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915 : 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 20
4. 언제 한번 죽기 살기로 싸워본 적이 있는가?
허깨비 군사력으로 싸운 임진왜란
호미,괭이 등을 녹여 만든 칼과 일본도의 대결
서류상으로 조선 군대는 항상 근무가 가능한 병력이 기병 2만 3천, 보병 1만 6천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임잔왜란 2년 후에 조사해보니 합해서 8천 명도 안 되었다. 한양의 방위사령부나 다름없는 수원의 군사 정원이 1만 7천 명인데 1596년 당시 병력은 1천 미만이며 평안도 역시 정원이 1만 명인데 1사 500명 밖에 안 된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임란 다음 해에 왕이 피란에서 돌아왔는데도 한양을 지킨 것은 군사 300명뿐이었다. 이들은 그나마 조정에서 밥을 먹여주니 그걸 먹으려고 자원한 숫자였다.
한양에 상주군 1만 명을 확보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지만 몇십 년 후 광해군 때에도 상비군은 훈련도감 300명뿐이었다. 그래서 인조반정은 쉽게 성공할 수 밖에 없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조선이 망하고 일본에 의해 조선군이 해산되었을 때도 그 병력은 고작 4천 명뿐이었다.
당시 조선의 성곽은 방어에도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었는데 병사들이 몸을 숨기고 사격을 해야 할 성벽 위의 여장이 너무 낮아서 엄폐가 되지 않는 곳이 많았다. 공격군을 몰아서 잡을 수 있는 옹성은 물론 측방 사격을 할 수 있는 돌출부 성곽도 찿기 어렵다. 이런 것을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성곽만 쌓았다. 이런 이유로 임진왜란 중 최대 전투의 하나인 울산성전투는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 5만이 왜군 1만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우선 무기가 엉망이었다. 명군과 조선군의 칼과 창은 일본군의 것보다 길이가 아주 짧았다. 우리 칼의 길이는 조선 후기 들어 길어져서 지금으로 환산하자면 90센티미터 가량되지만 조선 중기만 해도 아주 짧아서 70센티미터 정도로 추정된다. 창 역시 왜군의 3분지 2수준, 왜군은 왜소한 체구를 그런 장창과 긴 칼로 보강했던 것이다. 또 오랜 내전을 겪으면서 전투기술이 향상되었고 창과 칼을 사용하는 검법도 우리보다 월등하여 백병전이 붙으면 조선군이 절대 불리하였다.
더구나 우리 칼과 창은 길이만 짧은 것이 아니라 예리하지 못하며 만드는 방법도 조잡하기 짝이 없었다. 대나무를 잘라서 끝에 날을 붙인 우리 창과는달리 왜군은 대나무 가지를 여러조각으로 이어 묶은 다음 역청을 발라 단단하며 오래 가고 가벼웠으며 그 날의 예리함은 우리 것과 대조를 이룬다.
일본도의 우수함이 이미 증명되었지만 일본도에 조선칼이 부딪히면 통상 부러지고 말았다. 그래서 호미를 녹여 만든 짧고 둔탁한 칼과 일본도의 대결이 임진왜란이었던 셈이었다. 그런 강도 등 품질도 떨어지고 예리하지도 않은 둔탁한 그런 칼도 변변히 없었으니 몽둥이를 들고 조선의 군사들이 전쟁에 나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휘괸 몇 명을 빼놓고는 갑옷이라는 것도 없었고 물론 방패도 없었다. 전쟁이 끝난 지 200년이 다 지나 1786년 정조 9년 상소문을 보면 "지금 훈련도감을 비롯해 전국에 2만 7천여 자루의 환도가 보관되어 있지만 칼집도 업고 자루도 없으며 녹이 슬어 사용하기 어렵다"는 내용이 있다. 여전히 조선의 국방력은 밑바닥이었던 셈이었다.
울산성 전투에 참가한 명군 4만, 조선군 1만의 연합군 중 조선군은 권율이 지휘했다. 조선군은 용맹하게 싸웠으나 전사 300여 명을 포함하여 1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런데 도망병은 5천이나 되었다. 추운 겨울에 손발은 얼어 터지고 식량도 업고 무기도 없는데 애국심 하나만으로 버티는 백성이 없었다. 그나마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낼래고 용감하게 싸우는 조선군을 보고 명나라군은 놀랐다고 했다.
그해 가을 다시 벌어진 2차 울산성전투도 마찬가지로 같은 병력으로 싸웠지만 조.명 연합군은 1만이 넘는 사상자를 내고 다시 퇴각하고 말았다.
전투능력도 최하급이었는데, 일본군의 질사라는 연속사격술을 익혀왔는데, 왜군이 대오를 정비하여 겹겹이 걸치게 하여 연속사격으로 전진해오자, 조.명 연합군은 한꺼번에 몽땅 다쏘아버리고 그다음에 적이 다가오면 도망치는 형태로 전투를 했으니 패전할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의 비극은 군량미가 없었다는 점이다. 명군 1만 명이 내려왔을 때 아무리 긁어모아도 이들을 먹일 양곡은 5일분 밖에 안 되었고 조선군들은 물에 젖어 썩은 쌀 약간과 좁쌀 몇 줌이 고작이었고 말 먹이는 이미 고갈되어 도처에 굶어 죽은 말의 시체가 즐비했다고 한다. 살아있는 말도 먹이를 제대로 먹지 못해 힘이없어서 이미 군마의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군졸들은 지나가다 감나무에 덜익은 감을 보면 서로 달려들어 닥치는 대로 따 먹었다.
