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의 봄 9 : 바람따라 세월따라, 한민족의 서사시......8
북악 스카이 올레길 전망대에서 바라본 전경
석가탄일 연휴 토요일, 짝쿵과 같이 북악 스카이 위에 올레길을 가기로 했다. 지난 주에 이어 북악 스카이 웨이 올레길을 노래 불렀다. 누군가에게 그 길이 좋다고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다. 원래 귀가 얇아 남의 말을 잘 듣고 의심이 적은 편이며 남편 말은 의심해도 남의 말은 잘 믿는 사람이다. 어치피 쉰다는데 자진하여 가기로 하고 할 수 없이 아무 말 없이 준비하여 나섰다.
사전에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니 북악 스카이 올랫길은 여러 코스가 있었다. 대략 4개 코스다. 다녀온 사람들의 글을 보니 북악길에는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도 있었고 눈내리는 겨울 팔각정에서 바라보는 야경이 멋있다고 한다. 나도 초행길이라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은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선택한 코스가 한성대에서 내려 01번 마을버스를 타고 성북구청 구민회관 앞에서 내려 올라가기로 했다. 아침에 사온 김밥 3줄, 오이, 음료수, 물 등을 베낭에 넣고 출발했다. 날씨를 보니 구름낀 흐린 날이라 그리 전망이 좋지는 않을 것 같다. 오후 늦게 비가 내린다니 우산은 한 개 준비하여 출발했다.
남부터미널 역에서 3호선을 타고 충무로에서 4호선으로 갈아탔다. 한성대 역에서 내려 나오니 바로 01번 마을 버스 정륮방이 나온다. 조금 기다리다 01번 마을 버스를 타고 고층 아파트 사이로 꾸불꾸불 언덕길을 올라가니 종점이 나왔고 그곳이 성북구민회관 앞이다. 구민회관은 언덕 위에 지붕이 보이는 건물이며 버스 기사가 가리켜 주는 방향으로 울타리를 지나 계단을 따라 올라가 구민회관을 지나니 북악 스카이 웨이 도로가 나타났다. 안내판을 보고 도로를 끼고 계속 걸으니 도로에는 차들이 쌩쌩 지나가고 자전거를 탄 젊은이도 여럿 지나갔다. 이런 구배 도로를 오르내리며 자전거를 타는 젊은이들이 부럽기도 하다. 나에게 자전거를 타기에는 경사와 굴곡이 심하고 도로 갓길도 거의 없고 길이 좀 위험한 도로길이라 나는 엄두를 못낼 것 같다.
조금 가다보니 하늘한마당이 나왔고 갈림길에서 안내판이 있는 좌측 도로를 따라 요도에 표시된 여러 지점을 살피고 하늘마루 방향으로 다시 길을 재촉하였다. 도로 우측 건너편에 곰의 집, 조금 가다 성가정입양원이 나왔다. 한참 가다 북악 골프장을 지나 가다보면 다모정이 나오고, 숲속다리를 지나 대략 40~50분 정도 계속 도로를 따라 오르고 내리고 마주오는 사람들과 서로 비켜가면서 가다보니 어느듯 정자와 운동기구가 있는 하늘마루가 나타났다. 편안하게 걷기에는 좀 불편한 그런 길이었다. 무릎이 불편한 나이드신 분들에게는 이 길을 권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 부부는 아까 지나온 곰의 집을 지나면서 처음에는 "곰을 키우는 곳인가?"하며 나의 중얼거림에 짝쿵이 맞장구를 치는 등 둘은 곰을 키우는 곳인줄 알았다. 뒤에서 보는 집의 형상도 그러하거니와 여러 채의 허름한 막사 모습이 마치 동물우리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조금 후에 알았는데, 조금 가다보니 곰의 집 입구가 나오고 그곳에 음식점 간판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둘다 웃으면서 낄낄대며 걸었다. 촌놈이 따로 없다. 저런 음식점에 가보지도 못했으니 말이다. "촌놈이 도시 여자 만나서 출세했다" 는 등 짝쿵의 비아양에 웃으면서 걸었다. 내 생각에도 도시 출신 마누라 덕분에 나의 무식함이 드러났다. 모두 자기 덕분인줄 알라고 한다. 지난번 서울 성곽도 딸 덕분에 구경하였고, 이런 북악 올레길도 자기 덕분이란다. 그래 맞다. 맞다. 마누라 잘 얻은 덕분에 촌놈이 출세했따.
하늘마루에 도착하여 팔각정에서 김밥을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사진도 몇 컷 찍고 다시 출발했다. 갈래길에서 하늘교를 지나 김신조 루트로 가기로 했다. 휴일이라 사람들이 비교적 많았다. 숲에 가려 전망이 좀 제한 되고 바닥은 비록 나무 계단으로 만들어져 있지만 오르내리는 계단이 대부분인 길이라 걷기에 좀 불편했다. 하늘전망대에 도착하여 서울시 전망을 구경하고 사진도 몇 컷 찍고 또 다시 출발, 호경암에 도착하니 큰 바위가 있는데 김신조 사건 때 난 총탄 자국이 여러 곳이 나타나 있다. 야간에 사격했다면 비교적 잘 쏜 사격 실력이다. 한국 최고의 정예부대이며 청와대 근위부대인 30,33단 병사들이라면 저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당시 이곳을 지키던 수방사 병사들이 오르내리던 계단길로 여럿 나타났다.
