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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43 : 조선의 역사 385 (제26대 고종실록 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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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43 : 조선의 역사 385 (제26대 고종실록 8)

두바퀴인생 2013. 1. 28. 03:43

 

 

한국의 역사 843 : 조선의 역사 385 (제26대 고종실록 8)  

                

 

              

                  

 
                                             고종 황제 가족 사진

 

 

제26대 고종실록 ( 1852~1919년, 재위 : 1863년 12월~1907년 7월, 43년 7개월)

 

 

1. 수난의 왕 고종과 조선왕조의 몰락(계속)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프랑스와 미국이 조선과 통상 무역을 하기 위해 벌인 침략전쟁이었다. 이는 오히려 조선민들의 감정만 자극하여 척화비를 세우는 등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더욱 강화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은 오래 지속되지 못햇다.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고종이 어느새 20세를 넘겨 성인이 되면서 친정을 원하고 있었으며, 1866년에 입궁한 고종 비 민씨가 노대신들과 유림을 앞세워 대원군 하야 공세를 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침내 1873년 고종이 서무를 친히 결재하겠다는 명을 내리고 통치 대권을 장악하게 되자 대원군은 정계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자 정권은 왕비 민씨의 척족들이 장악했다. 민씨 척족들은 흥선대원군이 취하였던 강력한 쇄국정책과는 달리 안으로는 일부 세력의 대외 개방 여론과, 밖으로는 운요호 사건 이후 무력 시위를 하고 있던 일본의 국교 요청을 받아들여 1876년 일본과 강화도에서 '병자수호조약'을 맺었다.

 

신미양요 이후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한 조선에서 대원군이 물러남으로서 점차 대외 개방에 대한 여론이 높아가자 일본은 1875년 2월부터 군함을 이끌고 동해와 남해, 황해 등에서 무력 시위를 벌이게 된다. 그리고 결국 병력을 이끌고 강화도로 침입해오자 조선군은 영토에 대한 불법 침입을 이유로 발포한다. 일본은 이 조선군의 발포를 빌미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 영종도에 상륙했고, 그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군은 군사를 동원해 그들과 일전을 벌였지만 패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한동안 영종도를 점령하고 있다가 조선의 감정이 악화되자 일단 물러났다. 하지만 조선 영해에 계속해서 군함을 진주시켜 무력 시위를 벌이며 개항을 요구했고, 마침내 1876년 2월 강화도에서 '조일수호협약'이 체결되면서 제물포항이 개항되고, 이후 부산과 원산항도 개항되었다.

 

일본과 수교 이후 고종은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구미 열강과도 차례로 조약을 맺고 통상 관계를 가지는 개항정책을 실시하였다. 또한 이러한 일련의 개화시책을 실시하면서 한편으로는 관제와 군제를 개혁하고 젊은 개화파로 형성된 신사유람단과 수신단을 일본에 지속적으로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학습하게 하였다.

 

하지만 개항 이후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침투가 가속화되자 국내에서는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심각한 양상으로 치닫기 시작하였다. 1881년 황준헌이 <조선책략>을 유입하여 반포한 사건을 계기로 수구를 주장하던 '위정척사파'는 마침내 '척사 상소운동'을 일으켜 민씨 정권을 규탄하였다. 이때 안기영 등의 대원군 주변 세력은 고종의 이복형인 이재선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국왕 폐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역모는 일부 관계자들의 고변에 의해 사전에 적발되었고, 고종과 민씨 일파는 이를 빌미로 척사 상소운동을 강력히 제압하여 가까스로 정국을 수습하였다.

 

하지만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알력은 더욱 심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1882년 구식 군대 폐지와 관련하여 5군영에 소속되었던 군인들에 의해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며, 이어 1884년에는 개화파의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임오군란 때는 흥선대원군이 반란 세력을 등에 업고 궁중에 들어와 대권을 장악했다가 곧 청군에 의해 납치되었고, 1884년 갑신정변 때는 궁중을 습격한 개화 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다가 청군에 의해 밀려남으로써 왕권이 크게 실추되었다. 뿐만 아니라 청과 일본이 이 변란을 계기로 조선에 진주해 세력다툼을 벌여 조선의 자주권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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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요호 사건