"이러고도 우리가 오늘날 있는 것은 하늘이 도운 까닭입니다." -유성룡-
임진왜란은 그 빈구석으 조금만 들춰보면 어이없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물론 오늘날의 시각이지만 너무나도 이해 할 수 없는 구석이 대부분이다.
첯째,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 것이 그해 4월13일 저녁이었다. 새카맣게 바다를 뒤덮은 수천 척의 함선에 15만 병력이 들어왔다. 그런데 서울에서 그 전갈을 받은 것이 4월 17일 아침이다. 사흘 반나절이나 걸렸다.
거리가 천리이고 지금처럼 길이 좋은 것도 아니었으니 하루에 300리, 그래서 서흘 걸리는 것이 보통 아니겠느냐고 하면 이에 대해서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면 조선 시대 역의 구조를 들어다보기로 하자.
역은 역졸과 역마가 배치되어 있는 비상 대기소인데 역과 역 사이는 통상 30리였다. 30리 길은 보통 걸음걸이로 대략 3시간 정도 걸린다. 마라토너에게는 40분 거리다. 그럼 역졸이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리면? 말은 지금처럼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큰 말이 아니고 당시는 대부분 조랑말이지만 그래도 제법 달렸다고 볼 수 있다. 사람보다는 훨씬 더 속도감이 있었을 것이다. 도중에 시내도 있고 강도 있고 산길도 있겠지만 어떻던 역마라면 그런 비상시기에 달리고 또 달린다면 넉넉잡아도 30시간이면 충분히 전쟁발발의 도첩을 한양 궁궐에 전달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흘 반이나 걸렸다.
봉수대 연락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양에서는 사흘 후에야 들연 왜적 침입을 통보받은 것이다. 이런 비상사태 속에서 이틀간의 공백은 아주 중요하다. 대체 역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한때 세종은 눈병이 나서 온천에 다녀야 했는데 청주에서 신묘한 물이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 물은 즉시 각 역을 거쳐 운반되었는데 성분이 탄산의 효과가 떨어지기 전에 왕께 전달되어야 하므로 비상 송달책이 하달되었다. 이 온천수가 있는 곳에서 한양까지는 대략 250리, 그 길로 온천수를 하룻밤에 운반했다. 저물녘에 출발하여 왕이 이른 새벽에 사용할 수 있도록 밤샘을 해서 달려온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계산해도 부산에서 한양까지는 이틀이면 족하다. 온천수보다 몇 배가 더 중한 국가 존망의 위기 속에서 사흘 반이나 걸려 보고가 올라온 것이다.
당시 역참으로 불리는 역이나 참은 문서나 관수물자 운반이 주목적이었다. 이곳의 이용자들은 주로 역졸과 관헌들, 역참 외에도 외국 사신들이 이용하는 관, 민간이 이용하는 원과 점이라는 곳도 있었다. 가장 서민적인 보통 주막보다는 모두 고급시설인 셈이다.
암행어사들이 단골로 역참에 들어 마패에 새겨진 숫자대로 말을 빌려갔다. 임진왜란 이후 개선된 수치지만 병조 직속인 노원과 청파역에 각각 역졸 144명에 역마 80필이 배치되어 있었다. 물론 <만기요람>이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는 수치만을 봤을 때이다.
두 역은 매일 15필의 역마를 교대로 근무시켰는데 말은 금호문 밖의 마군영에서 보급하였다. 말은 상등마, 중등마, 하등마 등 3등금이 있었다. 아마 상등마는 화살처럼 빠르게 잘 달린 말을 뜻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역은 종사자가 적은 곳은 10명 안팎, 많은 곳은 2~3백 명 안팎이었다고 한다. 역의 종사자들은 나라에서 녹봉을 받아가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돈으로 역을 운영했다. 조선의 군사들이 자기 먹을 것을 가지고 가서 군역을 마치고 오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심지어 대규모 사절들이 오는 경우에는 말이 모자라 관군들이 자신들의 돈으로 말을 세내어 가지고 왔다는 기록도 있다. 게다가 설치 장소는 대부분 중국에서 오는 사신 접대용이었다. 의주에서부터 시작하여 인원 수백 명과 역마 수백 필이 배치되어 있는 대규모 역은 전부 중국과의 통로에 위치해 있었다.
남쪽에는 늙고 힘없는 역마와 소수의 역졸들이 한가하게 배치되어 있었지만 그들도 걸핏하면 농사지으러 가 버리고 누가 아프다고 하면 가 버리고, 밤이 되면 어디로 사라져버리고, 그런 광경을 상상해보기 어렵지 않다.
더구나 서류상으로는 상등마가 있고 중등마가 있지만 현장의 상황은 그것이 아니었다. 말 목장의 경우 서울 근처에는 지금의 성동구 지역인 살곶이에서 왕실 목장이 있었고 그다음엔 강화도에 있었다. 이 말이란 짐승은 번식이 매우 더디다. 몇 해에 한 마리밖에 출산하지 않는다. 게다가 중국에서 수시로 수백 마리씩 공납을 받아갔다.