다시 계곡을 지나면서 계단을 오르고 내리기를 여러번, 다리가 후들거린다. 남마루, 계곡마루, 서마루를 지나 나타난 성북천 발원지는 물이 졸졸 흐르고 있다. 가다보니 약수터가 나오는데 약수터는 음료 불가다. 이곳을 지나면서 유일한 약수터이나 마실 수 있도록 좀 보강하면 될 것인데 인터넷에 나온 글을 볼 때 그 사람이 다녀간 때가 몇 년 전인것 같은데 지금도 마찬가지로 음료 불가다. 관리를 어디서 하는지는 몰라도 약수터 관리가 허술하다.
이 길은 지난번 남산순환길에 비하면 나이가 좀 있는 분들에게는 별로다. 김신조 루트로 가고 있는데 호경암 근처에서 반대편에서 오던 어떤 아줌마가 땀을 흘리며 무척 힘들어 하면서 묻는다. "어디쯤 가면 내려가는 길이냐"고... ㅎㅎㅎ 많이 힘들어 하는 모습이라 "힘내시고 조금 가시면 곧 내려가는 길이 나타난다"고 격려했다. 아마 저 아줌마도 초행길인 모양이다. 반대편에서 오는 길이 더 험하기 때문이다.
김신조 루트를 거의 지나 오니 저 멀리 서울 성곽이 보이고 숙정문도 보인다. 전망대에서는 성북 방향 서울 시가지가 보이고 수목은 5월의 따사로운 햋빛을 받아가면서 신록을 더하고 있는 듯하다. 구비구비 오르고 내려가는 길을 지나 드디어 숙정문 관리사무실 앞에 겨우 도착했다. 이제부터는 지난번 딸 부부와 같이 갔던 성곽길을 따라 가다가 와룡공원을 지나서는 동대문 쪽으로 가는 길인데 동대문 쪽으로 가지 않고 와룡공원을 지나 창경궁 쪽 방향인 대학로 쪽으로 마을 비탈길로 내려왔다. 다리도 후들거리고 스마트폰 밧테리도 다 되어 기존의 아이스크림 폰으로 광경을 찍었다. 그런데 라디오 밧테리도 다 되어 음악 듣기도 종료하고 구멍가게에서 음료수를 사 마시고 다시 출발, 짝쿵은 대학로를 지나 평화시장까지 걷자고 하는데 다리가 힘들다. 그래서 마침 지나가는 08번 마을 버스를 타자고 했더니 걷자고 했다. 결국 언쟁 끝에 걷다가 일반 버스를 타고 종로 5가에서 내려 평화시장에 가서 짝쿵 속옷을 사고 다시 광장시장 먹자골목에 가서 막걸리와 순대를 먹고 나오니 힘들다. 연휴라 사람들이 지난번 보다 더 많다. 빈대떡 집에도 사람이 만원이다. 순대와 막걸리를 먹고 일어섰다. 그런데 막걸리가 별로인 것 같다. 속이 터부럭하고 소화가 잘 안되는 모양이다. 배가 불러오고 취기가 자꾸 오른다. 피로한 탓에 막걸리를 마신 탓일 것이다. 아마 오늘 5시간 정도 걸었고 피곤했다. 그때서야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다시 서초동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교대에서 내려 마을 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했다. 이것도 행복인지 알 수 없으나, 샤워를 한 후 밤새 내리는 비소리를 들으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안내간판
북한이 단거리 유도탄 4발을 이틀간에 동해쪽으로 발사한 것을 두고 국내외에서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말이 많다. 새로 사거리를 연장한 다연장 로켓이라고도 한다. 그런가운데 개성공단 문제로 북측이 개성공단 기업체 비대위측에 팩스를 보내는 등 우리 정부간외 비대위 간에 이간질을 유도하고 있는 모습이다. 자존심과 양보 과연 어느 것이 민족과 나라를 위한 처방인지는 역사적인 선택에 달렸는지도 모른다. 북의 장막 문고리를 자연스럽게 열어젓히게 만들고 개혁.개방을 통해 패쇄된 북한 사회를 변화시키는 길이 통일의 가장 빠른 길일 것이지만 북측은 그러한 우려스런 상황이 초래될 것에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물론이다.
북한 탈주민 3명이 다시 월북하여 좌담회에 나와서 남한에서 겪은 일을 토론하면서 협박, 고문 등 비인간적인 처사를 발언하면서 비난하고 있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이미 다시 월북한 탈주민들이 한 둘이 아니다. 탈주민들이 남한에 와서 정착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도움을 주어도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루 아침에 정착금을 모두 털어 날리고 다시 북으로 돌아가려 할 것이다. 그래도 좋다. 남한의 실상을 그들이 보고 느끼고 간 이상 북한 사회의 동요는 점차 늘어날 것이다. 그러면 남북의 장막이 서서히 무너져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 정부는 북한 탈주민들에 대한 실질적이고 근본적인 대책이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5월의 신록은 점점 그 색깔을 더하고 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33주년 기념식이 18일 오전 10시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렸다. 이날 기념식에는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 주요 인사, 국회의원, 자치단체장, 시민 등 2000여 명이 참석했지만 유족 상당수가 불참해 ‘반쪽 대회’로 치러졌다. 현직 대통령이 참석한 것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취임 첫해인 2008년 이후 5년 만이다.
