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남의 봄 8 : 바람따라 세월따라, 한민족의 서사시......7

 

 

강남의 봄 8 : 바람따라 세월따라, 한민족의 서사시......7

 

  

                                                                         새벽 야경, 내방역

 

요즘은 5시쯤 자전거를 타고 출발하면 금방 날이 밝아 온다. 기온도 영상 10도 이상 올라가고 따뜻한 날씨가 계속되고 한 번씩 내리는 비만 피하면 자전거 타기에 그지없이 좋은 시절이다.

 

박대통령 방미 기간 중 윤창중 대변인이 부적절한 행동으로 방미 이미지 손상 등 나라 망신에 언론과 청와대, 네티즌들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술을 꼭 먹어야 했는지, 왜 그런 여자를 옆에 두고 술을 먹어야 했는지, 그런 중차대한 시간에 그런 여성과 술을 꼭 먹어야 했고 젊은 여성에게 허리던 엉덩이던 손을 댄 자체가 적절치 못한 행동이었다. 추락에 앞서 찿아온 자만의 결과일 것이다.

 

美동포사회ㆍ온라인서 주미대사관 여성인턴 성추행설이 확산되고, 청와대는 "불미스러운 행동으로 국가품위 손상"했다며 조사 착수하였다고 한다. 이는 방미 계기 국정운영탄력 기대한 새 정부에 큰 부담줄 듯하다.

 

미국 교포사회에서는 윤 대변인이 워싱턴 체류 중 자신을 돕던 주미 대사관의 젊은 인턴 여성을 성추행했다는 이야기가 급속히 퍼지고 있으며, 미주 최대 여성 커뮤니티인 'Missy USA'에는 이날 "청와대 대변인 윤창중이 박근혜 대통령 워싱턴 방문 수행 중 대사관 인턴을 성폭행했다고 합니다. 교포 여학생이라고 하는데 이대로 묻히지 않게 미씨님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번 (방미) 행사 기간 인턴을 했던 학생이라고 합니다…사실입니다…도와주세요"라는 글이 올라와 네티즌들 사이에 빠르게 옮겨지고 있다.

 

윤 대변인은 언론인을 거친 우파논객 출신으로 대통령직인수위 대변인을 역임했으며 새 정부 청와대 초대 대변인으로 발탁됐다. 하지만 극우적 색채와 '밀봉인사' 등으로 끊임없이 논란의 도마 위에 올랐다가 이번에 새 정부 출범 70여일 만에 불명예 퇴진하게 됐다. 이번 윤 대변인의 낙마는 방미 성과를 토대로 국정운영에 탄력을 기대했던 새 정부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박대통령의 방미 성과를 한 방에 날려버린 수행원의 그런 적절치 못한 행동을 한 자체가 국민들의 공분을 싸고 있다. 이남기 홍보수석과 윤창중씨가 서로 거짓말을 하면서 진실게임을 벌이고 있지만 어쨌던 부적절한 행동을 한 윤창중씨의 책임이 전적일 것이다. 그런 적절치 못한 사람을 등용한 박대통령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도 높다. 이 나라에 그렇게도 반듯한 인재가 없는 것일까. 그 여성은 어떤 사람인가? 단순히 대사관에 인턴으로 고용된 사람인가, 아니면 박대통령의 방미 성과를 한 방에 날려버릴 박대통령과 한국 정부를 궁지로 몰아넣으려는 반한 세력에서 기용한 미인계인지도 모른다.

 

 

 

 

카네이션 꽃 유통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라디오에서 들었는데, 꽃 생산자들이 일년에 2주 정도 출하기인 카네이션을 양재동 꽃 도매시장을 기피하고 반포 고속터미널 도매시장을 주로 이용한다고 한다. 양재동은 꽃 경매에서 낙찰받지 못하거나 제값을 받을 수 없을 경우 아까운 꽃을 모두 폐기 처분한다고 한다. 그러나 반포는 물량 계약으로 최소한의 적절한 값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무언가 문제가 많은 꽃 도매시장이다. 중국산에 시달리다가 이제 겨우 제자리를 잡아가는 꽃 도매 시장의 기능에 대해서 정부에서는 적절한 행정조치가 이루어지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무언가 문제가 있어 보이는 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필요하다.