굶주린 백성들이 훔쳐다 잡아먹고 목장 관헌들이 몰래 내다 팔고, 폐사하고, 좀 좋은 말은 고관들이 빼돌리거나 바꿔가고, 그러는 판에 전국 목장의 말은 항상 장부수보다 부족한 실정이었다.
왕은 수시로 신하들에게 상을 내린다. 상품은 으레 말 한마리가 가장 많았다. 그걸 첩지로 써서 목장에 내리면 목장에서는 내줄 말이 없어서 첩지가 한 길이나 쌓였다. 사헌부에서 조사를 나갔지만 뽀족한 수가 없었다.
말의 대부분도 과하마라고 불리는 조랑말이다. 과실나무 가지 밑으로 지나간다 하여 과하마라 불렀다. 대신들은 그런 작은 말을 타고 다니는 것이 볼썽사납다고 하여 안장을 매우 높게 만들어 키를 부풀리는 것이 상례였다.
이런 과하마들은 빨리 달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짐을 가득 싣고 천천히 갇는 것이 주 임무이니만큼 그들이 국가 위기상황 같은 것을 이해할 리가 만무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원봉사나 다름없는 관원들이 근무하고 있었으니 왜적의 부산 침범 소식이 사흘 반나절이나 걸려 한양에 전해졌다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좋은 말들은 죄다 북쪽에, 왕이나 고관들이 행차하는 노선에, 그리고 그 나머지가 일반 노선에 배치되었다.
호남이나 영남은 진쟁 위기도 없고 변방이니만큼 가끔씩 가는 어사, 관보를 전달하는 일반 업무뿐인지라 역 관리도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호남과 대등하게 경상도 역시 조선에서는 상당한 지역 차별을 받았다. 조선의 영토는 요지가 한양과 평양, 의주 근처였고 나머지는 전부 변방이었다.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역참제도(驛站制度)
1. 과도기적(過渡期的) 교통로(交通路)
(1) 역도(驛道)의 정비
조선왕조가 개경으로부터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전국의 교통망은 한양을 중심으로 재정비하기에 앞서 과도기적 조처를 취하게 된다. 그와 같은 내용을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세가지 특징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경기에 속한 역도 가운데 좌도충청도정역찰방에 속한 역들은 대개 중로(中路:한양∼통영)에, 경기강원도정역찰방에 속한 역들은 대개 관동로(關東路:한양∼평해)와 관북로(關北路:한양∼경흥), 우도정역찰방에 속한 역들은 대개 의주로(義州路:한양∼의주)의 시발 부분에 속하는 역들로 살펴진다. 그러한 비중 때문에 찰방(察訪:종6품)관할로 한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는 역시 의주로의 연장으로서, 황해도의 참로(站路)찰방에 속한 역들과 평안도의 관로(館路)찰방에 속한 역들은 특히 사행로(使行路)로서의 중요성 때문에 역시 찰방 관할로 한 것이라 하겠다.
셋째 특징은 전대에 비해 국토의 영역이 크게 확대되기도 했지만, 역도의 수는 22:44(42)로서 거의 배로 증가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전대에 비해 정치적 경제적·군사적·외교적인 면에서의 큰 변화가 교통정책의 재편을 불가피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건국 초의 과도기적 교통정책은 점차 중앙집권적인 변화와함께 역의 증감조정, 역도의 재편, 역승(驛丞:정9품)의 일괄적인 찰방으로의 승격 등 체제를 재정비하여 대전(大典)체제를 구축하게 되어 그후다소의 융통적인 조정은 있었지만, 조선 전반기의 기본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게 되었다.
(2) 전국(全國)의 주요 간선도로
한양을 중심으로 재편된 역도와 함께 교통로도 새로이 정비되었다. 흔히 조선시대의 교통로를 9대 간선도로니 10대 간선도로로 이름지어 부르기도 한다.
제1로는 한양-의주(평안북도)를 잇는 교통로이다. 의주로(義州路), 사행(使行路), 연행로(燕行路)라고도 불린다. 간선도로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두었던 교통로이다. 국내사절과 중국사절의 내왕로로서 그들의 숙식은 물론, 연향(宴享)을 위해 관사(館舍)도 설치되어 있었다.
제2로는 한양-경흥(함경북도) 서수라까지를 잇는 교통로이다. 관북도(關北路)라고도 부른다
제3로는 한양-동해안의 울진·평해(平海: 경상북도)까지를 잇는 교통로이다. 관동로(關東路)라고도 부른다
제4로는 한양-부산까지를 잇는 교통로이다. 흔히 좌로(左路)·중로(中路)로 불리기도 한다. 특히 좌로는 낙동강과 한강을 이용하여 서울에 들어오는 왜사입경로(倭使入京路)이기도 하다.
제5로는 한양-통영(경상남도)을 잇는 교통로이다. 제4로와는 한양에서 문경(聞慶)의 유곡역(幽谷驛)까지 노정이 같다. 따라서 중로라 할 수 있다.
제6로는 한양-통영을 잇는 교통로로서 제5로와 다른 점은 우로를 이용하여 전라도를 경유하여 통영에 이르는 노선이다.
제7로는 한양-제주를 연결하는 교통로인데, 한양-삼례역(전라북도)까지는 제6로와 같다. 우로에 속한다.
제8로는 한양-충청수영(忠淸水營)까지를 잇는 교통로이다. 제6로와는 진위(振威)까지 노정이 같다.
제9로는 한양-강화(江華)를 잇는 교통로이다.
