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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41 : 조선의 역사 383 (제26대 고종실록 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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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41 : 조선의 역사 383 (제26대 고종실록 6)

두바퀴인생 2013. 1. 26. 05:18

 

 

한국의 역사 841 : 조선의 역사 383 (제26대 고종실록 6)  

                

 

              

                  

 
                                             고종 황제 가족 사진

 

 

제26대 고종실록 ( 1852~1919년, 재위 : 1863년 12월~1907년 7월, 43년 7개월)

 

 

1. 수난의 왕 고종과 조선왕조의 몰락

   

안동 김씨의 60년 세도정치는 왕권을 극도로 약화시켰으며, 그것은 곧 사회의 혼란과 불안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일본과 서구 열강이 점차 조선을 압박해오고 있었다. 고종은 이 같은 어려운 시기에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몰락해가는 왕조와 풍전등화와 같은 국가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수난과 고통 속에 외세에 의해 강제 퇴위 당하고 만다.

 

고종은 1852년 남연군의 아들 흥선군 이하응과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둘재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명복, 자는 성임이다. 이후 헌종의 모후 조대비에 의해 익성군에 봉해지고 1863년 12월 조선 제26대 왕으로 등극했다. 이때 그의 나이 12세였다.

 

고종이 왕위에 오를 당시 조정은 안동 김씨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들은 순조 이후 반세기 이상을 계속해서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헌종의 어머니이자 효명세자(익종)의 부인인 신정왕후 조씨는 이같은 권력 구도를 깨드리기 위해 남연군의 아들 이하응과 결탁하여 그의 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게 된다.

 

둘재 아들 명복을 즉위시키기 위한 이하응의 계략은 치밀했다. 안동 김씨 세력의 경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건달들과 어울려 지내는가 하면, 안동 김씨 가문을 찿아다니며 구걸을 하기도 했다. 이 같은 호신책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그는 철종의 죽음이 임박하자 익종 비 조대비와 연줄을 맺어 자신의 둘재 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려 했다. 조대비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안동 김씨의 세도에 짓눌려 지내던 처지였기에 이하응과 뜻을 같이하게 된다.

 

1863년 12월 철종이 죽자 조대비는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을 양자로 삼아 익종의 뒤를 잇게 하고, 자신이 수렴청정을 하였다. 그리고 흥선군 이하응을 흥선대원군으로 봉하고 섭정의 대권을 그에게 위임시켰다. 이로써 고종을 대신한 흥선대원군은 향후 10년 동안 권력을 쥐고 자신의 의지대로 정사를 운영하게 된다.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은 흥선대원군은 가장 먼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분쇄하여 쇠락한 왕권을 되찿고 조선을 압박해오던 외세에 대항하기 위한 과감한 개혁정책을 추진한다.

 

그는 우선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당쟁의 근거지가 된 사원을 철폐하는 한편, 토색을 일삼아 주구로 전락한 탐관오리들을 처벌하고 양반과 토호의 면세 전결을 철저히 조사하여 국가 재정을 충당했다.

 

이 밖에 민간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무명잡세를 없애고, 궁중에 특산물을 바치는 진상제도를 폐지하였으며, 은광산을 개발하는 것을 허용하여 경제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또한 사회의 악습을 개선하고 복식을 간소화했으며, 군포세를 호포세로 변경하여 양반도 세금을 부담하도록 했다.

 

한편 <대전화통>, <육전조례>, <양전편고> 등의 법전을 편찬하여 법질서를 확립시켰고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부활시켜 삼군부를 두어 군국기무를 맡게 함으로써 정무와 군무를 분리시켰다.

 

흥선대원군은 이처럼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재정을 확립했으며 경제, 행정 개혁 등으로 세도정치의 폐해를 완전히 일소하는 성과를 거두어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몇 가지 무리한 정책과 세계 정세를 정확하게 읽어내지 못한 채 지나친 쇄국정책을 폄으로써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다.

