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강남의 봄 1 : 바람따라 세월따라, 한민족의 서사시......1 본문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남의 봄 1 : 바람따라 세월따라, 한민족의 서사시......1

두바퀴인생 2013. 4. 1. 08:17

 

 

 

강남의 봄 1 : 바람따라 세월따라, 한민족의 서사시......1

 

                                                                봄은 이 대지에도 어김없이 찿아오고 있다. 고개내민 꽃망울......

 

 

지난 겨울은 눈도 많이 내렸고 기온도 급강하 하여 추운 날씨도 많았다. 염화칼슘이 동이나고 소금까지도 구입하여 사용하는 바람에 소금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래서 폭설이 연속해서 내리는 날에는 염화칼슘이 부족하여 뿌리지를 못하였다고 한다.

 

그로인해 아스팔트 도로가 군데군데 파이고 차량이 부식되고 도로 주변 가로수들이 말라죽고 있다고 한다. 재설작업 방법이 그것 뿐일까? 안이하고 편리한 생각으로 대처하는 우리나라 공무원들의 자화상이다.

 

서울에는 비탈길 동네가 많다. 밤새 눈이 내리는 날에는 비탈길에서 넘어지고 다치고 차량이 미끄러져 부딪히고 사상자가 발생하고 차가 비탈길을 올라가지 못하여 헛바퀴를 돌고 사고가 반빌하였다. 그래서 비탈길 가옥은 매매가가 비교적 낮다.

 

낮은 지역도 마찬가지다. 폭우가 내리면 갑자기 급류가 발생하여 도로를 타고 흘러내리다가 지하주차장이나 지하 단칸방으로 밀려들어 침수되어 온 가구를 못쓰게 된 경우가 많다. 지난번 우면산 산사태 발생시 방배역 근방 동네는 비교적 높은 지역이지만 이수역까지 우면산에서 남부순환도로를 타고 흘러 내린 폭우와 흙탕물로 지하층은 대부분 아수라장이 되었다. 일부 포장을 다시하면서 물길을 돌리기 위해 턱을 만들고 수막문을 설치하고 하였으나 이런 곳은 폭우가 내릴 때면 항상 불안에 떨고 있다.

 

 

 

                                                                                           몽마르뜨 공원 산책로

 

며칠 전에는  기온도 오르고 날씨가 따뜻하여 봄바람도 쐬일겸 마누라와 같이 몽마르뜨 공원을 올라 능선을 타고 정보사 뒷편- 용수산-대법원 뒷편- 서리풀 공원-서초경찰서 뒷편- 누에다리를 지나 강남성모병원 뒤를 돌아 고속터미널까지 산책을 하였다. 

 

 

 

                                                                               같이 산책한다고 기분이 업 된 마누라

 

                                        마눌께서 무언가 생각하는, 누굴 기다리는 듯한 모습으로, 벤치에서 한 컷......시키는대로 잘했다.

 

우리집 뒷 쪽으로 올라가면 고급빌라와 산정현 교회, 그리고 고급 현대빌라 뒷편에는 비닐 하우스 동네인 산청 마을이 있다. 1988년도 쯤에는 이 일대가 집이 드문드문 있었고 비닐 하우스가 많았다. 산청마을은 그 당시부터 무허가 건물 동네로 무단점령하여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얼마전에는 불이나 일부가 전소되었으나 서초구청과 교회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안정을 찿았다. 아마 서초구청에서는 골치가 아픈 곳일게다. 지금은 그동안 거주자가 점점 불어나 마을을 이루었고 다른곳에 집을 갖고 있으면서 이 곳에 거주지를 두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듣기로는 교회에 열심히 나가는 분식집 사장님도 이곳에 몇 채를 갖고 있다고 들었다. 집이 없어 기거하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딱지를 받을 욕심으로 거주하며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 비양심적인 사람들이다.

 

산청마을을 지나 고개를 올라가면 바로 방배동 이수역 방향으로 넘어가는 소로길이 나 있다. 소로길 정상에서 좌측으로 300미터 쯤 가면 효령대군이 묻혀 있는 청권사가 나온다. 우측으로는 정보사 뒷산을 지나 산길로 500미터쯤 가면 대법원 뒷쪽에 있는 비싸기로 유명한 용수산 음식점이 나온다. 용수산 앞 도로 위로 육교가 만들어져 있고 대법원 뒤를 경유하여 서초경찰서 방향으로 가면 여기서부터는 서리풀 공원이다. 