 

운요호 사건(雲揚號事件, 1875년 9월 20일(고종 12년 음력 8월 21일) 또는 강화도 사건(江華島事件)은 통상조약 체결을 위해 일본 군함 운요호가 불법으로 강화도에 들어와 측량을 구실로 정부 동태를 살피다 수비대와 전투를 벌인 사건이다. 한국식 한자음 그대로 운양호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운요호 사건
UnyoBattle.jpg
운요호 사건
날짜 1871년 음력 8월 21일
장소 강화도
결과 조선의 패배, 강화도 조약 조인
교전국
Flag of the king of Joseon.svg
조선
 

 

일본제국 해군의 문장
병력
400여명의 병력과 해안포대 군함 1척, 병력 22명
피해 규모
35명 사망, 16명 부상 2명 경상

 

 

조선이 문호개방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이에 불만을 품은 일본은 열강 세력에 앞서 조선 진출을 시도하는 계획이 늦어짐에 따라 그 타개책으로 무력시위로써 조선당국을 굴복시키고자 군함 5척을 조선 연해에 파견하기로 결정한 뒤 운요호를 파견하였다. 자신들이 개항을 강요당했던 그 수법을 자신들이 조선에 사용하고자 한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정권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조선에서도 문호개방의 요구가 차츰 무르익자, 일본은 안으로 개화사상에 입각한 부국강병을 도모하여 밖으로의 침략 정책을 강행하려 하였다. 이리하여 1875년(고종 12년) 일본 정부는 군함 운요호와 다른 한 척을 부산항에 정박시켜 함포 시위를 하고, 운요호는 다시 영흥만에까지 북항하여 해로의 측량과 시위를 겸하고 돌아갔다.

 

음력 8월 21일(양력 9월 20일)에 일본군은 강화도 동남쪽 난지도(蘭芝島) 부근에 정박하고 담수(淡水)를 구한다는 구실로 보트에 군인을 분승시켜 연안을 정탐하면서 강화도의 초지진(草芝鎭) 포대까지 접근하였다. 조선군의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불법 접근한 일본군에게 조선의 초지진 포대에서 포격을 가하자 운요호에서도 맹포격으로 응수하였다. 포의 성능이나 포술이 우세인 일본군은 초지진을 파괴하고, 영종진(永宗鎭)에도 맹포격을 가하면서 육전대(陸戰隊)까지 상륙시켜 살인·방화·약탈을 자행하였다. 일본은 한편으로 부산에 전함을 파견하고 병사를 상륙시켜 함포외교를 계획했다.

 

조선군은 전사자 35명, 포로 16명을 내고, 대포 35문, 화승총 130여 정과 무수한 군기 등을 약탈당하였으며, 일본군은 단지 2명의 경상자만 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포격전의 책임을 조선에 돌렸으며, 아울러 무력을 배경으로 개항을 강요하였다.

 

1876년(고종 13년) 일본은 전권대사를 조선에 파견하여 운요호 포격에 대한 힐문(詰問)과 개항 요구를 강요했다. 그해 2월에 일본 사신 일행이 군함 5척으로 강화도에 이르러 조선 정부에 담판을 요구하여 왔다. 조선 정부에서는 중신회담을 거듭한 끝에, 국제 관계의 대세에 따라 수호조약 체결 교섭에 응하기로 하고, 전권대신을 강화도에 파견하여, 조선·일본 양국 사이에 강화도 조약의 조인을 1876년 음력 2월 3일 보게 되었다.

 

 

 

운요호

 

운요(雲揚, 운양)는 1871년(메이지 4년) 5월 일본제국 해군에 편입된 일본제국 해군의 포함(砲艦)이다.

 

 

 

 

운요호의 그림

 

운요호는 조슈번(長州藩. 현재의 하기 시(萩市) 야마구치(山口, 산구)번 혹은 하기(萩藩, 추번)번이라고도 칭함)의 군함으로 1868년 영국의 에버딘에서 건조되었다. 양현에 모리가의 문장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1871년(메이지 4년) 5월 판적봉환의 일환으로 일본제국에 헌납되었다.