 

우선 왕조의 위업을 세우고자 경북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원납전'을 징수하고 도성문에서 문세를 거두는 것도 모자라 소유자 허락 없이 전국에서 거석과 거목을 징발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또한 천주교도들에 대한 지나친 박해로 인해 자신의 정치 생명에 타격을 입기도 했다. 그는 한때 천주교도들이 건의해온 '이이제이(오랑캐로써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논리에 흥미를 가진 적도 있었지만, 이 때문에 도리어 정적들에게 탄핵의 빌미를 주게 되자 정치적 생명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천주교 박해형을 내려 1866년부터 1872년까지 6년 동안 8천여 명의 신자들을 학살하였다. 이것이 '병인박해' 혹은 '병인사옥'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천주교 신자에 대한 이 같은 박해로 프랑스 신부 9명이 죽자 프랑스는 그 보복으로 1866년 10월 군함 7척에 총 병력 1천 명을 승선시켜 강화도를 침범,점령하였다. 이에 조선군은 강화도 수복 계획을 구상하고 그들을 공격하였지만 화력에 밀려 실패하였다. 그러나 제주목사 양헌수의 전략으로 정족산성 싸움에서 승리하여 프랑스군을 격퇴시켰다. 이 사건을 '병인양요'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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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의 쇄국정책

 

쇄국정책(鎖國政策)은 말뜻은 외국의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정책을 말하며, 정치·외교·통상에서는 이윤의 확보나 자기 방위 및 국제적 고립 상태의 유지가 불가피할 때 외국인의 입국이나 무역을 통제하는 정책을 일컫는다.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이라고도 하며, 이러한 사상쇄국주의(鎖國主義)라고 부른다.

 

조선 왕조는 병자호란 이래로 수세기 동안 대체로 사대교린(事大交隣)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 쇄국정책을 고수하여 왔다. 대원군이 집정하자 그는 국정 전반에 걸쳐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외교 면에서는 청나라를 제하고는 척양(斥洋)·척왜(斥倭)를 주장하여 쇄국정책을 계속 유지하였다. 특히 천주교의 유입을 단호히 배격하여 2차에 걸친 양요(洋擾)가 일어나기도 했으며 이러한 양요 및 열강의 문호 쇄국에 대한 요구가 맞물리자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적극적인 쇄국정책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러한 대원군의 강한 자세로 구미 열강은 통상 기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일본에서는 정한론까지 대두하게 되었다. 당시 한반도를 위요한 국제 정세는 문호 개방의 필요성과 열강으로부터의 국권 수호라는 상호 모순되는 상황에 있었다. 이러한 모순은 1875년(고종 12년)의 운요호 사건으로 폭발되었으며, 그 결과 타의로 문호 개방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천주교의 이이제이 제안

 

▲ 흥선 대원군이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
흥선 대원군이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서원산 기슭에 세운 보덕사 전경. 아들인 고종이 왕위에 오른 것에 대한 보은(報恩)의 뜻을 담아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예산 김명국기자 daunso@

 

 

이하응이란 파락호(破落戶),궁도령(宮道令)의 둘째 자식이 왕위에 오르고, 아비는 대원위대감이 되는 좀체로 일어나기 어려운 일을 두고 민중들은 마치 자신들의 옹색한 신세가 훤히 펴지기라도 한 듯이 좋아했다.대리만족의 한 극치였다.

대원위대감은 세상의 그런 민심을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집권 초기부터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여 조선 민중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당색과 문벌을 초월한 인재 등용,탐관오리의 숙청,양반 토호의 면세토지 조사와 세금의 징수,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것,복식의 간소화 등 후기 조선 사회가 안고 있던 여러 폐단들을 혁명적으로 개혁해 나갔다.

집권 초반의 개혁 정치가 성과를 거두자 이를 발판으로 삼아 쇠미해진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정책을 폈다.경복궁 중건을 강행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경복궁 짓는 일로 대원위대감은 그동안 쌓아온 정치적 성과와 지지를 상실하게 되었고,사회 모든 부문에서 지탄받기에 이르렀지만 한 번 권력의 맛을 본 그는 난세의 정략가답게 저돌적으로 일을 밀어붙였다. 그의 저돌성에 희생된 대표적인 경우가 속리산 법주사에 모셔져 있던 청동 미륵장륙상을 헐어다 녹여서 건축자재로 사용하게 한 것이었다.

그의 정치 역정에는 대외적 위협과 난관도 만만치 않았다. 그것은 특히 천주교와 관련된 외세들과의 갈등이었다. 집권 초기 그는 천주교에 대해 나름의 이해를 보였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그랬던 그가 장기간에 걸쳐 천주교 박해를 감행한 것은 서양세력의 침략적 접근에 따른 국가적 위기의식과 정치적 반대세력의 비난에서 벗어나 정권을 계속 장악하기 위한 목적이 감춰져 있었다.