그런데 행사 때 부르던 노래 문제로 국가보훈처가 제동을 건 모양으로 반쪽 행사가 열렸다. 행사 때 부르는 노래가 그리 문제인가. 그냥 놔두면 무슨 문제가 잇단 말인가. 그러나 보훈처는 노래의 내용과 의미를 문제 삼고 있는 듯하다. 정권에 반기를 들고 항쟁한 사건이 어디 한 둘인가. 그러나 5.18 사건은 군사독재정권에 항쟁한 사건이었고 실패하였지만 다음 정권에 의해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한 사건이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그 행사의 정당성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국가 권력에 항거한 사건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국가 권력이 정당하지 못한 역사는 수도 없이 많다. 역사를 보아도 수많은 역모와 반역이 있었고 아무리 그들이 내건 구호와 이념이 정당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한 사건은 역사속으로 소리없이 사라졌다. 이시애, 홍경래, 이인좌, 이몽학의 난이 그랬고 동학난이 그랬다.
숲 사이로 삼청각이 보인다
살인 진드기 출현으로 국민들과 보건당국이 긴장하고 있으며 이미 사망자도 발생하였다고 한다. 환경오염으로 인해 나타나는 새로운 곤충이나 벌레가 인류 멸망의 한 원인이 될 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선다. 특히 야외에 나갈 때 각별한 주의를 요망하고 있다.
행락철이 되자 사람들이 너도나도 도시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고속도로와 국도는 초만원을 이루어 주차장을 방불케 하고 있다. 경제가 어렵고 살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어색할 정도이다. 빚내서 휴가를 가고 남이 가니 우리도 간다는 것은 주도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다. 지금의 즐거움이나 기쁨이 영원히 계속되지도 않지만 자신이 세운 인생계획대로 차분히 삶을 추구하는 자세도 필요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타인지향적인 삶을 너무 집착하면서 살고 있지나 않은지?
지난 금요일 아침에 자전거를 타고 주택가 뒷골목을 지나가다보니 가족들이 짐을 바리바리 차에 실으며 야유회를 떠날 차비를 하는 모습을 여러 곳에서 보았다. 또 서울 난지도 캠프장에는 사람들이 몰려 빈자리가 없을 정도라고 한다. 캠핑 장비가 날개돗히듯이 팔리고 고가의 금액이지만 가장들이 부담을 가지면서도 구입하여 가족들을 태우고 산으로 강으로 달리고 있다. 가족들과 같이 그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삶의 의욕이 더 살아난다면 다행이다. 오며 가며 죽음이 스쳐지나가고 바람같은 기쁨과 즐거움 뒤에는 항상 허탈함이 찿아오고 공허함이 뒤따르는 법. 각자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겠지만......
김신조 루트 산행길은 삼청각과 길상사를 두고 북악산 북쪽 능선 중간을 빙그래 돌아가는 코스다. 서울 성곽 북쪽에 북악 스카이 웨이 능선이 있고 김신조 루트는 스카이 웨이 근방 하늘마루에서 능선 남쪽 계곡을 건너면서 숙정문까지 구비구비 가는 길이기도 하다
이제 조선에 대하여 노래를 불러보자.
이성계는 나라를 세운 후 국호를 정해야 했는데, 명나라로부터 승인을 받아야 했다. 국호 후보를 찿아보라는 이성계의 명을 받은 정도전은 기자조선의 '조선'과 이성계의 고향인 '화령'을 명에 보냈고, 명이 '조선'을 선택해서 나라 이름이 '조선'으로 결정되었다.
한반도에서 나라 이름을 타국에 물어 정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또한 나라 이름 후보를 뽑은 '조선'은 고조선이 아니라 중국의 번국으로 생각되던 기자조선에서 끌어다 쓴 것이고, 이는 명에 대한 사대의 극치였다. 심지어 명의 사신이 오면 임금이 수창궁에서 무릎를 끓고 황제의 글을 받을 정도로 명이라면 사족을 못 써 민족 자존에 크게 상처를 냈다. 명에 대한 사대는 명이 멸망한 후에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내내 계속되었다. 결국 명과 청에 대한 사대의 결과가 고인 물을 만들어내 조선은 역동성을 잃고 무기력하게 쇠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명에 대한 극진한 사대 덕분에 임진왜란이라는 국가 존망의 기로에서 나라가 망하지 않고 명의 도움으로 500년 왕조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흐린 날씨라 전경은 그리 맑지 못하다. 건너편 산위로 서울 성곽이 보인다.
사실 조선은 개국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두문동에 불을 질러 많은 고려의 충신들을 화장한 데다가, 고려왕조의 후손인 왕씨들을 바닷속에 수장시켜 씨를 말려버렸다.
그러다보니 이성계는 명으로부터 왕으로 승인받지 못해 죽을때까지 왕 소리를 하지 못했고, 제3대 태종 때에야 비로소 왕에 책봉되어 왕 소리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왕 대신 쓴 호칭이 '권지국사'였다.
