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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겨울 13 :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3 본문
우면산의 겨울 13 :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3
우면산에서 바라본 서울 서초동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3
박지원과 박제가
시대정신의 시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대적 변화와 그 변화를 판독하는 새로운 철학과 사상이다. 여기서 시대적 변화란 고대사회에서 중세사회로, 그리고 다시 근대사회로의 거시적인 변동을 뜻한다. 물론 17세기를 중세사회가 쇠잔해가고 근대사회로의 단초가 나타나기 시작한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송시열과 허목으로 대표되던 당시 지식사회의 주요 흐름은 유교적 이상사회의 구현에 있었지 새로운 모더니티의 모색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17세기와 비교하여 18세기는 새로운 전환을 모색하려는 흐름이 세계적으로 나타났던 시기다. 서구사회에서는 정치.경제적으로 모더니티가 본격화되었으며, 동아시아에서도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려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었다. 바로 이 시기에 등장한 지식인들이 실학파다. 이 실학파가 등장한 데에는 내.외적 조건을 모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내적 조건으로는 시대정신으로서의 성리학이 한계를 보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 성리학은 철학적으로 내적 발전을 이뤘을지는 몰라도 현실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한계를 드러냈다. 한편 외적 조건으로는 청나라를 통해 새로운 서양 문물이 조선에 소개되면서 서구사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우리 역사에서 북학파의 사상은 일종의 선구적인 근대화론이다. 근대화론의 기본 발상은 더 발전된 국가의 문물과 제도를 수용함으로서 사회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는 데 있다. 현재적 관점에서는 이 논리가 새로운 것이라고 보기 어렵지만, 당대적 관점에서는 대단히 혁신적인 것이었다. 그 이유는 당시 조선과 중국과의 관계 때문이다. 병자호란에서 청나라에 굴복한 조선은 형식적으로는 청과 수직적인 외교관계를 맺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이 매우 컸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이 제안하고 효종이 절치부심으로 추진한 북벌론은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한 당시 조선사회의 지배이념 가운데 하나였다. 청나라에 치욕을 당한 만큼 무력으로 청을 정벌하고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자는 북벌론은 그 실현가능성의 여부를 떠나 대내적 사회통합을 재고하기 위한 일종의 지배 헤게모니로서의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박지원과 그의 동료 및 제자들은 이러한 북벌론을 정공법으로 비판했다. 특히 박지원과 박제가는 비록 오랑캐라 하더라도 법과 제도가 우수하면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북벌론에 맞서는 북학론을 제시했다. 기존 지배이념과 정책에 대응해 새로운 비젼과 전략을 제시하는 게 시대정신 탐구의 본질을 이룬다면, 박지원과 박제가는 북학론을 통해 새로운 시대정신을 적극적으로 모색한 지식인들이었다.
박지원은 전통사회에서 근대화로 가는 우리 역사의 길목에서 정약용과 함께 가장 주목할 만한 지식인으로 꼽힌다. 그는 북학론을 제시해 상공업의 장려를 촉구한 개혁 정치가이자 문체를 혁신해 한국적 산문에 새로운 지평을 연 문필가였다. 홍대용,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박제가가 동료이자 제자였으며, 개화파의 선구자 박규수는 그의 손자였다.
박지원은 1737년 영조 1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자는 중미이며 호는 연암이다. 아버지는 반남박씨 박사유였으며, 어머니는 함평 이씨 이창원의 딸이었다. 1752년 이보천의 딸과 결혼했으며, 보천의 아우 양천에게서 <사기> 등을 배웠다. 박지원에게는 처가가 중요했는데, 특히 처남 이재성과는 평생 학문적으로, 인간적으로 매우 가까웠다.
박지원은 1756년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1768년 종로구 백탑 근처로 이사했으며, 친구인 홍대용, 이웃인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그리고 박제가 등과 교우했다. 이때는 영조 말년과 정조 초기에 해당하는 시기로, 박지원은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서양 문물에 큰 관심을 보였다. 과거에 낙방한 이후 박지원은 오직 연구와 글쓰기에 주력하면서 새로운 학문과 정책을 모색하고 있었다.