대외적인 첫 위협은 러시아였다. 두만강이 러시아와의 국경으로 바뀌게 되자 러시아의 통상요구는 대원위대감을 비롯,정부고관들에게 위기의식으로 다가왔다. 이때 천주교인이자 정부 관리인 김면호(金勉浩),홍봉주(洪鳳周) 등이 오랑캐를 이용하여 오랑캐를 물리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방어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했고 대원군은 이를 정치적으로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분위기는 승지를 지낸 남종삼(南鍾三)이 대원군으로 하여금 한불조약(韓佛條約)을 체결하여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이용,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는 정책을 펴도록 건의하기까지 이르렀다. 숨막히는 긴장의 나날이었다.

이같은 정책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조선에 체류중이던 베르뇌(Berneux) 주교와의 만남을 주선하게 되었고, 그때 대원군은 만약 러시아를 물리칠 수만 있다면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허락할 수도 있다는 암시를 주어 천주교인들은 자못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1866년 1월에 북경사신이 보내온 편지가 도착했다. 청나라는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분위기에 편승한 국내의 반 대원군 세력들은 대원군이 천주교와 불순한 정치적 흥정을 한다며 공세를 취했고 대원군은 정치적 생명에 위협을 느껴 천주교 탄압 정책으로 급선회하게 된 것이다.

1866년 2월 베르뇌를 비롯해 홍봉주,남종삼,김면호를 포함한 수천 명의 천주교인들이 서울과 그밖의 여러 지역에서 체포되어 순교했는데, 이때 베르뇌, 다블뤼 등 9명의 프랑스 신부들은 서울 새남터와 충남 보령의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병인박해로 불리는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그 이후 프랑스 군대와 대원위대감의 지휘를 받은 조선군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대원위대감은 국가적 위기의식을 고조시키면서 천주교인들을 외국의 적들을 불러들이는 무리로 규정하여 거듭되는 박해로 맞섰다. 서양오랑캐의 발자국으로 더럽혀진 땅은 그들과 내통하는 천주교 무리의 피로 씻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처형지는 주로 서울과 해안지방으로 정해졌다.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이 계속되자 프랑스는 대원위대감을 기필코 굴복시켜 그들이 겪은 수모를 되갚아주겠다며 방법을 모색했다. 그때 프랑스 신부 페롱(Feron)이 묘안을 내놓았다.그는 1866년 8월 프랑스 제독 로즈가 조선을 공격할 때 뱃길을 안내했던 인물이다. 또한 그는 조선의 사정에도 밝아서 대원위대감을 꺾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그는 독일의 무역상인인 오페르트(Oppert,E.J)라는 인물을 끌어들일 궁리를 했다. 오페르트는 1866년 3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친 조선과의 통상교섭에서 모두 실패한 뒤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런 사정을 간파한 페롱은 오페르트를 책임자로 하여 대원군과 정치적 교섭을 벌이면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묘책을 마련했다. 이 묘책을 강구하는 데는 조선인 천주교인도 가담했다. 묘책이란 다름 아닌 대원위대감의 아버지 남연군이 묻혀 있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사 옛터의 무덤을 파헤친다는 것이었다. 묘를 파헤쳐 시체와 부장품을 미끼로 내걸고 대원군과 통상문제,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흥정하자는 것이었다. 조선은 조상의 무덤에 대하여 특별한 관습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역이용하자는 극단적인 방법을 내세웠다.

오페르트는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는 자금을 담당할 인물로 미국인 젠킨스를 끌어들였다. 통상교섭이 성공하면 이익을 배당하겠다는 조건이었다. 도굴단이 결정되었다. 오페르트,젠킨스,페롱,선장 묄레,조선인 안내자 2명,유럽·필리핀·중국인 선원 등 모두 140명으로 이루어졌다.

1868년 5월 차이나(China)호,그레타(Greta)호 등 1000t급 기선 두 척을 이끌고 일본 나가사키에서 무기와 도굴용 장비를 구입한 다음,5월10일 충남 덕산군 구만포에 상륙했다. 도굴단은 자신들을 러시아인이라고 말하면서 조선인의 안내를 받아 남연군 묘소로 직행했다.덕산 군청을 습격하여 군기를 탈취하는가 하면 민가들을 습격하면서 고의적인 난동을 부렸다. 절골의 남연군묘까지 온 그들은 도굴을 시작했으나 묘광이 워낙 견고하여 그들이 준비해온 도구로는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대원위대감은 마치 이런 날이 오리라고 예측이나 했던 듯 성능이 매우 좋은 폭약을 사용하지 않는 한 묘를 파헤치기 어렵도록 만들어 둔 것이었다.