 

                                                          테헤란 로 세벽 풍경

 

우유업계의 대기업인 남양유업이 요즘 공중분해 직전이다. 그동안 방치되어 왔고 갑과 을의 관계에서 일방적으로 피해를 보던 약자들의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검찰에서 압수수색을 한다, 공정위에서 조사를 한다 부산을 떨고 있지만 그런 것을 지금까지 방치하다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자 너도나도 앞장서고 있다. 모두가 뒷북을 치는 꼴이다. 사회가 불의와 불공정이 판을 치는데도 모른척하던 사정기관이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고 퇴직 후 여생을 보낼 기업을 뒤를 봐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단계 업체 조합인 직판 및 특판 조합에 공정위 출신들이 줄줄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라.

 

신의 직장이라는 금융권 공기업에 대해서 뉴스에 났지만 년봉이 억대를 넘어간다고 한다. 대기업 연봉 수준을 웃도는 수준이니 그눔들은 모두 국민들의 세금을 곳감 빼먹듯이 하고 있는 파렴치들이지만 사정기관이나 정부 누구도 그런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있다. 특권층을 구성하여 권력의 비호하에 호의호식하는 인간들이 부지기수로 존재하는 한 그 나라가 제대로 굴러간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조선 시대 양반들이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 서출들의 관계 진출을 막았듯이 말이다. 

 

 

 

 

이제 기업 경영의 중심 축은 이제 도덕과 윤리로 옮겨졌고 구성원 개개인의 됨됨이가 경쟁력인 시대가 돼가는 듯하다. 신입사원 선발에서 스펙보다 인성을 중시하는것은 이런 기업 환경변화와 무관치 않다.

남양유업 사태의 전개 과정을 지켜보면 아무리 본사와 대리점 사이에 갑을(甲乙)관계가 존재한다지만 일선 영업 현장이 뒷골목 양아치에게서나 들음직한 험악한 욕설과 협박이 난무하고, 또 그것이 여태 통했다는 사실이 우선 그렇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후폭풍이다. 마치 들불이 번지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문제가 불거지자 회사 측은 즉각 해당 직원을 해고하고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게시하는 등 발 빠르게 대처했다. 이전엔 그런 정도면 통했다. 적당히 언론을 관리하고, 피해자를 겁박하고 구슬리면 억울하지만 넘어갔다. 하지만 이젠 달랐다. 급기야 회사 대표가 국민 앞에 석고대죄했고, 대리점과의 생상을 위한 방안을 내놓으며 용서를 빌었다. 이 또한 거기까지였다. 싸늘히 식은 세간의 시선을 거둬들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실제 제품 불매운동은 계속 확산되는 등 상황은 계속 나빠지고 있다. 본사에 대한 압수수색 등 검찰이 수사를 본격화한 데 이어 공정거래위원회 차원의 조사도 시작됐다. 이런 와중에 영업이 정상적으로 이뤄질 리 만무하다. 매출은 급전직하고 주가도 연일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호감을 잃은 기업의 모습은 이렇게 처참했다. 국내 최대 유업회사라지만 존립 자체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말단 조직원 한 사람의 분탕질에 매출 1조원의 거대 기업 운명이 흔들릴 수 있다는 이 엄중한 현실이 어찌 두렵지 않을 수 있나.

이제 사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개별 기업 차원을 넘어섰다. 식품업계 전반의 그릇된 영업 관행이 도마에 올랐고, 공정위는 이 과정에 불공정 행위가 있었는지 대대적인 조사를 벌일 태세다. 그러자 편의점 업체 등 부당한 관행이 문제시 됐던 주변 업계는 불똥이 자신들에게 튈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검찰도 불법 비위 사실이 드러나면 엄단한다니, 그 서슬에 관련 업계는 간이 녹아내릴 지경이다.

무서운 게 아니라 세상이 달라진 것이다.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을(乙)을 억압했던 어설픈 갑(甲)들은 그게 누구든 용서하지 않는 세상이 된 것이다. ‘빵 회장’ 사건에서 보듯 자칫하면 하루아침에 기업 문을 닫을 수 있다. 누구도 여기서 예외일 수 없다. 우리 사회 저변에 흐르는 도덕적 요구 수준이 그만큼 높아진 까닭이다.

