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842 : 조선의 역사 384 (제26대 고종실록 7) 본문
한국의 역사 842 : 조선의 역사 384 (제26대 고종실록 7)
|
고종 황제 가족 사진
제26대 고종실록 ( 1852~1919년, 재위 : 1863년 12월~1907년 7월, 43년 7개월)
1. 수난의 왕 고종과 조선왕조의 몰락(계속)
미국은 '셔먼호 사건'이 발생하자 조선 개항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게 된다. 그리고 두 번에 걸친 탐문 항해를 실시하면서 셔먼호에 대한 손해 배상을 요구하는 동시에 통상 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두 번에 걸친 조선 원정을 계획하였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1871년 5월 조선 원정을 결행하기로 하고 군함 5척, 병력 1천 2백여 명, 함포 85문 등으로 무장하고 강화 해협으로 침입해왔다.
미국 군함이 강화도로 접근해오자 조선군은 그들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손돌목 포격사건'으로 조.미간의 최초의 충돌이었다.
이 사건 이후 미국은 보복 공격을 벌이겠다고 위협하면서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하지만 조선의 거부로 평화 회담이 결렬되자 그들은 대대적인 상륙 작전을 감행해 강화도 초지진에 무혈 입성하였다. 이후 조선 수비병은 광성보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패하였고, 강화도는 완전히 미군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은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정책에 밀려 결국 점거 한 달여 만에 강화도에서 물러났다.
------------------------------------------------------------------------------------------------------------------------------------------------
제너럴셔면호 사건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1866년(고종 3년) 음력 7월 12일(양력 8월 21일)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던 미국 상선(商船)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를 평양 군민(軍民)들이 응징하여 불에 태워버린 사건이다. 이 사건은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1866년(고종 3년) 미국 상선(商船) 제너럴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횡포를 부리다가 관민들의 저항으로 배는 소각되고, 선원들은 처형된 사건이다.
톈진(天津)에 머물던 미국인 프레스턴 소유의 상선 셔먼호는 영국의 메도스(Meadows) 상사와 결탁하여 비단·유리그릇·천리경·자명종 등의 상품을 적재하고 프레스턴을 비롯하여 윌슨(Willson), 선장 페이지(Page), 영국인 호가스(Hogarth) 및 런던 선교회 소속의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Tomas)를 통역으로 삼아 19명의 말레이시아인 및 청국인을 태우고, 중국 정크선의(선장 유화태--Yu WauTai) 인도로 음력 7월 11일에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 경내에 들어왔다. 유화태는 1865년말 토마스가 황해지역에 왔을 때 타고 왔던 배의 선장이며 토마스에 의하면 20년 이상 조선인과 무역을 하였다.
마침, 프랑스의 군함이 침략해 올 것이라는 소문이 시중에 나돌고 있었기 때문에 관원들은 전전긍긍하며 긴장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셔먼호가 평양 경내에 정박하는 것을 보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셔먼호에 사람을 보내어 평양에 온 목적을 물었다. 통역으로 탑승한 토머스는 백인들의 국적을 소개하고 항해 목적에 대하여서는 상거래뿐임을 강조하며, 그들이 가져온 비단·자명종 등과 쌀·사금·홍삼·호표피 등과의 교역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서양 선박의 내항과 통상의 요구는 당시의 국내 사정으로 미루어 조선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또한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음을 이유로 거절하고, 그들에게 즉시 출국할 것을 요구하였다.
제너럴 셔먼호의 횡포와 평양성 군민들의 저항
음력 7월 12일 조선 측의 이와 같은 강경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셔먼호는 만경대 한사정(閑似亭)에까지 올라와 그들의 행동을 제지하던 중군(中軍) 이현익(李玄益)을 붙잡아 감금하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평양성 내의 관민(官民)은 크게 격분하여 강변으로 몰려들었고, 셔먼호에서는 소총과 대포를 이들 관민에게 마구 쏘아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와 같은 셔먼호의 무모한 행동에 대하여 강변의 군민은 돌팔매·활·소총으로 맞서 대항하고, 퇴교(退校) 박춘권(朴春權)은 배를 타고 가서 이현익을 구출해 내었다.