 

 

 

                                                                                              진달래 꽃망울

 

이미 남쪽에는 봄 꽃들이 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아직 꽃망울이 곧 피어날 기세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대지에 녹아내린 열기를 빨아올리며 나무들이 물기를 품고 성질급한 목련, 진달래, 매화, 벗꽃들이 꽃망울을 터트릴 준비를 하고 있다. 땅바닥에서는 쑥을 비롯한 각종 잡초들이 힘차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 

 

지난 토요일 새벽 사당역 일대는 산행을 가는 차량들인 버스들이 길 옆에 군데군데 서 있고 베낭을 맨 남녀들이 사당 지하철역 출입구 일대에서 서성이며 동료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버스 근방에는 총무로 보이는 중년 남자들이 눈을 번떡이며 담배를 꼬아물고 휴대폰을 연신 통화하면서 회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봄을 찿아 떠나는 산행이 줄을 이을 것이다. 요즘은 미혼, 이혼 등으로 독신자들이 늘어나는 추세이니 휴일이면 이런 산행이나 모임에 나가는 사람들이 늘어날 전망이다. 건전하고 보람있는 산행이나 모임이 되면 좋겠으나 일부는 불륜, 사기, 강매, 묻지마 관광 같은 행태도 줄지 않고 늘어날 것이다. 가족을 팽개치고 떠나는 심정을 누가 알리요마는 우리들 인생이 다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는 어쩌면 인생이 허상을 보고 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간판을 보고 상가를 찿아가듯이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고 혹한다면 그 사람은 헛껍데기를 보고 미치는 것이니 상대에게 속고 배신당하고 사기당하는 것이다. 여자는 미인에다 옷 잘 입고 날씬한 몸매로 나타나면 남자들에게 대접받고, 남자는 잘생기면 좋지만 우선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 능력은 바로 재력이다. 그 재력이 비리와 부패, 도적질, 사기, 로또, 연금복권 등 어떻게 모아졌는지를 묻지 않는다. 오로지 그 재력을 이용하여 자신이 왕비처럼 살 수 있게 투자하는 남자를 좋아하며 그렇게 바라는 것이 여자들이다. 그래서 능력없는 남자는 아무리 잘생겨도 하룻밤 정도는 몰라도 여자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결국은 단물 모두 빨아먹고 떠나는 것이지만......

 

 

 

 

북한 김정은이는 지금 불안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또 한편 북한 사회를 다잡을 좋은 호기로 생각하고 전 인민과 군대를 전쟁 일보전까지 몰고 가고 있다. 누구나 군대생활 전 기간을 통해 어느 한 해 적의 도발을 강조하지 않은 적이 없듯이 지금 북한은 불안하기 짝 없을 것이다. 한미군이 합동작전을 벌이며 훈련을 하고  B-52 폭격기가 날아오고 가공할 위략을 가진 스텔스기가 미 본토에서 날아와 한반도에 폭탄 투하훈련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북의 침공에 대비한 방어 훈련이지만 그들이 볼 때는 북침 훈련으로 간주한다. 북한에는 소련군이나 중공군이 없다. 그러나 남한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한.미군이 언제 북침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가 불안에 떨고 있다. 우리는 북한의 핵위협과 재래식의 정규.비정규 전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고 미국은 북한의 핵무장에 대해서 강하게 거부감을 갖고 있다. 북한이 핵무장을 한다는 것은 미국에 대한 위협보다 동북아의 군비경쟁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한국과 일본의 핵무장을 뜻한다.

 

이렇게 북한의 핵무장이 급진되고 있는 와중에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한국과 인접국 일본의 핵무장을 미국은 왜 반대하고 있을까? 미사일 사거리 제한과 원자력 협정 개정을 거부하는 이유와 상통한다. 즉 미국의 환태평양 방어선에는 한국이 최전선에 위치하고 있으며 일본은 주방어선이다. 미국이 한.일간의 독도 분쟁에는 신경도 쓰지 않지만 중.일간에 벌어지고 있는 센가쿠 열도 분쟁에는 일본에 동조하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고, 중국과 베트남, 필리핀 등과 벌이고 있는 남지나해 영유권 분쟁에도 적극적이다. 베트남은 중국과 전쟁도 불사하겠다며 동원령도 내리고 거세게 항의하고 있다. 그것은 미.중간에 주도권 경쟁과 영역 다툼인 강대국들의 지배논리와 그들의 국가 이익과 결부된다고 본다.