마침내 정치권이 나섰다. ‘갑’의 횡포를 방지하기 위한 관련 법 개정에 착수한다는 소식이다. 뿐만이 아니다. 입점업체에 군림했던 백화점이 갑을문화 시정에 앞장서고, ‘라면 상무’ 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포스코는 회장 주재로 전 계열사 임직원들이 모여 윤리실천을 다짐했다. 삼성 LG 등 대기업 집단도 내부 단속에 부심하고 있다.

이번 파문의 끝이 어디인지 가늠키는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업 경영의 핵심 축은 도덕과 윤리이며 구성원 개개인의 됨됨이가 경쟁력인 시대가 됐다는 것이다. 좋은 제품과 서비스만으로 고객의 만족을 끌어내는 시대는 종언(終焉)을 고(告)하고 호감도가 경쟁력의 새 잣대인 셈이다. 최근 일부기업이 신입사원 선발 기준을 인성에 두는 것은 이런 기업 환경변화와 무관치 않다. 이렇게 사회는 또 한 걸음 진화하고 있다.(정재욱 논설위원)

 

                           

                                                                            한강 전경

 

노사간에 해묵은 쟁점으로 갑론을박해온 통상임금 문제가 본격 공론화될 조짐이 엿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방문 중 이 문제가 주요 관심사로 부각됐기 때문이다. 미 상공회의소가 박 대통령 초청 CEO 모임에서 댄 애커슨 미 GM 회장이 한 것으로 알려진 발언이 발단이 됐다고 한다. 애커슨 회장은 앞서 지난 2월 밝힌 80억불 투자 계획이 여전히 유효하다면서 엔저와 함께 통상임금 문제를 언급했다는 것이다. 언론보도로는 엔저 현상과 상여금을 포함하는 통상임금 문제가 해결되면 한국시장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이는 조건부로 투자계획을 재확인한 것으로 해석됐다.

 

통상임금은 회사가 정기적이고 일률적으로 지급하는 임금으로, 시간 외 근무 수당과 퇴직금을 산정하는 기준이다. 통상임금은 지금 재계와 노동계가 첨예하게 맞선 핵심 현안의 하나다. 특히 지난해 3월 정기 상여금이나 근속수당도 통상임금에 포함된다는 취지의 대법원 판결을 기화로 노사 갈등이 증폭되는 양상이다. 노조가 제기한 수십 건의 관련 소송이 법원 판결을 앞둔 상황이다. 한국 GM 노조도 통상임금 반환 소송 1심과 2심에서 승소하고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한다. 이런 사정에 비춰 통상임금 문제는 이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셈이다.

 

 

 통상임금 문제가 이번에 새롭게 조명된 것은 미 GM 회장의 조건부 투자 계획 발언과 이에 대한 우리 방미단의 반응 때문인 듯하다. GM만이 아닌 한국 경제 전체의 당면 문제인 만큼 어떻게든 해법을 찾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해석된 대목이다.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은 현지 브리핑에서 통상임금에 대한 우리 법원의 결정이 번복되지 않으면 GM 투자가 무산될 가능성도 있다고 걱정했다고 한다. 사법부의 판단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달리 해석될 소지가 없지 않아 보인다. 노동 당국이 상반된 행정해석을 내렸다고는 해도 대법원 판결이 나오고, 또 관련 소송이 줄을 잇는 상황에서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이 과연 적절했는지는 의문이다.

노동계에서는 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봐야 한다는 취지의 법원 판례를 들어 미 GM 회장의 발언과 우리 방미단이 보인 반응에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고 한다. 임금 수준 향상을 바라며 고정 상여금의 통상임금 포함을 요구해온 노동계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재계의 걱정이 크다는 점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대목이다. 통상임금에 상여금이 포함되면 기업들이 한꺼번에 부담해야 할 비용이 최소한 38조원에 이르리라는 게 재계의 추산이다. 자동차. 조선업 등 대기업도 그렇지만 특히 중소기업들은 심각한 경영난을 피해가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언론보도로는 청와대 경제수석은 통상임금 문제를 노사정위원회에서 다룰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견해를 내비쳤다. 노사정위에 의하면 그동안 부분적으로 이 문제가 논의되긴 했지만, 정부로부터 노사정 차원에서 다루자는 신호는 없었다고 한다. 노사정위에서 이런저런 노사 현안을 논의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고, 통상임금 문제도 예외는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대법원 판결이 나오고서 줄소송이 제기되는 상황인 만큼 신중한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자칫 사법부의 권위를 훼손한다는 오해를 살 수도 없지 않아 보여서다. 통상임금 문제는 무엇보다 상생의 차원에서 해법을 찾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졸속으로 추진하다 보면 오히려 갈등의 골만 더 깊게 팰 수도 있다는 점을 잊지 말기 바란다.(연합시론)