 

사가의 난대만정벌에 종군하였으며 1875년(메이지 8년) 해군차관의 명령에 따라 함장인 이노우에 요시카(井上 良馨) 소좌는 조선군 강화도 포대에 대한 도발을 개시하여 강화도 사건이 발발하게 된다. 1886년 (메이지 19년) 10월 31일 키슈오타우라(紀州阿田浦)에 좌초되어 침몰되었다. 함명은 성어(고사성어)이며, 함의 사진은 없다.

 

 

 

구조, 제원 및 무장

  • 선체 : 목조 쌍돛대 범선
  • 배수량 : 245톤
  • 전장 : 35.7미터
  • 전폭 : 7.2미터
  • 흘수 : 2.3미터
  • 주기 : 2기통 왕복동기관 106마력. 1축추진
  • 무장 : 160mm 전장포 1문, 140mm포 1문

 

신미양요: 4년 전인 1871년에 같은 강화도에서 일어난 전투이다. 4년 전의 신미양요 때 온 미국의 부대도 일본 나가사키에서 온 상륙부대였다.

강화도조약: 운요호 사건을 구실로 일본이 조선과 맺은 불평등 조약이다.

 

 

 

병자수호조약

 

강화도조약 또는 조일수호조약(朝日修好條約)은 1876년 2월 27일(고종 13년 음력 2월 3일) 조선일본 사이에 체결된 통상 조약이며, 한일수호조약 또는 병자수호조약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흔히 강화도 조약이라 한다. 한일 관계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으며, 근대 국제법의 토대 위에서 맺은 최초의 조약이며, 일본의 강압적 위협으로 맺어진 불평등 조약이다.

 

일본은 자신들이 일으킨 운요호 사건을 핑계로 1876년 1월 30일 조선에 군함과 함께 전권대사를 보내 협상을 강요하였다. 이때 일본에서는 정한론의 기조에 따라 운요호 사건에 대한 조선 정부의 사죄, 조선 영해의 자유항행, 강화 부근 지점의 개항 등을 조건으로 조선을 개국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표면상으로 운요호 사건의 평화적 해결, 통상수호조약의 체결이란 구실로 1876년(고종 13)에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를 전권대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聲)를 부사(副使)로 보냈다. 이들은 일진(日進)·맹춘(孟春) 등 3척의 군함으로 1876년(고종 13) 1월 부산에 입항하여, 교섭이 진전되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여 육군을 증가해서 보낼 것을 본국에 요청한 뒤에 강화도로 향하고,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로 하여금 예비교섭을 시켰다. 이에 조선 정부는 매우 긴장하여 시원임대신회의(時原任大臣會議)를 개최하고 대책을 토의한 뒤에 신헌(申櫶)을 접견대관, 윤자승(尹滋承)을 부관으로 임명하여 교섭에 대처하게 하여, 강화도를 회담 장소로 결정하고 정식 회담을 열었다.

 

그리하여 모두 세 번의 회의를 열었는데 여러 번 결렬될 뻔했다. 이때 조선 정부에서는 흥선대원군 일파와 유생들의 반대로 의견이 제각각이었으나 박규수·오경석 등의 주장과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의 권고, 고종의 적극적인 개항 의사에 따라 개국을 결정했다.

조선이 개국을 결정하게 된 이유는

  • (1) 세계 대세로 볼 때에 개국을 해야만 할 객관적 조건이 성숙했으며,
  • (2) 일본 정부의 무력시위가 국내의 척화론(斥和論)보다 강력히 작용했으며,
  • (3) 민씨 일파가 개국을 버리고 쇄국을 하게 된다는 것은 민씨파의 실각, 즉 흥선대원군의 득세를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었고,
  • (4) 청나라가 개국을 찬성한 것,
  • (5) 고종이 개항에 적극적이었던 점 때문이었다.

사태가 이와 같이 되자 일시중단 상태에 있던 강화도 회담도 급속히 진전되어 1876년(고종 13) 2월 27일에 조인을 끝마쳤다.

 

강화도 조약은 전문(前文)과 12관의 조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은 자주국으로서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제1조)고 했지만, 이는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정함으로써 일본의 조선침략을 쉽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조선이 3개의 항구를 개방하고 거류지를 제공한 데 비하여 일본은 어떠한 의무도 지지 않았다. 또 일방적인 영사 파견의 권리와 영사 재판권의 설정은 일본의 침략자가 조선에서 어떤 행동을 취할지라도 간섭, 처분할 수 없다는 것을 뜻했다.