 

 

 

 

 

 

이러한 북한의 핵위협이 날로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오는 5월에 개최될 한·미 정상회담이 계획되어 있다. 박근혜 정부와 오바마 2기 행정부가 출범한 뒤 정상 간 첫 만남이라는 점에서 양국관계 설정의 분기점이 되리라고 여겨진다. 북핵 공동대응, 상호교역 증대, 방위비 분담 등의 현안이 산적해 있지만 그중에서도 원자력협정 개정은 시급성을 다투는 핵심 이슈다. 원자력협정이 어떻게 개정되느냐에 앞으로 양국 관계 5년이 달려 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체결된 지 39년이 지난 한·미 원자력협정은 시대 여건에 뒤처져 있을 뿐 아니라 체결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최초 원전인 고리 1호기를 건설 중인 걸음마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무려 원전 23기를 운영하는 세계 5위 원전 강국이자 수출국이다. 그런데도 저농축우라늄 생산과 재처리 권한을 갖지 못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은 불평등 조약에 준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국제 현실과 원자력 산업을 감안하면 저농축우라늄 생산과 재처리는 당연한 권리라고 할 것이다. 우리 정부가 절충안으로 제시한 파이로 프로세싱(건식처리공법)을 검증되지 않았다고 폄하할 일은 아니다. 일본에는 재처리를 허용하고, 유엔이 이란에 우라늄 농축시설을 공동 운영하자고 제안한 점에 비춰 우리에게만 골드 스탠더드를 요구하는 것은 형평성에도 맞지 않는다고 본다.

 

원자력발전소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용후핵연료의 저장용량은 2016년이면 포화상태에 이른다. 매년 700t씩 쏟아져 나오는 사용후핵연료를 저장할 공간이 사라지면 원전을 세워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새로 원전을 건설하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하고 우리의 전기사정은 한계상황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핵연료를 공급하려면 우라늄을 농축하는 권한도 반드시 필요하다. 핵무기 원료로 전용될 가능성이 적은 저농축우라늄을 생산하고 재처리 권한을 갖도록 협정을 시급히 고쳐야 하는 이유다.

우리에겐 재처리 권한을 갖도록 협정을 개정하는 일이 발등의 불이지만 미국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미국은 원자력협정을 개정할 때 농축과 재처리 권한을 포기하는 ‘골드 스탠더드’(황금기준)가 명시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는 지금 운용 중인 원자력협정보다 한참 후퇴하는 셈이다. 미국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재처리를 핵무장과 동일시하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원자력 협정은 반드시 개정되어야 하고 미국은 원자력협정 개정에 전향적인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다. 

 

 

 

 

 

새 정부가 들어서서 정부조직법이 겨우 합의되었다고 한다. 여야가 건실한 견제 기능과 균형, 감시 기능은 민주주의 장점이기도 하다.

 

 인류 사회에 민주주의가 태어난 그리스 시대부터 최초로 시작되어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온 것으로 지배자 위주의 권력에서 민중 위주의 권력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데, 이는 봉건적 독재가 가져오는 폐해를 인류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체험적으로 그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너무나 험난하였다. 수많은 피를 흘려야 했고 장구한 세월을 통해 발전되어 온 것이다.

 

서구의 민중들은 수많은 세월을 통해 자유를 쟁취하였다. 봉건지배 시절 서방 세계가 저지른 만행은 우리는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스페인, 포르투칼 제국이 남미에서 저지른 만행, 영국, 프랑스, 독일, 네들란드 등의 서구 국가들이 식민지배 역사를 보면 우리를 경악하게 만든다. 아프리카에서 저지른 그들은 만행, 중동, 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저지른 만행은 우리들에게 잘 알려지지도 않았지만 서구의 역사 왜곡으로 대부분 감추어지거나 은폐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인류가 기억하기를 꺼린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이 지배하던 곳의 백성들은 조선과 마찬가지로 노예처럼 살았다. 그러나 그들도 자체적으로 부패하고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였고 그래서 오늘에 이르렀다.   