 

 

                          

                                                                내방역 근방 찻집 '일랑일랑'

 

에스파냐(스페인)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 같으면서도 생소한 나라이기도 하다. ‘정열의 나라’다운 플라멩코 춤과 투우가 잘 알려져 있고,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의 축구 경기는 세계적인 관심사이기도 하지만, 정작 이 나라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

에스파냐 역사를 들춰보면 여러 가지 흥미로운 점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태양이 지지 않는 세계 제국’을 영국보다 200년이나 앞서 건설한 나라가 바로 에스파냐다. 그런데 최고 전성기가 시작되는 시점에 이미 사양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또한 6·25 전쟁(1950∼1953)에 꼭 14년 앞서 터진 에스파냐 내란(1936∼1939)도 철저한 이데올로기 갈등에서 비롯된 전쟁이라는 점에서 우리로 하여금 많은 동질감을 갖게 한다.

에스파냐는 1492년 국운의 대상승기를 맞이한다. 780여 년이나 이베리아 반도에 머물렀던 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잔재인 나스르 왕국(그라나다 왕국)을 멸망시키고 가톨릭 세력이 국토를 통일한 해로, 이를 계기로 에스파냐는 영토의 통일, 종교의 통일, 정치의 통일, 문화의 통일을 이룩하는 데 성공한다.

같은 해,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 발견(?)이라는 대박을 터뜨려 신대륙 진출의 길이 열리면서 에스파냐는 아메리카 대륙은 물론, 필리핀 등을 식민지로 거느리는 세계 대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그래서 에스파냐 역사에서 1492년은 ‘국운 비약의 해’로 기려져 500주년이 되는 1992년에는 ‘어게인 1492!’를 기원하며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열고 세비야 세계박람회를 개최했던 것이다.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해 ‘몬주익의 신화’를 창조한 바로 그 올림픽 말이다.

에스파냐는 이렇게 영토적인 글로벌화를 통해 유럽 최강국이 됐고 로마제국이 지중해를 벗어나지 못한 데 비해 대서양과 태평양을 아우르는 명실상부한 세계 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에스파냐는 영토의 글로벌화와는 반대로 정신적으로는 역(逆)글로벌화라 할 수 있는 순혈주의(純血主義)로 돌아섬으로써 그동안 다양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던 다민족·다인종·다문화 사회에서 비기독교적이고 비에스파냐적인 요소를 철저히 말살하기 시작했다.

국토 통일을 이룩한 뒤 가장 먼저 취한 조치가 ‘그라나다 칙령’ 반포였다. 이어서 유대인과 이슬람교도 및 아랍인들을 추방해 버렸다. 독실한 가톨릭 교도들이 십자군전쟁까지 포기하며 800년 가깝게 격렬히 싸워왔던 이슬람 세력이었으니 이러한 조치는 어쩌면 당연했을지는 모른다.

문제는 그들이 추방한 대상이 에스파냐 경제의 주축이었다는 데 있었다. 유대인들은 에스파냐 사회의 전문 직업군(群)으로 귀족들이 손대지 않던 당시의 3D 직종이라 할 수 있는 금융·의료·법률·유통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아랍인·이슬람교도들은 농업에 종사하는 경제의 기초 노동력이었으니 이들의 추방은 곧 경제의 혼란과 파탄으로 이어졌다.

에스파냐 역사에서 최고의 전성기라고 하는 16세기 후반 펠리페 2세 시대에는 무적함대(아르마다)를 거느린 세계 최강국, 최부국(最富國)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 번이나 국가부도(모라토리엄)를 선언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국가경제가 취약했다. 17세기가 열리기 무섭게 네덜란드와 영국에 밀리기 시작했고, 에스파냐는 급격히 유럽의 이류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영토의 글로벌화로 세계 최강이 된 에스파냐가 정신적 역글로벌화로 사양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은 시사한다.