제10로는 한양-봉화(奉化: 경상북도)를 잇는 교통로이다. 이 도로는 봉화 동북쪽 태백산에 사고(史庫)가 있음으로써 개설된 도로라 할 수 있다.
(3) 교통로(交通路)의 등급
조선시대 도로와 역을 대·중·소로의 3등급으로 나누고 있었다. 도로 규정상 3등급으로 분류하고 있지만, 도로의 폭이라든지 노면 등 구조적인 차등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간선도로로서의 중요성, 다시 말하면 도로의 이용도를 감안한 분류라 할 것이고, 오늘날 개념으로는 교통량의 많고 적음에 따른 분류라 하겠다. 그리하여 자연 대·중·소·로의 등급에 따른 역마(驛馬)와 역호(驛戶)가 차등있게 배치되어 있었다.
『經國大典』에 의하여 전국의 대·중·소로의 분류를 표로 나타내 보면 옆과 같다.
大 路 中 路 小 路
漢陽∼開城 開城∼中和 그 밖의 도로
漢陽∼竹山 竹山………尙州 그 밖의 도로
鎭川∼黃澗∼尙州
漢陽∼稷山 稷山∼公州∼全州 그 밖의 도로
漢陽∼抱川 抱川∼淮陽 그 밖의 도로
漢陽∼楊根
2) 역참제(驛站制)
조선시대 육로교통의 기능을 대표하는 것은 역전(驛傳)·파발(擺撥: 騎撥과 步撥)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전기의 역참제는 역전이 주였으나 임진왜란을 경과하면서 그 기능은 마비상태에 이르렀다. 그 이유는 역리(驛吏)나 역호(驛戶)의 도망 또는 유망으로 그 기능 수행이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역마를 함부로 탔다든지, 역전(驛田)을 사유화했다든지 찰방(察訪) 등의 작폐가 역전 기능의 쇠잔 원인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선조 30년(1597) 5월 집의(執義) 한준겸(韓浚謙)이 명나라의 예에 따라 파발을 설치한 데서 파발제가 성립되었다. 물론 파발제 성립으로 역전제가 소멸된 것은 아니고, 역참제 복구를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봉수제(烽燧制)의 군사통신수단과 전명(傳命)을 주로 담당하는 파발제의 두 기능을 합한 파발제가 성립된 것이다.
(1) 역전(驛傳)
역로행정을 총괄하는 관서는 병조(兵曹)였고, 역전(驛傳: 郵驛) 사무를 관장하는 실무부서는 승여사(乘輿司)였다. 역로행정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전국에 퍼져 있는 530여 개의 역을 40∼44개의 역도로 조직하여 관할하게 하였고, 역로의 중요도에 따라 대·중·소로 역의 등급을 나누었다.
역도의 책임관원으로 찰방(종6품) 1인을 두고 있었고, 역무(驛務)를 수행하는 종사자로서 역장(驛長)·역리(驛吏)·역졸(驛卒)·역정(驛丁)·일수(日守)·역노비(驛奴婢)·보인(保人)·솔인(率人) 등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종사자의 수는 역의 등급에 따라 달랐다. 『경국대전』에 보면, 상등역 121인, 중등역 96인, 하등역 71인 등 신분별 정원이 정해져 있었지만, 후에는 신분별 구분도 없어졌고 정원도 증가되고 있었다.
대개 역장이나 역리들은 사신의 영송(迎送), 역마의 보급, 공문서 발송 등의 업무를 맡았고, 역노비는 급주(急走)노비와 전운(轉運)노비로 구분 편성되었는데, 공문서 전달, 사신접대에 따른 운반, 역토지(驛土地) 경작에 종사하였다.
각 역에 딸려 있는 이른바 역마가 얼마였는지 자세하게 살펴지지는 않지만,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의하면 전국 40개 역도 535개 역에 5,380필의 말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역마는 상등·중등·하등·태마 등의 등급이 있었고, 역의 등급에 따라 마필의 배속이 달랐다. 가령, 병조 직속역이었던 청파역(靑坡驛)과 노원역(蘆原驛)에는 각각 역졸이 144명, 역마가 90필씩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마의 이용은 중앙에서는 출장관원에게 지급되었고, 지방에서는 중앙에의 보고나 진상(進上) 때에 사용되었는데, 품계에 따라 말의 지급수와 말의 등급이 달랐다. 출장관원이 각 역에서 말을 지급받을 수 있는 증표로 마패(馬牌)가 발급되었다. 즉 연호(年號)·월(月)·일(日)과 상서원인(尙瑞院印)을 새긴 앞면과 그 뒷면에 마필수가 말그림으로 새겨져 있는데, 말그림은 1∼5필까지의 5종이 있었다.
마패의 발급절차는 중앙에서는 출장관원의 품계에 따라 병조가 문첩(文帖)을 발급하면 상서원이 마패를 내주었고, 지방에서는 관찰사나 절도사(兵使 또는 水使)가 중앙에 보고나 진상을 올려보낼 때 마패를 발급하였다.
역마의 이용규정은 『경국대전』에 명시되어 있다. 즉, 역마는 원칙적으로 1일 3식(息: 1식은 30리)인 90리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때로 함부로 타는 자[濫乘者]라든지 아무에게나 내주는 자[濫給者], 역마를 반환하지 않는 자 등의 사고가 생겨남으로써 이에 대한 법적 처벌규정도 『경국대전』은 마련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원칙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18세기 중엽인 영조 38년(1762)에는 노문(路文: 마패 외에 從隸者의 숫자와 路程을 써넣은 표)을 발급하기도 했지만 실효는 거두지 못했다.