결국 남연군묘 도굴은 실패했다. 오페르트는 돌아가는 길에 인천 앞 영종도에서 프랑스 제독 알리망 명의로 된 협박장을 대원위대감에게 보냈다.남연군의 시체와 부장품이 그들 손아귀에 있으니 교섭에 응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협박문을 접수한 영종첨사는 도굴행위가 인간의 짓이 아니므로 대응할 가치가 없다며 협박문을 되돌려주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젠킨스는 같은 미국인에 의하여 파렴치범으로 고발당하였고, 페롱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소환당하였다.

대원위대감의 분노는 컸다. 조선은 조상숭배 사상이 유별하여 묘를 신성시하는 데다,국왕의 할아버지며 자신의 아버지 묘를 파헤쳤으니 그의 생각은 극단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대원위대감은 덕산군 내포지방 천주교인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했다. 내포지방은 천주교회 창설기부터 천주교가 전파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많은 희생자를 내었고,부근의 지방까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렇듯 대원군에 의하여 감행된,이른바 병인박해는 6년에 걸쳐 8000명 이상이 순교하는 불행을 낳았다.

한 정치가의 무모한 권력욕구가 불러온 결과는 조선의 세계사 합류를 지연시켜 근대화의 길을 막음으로써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는 비극을 초래했고,나쁜 지도자로서의 선례가 되었다. 그같은 대원위대감은 1871년 무슨 생각에선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서원산 남쪽 기슭에 자신이 불태웠던 가야사의 3층석탑을 옮기면서 보덕사(報德寺)라는 절을 지었다. 아들이 보위에 올랐으므로 보은(報恩)의 뜻으로 절을 지은 대원위대감의 생각은 오늘날 한국 정치지도자들처럼 혼란스럽다.

 

 

 

병인양요

 

병인양요(丙寅洋擾 )는 1866년(고종 3년)에 흥선대원군천주교 탄압(→병인박해)을 구실로 삼아 외교적 보호(diplomatic protection)를 명분으로 하여 프랑스가 일으킨 제국주의적인 전쟁이다.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 7척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프랑스 신부를 살해한 자에 대한 처벌과 통상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흥선대원군은 로즈 제독의 요구를 묵살한 뒤 훈련대장 밑에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해 무력으로 대항했다. 조선군이 완강히 저항하자 프랑스 해군은 40여 일 만에 물러났다. 프랑스가 병인양요를 일으킨 진짜 이유는 천주교 박해에 대해 보복한다는 구실로 침범하여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선쇄국정책은 한층 강화되었다.

 

당시 서양의 동양 침탈은 서교사를 먼저 보내고 박해를 구실로 군대가 침범하고 굴복당하면 그 나라는 자연적으로 식민지가 되었다. 서구 열강의 중국 침략이나 조선 침략도 모두 이러한 전략에 의해 천주교 선교사 보복 구실로 침공하여 협상을 벌이고 문호개방을 요구하며 식민지화를 노린 수법이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강력한 저항으로 조선이 조기에 식민지화를 방지하는 데 기여한 셈이 되었지만, 결국 청일전쟁, 로일전쟁에서 승리한 전승국 일제에 의해 결국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며 되면서 조선을 병탄하게 된다.

 

 

 

흥선대원군 

 

 

철종(재위: 1849년 ~ 1863년)조에는 안동 김씨가 세도정치를 행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의 조정은 천주교에 대해 관대하였다. 이 틈을 타서 베르뇌 주교, 리델 신부(1861년 입국) 등의 프랑스인 선교사가 많이 들어와 전교에 힘썼으므로 1861년(철종 12년)에는 천주교인의 수가 1만8천 명, 1865년(고종 2년)에는 2만3천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한편 1864년(고종 1년) 러시아인들이 함경도의 경흥부에 방문해 조선 정부에 통상을 요구하였다. 이런 갑작스러운 요구에 조선 정부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을 때, 당시 조선에 선교를 목적으로 방문 중이던 천주교 선교사들이 조선 정부가 프랑스, 영국과의 동맹을 체결한다면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의 힘을 빌려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할 수 있음을 주장했다. 하지만 러시아 측의 통상요구 시일이 지나면서 조선 정부는 안심하게 되었고, 선교사들이 제안했던 삼국 동맹도 무산된다. 또한 동맹 제안에 대해 무책임한 주선으로 간주하며 선교사들을 지탄하였다. 그러던 차에 흥선대원군의 처소인 운현궁에 천주교도들이 드나든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대왕대비 조씨와 정부 관료들이 천주교도들의 행동을 비난하자 대원군은 천주교 탄압을 단행한다.