우리는 우리 역사상 최고의 번영을 누리고 있다. 신문을 보면 당장 경제가 거덜날 것 같고 사회가 휘청거릴 것 같지만 우리가 언제 지금처럼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며 오히려 영양과잉을 걱정하고 성인병을 두려워해본 시대가 있었던가? 가장 저렴하면서도 완벽에 가까운 의료보험 혜택을 받으며 세계 최고 수준인 의료 기술진의 서비스를 받고 사는가 하면 세계에서 가장 깨끗하기로 유명한 도시가 서울 아닌가?

신문에는 끔찍한 범죄 기사가 끊이지 않아도 젊은 여성이 밤 10시 넘어 대도시 거리를 마음 놓고 활보할 수 있는 나라는 세계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하다시피 하다. 그만큼 치안도 잘 되고 있는 편이라는 얘기다. 이러한 오늘의 대한민국은 결국 남보다 앞서 겁내지 않고 개혁·개방을 했고 글로벌화를 통해 경쟁력을 키운 까닭에 이룩해낸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마인드까지 글로벌화돼 있는 것일까? 글로벌화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조류이며 필연임에도 불구하고 과거 에스파냐처럼 ‘단일민족’이라는 순혈주의(純血主義)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나라에도 이미 140만이 넘는 외국인이 살고 있다. 이들의 상당 부분은 한국인이 기피하는 3D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정확히 얘기하면 우리가 필요해서 데려온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들을 정당하게 대접하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가 지금의 번영을 계속 유지, 발전해 나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관용과 포용이 아닐까?(이원복, 덕성여대 석좌교수)

 

                                                      신반포 아파트 제1지구 1차 재건축 현장 

 

 

 

 

 

                                                                  반포 주공 1단지도 일부가 재건축 추진중이다

 

                          

 

자판기 사업도 이제 사양길이다. 관리도 잘 안되고 커피 전문점이 너무 많아 사람들이 잘 이용하지 않는다. 하나 둘 철거되고 있고 겨울철에는 동파로 관리도 어렵다. 커피에 섞는 프림 재료가 불량한 돼지기름 등으로 만들기 때문에 건강에도 좋지 않다는 보도도 있었다. 또 어떤 곳은 현금통을 무수고 동전통을 통째로 털어가는 사람도 있다.

 

간혹 커피를 뽑다가 잔돈통에 남이 미쳐 꺼내기지 못한 동전이 몇 백원 남아 있을 때 그 순간적인 짜릿한 즐거움을 이제는 맛볼 수 없을 것 같다. 

 

 

 

 

                            

 

자전거를 타고 아침 등교하는 학생. 헬멧이나 보호장구는 전무하다. 지금까지 이침에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 학생 중 헬멧을 쓴 학생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심지어 저 학생처럼 스마트폰이나 MP3로 강의나 음악을 들으며 자전거를 타고 간다. 차량의 경적 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된 상태이다. 그것은 부모도 학교도 자전거를 타는 학생에 대해서 홍보도 않고 안전교육도 않는다. 부모나, 학생, 학교에서 그 학생이 어쩌면 죽음에 이르는 지름길인 줄 모르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콩나물 시루나 찜통같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학교로 가는 학생들에게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도록 한다면 운동이 부족한 우리 학생들에게 운동도 되고 밥맛도 있듯이 학업에도 좋은 성과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모른다는 점이다.

 

요즘 길거리는 모두가 눈떤 장님의 나라인 듯하다. 모두가 스마트폰을 들어다 보면서 길을 걸어가거나 이어폰을 끼고 무언가를 들으면서 가는 것이 대부분이다. 또 모든 정보를 폰에 의지하고 책보다 폰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폰의 중독성이 심각하다. 정부와 통신사들의 현란한 마케팅에 의해 무차별 보조금을 지급하는 척 하면서 새로운 폰을 장만하도록 권유한다. 소비자들의 주머니 돈이 쌈지돈이다. 요즘 길거리에는 누구나 막론하고 고가의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며 2G폰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찿아 보기 힘들다. 모두가 허세를 쫓아 타인지향적인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남에게 없어 보이지 않기 위해서 옷, 신발, 빽, 휴대폰을 고급으로 장만하고 입고 들고 나가야 직성이 풀리는 사회다. 모두 조선의 허울과 허세, 가식과 위선이 5백 년 동안 지배하면서 굳어진 국민들의 심성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폰에 중독된 청소년들이 폰을 분실하면 머리가 멍해지고 안정을 못하고 아무것도 못한다. 가슴이 불안하고 금단현상이나 우울증까지 생긴다는 연구 결과가 보고되었다.