조선에서 명에 보내는 사신만 해도 정월 초하루에 하정사, 황제의 생일에 성절사, 동짓날에 동지사, 황태자의 생일에 천추사, 고마운 일이 있을 때 감사하는 사은사, 급한 일을 알리는 주청사, 황실 경사 때 진하사, 황실에 불행한 일이 있을 때 진위사 등이 있었다. 좌우간 명나라 경조사를 제 아비 것보다 더 챙겼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숭유억물 정책으로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유교문화가 꽃을 피웠다.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태종이 등극함에 강력한 카리스마로 왕권을 세웠고 대마도를 정벌하고도 대책이 없어 관리에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하여 그만 철수한 것이 지금까지도 못내 아쉽기만 하다. 조선은 고려조보다 더 극심한 신분차별제도가 운영되었는데, 양반, 서얼, 중인, 상민, 노비, 천민의 구분이었다. 조선의 신분제도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보다 더 악랄한 제도로 왕족과 사대부를 위한 제도였으며 결국에는 조선이 망하는데 크게 기여한 제도이기도 하다.
서초경찰서 근방 누에다리 전경(한달전)
우리 나라, 아니 동양 역사에서도 가장 뛰어난 군주였으며 최고의 성군이며 지혜가 넘쳤던 세종은 한글창제와 문화통치는 백성들에게 태평성대를 구가하게 만들었다. 과학기술을 발전시켰고 화약무기를 개선하였으며 국토를 개발하여 국경을 확정지었고 인구도 고려조의 600만 정도에서 1000만 정도로 증가하였다.
조선의 문화는 명나라에 사대하면서 얻었고 태종 때부터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함으로써 세종 이후 왕들은 내치에만 진력하면 되었다.
세종은 모든 정책을 백성의 입장에서 수립하였고 시행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을 '애민정신'에서 출발한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정치인들의 헛공약과 예산도 확보되지 않은 상태의 복지 포플리즘 선심 정책과는 비교가 될 것이다.
세조의 왕위 찬탈과 단종의 죽음은 유교를 숭상하는 많은 선비들과 백성들에게 씻지 못한 한을 남겼고, 수많은 정변을 통해 권력을 잡은 공신들이 왕권을 위협하며 중국에 사대하는 신하의 나라로 임금과 신하를 동급으로 생각하는 풍조가 만연하였다. 또 시간이 지남에 따라 훈구파가 제거되고 신진세력들인 선비들이 등용되면서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무위로 끝나고 권력을 잡기 위해 사색당파를 만들어 서로 죽고 죽이는 탐욕스런 사대부의 나라가 되었고 양반.문신 우대 사회가 전개되었다.
양반사회는 유교의 허례와 허식으로 사회를 병들게 만들었고 속보다 겉을 중시하는 외모지상주의가 팽배해졌고 양민은 수탈의 대상이었고 천민과 노비는 인간측에도 끼지 못하는 철저한 계급사회였다.
누에다리 모습
조선은 개국부터 약 100여 년간 융성하다가 연산군(10대), 중종(11대) 대부터 쇠퇴를 시작했으며, 이후 400년이 더 지나 멸망할 때까지 다시 부강한 나라로 변신할 만한 극단적인 계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조선은 그저 100년 내지 200년 정도 존속한 후 망해버렸어야 할 나라였으나, 중국의 속국이 되어 보호를 받으면서 쓸데없이 긴 세월을 연명했던 것이다.
조선은 연산군 때가 융성의 정점이었고, 이후 멍청한 왕들의 행진이 이어져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나마 조선 유일한 성군 세종이 창제한 자랑거리는 바로 한글이다. 한글은 세계에서 자랑할 만한 것으로 그 뛰어남은 오늘날 인터넷 시대에 한글의 우수성은 두 번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다리 위에서 바라본 고속터미널 방향
고려와 조선왕조는 세계 역사상 드물게 각각 500년 정도의 긴 수명을 누린 왕조였다. 그 이유는 역대로 중국에 사대했기 때문이었는데, 원.명.청의 우산 아래서 편안하게 지내다 보니 국가적인 경쟁 상대도 없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제외하고는 큰 외침도 없었다. 그래서 개혁 마인드가 크게 요구되지 않았고, 유학의 진흥으로 양반사회가 지배층으로 자리잡으면서 유약하고 허례허식과 출세주의에 치중하여 진취적인 기상도 사라졌다. 나라는 부패한 채 무기력하고 느슨하게 쇠퇴의 길을 걸었다.