한편, 역의 운영경비와 종사자들의 급료 지급을 위해 각 역에 토지가 지급되었다. 즉, 역의 운영경비, 급료지급을 위해 관둔전(官屯田), 공수전(公須田) 등이 대·중·소로의 구분에 따라 차등있게 지급되었고, 역마 충당을 위해서 마전(馬田)이 대마·중마·소마의 구분에 따라 차등·지급되었다.
(2) 파발(擺撥)
파발은 통신만을 위주로 하는 기구로서 변방의 급한 보고를 효율적으로 전달하려는 목적에서 설립되었다. 파발제가 생겨난 배경은 임진왜란을 경과하면서 마비상태에 놓인 역참제와 봉수가 순수한 군사 통신수단으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되자, 1597년 5월 한준겸의 건의로 명나라의 파발제를 도입한 것이 그 효시이다.
파발의 조직은 전송수단에 따라 기발(騎撥)과 보발(步撥)로 구분되며, 전국을 3대 간선으로 구성하고 있었다. 기발은 사람이 말을 타고 급보를 전하며, 보발은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달려서 급보를 전하는 것이다.
한편, 3대 간선이란, 서울에서 의주를 연결하는 간선 파발로를 서발(西撥), 서울에서 함경도 경흥을 연결하는 간선 파발로를 북발(北撥), 서울에서 부산 동래를 연결하는 간선 파발로를 남발(南發)이라 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3대 간선 가운데 서발은 기발이며, 북발과 남발은 보발이기 때문에 따로 대로기발(大路騎撥)이니 대로보발(大路步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간선에서 뻗어나간 지선을 간발(間撥)이라 하는데, 이들은 대개 서발과 북발에만 있다. 예컨대, ① 서발은 안주-강계, 안주-벽동, 영원-위원까지의 3개의 간발이 있고, ② 북발은 북청-후주, 부령-회령-무산까지의 2개의 간발이 있다.
앞에서도 지적되었듯이 파발은 군사통신적 기능이 강한 것이기 때문에 파발로는 군사통신로와 같은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고, 조직면에서도 군사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가령, 기발의 경우를 보면, 25리마다 혹은 20리∼30리마다 1참(站)씩을 두고, 발장(撥將) 1인, 색리(色吏) 1인, 군정(軍丁·騎撥軍) 5인, 말 1필씩을 배치하였다. 한편 보발의 경우는 30리∼40리 또는 50리마다 1참씩을 두었고, 매참에 발장 1인, 군정 2인씩을 두었다. 이와 같은 파발로의 구성은 기존의 역참제와 병행하여 설치되었는데, 서발에는 모두 41참, 북발은 64참, 남발은 31참이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경과하면서 생겨난 파발제도 그 폐단은 적지않았다. 신속히 전달되어야 할 전문(傳文)이 지체되거나 파손되는 경우도 많이 일어났다. 그러나 어쨌든 고종 32년(1895) 근대적 통신시설이 설치되기까지 군사통신수단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3) 역참(驛站) 이용의 보조설비
역참 이용의 주요 보조설비로서는 이정표(里程標)와 숙박시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경국대전』을 보면, “외방도로(外方道路)는 매 10리마다 소후(小대)를 세우고 역을 설치한다. 후에는 리수(里數)와 지명을 새긴다”라고 했다.
한편, 보다 자세한 내용을 『대동지지』에서 살펴보면, “주척(周尺)을 사용하여 6척(尺)이 1보(步), 360보가 1리(里), 3,600보가 10리이며, 매 10리마다 소후를 세우되, 후에는 리수와 지명을 새긴다(속칭 장승이라고 부른다). 30리마다 대후를 세우고 역을 설치한다. 옛 제도에서는 대·중·소로에 각기 원우(院宇)를 설치하여 여행자들이 거쳐가게 했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경과한 이후부터는 원우는 모두 폐지되고 점사(店舍)가 많이 생겼다. 그러므로 혹 원(院)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점(店)이다. 많은 점사가 생겨나는 것은 불규칙하고 변화가 많아 원과 점의 소재를 고증할 수 없는 것이 또한 많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요컨대 양란을 경과하면서 원우가 소멸되고 점사가 생겨나고 있음을 알게 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여행자들의 공영 노변시설 제공이 시세변화에 따라 사영형태인 점사로 이행되어 가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후(텎)란 흙으로 쌓은 돈대[土臺]를 말하는데,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느티나무를 심었고, 한편 나무그늘을 지게 하여 여행자들의 휴게소로서의 기능도 아울러 갖게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를 정자나무라고도 하여 느티나무뿐 아니라, 회(檜)나무, 은행나무 등이 많이 심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후나 장승, 정자나무 등은 이정표로서 휴게소로서 여행자의 편의를 제공한 노변설비였다 할 것이다.