 

 

 

  

 

  

비가 그치고 햋빛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비가 내리는 것도 고맙지만 햋빛이 비치는 것도 고마운 일이다. 비만 내린다면 열대우림이 될 것이요 비가 내리지 않고 햋빛만 비친다면 사막이 될 것이다.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자연의 변화에 따라 봄이 올 것을 알고 있기에 추운 겨울도 인내하고 지낸다.

 

젊음은 미래가 있기에 봄이 올 것을 기대하고 삶이 힘차고 열정적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인생에 있어서 모두 봄이 오는 것은 아니다. 잘 나가던 인생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것은 주체할 수 없는 탐욕의 유혹을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남한강변 자본주의의 극치를 달리는 별장에서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여성들과 광란의 밤을 보내던 사실이 드러났다. 언론은 경쟁적으로 집단 혼음, 매춘, 성상납, 물뽕 등 별의별 추측이 난무하고 사람들은 모두가 그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동영상 내용이 어떤지 궁금해하고 있다. 그러면서 혀를 차고 손가락질을 하지만 그것은 우리들 자신에게 하는 손가락질인지 모른다. 남이 하면 불륜이요 자신이 하면 로멘스라 하지 않는가?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지랴 ? 우리들 마음 한구석에는 그들이 부럽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이 서글퍼지는 것은 아닐까?

 

인간은 대부분 권력과 부를 향유하다보면 부패해지고 타락에 빠지는 것이 순서다. 역사를 보면 수많은 왕조가 망하고 나라가 망하는 것이 대부분 이러한 지도층의 부패와 타락이 대부분이 원인으로 작용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한반도는 사계절이 뚜렷하고 땅이 비옥하며 산이 수려하고 강이 완만하게 흘러 주변 평야를 촉촉히 적셔주고 지나간다. 구석기 시대부터 한반도는 다른 나라보다 많은 인류들이 살았던 흔적인 고인돌이 전국 곳곳에 남아 있다. 그들은 북방에서 남으로 내려가 한반도 곳곳에 기거하면서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울산 지역 수장 직전인 귀중한 유물인 반구대 벽화를 보면 한반도에는 공룡을 포함한 각종 동물들이 많이 살았고 바다에서 고래사냥도 활발하였다. 한반도 동해는 고래들의 천국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모여 촌락을 이루었고 서로 식량을 탈취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면서 흡수되고 합병되면서 성장했다.

 

고구려.백제는 예맥족인 부여에서 분리되어 주몽이 고구려란 나라를 세웠고 주몽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가 남으로 내려가 백제를 세운 혈통이 같은 한민족이다. 가야와 신라는 북방의 유목민족인 흉노족의 후예인 김수로, 김알지 등이 배를 타고 내려와서 김수로는 기존 세력을 누르고 흡수하여 나라를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고 김일지는 신라 사회에 정착하여 지배층에 올라 신라를 지배하게 된다.

 

한반도의 사계절은 인간이 정착하여 살기 좋은 기후와 땅으로 봄이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오곡이 영글고 가을이면 추수하고 주변 만물을 만들어 주신 신들과 조상들께 감사하며 제사를 올리고 같이 축제를 즐기며 가을을 보냈다. 흰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이면 군불 땐 따뜻한 방안에서 온 가족이 오손도손 모여 앉아 이불 속에 벌을 낳고 둘러 앉아 엣날 이야기 꽃을 피우며 가족들이 같이 긴긴 밤을 보내면서 겨울을 지냈다. 다시 봄이 오면 따스한 봄바람이 불면 들에 나가 논과 밭을 갈며 씨를 뿌리고 다가올 가을을 기약했다. 

 

이처럼 살기는 좋은 땅이지만 지나온 5천 년의 역사는 영광스런 역사로는 고구려의 대수.대당전쟁, 백제의 대륙경영, 신라의 대당전쟁, 고려의 거란 침공 격퇴와 대몽항쟁, 조선의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의 해전과 왜란 3대첩, 그리고 의병들의 승전 정도이지만 대부분은 비참하고 돌이켜 보고 싶지 않은 치욕스런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바람같은 인생, 세월의 역사, 우리 한민족의 장구한 역사의 서사시를 흥얼거려 보고자 한다.