박지원의 인생 전환은 정조의 등극과 함께 이뤄졌다. 정조 초기 정치적 이유로 박지원은 황해도 금천 연암협에 은거해 있었는데, 1780년 삼종형 박명원이 공식사절로 연경에 갈 때 수행원으로 따라갔다. 그해 6월 말에 출발해 10월 말에 돌아온 박지원은 자신이 체험한 여행을 <열하일기>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당시 <열하일기>는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 모았다. 젊은 세대는 열광한 반면, 기성세대로부터는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박지원은 뒤늦게 관료사회에 진출하기도 했다. 1786년 선공감 감역에 제수된 이후 한성부판관, 안의현감, 양양부사 등을 지냈다. 여러 기록을 볼 때 박지원은 훌륭한 지방 행정관이었으며, 이 시기에 <과농소초> 등을 포함한 저술을 남겼다. 그는 정조가 죽고 순조가 등극해 개혁파의 입지가 줄어들던 1805년 순조 5년에 세상을 떴다. 그의 아들 박종채는 아버지에 대한 기록인 <과정록>을 썼으며, 박종채의 아들인 박규수는 고종 때 개화파로 활약했다.
박지원이 남긴 대표적인 저서로는 <열하일기>와 <연암집>을 들 수 있다. 모더니티의 관점에서 <열하일기>는 문제적 저작이다. 흔히 이 책은 연경 기행문학의 정수로 평가된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이 책은 기행문학을 넘어서 일종의 사회개혁 프로그램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특히 두 가지 관점이 주목된다. 당시로서는 선진 문물이라 할 수 있는 청나라의 경제.사회.문화.건축.토목.천문.의학 등 다양한 분야를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 하나라면, 이들에 대한 이용후생을 적극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사회 전반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는 점이 다른 하나다.
한마디로 박지원이 품었던 정치적 기획은 앞선 청나라의 문물을 수용해 뒤떨어진 조선사회를 개혁하자는 데 있었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사상이었다. 당대 주류 지식사회에서는 반청친명의 경향, 즉 청나라를 거부하고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는 경향이 두드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들이 제시한 북벌론은 이러한 논리를 대표하는 정치적 기획이었으며, <열하일기>는 이런 북벌론에 맞서서 새로운 북학론을 제시하고자 했다. <열하일기>는 이런 북벌론에 맞서서 새로운 북학론을 제시하고자 했다. <열하일기>의 10권 '옥갑야화'에 실린 소설 <허생전>은 북벌론의 허구성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부국이민의 경제철학을 강조한다.
정치, 다시말해 국가 경영의 일차적 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국민 다수의 물질적.정신적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데 있다. 문제는 그 방법이다. 박지원은 당시 지배계층의 '성리학적 원칙주의'에 맞서 '실학적 실용주의'를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정책으로 구체화하고자 했다. 집배계층이 갖는 허위의식에 대한 박지원의 비판은 젊은 시절에 쓴 소설 <양반전>에도 이미 나타났듯이, <열하일기>4권 '관내정사'에 나오는 <호질>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양반을 꾸짖는 호랑이를 통해 박지원은 지배계층의 이중적인 도덕성을 풍자하고 질타했다.
박지원 사상의 핵심은 '이용이 있은 후에 후생이 되고, 후생이 된 이후에 정덕(正德)이 될 것'이라는 주장에 압축되어 있다. 다시 말해, 정덕을 이룬 다음에 이용후생을 할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이용후생 이후에 정덕을 이루자는 주장이 박지원이 품었던 실학사상의 근간을 이룬다. 스콜라적인 주자학에 대한 비판을 겨냥하는 이러한 발상에는 과학과 기술을 주목하고 특권화하려는 근대적 사유의 일단이 담겨 있다고 생각된다.