영국인 최난헌이(매천야록에 미국인 최난헌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최난헌은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 목사의 한국이름이다.) 군함 1척을 이끌고 조수를 타고 대동강에 들어왔지만 조수가 밀려나가면서 군함은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되었다. 당시 며칠씩 계속된 비로 강의 수위가 높아졌다가 이렇게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 평상시 수위로 돌아가게 되자 셔먼호는 양각도(羊角島) 서쪽 모래톱에 선체가 걸려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자 불안과 초조에 휩싸인 셔먼호의 승무원들은 강도·약탈·총포격 등의 폭력을 자행하여 평양 사람 7명이 죽고, 5명이 다치는 인명피해가 일어났다.
박규수는 그들을 체포할 수 있는 사람들을 돈을 주고 구하던 중 한 교졸이 지원했다. 이 교졸은 어촌의 괴피선(작은 배) 수백 척을 동원하여 배안에 기름을 끼얹은 뒤 섶을 가득 실어 불을 지르게 하고 궁수로 하여금 일제히 화살을 당기게 하였다. 이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철산부사(鐵山府事) 백낙연(白樂淵) 등과 상의하여 음력 7월 21일부터 포격을 가한 뒤 대동강 물에 식용유를 풀고 불을 붙여 셔먼호를 불태워 격침시켰으며, 승무원 23명 가운데 대부분이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
배에 불이 번지자 영국 선교사 토머스와 중국 상인 조능봉이 뱃머리로 기어나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박규수는 이들을 강안으로 데려왔다. 그러나 성난 평양부민들이 삽시간에 달려들어 그들을 때려죽였으며, 나머지 생존자들도 전원 사망했다.
박규수는 바로 사격 명령을 내렸고, 미국 군함은 한번에 화살세례를 받았으며, 군함 안에 있던 인화물질로 인해 군함은 불타고 말았다. 미국 상인들은 불길 속에서 튀어나와 도망쳤지만 그들을 추격해 대포를 쏘아 4,5명을 쓰러트렸다. 이것이 조정에 전해지자 박규수는 승자(품계가 승진됨)하였고 교졸 또한 진장이 되었다. 이후 박규수는 대원군의 각별한 총애를 얻게 되었다.
당시 조선의 흥선대원군 정권은 이 사건과 같은 해 음력 9월에 일어난 프랑스 함대의 침입 사건인 병인양요를 계기로 양이정책(攘夷政策)인 통상수교거부정책을 더 한층 강화하게 되었다. 그리고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5년 후인 1871년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서양 기술이 집약된 증기선을 복제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10개월 만에 복원하기는 했으나, 아주 느리게 움직여서 사실상 실패했다. 그러나 그 뒤에 통상수교거부 정책이 한창임에도 증기선을 만들든지 구하든지 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고 전해진다.
제너럴셔먼호
- 포획: 1863년 1월 29일
- 미국 정부의 구매: 1863년 3월 18일
- 취역일: 1863년 2월 4일
- 민간에 판매: 1865년 8월 17일
- 배수량: 614톤
- 길이: 38.81미터 (127피트 4인치)
- 선폭: 10.5미터 (34피트 6인치)
- 흘수: 503센티미터 (16피트 6인치)
- 추진방식: 요트(Sail)
- 승무원: 150 명
- 무장:
- 4 X 8" Sg.
- 16 X 32 pdrs
- 원래 영국 군함이었는데, 1863년에 포획되었다. 남북전쟁에 북부군 군함 USS Princess Royal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공경매로 민간에 팔려서 제너럴셔먼호가 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미 해군이 보유한 기록과 다르다.
- 미국 해군의 공식문서에 따르면 프린세스 로열호의 민간 판매 시점이 평양에서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지 2년 뒤인 1868년이라는 것이다. 또한 평양 대동강이 아닌, 1874년 1월 10일 노스 캐롤라이나 Cape Fear에서 침몰하였다.
제너럴셔먼호 탑승자
- 선장 페이지(Page, 덴마크인)
- 일등 항해사 윌슨(Wilson, 미국인)
- 선박 소유주 프레스턴(Preston, 미국인)
- 조지 호가스(George Hogarth, 영국인)
- 13명의 중국인
- 3명의 말레이인
- 영국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Robert Thomas, 한국어를 배웠기 때문에 통역으로 탑승하였다.)