 

 

 

 

왕검성의 망향가, 고조선의 눈물...

 

구.신석기 시대를 지나면서 기원전 2333년 무진년 청동기 문화를 꽃피우며 평화롭고 행복했던 부족들이 아사달인지 평양인지 기록이 없어 정확하게 알수는 없으나 이 곳에 모여 제사장 단군이 나라를 세운 것이 바로 고조선이요, 단군은 1000여 년 동안 고조선을 다스리다가 기원전 1122년경 기묘년에 상나라가 주 무왕에게 멸망당하자 상나라 왕족 기자가 무리 5천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망명하여 오자, 조선의 군주 단군은 기자에게 왕위를 내주고 장당경으로 들어가 아사달에서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좀 황당하다. 당시 단군이 통치하던 고조선의 강역은 평양 일대를 중심으로 한반도 북부설, 요동 일대를 중심으로 요동반도와 한반도 북부설, 또 일부는 난하-요서설로 요서 일대가 강역이라고 주장하는 등 여러 설이 있다. 토기와 비파형동검 유물 등으로 판단해 볼 때 라오닝성과 한반도 북부설이 유력하다.

 

기자는 평양에 도읍을 두고 8조 금법을 베풀어 나라를 다스렸다. 정전제를 실시하고 농사와 누에치는 법을 가르쳤다. 이후 구체적인 역사는 없으나 기록에 의하면 기자조선은 기원전 323년경 연나라와 외교적 마찰을 일으켰고, 기원전 300년경 연나라 진개에게 서쪽 영토 2천여 리를 빼앗기고 만번한을 경계로 하면서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기원전 214년에는 진나라 장수 몽염이 만리장성을 쌓자 당시 기자조선의 왕 부는 진나라에 복속하였다. 부는 기자의 40세 손이다.

 

부의 아들 준은 기원전 194년 중원이 혼란한 가운데 수많은 유민들을 받아들이면서 한나라에서 망명해 온 위만에게 왕위를 찬탈당하자 기자조선은 멸망하고 말았다. 그래서 위만에 의해 위만조선이 성립되었다.

 

기원전 109년 전한 무제는 육군 5만, 수군 7천을 이끌고 위만조선을 침공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위만조선은 내부분열이 일어났고 우거왕이 살해되고 왕자 장이 투항하였다. 대신 성기가 성안에서 백성들을 독려하여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기원전 108년 결국 왕검성이 함락되면서 고조선의 명맥은 멸망하고 말았다. 그 자리에는 낙랑.대방.현도.진번의 한사군이 설치되었고 많은 고조선인들이 남쪽으로 이주하여 만주와 한반도에 삼한 사회를 이루는데 기초가 되었다.

 

그래서 고조선의 찬란했던 장구한 역사도 한나라 무제의 침략으로 어이없이 무너져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은 한사군의 노예가 되어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왕검성이 어디메며 고조선의 고토가 어디메냐? 고조선의 혈통이 중국이냐 조선이냐? 서로 섞이고 아우러져 문화를 이루고 살면서 고유한 풍습과 전통은 어디로 갔느냐? 찬란하던 고조선의 문명도 중국의 황하문명보다 더 뛰어났거늘, 오늘날 그 누가 고조선의 찬란했던 문화를 되찿을 것이냐?

 

기자도 중국인이요, 위만도 중국인이니 우리 조선인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고조선인들은 만주 동북부와 한반도 북부 및 남부로 이주하여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으니 그들은 바로 예맥족이라는 이름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세운 조상들이니 바로 한국인들의 조상이니라.

 

 

 

 

 

예맥(濊貊)은 숙신(肅愼), 동호(東胡)와 함께 고대 중국의 동북부와 한반도 북부 지역에 거주한 민족으로, 일명 맥(貊·貉) 혹은 예(濊·穢·薉)로도 불렸다. 예맥족은 기원전 126년 이후 압록강두만강 유역은 물론 한반도의 동부 및 중부에 정착했다. 고구려.백제의 뿌리가 되는 민족이며 현재는 한국인의 조상이자 한국인에 해당한다.