고려는 중국의 정세변화에 따라 중국 연호를 여섯 가지나 가져다 썼고, 80년 무인시대를 거친 후 100년 가까이 몽골 식민지를 경험했다. 고려 초에 자체 연호를 사용한 것은 중국의 5대 10국의 혼란이 계속되면서 고만고만한 나라들이 몇 년 또는 몇십 년 만에 섰다가 망하곤 하여 어느 특정한 나라를 상국으로 모시는 데 애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초역 방향
조선의 경우 주변 나라 중 명에 지극히 사대한 나라로 조선을 따라올 나라는 없었다. 이렇게 나라 밖을 걱정할 일이 없다보니 모조리 나태해져서 무능하고 멍청한 왕들이 줄을 이었고, 사대부들은 권력싸움에 눈이 멀어 서로를 모함하여 죽이고 죽은 사생결단의 당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악순환을 반복하였다. 백성들은 국가에 대한 애국심이나 주인의식이 전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한심하게나마 500년의 수명을 끌고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사대부들은 백성들이 자신들을 경제적으로 부양하고 노동력이나 제공하는 객체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니 조정과 사대부들에게 조세와 부역을 바치면서 수탈에 시달리며 배를 곯고 사는 백성들에게서 애국심이란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었다. 이렇게 무능한 통치 계층과 애국심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백성들이 조선이라는 나라를 떠받치고 있었으니, 조일전쟁(임진왜란), 조청전쟁(병자호란) 등 전쟁만 나면 모조리 도망칠 궁리만 했지 싸움다운 싸움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전국토가 유린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이순신의 23전 23승의 해전 승리, 의병들이 각지에서 일어나 무능한 관군을 대신하여 싸운 결과 그래도 조선의 명맥을 이을 수 있었던 것이며 명나라의 지원이 있었기에 나라가 망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조선은 성리학이 국시였으며, 정체의 특징은 왕권과 신권 그리고 대간의 언권 등 3권이 분리된 체제였는데, 중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신권이 왕권을 압도하기 시작하게 되었고 이는 인조, 중종 반정 공신들과 외척들이 주를 이루었다.
하늘마루 전망대 모습. 멀리 북한산 능선이 보인다
조선의 왕 27명 중 요절 내지는 단기 재위한 왕은 총 7명으로 정종, 문종,단종,예종,인종,경종,순종이며 명군으로는 세종과 정조 2명, 밥값을 한 왕은 5명으로 광해군, 효종, 태종, 세조, 영조이며, 밥값도 못하고 죽값을 겨우 한 왕은 2명으로 성종과 숙종이다. 결국 명군 둘에다 밥값과 죽값을 한 일곱을 제하고 나머지 단기, 요절을 포함한 18명은 얼뜨기, 멍청이, 소인배, 모자란 무능한 왕들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소인배로는 조일전쟁(임진왜란) 때의 선조(14대)와 조청전쟁(병자호란) 때의 인조(16대)이다. 특히 두 왕들이 전쟁을 당하여 그 무능함의 극치를 보였는데, 나머지 왕들도 그런 전쟁을 당하였을 경우 마찬가지거나 더 멍청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전주 이씨 그 핏줄을 속일 수가 있겠는가!
문약, 부패, 탐관, 외척, 당파싸움, 반란 등으로 왕권은 추락하고 외척들과 권신들은 무능한고 병약한 왕을 골라 세웠고 그들은 대대손손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 사약을 받고 죽은 어미의 피묻은 치마자락을 보고 눈이 뒤집힌 연산군의 폭정으로 중종반정이 일어나 권력이 바뀌더니 왕손이 끓기자 무능한 선조를 등극시키니 가장 불행한 시대의 왕이되고 말았다. 그러던 차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부산포, 동래, 대구, 상주를 점령하며 파죽지세로 올라오던 왜군을 맞아 신립의 충주 평원에서 배수진을 치고 벌인 전투에서 조선군 7,000명의 기마부대는 왜군의 조총앞에 무력하게 쓰려졌고 탄금대 물속으로 거품처럼 사라졌다. 이에 한양의 선조는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조선 최고의 날랜 장수 신립이 어이없이 패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비내리는 밤 급히 북으로 피난을 출발하였고 지나가는 왕의 행렬에 백성들이 돌팔매를 던지며 욕설을 퍼부었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서울시 전경
왜군의 말발굽에 전 국토는 초토화되었고 수많은 양민들이 죽고 끌려 갔다. 그러나 이 때 망했어야 할 조선이 한 사람의 영웅에 의해 기사회생하였으니 바로 이순신 장군이었다. 옥포, 당포, 한산대첩, 명량대첩, 노량대첩 등 23전 23승의 빛나는 승리를 기억하는가? 부패한 나라의 운명을 오로지 나라.백성.부모 사랑으로 모든 어려움을 참아내며 백의종군의 처참한 현실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아던 장군! 그가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은 일종의 분신이었을 것이다.
무능한 선조의 우유부단은 수많은 장수들과 충신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고 나이 50 줄에 10대의 새 왕비를 얻고 아들 하나를 낳고 죽으니 그가 영창대군이라, 광해군과는 어쩔수 없는 한판 승부를 벌여야 할 입장이 되었고 결국 별궁에 위리안치되어 한많은 세월을 보내다가 인조 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나니 결국은 그녀의 승리가 되었다. 그래서 인조반정의 공신인 서인 남인들의 등장은 권력을 농단하였고 조정은 노론들이 장악하면서 날로 부패해져 갔다.
선조가 갑자기 죽자 사자 출신이지만 오랫동안 세자 자리에 있으면서 임진왜란을 통해 분조를 이끌며 의병을 모집하고 백성들을 위로하면서 책임과 역활을 다하면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광해군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고 말년에 어렵게 얻은 핏덩이 적자 영창대군을 후계자로 삼을 요량이었지만 갑작스런 그의 죽음에 조정은 혼란하였으나 조정의 최고 어른인 인목대비의 장고 끝에 결국은 광해군이 대북파들의 지지하에 어렵사리 등극하였다.