 

1866년(고종 3년) 정월에 전국에 천주교 탄압령이 내려지면서 대대적인 피바람이 불게되었다. 남종삼·정의배(丁義培) 등 조선의 천주교도 8천여 명이 학살되었고, 당시 조선에 머무르고 있었던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된다. 살아남은 프랑스 선교사 3명 중 하나였던 리델 신부는 1866년 5월 8일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는 7월 6일 청의 주푸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리델이 도착했을 때 프랑스 극동함대(極東艦隊)사령관 로즈 제독은 톈진에 있었다. 리델은 톈진으로 직행하여 조선에서 발생한 프랑스 신부들의 처형소식을 전하고 생존해 있는 다른 신부 두 명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즉각 함대를 출항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로즈 제독은 인도차이나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주력함대가 돌아오는 대로 조선 원정을 단행할 것을 약속했다.

 

 

 

 

 

로즈 제독

 

 

조선에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에 대해 보고 받은 북경프랑스 대리공사(代理公使) 벨로네(Henri de Bellonet)는 청나라 총리아문대신(總理衙門大臣) 공친왕 혁흔(恭親王 奕訢)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내 항의하며 조선 정벌의 결의를 표명했다.  "우리는 소왕국 조선에서 저질러진 끔찍한 폭행사건을 전하게 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프랑스 황제폐하는 이 같은 잔인한 폭행을 묵인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 국왕이 우리 프랑스인을 체포한 바로 그날 그의 치세가 끝나게 될 것이다. 수일 내 우리 군대가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 진군할 것이다. 이제 우리 황제폐하만이 조선의 장래와 공석이 될 조선 왕위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청나라 측은 “조선은 비록 청의 속국이긴 하지만 예로부터 내정과 외교는 자치적으로 행해 왔다.”라는 내용을 담은 답신을 보내, 사건이 청나라와는 무관함과 향후 이에 대해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청나라 정부는 간섭할 수 없음을 프랑스 공사관 측에 통고했다. 한편 청나라를 통하여 프랑스의 침략 의사를 전해들은 대원군은 탄압을 더 심하게 하는 한편 변경의 방비를 더 굳게 하였다.

 

 

 

 

1865 일본 나가사키항 주변의 프랑스 함대의 모습

 

 

1866년 음력 9월 로즈 제독이 인솔하는 프랑스 군함 3척이 리델 신부와 조선인 신자 3명의 안내로 오늘날의 인천 앞바다에 다다랐다. 음력 9월 11일(양력 10월 18일) 순무영에서 프랑스 함대에 격문을 보내니 회답 격문이 왔다. 그에 따르면 선교사가 죄없이 죽었으므로 때문에 왔다고 주장하면서, 죽은 프랑스 천주교회 선교사 9명에 갈음하여 조선인 9천 명을 죽이겠다고 협박하였다.

 

1866년 음력 9월 18일(양력 10월 25일) 지금의 마곡철교 하단부를 통과하여 한성부(서울) 근교 양화진(楊花津)·서강(西江) 일대에 진출했다. 이로 인해 서울 도성은 공포와 혼란 속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급히 어영대장 이용희를 파견하여 한강 연안 경비를 강화하였다. 프랑스 함대에서는 3척의 소(小)함대로써 도성의 공격이 곤란함을 깨닫고, 그 부근의 지형만 정찰하고 음력 9월 25일청나라로 물러났다.

 

조선 정부는 더욱 군비를 갖추고 한강 일대의 경비를 엄하게 하였다. 그 해 음력 10월 11일 로즈 제독은 프리깃함 게리에르(Guerrière)를 포함한 7척의 군함과 일본요코하마에 주둔해 있던 해병대 300명을 포함한, 도합 1230여 명 가량의 해병대를 동원해 다시 강화도 부근의 물치도(勿淄島) 근처로 진출하였다.

 

음력 10월 14일에는 프랑스 함정 4척과 해병대의 일부가 강화도의 갑곶진(甲串鎭) 부근의 고지를 점령한 뒤 한강의 수로를 봉쇄했다. 이어 16일에는 프랑스군의 전군이 동원되어 강화성을 공략해 점령하고 여러 서적 등을 약탈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이경하(李景夏)·이기조(李基祖)·이용희·이원희(李元熙) 등의 장수들을 급히 양회진·통진(通津)·광성진(廣城津)·부평(富平)·제물포 등의 여러 요소와, 문수산성·정족산성 등지에 파견하여 도성 수비를 강화하면서 19일에는 프랑스 측에 공문을 보내 프랑스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로즈 제독은 조선 측의 선교사 처형 등의 천주교 탄압행위를 비난하면서 전권대신의 파견을 요구했다.