 

예맥은 원주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기원전 2 ~ 3세기경에 남쪽으로부터 한족(漢族), 서쪽으로부터 유목민의 압박을 피해, 지금의 만주 동부에서 한반도의 동부·중부에 걸쳐 정착한 듯하다. 예맥족은 옛날 숙신(肅愼)동호(東胡) 사이에 개재(介在)하여 송화강·흑룡강·압록강 등의 유역과 함경·강원도 지방에 걸쳐 활동한 대민족으로 역사상 부여·고구려·예맥·옥저 등으로 부르는 여러 족속을 포괄한다.

 

예족은 호랑이에게 제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곽박의 《爾雅(이아)》, 《니혼쇼키》 등을 근거로 '맥(貊)'이 곰을 의미했고, 예족과 맥족의 관계가 단군신화에 반영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로부터 단군신화(檀君神話)에는 하늘과 태양을 숭배하는 천신족(天神族)이 곰을 부족의 상징으로 하는 맥족(貊族)과 호랑이를 부족의 상징으로 하는 예족(濊族)을 평정하고 복속시키는 사실을 설화로서 전해주는 신화(神話)로 남아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한편, 고조선이 전한 무제에게 멸망하기 이전 기원전 2세기부터 지금의 쑹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지금의 만주 일대(하얼빈, 아청, 위수, 눙안, 창춘, 솽양, 지린, 옌지, 훈춘, 치치하얼, 룽장)를 지배하는 나라가 나타났으니 바로 부여라,

 

 

 

 

 

 

 

 

부여(기원전 2세기~494년)는 삼국시대 한국의 고대국가로 초기 국가(연맹 왕국)들 중에 하나로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로부터 기원한 국가로 추정된다.

 

기원전 2세기경부터 500여 년간 예맥계의 부여족(夫餘族)이 세우니 일명 북부여라. 현재의 북만주 농안(農安)·장춘(長春) 일대에 웅거하여 동은 읍루(挹婁), 남은 고구려현도군, 서는 선비(鮮卑), 오환(烏桓)과 인접하였다. 농안 지역은 소위 동이(東夷)들의 주지(主地) 속에서는 가장 평야가 넓은 곳이었다.

 

이들은 일찍부터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하였고, 은력(殷曆, 은나라 역법)을 사용하였으며, 궁궐·성책·창고·감옥 등 진보된 제도와 조직을 가졌었다. 신분계급은 왕과 그 밑에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猪加)·구가(狗加) 등 4가(四加)와 대사(大使)·사자(使者) 등의 지배층, 그 밑에 하호(下戶)라고 불리던 농노·노예로 구성된 피지배 계급의 둘로 나뉘었다. 이른바 4가는 부여 전국을 4등분한 사출도(四出道)를 각기 맡아 다스렸는데, 국도(國都)만은 왕의 직접 지배하에 있었던 것 같다. 즉 4가는 국왕의 통솔을 받지만, 4출도에서 각기 소속의 호족과 하호들을 영솔해 마치 영주(領主)와 영읍(領邑)의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적의 침구가 있을 때는 4가가 친히 출전하고, 하호는 모두 군량을 부담했는데, 특히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가 실시된 듯 집집이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한다. 인접 고구려와 자주 투쟁이 있었으나 원래 그들은 경제적으로 호조건을 구비하였기 때문에 평화를 사랑했다. 기원후 49년 부여는 중국에 사신을 보내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혼인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추수 후 음력 12월에는 영고(迎鼓 : 맞이굿)라는 제천의식(祭天儀式)이 있었으며, 형법(刑法)은 아주 준엄하여 살인·간음·부녀의 투기 등에 대하여 극형에 처했다. 특히 간음과 투기자는 그 시체를 산에 갖다 버릴 정도로 혐오했다. 일부다처·축첩·순장(殉葬) 등의 풍습이 있었으며, 백의(白衣)를 숭상하였다. 이는 역시 한민족의 현재의 풍습에서도 많이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또 때와 곳을 가리지 않고, 항시 노래 부르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명산물(名山物)로는 말·적옥(赤玉)·미주(美珠) 등과 모피가 있었다. 부여에서는 전쟁이 있을 때 제천의식을 행하고 소의 발굽으로 길(吉)·흉(凶)을 점치는 우제점법(牛蹄占法)이 행해졌다.