- 위안부 12명
손돌목 사건
1871년 강화해협 손돌목에서 조선군과 미군 사이에 벌어진 포격전.
1871년 미국은 1866년에 발생한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 격침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무력으로 위협하여 통상조약을 강요할 목적으로 함대를 파견하였다. 군함 5척과 병력 1,230명으로 구성된 미국 함대는 5월 16일 일본의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5월 21일 인천 앞바다에 도착하였다.
5월 30일 강화해역으로 진출한 미국 아시아함대의 블레이크 중령은 30일과 31일 양일간에 걸쳐 조선 관원과 회담을 마친 후, 6월 1일부터 강화해협에서 한강 수로에 이르는 해역을 탐사할 준비를 갖추었다. 포함 2척과 소형 함정 4척으로 편성된 블레이크 중령의 탐사대는 6월 1일 강화해협 입구에 이르렀다.
이때 강화해협의 조선군은 초지진으로부터 갑곶나루에 이르는 해안선에 포대를 설치하여 총 70여문의 대포를 배치하였다. 조선군은 강화해협의 중간 지점이며 물살이 빠르고 굴곡이 심한 손돌목 어귀의 광성보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탐사대를 예의 주시하였다. 그리고 탐사대의 선두가 손돌목에 접어들자, 광성보 지휘소에서 울리는 포성을 신호로 하여 대포 사격을 가하였다. 이에 탐사대도 즉각 응사함으로써 쌍방간에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다.
아시아함대의 8인치 대포는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폭발탄을 연속적으로 발사하여 조선군의 포진지를 삽시간에 파괴하였다. 반면 조선군의 대포는 소구경에 발사거리가 짧은 재래식으로 성능이 훨씬 뒤떨어졌다. 개인 화기도 미군의 레밍턴 소총은 조선군의 화승총보다 발사거리와 발사속도에서 훨씬 우수한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미군측 탐사대의 월등한 화력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조선군이 진지에서 철수함으로써 양군의 교전 상황은 일단 종식되었다. 조선군 수비대의 자위적인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교전으로, 조선군은 광성보의 진지와 시설물들을 파괴당하고 다수의 사상자를 내는 피해를 입었고, 미군 탐사대는 부상자가 2명에 불과하여 피해가 경미하자, 계속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가 한강으로 북상한다는 당초의 계획을 그대로 추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탐사대의 주력 전함인 포함 모노카시호가 손돌목에서 좌초를 당함에 따라 미군측은 당초 계획을 포기하고 모선이 정박해 있는 작약도 근해로 귀환하였다.
신미양요
신미양요 | |||
![]() 전멸한 광성보의 조선군. | |||
| |||
| |||
| |||
교전국 | |||
|
| ||
지휘관 | |||
![]() ![]() ![]() ![]() ![]() ![]() ![]() |
![]() ![]() | ||
병력 | |||
불명 | 군함 5척, 대포 90문, 병력 800명 | ||
피해 규모 | |||
243명 전사, 100명 익사, 20명 포로 | 3명 전사, 10명 부상 |
신미양요(辛未洋擾)는 1871년 6월 10일(고종 8년 음력 4월 23일)에 발생한 조선과 미국 간 전쟁으로, 전술적으로는 미국이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전략적으로 결국 목적한 통상조약 체결은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고, 조선은 이를 계기로 쇄국정책을 더욱 고수하게 되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발생 뒤 미국은 두 차례 탐문항행(探問航行)을 실시하면서 셔먼호 사건을 응징하고 이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동시에 조선과 통상관계를 수립하기 위하여 두 차례나 조선 원정계획을 수립하였지만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다.
결국 1871년 미국은 일본과 류큐에서 그랬던 것처럼 전통적인 포함외교에 따라 조선을 개항하기 위하여 마침내 조선원정을 결행하기로 결정하고 주청 미국 공사 로 (Low)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동시에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John Rodgers)에게 해군 함대를 동원, 조선 원정을 명했다. 미국은 지금의 인천국제공항 근처까지 온 다음, 강화도로 진격하였다.