그러나 원거리 여행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숙식의 문제였다. 그 중요성은 조선시대 교통로를 말할 때 반드시 역(驛)과 원(院)을 묶어서 역원(驛院)이라고 하는 사실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 원의 설치 과정을 보면, 조선 초기에 원을 보완 정비하는 방법으로 원이 소재하는 인근주민 중에서 덕망 있는 사람에게 그 책임을 맡도록 하고 있다. 이른바 원주(院主)의 설치라고 하는데, 국가는 원주에게 원주전(院主田: 대로변의 원 1결 35부, 중로 90부, 소로 35부씩)을 지급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원우(院宇)조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전국에 약 1,310개의 원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역원을 중심으로 이 곳에서 시설장비와 관계 역무에 종사하는 관리 및 서비스에 종사하는 거주민의 주택이 들어서 부락을 이룬 것을 역취락이라하고, 역과 근접한 거리에 위치하여 숙박을 전문으로 하는 객사(客舍) 중심의 취락을 원취락이라고 하였다. 두 기능은 중복되거나 상호 보완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역원취락이라고도 불렀으며, 조선시대 여행자에게는 아주 긴요한 것이었다.
원이 공무 여행자의 편의시설인데 반해 일반 여행자를 위한 시설로는 점사(店舍, 店幕)를 들 수 있다. 점사는 원이 피폐된 이후에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 일반 여행자의 편의시설은 임의적으로 일반 민가가 이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과천소관(果川所管)의 역원(驛院)과 역참(驛站)
1) 양재역(良才驛)·도(道)
『고려사』 병지 참역조를 보면, 과주(果州) 소관의 역참은 오직 양재역(良才驛을 良梓 또는 良材로 표기) 뿐이다. 역도(驛道)는 주도(州道)에 속해 있었고 중심역은 덕풍(德豊, 현 河南市 덕풍동)이었다. 그후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한양을 중심으로 한 역로와 역도 정비에서 좌도충청도정역찰방 소관의 역과 동화도(同化道)가 재편성되어 양재도(良才道)가 되면서, 과천현 소관으로서의 양재역은 그대로 양재도 12역의 으뜸역이 되었다.
양재도의 역과 역도로서의 비중은 한양을 중심으로 한 하삼도(下三道)로 뻗는 3대로(左路·中路·右路) 가운데 첫 역도이기도 하며, 우로(右路)의 첫 역이기도 하였다는 점에서 잘 알 수 있다. 가령, 과천을 통과하는 우로의 노정을 소개해 보면, 한양(漢陽)-동재기나루(銅雀津)-승방뜰(僧房坪)-남태령(南泰嶺)-과천(果川)-인덕원(仁德院)-갈산점(葛山店)-사그내(肆覲坪또는 沙斤川)-지지대고개(遲遲臺)-수원(水原)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양재도의 관할범위는 한양-양재-용인-양지(陽智)-죽산-충주 방면으로의 역로와 한양-과천-수원-진위 등에 이어지는 역로이다. 이에 속하는 역은 낙생(樂生: 廣州), 구흥(駒興: 龍仁)·금령(金嶺: 龍仁)·좌찬(佐贊: 竹山)·분행(分行: 竹山)·무극(無極: 陰竹)·강복(康福: 安城)·가천(加川: 陽城)·청호(菁好: 水原)·장족(長足: 水原)·동화(同化: 水原)·해문(海門: 南陽) 등 12개 역이다.
이와 같이 양재도는 과천현 소속이었으나 이후 광주부(廣州府)에 소속되었는 바 그 연대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임진왜란을 경과하는 동안 광주부로 이속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그리하여 1757년 경에 작성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양재역에는 말 27필, 노비 27명이 소속되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양재도라는 역도는 수원의 영화도(迎華道)로 그 명칭을 바꾸게 되고, 그 으뜸역도 양재에서 영화역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그 연대도 대체로 수원의 읍치(邑治)를 옮기게 되는 정조 13년(1789) 이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영화역 관할로 바뀌면서 새로이 과천역과 영화역이 설치되고, 청호·장족·동화의 3개역은 폐지되어 영화도는 11개 역을 관할하게 된다.
한편, 역로의 등급을 살펴보면, 양재도 가운데 양재·낙생·구흥역은 대로(漢陽-稷山까지가 대로이므로)에 속한다. 더욱이 양재는 우로의 최종 통과지로서 한강 남안(漢江南岸)의 동재기나루라든가 노량진에 이르게 되는 역이기도 하다. 그 외에 금령·좌찬·분행·무극·가천·청호역은 중로에 속하였으며, 강복·해문·장족·동화역은 소로에 속하였다.
그리고 조선 초기 과천현 소관에는 행려자의 편의시설인 원(院)으로는 노량원(露梁院)·인덕원(仁德院)·미륵원(彌勒院)·오금원(吾金院)·요광원(要光院)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원도 임진왜란과 호란을 경과하는 동안 소멸해 버리고 점막(店幕)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과천현 관문리에 있었던 내점과 새술막도 조선 후기에 들어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점막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과천현신수읍지(果川縣新修邑志)』(1699) 역원조(驛院條)
2) 양재역(良才驛)의 변천
고려시대부터 설치되었던 양재역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한양과 하삼도(下三道)를 연결하는 역으로 주목받게 된다. 한양의 돈화문으로부터 남쪽으로 25리 130보를 떨어져 위치하여 1식(息: 30리)이 안될 정도로 가까워 역으로부터 4리 230보를 더 내려가 장성곶천(長城串川)에 이르러 1식을 삼았던 곳으로(『태종실록』 권 30, 15년 12월 정축조), 한양과 가장 가까운 역 중의 하나였기에 조선초부터 이를 중요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삼도를 왕래하는 여행자가 많다 보니 그에 따라 역에 종사하는 역리나 역졸, 역노들의 노역(勞役)이 고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역리(驛吏)와 전운노(轉運奴)들이 그 역(役)을 감담하지 못하여 도망가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런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세종 30년에는 찰방(察訪)을 다시 복구하게 된다. 이것은 양재역이 중요한 교통로상의 역으로 폐지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였다.