 

또 일본이 조선의 연해를 자유로이 측량한다는 것은 조선의 해항(海港) 및 요새의 침략을 의미했다. 조선 연해의 도서(島嶼), 암초는 종전에 조사를 거치지 않아 극히 위험하다 하여 일본국 항해자에게 때에 따라 해안을 측량하도록 허용하고, 그곳의 깊고 얕음을 살펴 도지(島地)를 편제하게 하여 양국 선객에게 위험을 피하고 안전을 도모하게 한다(제7관)고 했지만 이 또한 식민 지배를 위한 해양 조사의 속셈을 담고 있었다.

 

이것은 일본이 서양 자본주의 제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조선에서 그대로 재현시킨 것이다. 이 조약에 따라 일본은 조선에 진출하게 되어 침략의 첫 단계를 실현하게 되었다.

 

이 강화도 조약에 따라 1876년 7월 다시 일본과 조일수호조규 부록과 무역장정(조일통상 잠정협약)을 조인하였고, 일본에 수신사(修信使)를 파견하였다.[1] 또한 일부 자유무역에 대한 예외 사항도 포함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방곡령에 대한 것도 있다.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 갑신정변


대원군의 실각 뒤에도 계속 개화정책 구현이 미흡하고 오히려 수구파가 정권을 주도하는 것을 본 개화파는 일본을 등에 업고 정권찬탈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기회는 미국과의 조약 체결 후 진행된 개화 물결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듯했다. 견미사절단으로 미국과의 국교 수립의 후속 조치를 성공적으로 마친 민영익과 서광범은 1884년 6월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귀국했고, 그리피스가 지적한 것처럼 그들의 귀국과 더불어 “개화를 찬성하는 여론들이 놀랍게 고취되었다.”


민영익이 외무부 차관(Vice-President)에 임명되었고, 서광범은 승진했다. 중국 군사교관이 왕에 의해 해고되고, 항상 중국 쪽에 관심을 편중하던 묄렌도르프(Herr P. G. von Möllendorf)가 외교 고문에서 해임되었다. 견미사절단의 귀국 후, 정부는 1884년 7월 17일 우편제도를 도입하기로 결정하고 홍영식을 우정국 책임자로, 그리고 채경서를 농업국 책임자로 임명했다. 미국과의 수교로 한국에는 캘리포니아 풍의 모델 농장이 계획 추진되었고, 에디슨의 전기 불, 미국제 권총, 기관총이 국내에 유입되어 “새로운 민족적 개화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민영익과 서광범 등 견미사절단으로 미국에 입국했던 상당수의 수구파 지도자들은 비록 3개월의 짧은 미국체류였지만, 이 기간 동안 동양보다 수세기를 앞선 미국의 문화와 문명을 목도한 후에 그들은 서양의 문화를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수구파의 거장 민영익이 지속적으로 서양 선교사들에게 우호적이고 협조적이었던 것은 알렌을 통해 생명을 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서구문명의 발전을 목도하고 서구에 대한 시각이 상당히 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국내의 미묘하고 복잡한 정치 기류로 인해 민영익과 서광범의 동반관계는 얼마 가지 않아 금이 가고 말았다. 민영익은 서구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청과 지속적인 관계를 갖기를 원했다.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급진적이라고 할 만큼 적극적이었던 서광범과 친청 성향을 견지하기를 원했던 민영익 사이에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보수파 민영익이 친청(親淸, pro-chinese)의 입장을 견지한 반면 일본 세력을 등에 업은 서광범은 계속해서 정부가 급진적인 개화정책을 추진하기를 원했다.