미군 원정대의 구성
- 사령관: 해군 제독(Admiral) 존 로저스
- 탑승자: 주중국 대사 프레데릭 로우
- 군함
- USS Colorado
- 함대 기함
- 증기 스크루 프리깃
- 배수량: 3,425 톤
- 길이: 80.3m(263 피트 8 인치)
- 선폭: 16m(52 피트 6 인치)
- 흘수: 6.7m(22 피트 1 인치)
- 승무원수: 646 명 (장교와 병사)
- 속도: 시속 9노트
- 함포:
- 10인치(254 mm)포 2문
- 9인치(229 mm)포 28문
- 8인치포 14문
- 콜로라도 프리깃함은 1861년에서 1865년까지 치러진 남북전쟁에 참가하였다.
- USS Alaska
- screw sloop
- USS Monocacy
- 외륜식 포함
- 배수량: 1370 톤
- 길이: 109 피트 9 인치
- 선폭: 29 피트 8 인치
- 흘수: 9 피트
- 무장:
- 13" 박격포 1문
- 2 X 32-pdr
- USS Benicia
- screw sloop
- 배수량: 2400 톤
- 길이: 250 피트 6 인치
- 선폭: 38 피트
- 흘수: 18 피트
- 속도: 11.5 노트
- 승무원수: 291 명
- 무장:
- 1 x 11" S. B.
- 10 x 9" S. B.
- 1 x 60-pdr. R.
- 2 x 20-pdr. BLR.
- USS Palos
- iron screw tug
- 배수량: 420 톤
- 길이: 137 피트
- 선폭: 26 피트
- 흘수: 9 피트 10 인치
- 속도: 10.35 노트
- 무장: 대포 2문
명예훈장
미국은 신미양요에서 공로가 큰 15명에게 미국 최고의 무공훈장인 명예 훈장(Medals of Honor)을 수여하였다.
- 존 앤드류스: 해군 3등수병
- 알렉산더 매켄지: 해군 갑판수부
- 새뮤얼 F. 로저스: 해군 병참장교
- 윌리엄 트로이: 해군 3등수병
- 찰스 브라운: 해병대 상병
- 휴 퍼비스: 해병대 이등병
- 사이러스 헤이든: 해군 공병
- 프레드릭 H. 프랭클린: 해군 병참장교
- 존 콜맨: 해병대 이등병
- 제임스 도허티: 해병대 이등병
- 패트릭 헨리 그레이스: 해군 선임 병참장교
- 윌리엄 F. 루크: 해군 수습 선원
- 마이클 맥나마라: 해병대 이등병
- 제임스 F. 머튼: 해군 수습 선원
- 마이클 오웬스: 해병대 이등병
앞서 1866년(고종 6년) 음력 7월 평양 대동강에서 발생한 제너럴 셔먼 호 사건의 사과 및 책임 추궁, 그리고 통상조약을 무력으로라도 체결할 목적으로 함대가 발진하였다. 미국 아시아함대 사령관 존 로저스제독이 이끄는 미국 군함 5척(기함은 프리깃함인 콜로라도호, 순양함 2척, 전함 2척)은 청나라 주재 공사 프레드릭 로우와 90문의 화포, 800명의 병력을 대동하고 5월 16일(음력 3월 27일) 일본의 나가사키 를 출발하여 원정에 나섰다.
- 5월 16일 - 나가사키 출항
- 5월 19일(음력 4월 1일) - 미군, 경기도 남양만에 도착. 이후 해로를 탐사하면서 북상 돌입
- 5월 26일(음력 4월 8일) - 강화도 해역까지 북상, 강화 해협 물치도 앞바다를 함대의 정박지로 결정
- 6월 1일(음력 4월 14일) - 미군은 조선에 탐측을 일방적으로 통고. 서울로 진입할 수 있는 강화도 해협 수로의 측량과 정찰을 목적으로 두 척의 군함을 파견. 한강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손돌목을 지나려다 강화도 포대로부터 포격을 받고 퇴각. 이후 미국은 포격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함. 조선 정부는 미국 함대가 허락 없이 해협을 항해하는 것은 영토침략 행위이므로 협상이나 사죄를 할 수 없다고 요구를 거절, 협상 결렬.