당시 경기도의 좌도충청도정역(左道忠淸道程驛)에 속한 역은 양재를 비롯해 광주 관내의 낙생(낙생(樂生), 용인 관내의 구흥(駒興)·금령(金寧), 죽산관내의 좌찬(佐贊)과 분행(分行), 음죽 관내의 무극(無極) 등의 7개역이었고, 여기에는 모두 종6품관인 찰방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경기도내의 8개역도 중 우도정역(右道程驛)과 경기강원도정역(京畿江原道程驛) 그리고 좌도충청도정역을 제외한 5개 역도(中林道·同化道·平丘道·慶安道·桃源道)를 비롯한 전국 지방 각도의 역에는 각 역에 종9품관인 역승이 설치되어 그 중요도가 다른 지역에 비해 낮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양재역의 중요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세조 2년에 과천과 금천(衿川)이 작은 고을이라고 하여 두 현을 합해 금과현(衿果縣)을 두기로 결정하는데, 이 때 읍치(邑治)를 어디에 둘 것인지가 쟁점으로 떠오른 일이 있었다. 금천에 두자는 입장은 고을의 읍치가 그 영역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과천에 두자는 것은 양재역에는 빈번하게 왜국(倭國)의 사행(使行)이 통행하는데 읍치가 멀면 접대하는데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금천에 두자는 주장이 우세하여 읍치를 금천에 두게 된다. 그러나 양재역을 지나가는 대소 사행에 대한 접대의 불편함에 따라 읍치 이전의 주장이 계속 일어나게 되었고, 결국 세조 6년에는 과천이 다시 현으로 복구되기에 이른다(『세조실록』 권20, 6년 5월 무인조). 이는 한 고을의 존폐를 결정할 정도로 양재역의 역할이 중요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역들의 시설이나 역마 등이 피폐해지게 되면 중앙 정부에서 이를 시정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같은 세조 6년의 기록에 의하면 양재로부터 단월(丹月:충청도 괴산의 연월도 관내)역 사이의 역들이 조잔(凋殘)해 졌으므로 매 역마다 부호(富戶) 20호씩을 정해 주어 이들로 하여금 해당 역의 역마를 돌보게 하고 역(驛)을 꾸려 나가는 비용을 돕게하라는 조치가 내려지기도 한다(『세조실록』건19, 6년 정월 신축조).이것은 양재 등 역의 조선조에 있어서 교통로로서의 중요성을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것이다.
『경국대전』에 의해 조선의 법제가 정비되었을 때, 양재역은 경기도내의 6개 역도 중 하나인 양재도의 중심역으로 이에 속한 12개 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이같은 체제는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으며, 수원의 읍치가 현재의 수원성내로 옮겨 오게 되는 정조 13년 경에 영화도로 명칭이 바뀔 때까지 계속되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사회변동이 심해지자 역의 운영을 위해 필수적인 역노비의 확보가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는 신공(身貢) 이 무거워 역노비가 도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영조대에 역노비의 신공을 감하자는 주장이 나와 영조 32년에 내시노비(內寺奴婢:중앙관청)의 신고제 개혁과 함께 더불어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역노비의 신공은 전(錢) 2량으로 감해지게 되었는데, 경기도 각 역의 경우 노비신공이 감액됨에 따라 역운영에 커다란 차질이 발생하게 되었다. 즉, 경기도내 6개 역도의 역노비의 원래 신공이 7,600여 량이었는데, 이것이 줄어들어 경비가 부족하여 역을 지탱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지방의 각 역에는 거둔 노비신공을 경기 지역의 6개 역에 지급되게 된다(『비변사등록』129책, 영조 31년 8월 7일).이 같은 지방소재역의 경기소재 역에 대한 노비신공 입거(入居)는 경기의 역이 조잔해 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삼남 및 영동지방 각 역의 입마로 하여금 경기의 각 역에 입번(入番)하도록 했던 것인데, 경역(京驛)의 침학이 심해지자 입번을 폐지하고 대신 입거 목(木)을 상납하게 하여 경기의 6개 역도에 분급한 데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같은 조치로 양재도 관내의 역도 균역청(均役廳)으로부터 입거목을 급대받게 된다.
당시 양재역도 소관역의 경비총액은 목(木:무명)이 1동(同) 19필(疋)이었으며, 전(錢)은 1,654량이었다. 이 중에서 목 46필과 전 1,102량 6전 9푼은 자체의 역노비 신공으로 충당하였고, 목 23필과 전 551량 3전 1푼은 급대를 받아 충당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과천 위치한 양재역 등 각 역의 역할이 중요했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이외에도 경기 각 역의 운영이 어려워지고 과중한 역을 담당하는 역졸의 생계가 어려워지자 도망자가 속출하였고, 이를 시정하기 위해 영조대에는 각 군현에 역졸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는 비용을 분정(分定)하게 된다. 즉 영조대부터 경역 보포(保布)의 징수를 위해 각 군현에 독립된 보인(保人)을 두게 하고 여기에서 거두어진 보포로 역졸의 생계 및 역마유지비로 사용하게 하였던 것이다.(『良驛實摠』영조24)
이에 의해 경기도 내의 각 군현에는 경역보(京驛保)가 모두 1,179명이 배정되어 있었으며 1인당 2량씩 모두 2,266량의 보포전(保布錢)을 납부해야 했으며, 인접한 곳으로 금천은 38명에 76량을 납부하고 있다. (『賦役實摠』, 경기도) 이같이 타 군읍에 부담을 지워서라도 역을 운영하려 하였던 이유는 역로와 참제도가 당시 조선사회의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였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양재역을 비롯한 경기지역내의 역들은 그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어 국가로부터 특별히 관리되고 있었던 것이다.