그러나 영창대군이라는 적손이 살아 있는 한 왕권은 항상 불안하기 마련,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역모가 적발되면서 대북파는 왕권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되면 무조건 철저하게 걸림돌을 제거하였다. 그래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잔혹함이 도를 넘었다. 또 광해군은 친국을 좋아하여 직접 죄인들을 밤을 새면서 친국하는 것을 즐겼다. 그러다가 양반 가문의 서출들의 모여 시대를 한탄하며 도적, 강도질을 저지르며 여주 근방에서 노닐다가 꼬리가 잡혀 체포되어 조사하는 과정에서 사주를 받고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 영창대군을 끌여들였다. 그래서 대북파는 역모 혐의를 씌여 수많은 관련자들을 문초하고 주살시키니 옥사에는 죄인들이 넘쳐날 지경이었다. 결국 광해군과 대북파들은 '칠서의 난'을 핑계로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보내 결국 능살시키고 인목대비를 별궁에 유폐시켰으며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을 사사시켜 죽였다.
그러자 조야에서는 '폐륜군주', '폐모론' 등이 들끓기 시작하였고 특히 권력에서 쫓겨난 서인.남인들이 영합하여 복수의 칼날을 갈다가 결국 반정을 일으키니 인조반정이라! 훈련도감 장수들까지 반정군에 포섭되어 궐문이 저절로 열리고 반정군이 들이치자 광해군은 대궐을 도망쳐 민가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유배를 가니 18년의 긴 세월 동안 통한의 삶을 살다가 제주도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
멀리 북악 팔각정이 보인다
인조반정으로 등극한 인조는 대명사대를 내걸고 청나라를 오랑캐로 멸시하고 쓰러져 가던 명나라를 잊지못해 바지가랑이를 잡고 미련을 떨치지를 못했다. 결국 여진족이며 만주족인 청나라의 발흥과 침공으로 인조대에 정묘.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남한산성에서 40여 일을 버티다가 주전파.주화파가 서로 싸우는 가운데 양식이 떨어져 결국 송파 나루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머리를 땅에 '쿵쿵' 소리가 나도록 9번 박으면서 3번 절하는 치욕스런 항복을 당하고 말았다. 임진왜란에 이어 나라는 또 한 번 쑥대밭이 되었고 한양 길거리에는 죽은 양민들의 시체가 거리마다 가득하였다.
수많은 부녀자와 포로, 3학사, 소현,봉림대군이 불모로 잡혀가고 십여 년 가까이 볼모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포로를 돈을 주고 귀국시켰고 조선을 대변하였으며 서양 신부 아담 샬을 만나 신문물을 익혔고, 명.청전쟁을 관전하면서 망해가는 명나라와 발흥하는 청나라를 보았으며 조선이 살아남기 위한 새로운 개혁의 꿈을 가지고 돌아왔을 것이다.
이렇듯 국제정세와 신문물을 익히고 돌아온 소현세자가 청나라를 등에 업고 왕권을 위협한다고 우려하던 차, 소현세자가 원인을 알수 없이 갑자기 죽자 멍애를 씌워 세자비까지 사약을 내려 죽이고, 세손 아들 3명은 남쪽 섬으로 귀양보내 결국은 두 명이 죽는 잔인한 왕이었다. 만약 소현이 등극하였더라면 조선은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요즘 궁중잔혹사 드라마에서 이야기가 잘 전개되고 있으니 한번 꼭 보시라.
인조를 뒤이어 봉림대군이 등극하매 효종이더라. 북벌을 다짐하며 허리띠를 졸랐으나 전쟁은 유신들에게 가장 하기 싫은 임무이니 효종을 이리치고 저리치고 하여 북벌의 실행을 이루지도 못하고 영민하니 북벌의 꿈도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일명 '김신조 루트'로 기는 길목에는 호경암이라 불리는 곳에 난 총탄자국
숙종의 치세는 환국정치로 대표된다. 장희빈, 숙빈 최씨, 노론과 남인, 인현왕후 등 숙종의 환국정치 과정에서 부침을 거듭한 사람들이다. 숙종은 환국정치로 조정을 휘어잡고 왕권을 강화한 군주였다. 그리고 그에 따라 자신의 부인도 갈아치우는 비정함을 보인 대표적인 군주다. 그래서 인현왕후가 역사에 이름이 남고 희빈 장씨가 이름이 남았다. 숙빈 최씨는 지난번 동의라는 드라마에서 잘 나와 잇듯이 북촌 김춘택이란 자와 염문이 있었고 나중에는 그녀가 숙종의 후궁이 되어 영조를 낳았다. 드라마에서 나오지만 숙빈 최씨는 매우 영민했더 모양이다. 인현왕후와 장희빈, 노론과 남인들 간에 싸움에서 자신을 지켰고 영조를 낳아 후일 왕통을 잇게 만든 여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후궁 출신 어머니에서 태어난 영조는 평생을 그것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요즘 희빈 장씨에 대한 드라마가 다시 방영되고 있다.