전투
- 6월 10일(음력 4월 23일) - 미군 상륙부대는 포함 2척을 앞세우고 육전대(해병대) 644명을 강화도 초지진(草芝鎭)에 상륙시키고, 덕진진(德津鎭)을 점령하였다.
- 6월 11일(음력 4월 24일) - 광성진(廣城鎭), 광성보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진무중군 어재연 이하 600명의 조선군이 지키고 있던 광성진 전투에서 조선군은 병력과 무기에서 우세한 미군과 맞서 싸웠다. 미군은 상륙에 앞서 함포사격을 실시했는데, 이 와중에 광성진의 화약고가 폭파되었다. 조선군은 개인지참 분량의 총탄만으로 전투에 돌입했다. 전투 끝에 어재연 장군 이하 조선군 243명이 장렬하게 전사했다. 미군이 진채를 장악하자 경부상자 100여명은 바다로 뛰어들어 자결했으며, 중부상자 20명은 포로로 잡혔다. 미군은 전사 3명, 부상자 10명의 피해를 입었다. 조선군의 패배로 끝난 전투였으나, 군인정신 곧 적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함에 있어 조선군은 결코 미군에 뒤지지 않았다.
“ | 조선군은 미군에게 돌을 던지고 창칼로 대적하다가 무기를 놓치면 흙을 던져 눈에 뿌렸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총에 맞아 죽기도 하고, 부상병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포로로 잡힌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 ” |
조선 정부는 통상 교섭 자체를 거부하는 자세를 유지했다. 조선군의 결사항전과 정부의 통상거부로 당연히 더 이상 오래 머물 수 없었던 미군은 조선과 통상이라는 목적도 달성하지 못하고, 7월 3일(음력 5월 16일)에 중국으로 철수하였다.
전사자
조선군 주요 전사자는 다음과 같다.
- 어재연(魚在淵) (중군)
- 어재순(魚在淳) (어재연의 친동생)
- 이현학(李玄鶴) (대솔군관)
- 임지팽(林之彭) (겸종)
- 김현경(金鉉暻) (천총)
- 박치성(朴致誠) (광성진 별장)
- 유예준(劉禮俊)
이 기간에 미군 함대가 물치도를 근거지로 충청·전라·경상도의 물자가 서울(당시 한성부)로 수송되는 수로인 강화 수로를 봉쇄함으로써 서울(당시 한성부)에서는 식량난이 생기고 물가가 올라 서양인에 대한 거부감이 더욱 높아졌다. 또한 척화비가 전국 각지에 세워지고 쇄국정책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 전쟁은 미군의 명백히 실패한 침략이다. 비록 처음부터 군사적으로 조선을 정복, 지배하여 영토분할이나 식민지에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포함외교 정책에 입각하여 조선을 무력으로 굴복시켜 개방과 함께 통상조약을 체결하려는 목적이었지만, 프랑스(병인양요)에 이어 미국도 조선에 대한 포함외교도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일부에서는 이런 점 때문에 미국의 신미양요는 다른 일반적인 제국주의 침략과 성격이 다르다고 하는 주장도 있으나,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침략 및 식민지배의 시작은 모두 포함외교에서 시작되었음을 생각하면 그런 평가는 문제가 있다. 프랑스 및 일본(운요호 사건)과 다른 기준의 해석이 되므로 문제의 소지가 다분한 것이다. 병인양요 - 신미양요 - 운요호 사건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은 기존 서구 제국주의 침략 수단의 답습이었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역사 843 : 조선의 역사 385 (제26대 고종실록 8) (0) | 2013.01.28 |
---|---|
우면산의 겨울 13 :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3 (0) | 2013.01.27 |
한국의 역사 841 : 조선의 역사 383 (제26대 고종실록 6) (0) | 2013.01.26 |
한국의 역사 840 : 조선의 역사 382 (제26대 고종실록 5) (0) | 2013.01.25 |
한국의 역사 839 : 조선의 역사 381 (제26대 고종실록 4) (0) | 2013.0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