 

음력 10월 26일에는 120여 명의 프랑스군이 문수산성을 정찰하다가 매복 중이던 한성근(韓聖根) 등 조선군의 공격을 받고 27명의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다.

 

음력 11월 7일 프랑스군은 다시 교동부(喬桐府)의 경기수영(京畿水營)을 포격하고, 대령 올리비에의 지휘로, 앞서 강화부를 점령한 160여 명의 프랑스 해병이 정족산성의 공략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매복 중이던 천총(千摠) 양헌수(梁憲洙) 및 사격에 능한 500여 명의 조선군 포수들의 공격을 받아 6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을 입으면서 프랑스군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었다. 로즈 제독은 조선 침공의 무모함과 더 이상의 교전이 불리함을 깨닫고 철수를 결정했다. 음력 11월 11일 프랑스 군은 1개월 동안 점거한 강화성을 철거하면서, 장녕전(長寧殿) 등 모든 관아(官衙)에 불을 지르고 약탈한 금은괴와 대량의 서적, 무기, 보물 등을 가지고 갑곶진을 거쳐 청나라로 철군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군을 물리친 일로 자신감을 가진 대원군은 기존에 고수하고 있었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더욱 강화하게 된다. 병인양요는 두 달 만에 끝났지만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돼 있던 귀중도서와 은괴 19상자 등을 약탈당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동양에서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 제국의 위신은 여지없이 실추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대원군은 쇄국양이(鎖國攘夷) 정책을 더욱 고집하여 천주교 탄압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한편 유럽 열강은 조선의 국제적 위치와 조선-청나라 관계에 대하여 재검토하게 되었고, 그들이 탈취해 간 많은 서적과 자료는 후일 유럽 인사들의 한국과 동양 연구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연표

  • 1866년 - 병인양요 조선이 프랑스 선교사 9명을 살해한 것을 이유로, 청나라와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극동 함대가 인천과 강화도로 쳐들어와 조선인 9,000명을 보복 살해하려 한 사건. 실패하고 철군함.
  • 1871년 - 신미양요 일본 나가사키에서 온 미해군 상륙부대. 조선이 패배함. 그러나 개항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고 미군이 철군함.
  • 1875년 - 운요호 사건. 조선이 패배함. 일본의 개항 요구에 승복. 강화도 조약 체결.
  • 1876년 - 강화도 조약 체결. 근대 국제법적 토대 위에서 맺은 최초의 조약. 불평등 조약으로 인천, 부산, 원산의 자유무역지대를 설립함. 일본인에 대한 치외법권과 관세면제를 인정함. 인천은 일본군의 서울 공략의 근거지가 됨.
  • 1882년 - 임오군란. 강화도 조약으로 창설된 일본식 신식군대 별기군만 우대하는 것에 대한 구식군대의 반란. 개화파인 고종이 물러나고, 수구파인 흥선대원군이 집권.
  • 1894년 - 동학 농민 운동 발발. 열강과의 자유무역에 의해 일방적으로 수탈을 당하여 농촌사회가 붕괴된 것이 원인. 조선 정부가 청나라 군대를 요청, 아산만에 청나라 군대가 파병됨. 이에 대응하여 일본군이 인천 자유무역지대의 일본인 보호를 명목으로 파병함.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됨.
  • 1895년 4월 - 청일 전쟁. 일본군이 아산만의 청나라 군대를 급습함. 일본이 승리. 청나라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함.
  • 1895년 10월 8일 - 을미사변. 명성황후가 일본에 시해됨.
  • 1896년 2월 - 아관파천. 고종이 일본을 피해 러시아 대사관으로 도망침.
  • 1902년 - 영일 동맹. 영국이 일본의 조선의 지배를 인정함.
  • 1906년 - 가쓰라-태프트 밀약. 미국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함.
  • 1907년 - 헤이그 특사 사건. 고종이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폭로함.
  • 1907년 7월 20일 - 헤이그 특사 사건을 이유로 대한제국 고종이 강제로 양위.
  • 1910년 8월 22일 - 한일 병합 조약. 대한제국 순종이 양위. 조선 멸망.