종로 3가에는 탐골공원이 있다. 탑골공원 안에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있다. 바로 이 탑을 조선시대에는 그 색깔이 흰색에 가까워 백탑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백탑 근처에 살던 실학파들은 박지원을 선생으로 하고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등이 함께 어울려 북학파를 태동시킨 곳이다. 이 가운데 서얼 출신인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은 정조 시절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함께 임용되기도 했다. 당시 규장각은 창덕궁 안에 있었는데, 규장각이었던 주합루에서 자유롭고 치열하게 토론을 벌이던 북학파 지식인들을 떠오르게 한다.
박제가는 1750년 영조 2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박평의 서자인 그의 자는 재선이며 호는 초정이다. 박제가는 소년 시절부터 문명을 떨쳤다. 10대 후반에 박지원을 만났으며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등과 교유했다. 여러 기록을 보면 박제가의 성격은 호방하고 격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시.서.화에 모두 뛰어났던 것으로 보아 감수성 또한 옘니한 지식인이기도 했다.
1776년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와 함께 <건연집>이라는 사가시집을 내어 그 이름이 청나라에까지 알려졌다. 박제가는 서얼을 관직에 진출시키려는 정조의 정책에 따라 1779년 규장각에 근무하면서 많은 책을 교정하고 간행했다. 그는 지방 행정을 맡기도 했는데 부여현감, 영평현감 등을 지냈다.
박제가의 삶에서 특히 중요했던 것은 네 차례에 걸친 연행길이었다. 그는 1778년 사은사 채제공을 따라 청나라로 갔고, 1801년 사은사 윤행임을 따라 연경을 방문한 것에 이르기가지 네 번에 걸쳐 연행길에 올랐다. 이 여행에서 박제가는 이조원, 반정균 등의 청나라 학자들과 교우하였고 네 번째 연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박제가는 흉서 사건에 연루돼 종성에 유배됐다가 풀려났지만, 1805년 순조 5년 세상을 떴다.
서세동점이 시작되던, 새로운 사회변동이 꿈틀거리던 조선 후기의 한가운데를 거침없이 걸어갔던 지식인,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천년 뒤에도 천만 명의 아들과는 다른'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자기정체성을 당당히 드러냈던 지식인이 바로 박제가다. 조선 전기의 율곡 이이에 필적할 만한 천재였건만, 적서 차별이라는 신부적 구속 아래 좌절을 겪어야만 했던 박제가의 비애와 그것을 초극하려는 의지가 곳곳에 담겨 있어 이따금 <정유각집>을 펼치게 되면 마음 한구석이 시려오기도 한다.
북학의는 박제가의 대표 저술이다. 이 책은 박제가가 첯 번째 연행에서 돌아와 자신의 견문을 기록한 책으로 <열하일기>와 함께 북학파의 이론과 전략을 대변한다. 박제가는 섬세하면서도 호쾌한 자신의 성품에 걸맞게 청나라 문물을 치밀하게 소개하고 이를 과감하게 수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 책은 내편과 외편으로 이뤄져 있다. 먼저 내편은 수레.배.성.벽돌.수고.기와.자기,삿자리,주택.창호.뜰.도로.교량,목축.소.말.나귀.안장.구유통.시장과 우물.장사.은.화폐.목재.여자의 의복.중국어.통역.약.장.인장.담요.저보.종이.활.총과 화살.자.문방구.골동품과 서화의 항목들로 구상되어 있다.여기서 실생활에 연관된 다양한 기구와 시설을 살펴보고 이에 대한 개혁을 제시한다.
한편 외편은 밭.거름.뽕과 과일.농업과 잠업에 대한 총론.농기도서.용미차에 관한 논의.과거론1.과거론2.정유년 증광시에서 제출한 시사책.관직과 녹봉.재부론.강남 절강 상선과 통상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풍수설과 장지.군사를 논한다.존주론.북학변1.북학변2.북학변3.병오년 정월에 올린 소희의 항복들로 돼 있다. 여기서 박제가는 상공업과 농업 문제를 다루고, 상공업의 발전과 농업 기술의 개선을 적극적으로 제안하였다.