 

해부루왕(解夫婁王) 때 재상 아란불(阿蘭弗)의 권고를 받아들여 가섭원(迦葉原)으로 서울을 옮긴 뒤부터 동부여라 하였다. 위(魏)의 고구려 정벌에 부여는 군량을 제공하였고, 부여가 선비족의 침입으로 위태로울 때 진(晋)은 부여를 재흥케 하였다. 그러나 진의 세력이 북방 민족에게 쫓겨져 남쪽으로 천도하면서 부여는 국제적인 고립상태에 빠졌다. 285년(고구려 서천왕 16년) 선비 모용외(鮮卑 慕容廆)에게 공격을 받아 옥저로 도망하였다가 후에 다시 본국을 회복하기는 하였으나, 346년 연왕(燕王) 모용황(慕容皝)에게 멸망했으며, 그 후 이 국토는 고구려의 판도가 되고 말았다.

 

                                           

 

북부여의 기원 

오늘날 부여가 처음으로 확인되는 사서는 《사기》이니, 《사기》에서 열전 화식편 오씨과(烏氏倮)조에 진시황 때 오씨현 상인 과(倮)와 거래하던 상인 가운데 부여 사람이 나온다. 그리고 식화열전(食貨列傳)에서 “이 북으로 오환과 부여에 접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부여는 고조선기원전 108년에 망하기 이전, 적어도 기원전 3세기부터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는 부여의 영역을 “(장성 이북의) 현도 북쪽 천 리에 있다. 남으로 고구려와 접하고, 동으로 읍루, 서로 선비, 북으로 약수(弱水)-약수를 헤이룽강으로 보기도 한다-에 접한다”라고 적고 있다. 이에 따라 부여의 영토는 지금의 창춘시 이퉁강 유역을 중심으로 솽양과 남쪽으로는 랴오닝성 지방, 북쪽으로는 헤이룽강(하얼빈)에 이르렀을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사기》에는 부여의 역사가 해부루왕부터 등장하는데, 솽양에서 재상 아란불의 꿈에 천제가 나타나 해부루왕을 가섭원으로 옮겨가게 하고, 해모수가 천제의 아들이라 칭하며 북부여(北夫餘)를 건국해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쓰여 있다.

 

삼국유사》에는 해모수기원전 59년 북부여를 건국하였으며, 그에게는 첫 번째 아내로부터 얻은 해부루라는 아들과 하백의 딸 유화로부터 얻은 주몽이라는 아들이 있었다고 전한다.

 

신화적 요소를 배제하고 추측한다면, 원래 부여가 있었고 거기서 독립해 나온 집단이 동부여를 건국했다는 것, 그리고 북부여라는 명칭은 그와 상대되는 개념으로 원래 부여에 붙인 이름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혹은 이때의 하얼빈 지역에서 해모수가 신진 집단으로 원래의 부여족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여 새로운 국가, 즉 북부여를 세웠다고도 볼 수도 있다.

 

북부여의 유민들이 외세에 유린되는 부여를 탈출해 두막루를 세웠으나 오래 존속되지는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북부여는 왕실이 기존의 고구려(한 부족의 명칭인듯) 영토 내부로 편입되면서 명맥을 유지하였고, 494년 물길이 북부여를 압박하자 왕실이 고구려에 항복하면서 완전히 멸망하였다.

 

그러던 중 부여의 한 종족인 주몽이란 사람이 부여국으로부터 버림받고 탈출하여 동쪽으로 가서 당시 그곳에서 힘있던 부족의 한 여인을 만나 그녀 가문의 힘을 빌어 나라를 세우니 고구려라!

 

주몽은 나라를 세우고 친자 유리를 찿으매 친모와 함께 유리가 찿아와 후계자로 지명되자 주몽의 여인 소서노는 주몽의 배은망덕한 태도에 분개하여 두 아들과 그녀를 따르는 백성과 신하들을 데리고 고구려를 떠나 눈물을 삼키며 새로운 땅을 찿아 배를 타고 나섰다.

 

 

 

 

 

소서노의 눈물과 한, 백제의 웅지...