영.정조 시대의 태평성대는 문화융성을 극대화하였고 당평책을 사용하여 당파싸움을 없애려 하였으나 그것도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영조가 세자에 대해 숨을 쉴수 없도록 단련시키자 그 억압을 참지 못하고 미친척 하였더니 노론들의 탄핵이 이어지자 결국 뒤주속에 가둬 죽이니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잔인함에 백성들은 치를 떨었을 것이다. 영조는 숙종과 숙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 숙빈 최씨의 과거 행적을 문제삼아 정통성에 시비를 걸며 남도에서 이인좌가 난을 일으키니 영조는 대노하였디. 그래서 다행히 난이 평정되자 영조는 자신의 정통성에 대해서 챡을 저술하게 하는 등 출신의 비천함이 평생을 영조의 마음 속에서 떠나지 못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은 어린 정조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을 것이고 영조가 승하하지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왕위에 즉위한 정조는 한많은 세월을 청산하려고 몸부림쳤고 그것을 개혁이라는 미명아래 개혁의 고삐를 당겼으나 결실을 보지 못하고 갑자기 죽으니 개혁에 대한 그의 꿈도 연기처럼 사라졌다. 드라마 '이산'은 정조에 대한 이야기다.
흩어진 총탄 자국을 볼 때 당시 어둠 속에서 바위를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한 듯하다
그냥 재미삼아 조선 왕 27명에 대해서 점수를 매겨보자.(아래는 한 네티즌의 글로 용어의 투박함을 이해하시기 바란다)
1등은 당연히 세종(4대)이다. 점수는 95점을 주자. 왕으로서 더 이상 잘할 수 없었으나 후계 문제를 소홀히 했다. 세종이 세상을 뜬지 겨우 5년 후 둘째 아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고 왕실의 장손인 단종을 죽였으며, 두 동생 안평과 금성대군을 죽였다.
2등은 정조(22대)다. 정조의 점수는 85점 정도다. 정조는 참으로 괜찮은 호학군주이자 개혁군주였으나, 개혁의 속도가 너무느렸고 과감하지 못해 기대 만큼 성과가 없었다. 물론 노론 정국에다가, 정조 자신이 보소주의자였던 것이 한계였다. 그 다음이 광해군(15대)을 꼽아야 할 것 같다. 인조반정에 성공하여 광해군을 내쫓은 서인들이 쓴 <광해군일기>는 대부분 소설이다. 광해군은 외치와 내치에 괜찮은 성과를 이루었으나, 실정도 좀 있었다. 그의 점수는 75점쯤 된다.
호경암에서 남마루-계곡마루-서마루로 가는 길, 짝쿵이 야생화를 바라보며 이뻐하고 있다
다음은 태종(3대)과 효종(17대)으로 비슷할 것이다. 태종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굳혔고, 세종을 낳았다. 그게 큰 업적이다. 효종은 무기력한 조선에 진취성을 불어넣은 몇 안되는 군주였으나, 명이 짧았다. 둘 다 70~75점쯤 된다. 다음 순서가 세조(7대), 영조(21대), 성종(9대), 숙종(19대)순이 될 것이다. 이 인물들은 겨우 밥값이나 죽값을 했으니, 한 60~65점쯤 정도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조리 깡통이다.
조선의 27대 왕 중 전기의 절반인 14대 왕 가운데서 정상적인 과정을 거쳐 왕위에 오른 인물은 문종(5대), 단종(6대), 예종(8대), 연산군(10대) 등 4명 뿐이다. 그 중 문종과 예종은 일찍 죽었고 단종과 연산군은 신하들에 의하여 왕위에서 쫓겨났다. 초대부터 14대까지 정상적인 절차로 국왕에 올라 통치를 한 인물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보통 왕실에서는 세자가 9~12세 정도가 되면 혼인을 시켰다. 열 한 살에 자식을 보고 스물 다섯에 할아버지가 되었던 예종같은 왕도 있었다. 세자비는 또래거나 대개 몇 살이 더 많았다. 그런데 이런 꼬맹이들을 한방에 집어넣으니, 처음에는 뭘 모르다가 나중에는 가르쳐 주지도 않아도 알게 된다. 이렇게 해서 세손이 태어나는데, 애들끼리 섹스해서 태어난 애가 정상일 리가 없었고 대부분 미숙아일 수밖에 없엇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 왕 중에서 장자가 별로 없고 똑똑한 장자는 드물다.
조선이 1392년 개국하고 1910년에 망했으니, 존속 연대가 518년 정도인데(허수아비 대한제국 포함), 그 중 중종(11대), 선조(14대)가 80년(명종 포함시 100년), 숙종(19대), 영조(21대) 부자가 98년을 재위하여, 4명의 왕이 거의 200년 가까이 재위했다. 명,청나라가 존손 기간이 250~260년 정도인 것을 보면, 200년 정도는 거의 한 왕조가 창업하여 멸망할 만한 기간이다. 그런데 조선의 4명의 왕이 200년 가까이 재위했으니 얼뜨기 중종, 소인배 선조, 죽값 겨우한 숙종을 빼면 영조가 51년이나 재위하면서 그나마 겨우 밥값을 했으니, 그 나라가 되어가는 꼴은 안봐도 감 잡을 것이다.
조선이 융성하던 시기는 개국 후 약 100년, 연산군이 쫓겨나기까지이다. 중종이 들어서면서 쇠퇴를 시작하였고 마마보이 명종과 소인배 선조를 거치면서 그 기간 100년 동안 조선은 완전히 주저앉고 말았다.