미국, 유럽, 그리고 근대 일본에서 돌아온 급진 개화파들은 민영익이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 서구의 진보된 문화에 대하여 더욱 반동적으로 선회한 것에 대해 대단히 실망하고 있었다. 이들은 “어떤 대가를 지불하는 한이 있더라도 변화를 원했다.” 그리피스는 양측의 대립이 점점 더 점증하면서 1884년 10월 말에 이르러 서울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며 이렇게 전한다:

 

1884년 10월 말에 서울의 상황은 심상치 않았다. 두 정당의 지도자들 사이에 적대감이 존재했다. 그 중 한 정당은 그들의 요청으로 오랜 원수 일본인들에게 자신들의 새로운 방식들을 시도하기를 갈망하는 한 무리의 탐욕적인 구식 군대(舊式軍隊, 민병대)를 소유하고 있었고, 반면 다른 정당은 작은 일단의 일본 보병대의 진정한 자질을 잘 알고 있는 데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그들을 고용할 만큼 충분히 교활했다. ……라이벌의 수중에 있는 정부가 자신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친청(親淸) 정책에 헌신적인 그러한 상황에서, 급진 개화파들은 상대편을 공격하지 않음으로 그들의 원수들을 즐겁게 하는 한에만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어떻게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각료들에 대한 불신임 결의를 개진하겠는가? 어떻게 자신들의 생명을 구(救)하겠는가?


그리피스에 따르면, 10월 25일 개화파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은 한 미국인에게 “한국을 구하기 위해” 약 열 명의 탁월한 보수파 지도자들을 “살해해야 한다”고 넌지시 알렸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12월 4일의 갑신정변 사건은 오래 전부터 용의주도하게 계획되었음을 암시해 준다. 그리고 이것은 일본의 지원을 받는 개화파와 친청 정책을 고수하는 보수파의 갈등이 얼마나 첨예하게 대립했는가를 말해 준다. 양쪽의 갈등이 팽팽하게 대립되고 있는 상황 가운데 불란서의 압력을 받고 있는 청국이 한국 주둔군의 반을 철수하면서 기회는 일본 쪽으로 기울어지는 듯했다.

 

일본은 일본을 등에 업고 개화를 꾀하는 조선 내의 친일 세력, 개화파들과 결탁해서 물리적으로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거사를 계획했다. 알렌(Horace N. Allen)의 한국의 풍물(Things Korean)에서 “유혈의 구데타”(the bloody emeute)라고 불렀던 1884년 12월 4일에 일어난 갑신정변이 바로 그것이다. 12월 4일을 거사일로 잡은 것은 각국 공관들을 초청한 가운데 우정국 개국 축하 만찬회가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개화파 지도자들은 일본에 파견되었다 돌아온 사관학교 생도들을 쿠데타에 동원하고,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병으로 국왕을 호위케 한 후 혁신 정부를 세우려는 계획을 세웠다. 필요한 무기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하생으로 박문국에 고용된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의 주선을 통해 일본에서 밀수입하여 조달했다. 거사에 필요한 자금은 일본 공사 타케조이(Takezoi)가 배후에서 지원했다. 이렇게 해서 거사자금도 일본에서 얻었고, 무기도 일본에서 밀수입했으며, 직접 행동할 사람들도 김옥균(金玉均)이 골라 일본에 파견했던 유학생 출신자들이었다. 돌이켜 볼 때 이렇게 해서 거사에 참여한 개화파들은 일제침략지반의 앞잡이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다.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홍영식(洪永植), 서재필(徐載弼) 등 개화파 지도자들은 1884년 12월 4일 우정국(郵政局) 낙성식(落成式)을 호기로 이용해 그날 오후 5시를 기점으로 일본 공사의 협력을 받아 치밀하게 거사를 계획했다. 개화파 지도자들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일본인 낭인 4인을 배치하고 일본군 30명을 창덕궁과 경우궁 사이에 배치해 두었다. 12월 4일 저녁에 개최되기로 계획된 만찬회에는 예정대로 서울주재 각국(各國) 외교관들과 척족일파가 초청되었다. 개화파는 우정국에서 멀지 않은 안국동 별관에 화재를 일으켜 척신들이 황급히 왕이 있는 궁궐로 가기 위해 우정국을 뛰쳐나갈 때 미리 준비해 둔 사졸들로 하여금 척족 세력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당시 불의의 이변이 있을 때는 정부요인들이 왕이 있는 궁궐로 급히 달려가도록 되어 있었다.