 

발해만의 거센 파도를 헤치고 남쪽으로 가다 드디어 산동반도에 다다르니 그곳은 대방 땅이라, 그 곳에서 실향민의 이야기를 들은 대방 왕은 그들에게 기거할 땅을 주었고 감사하는 뜻으로 성을 세우니 바로 위례성이라.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대방 왕의 간섭이 점점 심해지자 나라를 세우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하여 소서노는 둘째 온조에게 나라를 세울 땅을 찿아보라며 동쪽 바다를 건너 한반도로 보냈건만, 세월이 흘러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소서노는 아들 비류와 백성, 신하들을 데리고 온조를 찿아 한반도 미추홀(인천)로 찿아든다.

 

먼저 도착한 온조는 마한 왕의 배려로 지금의 서울 동부 송파구 지역 일대 넓은 터전에 나라를 세우니 바로 백제라. 어미가 도착하였다고 연락을 해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그제서야 온조의 그 본심을 알게 된 소서노가 분개하여 군사를 데리고 온조를 징벌하려 갔다가 전투 중 그만 전사하고 말았다. 온조는 어미를 죽인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르고 말았으니 그것은 권력에 대한 탐욕이 빚어진 사건으로 소서노는 결국 남편 주몽에게 버림받고 수 천리 길을 떠나 두 아들과 새로운 땅을 찿아 왔건만, 결국은 둘째 아들인 온조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비참한 그녀의 기구한 운명이 바로 한반도의 운명이런가! 

 

어미와 형을 저버리고 왕이 된 온조는 원래 주인이었던 마한을 비롯하여 외래 세력이 이주하여 세운 가야 및 신라와 영역싸움을 벌이며 국력을 신장하였다. 후대에 들어서 백제는 마한을 정복하고 가야를 지배하게 되었으며 신라와는 뺏고 빼앗기는 영역 싸움을 벌이며 고이왕, 근초고왕 대에는 중원 대륙까지 진출하여 산동반도를 포함하여 양자강까지 진출하여 광활한 영역인 대륙백제를 세우고 그곳에서 중원 세력 및 고구려와 패권을 다투었던 백제였다. 

 

그러나 백제는 내부적으로 계속된 왕위 쟁탈전과 내분으로 분열을 초래하매 개로왕이 고구려와 싸우다 반정에 실패하여 고구려로 도망갔던 백제 장수들에게 잡혀 아차산성 밑에서 고구려 장수왕이 지켜보는 앞에서 참수당하였다. 동맹과 배신을 반복하면서 백제와 신라는 패권다툼을 벌였다. 그러다가 후대의 백제의 성왕은 신라군과 전투 중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어이없이 목이 잘리는 비극을 당하면서 잘린 머리는 신라 궁궐 계단 밑에 파뭍혀 지나가는 사람들이 밝고 지나다니는 비참한 왕이 되고 말았다.

 

그 후 백제는 내분과 반정의 반복으로 국력이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다가 무왕대에는 다시 기력을 회복하는 듯 하였으나 그의 아들 의자왕대 초기에는 성충.계백같은 충신 장수와 흥수같은 신하들의 도움으로 과감하게 영역확장을 도모하였고 현명한 군주로 칭송을 받았으나, 신라와의 싸움에서 승전이 계속되자 그만 자만심에 빠져 사치와 타락의 길로 빠져든 의자왕은 수많은 처첩과 아들을 두었고 수시로 백강에서 풍류를 즐기며 그가 백제의 마지막 왕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신라와 내통한 임자 등 간신들에 둘러싸여 충신을 멀리하고 그들 왕족들은 백제를 난도질하고 있었다.

 

이처럼 백제가 신라를 무던히도 괴롭히자 신라는 김춘추와 김유신이라는 걸출한 지도자와 무장이 나타나 당과 힘을 합쳐 사치와 방탕의 세월을 보내고 있던 백제를 침공하여 왔다. 백강 전투에서 백제군이 패하고 계백이 황산벌에서 5천 결사대와 같이 순절하니 백제의 최후 방어선은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고, 결국 나당연합군이 사비성과 공주성을 함락함으로써 계백이 뿌린 피빛이 허망하게 되었으며, 의자왕은 수많은 신하, 백성들과 포로로 묶여 당으로 끌려가 이역 땅에서 쓸쓸하게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