 

또 1백만 원에 가까운 고가의 폰을 장만하는 것이 위세요 자랑이며 최신 기종이 아니면 왕따를 당하는 세대다. 부모가 능력이 없으면 무시하고 앙탈하며 반항한다. 그래서 부모는 허리가 뿌러지는 줄  모르고 자식이 요구하면 고가의 폰을 장만해 준다. 그리고 힘든 새벽 인력시장으로 나가거나 파출부로 새벽 출근을 한다. 자식이 뭐길레......

 

그러나 젊은 청소년이나 젊은 여성이 복장과 안전장구를 갖추고 날렵한 몸매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습은 보기에 너무나 좋다. 

 

 

 

 

우리집 애완견 2세들인 '알콩'과 '달콩'이 나의 침대 위에서 곤하게 잠을 자고 있다. 애견집에서 자는 것보다 폭신하고 때뜻한 나의 침대가 제일 좋은 모양이다. 내가 인터넷을 하면 이눔들은 하나같이 침대로 올라가 자거나 딩굴고 있다. 밥을 주고 목욕을 시키고 틈틈이 갈비뼈나 닭고기를 주니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밖으로 나가려면 좋아들 한다. 갔다오면 자기들을 위한 무언가 맛있는 특식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다시 바람따라 세월따라 한민족의 서사시가 계속된다.

 

중원에서는 수많은 나라들이 명멸하는 가운데 고구려와 발해가 만주 땅에서 천년 이상 웅지를 펼쳤고, 백제가 양자강 이북과 산동 반도 일대에서 대륙 경영으로 힘을 펼쳤으나 그것은 잠시에 불과했다. 당나라의 힘을 빌어 신라의 통일신라 이후 신라 조정의 천년 사직이 극도로 부패해지자 반란이 사방에서 일어나면서 군웅활거 시대가 시작되었고 이후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면서 수많은 영웅들이 명멸하며 사라져 갔다. 궁예가 그랬고 견훤이 그랬다.

 

고려 역시 미완의 통일이지만 삼한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왕건이 그의 특유의 포용력을 발휘하여 지방 호족들을 아우르며 분산된 후삼국 시대의 힘을 결집시켜 후백제를 무너뜨리고 신라를 흡수하여 삼한통일의 위업을 자력으로 이루어 민족 대화합의 결정체인 고려라는 나라를 창업하였으며 임종을 앞두고서 후손들에게 '훈요십조'를 남겨 반드시 지킬 것을 유언하면서 창업공신인 박술희에게는 "인생이란 이렇게 참으로 덧없는 것이라네!" 라고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하였다.

 

태자 무(혜종)가 왕건의 유언에 따라 박술희, 왕요 등의 개경파의 지지하에 불안한 왕위를 즉위하였으나 많은 이복 형제들과 호족들로부터 숱한 왕권 위협에 시달리다가 2년 4개월의 짧은 치세를 마감하고 죽자, 왕위 계승을 노린 왕식렴, 평산 박씨, 충주 유씨 세력인 서경파가 개경파인 박술희, 왕요 등을 제거하고 충주 유씨의 아들인 왕요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정종이다.

 

 

 

남산골 한옥마을

 

 

