 가장 큰 규모의 정규군이 궤멸하였고, 사실상 한양까지의 문이 열려져 버렸다고 할 수 있다. 순변사 이일은 신립의 뒤에 따라 가면서 조총을 피하다가 대열이 무너지자 전장을 이탈하여 사잇길을 쫓아 산중에 들어 간 다음 적병 수 명을 만나서 활로 쏘아 죽이고 한강을 넘어 북으로 달아났다. 이일은 사람을 시켜 장계를 작성하여 급히 조정에 올리게 하니 조정에서는 비로소 충주전투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4월29일 신립의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도성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이일이 상주에서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부터 도성의 분위기는 이미 흉흉했다. 조정은 민심의 동요를 막으려고 도성 주민들의 피난을 금지했다. 밤이면 사대문을 닫아걸고, 나루의 배를 없앴으며, 골짜기 등을 뒤져 피난한 백성들을 색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립의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위기감은 절정에 이르렀다. 대궐의 호위 군사들은 달아나고 궁궐 문엔 자물쇠가 채워지지 않았으며 물시계는 시간을 알리지 않았다. 4월29일 서울의 분위기는 이미 파장 그 자체였다. 결국 선조는 비내리는 날 밤 백성과 한양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탄금대 전투에 대하여...
신립(申砬,1546-1592) 장군은 무장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별칭자는 입지(立之),시호는 충장(忠壯). 선조 원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도총부도사-진주판관을 거쳐, 1583년 온성부사로 보직되어 오랑케 이탕개를 격퇴시고 두만강을 건너 야인 소굴을 소탕하는 등의 무공으로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하게 된다. 그는 기병운용에 특출한 전술을 구사하여 많은 전공을 세우게 된다.
1587년 흥양에 왜구침입으로 우병마사로 출병하였으나 왜구가 이미 철수한 뒤라 철수시 양가집 처녀를 첩으로 대려온 사실로 삼사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얼마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로 다시 등용되어 직책을 수행 중 병사를 참살했다는 문제로 중추부동지사라는 한직으로 좌천되었다. 신립이 가는 곳마다 부하들을 함부로 죽이는 성향이 강한 장수로 비난이 많았으나 한편으로는 용장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1590년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다시 보직되어 한성판윤에 승진되어 있을시 임진년 왜란을 맞게 되자, 1592년 삼도도순변사에 임명되어 왜군에 맞서 싸우다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전후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충장공의 시호를 받게 된다.
후세 사람들은 신립장군의 탄금대 전투에서 배수진을 치고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전멸하였다는 사실에 대하여 많은 문제점과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신립 장군이 8천명의 조선군으로 1만8천명의 일본군을 막아내는데 방어에 절대 유리한 문경 새재를 포기하고 탄금대에서 적과 평야전투를 벌였다는 점이다. 신립은 북방에서 야인들을 물리칠 때 처럼 자신의 주특기인 기마대를 이용하여 일본군을 한 번에 몰아치면 적의 대오가 무너질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또 당시 조선군은 급조된 군대로 오합지졸이었으며 신립은 전투중 전선이탈이 뻔한 이들 병력을 효과적으로 전투에 임하여 한번의 결전으로 일본군을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 그는 탄금대로 떠나기 전 서애 유성룡을 만나 하는 대화에서 일본군의 조총에 대하여 유성룡이 묻자, "뭐, 조총이 쏘면 다 맞는답니까?' 라며 조총에 대하여 그리 대단한 무기기 아니라고 생각하며 자만심에 빠져 있었다.
또 조령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기에 시간적으로 너무 촉박하였으며 자신이 대리고 온 4000명의 기병대를 효과적으로 운용할 수 없다는 판단도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최후의 결전을 시도하여 일본군의 예봉을 꺽을 수 있는 방법은 배수진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미 신립장군은 전쟁에 임할 당시의 심정은 준비되지 않은 전력으로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일본군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판단을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왜란 당시 조선 최고의 장수로써 국가 전체를 보는 전략적 안목이 있어야 하거늘 제대로 된 군사가 없던 조선의 입장에서는 정예 4000명의 기마부대와 일반병 4000명 도합 8000명의 정규군을 일시에 잃는다는 것은 조선의 입장에서는 치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주력부대가 일시에 소멸되었다는 점은 결국 한성 방어는 물론 조정이 파천을 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을 야기한 점이다. 신립은 이점을 몰랐을까? 아마 알고 있으면서 스스로 죽음의 전술을 택한 이유는 무었일까? 우리는 여기서 의문을 제시하게 된다.
그리고 전술적으로도 당시 탄금대의 지형 상황이 비가 온 뒤라 기마부대 온용에 부적합한 상태인 늪지대였다는 점, 일본군의 대기병 방책 전술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점, 기병대가 조총앞에 먹이감 밖에 되지 않는 다는 점, 당시 조선의 우수한 각종 화포를 제대로 운용할 수 있는 지형이 아니였으며 실제 운용도 못하였다는 점 등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는 당시 조선군의 문경 새재 방어전을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지역 장수들이 문경 새재의 중요성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 문경 새재에 주방어병력을 배치하고 장애물을 설치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어야 했다. 상주전투에서 패한 이일이 적정도 모른채 허허벌판 강가에서 군대를 훈련중에 적에게 참패를 당할 바에는 문경 새재에서 벙어책을 강구했더라면 다소의 시간을 벌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8000명의 신립군이 증원되어 새재 관문에서 조직적인 전투를 벌일 수만 있었다면 적의 예봉은 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축차적인 철수로 일본군의 공격속도를 지연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 당시 조선군은 지형을 이용한 방어전술을 펼치지 못했으며 그러한 생각을 도무지 못 한 이유가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다. 이처럼 육전에서 동시대에 조선의 장수들이 병법을 운용함에 대부분 무능하였다는 점에 비해 이순신의 해전은 지형과 해류를 이용한 천부적인 병법의 귀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신립의 기마대는 수차례 돌격을 시도했지만 일본군의 조총 사격 앞에 번번이 가로막혔다. 게다가 주변에 논과 습지가 널려 있어 기마대가 돌격전을 계속 펼치기에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전세가 기울자 신립은 단기로 적진을 향해 돌격을 시도하다가 달천에 몸을 던져 순국한다.
<징비록>은 “여러 군사들도 모두 강물에 뛰어들어 시체가 강을 뒤덮었다”고 당시의 참상을 기록하고 있다. 신립은 용감했으나 무식하였고 지혜롭지 못한 장수를 만난 8천 장졸들의 죽음은 아까운 목숨을 버린 결과가 되었다. 이처럼 용감했으나 무식한 장수와 용감하면서도 지혜로운 장수의 차이는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게 된다는 점을 주지해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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