조선이 초기에 융성하게 된 이유는 바로 세종 덕분이었다. 대개 나라가 개국하면 그 나라의 흥망은 3~4대 왕 사이에서 결정된다.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는 좀 잔인하기는 했지만 명조에서 가장 영명한 황제로 손꼽을 수 있다. 또 청나라 4대 황제는 청나라 황제 중 가장 뛰어난 강희제였다. 조선에서도 다행히 4대째 왕이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왕이었던 세종이었기 때문에 개국 후 100년간 유례없는 융성을 누렸던 것이다.
그러나 첯 번째 쿠테타로 중종이 들어서면서 융성기는 끝나고 만다. 그것은 반정으로 신권이 왕권을 누르면서 부패해졌고 나라가 절단나는 현상이 초래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쿠테타는 더 어이가 없다. 멀쩡한 광해군이 일 좀 하려고 하는데 썩어빠진 관료 패거리들이 쿠테타를 일으켜 광해군을 내쫓았다. 그리고 무능하기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조가 들어서면서 조선의 희망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원래 최고 통치자가 힘이 약해지면 힘이 강한 신하들이나 장관, 그리고 인친척, 하급 관료, 혈연, 학연, 지연 인맥들이 권력을 휘두르며 부패해지기 때문이다.
조선은 두 번의 반정으로 망한 것이나 진배없을 것이다. 정조대에 병세가 약간 회복 기미를 보였으나 골수에 미친 병을 치유하기에는 너무 약발이 약했다. 멸망 직전 대개혁가인 대원군 시대가 잠깐 있었으나 10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인데다가 이미 너무 늦어서, 그저 절벽에서 굴러 떨어지다가 중간에 돋아난 나무에 걸려 잠시 한숨 돌린 후 그냥 나락으로 추락하고만 것과 마찬가지였다. 조선은 정조 이후 안동 김씨 떼거리들의 썩은 세도정치와, 대원군 몰락 이후 민비의 후원을 등에 업은 민씨 떨거지들의 더 썩은 척족정치가 합하여 80년이나 되는 바람에 망한 것이다. 80년이면 절대로 짧은 세월이 아니다. 조선의 병을 치유하고도 남을 기간이 될 것이다.
멀리 북악산과 서울 성곽이 보인다
그런데 80년 세월이 지나고 나니 조선은 썩어도 너무 썩어 하느님이 치세를 해도 살릴 수가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두 집안이 싹싹 긁어대는 바람에 조선의 백성들은 모조리 거지 새끼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초기 100년 광해군 10년, 효종 10년, 정조 약 20년 합하여 150년간 존재의 의미가 있었던 기간이었고 나머지 350년은 무능한 인간들이 등장하여 치세했으니 조선의 백성들의 삶은 말할 수 없이 참혹했던 것이다. 명나라가 당쟁과 환관들의 횡포로 망했듯이 조선도 외척세력과 척족세력들로 인해 매관매직, 탐관 등 부패가 극을 달렸고 양반들과 공허한 명분론에 치우친 유교패습 때문에 멸망하였던 것이다.
-------------------------------------------------------------------------------------------------------------------
대략 조선의 노래는 이것으로 끝을 맺는다.
아! 돌아보면 한숨이요 생각하면 치욕이요 백성을 바라보면 분노로 얼룩지는 세월이었다. 500년을 끈질기게 이어온 이씨 왕조. 망하고도 남을 기회가 여러번 있었지만 운 좋게도 버티며 지내왔다. 어디 이 세상에 이런 나라가 또 있었을까? 모든 치욕을 감수하면서도 백성들을 내팽개치더라도 왕족과 지도층은 호의호식하면서 양반 사대부들만을 위한 나라였던 것이다. 인간이란 재물이나 권력이나 가지면 가질수록 더많은 것을 갖고 싶어하는 동물이라, 그 처참한 피비린내는 500년 내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망국의 길을 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의 마지막 연기자들은 흥선대원군, 민비와 고종이었다. 그기에 을사오적과 수많은 친일파들이 무대를 장식하였다.
민족의 참담한 비극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일제가 조선을 삼키고 36년간 침탈하고 태평양 전쟁에서 패하자 한반도에는 소련.미국이라는 초강대국들이 일본군 무장해제를 빌미로 남북으로 점령하였다. 하필이면 북한 지역의 일본군 17사단이 만주의 관동군으로 배속이 변경되는 바람에 북한 지역이 관동군 무장해제를 책임진 소련군의 무장해제 대상 지역이 되었다. 만약 그 당시 일본군의 편제를 변경만 하지 않았더라면 한반도는 미군의 무장해제 지역이 되었을 것이며 김일성이 북한에서 소련의 위성국이며 꼭두각시 괴뢰 정권을 세우지도 못했을 것이다. 당시 소련군 대위로 근무하던 젊은 김일성은 참으로 운이 좋았던 인물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남의 봄 10 : 북악의 봄, 북악 둘레길을 걷다 (0) | 2013.05.22 |
---|---|
한국의 역사 918 : 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 23 (0) | 2013.05.21 |
한국의 역사 917 : 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 22 (0) | 2013.05.18 |
한국의 역사 916 : 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 21 (0) | 2013.05.16 |
한국의 역사 915 : 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 20 (0) | 2013.05.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