정종도 왕식렴의 실질적인 권력행사에 허수아비에 불과하였고 서경 천도 등을 추진하기 위해 서경에 궁궐을 짓는 등 서경천도를 추진하려 하였고 호족군 연합체이면서 일종의 예비군 개념인 광군 30만을 조직하여 군사력을 강화하여 거란 침략에 대비하려 하였으나 결실은 보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즉위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인명을 죽인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정종이 갑자기 병상에 눕게 되고 또 왕식렴까지 갑자기 죽자 정종은 동복아우 왕소에게 자신의 아들을 부탁하며 왕위를 넘기고 3년 6개월의 짧은 치세를 마감하고 나이 27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왕위를 계승한 왕소(광종)는 즉위 후 7년 동안 호족들의 비위를 맞추며 내면의 힘을 키우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한편으로는 고려의 대외 위상을 높이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불교를 적극 장려하는 등 정책을 추진하면서 한편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키우기 위해 당나라 태종의 <정관정요>를 숙독하여 제왕의 치세와 신하들을 다스리는 방법을 연구하였다. 이같이 정치적 토대를 마련한 후 7년이 지나자 중앙집권화를 위한 급진적인 과감한 개혁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개혁작업은 953년 후주와 본격적인 외교관계가 성립된 이후부터 암암리에 후주의 쌍기라는 사람을 고려로 끌여들여 고려의 개혁에 대한 그의 개혁론을 듣고 광종은 흥분하게 된다. 그래서 그의 개혁이론에 따라 '과거제'와 '노비안건법' 등 과감한 개혁작업을 추진하게 된다. 광종은 '노비안건법'을 통해 호족들의 경제적, 군사적인 힘을 약화시키고, '과거제'를 통해 신진 인재를 조정에 등용함으로써 호족들의 자리를 교체하여 나갔다. 이에 호족들이 강하게 반발하자 측근들의 힘을 배양한 광종은 무자비한 숙청을 단행하여 수많은 호족들이 수난을 겪어야 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왕권과 중앙집권제를 강화하여 고려를 반석위에 올려놓았다.

 

 

 

 

 

이 후 고려는 경종의 화합정책으로 호족들이 재등장하게 되었고, 성종 대에는 유학 정치이념의 실현으로 관제와 행정조직을 개편하는 등 중앙집권 체제를 완성하였다. 또 거란의 침입을 서희 등에 의해 물리치고 과거제로 등장한 신진관료들이 조정을 장악하면서 사학이 번창하였고, 목종 대에는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모후 헌애왕후가 섭정을 하면서 김치양이 등장하여 정권을 농단하였고 문란하고 무능한 정치와 도덕성 상실로 결국 강조의 반란이 발생하였다. 

 

반정에 성공한 강조는 왕을 폐위시키고 불륜의 씨앗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현종이 강조에 의해 즉위하게 되었다. 그러나 헌종은 거란의 2차 침공으로 남으로 몽진을 하면서 난적들에 의해 목숨까지 위협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강조의 희생으로 화친을 맺고 복귀하였다. 그러나 거란과의 마찰로 3차 침입이 있었으나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거란군을 거의 섬멸하는 등 역사에 빛나는 승리를 거두면서 고려를 반석위에 올리는 위업을 남겼다. 

 

  

 

 

 

거란의 3차례 침공 중 1차 침입은 서희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되돌려 받는 외교술의 승리를 이루었으며, 강조의 반란으로 목종이 폐위되고 '눈물의 씨앗' 현종이 즉위하면서 거란의 침공을 강조의 희생으로 무마되었으나, 3차 침입은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거란군을 전멸시키는 쾌거를 이루었다. 

 

덕종-정종을 거쳐 문종 시대에는 태평성대를 누렸으며 순종-선종-헌종을 거쳐 숙종은 조카를 밀어내고 왕위를 찬탈한 이조의 세조와 같은 경우였으나 10년 치세로 마감한다.

 

 

 

 

 

숙종의 뒤를 이은 예종대에는 윤관의 별기군 창설과 여진정벌로 동북 9성을 개척하였으나 관리의 어려움으로 여진에게 다시 돌려주게 된다. 뒤를 이은 우유부단한 정치로 일관한  인종 시에는 이자겸의 난 등 외척들이 준동하여 고려 왕조가 위기에 몰리기도 하였으나 묘청이 등용되어 북벌을 위한 서경천도론이 힘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묘청은 김부식 등 개경파의 극렬반대로 서경천도가 무산되자 서경 군부를 배경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부식에 의해 결국 묘청과 서경파는 무참하게 도륙되고 말았다. 김부식에 의해 저술된 <삼국사기>는 우리나라 역사서 중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 사료적 가치가 풍부한 역사서이나 사대주의, 신라위주의 역사, 고구려.백제의 역사 축소 등 부정적인 면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의종대에는 향략주의에 빠져 환관과 내시들에 의해 조정이 운영되었고 문신들이 무신들을 멸시하는 분위기에서 울분을 참지 못한 무신들이 우발적인 반란으로 결국 무신정권이 들어서고 의종이 폐위되고 명종이 즉위하여 정중부-이의방 -정중부-경대승-이의민으로 이어지는 20년간 무신들의 피나는 권력투쟁이 반복되는 가운데 민생은 토탄에 빠지고 각지에서 김보당의 난, 조위총의 난, 망이.망소이의 난, 효심과 김시미의 난 등을 위시하여 민초들의 반란이 줄을 이었다. 그러다가 최충헌에 의해 이의민 세력이 제거되고 명종이 폐위되면서 신종-희종-강종-고종 등이 대를 이으면서 최씨 무인정권이 60년간 전개된다.