북학의는 일종의 국부론이다. 부국의 방법으로 박제가는 청나라 문물의 즉각적이고 대대적인 수입과 응용을 강조함으로써 새로운 국가 비젼을 제시한다. 또 중국 문화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는 중국어를 써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급진적이었으며 세계화주의자, 그것도 진보적 세계화주의자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김정희에게로 이어졌다.
정치란 백성들이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무릇 어떤 사상이라 하더라도 시대적 구속을 초월하는 것은 없다. 북학파의 사상이 지배적인 성리학적 질서를 비판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전통적인 유교사상의 범위를 완전히 넘어섰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빅지원과 빅제가로 대표되는 북학파 지식인들은 주자학에 대응해 고증학을 선호하고 이용후생을 강조한 것이지 포괄적 의미의 전통사상과 완전히 단절할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새로운 문물의 도입을 적극적으로 강조한 동시에, 가족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주의, 우주의 질서와 연관된 도덕과 윤리, 배움을 바탕으로 정치를 하는 엘리트 등을 강조하는 전통적 유교사상의 자장 안에 여전히 박지원과 박제가는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남긴 여러 글들을 보면 박지원과 박제가는 전통적인 지식인이기도 했으며 전통과 근대 사이의 경계선에 서 있었던 지식인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주목할 것은 모더니티를 이루는 양축인 제도와 정신에서 박지원과 빅제가가 보여준 문제의식이다. 제도로서는 자본주의.산업주의.감시체제.군사적 힘으로 이뤄져 있다면, 박지원과 빅제가는 비록 근대적 자본주의와 산업주의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았고 그 응용 모델이 청나라이기는 했지만, 동시에 두 사람은 분명 생산도구 개선과 유통구조 혁신 등 근대적 사회.경제 변화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갖고 있었다.
정신으로서의 모더니티 역시 마찬가지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박지원의 소설들이다. <양반전>, <호질>, <예덕선생전>, <열녀함양박씨전> 등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박지원은 봉건적 신분제를 비판하고 평등주의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사회윤리를 모색했을뿐만 아니라 합리작 이성과 지연스러운 감정을 가진 보편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이해를 추구했다. 그가 남긴 작품들에 대한 모더니티를 생각할 때 문화사적 측면에서 박지원은 참으로 이채로운 지식인이었다.
박지원과 빅제가가 새로운 사상을 펼칠 수 있었던 조건 가운데 하나는 '계몽 군주' 정조의 존재였다. 시대사적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던 정조의 개혁정치는 1800년 정조의 죽음과 더불어 노론 벽파들의 정권 장악으로 모두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세도정권의 등장과 함께 전통질서로 다시 되돌아 가고 말았다. 전진과 후퇴가 역사의 본질이라지만, 당시 세계사적 변화를 지켜볼 때 정조 사후 세도정권의 등장과 전통 질서로의 회귀한 조선사회의 대응은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었다.
두 사람은 정조의 호위무사였던 백동수와도 친분이 깊었다. 그가 말년에 인제군 기린면으로 낙향하여 떠날 때 그를 보내는 아쉬움을 글을 <연암집>과 <정유각집>에 남겼다. 무사 백동수는 얼마전 드라마로도 방영되었지만 그는 무인 집안에서 태어났고 이덕무의 처남이 된다. 그는 이덕무, 박제가와 함께 <무예도보통지>를 지어 정조에게 올렸던 인물이다. 그는 당시 규장각의 북학파 지식인들과 매우 가깝게 교유했다. 자가 영숙이었던 그가 우국충정을 품었으나 정조 사후 시대와의 불화 속에서 은둔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친구의 삶에 대한 안타까움을 박지원과 박제가는 글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지식인에게 기품이란 무엇인가. 지식에 대한 탐구를 통해 진리를 밝히는 이로서의 지식인은 경우에 따라 시대와 불화할 수도 있고 권력에 맞설 수도 있어야 한다. 인간의 자유에 대한 치열한 열망과 평등에 대한 간절한 소망은 지식인이 가져야 할 덕목이며, 이 덕목을 내면화하고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지식인이라면 마땅히 갖고 있어야 할 위엄이자 기품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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