【집필자】 方東仁
[출처] 驛站制度|작성자 만취헌
몽고의 역참제도
13세기 중엽이었다. 마치 바다처럼 끝없이 펼쳐진 중앙아시아 초원의 한 모퉁이에서 말발굽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일었다. 바다에 거센 풍랑이 일듯, 초원에는 걷잡을 수 없는 폭풍이 휘몰아쳤다. 말발굽 소리는 점점 커져 거대한 기마군단이 되었다. 기마군단은 척박한 중앙아시아 고원에 흩어진 부족들을 차례로 ‘접수’하고, 일사불란하게 대륙을 휩쓸었다. 그리하여 유라시아 대륙에 인류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건설하였다.
기마군단의 리더로 초원의 황제가 된 칭기즈칸. 그가 정복한 땅은 무려 777만 평방 킬로미터였다. 원 세조 쿠빌라이 대에 이르러 정복지는 더욱 확장되었다. 마침내 그들은 아시아와 유럽, 태평양과 대서양을 하나로 이어버렸다. 200만 명도 안 되는 유목민이 1억 인구를 150여 년에 걸쳐 통치하였던 것이다.
중세 중앙아시아 초원의 유목민이 이처럼 사상 초유의 대 제국을 건설하게 한 힘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대부분의 역사가는 유목민족 특유의 기동성과 잔혹함, 투지 등에서 그 대답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그러면 금나라나 호라즘 같은 대국을 공략하는 데 기동성과 투지만으로 충분했을까?
▲ 말타기 경주에 참가한 몽골인들이 승마 기술을 겨루고 있다. /조선일보DB
이런 의문을 놓고 일부 연구가들은 원 제국 특유의 ‘역참제도’에 주목한다. 몽골제국의 정복자들은 새로운 정복지가 생겨날 때마다 사방 백리 간격으로 역참을 설치하여 정보 소통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렇게 설치된 수천 개의 역과 역은 광활한 대지를 하나의 그물코로 묶었다. 위대한 칸의 전령들은 역과 역 사이를 가장 빠른 말을 타고 달렸다. 그리하여 칸의 명령이나 보고사항을 신속하게 전달함으로써, 그들의 적보다 정보전에서 월등히 앞섰다는 논리다.
그런데 역참제도는 이미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에 이미 역참이 있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한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전국에 500개 이상의 역참이 설치되어 운영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유독 몽골제국의 역참제도가 대제국을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는 논리는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일까?
정답은 바로 역참의 운영원리 차이에 있었다. 고대 중국을 비롯한 농경국가의 역참은 중앙과 각 지방을 연결하는 도로를 따라 거미줄 형태로 설치되었다. 그것은 중앙 집중 원리에 충실한 ‘선(線)의 체계’였다. 반면 몽골제국의 역참은 도로가 없는 초원과 사막에 바둑판처럼 설치된 ‘점(點)의 체계’로 구축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몽골제국의 역참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역참 시스템은 전쟁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전달경로가 바뀌었다. 뜻밖의 장애물이 생겨도 피해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수신자가 이동하는 경우에도 문제가 안 되었다. 거대한 네트워크 자체가 언제든지 이동 중이라는 전제에서 운영되었다.
상황 변화에 순발력 있게 적응할 수 있는 유연한 시스템은, 광대역을 촘촘한 점으로 얽어놓은 오늘날의 초고속 인터넷 망과 같은 원리로 운영되었다. 그러한 ‘프로토콜’ 방식의 역참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몽골제국은 이미 13세기에 정보화 혁명을 이루었다. 그리고 비약적으로 발달된 정보네트워크의 기반 위에 대제국을 건설하고 유지하였던 것이다.
신석기 시대 농업혁명, 근대 산업혁명과 더불어 정보혁명을 인류의 세 번째 혁명이라고 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정보화 사회는 인류의 운명을 새로운 세계로 끌어가고 있다. 우리는 이미 빛의 속도로 정보가 전달되는, ‘동시성’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중세 몽골식 ‘점의 체계’를 현대적으로 구현한 초고속 인터넷과 이동통신이 열어놓은 그 세계에서 말이다.
몽골제국의 프로토콜 정보망은 당시 중세인들에게 두 가지 의미를 가져왔다. 우선 그것을 지배한 초원의 정복자들에게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줬다. 그리고 주변의 피정복민에게는 더 많은 ‘공포’를 전달해주었다. 그렇다면 거대한 세계체제(world system)가 되어버린 오늘날의 정보화 사회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복자의 전리품’일까, 아니면 피정복민을 떨게 하는 ‘공포’일까?
이제 우리는 정보화 사회로 인하여 빚어지는 여러가지 철학적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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