  

 

 

 

 

고종대에 몽고의 침공이 시작되어 7차례의 침공이 계속되었는데, 최충헌의 뒤를 이은 최우 집권시에는 강화도로 천도하여 대몽항쟁을 전개하게 된다. 기간 중 팔만대장경을 축조하는 등 대몽항쟁을 계속하다가 원종대에는 최씨 무신정권이 대가 끊어지고 수하였던 김준-임연에 의한 무신정권 말기를 맞이하게 된다.

 

원종이 몽고에 입조한 후 개경에 머물면서 친원정책을 전개하게 되자 궁지에 몰린 무신정권은 몰락하게 되는데, 무신정권의 하수인이며 무신정권의 권력을 유지하던 핵심세력이었던 삼별초가 궁지에 몰리자 반란을 일으켜 진도-제주도로 이어지는 3년 동안의 대몽항쟁의 붉은 충혼들은 남쪽 바닷물 쪽빛깔처럼 파도속으로 사라졌다.

 

 

 

 

 

 

이 후 몽고의 부마국으로 전락한 고려는 충령왕-충선왕-충숙왕-충혜왕-충목왕-충정왕-공민왕으로 이어지는 시대를 거치면서 몽고의 속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몽고를 등에 업은 권문세족들이 고려 조정을 농단하고 고려 왕실은 자식이 아비를, 아비가 자식을 모함하여 왕위를 폐위 당하거나 복위되는 등 수난을 겪게 되었고, 몽고 출신 고려 왕비가 권력을 휘두르며 고려 조정을 농단하였으며 심지어 고려 왕비를 모함하거나 왕비의 말을 잘 듣지 않으면 고려왕도 갈아치우는 수모를 겪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또 만주땅에는 별도로 고려 왕족으로 심양왕을 만들어 고려 왕실과 대립관계를 부추기며 고려 조정을 압박하였으며 고려 국내는 부원세력들이 농민들의 농토를 빼앗아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는 등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렸다. 한편 몽고는 대일본 원정을 준비하면서 고려의 국력 소모와 백성들의 수탈은 극에 달하였다.      

 

 

 

 

   

고려는 몽고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는 속국으로 전락하자 뭉고풍 머리와 옷을 입고 몽고말을 사용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일부 간신들은  몽고 황실을 등에 업고 고려 왕실을 농락하며 부귀영화를 누렸고 몽고의 속박에서 벗어난 공민왕의 개혁도 일어서다 말았다. 왕권이 미약하고 조정이 타락함에 최영의 만주 고토회복의 꿈도 위화도 회군으로 쿠테타에 성공한 이성계로 말미암아 연기처럼 사라졌다.

 

고려말이 되자 특권 세력인 권문세족의 횡포와 부패한 불교의 폐단으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북방에서는 여진족이 국경을 넘어와서 약탈해갔고, 서남해 일대는 왜구의 침입이 끓이지를 않았다.

 

당시 국제정세는 몽고족의 원나라가 점점 쇠퇴하고, 한족의 명나라가 점점 세를 키우고 있을 때였다. 이에 고려 조정은 친원파와 새로 부상한 친명파 간에 권력다툼이 수면위로 부상했다. 또한 사대부들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강경파는 왕조 교체를 주장했고, 온건파는 고려 왕조를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했다. 온건파에는 정몽주, 이색, 이승인 등이었고, 강경파에는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이었다.

 

결국 권력 쟁탈전에서 강경파가 득세함으로써 정도전 등은 공양왕 3년에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58세의 이성계를 왕으로 즉위시켜 조선을 개국하였다. 조선은 개국하자마자 명에 대하여 극진하게 사대하고, 국시로는 성리학(주자학)을 채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