 

만찬회는 예정된 날짜에 일본영사를 제외한 모든 각국(各國) 외교사절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그러나 별관 방화가 실패하자 우정국 옆 민가에 방화를 하여 거사를 시작한 것이다. 자객들을 연회장 가까운 곳에 숨겨 두었고, 거사의 신호는 연회장에 인접한 가옥과 안국동 별궁의 방화로 시작되었다. 연회장에 있던 수구파 지도자들이 외국 공사들과 함께 급히 밖으로 도피하자 숨어 있던 개화파 자객들은 그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개화파 일당은 거사 후 급히 창덕궁으로 들어가 고종에게 지금 청군이 변을 일으켰다고 속이고 고종을 통해 일본군의 호위를 요청하는 한편, 고종을 경우궁(景祐宮)으로 옮겼다.


일본군의 호위 속에 경우궁 안은 일체 외부와의 연락이 끊어졌다. 12월 5일, 개화당은 각국의 공사, 영사들에게 신 정권(新政權)의 성립을 통고하고 혁신정강(革新政綱)도 마련했다. 그들이 마련한 혁신정강은 “문벌의 폐지와 인민 평등권의 확립, 관제의 개혁과 용관(冗官)의 혁파, 전세제(田稅制)의 개혁과 재정의 일원화, 군제의 통합과 순사(巡査)제도의 신설, 고관회의에 의한 정책의 심의, 그리고 형정(刑政)의 시정 등이었다.” “그것은 변법(變法), 개량적인 정책 심의와 시정(施政), 그리고 인민 평등권의 확립을 지향한 것으로서 종래의 개화사상에서 진일보한 것이었다.” 일본 군대가 12월 5일과 6일 왕궁을 지키는 동안 급진 개화파 지도자들은 거짓으로 왕의 조서를 만들어 6명의 대신들을 왕궁으로 소환시켜서 모두 살해했다.

 

그러나 12월 6일 아침 6시에 일본 타도를 외치는 군중의 외침이 들렸고, 그날 오후에 3,000명의 한국인의 지원을 받는 600명의 중국정예군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중국군과 일본군 사이에는 훗날 그리피스가 말한 “유혈의 거리 전투”(a bloody street battle)가 발생했다. 그러나 열세인 일본 군대는 즉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열심히 싸웠지만 140명에 불과한 일본 군대는 3,000명의 한국인의 지원을 받는 중국 군대와 싸움이 되지 않았다. 40구가 넘는 시체들이 길거리에 죽어 나뒹굴었는데, 그들 중 절대다수가 일본군의 시체였다. 알렌은 갑신정변 이후 다음 몇 주 동안 개들이 이들 시체를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해서 “훨씬 더 많은” 군인들을 동원한 청국(淸國)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새로 건립한 우정국과 일본 외교부 건물이 파괴되고 많은 일본 민간인이 살해되었으며 권좌를 버리기를 거부한 홍영식은 중국 군대에 체포되어 중국군 캠프로 끌려가 거기서 처형되었다. 갑신정변에 연루된 11명은 비참하게 처형당했다. 갑신정변으로 생명을 잃은 사람은 전체 300명이나 되었다. 갑신정변은 그리피스가 적절하게 지적한 것처럼, “급진개화파의 반청(反淸) 반란”으로 시작되어 “반일 시위(反日 示威)”로 끝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갑신정변은 3일 만에, 혁신 정부도 불과 48시간도 채 지속되지 못하고 종식되었다.


갑신정변이 발생한 후 며칠 동안 군중들의 동요가 계속되었고, 알렌 부처와 폴크(George C. Foulk)를 제외하고는 미국 공사 푸트와 다른 외국인들이 제물포로 피신했다. 청국의 도움으로 간신히 갑신정변의 위기를 넘기기는 했지만, 12월 30일 청국 대사가 3,000명의 청군을 대동하고 한국에 도착했고, 같은 날 일본대사 이노우에(Count Inouye)가 2,500명의 일본군과 함께 제물포에 도착하면서 수개월 동안 조선정국은 매우 긴장된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1885년 4월 18일 청국의 이홍장(Li Hong Chang)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Hirobumi Ito) 사이에 협상이 이루어져 양국 군대가 한국에서 철수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1885년 10월 5일 대원군이 청국에서 돌아왔다. 그러나 이것으로 긴장이 종식된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